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4월 6일 저녁,
르완다의 하비야리마나 대통령과 부룬디이 임시 대통령이 탑승한 르완다 대통령 전용기가
르와다의 수도인 키갈리의 공향에서 두 대의 미사일을 맞고 격추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탄자니아에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던 대통령 일행 전원이 사망했다
미사일은 공항 바로 바깥에서 쏘아올려졌다.
누가 왜 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의 전용 제트기를 격추시켰는지는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각기 다른 동기를 가진 몇 개의 그룹에 혐의를 둘 수 있으리라.
살해범이 누구냐에 상관없이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은
제트기가 격추된 지 한 시간 만에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분명 미리 세세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준비된 그들의 계획은
후투족 총리와 다른 온건파 후투족 정치인들 및 투치족을 살해하는 것이었다
극단주의자들은 후투족 온건파를 제거하고 정권과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했으며,
르완다에 잔존하는 100만의 투치족을 절멸시키고자 했다.
투치족 살해에 앞장선 자들은 총을 든 후투족 군대의 극단주의자들이었지만,
그들은 곧 민간인들을 모아 훈련시키고 무기를 지급했으며,
도로를 봉쇄한 후 투치족 신분이 드러난 사람들을 살해했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바퀴벌레(후투족이 투치족을 일컫는말)'를 모두 없애자고 촉구했고,
투치족에게는 안전한 장소로 모이라고 한 후 모두 살해하고 생존자의 행방을 추적했다.
마침내 이 학살사건에 대한 국제 사회의 항의가 표면화되자 정부와 라디오 방송국은
선전 문구를 '바퀴벌레를 모두 쓸어버리자'는 호소에서
'적으로부터 르완다인 스스로를 보호하자'는 말로 슬그머니 바꿔버렸다.
학살을 막으려고 한 후투족 온건파 정부관료들은 협박이나 파면, 또는 살해를 당했다.
한 곳에서 수백 명 내지 수천 명이죽어나가는 대규모의 학살은 주로 투치족이
교회나 학교, 병원, 관공서 등 비교적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장소에 모여 있을 때 발생했다.
많은 수의 후투족 시민이 투치족 살해에 가담했는데,
들리는 말에 다루면 후투족 시민의 3분의 1이 연루되었다고도 하고, 그보다는 적은 수였다고도 한다.
각 지역마다 처음에는 총을 든 군대가 투치족 살해에 앞장섰지만
그 다음에는 머셰티와 곤봉 등 재래식 무기가 등장했다.
그리하여 희생자의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고 유방이 도려내지며,
어린아이가 우물에 처박히고, 강간이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다.
후투족 극단주의 정부가 학살을 조직하고 주로 후투족 시민들이 자행했지만,
중립적인 역할을 하리라고 기ㄷ되었던 단체들 조차 이를 묵인하거나 동조함으로써 학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많은 가톨릭지도자들은 투치족을 보호하는 데 실패했고,
오히려 그들을 한데 모이게 해서 살인자들에게 넘겨주기까지 했다.
또한 르완다에는 소규모의 UN 평화유지군이 주둔해 있었지만
학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철군 명령이 내려졌으며,
프랑스 정부에서 파견한 평화유지군은 후투족 정부의 편에 섰다.
그리고 미국정부는 개입하기를 거부했다. UN과 프랑스 정부, 미국 정부 등은
'카오스;, '혼란 상황,' '부족 갈등' 등과 같은 말을 사용함으로써
마치 이 사건이 아프리카에 흔히 있는 종족 간의 싸움이라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며,
르완다 정부가 배후에서 치밀하게 학살을 주도했다는 증거를 무시해버렸다.
6주 사이에 르완다에 남아 있는 투치족의 4분의 3이자
르완다 전체 인구의 11퍼세트에 해당하는 80만 투치족이 살해되었다.
학살이 시작된 다음날부터 투치족 반군인 르완다 애국전선(RPF)이 반정부 군사 행동에 돌입했다.
RPF군이 도착한 지역마다 대량 학살이 중단되었으며, 결국 1994년 7월 18일, RPF군은 완전한 승리를 선언했다.
RPF군은 야만적인 행동을 하거나 민간인을 강제 징집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지만 소규모의 보복 살해을 수행했다.
(보복 살해의 희생자는 '겨우' 2만 5,000명에서 6만명으로 추정된다.)
RPF군이 승리를 거둔 후 200만 르완다인(주로 후투족)이 인접 국가 (특히 콩고, 탄자니아)로 망명을 떠난 반면,
과거에 이웃나라로 망명한 75만의 르완다인(주로 투치족)이 고국으로 돌아왔다.(사진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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