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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파와 시아파 그 천년을 이어온 갈등
이라크의 급진 수니파 무장단체가 주요 도시들을 속속 점령하면서 이라크가 '수니파-시아파-쿠르드족' 지역으로 세 동강 날 위기에 빠졌다. 영국 BBC방송은 14일 "이슬람 무장단체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의 공격으로 이라크가 미군 철수(2011년) 이후 최대 위기에 빠졌다"며 "특히 수니파 중심의 서북부와 시아파 중심의 중남부 그리고 쿠르드족이 자치권을 행사하는 동북부 등 3개 지역으로 급격히 재편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수니파와 시아파, 역사의 시작
서기 632년 마호메트의 죽음으로 이슬람 세계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마호메트에겐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으며, 그를 대신할 분명한 후계자 선정도 하지 않을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통성이라는 화두가 이후 이슬람 역사 천 년을 지배하게 된다. 이를 두고 이슬람 학자 필립 히티는 “칼리프(이슬람 사회의 종교적/정치적 대표자)의 지위는 이슬람교가 직면해야 했던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문제다.”라고 말하고 있다. 마호메트 사후 후계구도는 피로 얼룩져 있고, 그에 따른 파벌 갈등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갈등도 여기서 출발한다.
수니파는 마호메트 이후 아부-바크르, 오마르, 오트만, 알리 이븐 아비의 4대 정통 칼리프와 이후 칼리프들의 정통성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시아파의 경우 마호메트의 사위이자 충실한 추종자였던 알리 이븐 아비만을 정당한 메시아의 후계자로 인정한다. 칼리프의 자격 요건에서도 서로 견해차이가 있다. 수니파는 마호메트의 혈통이 아니어도 그의 부족인 쿠라이시족 출신이라면 무조건 칼리프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고 보는 반면, 시아파는 칼리프의 정통성은 마호메트의 혈통에 의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보았다.
종파 간 견해 차이 속에서 알리 이븐 아비가 4대 칼리프로 집권할 무렵 아랍 세계는 잦은 분쟁과 반란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그리고 657년, 시리아를 다스리던 옴미아드가(家)의 수장 무아위야가 알리의 지도력을 의심하며 반란을 일으켜 시핀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무아위야는 코란 구절을 창끝에 매달고 중재인을 내세워 협상을 하게 되고 알리와 무아위야는 동-서로 영역을 양분하는 협정을 맺는다. 알리의 협정이 나약한 결정이었다고 실망을 느낀 추종자들은 그를 떠났는데, 그 가운데 하와리지파는 후일 알리를 암살한다.
알리가 암살당하자 무아위야는 대군을 이끌고 들어와 알리의 장남을 격파하고 우마이야 왕조를 세운다. 이 때 무아위야는 본래 선출 임명직이었던 칼리프의 지위를 세습화로 고정시켰다. 무아위야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야지드가 칼리프가 되었는데 알리의 차남인 후세인 알 리가 야지드의 승계를 부정하며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 쿠파로 돌아가 봉기 계획을 세운다. 이에 680년 쿠파의 총독이었던 우베이둘라는 그들의 봉기를 인정하지 않고 카르발라에서 후세인 알리를 공격하여 그 일가를 괴멸시켰다. 마호메트의 외가 혈통이 무참히 살해당한 것에 분노한 시아파는 정식으로 수니파로부터 분파했다. 이것이 시아파와 수니파의 본격적인 분열의 시작이다.
수니파와 시아파, 과연 같은 율법을 섬기는가.
수니파와 시아파는 의식의 실행과, 종교관, 이슬람 율법의 해석에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수니파의 경우 코란에 입각한 삶과,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아를 있는 그대로 철저히 지키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율법주의를 고수하고 있고, 시아파는 코란의 적힌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 보다 그 내면에 감추어진 의미를 찾아 해석하고 이행하는 가치 순응적인 모습을 보인다. ‘수니’라는 말은 ‘코란과 함께 마호메트의 순나-즉 말과 행동을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시아’는 ‘알리와 후손들을 따르는 사람들(시아트 알리)’이란 뜻이다.
