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생동안 여러 단계의 의례들을 거치게 되며, 이를 총칭하여 일상의례라고 한다. 개인이 의례의 주체가 되지만, 가족의 연대의식을 고취하고, 혈연과 촌락의 친목과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의 제공자가 된다. 개인은 가족, 친족, 촌락의 구성원으로서 그의 사건은 사회집단 전체의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한 사회집단의 성원은 그 사회가 규정한 일정한 시기에 모두 동일한 형태의 의례를 치르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일생의례는 인간의 일생을 어느 시점에서 구획 짓는 일종의 문화적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다 확대하여 해석하면 출생, 성년, 혼례, 상례, 제례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거치는 의례들 모두를 일생의례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은 일상의례는 모든 사회에 존재하지만 사회구조나 문화적 편차에 따라 강조하는 의례가 각각 다를 뿐만 아니라 절차 또한 다르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도 역사에 따라 각기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규범과 절차가 진행되어 왔다. 현재까지 우리 생활에 반영되고 있는 일생의례들 대부분은 조선시대의 잔영이라고 해도 과언이다. 조선사회는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충실히 따른 유교사회였기 때문에 관혼상제를 중심으로 하는 모든 일생의례는 자손이 대대로 번성하고, 조상을 받드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이들 중에서 공공의 기관이나 장소에서 행사를 치르는 경향이 있는 관례를 제외한 다른 부분 모두는 일반에서도 가정의례로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상례와 제례가 과거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에 산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혼례는 전통과 외래의 절충 내지는 새로운 유형을 선호하는 세태를 보이면서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모습이 오늘의 현실이지만, 그 속에는 우리 전통이 외래와 절충하면서도 여전히 그 원형을 고수하고 있다.
1. 관례
관례는 소년, 소녀가 성장하여 어른으로 진입하는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통과의례이다. 성년식을 치름으로서 불완전한 단계로부터 완전한 단계로 승격하며, 가족의 일원에서 사회의 일원으로 자격을 획득하고, 남녀의 성(性)이 분명해진다. 우리 고유의 성년식에 관한 기록은 매우 단편적이며. 그 형태 역시 정확히 살피 수가 없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유학이 전래된 이후부터 중국적인 성년의례인 관례(冠禮)와 혼례(婚禮)가 보편화되면서 그 자취가 민멸되었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특히 『오례의(五禮儀)』의 「가례편(嘉禮篇)」에 의하면, 왕세자 관의(冠儀)와 함께 문무관 관의를 제정하고 있음은 물론 관례를 치르지 않은 자제에게는 입학, 혼인, 벼슬을 허락하지 말라고 규정할 정도로 관례를 중시하였다. 『주자가례』에 의하면 “남자는 15세에서 20세 사이에 관례를 올릴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관례의 나이를 고정시키지 않고 15~20세로 규정한 것은 관례를 올릴 당사자의 신체적 환경에 따라 결정짓도록 한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조혼풍속이 생기면서 10세를 전후하여 관례를 치르는 폐단이 생겨났다. 혼례를 빨리 치르려고 관례를 한몫에 치르다 보니 관례와 혼례를 동일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관례와 계례를 치를 때 댕기머리를 걷어서 얹게 되므로 ‘머리를 얹는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혼례를 지칭하는 말로도 병행되었다.
