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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양산(394.9m)
기서 제일의 명산이자 부평고을의 진산이다. |
- 중구봉
부평군읍지에「중구봉(重九峰, 200M)은 부평부(부평초등학교) 서쪽 3리」라 했으니 계양산 서쪽, 학사봉 줄기가 비틀거리며 흘러 동쪽으로 돌아간 남쪽 봉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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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중구봉 북쪽기슭 아늑한 곳이 온수굴(溫水洞)로 고려 의종 19년(1165) 안남도호부 청사를 배꾸지(배곶이)에서 이전해 와서 안남청사가 새로 자리잡았던 곳이다. 부평향교 동쪽 계산천 하천옆 "온수동"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높이 17m 둘래 10m의 천년 묵은「느릅나무」가 있고, 그 나무 밑에 큰 암벽을 다듬어 세워 온수동천(溫水洞天) 임인(壬寅) 八월이라 음각되어 있으며 그 밑에 옹달 샘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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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400년전 돌림병이 부(府) 중에 만연되자 이 나무에서 6일 동안 괴상한 소리가 났다. 그 뒤부터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에 치성을 들여 병이 완쾌되었으므로 신목(神木)으로 받들어 왔다. 이 신목에 치성드리는 관습이 수 백년 간 이어져 약 30년 전 까지도 치성을 드렸었다.
"온수동천"이라 크게 읍각된 것은 온수동 마을입구(洞口)를 표시한 것이고 "임인八월"은 명종12년(1182) 8월로 청사가 이전되어 온지 17년 만에 세워진 것이 될 것이다. 나무는 동구 앞 행인의 쉼터인 관상목으로 심은 것으로 보이며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수령은 천년이 아닌 817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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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귀중한 사료가 근래 계산지구 도시개발로 사라지고 등걸만 남은 고목으로 변하여 개인주택지 안에 남아있다. "이규보"의 초정(草亭) 기록에 「오직 남산옆에 한 정자가 있다」라 함은 도호부청사가 "온수굴"에 있어 남산은 지금의 교육대학 됫산이 되며 냉천(冷泉) 밑에 "초정"이 있었고 또 그 밑 서쪽 산줄기 밑에 관사인 자오당(自娛堂)이 있었던 것이다.
"중구봉"이라 한 것은 이 곳 사람들이 9월 9일 중구절에 치성을 드린 산으로 겹친 九라서 생긴 이름이라고 전한다. 또한 자세히 살펴보면 크고 작은 봉우리가 아홉 개가 겹쳐 있어 생긴 이름인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중구봉 산줄기가 지금의 인천교육대학을 감싸고 동쪽으로 흘러 가회현(佳會峴, 佳峴里)에서 크게 뭉치어 요즘 사람들은 「가현산」으로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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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산 중턱에는 근방에서 손꼽히는 명당으로, 이곳에 효령대군의 손자인 영신군 (永新君) 이이(李怡)를 비롯하여 현부인 죽산박씨묘, 영신군의 둘째 아들 함원군(咸原君)과 현부인 평강채씨묘, 함원군의 큰아들 대호군 이제안과 혜인 장수황씨묘 등등 효령대군의 7대손까지 18분의 상이 아담하게 자리잡아 그 직계 종손이 지금도 묘하에 살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8일이면 효성·갈산동을 위시하여 전국에서 후손들 400여명이 세사참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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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이 옛 고지도인 「광여도(廣與圖)」에 보면 가회현(佳會峴)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부평군 서면 가현리가 1914년 3월 1일 부천군 부내면 가현리로 되었다가 1940년 4월 1일 인천부에 편입되어 인근 마을인 화전(化田)· 신대(新垈)· 작정(鵲井)과 합병하여 작전정(鵲田町)이 되었고, 해방 후 작전동으로 된 것이 동세확장으로 작전 2동에 속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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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마산을 철마산이라 하고
서구 가정동(개경주), 심곡동(기피울) 계양구 효성동(새별이) 사이에 걸쳐 있는 높이 226.7m의 산을 「철마산」 이라 부르고 있다. 이 철마산(鐵馬山)은 서쪽 골짜기에서 용마가 났기 때문에 용마골(龍馬谷)이라 불러왔고, 그 본디 이름은 천마산 (天馬山)이다. 그리고 이 산 중턱의 바위에는 꼭 말발자국처럼 움푹 움푹 패인 흔적들이 남아 있어 이 바위를 마제석 (馬蹄石)이라 하고 이 산을 마제봉(馬蹄峰)이라고도 부른다.
