|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나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나
100세 시대-자연스런 삶, 평온한 죽음을 위한
노인요양원 의사의 따뜻한 조언
이시토비 고조 지음 | 민경윤 · 노미영 옮김
1. 출판사 서평
먹지 않아서 죽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다하여 먹지 않는 것이다.
의사들도 자연사를 모른다.
노쇠하여 마침내 입으로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의료기술의 진보는 거꾸로 우리에게 냉엄한 사생관(死生觀)을 요구한다.
노인요양원 의사가 토로하는, 우리 모두가 생각해야 할 바로 그 문제
도대체 ‘자연스런 죽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 국민의 72%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찬성”하고 있고(2012년 1월 보건복지부 ‘생명나눔 인식도 조사’),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는 회생이 어려운 말기환자에 대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제도화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라”고 권고했다(2021년 11월). 한편에선 치매 노인의 자살이나 치매 배우자를 돌보던 노인의 ‘간병 살해’ 사건 소식이 자주 들려오고, 존엄한 죽음을 위한 ‘사전의료의향서’를 보급하는 단체가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수천 명이 신청했다는 뉴스도 함께 들려오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나. 의학이 발달함에 따라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지점에 대한 인간의 개입이 커질수록 우리는 이 질문에 의식적으로 대답해야 한다.
웰다잉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어느 칼럼니스트는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출구전략’, 다시 말해 어떻게 인간다운 모습으로 존엄을 지키며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삶의 출구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특히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찾아오는 고령기, 그 끄트머리의 죽음에서조차 우리는 ‘출구전략’을 생각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러 있다. ‘자연사’는 사라지고 ‘병사(病死)’만이 존재하는 의료현실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에 대한 자기결정 없이는 평온하고 존엄한 죽음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 그 현실의 문제를 생생하게 전하면서 평온한 죽음을 위한 돌봄의 실천 경험을 담아 우리에게 들려주는 노인요양원 의사가 있다.
생명의 흐름을 거슬러 싸우도록 강요받는 노인들
일본은 고령화에 따르는 갖가지 문제를 우리보다 10년 앞서 겪어 왔다. 그것은 일본이 우리보다 10년 앞서 준비를 해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온갖 시행착오를 포함해서다.
그런 일본의 베테랑 외과의사가 노인요양원의 상근의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목격한 말기 의료의 현실은 어수선하고 우울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생명을 구해야 하는 의사에서 인생의 마지막 길을 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로 역할이 달라지면서 그는 오직 수명을 늘리는 한길로만 치달려 온 현대의학의 모순된 현실과 마주친다.
우선, 연명지상주의의 관성적 적용으로 고령자의 경우에서조차도 ‘자연사’ 개념은 실종된 지 오래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즉 ‘노쇠’가 자연현상이 아닌 병으로 인식되면서 ‘자연사’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미 생명력이 고갈된 노인들도 코나 위로 연결된 관을 통해 영양을 공급받고 수액주사를 맞으며 ‘노쇠’에 맞서 싸우도록 독려된다. 생명체는 이미 사명을 다했음을 여러 신호로 알리지만 영양과 수분을 강제로 공급하고 노쇠한 몸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문제가 일어나면 다시 ‘치료’하는 악순환이 당사자와 가족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말기에 이른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영양량의 적정선은?
저자는 왜 우리가 자연사의 개념을 잃어버렸으며 그 끝은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삶의 마지막 단계에 다다른 노인이 입으로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떻게 그들을 도와야 하는지 묻는다.
현실에서 노인 자신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상태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고, 가족은 어려운 결정을 갑자기 강요당하면서 혼란에 빠진다. 저자 또한 노인들이 마지막 거처가 된 요양시설에서도 평온한 종언을 맞는 대신 병원의 침상에서 갖가지 의료기구를 매단 채 죽어야 하는 현실에 의문을 느끼면서 해법을 구하기 시작했다.
