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란 어떤 존재인가? 유학을 공부해 그 이념과 도덕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나아가 사회 교화를 임무로 여기는 지식인을 일컫는다. 그 몸이 세상에 있든 아니면 초야에 있든 선비의 가장 큰 관심은 공의의 실현!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드는 길이 바로 공적인 의로움과 도리에 있기에, 선비들은 개인의 영달이나 이익을 넘어 권력 앞에 당당할 수 있었다. 때로는 임금이라도 인과 의리에 어긋나는 일을 행하면 이를 지적하고 그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도 허다했다. 이런 선비의 의리 정신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치열한 항일운동으로 극명하게 표출된다.
19세기 후반 성주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중류지역에서는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이 등장, 한 학파를 열며 성리학의 꽃을 피웠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를 '주문팔현'이라 일컫는데, 그 중에서도 면우 곽종석(郭鍾錫)과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가 유명하다. 곽종석은 l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 폐기와 조약 체결에 참여한 매국노를 처형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또 3·1운동 후 '제1차 유림단 사건'이라고 일컬어지는 '파리장서사건'을 주도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주의 맏아들인 이승희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서상돈과 모금운동을 벌이다가 친일파의 방해공작으로 실패하고 고종 양위사건이 발생하자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이상설 등과 함께 동포들의 교육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퇴계·남명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지는 선비 정신을 지닌 성주의 유학자들은 3·1운동, 제1·2차 유림단 사건 등을 통해 항일운동에 적극 몸을 던진다. 여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과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919년 3월 1일 독립을 부르짖는 만세소리가 삼천리 방방곡곡을 울린 후 성주에서도 만세운동의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 3월 27일 선남을 시작으로 가천 동원리를 거쳐 4월 2일 성주 장날에는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에 있는 백세각(百世閣). 3·1운동 당시 송준필을 위시한 그 문인들이 성주 장날이 서는 날에 배포할 태극기를 제작·보관했던 곳이다. 공산은 "사생(死生)은 천명이다. 나라가 회복되면 죽더라도 사는 것이요, 나라가 회복되지 않으면 살더라도 죽은 것이다"고 선언한 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성주 장날에 벌어진 만세운동은 한밤중까지 이어졌고 왜경의 총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서너명, 상해를 입은 사람이 수십여명, 잡혀간 사람이 육칠십명이었다고 한다.
백세각은 3·1운동은 물론 '파리장서사건'을 모의한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려 약소국가의 자주독립을 논의한다는 소식을 접한 공산은 조선의 억울함을 세계만방에 알릴 '천재일우'의 기회라 생각하고 유림의 뜻을 모아 만국회의에 장서를 보내기로 했다.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이 초고를 쓰고, 면우 곽종석이 수정을 해 장서를 완성, 김창숙이 파리에 가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심산은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파리장서)를 전달, 우리의 독립 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렸다.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단 137명 가운데 13명이 성주 유림일 정도로 주도적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백세각은 조선 전기 문신인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가 지은 건물. 사헌부 집의로 있던 송희규는 당시 세도가였던 윤원형 등의 행패를 탄핵하다 오히려 역적으로 몰려 전라도 고산(高山)에서 5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고향에 돌아와 백세각을 지었다. 백세각의 규모는 정면과 측면이 각 7칸이며, 평면은 ㅁ자형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싸리로 엮은 점과 대패를 쓰지 않고 손도끼(자귀)로만 다듬어 만든 건축물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본관이 의성인 심산은 조선 선조 때의 명신이며 학자인 동강(東岡) 김우옹의 후손. 어려서 유학을 배웠고 문장에 능했던 심산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그는 1909년 고향인 성주에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세우고 인재를 키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성명학교 교사(校舍)는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에 있는 지금의 청천서당(晴川書堂)이었다.
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한 심산은 그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귀국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 제1차 유림단사건으로 체포됐다.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서로군정서 군사선전위원장과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을 맡았다. 1927년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돼 징역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유도회를 조직하고 성균관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했으며 이승만의 독재에 맞서 투쟁을 벌였다.