「천마산」이라 부르게 된 것은, 산 밑 개경주(가정동) 마을에는 고려말 합천이씨(陜川李氏)가 많이 살고 있었다. 조선조 초기에 명문이던 합천이씨 문중에서 뜻밖에도 장사 아기가 태어났다. 이 장사아기는 태어난 지 불과 한 이래 만에 걸음을 걸었고 이상하게도 양어깨에 날개까지 달려 방안을 날아 다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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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본 이기장사의 부모는 후환이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이런 장사(壯士)나 이인(異人)이 나면 나라에서 후한을 염려하여 그 집안 일족을 모두 죽여 없앴기 때문에 그 부모는 그것이 두려워 비록 마음이 아팠지만 장사아기를 다듬이돌로 눌러서 죽이게 되었다. 그러자 이 아기장사는 휙 날아서 천장에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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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부모는 눈물을 흘리며 그 아기장사를 기어코 붙잡아 내려서 다듬이돌로 누르니 아기장사는 숨을 껌벅거리며 한사코 발버둥을 치는데, 이때 뜻밖에도 별안간 용마가 나타나서 그 집주위를 맴돌며 구슬프게 울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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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가 아기장사가 숨이 끊어지자 그 용마도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로 이 산을 용마가 있던 산이라서「천마산(天馬山)」 이라 부르게 되었고 신성시하였다.
이러한「천마산」이 1916년 조선총독부의 세부칙량(稅賦則量) 때 철마산(鐵馬山)으로 도면에 표기하므로써 「천마산」이 「철마산」으로 둔갑된 것이다. 옛 고지도를 보면 이 철마산에 이웃한 추곶산과 원적산은 표기되어 있어도 천마산으로 표기한 것이 없으니 다만 구전되어 온 산이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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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 칙량기사는 마을사람들에게 산 이름을 물으니「천마산」이라 한 것을 철마산으로 잘못 듣고 그대로 적어 넣어 오늘의 모든 지도에 철마산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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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요즈음 발행한 인천시 도면에 부평구의 산곡·청천동과 서구의 가좌· 석남동 사이에 있는 원적산을 철마산으로 표기하고 또, 부평구 일신동과 남동구 만수동 사이에 있는 금마산 (錦馬山)을 철마산으로 표기하여 부평지역에 철마산을 3개나 만들어 놓아 이를 구별하기 위해 "북철마산", "중철마산","남철마산"이란 산이름을 붙이게 된 것은 한참 모두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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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명성으로 믿음을 찾는 IMF시대에 작으나마 내고장의 산이름이 왜곡되어 문화유산이 바르게 전승될 수 없다면 큰 잘못이며 이를 방치한다면 그 산신령의 노여움 또한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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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적산도 철마산이라 했고
원적산(165m)은 남으로는 장고개(場峴)이며 북으로는 안아지고개(九十峴) 사이의 부평구와 서구를 경계한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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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산은 우리나라 산경표에 원적(元積)으로 명시되었는데 원(怨)이 쌓여 원적(怨積)이 변한 것이라고도 전한다. 중종 때 경인운하를 팔 적에 원테이고개의 암벽 때문에 실패하고 북쪽의 안아지고개를 또 파다가 역시 실패하여 그 사이에 있는 산은 원한이 쌓인 고로 「원적」이라했다고 전하는 것은 근거가 없으니 지나친 과장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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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5년경 외래인이 산곡동에 살면서 이 산을 철마산으로 하고 관통도로를 개설하자고 발의했던 것이 훗날 「철마산관통도로」가 생겨서 "원적산"이 "철마산"으로 둔갑되고, 따라서「천마로」「철마산터널」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되었다. 이 원적산(元積山,元寂山)은 모든 고서(고지도)에 고려때 부터 실려있는 오래된 산이름인데 뚜렷한 명분도 없이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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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고종 20년(1883) 박희방 부사 때 축조한 중심성의 「경명문」 문루인 공해루(控海樓)에 현액했던 「부평八경」, 시문속의 계양고성(桂陽孤城), 원적모우(元積暮雨)의 「원적」 에 대한 해설까지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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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마산 관통도로
부평로 신일예식장 앞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산곡동으로 가는 "천마로"를 따라 명신여고 앞에서 서구 가좌동 공무원아파트 앞으로 넘어 가는 고개길을 "철마산관통도로"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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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10월 2일 개통된 이 새로운 고개길은 그 당시 시비 24,500만원을 투입하여 1969년에 착공한지 3년여에 걸쳐 완공하므로써, 부평과 인천 구시가지 간의 거리를 16㎞에서 5㎞로 줄이고 또, 주파시간 30분에서 10분으로 단축했으며 그 주변은 주택단지로 조성되어 토지의 이용도를 높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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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땅이름학회' 이형석 회장은 인천의 땅이름은 가는 곳 마다 오류투성이라고 지적했듯이 전통성 없는 이름을 만들어 붙여 놓아 후학자들을 어리둥절케 하고 있으니 이 철마산 역시 예외는 아니다. 왜 철마산 관통도로라 했는가?