저자가 얻은 해법의 대전제는 “먹지 않아서 죽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이 다하여 먹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인위적으로 영양을 공급하는 위루술 등에 의지하는 대신 공급하는 열량과 수분을 종말기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어 평온한 떠남을 돕는 간병 혹은 케어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노인요양원에서 실제로 그 일을 해냈다. 이 책이 강한 설득력을 갖고 일본사회에 ‘수명의 질’과 노인의 ‘존엄한 죽음’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와 감동적인 성공 체험이 발휘한 힘이다. 특히 현장의 의사들과 간호사, 요양보호사들로부터 누군가 꼭 해주어야 할 얘기였다는 반응이 뜨거웠다고 한다.
한밤중에 홀로 질식사하는 ‘인공영양’ 노인들
책에는 튜브를 통해 영양을 공급받는 말기 노인 환자는 내용물이 역류하여 질식사한 것을 각 호실 라운딩 중 발견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소량이라도 마지막까지 입을 통해 섭식토록 돌본 노인은 대개 가족에게 둘러싸여 평온하게 마지막을 맞이했다는 통계가 제시되고 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나누고자 하는 메시지와 방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술이 진보하여 수명이 늘어날수록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삶의 질문이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생의 마지막 시기에 도달한 노인에게 적당한 열량은 얼마인가를 계산하기에 앞서 생명체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생명의 의미를 생각하는 책
우리 사회는 이미 고령화사회에 진입했고 고령사회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를 넘어서는 고령사회를 넘어 초고령사회(20%)에 이미 진입한 일본의 경우를 눈여겨 살피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치른 사회적 비용을 우리는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노인장기요양보험 등은 일본의 사례를 많이 참고한 제도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05년 인구 센서스를 기초자료로 연구한 바에 따르면 한국인의 '건강 수명'은 평균 ‘건강 수명’은 71.3세다. 그런데 기대수명은 현재 80세를 넘겨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평균적으로 10년 넘게 병치레를 하며 살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노인들이 다짐 삼아 외치는 ‘9988234’ 즉 99세까지 팔팔(88)하게 살다 2,3일만 아픈 뒤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소망은 그야말로 희망사항일 뿐, 현실은 이 책에서 만나는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수명의 질, 생명의 의미, 노인 의료와 복지 현실과 관련하여 이 책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 우리도 당사자와 가족 그리고 의료와 복지 관련 종사자들이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널리 읽혀 ‘평온하고 존엄한 죽음을 생각하는 책’이 ‘진정한 생명의 의미를 생각하는 책’이 되기를 바란다.
2. 차례
들어가며
1장 노인요양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처음 본 광경 / 로카홈 / 구급차 소리와 폐렴의 원인 / 입을 통해 먹는다는 것 / 지나친 수분과 영양 보급 / 현장의 사례들 입소기간의 절반을 병원에서 보낸 할아버지_ 이대로라면 굶어 죽는다?_ 하루에 400킬로칼로리 / 고민 끝에 선택한 위루술 / 미야케 섬의 전승처방 /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가족의 혼란 /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것 / 고령 치매환자의 가족들사흘에 100만 엔_ 가족의 상황_ 며느리의 간병 분투기 / 요양원에서 마지막을 맞은 사람들
2장 노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나
인간의 일생 / 노쇠와 의료행위 / 어디까지 의료를?/ 치매의 풍경 젊어서 시작되는 치매_ 사계절 꽃 사진 / 골절 / 죽음에 이르는 시간 / 죽는 장소 / 자연사를 모르는 의사들 / 위루술의 타당성에 대해 가장 고통이 덜한 것은 자연사_ 여기저기서 위루술이 행해진다_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_ 치매에도 위루술은 유용한가 / 폐수종과 연명 조치