1) 관례(冠禮)
『사례편람(四禮便覽)』에 보면, 관례와 계례를 치를 수 있는 조건으로 대공(大功) 이상의 상복을 입지 않은 15세에서 20세 사이 남녀라고 규정하고 있다. 관례는 관자의 상투를 틀고 망건, 치포관, 복건을 씌운 다음 어른의 출입복으로 갈아입는 초가례, 갓을 씌워 주고 출입복으로 갈아입는 재가례, 복두 또는 유건을 씌워 준 다음 예복으로 갈아입는 삼가례, 주례자가 관자에게 술을 마시는 예법과 함께 자(字)를 지어 주는 순서로 진행된다. 이처럼 관례는 그 절차가 매우 번잡할 뿐만 아니라 소용되는 의관의 비용 또한 매우 컸다. 그래서 조선 말기에 오면 관례를 생략하거나 관례를 치를 경우라도 삼가례를 모두 밟지 않고 한꺼번에 망건, 복건, 초립을 쓰며 옷도 관복이나 도포, 두루마기 등 있는 대로 편의에 따라 착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약식관례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점차 자취를 감추었고, 오늘날은 복고풍으로 상징적, 시범적으로 ‘성년의 날’을 택하여 관례를 행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이유들이 작용한 것으로 파악된다. 첫째, 관혼상제의 의례 중에서 그 성격이 뚜렷하지 않다. 둘째, 조혼풍속으로 인하여 관례는 혼인의 전제가 되는 부수적인 의식으로 전락되었다. 셋째,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상투를 틀고 관을 쓸 일이 없어졌다. 끝으로 관례는 주로 양반층에서 행해진 의례로써 서민층에까지 보편화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관례는 사회, 윤리 상으로 상례나 혼례처럼 절대적인 의미를 띠고 국민의 의식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체 하나의 의례로써 그 상징성만 정형화된 것으로 이해된다.
2) 계례(禮)
여자의 계례는 남자의 관례보다 그 절차가 매우 간소하다. 먼저 계자가 주례에게 4번 큰절을 올린 다음 주례가 가계축사(加祝辭, 비녀를 꽂고 어른스러워지기를 당부하는 축사를 하고 머리에 비녀를 꽂아준다. 그러면 계자는 방으로 들어가 성인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오면, 주례는 계자[字, 당호(堂號)를 지어 주는 것]를 지어주고 관례의 초례의식과 같이 다례의식을 행한다. 이처럼 계례는 성년식 절차인 관계로 대부분 혼례를 치른 다음 시어머니가 행함이 일반적이다. 즉 신행이후 시어머니가 현구례(見舅禮)를 올린 신부를 대청에 앉히고 계례를 시킨다. 시어머니가 빗치개로 머리를 갈라놓으면 수모는 이성(二姓)의 교합을 의미하는 뜻에서 머리를 두 줄로 땋아 쪽을 진다. 이어서 연두 곁마기 다홍 겹치마 열두 폭 대무지기, 여덟 폭 풍무지기, 여섯 폭 연봉무지기, 모시 분홍 속적삼, 노랑 속저고리, 저고리 삼적과 당의 원삼 등의 옷을 신부에게 내주면서 입히고, 대삼작과 소삼작 등의 노리개를 차고 낭자족두리를 한다. 그리고 시어른께는 원삼을 입고, 동행에는 당의를 입고 절을 올리도록 시킨다. 이는 여자의 경우 혼례를 치러야만 성인이 된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2. 혼례
혼례는 사회공동체의 기본단위인 가족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일생의례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대례(大禮)’ 혹은 ‘인륜의 대사(人倫之大事)’라고 하였다. 혼례는 자손을 낳아 조상의 제사를 끊어지지 않게 하고, 사회의 올바른 풍속을 교화하려는 목적성을 지녔다. 남녀관계가 문란하면 부부의 도가 무너지고, 인륜의 도가 바로 설 수 없으며, 사회질서가 무너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혼례는 건전한 가정을 유지하려는 서약식이기도 하다.