이는 산곡동 주민들이 인천구시내를 가자면 가까운 장고개는 미군44공병대가 자리잡아 통행이 금지되어 안아지고개나 원테이고개로 빙 빙 돌아 다녀야 했으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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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5년경 외지에서 이사 온 산곡동의 某인사가 이 산을 뚫어 인천과의 직통도로를 내면 산곡동은 물론 부평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에서 자기 나름대로「철마산」이라 하고 관통도로의 개설을 인천시에 건의하고 여론을 환기시켰으니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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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쯤되니 인천시당국은 현지를 수 차 답사하여 그 타당성은 인정되나 원래 높은 산을 뚫어야 하는 난공사라 예산이 허용치 않아 엄두를 못내고 "철마산 관통도로"란 이름만 매년 문서상으로만 오르내리기를 15년 동안을 끌어 오다가 1969년에 이를 착공하게 되어, 그 공사명칭을 온갖 문서에 적어있는 "철마산 관통도로"로 못을 박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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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고향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자세히 살펴 지명만은 바로 쓰도록 할 것이지 어쩌자고 아기를 낳아 그 아기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남의 장단에 모두 춤만 춘 꼴이 되었으니 한심한 일이다.
이 산은 고려 때 문헌에 기록된 원적산(元積山,元寂山 165m)으로 많은 유적과 일화를 간직하고 오늘에 이어져 왔는데 근래에 와서 무성의한 사람의 한마디 말로 철마산으로 둔갑한 꼴이 되었고 따라서 "천마로"니 "철마산관통도로"가 덧붙어 무려 40여 년 간을 불러와서 모두의 머릿 속에 박혀있으니 "원적산"으로 되찾아 부르기를 어렵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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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다 요즘은 한술 더 떠 "철마산터널"이 새로 또 생긴다 하니 기왕이면 "원적산터널" 로 하고 "철마산관통도로"는 원적고개(元積峴)로「천마로」는「원적로」 또는「산곡로」로 해서 원적산을 되찾아 주어야 원적산신의 노여움이 풀릴 것으로 보인다. 이 산 정상에는 서구청에서 세운 팔각정 현판에 역시 철마정 (鐵馬亭)이라 현액(懸額)되어 있으니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생각은 아니하고 철마산, 철마산관통도로, 철마산터널, 철마정 등이 누적되어가는 오류는 점 점 바로잡기가 어렵게 되고 있다.
