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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강1902년 5월 2일 강의,
[언어의 기원: 삶에서 본능과 지성의 두 경향]
벩송: 시간관념(L’idée de temps),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1-1902)
- 메이에르-비쉬(Gabriel Meyer-Bisch s.d.), 편집, PUF, 2019, pp. 125-140(P.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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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적 사유의 첫 분석으로부터, 언어의 기능과 역할을 규정하면서 “관념의 입문”으로서 다룰 것이다. - 관념의 입문[도입]은 언어에서 보면 형이상(上)학의 입문일 것이고, 내적 상태에서 보면 형이심(深)학일 것이다. - 이런 이중성이 사회적 삶의 이중 요소 또는 경향성이 아니겠는가. ‘관념의 입문’에서, 개념작업인 한에서, 벩송은 언어의 두 요소 명사와 형용사를 다룬다. 사람들은 명사를 불변성과 고정성으로 다룬다. 실사로서 형용사는 두 가지 성질이 있는데 하나는 테두리 없는(성운같은) 일반화로서 변질성있는 일반적인 것(보통명사와 같은)이며, 둘째로서 성질은 변화이며 감각적으로 느껴질 수 없는 이동[이전]이 있다.
실사로서 명사와 형용사는 현존들의 연속성에서 여러 상태들로 나타나며, 연속적인 이전이 있다. 이는 현존의 이중적 성격[특성]이다. 한편 현존을 (개별)명사로서 경계를 갖는 대상으로 삼으면, 지성이 동원되어, 개념작업과 추상작업으로 향하여 순수 형식으로 향하는 것이 이데아(상징)의 성립이다. 이에 비해 다른 한편 현존은, 형용사로 다루면, 경계(코라)라는 외부 형식[외연]이 사라지고 무매개적으로 형식 속의 내용이 드러나며, 그 내용의 강도성에 의해 뚜렷하거나 흐릿하게 느껴지며, 전자와 달리 페라스(경계 있음)가 없는 인식으로 아페이론(경계 없음)의 인식이라 강도성에 – 우리 사회성에서는 내공이라 불리는 - 의해 파악되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에서 언어의 인위적 사용이 이루어진다. 언어가 둘로 분화[이분법]되는 것은 한쪽에는 무매개적이고 닮음의 인식이 있고[지각작용의 과정에서], 다른 쪽에는 개념작업이 있는데, 그 개념에서 두형이 나온다[지성의 인위적 분할에서]. 한편 안정과 불가분[개체적], 다른 한편 운동(일반)과 일반적인 것을 구별한다(133). 이 후자에서 언어의 요청이 있다. 이런 요청은 사회적 삶에서 온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삶은 진화의 과정에서 개인들의 진보를 위해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혼자 삶에서 진보는 없다, 연관, 즉 상호침투, 상호소통, 상호부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간이 깨달았다. 이는 이기심이라기보다 공동체적이다.]
이런 사회적 삶에서 인간(지성)이 동물(본능)과 달리 개념작업을 하고, 개념들을 매개로 해서 동물의 조건을 넘어섰고, 게다가 영원성으로 향하는 초월적 사고를 한다. 이런 벩송의 표현은 언어를 무시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 또는 개념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창조적 기능을 하는데, 초월이나 영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현존에서 창의와 자유를 향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가 반성을 통하는 길을 열어놓았기에, 지성에서 풀려나와 소통과 상호침투를 통해 인간종이 자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초월이나 영원의 실재성으로 가지 않을 때, 자기 현존에 즉 보살에 이를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철학사를 들여다보면, 또는 형이상학의 일반적 조건을 되돌아보면, 잘 알 수 있다. 우리가 항상 말했지만, 철학사는 인류의 인식작용의 분화와 더불어 인간이 자유롭고 또한 소통과 상호침투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으며, 누구나 노력하여 보살이 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고 또한 스스로 실행하자는 것이다. 벩송이 그의 마지막 저술(MR) 마지막 구절에서, “우주는 신들을 만드는 기계”라는 세상이, 모두가 부처가 되는 세상이 가능하다는 낙천주의가 깔려있다. (55VL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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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문장으로 표현 또는 재현되는 과정에서 기본 기능 또는 기본 요소는 둘이라 한다. 하나는 명사이고 다른 하나는 형용사이다. 명사는 개체성과 불변성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형용사는 일반성과 변화성을 표현한다. 여기서 일반성이란 일반관념이 아니고 성질화의 부분으로서 일반성이다. 그런데 벩송은 형용사에서 연속성과 지속을 찾는다. 지속은 변화하는 과정에서 일반성을 갖는 것이라 한다. 이런 변화와 지속을 하는 것이 실재적 현존(une existence)이라 한다. 벩송은 16강에서 언어의 기원적 분석에서는 공통 기원으로 숨쉬다에서 동사(être)가 현존하다(exister)의 기원인데, 서양어에서는 ‘있다’와 ‘이다’를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계사로서 ‘이다’가 사회성의 연결인 것처럼, 계사는 언어의 두 기능 명사와 형용사를 연결하는 것으로 보았다. 17강에서는 ‘현존하다’는 두 기능의 연결에서 형용사에 기원이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주체로서 자아는 훨씬 나중의 일인데, 이 나중인 것이 주인 행세로서 명사를 가지고 논하는 것이 개념작업에서 논리학이 될 것이고, 형이상학이 될 것이라 본다. 이에 비해 지각작용에 가까운 일반성과 변화성에서 변하는 현존을 드러내는 것은 ‘형이심학’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후자의 변화성에서 한 측면이 현존이며, 현재(변화의 과정중의 현존)이다. 왜 이런 구별이 나올까? 