우리의 고대 혼례풍속에는 부여의 형사취수(兄死妻嫂), 고구려의 서옥제(屋制), 옥저의 민며느리제, 동예의 동성불혼(同姓不婚) 등이 있었다. 이러한 우리의 고대 혼인풍속은 『예기』에 기록된 유교적 혼례의식인 납채(納采), 문명(問名), 납길(納吉), 납징(納徵), 청기(請期), 친영(親迎)의 육례(六禮)와 이를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의 사례(四禮)로 정리한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일반화되면서 점차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육례와 사례 역시 우리의 전통과는 적지 않은 괴리현상을 나타냈다. 그리하여 조선 숙종 때에 『주자가례』를 우리의 현실에 맞도록 개편한 이재(李縡)의 『사례편람(四禮便覽)』이 간행, 보급되면서 육례와 사례는 마치 우리의 전통혼례인양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1) 육례(六禮)와 사례(四禮)
조선시대의 혼례절차는 육례와 사례가 그 주류를 이루었지만, 일반 서민까지 모두 이를 엄격하게 갖춘 것은 결코 아니며, 형편에 따라 달리 의식을 거행하였다. 혼례를 육례라고 말하는 것도 그 상징성을 일컫는 의미일 뿐이지 반드시 육례에 따라 혼례를 치렀음을 지적한 것은 결코 아니다. 『사례편람』에 기록된 사례도 육례를 바탕으로 개편되었기 때문에 육례와 중복되는 절차가 있다. 이러한 육례와 사례의 규정은 시대와 지방 그리고 가문의 형편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① 납채(納采) : 육례의 첫 단계로 남자의 집에서 중매를 넣어 기러기로서 청혼하는 절차이다. 청혼할 때 남자의 집의 혼주(婚主)는 서식을 갖추고, 사주(四柱, 태어난 년, 월, 일, 시)를 써서 신부 측에 보낸다. 사례에서의 첫 단계는 중매자가 신랑과 신부의 양가를 오가며 혼인의 의사를 타진하는 의혼(議婚)이며, 서로의 합의가 이루어지면 바로 청혼서신을 보낸다. 그리고 신부의 부모가 혼인을 승낙할 뜻이 있으면 허혼서신을 신랑의 집에 보낸다.
② 문명(問名) : 여자의 집에서 혼인을 승낙하면 남자의 집에서 신부가 될 여자의 생년월일과 이름을 묻는 절차이다. 이것을 묻는 까닭은 혼인할 당사자의 궁합을 맞추어 보아서 장래 부부의 길흉을 점쳐 보기 위함이다.
③ 납길(納吉), 연길(涓吉) : 신랑의 사주를 받은 신부의 집에서 신부의 생리일(生理日)을 고려하여 혼인할 날을 잡아서 신랑의 집에 알리는 절차이다. 혼인할 길일(吉日)을 점쳐서 보낸다고 하여 연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때 택일한 날짜를 백지에 써서 보내면서 신랑에게 입힐 의복의 크기를 묻는 내용도 함께 적어 보낸다. 사례에서도 이 과정은 같으며 명칭만 연길이라 부른다.
④ 납폐(納幣) : 신랑이 신부에게 혼인의 증표로 주는 혼수라 부르는 붉은 비단과 푸른 비단을 함에 담아서 보내는 절차로써 납징(納徵)이라고도 한다.
⑤ 청기(請期) : 신랑의 집에서 신부의 집에 결혼 날짜를 묻는 절차로써 혼인 수속이 끝났음을 나타낸다. 즉 신부의 집에서 납길하여 알려온 혼인 날짜를 신랑의 집에서 확인하고 동시에 신랑의 집에서 신부가 시댁으로 오는 우귀(于歸)의 날짜를 정하여 알려주는 절차이다.
⑥ 친영(親迎) :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혼례를 올리고 신부를 자기의 집으로 데리고 오는 절차이다. 친영은 신랑과 신부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므로 혼례의 절차 중에서 가장 중요히 여겼다. 친영할 때 신랑은 사모(紗帽), 관대(冠帶)에 관복(官服)을 입고, 흑화(黑靴)를 신는 등 예장(禮裝)을 갖춘다. 친영의 행렬은 신랑 앞에 등롱과 안부를 세우고, 뒤에는 상객(上客)이 따른다.
2) 전안례(奠雁禮), 교배례(交拜禮), 합근례(合禮)
육례 또는 사례 모두를 실행하는 것을 광의적 의미의 혼례라고 한다면 친영과 그 이후에 행해지는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 등은 협의적 의미의 혼례라고 하겠다.