3장 왜 노인요양원에서 죽을 수 없는가
노인요양원에서 죽을 수 없는 이유 노인요양원에 상근의가 없는 이유 / 평온한 죽음에 공헌을 / 존엄사와 사전의료지시
4장 우리는 어떤 일을 했나
폐렴을 방지하다 과도한 영양과 수분을 공급하지 않는다_ 되도록 경관영양은 피한다_ 95세, 치매, 하루 600킬로칼로리 로 2년_ 구강 케어를 추진하다 / 직원들의 의식을 바꾸다 예전 어느 날의 의무실_ 위축된 의식_ 과보호가 낳은 갈등 / 솔선하여 몰두하다 / 각 직군의 업무를 재정비하다 간호사에게 몰렸던 과중한 부담_ 요양보호사의 지난한 업무_ 열쇠를 쥔 상담원 / 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보기 / 102세의 대왕생
5장 로카홈은 어떻게 달라졌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간병’의 수확 폐렴이 줄었다_ 구급차를 부르는 횟수가 줄었다_ 요양원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사람이 늘었다 / 울면서 유해를 떠나보내다 / 요양원에 돌아와서 행복했어요
6장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외과의사로 일해 오면서 / 책임을 지는 방법 정당성의 증명_ 사태를 변하게 한다는 것 / 인생의 싸움/ 암 고지와 입무(入舞) / 많은 일이 있었던 인생 / 현대의 신학 논쟁 / 경관영양에 대한 비판 / 형태뿐인 인명존중론 / 평온한 마지막을
마치며 / 후기
3. 지은이 및 옮긴이
지은이 이시토비 고조
1935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게이오 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후 독일의 병원에서 혈관외과의로 약 2년간 근무했다. 도쿄도제생회중앙병원 부원장 등을 거쳐 2005년부터 도쿄도 세타가야구립 특별양호노인홈인 로카홈에서 상근의사로 일하고 있다. 40년 넘게 외과의로 일하면서 ‘환자가 꼽는 외과부문 좋은 의사’ 1위에 오르기도 했던 실력파다.
그런 저자가 야전의 전투현장과도 같은 수술실을 떠나 노인요양홈이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이 책이 태어났다. 저자는 무분별한 연명치료가 만연하면서 생명력이 다한 고령자조차도 평온한 죽음에 이를 수 없는 현실을 생생한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마지막 케어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먹지 않아서 죽는 게 아니라 생명력이 다하여 먹지 않는 것’이므로 종말기 고령자에게 과도한 영양과 수분을 공급하는 것은 당사자와 가족에게 고통만 더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저자는 고령화사회에서 늘어난 수명의 질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진지하게 묻고 있다. 그것은 또한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죽음의 방식에 반영될 수밖에 없음을 환기시켜 준다.
책 출간 이후 의료 및 복지시설 관계자들, 그리고 고령 부모를 돌보고 있는 가족들로부터 “이것이 바로 현실이며 우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는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는 저자는 활발한 강연활동 등을 통하여 고령자 종말기 의료와 평온한 죽음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가고 있다.
옮긴이 민경윤
한방내과 전문의. 경희의료원 한방병원 근무 시절 중풍 환자들을 돌보면서 죽음의 모습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환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으로서 존엄을 존중받고 남겨진 가족은 마음의 준비를 차분히 할 수 있는 ‘평온한 죽음’ 의 가능성을 고민하며 책을 옮겼다.
옮긴이 노미영
책을 만들고 내는 일을 하고 있으며 노년기 문제에 관심이 많다. 옮긴 책으로 《가끔 쓸쓸한 아버지께》, 《참 다사로운 어머니께》가 있다.
4. 책 속으로
의료기술이 발달하면서 죽음이 찾아오는 시간은 뒤로 늦춰졌다. 하지만 의료가 죽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 나이가 들수록 발병률이 높아지는 치매. 언젠가는 자신의 입으로 먹지 못하게 된다. 무리해서 먹으려 하면 오연(誤嚥, 음식물을 삼킬 때 잘못해서 기관으로 들어가는 것) 현상이 일어나서 폐렴에 걸린다. 병원에 입원해서 폐렴을 다스린다. 하지만 삼킴장애(연하장애)로 곤란을 겪기 쉬운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면 위에 직접 튜브를 연결하여 영양을 공급하는 위루(胃瘻) 조성 수술(PEG)을 권유받는다. 그런데 치매라면 당사자에게 물어도 좋다 싫다 대답을 들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가족은 혼란스럽다.