사회의 형성에서 말이다. 사회라는 형성에서, 전자의 위계질서와 후자의 상호상부의 구성차이가 아닐까 한다. 전자에서는 주체의 명령과 지배로서 명사가 개체화와 불변성을 우선성으로 만드는데 비해, 후자에서는 주체와 달리 온자아 안에서 일반화를 통한 자아의 성립이 상호침투와 상호소통을 통해서 현존이 성립할 수 밖에 없고, 이런 자아는 우여곡절의 과정을 겪는 현존자이다. 이런 과정에서 자아의 삶은 드라마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 이런 방향으로 철학의 전복을 말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이런 방향이란 점에서, 그가 사회에서 탈권위, 탈국가의 노마드 철학을 만들었다는 것도 신기하다. 그런데 우리로서는 전자에서 고대 황제(참주)제에 이어서 중세의 신국으로부터 근대에 국가주의와 현대에서 제국주의의 체계로 이어짐을 볼 수 있고, 후자에서는 표면 밑에서 흐르고 있었던 교감과 공감 그리고 연민을 통한 인간의 자연권의 발흥 다음으로, 사회사적으로 19세기 아나키즘과 공산주의의 태동을 볼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이런 정태적 사고와 역동적 사유는 각기 언어의 표현과 지시에서 의미론과 기호론으로 분화할 것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벩송은 의미론이 개념론으로, 기호론이 현존론의 생성으로 보았을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벩송은, 개념론에서 착오 또는 파라독스 등을 지적하면서, 언어 분석을 여러 방식으로 괜히 한 것이 아니라, 언어의 기원과 이유의 탐구에서 자신의 지속론을 끌어내려고 사유의 경향성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벩송은 일반성이 지각작용에 속하는 것인데, 이를 선천적 또는 선험화하여 언어의 기원과 이유를 말하지 않고서, 언어의 개념화작업을 기준으로, 언어의 토대를 마련하고 체계를 정립하려한 것이 로크와 칸트로 가는 길이 아닌가? 개념화는 관념화로 넘어가면서(초월이라고도 하지만), 관념이 실재성인 것으로 강조하다가 보니, 관념의 기원으로 요소들을 제시할 수 밖에 없었고, 단어 또는 음절과 음절에 관한 것을 말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런 요소들을 연합하는 것으로 역으로 추론하여 언어의 성립의 기원을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벩송은 단위들(단어, 음소)의 조합방식으로 이루어진 관념연합은 고대의 원자론적 입장을 그대로 본 받은 것이 하며, 이것은 단위 자체가 원자처럼 부동인데 운동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다른 힘(데우스 엑스 마키나)이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프랑스 언어학의 분화에서, 소쉬르가 브레알(Michel Bréal, 1832-1915)과 헤어진 것도 이 지점이 아닐까 한다. 아마도 소쉬스 계열이 원자론적 입장으로서 러셀의 논리실증주의와 같은 계열임을 사람들은 눈치 챌 수 있을 것 같다. 20세기 철학사를 보면 소쉬르 계열의 구조주의는 원자론적 입장에서 구조를 논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타파하려는 후기구조주의는 퀴니코스의 영향을 입은 초기 스토아의 입장을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퀴니코스에게 영향을 준 것이 일반성으로부터 변화하는 단위를 설파했을 지도 모르겠다. 즉 퀴니코스에서 초기스토아의 사유는 성질사의 일반화에 더 주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성질상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 의식 즉 영혼이었으리라. 그런데 플라톤도 일반성을 통해서 이데아를 질적으로 구상했을 수 있는데, 기하학적 논리에 강조로 성질사의 일반성이 추상적 관념(형식적 이데아)으로 가는 길을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
이를 이어받은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위를 먼저 설정하여, 한계를 지닌(즉 외연을 지닌) 개념에서 관념으로 올라가는 추론의 사다리를 놓은 것이리라. 그러면 일반성에서 변화하는 중에서 동일성을 유지하는 ‘단위’를 당시에는 인간(영혼)의 비유하여 찾으려 했을 것이다. 영혼은 개체성도 존재도 아니고, 운동하고 변화하는 현존이며, 신체와 연관도 없는 어떤 것이라 했을 것이다. 이런 현존을 철학적으로 풀지 않았지만 도덕적으로 공동체로 풀려고 했던 이는 초기 스토아학자들일 것이고, 브라만에서 벗어나려는 싯달다도 그 길을 실천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편 상부상조의 도덕에서 공동체의 종교로 가는 드라마의 길이 형이심학일 것이다. 다른 한편 명사를 중심으로 불변하는 개체성을 유지하려는 쪽에서는 요청의 형이상학에 힘입어 윤리와 국가, 헤겔의 인륜성 등으로 향하는 길이리라. 이 처럼 전자와 후자에서 지각작용의 재인식과 개념작업의 재현으로 각각이 다른 길, 다른 방향일 진데, 들뢰즈가 방향의 논리를 전개한 것은, 구조주의의 개념작업을 벗어나려는 노력이며, 어쩌면 성질사를 통한 일반화의 계열들을 전개하고 하였을 것이다. 그는 벩송의 이 강의록들을 읽지 못했지만, 지작작용의 재인식(기억)을 통한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55VMA)
#제17강1902년 5월 2일 강의,125-140.
여러분, 당신들은 우리가 어떻게 언어를 언어의 원칙적 요소들 속에서 매우 재빨리 분석으로 이끌어 왔는지를 상기해보시라. 우리가 지속의 연구에 의해 이끌렸던 개념과 개념적 사고는, 불가분적인 것과 류적인 것이라는 두 개의 다른 대상들에 관해서 보다 두 형식[지각작용과 개념작업]을 다룰 수 있다. 우리가 말하듯이, 불가분의 개념들, 즉 불가분적 개념들이 있고, 그리고 류적인 개념들, 일반 개념들, 불가분적 개념이 있고, 그리고 주어진 공통 층으로부터 파생된 일반 개념이 있다. 닮음의 무매개적 인식이 있다. (125)
우리는 지각작용또는[즉] 닮음의 무매개적 인식을 인정했다. 이 인식은 어떤 것인데, 한편으로 불가분적인 것[개체]의 개념작업을 부여하는 어떤 것이고 다른 한편 류의 개념작업을 부여하는 어떤 것이다. 이 어떤 것은 한 측면에서 말하자면 불가분적인 것의 표상으로 고정되고, 다른 측면에서는 반대로 류의 표상으로 미묘하게 되어 날아가게 된다. 이처럼 불가분적인 것의 개념작업, 즉 류의 개념작업은 한 등걸에서 나온 두 줄기이다. 그 중 한 줄기가 닮음의 무매개적 인식이다. (125) [다른 한줄기는 재현의 인식인가.]
