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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사진편지 제1639호 (12/5/26/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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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구간 걷기 길의 역사적 조명(2)
글 : 윤 종 영(한사모 고문, yooncy1936@hanmail.net)
다음날(4월11일)
걱정했던 새벽하늘이 괜찮다. 시원한 바다 바람을 쏘이면서 어제 저녁 먹은 “등대회집”을찾아 시원한 “생조개미역국”으로 속을 달래였다. 우리일행은 이곳에서 8시 이전에 버스에 승차, 보령시를 통과 홍성군과 서산시를 거쳐 태안군으로 이동, 태안군 최남단 영목항으로 2시간여 달렸다. 나는 승용차 차창을 통해 밖을 보며 전날 안내지도에서 보았던 고려청자매장구역(高麗靑瓷埋藏區域:사적제321호)을 찾아보았다.
이곳은 고려, 조선조 때 선박의 내왕이 가장 잦았던 조운로(漕運路:稅穀을 나르던 뱃길)로 고려시대 이 길을 통해 강진이나 부안에서 제조한 청자를 개경으로 운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곳의 뱃길이 험난하여 배가 난파, 침몰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이곳에 배와 함께 매몰되었던 청자가 최근에 몇 차례 발견되어 이곳을 사적(史蹟)으로 지정하여 이를 보호하게 되었다. (1983년에 어망에 청자가 발견되어 다음해 해군잠수부를 동원 대대적인 수색, 많은 고려상감청자를 발견하였다)
이 부근은 수로가 험난하여 조운선도 침몰하는 경우가 많아 풍랑이 심한 6.7.8월은 항해를 피하도록 하기도 하였고 태안군 최남단 부근 샛별해변부근에는 파선된 조운선에서 쌀이 바다에 쓸려 썩은 쌀이 많다고 지명이름이 “쌀썩은여”라고 이름지여진 곳이 있기도하다. 그래서 이곳을 피하기 위해 태안반도에 연결되어 있던 안면도를 인공적으로 섬으로 만들어 태안반도와 안면도사이에 수로를 이용, 천수만을 통해 조운선을 운반하게 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기록에도 없고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나는 홍성군을 지나며 잊지 못할 두 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홍성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국권회복을 위해 몸 바쳤던 백야 김좌진(白冶 金佐鎭:1889-1930)장군과 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1879-1944)선생이시다.
두 분은 동향(同鄕)에 동시대 인물로 우리의 국권회복에 커다란 위업을 남기셨지만 활동 영역이나 방법 등이 대조적이었던 분이었다. 백야는 해외에 망명, 무력항쟁을 통한 국권회복을 추구해 독립군을 양성, 1920년, 만주 청산리(靑山里)에서 일본군 2개사단에 섬멸적인 타격을 준 유명한 “청산리 전투 신화”를 만들어 일제의 식민지 질곡(桎梏)하에 허덕이던 우리민족에게 용기와 희망의 등불이 되었고. 만해는 일제치하 국내에 머무르며 불교에 귀의, 불교 개혁운동(불교의 대중화)을 주도하며,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고 일제 저항문학에 앞장서 유명한 “님의 침묵” 등을 출간, 일제치하에 서 허덕이던 우리민족의 정신적 지주로 향도자로 희망의 등불이 되었다.
나는 두 분과 얽힌 이런저런 일화를 생각해 보았다, 백야는 안동김씨 명문거족 출신으로 15세 때 집안 살림을 맡게 되자 수십명의 노비들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해방시켜주었을 뿐 아니라 수천석의 추수를 하던 논밭을 소작인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는 정말 범인이 할 수 없는 쾌거(快擧)를 한일 등, 그런데 이런 백야가 일제가 아닌 동족의 손(공산당원 金一星)에 의해 유명을 달리한 가슴 아픈 일 등. 만해는 그와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최남선이 지조를 꺽고 일제에 협력하자 새벽에 그의 집을 찾아 대문 앞에 엎드려 형제가 상을 당했다고 곡(哭)을 하며 친구의 훼절(毁節)을 질타(叱咤)하였던 일. 또 우리 주말걷기에서 만해의 옛집인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을 찾아 집향을 두고 나누었던 이야기 등 등을 떠올리며 두 분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보았다.