노쇠로 인한 종말기임에도 불구하고 연명치료를 받느라 일본인 중 80%가 병원에서 죽는다. 노인 환자가 병원에 입원하면 의사는 수액 주사를 지시한다. 어느 간호사가 흘린 말이 마음에 남아 있다. “저런 상황에선 수액 공급이 과도한 거야. 마치 익사시키고 있는 것 같다니까.”
나는 외과전문의로서 40년 넘게 수술을 해 왔다. 대개 생명이 걸린 치료였다. 환자들은 그때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었고, 사회 속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 환자들을 치료할 때 수술이 성공적이지 않다는 것은 곧 패배를 의미했다.
지금 내가 일하는 노인요양원의 입소자는 평균 연령 90세에 열에 아홉 분이 치매를 앓고 있다. 지금까지 여러 질병과 싸우면서 살아 온 분들이다. 병원과 달리 노인요양원에서 죽는 것은 패배가 아니다. 슬픈 일이지만 안식이기도 하다.(15~16쪽)
나는 거의 매일 아침 제일 먼저 이 분들을 회진한다. 가족 입장에서 보자면 하루라도 더 살아 계시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의식이 있어서 가족의 노력에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경우라면 서로에게 힘이 되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입소자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다. 자리에 누워서 거동을 못하는 상태인 데다 몸을 뒤치지도 못한다.
지금 이 분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어떤 느낌일까. 코에 줄이 끼워진 채 하루 세 번 ‘우주식’ 같은 액체를 공급받고, 정해진 시간마다 대소변 시중을 받는다. 이런 상태로 몇 년씩 살아가야 하는 분들도 많다. 이 분들에게 사는 즐거움이 있을까. 위에 직접 주입되는 우주식은 당사자에게 어떤 맛일까.
이 분들은 누워 있으므로 위의 내용물이 역류하여 만성적인 흡인성 폐렴을 일으킨다. 방광기능도 쇠약해져 때때로 요로 감염도 일어나는데, 그러면 고열이 난다. 이것은 치료일까. 무엇을 위한 영양 보급일까. 가족 입장에서 보아도 솔직히 말해 회의가 들지는 않을까. 일단 시작된 일이고 이제 와서 뒤로 물릴 수는 없지만 과연 이게 잘한 일일까 하는…….
나는 그곳에서 의료기술의 진보와 연명주의가 가져온 자승자박의 비극을 목격한 느낌이었다. (20~21쪽)
인간은 본래 입을 통해 먹은 것에서 에너지를 얻어 살아간다. 그런데 점점 나이를 먹어 몸이 약해지면 결국 어느 순간에는 먹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렇게 해서 옛날에는 자연스럽게, 조용하게 숨을 거뒀다.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에게도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군가가 혼자서 조용하게 죽어 있다면 큰일이다. “아파트에서 ‘노인 고독사’”라고 신문에 큼지막하게 보도된다. 복지국가에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 이것이 대사건이 되었을까. 지금은 입으로 먹을 수 없게 되어도 살아갈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고칼로리 수액이라고 하는 고농도의 포도당액과 그 밖의 영양제를 굵은 정맥으로 밀어 넣는다. 체력이 남아 있으면 이것만으로도 몇 년은 살아갈 수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위 내부에서는 내시경을 사용하고 바깥쪽에서는 수술기구를 사용하여 위의 안팎 양쪽에서의 조작을 통해 복부 벽에 관을 심은 후 그 관을 통해 우주식과 같은 유동식을 공급하는 위루술(PEG)이 늘어나고 있다. 이를 통해 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먹을 수 없다 = 죽음’이라는 전제가 무너졌다. 이것은 본디 질병을 치료할 때 적용하던 응급조치였다. 그런데 그것이 노쇠의 경우에도 다양한 사정과 견해에 따라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몸이 이미 영양분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경우에도 가족들은 생명 연장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나쁜 짓을 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이런 일련의 조치들이 정말로 당사자를 위한 일인지 아닌지 판단하지 못한 채 의사의 말에 따르게 되는 것이다.(30~31쪽)
내가 로카홈에서 3년 동안 돌본 33명 입소자의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눈에 띄는 것은 예측 못한 사망이 경관영양 케이스에 많았다는 것이다. 경관영양을 받지 않았던 분들은 마지막엔 경구 섭취가 불가능하게 되어 사망하므로 27명 중 22명 즉 8할에 해당하는 분들은 사망 시기를 예측할 수 있었고, 그래서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경관영양을 하고 있었던 경우는 6명 중 4명이 마지막을 예측할 수 없어 각 호실 라운딩 때 사망 사실을 발견했다. 잘못 삼켜 기관으로 들어가니까 입으로 먹는 것은 위험하다며 위루술을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구토하여 질식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45~46쪽)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직원들이 즉각 반발했다. 입으로 먹는 것은 위험하고 불가능하며, 따라서 위루술이 필요하다고 병원에서 판단했음에도 입을 통해 먹게 하는 것은 위험하며 무모한 일이라는 것이다.