이제, 우리는 개념적 사고의 첫 분석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 분석을 언어에 관해 검증하고자 하면서,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데, 즉 언어를 점진적으로 가장 단순한 요소로 환원하면서, 가장 복잡한 명제들을 기본적인[요소적인] 명제로 해체하면서, 요소적인 명제들 가운데 파생된 전형들을 원초적 명제로 이끌면서,우리는 언어로부터 환원할 수 없는 본질적인 두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었다. 이 요소들이 주어와 속사, 명사와 형용사인데, 여기서 형용사는 속성작업, 성질 또는 상태를 표현한다. 그런 것이 초점이며, 우리가 지난 강의에서 도달했던 결론이다. (125-126)
이제 우리는, 우리가 이 강의에서 전개하고자 원하는 것은 관념의 입문[도입]일 것인데, 언어의 두 요소들 - 형용사와 명사 - 각각의 기능과 역할을 규정해야 한다. 실사로서 명사는 표현하는 이중 기능을 갖는 것 같다. 하나는 구체적이고 불가분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변하는 것(l’immuable)이고 불가운동성(l’immobile)이다. (126)
[명사의 심리학적 기원에서 표상적[재현적] 기능: 불가분성과 불변성]
우선 나는 명사가 불가분적인 것[개체, 개인]을 표현한다고 말하다.내가 인간, 탁자라고 말할 때, 그럿은 불가분적 개념작업, 우선 정신에게 현재 있는 불가분의 개념이다.
내가 또한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사람들이 대답하기 익숙한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사람들은 인간 탁자를 말할 것이고, 그것들은 무엇보다 류들을 표현한다. 그리고 내가 단어 인간, 탁자를 발언할 때, 내가 그런 인간 저런 탁자라는 것을 특정하지 않는 것처럼, 그것이 문제인 것은 인간 일반에 대해서 그리고 탁자 일반에 대해서 이다. (126)
틀림없이, 그러나 만일인간, 탁자라는 단어들은 정신에서 류의 재현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실체인 한에서, 명사인 한에서 인가? 분명히 아니다. 그것은 마치 가능한 속성들처럼, 또한 일종의 형용사들처럼, 내가 그것들을 표상[재현]하는 한에서이다. 만일내가 예를 들어 삐에르, 뽈, 쟈끄는 - 삐에르, 뽈 자끄가 단어 인간을 성질사[실사처럼 형용사로서]처럼 인정할 수 있는 한에서 - 인간이라고 나에게 말한다면, 이들은 성질사적인 상태를 매개로 해서 류를 재현한다.그런데 만일그것을[단어인간] 마치 명사처럼 또한 성질사처럼 있는 그대로 취급한다면, 실체적 어떤 것, 불가분적 존재만을 표현할 수 있고, 사실상 그것은 불가분적 재현이며, 재현이 정신 안에서 – 사람들이 이미지를 충만하게 정확성을 드러내기를 원할 때 - 불러일으킨 규정된 한 인간의 이미지이다. 따라서 만일내가 실사를 실사처럼 다룬다면, 즉 내가 가능한 속성인 한에서 형용사로 항상 혼융될 수 있는 것처럼 다루지 않는다면, 실사가 재현하는 것은 당연히 구체적이고 불가분적인 어떤 것이다. 그리고 내가 덧붙여 말하건데, 그것[실사]는 안정되고, 움직이지 않고, 불변하는 어떤 것을 재현한다. 만일내가 말하건데, 그 탁자라는 단어는 실사인 한에서 변하지 않는 어떤 것[관념]을 지칭한다. (126-127)
여기서 또한 우리는 우리에 마주하여 겉모습들(les apparences)을 갖는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할 것이다: 이 탁자는 깨끗하다. 탁자는 더러워질 수 있고, 깨끗하고 더럽고 등등으로 모든 매개적 상태들을 거쳐(통과)갈 수도 있다. 탁자는 사각형인데, 탁자는 둥글고 등등이 될 수 있다. 아마도, 한 순간 반성해 보시라. 당신들은, 만일 탁자라는 단어가 나에게 변화하는 어떤 것을 재현한다면, 내가 거기에 덧붙인 여러 성질들의 매개에 의해서라는 것을 [아제에]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변화하는 이 탁자를, 수많은 단어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성질화하는 한에서, 깨끗한 더러운 등등으로 표상할 것이다. 이 단어들은 성질사들이고 상태들을 표현한다. 또한 상태들은, 만일 내가 탁자인 한에서 탁자로 만족한다면, 또한 만일 정신 속에 탁자라는 단어만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정신 속에서 어떤 것의 표상을 – 그것은 변화하는 많은 성질들의 기반[지지]처럼 있을 것이고 - 갖는 것이게 한다. 이 기반은 움직이지 않고 변질하지 않고 남아있다. 따라서 내가 실사에게 하나 또는 무한정하게 많은 성질들을 항상 결합시키는데 익숙[습관]하기 때문에, 내가 이 실사를 마치 변화하고 움직이는 어떤 것을 표현하는 것처럼 표상한다. 반면에 만일 내가 실사를 그 자체로 취급한다면, 실사는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의 표상이며, 실사는 변질불가능성[불변성]을 표현한다. (127)
따라서 우리는 언어의 이런 본질적 요소는, 명사든 실사든 간에, 불가분적인 어떤 것을, 즉 한편으로 구체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을, 표현한다. (127)
[형용사의 심리학적 기원에서, 표상적[재현적] 기능: 일반적인 것과 변화성]
이제 우리가 도달할 언어의 다른 요소를 보자: 형용사즉 속사. 반대로 형용사는 한편으로 일반적인 것(le general)[보통명사], 다른 한편 변화(le changement)을 표현한다.
먼저 일반적인 것을 다루자. 그것은 분명하다. 만일 내가 검은, 흰, 깨끗한, 더러운 등을 말한다면, 그것은 모든 깨끗한 대상들, 모든 더러운 대상들, 모든 검은 대상들 등등에 적용하면서, 이 단어들이 적합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형용사는, 형용사가 성질사이기 때문에, 또한 형용사가 가능한 무한정한 대상들에 적용되는 한 상태를 표현하기 때문에, 정당하게 형용사이다. 따라서 본질에 의해서 형용사는 류를 재현한다. 형용사는 마땅하게 대상에 적용되고자 하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127)
그 대상을 불가분적(개별적)인 어떤 것처럼, 한 인격처럼 재현해보시라. 형용사는 한 옷을 완전히 인조품[모조품]으로 표현할 것이다.이 모조품 옷은 수많은 인격들에게 해당할 것이며, 그 인격들은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입혀진 것이다. (128)
따라서 일반적인 것이 있다. 이제 이 단에가 취급하는 것 다른 것[단어]이라기보다 일반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고, 또한 ‘움직이는 것(le mobile)’이고 ‘변화하는 것(le changeant)’이다.