이 원적산의 동족 작은 봉우리는 원적산의 지봉으로 원래 이름없는 무명의 산인데 청천동 노인들의 가까운 등산로가 되었다. 이 노인들이 모여 등산은 장수의 비결이니 우리 이 산을 장수산(長壽山)으로 이름지어 불러 왔는데 부평구는 몇 해 전에 이곳에 팔각정을 지어 이를 장수정(長壽亭)이라 현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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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없는 산이름을 새로 만들어 부르고 있으니 시비를 가릴 것이 못되며 "원적산"을 "철마산"으로 고쳐 부르는 것과는 전혀 그 뜻이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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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마산도 철마산이라 했다
소래산 북쪽 줄기의 부천의 앞 산은 소가 누운 것과 같다 하여 와우산(臥牛山)이라 했는데 왜정 때 이곳 작은 봉우리에 일본사람들이 신사(神社)를 세우고 산이름을 성주산(聖柱山)이라 고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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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산줄기가 동서로 길게 뻗어 와우고개와 하우고개를 이루고 남쪽은 마니골(장수동) 뒷산인 거마산을 이루웠으며 북쪽줄기는 구산 (龜山)을 이루어서 그 기슭에 구산동마을이 생겼다. 이 산은 옛 부평도호부의 안산이므로 이를 드높여 향안산 (香案山)으로 옛 지도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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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거마산" 서쪽줄기는 비루고개(星峴)을 거쳐 금마산(201m)에 이루고, "금마산"의 주맥은 서쪽으로 "주안산"인 만월산에 이어지고, 또 북쪽 줄기는 부개봉을 이루어 서쪽으로 길게 뻗어서 그 남쪽은 「큰골」을 이루어서 고려 때 수도하던 개국사(開國寺)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시립공동묘지」가 되고 있다.
이 "금마산"과 부개봉은 옛 지도에도 없어 이를 찾느라 한참 고생을 했는데 "금마산"은 「국립지리원」발행, 지형도에 나와 있고 또 본현의 대인걸 양성지(梁誠之)가 발행한 「동국지도」에 검마산으로 기재되어 있다. 부개산(부개봉)은 광복 후 부개동이 생기고서부터 마을 앞산이라 부르게 된 산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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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금마산"을 1994년 인천직할시가 발행한 관할도에 철마산(鐵馬山)으로 표기되어 새로운 "철마산"이 또 생겨 이곳에 "철마산"이 셋이 되어 「남철마산」이란 말이 나오게 까지 되었다. 한 고을에 같은 철마산을 3개씩 방치할 것이 아니라 "북철마산"은 "천마산(天馬山)"으로 고쳐 주고 "중철마산"은 "원적산(元積山)"으로 ,"남철마산"은 "금마산(錦馬山)"으로 바로잡아 주어야 될 것이다.
동국지도(東國地圖)는 세조 9년(1463) 왕명으로 집현전 직제학인 "양성지"가 편찬한 것이다. 그러기에 앞서 "양석지"는 단종 원년(1453)에 조선도도(朝鮮道圖)를 편찬했고 홍문관 대제학으로 있을 때(1481) 여지승람 (與地勝覽) 편찬에 참여한 전국 지리학에 탁월한 식견을 가진 인걸로 성종 2년(1471) 「좌리공신」,「남원군」에 봉해진 문양공(文襄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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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분의 후손들이 서구 금곡동 좌동마을에 누 대 동안 집단 거주하고 있으며 좌동 마을뒷산인 운학산 기슭에 「대포서원(大浦書院)」을 세워 김포, 통진 일대의 유림들이 문양공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제향을 받들고 있다.
- 원통산→주안산→만월산으로 바꾸었다
남동구 간석동에 있는 만월산(187.1m)는 옛 인천부 주안면(朱雁面)에 소재한 주안산(朱雁山)이다. 왜 주안산이라 했는가? 이 산의 흙과 돌이 모두 붉은 빛이라 주(朱)자와 산의 형국이 기러기가 나는 것 같다하여 안(雁)자를 붙이어 주안산이라 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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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1861년에 간행된 고산자의「대동여지도」에는 한문 표기에「雁을 岸」 으로 바뀌어「朱岸山」으로 되어 있다. 이 주안산을 주산으로 한 지봉이 서해바닷가를 휘돌아 해안에 접하고 있었으니 朱岸山이라 함도 그리 잘못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元積山을 元寂山으로 옛 지도에 표기되었듯이 우리가 불러 온 모든 이름은 우리의 낱말에서 비롯되어 온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니 한자를 논할 필요성은 없다고 본다.