로카홈 전체가 들썩였다. 나의 방법에 대한 비판이 터져 나왔다. 간호사와 요양보호사를 비롯한 모두가 할머니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했다. 자신이 오연(誤嚥)의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떠맡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할아버지의 뜻을 존중하여 방침을 바꾸지 않았고, 예정대로 할머니는 로카홈으로 돌아왔다.
그날 점심 무렵, 먼저 할아버지가 젤리식을 먹이기로 했다. 직원들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할아버지는 휠체어에 앉아서 반쯤 눈을 감고 있는 할머니의 뺨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여러 차례 쓰다듬었다. 이어 조금씩 힘을 주어 뺨을 가볍게 두드린 후 오른쪽 검지를 이가 없는 할머니의 입안에 넣어서 혀와 목구멍 주위를 원을 그리며 문질렀다. 그러자 할머니는 손가락을 빨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녹차젤리를 조금 숟가락에 떠서 입안에 넣어 주었다. 할머니는 입을 약간 오물거린 후 꿀컥 삼켰다. 또렷하게 목울대가 아래위로 움직이는 것을 본 직원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요양보호사, 간호사, 영양사, 작업요법사, 게다가 마침 그날 홈에 와 있던 의료센터의 연수의, 그리고 나, 모두가 새로운 전개를 예감하며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은 할아버지가 거의 매끼 식사 케어를 위해 홈에 오셨다. 그리고 점차 간호사와 요양보호사가 그 일을 맡게 되었고 할아버지는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후로는 젤리식을 하루 두 팩 전후(한 팩당 300킬로칼로리) 그리고 녹차젤리와 가끔 아이스크림 등을 곁들이는 ‘식사’만으로 지탱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40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는 32킬로그램으로 줄었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건강했다.