형용사의 이 둘째[변화성] 고유성은 아마도 첫째[일반성]보다 덜 놀랍다. 그러나 사람들은 판단을 마치 다음처럼 고려한다. 즉 탁자는 검다. 그 탁자는 이런저런 색깔을 가지고 있는데, 검은 색이라 하자. 분명한 것은 내가 탁자를 검은 것처럼 표상할 수 있을 때는, 탁자가 그렇다고 믿을 수 있는 다른 많은 색깔을 내가 생각하지 않을 경우이다. (128)
또는 이런 성질화하는 작업은 나의 정신에서 어떠한 정확함도 갖지 않는다. 또는 내가 가능한 다른 성질화 작업들을 만큼 많은 것들 가운데, 어느 정도로 모았던 것처럼 성질화 작업을 표상한다. 따라서 탁자는 나에게 마치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많은 상태들을 통과할 수 있는 것처럼, 즉 마치 무한정하게 변할 수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각각의 성질사(chaque qualificatif)는 마치 한 문장처럼 이 변화의 상태와 같다.
따라서 귀결로서 성질을 만하는 것은 – 실재적이든 가능적이든, 지각되었던 또는 생각되었던 - 변화를 말한다. 그러한 것이 두 항들의 이중 기능이며, 두 요소의 이중기능이다. 우리분석은 언어를 두 요소로 환원시켰다. (128) [두 요소: 명사와 형용사]
만일 우리가 이제 우리가 지속의 분석을 인도했던 결론들 중의 결론을 이 강의의 첫째 부분에 접근시키고자 애쓴다면, 여기서 내가 믿기로 매우 간략한 요약을 할 수 있는데, 다음에서 그것을 발견한다. (128)
우리는 말했다. 실재성, 즉 실재적인 것, 그것은 무엇보다 어떤 연속성이고, 변화의 연속성이다. 실재성은 무엇보다 지속하는 무엇이며, 지속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 진행하여 다음 순간으로 연속되는 그런 방식으로 변하는 것이고, 서로서로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이전(une transition)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치 지속의 완전한 연속성처럼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현존(une existence)을 재현한다. (128-129)
여기서 도형에 의해 재현해보자. 자 선(線)이 있다.
[17강 표 1]
| a
| b
| c
| d
[원문에는 이어진 선인데 우리가 표시할 줄 몰라서 끊겨진 것이 되었다.]
연속적인 어떤 것이 있다. 그러면 현존, 실재성, 지속, 이것은 연속성 자체이다. 말하자면 서로서로 침투하면서 계속되는 상태들의 무한정[무정의]한, 또한 무한한 수(un nombre)이다. (129) - [그 정의되지 않고(무한정하고) 무한한 수 – n 수이며 대수이다. 벩송은 현존을 대수처럼 생각했고, 그리고 그 n(부정대수, 부정법)이 an(어떤 것a의 n승)처럼 사유하면 다양체의 개념이 꼭히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대수학에서 나왔다고도 할 수 있고, 기원은 소크라테스의 ‘뭣’이 열려진 물음이라는 점에서 다양체에 대한 물음일 수 있다. (55VMA)]
만일 우리가, 지속의 분석이 도달한 것에 막 도달했던 결론들에 접근하고자 원한다면, 우리는 언어의 기능이 다음과 같다는 것을 발견한다. 언어 기능은 선에 의해 재현[대리]된 변화의 연속성을 취급하는데 있고, 변화의 연속성의 길을 따라 얼마간의 순간들을 구별하고 고정하는데 있다. [그 구별에서] 마치 상태들처럼 우리가 a, b, c, d라고 부르는 계속적 상태들을 고정하는데 있다.
이 선을 무한정한 뉘앙스를 지닌 태양 빛의 스펙트럼처럼 표상해 보자. 사람들은 빛이 포함하는 색깔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는 얼마간의 수(數)로 된 기준점[표시]들로, 즉 a, b, c, d의 색깔들, 즉 보라, 붉음, 푸름, 녹색 등등으로, 취급할 것이다. 언어는 명명할 것이고, 다른 점들을 단어들에 의해 지적할 것이다. 상태들의 차이들을, 연속된 변화의 다른 순간들을, 표상[대리]하는 운명에 처한 단어들, 그것은 성질사들(les qualifiatifs), 형용사들일 것이다. 지칭작업(dénomination)[럿셀의 지시이론]은 분할의 작업을 함축하고 있으며, 연속성은 중단되어 있다. 모든 매개자들은 a와 b 사이, b와 c 사이에 제거되었다. 그 간격을 표현할 수 없게 남아있다. (129)
그렇다면, 어떤 것에 의해서, 이 간격이 존속한다고 표현해야만 한다. 한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느끼지 못할 정도의 이전이 있다. 그러나 이전 특히 이런 이전의 비감각성(l’insensibilité, 느낌불가능성)은 표현되지 않은 채 있다. (129)
이런 이전을 표현하기 위하여, 여러 다른 순간들을 그것들 사이에서 유지하는 어떤 것이 있다. 마치 실과 같은 것이 있다고 표현하기 위하여, 나는 우리가 사용했던 옛 이미지를 다시 취급한다. 그 이미지는 여러 색깔로 된 모든 항들을 관통하여 통과했다. 실사가 현존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실사는 연속적 변화들 속에서 연속성을 표현한다. 한 상태에서 다른 한 상태로 이전이라는 어떤 것, 따라서 같은 의미로, 이전의 비감각성은 단위를 보증한다. 그 실사가 끊임없이 그 자체로부터 다르다고 할지라도, 실사는 그러한 것, 즉 연속성의 분할 속에서, 또한 얼마간의 점들 또는 순간들에 의한 연속성의 재현에서, 부정확한 어떤 것을 불완전하게 수정하는 어떤 것일 것[변화하는 단위]이다 것이다. (130)
여기에, 우리의 실사라는 것, 명사가 있다. 그때에 만일 사람들이 형용사와 실사를를 정의하는 것이 이러하다면, 사람들은 우리가 좀 전에 말했던 것을 이해할 것이고, 그리고 하나는 기원적으로 본질적으로 불가분적인 것, 구체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고, 반면에 다른 하나는 오히려 추상이고, 일반적인 것[보편개념]이다. (130)
이런 이유로 몇 개의 구체적 현존ㄴ들을 고려해 봅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직선을 상징으로 채택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직선들을 가질 것이다 (130)
[17강 표 2]
[a] | ∖∖
[b] | ∖ ∖
[c] | ∖ ∖
[d] | ∖∖
[O] [P] [Q]
[원문에서 선O는 수직이고, 선P는 급경사가 직선이고, 선Q 완만한 경사의 직선이다]
현존들의 각각은 마치 순간들의 연속성처럼, 이어서 마치 서로서로 연속하는 상태들의 다곱성처럼, 고려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둘째 현존으로서 [다음 표가 있다.]