이슬람의 교리인 여섯 믿음과 다섯 개의 실천 강령 중 “하루 5번 일정한 시간에 예배드리는 것”에서 수니파는 5번을 모두 이행하는데 반해, 시아파는 융통성을 발휘하여 3번으로 압축해서 기도를 하기도 한다. 또한 시아파는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하마드(마호메트)는 신의 예언자”라고 암송하는 기도문 부분에 “알리는 신의 대리인이며, 예언자 마호메트의 계승자이며, 최초의 칼리프다.”라는 구절을 추가한다. 기도 자세도 시아파는 서있는 자세에서 두 손을 배 위에 올리지 않고, 절을 할 때에도 바닥에 곧장 이마를 대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카르발라에서 나온 작은 돌을 놓고 그 위에 이마를 댄다.
두 종파간의 차이를 뚜렷이 볼 수 있는 관습은 바로 ‘아슈라의 날’을 지내는 모습이다. 이 날은 후세인 알리가 살해당한 이슬람력 1월의 열흘간을 의미한다. 시아파는 후세인 알리가 쿠파의 총독에게 살해당한 것을 순교라고 보고 그의 후세인의 고통을 기린다. 시아파 신도들은 이 날 자신의 가슴을 칼로 긋고 채찍으로 치는 행위(타으지아)를 통해 후세인 알리의 순교를 몸으로 기억하고 참회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을 통해 후세인이 중재자로 나타나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 이라고 믿는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다른 종교관의 차이는 이맘(종교 지도자)에 대한 숭배 유무이다. 수니파는 코란을 완결 무결한 것으로 보고 이맘은 단순한 예배의 인도자쯤으로 여기는 반면 시아파에서는 이맘을 마호메트와 비슷한 반열에 놓는다. 시아파는 홀연히 사라졌던 12대 이맘이 최후의 날에 살아 돌아와 이슬람 공동체의 단합을 이끌어주고 전 세계에 알라의 가르침을 전파한다고 여기는 종말론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이맘에 믿음이 크다. 이란 등 시아파 국가에서 종교적 지도자가 절대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하게 된 것도 이맘에게 부여하는 절대적인 권리에서 기인한다.
시아파는 수니파에 비해 인물숭배 경향도 두드러진다. 시아파 교도들은 마호메트 가문 출신 성인들에 대해 숭배의식을 행함과 동시에, 이란 등지에 퍼져 있는 시아파 지도자들의 묘소를 주기적으로 참배하며 순례한다. 이란의 가정이나 관공서에는 알리, 후세인 알리, 그리고 카르발라 전투에 관한 사진과 그림들이 장식되어있는데, 이는 수니파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시아파는 일정 기간을 정해두고 혼인관계를 맺는 계약결혼제도, 무트아를 인정하고 있다. 무트아는 마호메트 시절엔 일부 허용되었으나 수니파에선 죄악으로 보고 있다. 무슬림 사회의 폐쇄성과 보수성을 고려하면 시아파가 무트아를 인정한다는 점은 파격적이고 놀라운 사실이다. 또한 시아파는 수니파에 비해 여성의 상속권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으로 미루어 보아 시아파를 대표하는 국가인 이란의 여성들이 다른 아랍권에 비해 사회참여도가 월등히 높은 것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시아파가 수니파와 대비되는 또 다른 다른 특징은 따키아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따키아란 거짓 믿음을 의미한다. 시아파는 수니파의 정치적, 종교적 박해로부터 시아파 신도 자신의 존재와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필요할 경우 따키아를 통해 거짓으로 자신의 신앙을 숨기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결국 따키아는 소수종파인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관습적 안전장치인 셈이다.
신앙의 방식과 생활 관습의 차이가 지금의 시아파와 수니파의 대립을 부추긴 근본적인 원인일까? 사실 시아파와 수니파는 종교관과 역사관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융합될 수 없을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두 종파 간 결혼의 경우 관습적인 문제는 남아있을 수 있지만 법적인 면에서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또한 두 종파 모두 알라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같은 장소에서 예배를 본다. 시아파와 수니파도 서로를 같은 무슬림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상호 존경하는 부분도 있다. 단지 조금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문제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천 년을 이어져 온 갈등, 진짜 이유가 궁금하다.
그저 ‘다르다’는 이유는 갈등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다르다’는 경계로 구분 짓는 ‘우리와 너희’ 사이에 권력과 부의 배분에서 문제는 일어난다. 이슬람 국가 중 몇몇 나라에서는 수니파와 시아파 가운데 한 종파가 소수를 차지하는 경우가 있다. 이 때 국가 내부에서의 권력 배분 문제와 소수에 대한 처우 문제 등이 발발한다. 한 국가 내에서 뿐 아니라 다른 종파를 가진 국가 간의 국경문제와 언어문제, 그리고 부의 배분에 관한 불만 등이 바로 두 종파 간 대립을 촉발시킨 근본 원인이다.