그렇게 1년 반이 흐른 후 다시 흡인성 폐렴을 일으켜 입원했다. 또다시 위루술을 권유받았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거절하고 할머니는 그대로 로카홈으로 돌아오셨다. 한층 더 주의를 기울여 조금씩 먹여 드렸다. 그리고 열흘 후, 가까스로 녹차젤리를 넘길 수 있는 상태가 되었지만 그것도 곧 소용이 없어지면서 사흘 후 해 돋을 무렵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향년 92세.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한 끝이라 할아버지의 얼굴은 평온했다.(54~56쪽)
H씨의 피부는 반들반들 윤기가 흘렀다. 이 순간부터 먼 곳으로 가 버릴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 인생을 살아 왔을까, 왜 H씨는 이곳에 누워 있는 것일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때 쥐고 있던 손에서 H씨의 맥이 조용한 밤의 파도에 쓸려 가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주임! 주임!” 하고 소리쳤다. 주임이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은 너무도 길었다. 그동안 나는 H씨의 손을 줄곧 쥐고 있었다. 주임은 혼자 돌아와서 내게 무어라고 말했지만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임의 손목시계는 23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로부터 조금 후 간호사, 그리고 바로 뒤를 이어 이시토비 선생님이 들어왔다. 간호사와 주임은 취해야 할 조처를 차례차례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전신주처럼 붙박혀 서서 지시받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H씨의 얼굴은 무척 평온했다.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중략) 내가 이곳에 와서 만나는 죽음은 모두 평온한 것처럼 보인다. 병원에서 튜브를 매달고 약에 절여진 채 죽는 일 없이 어디까지나 주어진 수명에 따르는 것처럼 서서히 남은 생명을 소진하는 노인들의 마지막은 그다지 비통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노인요양원이 가지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H씨가 돌아가셨을 때 이상하게도 나는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상상으로는, 죽음은 무서운 것이며 삶에서 멀리 떨어진 정반대편의 것이어야 했다. 그러기는커녕 커다란 안도감과 조그만 기쁨이 폴폴 끓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H씨, 수고하셨어요, 다행이에요, 고맙습니다, 하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H씨의 죽음은 내게 봉인되어 있었던 죽음의 문을 살그머니 열고 죽음의 평안을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가르는 이원론이 아니라 삶과 죽음은 같은 장소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드러내 준 것이다. (74~76쪽)
가능한 한 자연의 흐름에 맞춰 대응하는 편이 당사자로 하여금 편안하게 마지막을 보낼 수 있도록 한다. 이 사실을 증명한 구미의 문헌은 적지 않다.
실제로 로카홈에서 입소자가 먹지 못하게 된 이후 마지막 며칠간의 모습을 지켜보아도 목의 갈증이나 공복을 호소하는 분은 없었다. 몸속에 들어가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소변이 나온다. 마치 자신의 몸속을 정리정돈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는 것처럼 몸이 죽음에 친숙해져 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같은 상태에서는 몸에서 자연스럽게 마약성 물질인 엔도르핀이 분출된다고 한다. 그래서 고통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잘 알 것 같다. 일껏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갈 수 있는 것을 수액 주사나 영양 공급, 산소 흡입으로 무리한 분발을 요구한다. 얼굴과 손발은 퉁퉁 부어 있다. 우리는 의료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자연의 섭리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양시설에서 노인을 돌보는 사람들에게, 또 가족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심리적 부담을 동반한다. 입으로 먹을 수 없게 된 사람에게 위루술이라는 방법이 있는데도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은 굶겨 죽이는 것이며 못 본 체 눈을 감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영양과 수분 공급은 인간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처치이며,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은 비인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자연사다. 숨을 거두어들이겠다는 결단은 이미 자연계가 내린 것이다. 적어도 신은 책망하지 않을 것이다. 의사나 가족은 ‘내가 마지막을 선언했다’라는 결과가 되는 것은 피하고 싶다고 생각하겠지만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108~109쪽)
건강하기 위해 충분한 영양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그것은 활동하고 있는 사람의 경우다. 마지막이 임박했을 때는 사정이 다르다. 몸은 이미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무리하게 공급하여 오연에 의한 폐렴을 초래하는 것은 고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미야케 섬에 내려오는 지혜의 가르침에 따르면 기아(飢餓) 도 아니며 방기도 아니며 평온한 간병이 된다. 자연에 따르는 훌륭한 지혜다.
최근 로카홈에서는 간병이 예상되는 단계에 접어들면 요양보호사와 간호사, 상담원이 입소자 가족과 면담을 거듭하여 평온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도록 아주 세세한 사항까지 협의를 하고 있다. 그 협의를 함에 있어서 입소자 가족과 케어 담당자 모두 ‘먹을 수 없는 상태’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기실, 옛날에는 이런 일이 의문의 여지가 없는 상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는 의료기술의 발달 등에 따라 죽음에 대한 수용태도가 변화해 왔다. 그것이 지금 다시 재검토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은 의료에 속한 것이 아니고 특수한 것도 아니며 자연의 것이어야 한다. 핵가족화한 현대에 걸맞은 ‘미야케 섬’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지향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한 조력자다.(177~1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