이 만월산은 한일합방 후 인천지방의 지지조사에 의하면 「인천부 주안면 원통산(元通山, 上十井里 東尾)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1986년에 발간된「한국지명 총람」에 「원통산-선유산, 간석동과 만수동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87m, 신선이 놀았다고 함」이라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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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부터 부평사람들은 주안산으로 부르지 않고 이산을「원통산」 으로 불러 왔으며「원통이 고개」는 원통산에 있는 고개로 지금의 시립묘지 입구인 십정동에서 약사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원테이 고개"라고 불러왔는데, 지금은 그 서쪽에 큰 도로가 뚫리어 이를 "원테이고개"로 모두 부르고 진짜 "원테이고개"는 이름도 빼앗기고 약사사의 벚꽃 상춘객이나 다니는 한적한 소로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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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 원통산을 선유산이라 하여 신선이 놀았다고 하나 산 전체를 살펴보아도 그러한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이 곳의 옛 仁川郡 주안면(朱雁面)은 1914년 3월 1일에 시행한 부·군·읍·면 폐합 때 仁川郡 多所面과 합병하여 머리글자를 따서 多朱面이 되어 새로 생긴 부천군에 예속되었다. 1899년 9월18일 경인철도가 개통되자 주안역 (朱安驛)이 지금의 간석역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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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이름 주안면, 주안산의 주(朱)자와 바로 밑에 임진외란때 고전장인 안대평(安垈坪)의 안(安)자를 따서 「주안」이라 이름지었고 이 역이 그 후 주안염전이 활발해 지자 충훈리로 이전하여 주안역 그대로 불러왔다. 경인전철이 복선화되고 옛 주안면 근방이 도시화되어 옛 주안역 자리에 간석역이 다시 생겼다.
이 주안산이 원통산, 선유산 등으로 불러왔는데 이 산 중턱에 위치한 약사사(藥師寺)의 창건 내력을 살펴보면, 「東方滿月世界 藥師如來 淨瑠璃國」이라는 불국(佛國)을 건설하여 일체 중생의 질병을 치료할 것을 서원하고 1932년 금강산「유점사」에서 수행하던 한보월(韓普月 : 현주지 陵海스님의 부친)스님과 은사이신 晦明스님께서 득도하여 중생교화처를 찾던 중 우연히 꿈에 현몽하셨던 산 모습과 똑같은 곳을 발견하고 본래 산이름인 주안산, 원통산을 「滿月山」이라 고치고 약사암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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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약사사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면 큰 바위밑에 옛 절터가 있는데 이 곳은 고려말기에 창건한 사찰로 사세번창하여 늘 백명의 스님들이 수행하여 백인사(百人寺) 라 불러왔으며 이를 주안사(朱雁寺)로 개칭했는데 조선조 성종때 억불숭유정책에 희생의 비운을 맞아 승려는 뿔뿔이 흩어지고 절은 페허가 되어 사라졌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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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백인사 위의 바위를 「부적바위」라 불러오고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일본 중이 주안산의 정기를 죽이려고 이 바위에 부적을 붙였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이 부적바위 밑에 주안사 옛 절터가 있고 주안산 서쪽기슭에 향기나는「돌우물」이 있어 이물은 약수로 안질, 종기에 특효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서 이 소문이 조정에 알려져 세종 26년(1444)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물맛, 향기, 약효등을 세밀하게 조사했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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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주안사 절터에도 샘물이 있고 지금 약사사 앞의 돌우물은 샘물이 끊어져 페천이 된 것이 있고 간석초등학교 북쪽에 있는 샘물은 옛날 용이 올라간 곳이라 용천(龍泉)이라 불러와서 수많은 사람들이 물을 길어다 먹고 있다. 어느 것이 옛 돌우물인지 좀 더 연구를 거듭하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주안산"을 부평사람들만이 "원통산"으로 불러 온 것이 아니라 옛고지도를 살펴본 즉, 거의 모두가 "원통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선 영조 36년(1760)에 발간된「여지도서」그 후의「광여도」,「지승」,「해동지도」,「경기지」 ,「기전읍지」와 근세인 「부평부지도」(1872), 「부평군읍지」(1899)에 모두 원통산(元通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김정호가 간행한 「대동여지도」(1861)와 철종 때 간행된 「청구도」(靑丘:옛날 중국에서 부른 우리나라의 별칭)에만 주안산(朱岸山)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원래의 산 이름은 원통산(元通山)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
- 추곶산 봉수대가 있던 산이다
부평구 서쪽 15리(가정동)에 위치한 추곶산(杻串山) 정상에 봉수대(烽燧臺)가 설치되어 남쪽의 성산(城山) 봉수대 북쪽의 백석산(白石山) 봉수대와 서로 상응하여 통신연락을 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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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문학산)과 백석산(검단)은 다같이 이곳에서 25리 상거에 있다. 천마산과 경명현 옆에 있는 학사봉 사이에 있는 추곳산(260m)은 싸리나무가 무성하게 자생하여 「싸리뫼」라 했는데 산모양이 꼬챙이 같이 생겨서 추곶산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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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추곶산 봉수대가 설치된 것은 세종 5년(1423) 부평도호부 때 이고 이것이 조선조 말기까지 지속되었는데 갑오개혁(1894)으로 전신주가 세워지므로 471년만에 없어졌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후 외침대비의 강화책으로 고잔(경서동)의 금산과 인천 올림포스호텔 자리에 봉수대를 증설하여 주로 외양선 침범에 대비했던 것이다. 이 봉수는 서울 남산에 중앙봉수대가 있어 전국의 통신망을 총괄했는데 거준(炬準)이란 다섯 개의 봉화통(烽火筒)이 있었다.