[17강 표 3]
a’ | a” |
b’ | a” | [b”]
c’ | a” | [c”]
d’ | a” | [d”] (130)
[이 표3은 현존들의 다양성을 표현할 것이다. 아마도 수직선도 여럿일 수 있고 각각은 현존이다. 그 현존에서 순간들의 계속은 첫 현존과 다른 순간들을 지닐 것이다. 물론 보편관념을 지닌 이는 a, a’, a” 등등과 수평에서 동일한 현재의 상태의 개념을 추리할 것이다. 그러나 지각작용에서 a, a’, a”는 공감하는 또는 상호 침투하는 구체적이고 불가분적인 것이다. 따로 파악 또는 추리되는 것은 a, a’, a”를 각각의 개인으로 이미 분할했기 때문일 것이다. ]
여러 다른 현존들 속에서, 실사는 매번 이전들의 연속성을 표현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전들의 연속성은 만일 사람들이 한편에서 다른 편으로 이행한다면 달라진다. 거기에서 실사는 불가분적인 어떤 것을 - 각 경우에 이런 고유한(sui generis)연속성이 있는 어떤 것을 - 표현할 것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고유한 연속성이라는 여기서는 a에서 b로, 다른 곳에서는 a”에서 b”로 등등의 연속성이다. 따라서 실사는 불가분적인 것을 지칭할 것이고, 내가 그것을 기체(substratum)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따로 파악된 각 현존의 특성이라는 영속성, 고유한(sui generis)이전들의 연속성이라 말할 것이다. (131)
그러나 만일 내가 연속성들의 길이에 따라 상태들 중의 하나 취한다면, b로서 시작하자면, 그리고 만일 내가 다른 연속성들을 고려한다면, 내가 이 연속성들을 따라 b에 닮은 상태들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것은 있을 수 있을 것이고 [또는] 있을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어떠한 닮음도 없다는 것, 아무것도 아무것에 닮지 않는다는 것이 이루어질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러한 것은 있고, 또한 왜 이러한 것이 있는가? 이것은 다른 질문이다. 그러한 것이 있고, 그리고 왜냐하면 그러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접근할 수 있을 다른 항을 찾을 것이다. 내가 연속적 연결(un trait)에 의해 여러 다른 점들을 이렇게 통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다른 점들은 가능한 많은 수의 현존들에 공통인 것을 재현할 것이다. (131)
[17강 표 4] - [원문에서 수직선과 수평선은 끝어지지 않은 직선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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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a’ | 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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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형용사일 것이다. 당신들은 실재성을 변화의 연속성으로 표현하기 위해 언어의 인위물(l’artifice)을 본다. 이것은 연속성 속에서 변화들을, 즉 성질사 또는 형용사라고 부르는 어떤 단어에 의해 표현되는 서로 대체할 수 있는 상태들을 구별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접이었던 것을 재결합되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상태들이 중단없는 연속성을 따라서 구별되었던 점들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운동성이 아니라 안정성을 표현하는 항들[용어들]을 창조할 것이다. 한편으로 안정성이 다른 한편으로 운동성이 서로 결합하여 어떤 것을, 즉 가능적인 척도에서 구체적 실재성을 표현할 어떤 것을, 제공할 것이다. (131)
그러한 것이 표현된 언어의 본질적 인위물[개념화의 산물]일 것이다. 한편으로 불변질성이며 다른 한편 변질성이다. 한편으로 안정적인 것이며 다른 한편 운동적이고 변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언어의 이중 기능이 있다. 언어는, 두 항들, 두 요소들을 함께 붙이지 않고서는, 가능적인 것의 척도 안에서 실재적인 것의 연속성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자기 기능에 속하는 요소적인 단순 작동을 완수할 수 없다. (132)
만일 우리가 언어의 기원들자체에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만일 우리가 언어가 사유로부터 나오는 그 정확한 점에서 언어를 다룰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좀전에 구별했던 두 요소들이 시작에서부터 서로 섞여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형용사와 실사가 유일한 항에서부터, 즉 실사의 고체성과 질적인 운동성(유동성) 사이에 매개적인 어떤 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단어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의 인도-유럽 언어에서, 사람들이 단어의 기원에 충분히 높이 거슬러 올라가는 거기에서, 사람들은 실사들 일반이 옛 형용사들, 즉 옛성질사들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이리하여 태양은 아마도 처음에는 ‘빛나는 것’, 즉 비추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고, 발은 원시적으로 걷는자, 걷는 자가 나타내는 작용, 상태 어떤 성질이었다. (132)
나는 놀라게 되는데, 이 성질사들이 처음에는 한 성질사의 잘 정해진 의미를 가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질사의 의미는 사람들인 그것을 접합하는 한 실사를 규정했을 때만이 규정되기 때문이다. 만일 실사가 말끔한 출현을 행하기에 바로 앞서 우리가 스스로 자리 잡는다면, 분명한 것은 실사를 앞선 것으로 간주되는 형용사는 형용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실사의 의미와 성질사의 의미 사이에 매개적인 어떤 것이며, 그 어떤 것은 실사로 고체화 될 것이며, 그리고 나중에, 우리가 조금 전에 말했듯이, 성질화를 이룬 보다 더 움직일 수 있는 어떤 것으로 휘발될 것이다. (132)
무슨 일이 있다하더라도, 우리는 가설들을, 추정들을 행할 수 있으나 우리가 아는 것은 추정들의 지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럴듯하게도 언어가 허용하는 모든 요소들을 가지고 또 언어 덮어쓰고 있는 무한한 복잡성과 더불어, 언어는 매우 단순한 이런 형식 하에 인간 지성으로부터나왔다.
