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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사전 3
♣ 다가[多可]성질이 꼼꼼하지 못해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서 봐 주기 일쑤라는 말이다. 문선(文選)에 나오는 진(晉) 나라 혜강(嵇康)의 여산거원절교서(與山巨源絶交書)에 “두루 달통하신 당신께서는 좋게 봐 주는 것은 많은 반면 괴이쩍게 여기는 경우는 드물기만 하다.[足下傍通 多可而少怪]”라는 내용이 있다.
♣ 다간요비궁[多艱要匪躬]국가에 대한 충성심에서 곤경을 허다히 겪었다는 말이다. 주역(周易) 건괘(蹇卦) 육이효(六二爻)에 “왕의 신하가 절뚝거리는 것은 그 신하 개인의 일 때문이 아니다.[王臣蹇蹇 匪躬之故]”라는 말이 있다.
♣ 다경[茶經]서명(書名). 당(唐) 나라 육우(陸羽)가 찬하였다. 이 책이 차(茶)에 대한 일을 기록한 서책(書冊) 중에 가장 우월하다고 한다.
♣ 다경루[多景樓]다경루는 평양부 서쪽 9리 양명포(揚命浦) 위에 있는데, 대안(對岸)에 돌을 쌓고 그 위에 다락을 지었는데, 그 밑으로 통할 만하다.
♣ 다구[茶甌]차사발.
♣ 다기[多岐]여러 갈래
♣ 다기망양[多岐亡羊]달아난 양을 찾으려다가 길이 여러 갈래로 나서 찾지 못하였다는 뜻. 학문도 너무 다방면에 걸치면 도리어 진리를 얻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한다. 너무 방침이 많아 갈 바를 모를 때도 쓰인다.
♣ 다농[茶農]청 나라의 시인이며 화가인 장심(張深)의 호. 자는 숙연(叔淵)이고 별호는 낭객(浪客)임. 추사가 일찍이 다농에게 부탁하여 난설의 부춘매은도(富春梅隱圖)를 그리게 한 일이 있음.
♣ 다다익변[多多益辨]패공은 뒤에 천하를 통일한 다음 한신에게 “나는 군사를 몇 명이나 거느릴 수 있는가?" 하고 묻자, “10만 명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패공은 다시 “장군은 몇 명이나 거느릴 수 있는가?" 하자, 한신은 “저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하였다. 《漢書 韓信傳》
♣ 다다익선[多多益善]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음. 양이나 수가 많을수록 좋음
♣ 다다익판[多多益辦]한(漢) 나라의 명장 한신(韓信)을 비유한 말이다. 한 고조(漢高祖)가 한신에게 얼마의 군사를 거느릴 능력이 있느냐고 묻자,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多多益辦]’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고도 한다. 《史記 淮陰侯列傳》
♣ 다문박식[多聞博識]많이 듣고 넓게 공부함. 견문이 넓고 학식이 많음을 말한다.
♣ 다반사[茶飯事]옛날에 밥을 먹은 다음 차를 한 잔 마시곤 했는데, 특히 불가에서는 차와 선(禪)을 한 맥락으로 보고 다선일여(茶禪一如)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차 마시는 정신에 선이 있고, 선(禪)하는 과정에 다(茶)의 도(道)가 통한다는 뜻. 즉 차 한 잔 마시고 밥 한 그릇 먹는 그 속에 삼매(三昧)의 도가 들어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불가에서는 다반사는 평상적인 일 속에서 도를 깨우치는 불심으로 향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것처럼 흔히 있는 일을 말함.
♣ 다방[多方]여러 가지. 여러 개. 많은 의미.
♣ 다병고인소[多病故人疏]당(唐) 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의 세모귀남산(歲暮歸南山) 시에 “재주 없으니 명군도 버리고, 병이 많으니 친구도 소원해진다.[不才明主棄 多病故人疏] “하였다.
♣ 다병상여[多病相如]한(漢) 나라의 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는 본디 소갈증(消渴症)을 앓았는데, 그의 전(傳)에 의하면 “장경(長卿)은 본디 벼슬하기를 싫어했다.”고 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 다병추풍낙 군래위안전[多病秋風落 君來慰眼前]병이 나으면 벗들이 연회를 베풀고 초대하거나 물품을 보내 축하의 뜻을 표하는 풍습이 있었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가을 바람에 낙엽 질 때 병도 하 많은 몸, 그대가 눈앞에 와 나를 위로해 주누나.[多病秋風落 君來慰眼前]”라는 비슷한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8 示姪佐》
♣ 다보수경[茶譜水經]차[茶]를 달일 맛 좋은 물을 기록한 책을 말한다.
♣ 다사다난[多事多難]여러 가지로 많은 일이 많은데가 어려움도 많은 것.
♣ 다사다망[多事多忙]일이 많아 몹시 바쁜 것.
♣ 다생[多生]불교의 용어로, 다생은 중생이 선과 악의 업을 만들어 윤회의 고통을 받느라 태어나고 죽는 일이 반복되는 것을 말한다.
♣ 다수다남[多壽多男]요 임금 때에 화(華) 땅의 봉인(封人)이 요 임금에게 수(壽)ㆍ부(富)ㆍ다남자(多男子) 세 가지를 기원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다시[茶時]대관(臺官)들이 일없이 모였다가 해산하던 일을 말하다. 다시(茶時)는 다례(茶禮)의 뜻을 딴 것이다. 이 제도는 고려 및 조선 초기에 행하던 것으로, 당시 언책(言責) 이외에 별다른 임무가 부여되지 않았던 대간(臺諫)들은 특별한 공사(公事)가 없을 경우, 으레 경복궁문 오른편 곡장(曲墻)에 설치된 즉 성상소(城上所)에서 교대로 하루 한 차례씩 모여서 차(茶)를 마시고 산회했던 것이다.
♣ 다언계[多言戒]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진다는 격언으로 도덕경(道德經) 5장에 “多言數窮 不如守中”이라 하였다.
♣ 다언삭궁[多言數窮]말이 많으면 궁지에 몰리는 때가 많다는 뜻이다. 《道德經 5章》
♣ 다언해도[多言害道]심경(心經) 권3에 “내가 양시(楊時)에게 늘 저서(著書)하는 일을 좋아하지 말라고 일렀나니, 저서하기를 좋아하면 말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지면 도를 해치기[多言則害道] 때문이었다.”라는 정이천(程伊川)의 말이 실려 있다.
♣ 다완[茶椀]다완은 차를 마시는 사발을 말한다.
♣ 다원[茶院]아내의 친정이 있는 곳. 지명.
♣ 다재다병[多才多病]재주가 많은 사람은 흔히 몸이 약하며 잔병이 많음
♣ 다절위간[多節爲艮]간괘(艮卦)는 “☶이므로 마디가 많다.”는 것이다.