더욱이 오늘은 국정을 맡을 국회의원을 선거하는 날, 이번 국회의원후보군 가운데 자기나 정파보다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두 분 같은 인물이 있어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해보지만. 별로 밝지가 않다.
백야의 생가와 기념관 (홍성군 길산면 행산리)은 옛날에 한번 찾은적이 있지만 만해의 생가(홍성군 결성면 성곡리)는 아직 찾을 기회가 없어 그냥 지나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다음기회로 미를 수 밖에...
우리일행은 9시가 좀 지나 안면도의 최남단 영목항에 도착, 여객선 선착장에 모여 사진을 찍고 다시 버스를 이용, 고남패총박물관 앞으로 이동, 이를 출발점으로 오전 걷기를 시작하였다. 오전 걷기는 11Km, 그리 만만한 거리는 아니지만 반별로 대오를 이루 워 원기왕성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고남패총박물관(古南貝塚博物館),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일정에 없어 잠깐 들러 안내 팜푸렛을 얻어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고 일행의 뒤를 따랐다. 안내서를 보니 이곳 고남면 고남리 부근의 선사시대(신석기, 청동기)유적지를 1988년 한양대학교 박물관팀이 발굴, 그때 발굴된 유물을 중심으로 박물관을 개관했다고(2002). 정말 상찬할 일이지만 조개더미(조개묻이)가 아닌 패총이라는 역사용어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 좀 아쉬웠다.
우리 일행은 77번 국도를 따라 열심히 걸었다. 안면도 중심부지만 바다가가 되어서 인지 기온이 선선하여 걷기에 최적이었다. 그래서 주변 길가 가로수나 꽃나무들이 꽃은 커녕 꽃망울도 간혹 눈에 띄일 정도, 어쩌다 개나리꽃이 보이면 어떻게 반가운지. 한참 걷다보니 오전걷기에 종점, 이곳에서 버스에 승차, 점심식당인 “낙원가든”에 도착하여 안면도에서 첫식사를 맛있는 갈비탕으로 입맛을 즐겼다.
오후 걷기는 13Km, 안면대로인 77번 국도에서 해안선으로 내려오는 병술만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 길은 우리가 오전에 걸었던 길도 한가했지만 거의 차한대 볼 수 없는 길이었다. 차도와 인도에 가로수 까지 잘 심어져 있었지만 인적이 없는 길이었다. 앞으로 이 부근에 이 길을 필요로 하는 큰 시설물이 등장할 계획이 있는지 모르지만. 어떻든 이 길을 계획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우리는 병술만로를 따라 해변길로 나와 시원한 해풍을 맞으며 열심히 걸었다. 그런데 우리 걷기이후 우리 걷기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전국에 걷기 코스가 여기저기 만들어져 아름다운 이름과 함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전에 걸었던 길로 얼핏 생각나는 것이 “마실길” “열린 바다 길” 등. 오늘 우리가 걷는 이 해안길도 “샛별 바람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새로 만들어진 길이라고. 이 다음으로 이어진 해안길은 “노을 길”이라고, 이 길은 220개 나무 계단으로 산위에 전망대로 이어져 이를 거쳐 계속 호젓한 바닷가 산속길로 이어진 다른곳에서 보기 어려운 길이다. 나는 이길을 걸으며 오랜만에 세속의 잡념에서 해방되는 평안함을 느껴 보았다.
우리일행은 예정된 시간에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전원 오늘의 종착지인 “밧개해수욕장”에 꼴인, 버스로 오늘의 숙소인 드르니항 부근의 “드르니오션리죠트”로 이동, 반별로 방배정을 받고 여장을 풀었다. 저녁식사는 “신영수산회센타”에서 회정식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여흥시간에 나에게 노래를 하라고 그런데 나의 애창곡인 “울고 싶어라”가 이날은 어떻게 내 기분에 맞는지(국회의원 투표 출구조사를 본 기분).