[단순한 형식은] 반은 실사적이고 반은 형용사인 항이며, 이것은 둘로 분해되는 저항할 수 없는 경향성을 갖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주체의 표현을, 사물의 표현을 제공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질의 표현일 것이다. 스스로 나누어지고, 스스로 분해되는 이런 경향성은 분명히 언어의 본질 자체이다. 언어는, 그것이 인간 지성으로부터 나온 것처럼, 이처럼 둘로 분할하는 경향성을, 이분법(la dichotomie)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언어가 이분법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33)
언어가 왜 그러한가?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에 이른다. 왜 언어는 이처럼 둘로 스스로 나누어지려고 하는가? 주목해 보세요, 우리가 추적하는 대상에서, 이런 질문은 본질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념적 사유의 본질이 그러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둘로 나누어지는 경향, 닮음의 인식인 무매개적 인식을 취하는 경향, 그리고 한편으로 안정되고 불가분적인 어떤 것을 다른 한편으로 움직이고 일반적인 것을 구별하려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개념의 이중적 형식이 나온다.
우리가 개념에 대해 말했던 것을, 우리는 언어에서 검증했다. 우리는 가정했다: 아마도 심지어 개연적으로, 언어의 요청들, 언어가 창조되는 필연성, 그것은 사유가 밀고나간 것이며, 언어에 가장 좋게 적합하는 개념적 형식을 채택하기로 밀고 나간 것이다. (133)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다음 이유들을 아는 것이다: 왜언어는 이런 형식을 내보이는 지, 왜 언어는 다른 방향이 아니라 이런 방향을 취했는지, 왜지각작용, 무매개적 인식이 우리에게 불가분적 어떤 것으로 주어져서 언어가 항상 한편으로 안정성을 다른 한편으로 운동성을 지나가게(통과하게) 하는 경향을 갖는지, 그때에 실재적인 것을 혼합들을 – 다소 파생된 두 요소들을 - 가지고 표현하려는 경향을 갖는지. (133)
만일 우리가 인간의 심리학적 능력들 일체에 관해 눈길을 한번 던진다면, 추상의 관점에서 이 능력들을 이해하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 능력들이 목표를 갖고서 어떤 것에 쓰여서 유용하다는 이런 생각들을 고찰하면서, 만일 다른 편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들의 일반적 진화를 고려할 것이다. (133-134)
여기 우리는 진화라는 단어를 매우 모호한 의미에서 매우 일반적 의미에서 다룬다. 그 진화라는 단어는 필연적으로 혈통의 관념을 필연적으로 함축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거기서 단순하게 규칙화된 계속, 존재들의 계속을 이해한다. 존재들이 우연에 따라가지 않는 뿐만 아니라, 서로서로에게 연결되고 묶여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에서 계속이다. (134)
따라서 만일 한편으로 우리가 심리학적 분석을 행한다면, 만일 다른 한편 우리가 형식들과 유기체들의 일체에 관하여, 생명 일반의 진화에 관하여, 눈길을 한번 던진다면, 만일 우리가 이 두 연구의 결과물들에 접근한다면, 내가 믿기로 우리는 다음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생명의 모든 일반진화는 우선 사회적 삶을 사회 안에서 삶을 목적으로 삼는다.그러한 것은 사회적 삶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삶을 이용하기 위해서 이다. 이 분석으로 들어갈 시간이 없으나, 내가 이에 대해 이미 몇 마디를 말할 수 있었다: 즉 우리 능력들의 심리학적 분석은 이것을 잘 제시한 것 같다. 심리학적 분석은, 진화의 목적이, 사회 안에서 삶의 환경에서 개체들의 장차의 진보를 얻기 위하여, 사회에서 삶의 실현을 이끄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134)
사회는 처음에 목표이고, 사회적 삶이 목표이지만, 수단일 뿐이어야만 하는 목표이다. 사람들은, 진보의 정식이 이러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처음에는 사회를 위한 진보, 그러고 나서 사회의 의한 진보이다.결국 거기에는 이중 기획[프로그램]이 있고, 첫째 절반은 이와 같다. 사회적 삶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절반은 목표였었던 사회적 삶을 이용하는 것이다. 마치 개인적 삶의 장차의 진보를 위한 도구처럼. (134)
[첫째 목표로서 사회적 삶 실현: 곤충사회] [둘째 사회적 삶 속에서 인격실현?]
따라서 우리가 기획의 첫 절반, 즉 사회적 삶의 실현화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 첫절반이, 진화의 선들을 따라 진화의 몇 방향들을 따라, 실현되었고 또한 매우 잘 실현되었다. 그 진화의 방향들은 인간에 이르는 것이 아니었고, 몇몇 동물 종에, 특히 곤충의 몇 범주들에 이르는 것이다. (134)
어떻게 곤충들의 몇 종이 사회적 삶에 이르렀는지를 보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벌통 속에서 완성되는 노동을 따라갔던 학자, 그것의 묘사들을 읽었던 독자는 사회적 삶이 제시한 완전함 앞에서 경탄했다. (134-435)
우리는, 벌들이 우리에게는 아직도 괴롭히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 해결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또한 벌들의 사회에서 부자들도 가난한자들도 없다는 것을, 모든 이들이 만족하고 모든 이들이 자기 성향(aptitude)과 자기 능력(faculté)에 따라 일하는 것을 발견한다.; 모든 구성원은 복종하고, 어떤 이도 명령하지 않는다. 정부는 없고, 사회는 경탄할 정도로 그 자체로 진행하다. 절대적 정의가 있으며, 각자는 자기가 행해야할 것을 행하고, 각자에게 받아 마땅할 것은 받는다. 이것은 헌신(le dévouement)이며, 모두에게 각자의 희생(le sacrifice)이며, 공동체에게 모두의 희생이다. (135)
따라서 자기 류(類)에서 완전한 사회적 삶이 있다. 그럼에도 어느 누구도 인간이 곤충들보다 무한정하게 더 우월하지 않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그들에게 부족한가, 진화가 있다고 가정하고 우리가 매우 분명하게 시작된 진보를 인정함에도, 왜 진화는 멈췄고, 별안간 중지되었는가?