♣ 다정[茶亭]국왕 또는 중국 사신이 지날 때에, 이를 환영하는 뜻으로 베푸는 작은 채붕(綵棚; 여러 가지 색의 실ㆍ종이ㆍ헝겊으로 꾸민 시렁). 시렁 앞에 사람ㆍ짐승 따위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들어 늘어 세우고 뒤에는 큰 물통을 세워 놓고 거기에 물을 대면 앞에 세운 형상들의 입속으로부터 물이 흘러 나와 높이 솟는다. 본디 채붕의 설치에는 나례(儺禮)를 아울러 행하게 되어 있으므로, 나례를 생략하는 이 다정(茶亭)을 설행하여 비용을 절약하기도 하였다.
♣ 다정첨야[多情沾惹]송(宋) 이청조(李淸照)의 ‘원왕손(怨王孫)’이란 사(詞)에, “정이 많아서 자꾸만 그리움이 인다네, 차마 잊지 못해라. 다시 또 한식이라네.” 하였다.
♣ 다조[茶竈]경포대 부근에 신선[실은 신라 화랑]들이 차를 달이던 아궁이가 있었다는 전설.
♣ 다주무[茶酒務]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들이 날마다 한 번씩 분대(分臺)에 회좌(會坐)하는 것을 다시(茶時)라 하니, 즉 사헌부 감찰의 직무를 말한 것이다.
♣ 단[端]끝. 가장자리.
♣ 단[摶]둥글다.
♣ 단갈[短褐]옛날에 천한 사람이 입던 무명베로 짠 짧은 옷을 말한다.
♣ 단거장은궤[端居長隱几]자기 자신도 잊어버리고 천지의 조화와 벗할 수 있는 경지에 이름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남곽자기(南郭子綦)가 안석에 기대 앉아서 마치 그 자신조차도 잊어버린 것처럼 멍하니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짓고 있었다…….” 하였다.
♣ 단경[短綆]재주가 짧아서 깊은 도리를 배울 수 없음의 비유. “두레박줄이 짧아서는 깊은 물을 길을 수 없다.” 《莊子》
♣ 단계[彖繫]단사ㆍ계사. 주역(周易)의 이치를 해설한 글이다.
♣ 단계[丹溪]옛날에 허유(許由)가 영천(穎川)에 숨어살았었다.
♣ 단계[丹溪]원(元) 나라 의가(醫家) 주진형(朱震亨)의 별호임. 본시 유자(儒者)로서 의학(醫學)을 나지불(羅知佛)에게서 전수 받았는데, 그 설이 전인의 미발을 발명하여 의가의 일파가 되었다. 저서로는 격치여론(格致餘論)ㆍ국방발휘(局方發揮)ㆍ금궤구원(金匱鉤元) 등이 있음.
♣ 단계[端溪]중국 광동성(廣東省)에 있는 시내. 그 시냇가에서 나는 벼룻돌이 당(唐)ㆍ송(宋) 이래 천하의 명품(名品)이다.
♣ 단계경[丹桂擎]진(晉) 나라 각선(郤詵)이 현량과(賢良科)의 우등으로 뽑혀 스스로 말하기를 “마치 계수나무 숲의 한 가지와 곤륜산의 한조각 옥과 같다.” 한 데서 나온 것으로, 과거에 급제한 것을 뜻한다. 《晉書 卷五十二 郤詵傳》
♣ 단계옹[丹溪翁]원 나라 사람인 주진형(朱震亨)의 호이다. 주진형은 의술에 아주 뛰어났으며, 국방발휘(局方發揮)ㆍ단계심서(丹溪心書) 등의 저서를 남겼다.
♣ 단계용두객[丹桂龍頭客]옛날에 과거시험에 급제하는 것을 “계수나무를 꺾었다.”고 하였으므로, 이를 인하여 과거시험에 급제하는 것을 단계라고 말하며, 용머리의 나그네란, 과거에서 장원을 하였다는 말이다.
♣ 단공상책[檀公上策]위기를 신속하게 면하는 것을 비유한 말. 단공은 남조 송(南朝宋) 때의 장군 단도제(檀道濟)를 이르는데, 그가 일찍이 위(魏) 나라와 싸우다 불리하자 퇴군(退軍)을 주동한 사실이 있었으므로, 왕경칙(王敬則)이 일찍이 말하기를 “단공의 삼십육계(三十六計) 가운데 주(走)가 상책이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南齊書 王敬則傳》
♣ 단구[丹丘]밤이고 낮이고 항상 밝다고 하는 신선의 나라 이름이다.
♣ 단구[丹丘]원주(原州)의 속역(屬驛)이다.
♣ 단구석실[丹邱石室]단구나 석실은 모두 신선이 산다는 전설상의 세계를 뜻한다.
♣ 단구자[丹邱子]신선을 말함. 초사(楚辭) 원유(遠遊)에 “仍羽人於丹邱兮 留不死之舊鄕"이라 했고, 그 주에 “단구는 해외 신선의 땅인데 주야로 항상 밝다.” 하였음.
♣ 단구전[丹九轉]불에다 달구는 약은 아홉 번 되풀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단약은 신선이 먹는 장생불사의 약을 말한다.
♣ 단극[丹棘]망우초(忘憂草) 즉 원추리의 별칭이다.
♣ 단금[斷金]주역(周易) 계사 상(繫辭上)의 “二人同心 其利斷金"에서 나온 것으로 두 사람의 우정이 금속을 끊을 정도로 단단하다는 것임.
♣ 단금[斷琴]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 종자기(鍾子期)가 백아(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잘 이해하였는데, 그가 죽자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고 종신토록 연주하지 않았다는 고사로서 지기(知己)를 잃은 슬픔을 말한 것임. 《列子 湯問》
♣ 단금지교[斷金之交]무쇠라도 끊을 만큼 마음이 굳은 두 사람의 사귐. 정의가 두터운 친구간의 우정
♣ 단금지우[斷金之友]쇠라도 끊을 정도로 굳게 우정으로 맺어진 친구를 말한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상(上)에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끊을 수 있다.[二人同心 其利斷金]”라고 하였다.