제1거준은 함경도「경흥」에 이르고, 제2거준은 경상도「동래」의「다대포」에 이르고, 제3거준은 평안도 「만포진」에 이르고, 제4거준은 평안도「의주」에 이르고, 제5거준은 전라도「순천」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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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중앙 봉수대를 기점으로 전국 8도 430개의 봉수대를 총괄했는데 이 추곶봉수대는 제5거준에 속하였다. 봉수대는 산마루 높은 곳에 22∼30리 상거로 돌이나 흙을 쌓아 만들어 수비병을 두고 축대 위에다 결고(結皐)를 설치하여 결고 끝에 통을 걸어놓고 일이 생기면 통에다 불을 피워 결고를 올려 서로 신호를 했는데 낮에는 연기로 불을 피워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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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고란 긴나무에 돌을 매달아 그 무게로 물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 나무틀로 그 신호방법은 다음과 같다. 평상시에는 한번 들고 적을 보면 두 번 든다. 적이 범경하면 네 번 든다. 적과 교전하면 다섯 번을 든다 이와 같이 봉수간에 서로 상응하여 서울 남산의 중앙봉수대로 연락한다. 그래서 봉수대에는 모두 다섯 개의 봉화통이 설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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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봉수대 밑에 마을을 봉우재(烽火村)라 했으니 가정동의「봉우재」또 검단의 백선산 밑 오류동의「봉우재」가 그러하다. 갑오개혁으로 전국의 봉화대가 없어진 지 이미 100 여 년이 넘어 자취를 감추었으나, 그 봉화통 모형이 남산(서울) 정상에 재현되어 있다.
추곶산 봉수대는 전라도 순천에 이르는 제5거준에 속하여 그 연락망은 다음과 같다. 경도 목멱산(京都,木覓山,南山) 제5봉(烽)에서 시발하여 양천·개화산 → 김포·북성산 → 통진·남산 → 강화·송악산 → 하음성산 → 교동·화개산 → 강산 → 진강산 → 대모성산 → 통진 수안성산 → 백석산 → 부평 추곶산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인천 성산 → 안산의 오질이섬 → 남양·해운산 → 남쪽으로 염불산 동쪽으로 수원, 흥천산에 이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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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성산 경인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없어진 산이다
광무 3년(1899) 11월 경기도가 발행한「부평군 읍지」부도에 령성산(靈成山)과 당산(堂山)이 나온다.「靈成山 在府東南 大野中 四里許 右有大石曰 舡巖 左有三江曰 長堤」즉 (영성산은 부평읍 동남쪽 넓은 벌판 가운데 4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오른편에 큰 돌-바위-를 '배바위'라 했고 왼편에는 삼강이 있어 이르기를 장제라 했다)고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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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바위(홍암)은 항상 고여있는 물 가운데 있는 바위로 중간에 구멍이 뚫여있어 이곳 사람들은 이를 「배다리」라 불러왔다. 그 후 이 배다리는 1915년 경 신도균(申道均) 부내면장댁을 수축할 때 헐어다 써서 바위 뿌리만 논바닥섶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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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강"이라 함은 청천, 원통천, 석천 등 세 곳의 냇물이 모인 것으로 이를 "장제"라 함은 장도못(長陶池)를 말함인데 이는 1923년 부평수리조합 몽리시설 공사 때 사라지고 말았다. 이 "영성산"은 삼산동의 신촌인 "영성미"마을의 뒷산으로, 표고 100m정도의 얕은 산으로 그 모양이 일본의 「부사산」같은 형국으로 그 산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갈산(葛山, 부평정수장)과 부평공단 안의 없어진 김산(金山) 에 이어진 벌판 가운데 있었던 삼산(三山)이었다.