청천서당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심산의 생가가 있다. 선조로부터 세거해 온 전래의 건물은 모두 화재로 소실되고 지금의 안채 건물은 1901년에 중건한 것. 장방형 토석담을 두른 터에 안채와 1991년에 건립한 사랑채, 판각고(板刻庫) 등이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김창숙은 심산 외에도 벽옹이란 호를 갖고 있다. 앉은뱅이 노인이란 뜻. 일제의 고문에 의해 불구의 몸이 된 후 벽옹이란 호를 갖게 됐다. 대구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던 심산은 오히려 웃으며 "너희들이 고문을 해서 정보를 얻어내려느냐? 나는 비록 고문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며 종이와 붓을 달라고 해서 시를 써줬다. "조국 광복을 도모한 지 십 년에/가정도 생명도 돌아보지 않았노라/뇌락(磊落·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음)한 일생은 백일하에 분명한데/ 어찌 야단스럽게 고문하는가."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심산 선생 자부 손응교 여사
"결혼을 하고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이셨던 시아버님을 처음으로 뵈었지요. 평생을 독립운동과 반독재 투쟁에 바치신, 참으로 꼿꼿한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심산 김창숙 선생의 자부 손응교(92·사진) 여사.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심산 생가를 홀로 지키고 있는 손 여사에게서는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도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는 가야산의 소나무가 떠올랐다.
스물일곱에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의 유해를 받고 그 충격으로 목소리조차 변했지만 모진 고문으로 걸음조차 어려운 시아버지의 손발이 되어 평생을 보냈다. 두 자녀를 키우며 곧기만 한 독립운동가의 집안에 흠이 되지 않게 삯바느질로 힘겹게 생계를 꾸렸다.
손 여사는 일제 때 심산 선생이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보내는 '비밀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전국 곳곳은 물론 중국도 오갔다. 숨은 독립유공자인 셈. "아버님이 주시는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만주를 두번, 중국 본토를 한번 다녀왔고 국내는 30여차례를 오갔지요. 만주에는 기차를 타고 갔지만 많이 걷기도 했어요. 짧게는 사흘이 걸리고 길게는 1주일이 걸린 적도 있어요."
심산 선생이 편지를 주며 "어디에 있는 누구에게 전하라"고 하면 그대로 따랐단다. "처음에는 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지만 나중에는 독립운동과 관련돼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일본 순사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애를 업고 만주에 간 적도 있고, 편지는 포대기 안에 꼭꼭 숨겨 다녔어요." 며느리가 편지 심부름을 하고 오면 심산 선생은 "너 왔구나"란 말씀만 한마디했다. "그 무렵에 저를 빼면 아버님이 의지할 데가 별로 없으셨지요. 그래서 제게 편지 심부름을 시킨 것 같아요. 비록 고생했다는 말씀을 직접 하시지는 않았지만 며느리를 걱정하는 마음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월성 손씨 집성촌인 경주 양동마을이 고향인 손 여사는 외삼촌이 심산 선생의 제자였던 것을 인연으로 해 심산 선생의 자부가 됐다. 일제 때 갖은 고생을 하고 광복을 맞았지만 오히려 더욱 고초가 심해졌다. 심산 선생이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 "자유당 때 오히려 고생을 많이 했어요. 이틀을 굶은 적도 있어요. 일제 때는 나라를 찾기 위해 고생하기에 참을 수 있었지만 해방된 나라에서 더욱 핍박을 받으니 더욱 서러웠지요." 1990년대초부터 심산 생가에서 생활하고 있는 손 여사는 밭일도 하고, 가까운 곳은 걸어다닐 정도로 정정하다. 마을이 의성 김씨 집성촌이어서 집안 사람들이 청소도 해준단다.
독립유공자로 지정을 받으셨느냐는 물음에 손 여사는 손사래를 쳤다. "아버님이나 남편 모두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마음과 몸을 던지신 분들이지요. 나라를 찾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했지 무엇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지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젊은이들이 생가를 찾아와 심산 선생에 대해 물을 때 마음이 흐뭇해진다는 손 여사. 구순을 넘긴 연세임에도 당당하고 형형한 눈빛에서 항일운동에 투신한 한 집안을 꿋꿋하게 지킨 꼿꼿함이 느껴졌다. 이대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