♣ 단기[斷機]학문을 배우기로 굳게 다짐한 것을 말함. 맹자(孟子)가 어렸을 때 배움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오자 맹자 어머니가 때마침 베를 짜고 있다가 칼로 베틀의 베를 자르고 말하기를 “자식이 배움을 폐하는 것은 내가 이 베를 끊는 것과 같다.” 하였는데, 맹자는 그로 인하여 깊이 각오하고 부지런히 배웠다고 함. 《古列女傳 母儀 鄒孟軻母》
♣ 단기견노도[單騎見虜圖]당(唐) 나라 곽자의(郭子儀)가 단기를 타고 오랑캐 추장을 만나러 가는 그림이다. 곽자의는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하여 1등 공신에 봉해졌으며, 대종(代宗) 영태(永泰) 원년에 복고(僕固)와 회은(懷恩)이 토번(吐蕃), 회흘(回紇), 당항(黨項) 등의 종족을 꾀어 침입해 오자, 수십 기(騎)만을 거느린 채 회흘의 군사가 주둔해 있는 곳으로 가서는 의리를 가지고 깨우쳐 다시금 우호 관계를 맺고 물러가게 하였다. 《新唐書 卷137 郭子儀列傳》
♣ 단기명[段紀明]기명은 단경(段熲)의 자(字)로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의 호강교위(護羌校尉)였으며, 무예가 뛰어나 흉노와 서강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後漢書 段熲傳》
♣ 단기지계[斷機之戒]맹자의 어머니가 짜던 날을 끊어 중도에 그만두면 아무런 공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교훈.
♣ 단기지교[斷機之敎]베틀에서 짜던 베를 끊은 맹자 어머니의 가르침. 학문은 중도에 그만 두어서는 안되고 꾸준히 계속해야 한다. 학문을 중단하고 집에 돌아온 맹자를 그 어머니가 짜던 베를 끊고 훈계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 孟母斷機, 斷機之戒
♣ 단단[團團]둥근 모양, 이슬이 동글동글하게 맺혀 있는 모양, 늘어진 모양, 드리워진 모양
♣ 단단[湍湍]소용돌이 치는 모양
♣ 단단[旦旦]아침마다, 공손하고 성의가 있는 모양, 환한 모양, 마음이 누그러지는 모양
♣ 단단[慱慱]애태우며 근심하는 모양
♣ 단단[漙漙]이슬이 많이 내린 모양
♣ 단단[斷斷]전일한 모양, 그렇게 결정하여 반드시 틀림없는 일
♣ 단단[亶亶]평탄한 모양
♣ 단단부휴휴[斷斷復休休]단단은 성실하고 전일함을 뜻하고, 휴휴는 선미(善美)함을 뜻하는데, 이는 곧 대신(大臣)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잘 포용하여 부릴 수 있는 덕행을 말한 것이다. 《書經 周書 秦誓》
♣ 단당상[單堂上]당상 중에서 가장 낮은 자급(資級), 곧 정3품(正三品)의 상계(上階). 동반(東班)의 통정대부(通政大夫), 서반(西班)의 절충장군(折衝將軍) 등을 말한다.
♣ 단대[丹臺]선인이 있는 곳. 자양진인(紫陽眞人) 주계도(周季道)가 선인 선문자(羨門子)를 만나 장생결(長生訣)을 물으니 선문자가 말하기를 “이름이 단대의 석실(石室) 안에 있는데 왜 선인이 못 됨을 근심하는가.” 했다는 고사이다. 《列仙傳 卷二》
♣ 단도제[檀道濟]단도제는 남북조 송(宋) 나라 사람인데, 무제(武帝)~문제(文帝) 때에 태위(太尉)가 되어 누차 큰 공을 세워 위엄과 명망이 매우 중하니, 조정에서 의외(疑畏)하여 잡아다 죽였다. 도제는 잡히게 되자 투구를 벗어 땅에 던지며, “마침내 네 만리장성을 무너뜨리는구나.” 하였다.
♣ 단도직입[單刀直入]오직 한 자루의 칼을 품고 적진으로 곧장 들어감. 여러 말하지 않고 곧바로 결론이나 요점을 말함
♣ 단려[丹藜]기자는 붉은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주 나라에 조회하면서 은허를 지났다 한다.
♣ 단로[丹爐]단로는 선약인 단약(丹藥)을 굽는 화로로서 신선술을 뜻한다.
♣ 단류[鍜柳]단류는 버드나무 아래서 대장일을 한다는 뜻이다.
♣ 단류객[鍛柳客]단류객은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을 가리키는데, 그가 대장일[鍛冶]을 좋아하여 자기집 버드나무 아래서 대장일을 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종회(鍾會)가 혜강의 집을 찾아왔는데, 혜강은 그를 잘 대우하지 않고 그가 가려 할 때 묻기를 “무엇을 들으러 왔다가 무엇을 보고 가느냐.” 하자, 종회가 “들을 것을 들으러 왔다가 볼 것을 보고 간다.” 하고 떠났다. 그 후 이로 인해 종회는 혜강에게 감정을 품고 문제(文帝)에게 참소하기를 “혜강은 와룡(臥龍)입니다.” 하여, 결국 혜강은 죽임을 당하였다. 《晉書 卷四十九 嵇康傳》
♣ 단리[短李]당 나라 이신(李紳)의 별칭. 그는 체구가 아주 왜소했기 때문에 ‘단리’라는 별칭이 있었다. 이신은 처음에 재질과 절조로써 진용되었다가 뒤에 소인들의 모함으로 거의 화란을 당할 뻔했으나 다시 정인(正人)들의 극력 구호로 풀려나 길이 공명을 누렸다. 당서(唐書) 이신전(李紳傳)에 “신체는 아주 작게 생겼으나 성격이 호방하고 시(詩)에 이름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단리라 일컬었다.” 하였다.
♣ 단말마[斷末魔]불교용어. 임종(臨終) 때를 이르는 말. 숨이 끊어질 때의 고통. 숨이 끊어질 때 내뱉는 짧은 비명.
♣ 단면[端冕]단면은 임금이 정식으로 조회를 받을 때 입는 예복과 관이다.
♣ 단면[袒免]단문은 오복(五服) 이외의 먼 친척이 죽었을 때 두루마기의 오른쪽 소매를 벗고 머리에 사각건(四角巾)을 쓰기만 하는 상례를 말한다.
♣ 단명고사[端明故事]소동파가 ‘적벽부’를 지은 것을 말한다. 동파가 일찍이 단명전 학사(端明殿學士)를 지냈기 때문에 소 학사(蘇學士)라고 불려지기도 하였다.
♣ 단목[端木]단목(端木)은 자공(子貢)의 성이다. 자공이 말하기를, “부자(夫子)의 문장을 얻어들을 수 있다.” 하였다. 단목 사(端木賜)
♣ 단목천종양[端木千鍾養]단목은 복성(複姓)인데,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을 가리킨다. 장사 수완이 뛰어나 수천금의 재산을 모았다 한다.
♣ 단문[端門]단문은 궁전의 남쪽으로 트인 정문을 말한다.