이라크의 예를 들어보자. 사담 후세인 시절 이라크의 국민 가운데 시아파가 65%, 수니파가 35%를 차지했는데 정국은 소수인 수니파 정부가 지배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다수의 시아파는 정권에 순종하는 분위기였고 수니파 정부 역시 다수 종파라는 입지에 걸맞게 경제적 지원과 종교의식의 자유 등을 보장해 주었다. 그러던 것이 1991년 걸프전 이후 달라졌다. 당시 수 만 명의 시아파 국민들은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였는데 수니파 정권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되었고, 국외 정세가 혼란한 틈을 타 봉기를 했다는 이유로 시아파에 대한 수니파의 보복성 탄압이 시작되었다. 융화책의 일환으로 등용되었던 시아파 관료들은 숙청되거나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정권에 불만을 제기한 시아파 국민들은 연이어 체포, 구금, 처형당했다. 10년 간 시아파 처형된 시아파 무슬림의 수가 잠정 집계 2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피의 숙청보다 무서운 것은 종교에 대한 박해였다. 사담 후세인은 시아파 신도들이 순교자로 칭송하는 후세인 알리에 대한 종교 행사를 금지시켰는데, 그가 숨진 곳이자 시아파의 성지인 카르발라에 대한 순례 역시 금지했다. 성지에 대한 순례를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하는 무슬림들에게 성지 순례가 불가하다는 것은 가혹한 억압이었다.
갈등은 이라크만의 문제가 아니다. 1979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정 반대에 대해서 원리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에 가담했던 시아파가 잔혹하게 탄압 당했다. 1975년부터 15년간 지속돼 온 레바논 내전에서는 다수인 시아파가 소수인 수니파, 기독교 마론파, 이단 분파로 알려진 드루즈파에 학살을 자행했다.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수니파 정권인 탈레반이 무너진 뒤 그동안 억압받던 시아파가 미군정의 도움으로 집권하게 되면서 종파 간 유혈 사태가 끊이지 않고 있다. 종교를 받아들이고 섬기는 방식이 ‘달라서’ 타자가 된 이들 간에 권력과 부의 배분 문제가 불거지면서 갈등의 불길은 꺼질 줄 모르고 더욱 활할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나라별로 수니파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시리아, 이집트, 예멘, 레바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대부분 국가에서 다수 종파지만, 시아파는 이란과 이라크 등에서만 다수 종파다.
시아파가 정국주도권을 잡아온 이란과는 달리, 이라크는 시아파가 다수 종파임에도 수니파가 줄곧 정권을 잡으면서 시아파가 박해를 받았다.
앗쌀라아무 알라이쿰!
파키스탄에서는 지금도 시아파의 종교 행사인 ‘아슈라의 날’만 되면 시아파와 수니파 간에 유혈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이렇게 맞물린 종파 간 분쟁을 멈출 방안은 없는 것일까?
최근 이라크는 시아파 정권이 집권하고 있다. 이들은 후세인 집권 당시 수니파에 의해 금지당한 종교적 행사와 신앙 의식을 다시 되찾고, 그동안 방치되어 경제적으로 낙후된 시아파 지역에 대한 회복을 추진하고 있다. 수니파에 대한 보복성 탄압은 없다. 내 종파만을 위하고 다른 종파는 배척한다는 흑백 논리가 아닌, 그저 같이 잘 살고 싶다고 외치고 있다.
종교는 많은 이들에게 삶의 지침이 되고 안식처가 되며 사람들을 하나의 목소리 아래 합심하게 한다. 한 마디의 말이라도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종교 역시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종파가 분열될 수도 있다. 집권 종파가 서로 다른 국가 사이에 학술적 교류와 민간 교류를 정부 차원에서 독려한다면, ‘다름’을 기준으로 권력과 부를 한쪽으로 편향하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적용한다면, 같은 ‘알라’를 믿고 ‘코란’을 섬기는 이들 사이에 천 년이 넘도록 지속되어온 갈등도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비단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일 뿐이겠는가. 오늘,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나와 타인의 다름을 인정한다면 ‘앗쌀라아무 알라이쿰(안식과 평화가 함께하기를)’는 기도가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앗쌀라아무 알라이쿰(السلام عليكم)
모든 사람의 마음에 안식과 평화를.
그것이 예언자의 가르침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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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