다음날(4월12일)
새벽에 눈을 뜨니 TV 화면이 보인다. 국회의원 투표결과를 방송하고 있다. 얼핏 보니 어제 저녁 출구조사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다. 나는 급히 일어나 몸을 추스르고 어스름한 문밖으로 나왔다. 몇 몇 회원들이 눈에 뜨인다. 서로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더욱이 걷기가 내일 하루 남았다니 정말 홀가분하다. 모두가 나와 같은 기분인 것 같다. 날씨도 맑아 우리 기분을 북돋아 주는 것 같다. 오늘아침식사는 “신영수산센타”에서 이곳 특산인 “바지락 해장국”으로 속을 풀었다.
우리일행은 버스를 이용, 어제 걷기종착지인 “밧개해변”으로 이동, 이곳을 출발점으로 북상을 시작했다. 오늘 오전에 걷는 거리는 12Km, 오늘은 반별로 대오를 짓되 남녀로 짝을 지워 걷는다고, 어떻든 지휘부의 새로운 발상이 팀 전체에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우리일행은 어제와 달리 오늘은 해변 “노을길”을 노을 햇살이 아닌 아침 햇살을 받으며 열심히 걸었다. 나는 일행을 따라 걸으며 천수만 넘어 서산시에 있는 해미읍성(海美邑城)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해미읍성은 충청도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대표적인 조선조 읍성에 표본이 되는 곳이고 천주교의 성지이기도 한 곳이다.
나는 우리 회원 중에 천주교신자들이 많아 혹 해미읍성을 들르지 않을가 하는 기대를 해보았는데 일정표에 태안반도 서쪽 해안 길을 걷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어 좀 서운했다. 나는 이곳을 옛날에 두어차례 찾은 적이 있지만 최근에 찾은 적이 없어 한번 찾고 싶었는데...
해미는 원래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顯)이었던 것을 조선조 태종 7년(1407), 두 현을 합쳐 해미현이 되었고 이 읍성은 조선조 성종 22년(1491),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성한 석성(石城)으로 둘레가 2Km, 높이가 5m가 된다. 이곳이 천주교 순교지가 된 사연을 보면 천주교전래이후 충남 서편인 내포(內浦 :아산,당진,서산,덕산,태안,해미 등)지역에 천주교신자가 많았다. 그런데 18세기말, 천주교가 박해를 받게 되면서 이지역의 천주교신자들을 잡으면 토포사(討捕使)가 있는 이 해미영으로 끌고 와 이곳에서 심문하고 처형하였기 때문에 순교지가 되었다.
더욱이 고종 5년(1868), 유명한 오페르트(Oppert:1832-?:유태계 독일인)의 남연군(南延君:흥선대원군 부)묘 도굴사건이 일어나고 이 사건에 천주교인이 가담한 사실이 들어나자 해미읍성은 대원군의 천주교신자에 대한 보복의 형장이 되었고 이때 수많은 천주교신자가 학살 당하였다. 해미 이웃 덕산에 있는 남연군묘는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라는 명당자리로 알려진 곳으로 대원군은 이 지덕(地德)에 의해 고종이 등극한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이묘를 도굴하려 했으니 대원군의 분노를 짐작할 만하다. 이 도굴사건은 그 뒤에도 서구인과 그 문화에 대한 유림양반 들이 편견을 갖게 하고 우리나라 개화기에 전국을 흔들었던 유생들의 위정척사(衛正斥邪:바른 유교문화를 지키고 그릇된 서양문화를 배척한다)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변에 회원과 주고 받으며 산기슭 길을 따라 걸으며 간혹 눈에 뜨이는 진달래꽃을 반갑게 맞이하기도 하고 또 해변길로 나와 물 빠진 갯벌을 살펴보며 바다갓길을 주변에서 흥얼대는 노래소리를 따라 흥얼거리며 열심히 걷다 보니 오전 꼴인지점인 “기지포탐방지원센타”에 도착, 이곳에서 버스로 드르니항 부근에 점심식당인 “신영수산회센타”로 이동, 별식인 생고등어조림과 맥주를 겻 들여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오후 걷기는 13Km, 만만치 않은 거리지만 누구하나 걱정하는 회원이 없다. 