♣ 단미계[斷尾鷄]빈맹(賓孟)이 교외에 나갔다가 제 꼬리를 제가 물어뜯어버리는 장닭을 보고서는 그 까닭을 시자(侍者)에게 물었더니 그 시자는, 제대로 된 고운 깃털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장차 종묘(宗廟) 제사에 희생(犧牲)으로 쓰여질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면키 위하여 그러는 것이라고 하였음. 《左氏傳 昭公 二十二年》
♣ 단박[檀拍]단판(檀板)과 같은 뜻으로, 즉 박자(拍子)를 때리는 일종의 악기(樂器)이다.
♣ 단방[丹房]도가에서 단약(丹藥)을 굽는 장소를 말한다.
♣ 단배성[袒背誠]북송(北宋) 때 진회(秦檜)가 충신 악비(岳飛)를 참소하여 옥(獄)에 가두고, 하주(何鑄)를 시켜 악비를 국문(鞠問)할 적에 악비가 웃통을 벗고 등을 하주에게 보였는데, 악비의 등에 진충보국(盡忠報國)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데서 온 말이다.
♣ 단변[端弁]머리에 쓰는 것을 바르게 함
♣ 단보탄[單父彈]공자 제자 복자천(宓子賤)이 선보 원이 되어 거문고만 타고 당에 내려오지 않았어도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 한다. 《逸論語 知道》
♣ 단부[單趺]단부는 불교(佛敎)에서 앉는 법의 한 가지로, 오른발을 왼편 허벅다리에 얹고 왼발을 오른편 무릎 밑에 넣고 앉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말한다.
♣ 단부[丹府]정액(精液)이 고이는 단전(丹田)을 말한다.
♣ 단부사[單府使]판관(判官)이 없는 도호부(都護府)의 부사(府使)
♣ 단비[短臂]이목(李牧)은 춘추 시대 조(趙) 나라 북변(北邊)의 명장인데, 몸은 장대하였으나 팔이 짧았다 함.
♣ 단비[斷臂]후위(後魏) 때 고승으로 중국 선종의 제2조가 된 혜가(惠可)가 달마에게 도를 받을 때 그의 왼팔을 잘라서 자기의 굳은 뜻을 보였다.
♣ 단사[丹砂]단사는 연단(鍊丹)을 해서 단약(丹藥)을 만들어 내는 광물의 이름이다. 옛날 도사(道士)들은 단사를 원료로 하여 불로장생의 비약(祕藥)을 구워냈는데 이를 연단술(鍊丹術)ㆍ연금술(鍊金術)ㆍ점금지술(點金之術)이라고도 한다. 여러 가지 쇠붙이를 금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하였다. 본초(本草)에 의하면, “단사를 오래 먹은 자는 신명(神明)을 통하고 늙지 않으며 몸이 가벼워져 신선이 된다.” 하였음.
♣ 단사[摶沙]모래를 뭉침. 모래는 서로 뭉쳐지지 않는 것이므로, 전하여 친구 간에 서로 헤어져 있음을 뜻한 것이다.
♣ 단사[丹砂]주사(朱砂). 수은과 유황의 화합물.
♣ 단사[斷蛇]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술에 취해 길을 가다가 큰 뱀을 죽인 뒤[斷蛇] 깃발의 색깔을 붉게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高帝紀贊》
♣ 단사구루[丹砂句漏]세상을 피해 살며 양생(養生)하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갈홍(葛洪)이 혼란한 세상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려 하다가, 교지(交趾)에서 단사(丹砂)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구루 영(句漏令)으로 자원했던 고사가 있다. 《晉書 葛洪傳》
♣ 단사군[丹砂郡]진(晉) 나라 갈홍(葛洪)이 교지(交趾)에서 단사가 난다는 말을 듣고 벼슬을 구하여 구루 영(句漏令)이 된 고사를 인용한 것임.
♣ 단사두갱[簞食豆羹]단(簞)은 밥을 담는 그릇. 두(豆)는 국을 담는 완(椀) 같은 것으로 음식의 분량이 적은 것을 말한다. 하찮은 음식. 소쿠리의 밥과 나무 제기의 국.
♣ 단사법[丹砂法]불로장생하는 금단(金丹)의 제조법을 말한다.
♣ 단사출촉정[丹砂出蜀井]단사는 선가(仙家)의 불사약(不死藥)으로 주사(朱砂)를 말하며 촉정은 중국 촉(蜀) 지방에 있는 화정(火井)을 말한다. 여기에 불을 붙이면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나며 10리까지 불빛이 비치는데, 여기에서 새빨간 단사가 나온다. 《蜀都賦 注》
♣ 단사표음[簞食瓢飮]일단사일표음(一簞食一瓢飮)의 준말.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 소박하고 청빈하게 사는 가난한 살림.
♣ 단산[丹山]단산은 봉황이 나온다는 산 이름으로 보통 단혈(丹穴)이라고 한다.
♣ 단서[丹書]도가(道家)의 서적.
♣ 단서장석실[丹書藏石室]단서는 단사(丹砂)로 만든 채료(彩料)로 붉게 쓴 서문(誓文). 곧 이를 공신(功臣)에게 하사하여, 영원토록 그의 자손에게 죄를 면해줄 것을 증명하는 것인데, 한서(漢書) 고제기(高帝紀)에 “공신과 함께 부신(符信)을 나누어 서문(誓文)을 만들어서 단서철계(丹書鐵契)를 금궤(金匱)와 석실(石室)에 담아 종묘에 수장하였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단서차화곤[丹書借華袞]유배를 가게 된 것도 임금의 은총이라는 뜻이다. 단서(丹書)는 임금이 공신(功臣)에게 세습적으로 면죄(免罪)케 하는 등 특권을 부여한 증서를 말하고, 화곤(華袞)은 제왕을 가리킨다.
♣ 단석[袒裼]웃옷을 벗어서 맨몸을 드러내는 것으로, 예의가 없음을 뜻한다.
♣ 단선가[團扇歌]진(晉) 나라 때 왕민(王珉)이 형수(兄嫂)의 비(婢)인 사방자(謝芳恣)와 사통하여 서로 매우 사랑하다가, 사실이 탄로되어 사방자가 왕민의 형수에게 매를 몹시 맞았는데, 당시 사방자는 노래를 잘하였고 왕민은 백단선을 좋아하여 항상 손에 가졌으므로, 사방자가 단선가(團扇歌)를 지어 불렀다한다.
♣ 단선원서궁[團扇怨西宮]둥근 부채는 반첩여(班婕妤)의 단선(團扇)을 말하며 서궁은 후궁(後宮)임.
♣ 단소정한[短小精悍]작달막한 체구에 정명(精明)하고 강한(强悍)한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유협열전(游俠列傳)에 “곽해(郭解)의 사람됨이 단소정한하였다.”고 하였으며, 전주(前注) 두보의 동시(同詩)에 “短小精悍姿 屹然强寇敵”이라는 표현이 있다.
