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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 이전인 마한시대 지곡면 일원으로 추정되는 ‘치리국’으로 기술되면서 부터이다. 백제시대에는 이 지역 일대가 ‘기군’으로, 통일 신라 시대에는 ‘부성군’으로 불리다가 고려 충렬왕 시절 처음 ‘서산’이란 이름이 등장하였다. 이후 충렬왕 34년(1308년) ‘서주목’으로 승격된 후 충선왕 2년 다시 ‘서령부’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변경이 거듭되다가 1895년 서산군과 해미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95년 지금의 서산으로 통합되었다.
◆ 둘레 1,200m, 높이 4m의 큰 성
해미읍성안에 해미읍 관청이 존재했듯이 서산의 관청도 서산읍성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읍내동 31통과 11통 일대에 넓게 퍼져 있었던 서산읍성은 둘레 1,200m에 높이가 4m가 되는 큰 성이였다고 전해진다.
이 성안에는 수령이 집무하던 동헌, 이,호,병,예,공방의 집무장소인 질청과 장교청, 군사들이 훈련하던 장대와 교련청, 창고, 객사, 호적고, 화약고, 옥사 등이 모여 있었다.
1927년 발간된 서산군지에는 서산읍성에 관해 ‘서산군성은 석축 주위가 3,710척이요 높이가 12척이다. 서쪽에 작은 시내가 있는데 이 냇물이 성내로 들어와 연지가 되어 있다. 처음 건립연대는 알 수 없고 성이 동서쪽과 남쪽 모두 훼철되었다. 건축가옥 전부를 알 수 없다. 성벽도 역시 북부에만 조금만 남아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글로 봐서 1927년에도 서산읍성은 그 흔적만 조금 남아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나마 남아있던 것이 서령군문과 외동헌 정도였는데 모두 1979년 다시 이전 복원시킨 것이다. 지금 서산시청 앞에 있는 대문과 안에 있는 옛날 건물이 바로 서령 관아문과 동헌이다.
◆ 군문과 거북이머리
시청정문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서령군문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문은 옛 군청사의 외삼문으로 풍락루(豊樂樓)로 불리기도 하였다. 고종 4년인 1867년 서산군수였던 오병선에 의해 지어졌으며 오병선은 고종 초기 경복궁 중흥을 총 지휘하였던 인물이다. 때문에 서령군문은 조선 후기 건축양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인 새의 부리같은 익공계 2층 문루로 높은 사각형의 돌기둥의 초석에 원형기둥을 세워놓았다. 아래층은 가운데 기둥 줄에 대문을 달아 동,서,중앙 삼문을 만들어 출입하게 하였고 위층은 주위에 난간을 두르고 기둥과 창방이 만나는 부분에 연꽃모양을 새긴 장식을 붙여 놓았다. 팔작지붕 형태이고 사방추녀 끝에 각각 기둥을 세웠다. 가운데에는 ‘서령군문’이라고 적혀진 현판이 걸려있다.
이 문은 1956년 한차례 보수하였으나 크게 훼손되어 버렸다. 이에 1976년 다시 해체하고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다.
서령군문 앞에는 귀부석이 있는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2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산시청 앞 분수대에 있는 것을 198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았는데 눈은 하늘을 향해 부릅뜨고 있고, 입에는 보주를 물고 힘있게 치켜든 형상을 하였다. 등의 거북등무늬는 일반적인 육각형의 등무늬와는 다른 U자형으로 조각하였다. 반대편의 귀부석은 거북의 머리가 움츠린 형태이며, 몸체를 비교적 납작하게 조성하였다. 거북 등에 육각형의 거북등무늬를 뚜렷하게 조각하였다.
두 가지 모두 서산시청 앞에 당당히 자리 잡아 오가는 사람들에게 옛 청취를 느끼게 해주고 있으며 상징적으로 서산을 지켜주는 신물로 남아있다.