곤충의 사회적 삶에 무엇이 부족한가, 인간의 사회적 삶에 무엇이 발견되는가? 왜 동물, 즉 곤충은 순환 속에 돌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가? 왜냐하면 곤충이 행동하는 것은 자기로부터 이기 때문에, 곤충은 순환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여 더 멀리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마치 곤충이 어떤 부분을 진행하기 위해 자기 도약을 취했다고 할지라도, 또한 그 도약이 [곤충에게] 충분히 강하게 도약하게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마치 곤충이 도중에 멈추어야만 했던 것처럼 보이듯이 말이다.
이런 질문에 대답은 이러하다. 벌의 사회에서 분명하게 [전체]모든 것은 찬탄할 정도로 진행한다. 그러나 개체[불가분적인 것]은 고려되지 않는다. 그가 헌신하기 때문에 그가 기꺼이 희생하기 때문에, 개체에게서 원인(la cause)이 거의 중요하지 않고, 원인을 고려하지도 않는다. 불가분적 창의성(une initiative)의 그림자는 없다. 벌은 이런 창의성을 가지려 애쓰지(chercher) 않는다. 벌은 창의성을 잡을 수 없다. 만일 당신이 벌를 그 통속에서 나가게 한다면, 그 벌은 무능하고, 비지성적이 되어, 바보가 된다. 그런데, 벌은 자기 벌통 속에서 지성의 기적들을 펼친다. (135) [벩송은 이미 EC와 MR을 죽 구상하고 있었다.]
사회적 삶을 향해 방향이 이루어진 후에, 또는 도약(l’élan)을 취한 후에, 게다가 아마도 더 멀리가기 위한 필연적인 것인 충력을 받은 후에, 벌은 사회적 삶에 도달하여, 사회적 삶에 의해 매료된 것처럼 되었다. 그 사회적 삶은 수단이어야 하는데 목표로 남아있었다. [따라서] 벌은 최면상태로 있어야 했으며, 영속적인 몽유병상태에서처럼 있어야 했다. 벌은 항상 구성되어 있는 원[악순화] 속에 돌고 돈다. 결국(une fois pour toutes, 단 한번도) 원을 넘어설 수 없다. 부족한 것, 그것은 사회적 훈육(la discipline)[교육]이외에도 개별적 창의성(l’initiative)이다. (136)
[둘째 인간 사회: 인격성의 실현, 보살행.]
나는 매우 긴 우회의 길을 따라, 이르고자 한 점에 도달한다. 내가 믿기로는 그 깊이에는 인간 지성이라는 것과 인간 의지라는 것이, 즉 인간 본성의 일반이 있다는 것, 그것인 이중 요청이며, 경향성의 이원성, 행동의 이원성 자체이다. .. 이 이중성은 호흡의 현상 속에서 들숨(l’inspiration 영향받음)과 날숨(l’expiration, 영향줌)이라는 작동의 이중성이다. 경향이라는 이중성은 한편으로 사회적 질서에 복종하는 경향성에 의해 구성되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의 깊이에서 어떤 것을 덧붙이는 경향성에 의해 구성된다. .. 한편으로 교육 다른 한편으로 개별적 창의력이 있다. 여기에 이중 경향이 있고, 이것들 사이에서 행동하는 한에서 또한 재현하는 한에서 인간은 연속적으로 나누어가지고 있다. (136)
만일 우리가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만일 우리가 어느 정도 두 개의 다른 방향에서 밀고 나가는 것(une poussée, 추진력)을 체험함이 없이 생동하고 사유할 수 없다면, 나는 왜 언어, 즉 단순한 상태에서 재현을 움직이는 연속성의 재현을 다루는 언어가, 다른 두 방향으로 밀고 나갔던 두 항으로 분해되기에 이르렀는지를 당신들이 스스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한편으로 안정성의 방향으로 명사와 실사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운동성의 방향으로 속서, 성질사가 있다. (136)
언어는 과학과 철학에서 발명된 것(une chose)가 아니다. 언어는 사회적 삶의 도구이며, 언어는 인간들에 의해, 투쟁(la lutte) 속에서 서로 간에 소통하기 위해 서로 이용하기 위하여 발명되었다.인간들은 배고픔, 질병, 모든 종류의 적들 등등을 대항하여 그 투쟁을 지탱해야 한다. 언어는, 마치 인간적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두 방향성 속에 진행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두 방향 중 하나는 사회적 훈련[교육]이며 다른 하나는 개별적 창의성이다. (136-137)
인간이 인간과 소통할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우선 인간이 서로 이해하는 무엇에 관하여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이에게 공통관점을 표현하는 항이 있어야 한다. 이 항은 뽈 자끄 삐에르의 지각작용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동등하게 지각했던 것을 표현하는 항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제공한 정보를 나르는 것에 관하여 표현하는, 아직 성질로서 규정되지 않았더라도 모든 사람들로부터 수용되는 어떤 것을 표현하는, 항이 있어야 한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기여하는 정보를 표현하는 항이 필요하고, 그 인격(la personne)이 그 바탕[깊이]에서 제공할 무엇을 표현하는 항이 필요하다. 마치 사회에 복종하는 첫 항처럼 개별적 창의성처럼 있을 둘째 항도 필요하다. (137)
만일 가능한 한 단순한 문장을 ‘태양이 [구름에] 덮혀있다.’를 다루어 본다면, 거기에는 두 가지 사물이 있다. [한편] 비규정적 상태에서 태양은 덮혀있지도 빛나지도, 수평에도 정점에도, 뜨지도 지지도 않고 있는데 그 태양은 삐에르, 뽈, 장등의 지각작용과 독립적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내가 전하는 정보가 정확하게 재현하는 성질사가 있다. 나는 비규정적인 상태에서 개별적인 이런 저런 지각을 표현하지 않는 항에서, 그리고 이에 따라서 모든 지각들에 공통하는 무엇을 표현하는 항에서, 시작한다. 여기에서 자, 정보가 전달하는 대상의 표시가 있고, 그러면 나는 정보 그 자체를 대상에 결합하는데, [이는] 성질화 작업이다. 우리가 언어의 기원에서 발견하는 이분법적 경향성 속에서, 우리가 인간의 모든 다른 능력들 – 재현 전체, 행동 전체들에서 - 속에서 발견할 경향성이 있다. 두 부분으로 분할하려는 경향성에서 하나는 보수적(conservateur)라고 불리고, 보수주의 요소를 대신한다. 다른 하나는 진보적 요소이며 거의 혁명적이다. 이 두 요소는 명시적 상태가 아니라 경향성들의 상태이다. (137)
만일 이런 경향성이 재현적[대리적]이라면, 만일 이런 경향성이 우리 활동성의 특성자체이라면, 이런 활동성의 중요한 표출들 중의 하나인 언어는 이런 경향성의 이원성을 표출한다. 따라서 사회생활의 요청은,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고 또한 그것이[사회생활] 현존하고 있는 대로, 오직 인간만을 위해서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분법의 기원에서, 따라서 개념적 사유의 기원에서 발견한다. 그 이분법은 언어의 근본적 절차이다. (137-138) [이런 이분법은 들뢰즈의 파라독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서 동념즉괴(動念卽乖)와 같다.]