♣ 단수[短袖]기예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한비자(韓非子) 오두(五蠹)에 “소매가 길수록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을수록 장사를 잘 한다.[長袖善舞 多錢善賈]”라 하였다.
♣ 단수[丹髓]단수는 단약(丹藥)의 정수(精髓)를 뜻한다.
♣ 단수[丹水]적수. 곤륜산에서 나온다는 물.
♣ 단수[蜑叟]해인(海人)과 같은 뜻으로, 즉 어부(漁父)를 이른 말이다.
♣ 단순호치[丹脣皓齒]붉은 입술과 새하얀 이, 즉 미인의 얼굴을 형용하는 말이다.
♣ 단식표음[簞食瓢飮]변변치 못한 살림
♣ 단심수부상[丹椹垂扶桑]부상은 동해(東海) 가운데 있다는 지명(地名)으로 거기에 단심이란 나무가 있는데 그 열매가 매우 달고 향기롭다고 한다.
♣ 단씨안씨[段氏顔氏]단씨는 태위(太尉) 단수실(段秀實)을 가리킴. 당 대종 때 주자(朱泚)가 반란을 일으키자 단수실이 그를 토벌하게 되었다. 단수실은 거짓으로 주자에게 항복하여 기회를 노리다가 주자의 홀(笏)을 빼앗아 주자의 이마를 치고 크게 꾸짖었더니, 끝내는 주자에게 죽음을 당했다. 안씨는 태사(太師) 안진경(顔眞卿)을 가리킴. 안진경이 이희열(李希烈)을 토벌하러 갔다가 도리어 희열에게 잡혔다. 그러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吾年八十 知守節而死耳”라 하자. 희열은 사람을 시켜 목졸라 죽였다.
♣ 단안절[段安節]태어나고 죽은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산동 사람으로 唐나라 초기의 명장군 段志玄의 후예로, 음악에 소질이 있었고, 가무, 광대, 악기를 잘하는 재주가 있었다.
♣ 단알[單閼]세성(歲星)이 묘(卯)에 있는 때, 즉 정묘년의 호란(胡亂)을 가리킨다.
♣ 단액[丹液]불로장생약(不老長生藥)과 같은 말이다.
♣ 단액[丹掖]붉게 칠한 액성(掖省). 액성은 궁중의 문하성(門下省)ㆍ중서성(中書省).
♣ 단약[丹藥]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장생불사약(長生不死藥)으로 곧 선약(仙藥).
♣ 단양[丹陽]단양은 영해(寧海)의 고호임.
♣ 단언세동거[鄲郾世同居]당(唐) 나라 최단(崔鄲)과 최언(崔郾)의 형제를 가리킨 것으로, 최씨(崔氏)가 4대를 한 솥에 밥을 지어먹었다. 《唐書 卷一百六十三》
♣ 단연[丹鉛]단사(丹砂)와 연분(鉛粉)을 이르는데, 모두 문자의 교정(校訂)에 쓰이므로, 전하여 교정의 뜻으로 쓰인다.
♣ 단연[檀筵]불공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을 모신 자리라는 뜻인데, 전단(栴檀)은 향기가 많이 나는 나무로, 불상(佛像)을 새기거나 불단(佛壇)을 만드는 데 쓰인다.
♣ 단연[丹鉛]신선이 먹는 장생불사약을 말함.
♣ 단연[澶淵]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지명으로, 송(宋) 나라 때 구준(寇準)이 거란(契丹)을 물리친 곳이다. 송 나라 진종(眞宗)이 즉위한 함평(咸平) 초년에 거란군이 침입해 오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황제에게 남쪽으로 피해 가 있을 것을 청하였으나, 구준만은 친정(親征)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진종이 친정을 결정하였으나, 남성(南城)에 이르러서는 군사를 주둔한 채 강을 건너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구준이 다시 강을 건너기를 고집하여 황제가 할 수 없이 강을 건넜는데, 이로 인해 사기가 고무되어 거란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거란을 물리친 뒤 거란에서 화친을 요청하자, 구준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황제가 구준의 말을 듣지 않고 화친하였다. 《宋史 卷281 寇準列傳》
♣ 단연사점감[丹鉛事點勘]이 시구는 한유(韓愈)의 추회시(秋懷詩)에, “不如覰文字 丹鉛事點勘”이라 보임. 점감은, 일일이 표해가며 조사한다는 것.
♣ 단오안후지[斷鰲安厚地]옛날 여와씨(女媧氏)가 오색(五色)의 돌을 달구어 하늘의 이지러진 곳을 때우고, 큰 자라의 발을 끊어서 사극(四極; 사방의 끝 닿은 곳)을 세웠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단요무심이[但要無心耳]불법(佛法)에서는 무심(無心)을 주장하므로, 자기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지 않아도 무심만 공부하면 된다는 뜻이다.
♣ 단원[斷猿]애가 끊어지도록 슬피 우는 원숭이를 말함.
♣ 단의수이광[短衣隨李廣]용맹스럽고 호협한 인물과 함께 사냥 등을 하면서 기상을 길러 보고 싶다는 뜻이다. 이광(李廣)이 한 무제(漢武帝) 때 우북평 태수(右北平太守)로 있으면서 사냥을 나가 풀숲 속의 바위를 보고 호랑이로 여겨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바위를 뚫고 깊이 박혔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史記 卷109》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短衣匹馬隨李廣 看射猛虎終殘年”이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2 曲江 3》
♣ 단일서비미주륜[短日西飛未駐輪]효자가 어버이를 섬길 시일이 적음을 안타까워하는 애일(愛日)의 마음을 비유하고 있다. 한(漢) 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에 “부모를 섬기되 스스로 부족한 줄 아는 이는 순(舜)이로다. 오래 할 수 없는 것이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을 이르니, 효자는 부모를 모실 시일이 적음을 안타까워한다.” 하였다.
♣ 단장[斷腸]창자가 끊어짐. 자기 새끼를 빼앗긴 어미 원숭이가 애타게 쫒다가 지쳐 쓰러져 죽은 것을 보니 창자가 끊어져 있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 슬픔이 더할 수 없이 극치에 이르른 것을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 단장군[檀將軍]송(宋)나라 무제(武帝)의 건국(建國)을 도운 명장 단도제(檀道濟)를 가리킴.
♣ 단장무감[湍藏霧歛]북산이문(北山移文)에 있는 문구인데, “처음에 고상하게 숨었다가 나가서 벼슬하는 주옹(周顒)이 다시 찾는 것을 미워하여 여울을 감추고 안개를 거뒀다.”는 말이 있다.