◆ 옛 사또의 집무실 「서산동헌」
서령군문 바로 뒤편으로 옛날 건물이 하나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옛날 서산의 사또가 공무를 집행하던 곳으로 건물 중앙정면에 ‘서령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역시 익공계 단층건물로 동쪽 한 칸에는 기둥 모양의 높은 주춧돌을 사용하고 있어 누마루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나머지 부분은 무사석으로 쌓은 기단위에 원형의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원주를 세웠으며 팔작지붕을 올렸다.
서산군지에는 아동헌이 35칸으로 180년 오병선이 재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917년 군수실 5평을 증축하면서 과선각(過仙閣)이란 현판을 걸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976년 서령군문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41호로 지정되어 있다.
◆ 손님이 묵어가던 영접관 「서산객사」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137호로 서산시 선거관리위원회 사무실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서산객사는 남향으로 정면 8칸, 측면 2칸 규모의 일자형태의 건물이다. 기단석위에 원형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으며 무출목 초익공 계통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손님을 중요시 했던 우리민족의 특성상 보통 어느 건물이든 객사가 가장 화려한 형태인 경우가 많은데 서산객사역시 화려한 외관을 뽐내고 있고 이곳에 머물었던 손님들도 서산의 기운에 감탄해 많은 시를 남겨놓았다.
이 객사에는 1416년 태종대왕이 충녕대군을 대동하고 서산지방을 행행했을 때 이곳에서 쉬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위라는 관찰사가 이 객사에 쉬면서 지은 시문이 전해지고 있다.
‘훈훈한 바람 불어 깊숙한 궁실에 야당화 피었는데 아전들 나가고 텅 비인 관아 뜰엔 돋아 오른 풀빛이 이끼처럼 진하다. 위포의 조수소리 바다로 다 돌아가서 고요하고 상산의 구름기운 하늘에 맞닿아 오는구나, 사암 고려 류숙이 살던 옛 집은 어느 곳인지 찾을 길 없고 학사 신하 최치원도 신선되어 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고적 찾아드니 사람의 감개만 더할 뿐 한 술잔에 취하여 우레 같이 코나 골거나 하였다’
세종시대 유명한 학자인 신숙주역시 이곳에서 글을 남겼는데 ‘적요한 관사 옮긴 곳에 앉아보니 바다 기운 아침에 장기와 연해 떠오른다. 눈에 가득히 들어오는 흥하고 망한 일을 어느 곳에 물으랴. 무너진 성 의구하게 산마루에 있구나’는 내용으로 서산의 서정적인 풍경과 더불어 인생무상을 느낀 신숙주의 마음이 잘 느껴지는 내용이다.
옛 서산의 시청은 이렇게 읍성 안에 자리 잡아 군민들을 다스렸다.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는 몇 가지 흔적밖에 남아있지 않고 옛 마을 지명도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서산, 태안, 당진지역 가장 큰 시장이었던 구장터(읍내동 11통 부근), 시청 앞 로타리로 불려지고 있는 남문밖, 옛 공무원들이 기거하던 노상말(읍내동 22통 부근)과 로하리(읍내동 21통 부근), 아름드리나무에 아름다운 정자가 지어져 있어 행사장으로 많이 쓰였던 양류정(읍내동 22통 부근), 옛 여인들이 냇가에서 빨래 방망이를 두들기는 소리가 마치 울음소리 같다고 해서 지어진 울음산(읍내동 31통 부근), 말먹이를 먹이던 마사리(읍내동 31통 부근), 얼음창고가 있었던 빙고재(읍내동 41통 부근)등 아름다운 지명이 이젠 모두 쓰이지 않고 있다.
우리가 살아오고 하루에 차로 몇 번을 지나치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옛 사람들의 향기는 계속 뿜어져 나오고 있다. 가끔 그 부위를 지나갈 때 마다 옛 광경을 한번 떠올려 보는 것도 바쁜 일상 중에 한숨 쉬어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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