이 영성산이 1942년 경 현 경인고속도로의 전신인 소위 국방도로를 개설할 때 이 산을 헐어다 도로를 만들어 산 밑둥인 뿌리만 남고 없어졌다. 이 영섬미를 마을 앞의 부서진 바위가 벼락을 맞았다고 해서「벼락바위」로 불러왔는데, 이 마을의 주산인 "영성산"도 일본군의 극성에 이 또한 날벼락을 맞고 없어진 꼴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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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이 한적한 몇 집 없던 시골마을도 어찌나 많이 모여 사는 지 자세히 살펴 보아야 뿌리만 남은 산 밑둥을 찾을 수 있다. 이 영성산 서북쪽 벌판을「뒤뜰」로 불러왔는데, 이 곳에 인천시가 북부권 청과물 도매시장이 건설 중에 있어 이것이 완공되면 영성산은 그 위치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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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포천은 김포(고촌)하천이고
굴포천에 대하여는 수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으나 굴포천의 이름만을 다루고저 한다. 지금의 시립공동묘지 깊숙히 금마산(잘못된 철마산)밑 칠성약수터에서 발원된 개울물이 북으로 흘러 부평시내와 갈산신도시를 거쳐 동으로 흐르다가 목수통에서 북으로 계속 흘러 한강에 입류된 27㎞ 모두를 굴포천이라 부르고 있음은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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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이 굴포천의 내력을 간추려보면 「만기요람」(萬機要覽, 1809)에 고려 고종때 명신 "최이(崔怡)"가 도랑을 파서 서해로 통하려고 사람을 보내 안남(부평)의 지형을 살펴보니 지세가 험악하여 될 수 없으므로 취소했는데 그 후 300년이 지난 조선조 중종 때 권신 "김안노(金安老)"가 굴천작업을 시작하여 한강에서 부평뜰은 완공됐으나 원테이고개(元通峴)을 뚫지 못하며 실패했다고 전한다. 이것이 굴포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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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 인하여 굴포(掘浦)란 이름이 생겼는데 1486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김포현 편에 "굴포"는 김포현 동쪽 17리에 있다. 김포국도는 굴포천에 돌다리를 놓고 "굴포교"라 했는데 흔히 부르기를 "팽개다리"라 불러왔음은 "판개(堀浦)다리"의 변음이다.
또「부평군읍지」산천조에 "직포(直浦)는 부평부 동쪽 10리에 있으며 적유산(狄踰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북포로 들어갔다." "적유산"은 오랑캐가 머물렀던 산으로 병자호란 때 청병이 머물렀다고 해서 부르게 된 산으로 계양산 북쪽의 금계봉(金鷄峯)이 될 것이고, 한다리개는 부평부 동쪽7리에 있으며 원출(源出)이 원적산(元積山)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직포를 거쳐 김포군의 굴포로 해서 범나루(法津)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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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종합해 보면 팽개다리(堀浦橋) 에서 북쪽 한강까지를 굴포(堀浦)라 했고 직포는 팽개다리에서 한다리(大橋)를 거쳐 목숙교( 橋)까지 사이에 원형이 이리저리 구부러진 개울을 곧게 파서 "직포"란 이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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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직포"에 고종 때 한다리(大橋)를 가설한 후 이 곳의 "직포천"을 "한다리개(大橋川)"이라 불러왔다. 그럼으로써 한다리개(大橋川)은 한다리 근방의 하천 이름이 되기도 하고 "직포" 전체의 이름으로도 불러와서 직포 또는 직포천은 역사기록에만 남아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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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문화원- | |
첫댓글 제가 잘 못 알고 있는지요? 계양산 395m로, 아님 오타가 났는지... 고생하셨습니다
들풀님께 들키고 말앗네 ㅋㅋ 정확히 394.9m로 알고 있는데 맞는지 모르겠어요. 다시 확인 해 보고 제가 쓴 글이 아니고 부평문화원에서 스크랲 해 온 글이라 수정하지 않고 곧바로 올렸습니다.
수정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