♣ 단장보단[斷長補短]긴 곳을 잘라 짧은 곳을 메꾸어 들쭉날쭉한 것을 곧게 한다.
♣ 단장원[斷腸猿]사람에게 잡혀 죽은 새끼 원숭이 옆에서 어미 원숭이가 슬프게 울다가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 배를 가르고 보니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더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搜神記 卷20》
♣ 단장정[短長亭]옛날 행인의 휴식이나 전별 장소용으로 길거리에 설치한 휴게소로, 5리(里)와 10리마다 각각 단정(短亭)과 장정(長亭)을 두었다.
♣ 단장중설[壇場重設]단장은 국가의 제사, 임금의 즉위, 국가간의 조약, 장수를 임명하는 등 큰 예식을 거행하는 장소이다. 곧 여러 번에 걸쳐 장수에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 단전[單傳]단전(單傳)은 불교의 문자로서, 경전에 의지하지 않고 이심전심(以心傳心)한다는 말임.
♣ 단전[丹田]도교에서 일컫는 인체 부위의 이름으로, 상단전(上丹田), 중단전(中丹田), 하단전(下丹田)으로 나뉜다. 도가(道家)에서는 그 곳을 수양(修養)상의 가장 중요한 곳으로 여김
♣ 단전태자성[丹田胎自成]단전은 사람의 배꼽 아래로 한 치쯤 되는 곳을 말하고, 태(胎)는 곧 도가(道家)의 용어(用語)로서 신기(神氣)의 수양이 극에 이르렀을 때 복중(腹中)에 결성(結成)되는 원기(元氣)의 근간인 신념(信念)을 말한다.
♣ 단정[丹鼎]단정은 신선이 먹는 단약(丹藥)을 달이는 솥이다. 낭환기(瑯環記)에 “천 년 묵은 거북이 봉래산 아래 신을 찾아와서 단정 씻은 물을 마시면, 곧 날개가 돋혀 변화 무쌍하게 된다.” 하였다.
♣ 단정[丹旌]붉은 천에 망자의 이름을 쓴 깃발. 상여(喪輿)가 나갈 때 쓰는 붉은색의 명정(銘旌)을 말한다.
♣ 단정[短亭]정(亭)은 길에 있는 역사(驛舍) 비슷한 것인데, 오리(五里)에 단정(短亭)이요, 십리에 장정(長亭)이었다.
♣ 단정월[端正月]일 년 중에 가장 밝다고 하는 음력 팔월 십오일의 달빛을 말한다.
♣ 단정장정[短亭長亭]행인들의 휴게소로서, 5리(里)마다 단정을 설치하고 10리마다 장정을 설치하였다.
♣ 단제[丹梯]붉은 사다리. 전하여 선경(仙境)에 들어가는 길을 뜻하며, 또는 붉은 계단의 뜻으로 조정(朝廷)을 의미하기도 한다.
♣ 단조[端操]바르게 몸가짐을 하다. 초사(楚辭) 주자집주(朱子集註)에, “求其本初也”라 하였음.
♣ 단조[丹旐]상여가 나갈 때 쓰는 붉은 색의 명정(銘旌)을 말한다. 단정(丹旌).
♣ 단조[丹竈]선가의 도사(道士)가 단약(丹藥)을 고는 부엌. 전하여 단약을 말함.
♣ 단조협[丹竈峽]신선이 사는 골짜기를 말한다. 단조는 단약(丹藥)을 달이는 부엌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제14권 단양군 조(丹陽郡條)에 보면, 김일손(金馹孫)의 이요루기(二樂樓記)에, “내가 절경에 이름이 없음을 애석하게 여겨 처음으로 단구협(丹丘峽)이라 이름을 붙였다.” 하였는데, 혹 이를 말한 것인 듯하기도 하다.
♣ 단주[단絑]요(堯)의 아들. 단주가 불초(不肖)하여 요의 뒤를 잇지 못하고 순(舜)이 대신 이었다고 함. 《書經 堯典》
♣ 단지[丹趾]단지는 붉은 다리를 가진 새를 말하는데 무슨 새인지 분명치 않다.
♣ 단지[丹地]대궐은 전계(殿階) 밑의 마당을 모두 붉은 칠을 하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단지[丹墀]붉은 섬돌. 고대에 대궐의 섬돌은 붉은 칠을 하였다는 데서 대궐의 별칭으로 사용된다.
♣ 단직[斷織]맹자가 젊어서 배우다가 중도에 돌아오니 그의 어머니가 칼로 짜던 베를 끊으며 말하기를, “네가 학업을 폐함은 내가 이 베를 끊음과 같으니라.” 하니, 맹자가 두려워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공부했다. 《列女傳》
♣ 단책[端策]점풀을 바르게 잡다.
♣ 단청[丹靑]역사책을 가리킨다. 옛날에 단책(丹冊)에는 공훈을 기록하고 청사(靑史)에는 일을 기록하였다.
♣ 단청수[丹靑手]솜씨가 뛰어난 화공(畫工)을 말한다.
♣ 단파[丹把]인삼(人蔘) 철에 외인이 몰래 들어와 인삼을 캐어 가는 것을 막는 한편 인삼을 캐어 모으기 위하여 강계(江界) 일대에 나누어 보내는 군대. 단절(丹節) 즉, 인삼의 열매가 붉어진 때에 보내는 것을 단파라 하고, 황절(黃節) 즉, 인삼 잎이 노래지기 시작할 때에 보내는 것을 황파라 한다.
♣ 단판[檀板]박달나무 판으로 만든 타악기.
♣ 단패교군[單牌轎軍]가마를 메고 가는데 돌려가며 멜 사람 없이 두 사람이 메고 가는 것.
♣ 단폐[丹陛]천자(天子)가 있는 궁궐의 뜰은 전계(殿階)를 붉게 칠하므로 궁궐의 섬돌을 단폐라고 하는바, 전하여 대궐을 뜻한다.
♣ 단표[簞瓢]밥을 담는 대그릇과 물을 담는 표주박이란 뜻으로, 전하여 가난한 사람이 먹는 보잘것없는 음식을 뜻한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질도다 안회(顔回)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一簞食一瓢飮]로 누추한 시골에 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그 걱정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 하였다.” 하였다.