자신만만들 하다. 오후코스는 “솔모랫길” 작명도 잘한 것 같다. 나는 일행을 따라 해안길을 따라 한참 걷다보니 염전이 나온다. 나는 염전을 보면 옛날 인천에 살 때 집에서 가까이 있던 주안 염전이 떠오른다. 학창시절에 여러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나는 문득 태안반도 부근 해역에서 벌어졌던 원유유출사건이 떠올라 그 흔적을 찾아 주변을 살펴 보았지만 별로 눈에 뜨이는 것이 없어 전화로 태안군청에 문의해 보니 이미 원래의 청전해역으로 복귀하였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이사건(2007.12.7)으로 검은바다로 변한 이곳을 원상복귀하는데 적어도 30여년이 걸린다는 전문가들의 예측과 달리 130여만명의 자원봉사자와 이곳주민의 땀과 노력으로 5년여만에 원래의 청전지역으로 원상복귀하는 기적을 만들어 내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정말 가슴 뿌듯한 이야기이다. 우리민족은 정말 대단한 민족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걸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한참 걷다보니 청포대해수욕장, 이곳 해안길가에 별주부전 유래비가 보인다. 구전설화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곳을 거북을 속인 토끼가 상륙한 곳이라고 기념물을 만들어노았다.(원래 이 설화는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에 나온다.------戱語曰, 子亦嘗聞龜兎之說乎, 昔東海龍女病心---)삼국사기 기록은 동해인데, 어떻든 재미있게 유래비를 읽고 부근에 자라바위 등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우리일행은 소나무가 우거진 모랫길을 따라 걷다 또 산자락길로 옮겨 걷기도 하면서 걸음을 재촉하였다.
오후 3시경, 드디어 우리일행은 오늘의 걷기의 종착지인 “몽산포 탐방지원센터”에 전원이 도착, 이곳에서 버스에 승차 오늘의 숙박지인 만리포로 향했다. 우리 일행은 태안읍을 경유하며 이곳에서 “불가마사우나”로 오늘의 피로를 풀기도하였다. 나는 몇몇 회원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하였고. 나는 승용차로 태안읍을 떠나며 아쉬움이 있었다. 태안군에서 가장 대표적인 국보급 문화재인 태안 마애삼존불(泰安 磨崖三尊佛:국보307)을 찾고 싶었다. 나도 이번 걷기를 준비하면서 처음 알게 된 흔치않은 6세기 백제불상이고 태안읍에서 가까운 백화산 기슭에 있어 한번 볼 기회를 얻었으면 했는데 이도 다음으로 미룰 수 밖에...
그러면서 이웃 서산에 있는 백제 마애삼존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서산 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국보 84)은 삼국시대 마애삼존불로 충청도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불상으로 알려져 있어 많은 관광객뿐 아니라 학생들의 수학여행코스가 되어 찾고 있지만. 태안 삼존불은 별로 널리 알려지고 있지 않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도 서산 마애삼존불은 수차례 찾을 기회가 있었고, 이번 걷기에서도 찾을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 보기도 했다. 서산 마애불은 본존불의 높이가 2.8m나 되고 당당한 체구와 머리 뒤에 화려한 광배를 한 백제조각예술에 가장 뛰어난 작품이요, 웃음을 머금은 불상의 모습은 백제미의 정수라고 전문가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일행은 예정된 시간에 만리포에 도착, 오늘의 숙소인 “수 비치캐슬”에서 방 배정을 받고 저녁식사는 “전주횟짖”에서 바닷가에 어울리지 않는 삼겹살 구이로 오랜만에 포식을 하였다. 노래를 겻들인 여흥도 즐기며.