① 전안례 : 신랑을 맞아 대례(大禮)를 치루는 첫 절차인 소례(小禮)로서 신랑을 신부의 집에서 맞아들이는 의식이다. 정해진 혼례의 시간에 신랑은 전안청(奠雁廳)으로 나아가 홀기(笏記, 혼례의 진행순서)에 따라 신부 측에 기러기를 전한다. 기러기는 원래 살아 있는 것을 바쳤으나, 뒤에는 목안(木雁)을 붉은 보자기에 싸가지고 갔다. 전안례를 올리는 까닭은 천상계(天上界)에서 인간의 수복을 관장하는 자미성군(紫微星君)에게 기러기로 폐백을 드린 풍속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② 교배례(交拜禮) : 신랑과 신부가 초례상을 사이에 두고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 예를 올리는 절차이다. 교배상에는 양쪽에 촛불을 밝히고 신랑의 편에서 오른쪽으로 꽃병, 수탉, 흰쌀, 대추를 진설하고, 왼쪽으로 생밤, 흰쌀, 암탉, 꽃병을 진설한다. 이와 함께 삼색의 과일과 포, 혜, 콩, 팥 등을 담아 올려놓기도 한다. 꽃병에는 대나무와 소나무를 꽂고 청실홍실을 걸치는 데, 그 이유는 중국에서 전래된 부부의 인연을 맺어주는 월하노인(月下老人)의 설화를 믿기 때문이다. 교배례 역시 지방과 가문 그리고 홀기(笏記, 혼례의 진행순서)를 부르는 홀애비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③ 합근례(合禮) : 교배례가 끝나면 이어서 신랑과 신부가 서로 술잔을 교환하여 하나가 되는 의식으로 일명 근배례(杯禮)라고도 한다. 대례인 합근례 역시 지방과 가문 그리고 홀기(笏記, 혼례의 진행순서)를 부르는 홀애비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로서 대례는 교배례와 합근례를 합친 초례(醮禮)가 모두 끝나게 되며, 이어서 신방절차인 초야(初夜)와 합계례(合繫禮)로 이어진다. 합계례는 신랑과 신부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조금씩 잘라서 함께 묶는 의식으로 백년해로하기를 약속하는 부부의 신물(信物)이기도 하다.
4) 우귀(于歸)와 현구례(見舅禮)
① 우귀 : 혼례를 마친 신부가 신랑 집으로 들어가는 의식으로서 신행(新行)이라고도 한다. 이때는 신부 집에서 각종 음식을 마련하여 편지와 함께 보내는 것이 예로 되어 있는데, 예물을 상수(床需)라고 하며, 편지는 상수서(床需書)라고 한다. 신행에는 상객으로 신부의 아버지나 가까운 친척 한 사람과 시중드는 수모(일명 하님)가 따른다. 신부 가마가 대문을 들어서면 신랑이 가마의 문을 열어 신부를 맞는다. 그리고 대청이나 사당으로 안내된 신부는 신랑과 함께 조상에게 잔을 올리고 절을 하여 새 가족으로서의 영입을 고한다.
② 현구례 : 신부가 신랑의 부모와 친척들에게 첫 예를 올리는 의식으로 우귀일에 행하는데 일명 폐백(幣帛)이라고도 한다. 신부가 폐백을 올릴 때 시아버지는 동쪽, 시어머니는 서쪽에 앉는다. 수모(手母)의 도움을 받은 신부는 시부모에게 큰절을 네 번하고 술을 권한다. 폐백에는 대추와 꿩을 쓰는데, 대추는 시아버지께, 꿩은 시어머니께 드린다. 신랑의 조부모가 살아 있어도 시부모부터, 그 다음 촌수와 항렬에 따라 폐백을 드리며, 신랑의 직계존속(直系尊屬)에게는 큰절을 네 번, 그 밖의 사람에게는 큰절을 한 번만 하고 술을 권한다. 폐백이 끝나면 시어머니는 신부를 대청에 앉히고 갖은 예물을 준비하고 관례를 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