♣ 단표락[簞瓢樂]안회(顔回)의 고사이다. 단(簞)은 대그릇이고 표(瓢)는 표주박인데 가난한 생활을 표현한 것이다.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는 집이 가난하여 한 바구니 밥과 한 바가지 물을 마시면서도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아니하였다 한다. 《論語 雍也》
♣ 단표습진[簞瓢拾塵]단표는 안회(顔回)를 가리킨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우리 안회는 어질기도 하다. 한 그릇 밥과 한 표주박의 물[一簞食一瓢飮]로 누항(陋巷)에서 사는 고통을 다른 사람들은 견뎌 내지를 못하는데, 우리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우리 안회는 참으로 어질기도 하다.”라고 공자가 칭찬한 말이 나온다. 공자가 진(陳) 채(蔡) 사이에서 곤궁한 상황에 처했을 때, 안회가 쌀을 얻어 밥을 짓던 중에 재가 솥 안으로 들어가자 이것을 버리기가 아까워 손으로 집어먹었는데[拾塵], 이 행동이 몰래 밥을 훔쳐 먹는 것으로 오인(誤認)되어 의심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呂氏春秋 卷17 審分覽 任數》
♣ 단필[丹筆]죄인(罪人)의 형(刑)을 기록하는 붓을 말한다.
♣ 단하[丹霞]산명인 동시에 동명(洞名)임. 마고산(麻姑山)의 서쪽에 있음.
♣ 단하장[丹霞漿]신선이 먹고 마시는 음식물을 말한다.
♣ 단학[丹壑]적색(赤色)이 어린 산골짜기. 전하여 선경(仙境)을 뜻한다.
♣ 단학담조여[猯狢噉曺蜍]단학(猯狢)은 오소리와 같은 조무라기 짐승이고 조여(曹蜍)는 조무(曹茂)의 소자(小字)로 이지(李志)와 함께 변변찮은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 단할[袒割]삼로 오경(三老五更)을 태학(太學)에서 궤향(饋饗)할 때 임금이 친히 옷소매를 걷고 희생(犧牲)을 칼로 베어 대접하는 것을 말한다. 《禮記 樂記》
♣ 단현[斷絃]금슬(琴瑟)의 줄이 끊어졌다는 뜻으로, 아내를 여의고 홀로된 것을 이르기도 하고, 혹은 친구의 죽음을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의 내용은 자세하지 않다.
♣ 단현수속[斷絃誰續]친구의 죽음을 슬퍼한 말이다. 옛날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잘 탔고,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는 거문고 소리를 잘 알아들었는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들을 이가 없다 하여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다시 타지 않았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단현정[斷絃情]아내가 죽은 슬픔을 뜻하는데 금슬(琴瑟)의 줄이 끊어진 것과 같다는 데서 온 말이다.
♣ 단혈[丹穴]단혈은 단사(丹砂)가 나오는 구멍이 있는 단산(丹山)으로 봉황이 산다 한다.
♣ 단혈[丹穴]산해경(山海經) 남산경(南山經)에 나오는 산 이름. 금과 옥이 널려 있고 오색의 무늬를 가진 봉황새가 산다고 한다.
♣ 단혈금[丹穴禽]봉새를 가리킴. 산해경(山海經)에 의하면, 단혈산에 오색의 무늬를 가진 새가 있는데 이름을 봉새라 한다고 하였다.
♣ 단화[丹火]붉은 불빛으로 풀이되나, 선약인 단약(丹藥)을 달이는 화로의 불이란 뜻이다.
♣ 단환범골[丹換凡骨]뛰어난 문장 실력으로 벗들에게도 자극을 주어 함께 발전해 나가도록 하자는 말로, 일종의 겸사(謙辭)이다. 보통 시문(詩文)의 경지가 점수(漸修)를 거쳐 돈오(頓悟)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말로 ‘금단 환골(金丹換骨)’이라는 표현을 쓴다.
♣ 단후[短後]뒷자락을 접게 만든 일하기에 편한 옷.
♣ 단후[丹侯]요(堯)의 아들 단주(丹朱)를 이름.
♣ 단후의[短後衣]단후의는 장자(莊子) 설검(說劍)에 나오는 말로, 활동하기 편하게 뒤를 짧게 한 무사(武士)의 상의(上衣)를 말한다.
♣ 달권[達權]권도(權道)에 능함. 곧 임기응변을 잘 하는 것을 뜻함.
♣ 달기[妲己]은(殷) 나라 주(紂)의 비. 그녀는 주를 도와 포학과 음란을 자행하다가 무왕(武王)이 주를 정벌할 적에 참수(斬首)되었다.
♣ 달기[妲已]은(殷) 나라 주(紂)의 총희(寵姬).
♣ 달달[怛怛]근심하고 애씀, 슬퍼서 마음을 씀
♣ 달도가[怛忉歌]소지왕(炤知王) 10년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에서 노니는데, 어떤 노옹(老翁)이 지중(池中)에서 나와 글을 바쳤다. 그런데 그 외면(外面)에 쓰여 있기를 “뜯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되어 있으므로, 왕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죽게 하는 것보다는 뜯지 말아서 한 사람만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 하니,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두 사람은 서인(庶人)이고 한 사람은 왕(王)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왕이 두려워하여 그것을 뜯어서 보니, 그 글에 “금갑을 쏘아라[射琴匣]”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왕이 궁(宮)에 들어가 금갑을 보고는 벽을 기대고 그를 쏘아 넘어뜨리고 보니, 바로 내전(內殿)의 분수승(焚修僧)이었다. 왕비가 그를 데려다 간통을 하고 인하여 왕을 시해하려고 꾀했었으므로, 이에 왕비도 복주(伏誅)되었다. 그 후로는 나라의 풍속이 매년 정월의 상진일(上辰日)ㆍ상해일(上亥日)ㆍ상자일(上子日)ㆍ상오일(上午日)에는 온갖 일을 금기하여 감히 동작을 하지 않고 이를 지목하여 달도일(怛忉日)이라 하였다. 그런데 굳이 4일을 지목한 것은 그때에 마침 오(烏)ㆍ서(鼠)ㆍ시(豕)의 요괴가 있어 기사(騎士)로 하여금 추격하게 한 결과 인하여 용(龍)을 만났던 때문이다. 또는 16일을 오기일(烏忌日)로 삼아 찰밥으로 제(祭)를 지내었다.
♣ 달마[達磨]양(梁) 나라의 고승(高僧) 보리달마존자(菩提達摩尊者). 중국에 맨 처음 들어와 선종(禪宗)의 시조가 되었다. 당 대종(唐代宗) 때 시호를 원각법사(圓覺法師)라 했다.
♣ 달방[達邦]‘재방필달(在邦必達)’을 줄여서 쓴 말이다. 논어(論語) 안연(顔淵)에 “달(達)이라고 하는 것은 질박ㆍ정직하고 의를 좋아하며, 남의 말을 살피고 안색을 관찰하며 생각해서 몸을 낮추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면 나라에 있어서도 그 신실한 덕이 행해져 이르지 않는 곳이 없게 될 것이다.[在邦必達]”하였다.