다음날(4월13일)
새벽을 눈을 뜨니 기분이 정말 홀가분하다. 오늘은 걷기의 마지막 날, 오늘까지 잘 견딘 것이 나 스스로 대견하기도 하고. 창밖을 내다보니 날씨가 흐린 것 같다. 별로 걱정은 되지 않지만 비만 뿌리지 않는다면 걷기에는 오히려 좋지 않을가 스스로 위안을 해본다.
밖으로 나가 만리포해수욕장 주변을 서성거리는데 몇몇 회원이 저쪽 바닷가에 정서진(正西津) 표식판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 급히 찾아보았다. 나는 장흥의 정남진을 보면서 아직 정서진이 명명(命名)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걸으면서 정서진 지점을 찾아 명명을 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던 적이 있어 이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그 지점을 몇 차례 지도상으로 찾아보아 그 곳이 인천광역시 부근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는데 엉뚱하게 이곳에서 정서진을 보니 황당하기까지 했다.
태안군청 문화과에 전화로 정서진 설정 근거를 문의해 보니 충북에 있는 중원탑을 기준으로 하였다고, 이해가 되지 않아 자료가 있으면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집에 오니 고맙게도 자료가 도착해 이를 보니 이들이 근거로 제시한 내용은 “우리나라 중심지를 충북 충주시 중원탑(통일신라 7층석탑)으로 하고 이곳 중심에서 최서단인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북위36도46분12초 동경126도6분49초)를 정서진으로 확정하였다는 것이다(2005년 6월 표지석 설치).”
나는 집에 와 인천시청에 정서진 설치여부를 문의하니 인천시 서구청에서 작년 12월에 정서진 표지석을 설치하고 대대적인 명명식 행사를 했다는 것이다. 서구청에서 자료를 받아보니 서울 광화문 도로원표 기준점을 중심으로 정동진에 대칭되는 지점인 인천시 서구 “경인 아라뱃길 아라인천터미날”(북위37도34분8초 동경126도35분17초: 지번은 매립지가 되어 아직 확정되지 않음)에 표지석과 이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설치하고 특허청에 정서진 상표등록을 출원하여 거의 확정단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에 태안군에서는 ‘태안군 정서진 지키기 소송단’을 구성, 소송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도 있고. 어떻든 기존의 정동진 정남진을 바탕으로 지방자치단체가 자기고장중심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이 문제를 잘 정리하였으면 하는 바램을 해본다. 아쉽게도 우리 걷기팀이 걸으면서 정서진을 명명한다는 것은 물거픔이 된 것 같다.
우리일행은 아침식사는 “전주횟집”에서 시원한 황태해장국으로 속을 달래고 버스를 이용 인근 천리포해수욕장에 있는 “천리포 수목원”을 향했다.
“천리포수목원” 말은 듣고 있었지만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안내양의 소개를 들어보니 수목원을 만든 민병갈(Carl Ferris Miller:1921-2002)이란 분은 외국인(국적 미국)으로 우리나라에 귀화, 이런 훌륭한 업적을 남겨놓았다고, 이런 분 들이 있어 세상은 살만한 것 같다. 그분의 일생을 더듬어 보며 나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을 하며 아직까지 살고 있었는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발걸음은 무겁고 기분은 개운치가 않다. 다행인지 수목 안내판에 이상한 글귀가 보여 안내양에게 수정을 부탁하고 나니 그래도 수목원에 조그만 기여를 했다는 생각을 해서인지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
오늘 오전 걷기는 12Km, 우리일행은 수목원을 출발 기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스산한 날씨와 달리 모든 회원들의 표정이 밝고 걸음걸이도 가벼워 보이고 팀 분위기가 좀 들떠 있는 것 같다. 천리포 해수욕장을 지나 얼마 걸으니 백리포 해수욕장 안내표식판이 보이고 더 가면 십리포도 있다고 어떻든 재미있는 지명이다.