이런 형식 하에서 관념[이데아]는 어떤 측면들에서 파라독스(pardoxale)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믿기로, 인간을 동물들에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려면, 인간의 특성이라는 것이 우리가 막 말했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인간을 동물에서 구분하는 것, 인간을 말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138)
왜 동물이 말하지 않는가? 동물이 말투의 기관들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보다 더 잘, 찬탄할 만한 재능을 부여 받은 새들이 있다. 가끔 우리가 말했듯이, 동물이 일반 관념들을 갖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동물이 일반관념을 가졌다고 말하는 데까지 내가 가지 않을 것이다. .. (18)
동물은 일반관념들을 가지지 않았지만, 그것과 동등한 가치는 갖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그는 행동들을, 즉 사람들이 태도들이다로 부를 수 있을 것들 가지고 있다. 사냥개는 토끼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자고새 앞에서 동일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냥개는 토키의 일반 표상과 자고새의 일반 표상을 갖는다. 사냥개는 이 두 종류를 잘 구별한다. 어떤 개는 인간을 동물과 잘 구별하고, 하물며 어떤 동물을 개와 잘 구별한다.
따라서 동물은 일반관념들의 동등가를 갖는다. 동물은 일반관념들 표상[재현]하지 않으나, 이것들을 놀이하고 행동한다. 동물은 자기 속에 언어의 재료(l’étoffe)를 가졌다면, 이런 일반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언어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기 위하여 동물에게 무엇이 부족한가? 이것이 우리가 막 말했던 것인데, 만일 말하기 위하여 표상의 이분법적 경향이 있어야 한다면, 말하기 위해, 전반적 표상, 정신에 주어진 대로 전반적 직관은 두 요소로 나누어질(se scinder) 수 있어야 한다. 하나는 보수주의 요소이며, 사회에 복종하는 작통을 표현하며, 안정을 재현하고, 표상작업 속에서 비인격적인 것을 표상한다. 반대로 다른 하나는 변질하고 인격적이고 운동하는 표상작업 속에 있는 것[무엇]을 표현한다. (138-139)
만일 이분법적 경향성이 현존해야 한다면, 사람들은 경향이 현존하지 않은 거기에서 언어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한다. 사람들이 표상의 측면 또는 행위의 측면으로 고려하는 동물은 단선적(unilinéaire, 일직선)의 현존을 갖는다. 동물은 자기 앞으로 똑바로 가며, 만일 행동한다면 직선으로 간다. 동물은 우리처럼, 위기의 어떤 순간들에서 다른 운동들 사이에 주저하기 때문에 멈추는 네거리들(des carrefours)을 갖지 않는다. (139)
반면에 인간현존의 특성은 둘로 분할되는 직관의 경향성이 있다. 분열(scission)이 현존하는 거기에서 언어가 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분열이 현존한다면, 그것은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필요를 체험하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필요, 우리가 우리 사유를 우리에게 말하는 필요.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이런 필요를 체험한다면, 그것은 왜냐하면 무엇보다 사회적 삶의 근본적 요청을 우리 속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따라서 우리가 개념적 사유의 기원에 되돌아오는 것은 항상 거기에서 이다.
사회적 삶[사회생활]의 필연성이 있다. 내가 말을 끝내려는 여기에서, 개념은 가치가 없다고 내가 말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나는 과학적이 아니지만, 오히려 형이상학적 가치가 없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139)
틀림없이 우리는 이 강의에서 여러 번 걸쳐서 말했는데, 형이상학은 개념을 넘어서기(transcender) 위하여 노력을 해야만 한다.또한 형이상학은, 점점 더 압축되어 영원성이라 불릴 수 있는 것 속에서 지속이 압축되는 데까지, 지속의 직관에 되돌아가기를 힘쓰고 노력해야 한다. 형이상학은 거기에 있으며, 우리는 개념들의 매개에 의해서 와는 다르게 이런 직관을 가질 수 없다.개념들의 매개에 의해 통과하지 못했을 존재(un être)는, 우리가 막 행했던 분석 덕분에, 동물의 조건 속에 있을 것이며, 동물성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ne dépasserait). (139)
사유의 분할이라는 이분법을 부추기면서, 이에 따라서 반성으로 이끌고 반성을 창조했던 것은 개념(le concept)이다. 따라서 동물적 조건의 지성을 해방하는 것은 그 개념이다. 그것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러한 것은 자체로 현존하는 것에 도달하기 위하여[지속 속에 도달하기 위하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언어를 항상 지지점으로서 다루기를 각오하고서라도, 언어를 넘어서지[초월하지] 않아야 한다. (139-140)
이 마지막 관점에 관하여, 우리가 되돌아온 형이상학의 일반적 조건들에 관하여, 우리는 특히 철학사를 이용하면서 마지막 두 강의에서 되돌아 올 것이다. (140)
(14:02, 55VMC) (14:18, 55VME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