걸으면서 지도를 보니 우리가 걷는 가까운 곳(원북면 반계리)에 옥파 이종일(沃坡 李鍾一:1858-1925)생가가 있다고. 이분은 그렇게 널리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이곳 출신으로 한말에 선각자로 교육계(보성보통학교교장 등)언론계(황성신문사장 등)에서 활동하면서 구국운동에 투신, 31운동때 민족대표 33인중에 한분으로 활약하신분이다. 찾지 못한 곳이어서 한번 찾아보고 싶었지만 다음기회로 미를 수 밖에. 한참 걷다 보니 오전 종착지인 송현삼거리에 도착, 이곳에서 버스로 점심식사식당인 “국일대반점”으로 이동, 이번 걷기에 처음으로 중국음식에 백알까지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점심후, 우리 일행은 버스에 승차 서산 삼길포항으로 이동, 이곳을 오후 걷기 출발기점으로 삼고 대호 방조제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날씨가 음산한데다 바닷길을 걸으니 추위가 느껴져 초가을 날씨 같다. 주변에 푸른 바다와 갯벌만 보이는 길을 우리 팀만이 대오를 이루어 열심히 걸었다. 나는 오늘로 충남 내포지역을 끝낸다고 생각하니 챙기고 싶은 곳이 있다. 덕산에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1908-1932)의사를 모신 충의사(忠義祠)이다. 나는 이곳을 여러 차례 찾아 보았지만 찾을 때마다 윤의사에 대해 몇 가지가 되새겨지곤 한다.
윤의사는 열열청년으로 백범 김구선생의 지도로 폭탄을 들고 충동적으로 일본군 기념식장에 뛰어든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농촌계몽가요, 교육선각자요, 사회운동가로 자기스스로 이일을 생각했고 자기 판단에 의해 뚜렷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이런 거사를 한 독립사상가라 생각한다. 이곳에 전시된 그의 친필인 “농민독본‘ ”기사년일기“ ”월진회취지문“ 또 300여편의 한시(漢詩), 거사직전에 가족에게 보낸 편지, 글 등이나 윤의사가 망명 전에 이곳에 부흥원을 세우고 전개한 농민계몽운동이 윤의사의 이런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윤의사의 의거가 갖는 역사적 의미도 크지만 이보다도 매헌의 정신과 그의 인간적인 풍모를 되새겨보며 그를 역사적인 위인으로 두고두고 흠모(欽慕)하며 우리의 귀감(龜鑑)으로 삼아야할 것이라 생각하곤 한다.
나는 매헌이 망명하며 집에 남긴 글 “丈夫出家生不還(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글귀를 입속으로 되새겨보며 아쉽지만 이곳을 찾는 것도 다음기회로 미루고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방조제길을 따라 서산시에서 당진군으로 군계를 넘어 걸었다. 부근에 당진 화력발전소 부근 길, 인도도 없고 차량통행이 많은 길을 일렬로 대오를 이루어 오늘의 종착지인 “왜목(원래는 臥木인데) 마을”을 향해 앞 회원의 뒤를 따라 걸었다. 걸으며 왜목마을에 대해 “서해안에서 해뜨는 것을 볼 수 있는 마을”이라고 처음가보는 곳이어서 많은 기대가 된다. 드디어 오후 5시30분경, 우리 걷기팀 전원은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왜목마을 “견우직녀 다리”앞 꼴인 지점에 감격적인 꼴인을 하였다. 우리는 두 손을 높이 들고 대한민국 U자걷기 제9구간 완주를 자축하고 앞으로 임진각까지 완주의 기원을 담아 우렁찬 만세삼창으로 꼴인의 기쁨을 나누었다.
제9구간 완주는 함수곤 대표님을 비롯한 지휘부(이영균님 이창조님 이경환님 김태종님 김영신님 황금철님)의 치밀한 계획과 추진력 그리고 여러 봉사팀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회원모두가 자기보다 남을 배려하는 희생정신이 뭉쳐 이루어진 결과라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높은 곳에 계신 높은 분의 끊임없는 보살핌이 가장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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