♣ 달생[達生]장자(莊子) 달생(達生)의 “삶의 실정을 통한 자는 삶과 관계가 없는 것을 힘쓰지 않는다.”에서 나온 것으로, 세상사의 구속을 받지 않고 자연의 본성대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 달생지훈[達生之訓]장자(莊子) 달생(達生)에 “생(生)의 진상(眞相)에 통달한 자는 어찌 할 수 없는 생에 힘쓰지 않고, 명(命)의 진상에 통달한 자는 어찌할 수 없는 지혜에 힘쓰지 않는다.” 한 말을 칭찬하여 이른 말이다.
♣ 달성[達城]대구(大邱)의 옛 이름이다.
♣ 달수[獺髓]달수는 수달의 뼈 속에 든 기름으로 생채기를 낫게 하는 데 쓰이는 명약(名藥)이라 한다. 《拾遺記》 삼국(三國) 때에 오(吳) 나라 임금 손화(孫和)가 달빛 아래서 수정여의(水精如意)를 춤추다가 잘못하여 등부인(鄧夫人)의 얼굴에 상처를 내어 피가 흘렀는데, 태의(太醫)가 말하기를, “달수를 구하여 옥과 호박(琥珀) 가루를 섞어서 바르면 흉터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여 흰 수달의 골[白獺髓]을 구하여 치료하였다 한다.
♣ 달유보본[獺猶報本]수달은 맹춘(孟春)이 되면 물고기가 살찌므로 물고기를 잡아 조상에 제사한다고 한다. 《禮記 月令》
♣ 달인비과망[達人非果忘]달인은 사리에 통달한 사람을 이름. 공자(孔子)가 위(衛) 나라에서 경(磬)을 치자, 삼태기를 메고 그 문 앞을 지나던 은자(隱者)가 말하기를, “비루하다 경쇠 소리여!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둘 뿐이다.”고 하여, 그 경쇠 소리에서 공자가 세상을 잊지 못함을 알아듣고 공자를 비난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자가 말하기를, “그는 세상을 잊는 데에 과감하구나. 출처(出處)를 그렇게 하기는 어렵지 않은 것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憲問》
♣ 달제[獺祭]시문(詩文)을 지을 적에 좌우에 참고서를 많이 펴 놓음을 뜻한다. 수달은 포획한 고기를 먹으려 할 때에 먼저 좌우에 늘어놓고 제사를 지낸다는 고사에서 전용(轉用)된 말이다. 《呂覽 孟春紀》
♣ 달제어[獺祭魚]시문(詩文)을 지을 적에 참고서를 좌우에 많이 늘어놓음을 비유한 말인데, 수달은 본디 물고기를 잡아서 사방에 진열해 놓으므로 이를 제(祭)한다고 이른 데서 온 말이다.
♣ 달존[達尊]사람이 누구나 공통으로 높이는 것으로, 연치와 관작과 덕이 높은 것을 삼달존(三達尊)이라 칭한다. 《孟子 公孫丑下》
♣ 달존삼병취[達尊三竝取]달존은 곧 천하(天下)를 통하여 언제나 존중하여야 할 것으로서, 즉 관작(官爵)ㆍ연령(年齡)ㆍ학덕(學德)의 세 가지를 가리킨다.
♣ 달천[獺川]보은(報恩)의 속리산(俗離山)에서 발원하여 충주 서쪽을 흐르는 물 이름이다.
♣ 달효[達孝]온 세상이 다 함께 인정하는 효도.
♣ 담[啗]먹다.
♣ 담국헌[澹菊軒]담국헌은 청 나라 오위경(吳偉卿)의 부인. 장요손의 누이. 여류시인임.
♣ 담담[湛湛]“담담”은 틀린 독음. “잠잠”이 옳음.
♣ 담담[啖啖]게걸스럽게 먹는 모양, 한꺼번에 삼키는 모양
♣ 담담[淡淡]담백한 모양, 산뜻한 모양, 안온하고 침착한 모양
♣ 담담[啿啿]풍부한 모양
♣ 담담[曇曇]흐린 모양, 먹구름이 낀 모양
♣ 담대[澹臺]담대멸명(澹臺滅明)을 말한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원이 되었는데, 공자가 ‘사람을 얻었느냐.’고 물으니 ‘담대멸명이라는 자를 얻었는데 지름길로 다니지 않고 공사(公事)가 아니면 절대로 저의 집에 오지 않습니다.’고 답하였다.” 한다.
♣ 담대멸명[澹臺滅明]공자(孔子)의 제자. 얼굴이 못생겼으나 덕행을 닦아 유명해졌다 한다.
♣ 담대심소[膽大心小]담대하면서도 치밀한 주의력을 가져야 함. 문장을 짓는 데 경계하는 말로도 쓰인다.
♣ 담로[覃老]옹담계를 말함.
♣ 담로[郯路]중국 산동(山東) 지방을 가리킨다. 담(郯)은 옛날의 나라 이름으로, 산동 담성(郯城) 일대에 있었다.
♣ 담로[湛盧]춘추 시대 구야자(歐冶子)가 만들었다는 보검 이름이다. 오월춘추(吳越春秋) 합려전(闔閭傳)에" 초 소왕(楚昭王)은 고이 누워서 오왕(吳王)의 담로란 보검(寶劍)을 얻었었다.” 하였다.
♣ 담로[湛露]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천자가 제후에게 잔치를 베풀어 준 내용을 엮은 시인데, 천자의 혜택이 이슬이 온갖 생물을 윤택하게 하는 것처럼 한다는 비유.
♣ 담로점주아[湛露霑周雅]담로(湛露)라는 말은 시전(詩傳)에 천자(天子)가 제후를 대접하려고 지은 시라고 한다.
♣ 담막[澹漠]장자(莊子) 선성(繕性)에, 옛사람은 염담(恬澹)하고 적막(寂漠)한 담막(澹漠)의 경지를 얻었다고 설명하였다.
♣ 담명[噉名]명예 구하기를 주린 사람이 음식을 구하듯이 함을 이름.
♣ 담무[曇無]보살인 담무갈(曇無竭)을 말한다.
♣ 담무갈[曇無竭]당(唐) 나라의 고승(高僧). 불국(佛國)에 이르러 범문(梵文)을 얻어 가지고 인도로부터 바다를 건너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한다. 《高僧傳 卷三》
♣ 담묵[淡墨]담묵은 진하지 않은 먹물을 말하는데, 당(唐) 나라 때에 진사방(進士榜)의 첫머리에는 반드시 담묵으로 ‘예부공원(禮部貢院)’이란 네 글자를 썼다고 한다.
♣ 담발[曇鉢]우담발화(優曇鉢華)를 가리킨다. 우담발화는 3천 년마다 한 번 꽃이 피는데, 부처가 세상에 나올 때만 핀다고 한다.
♣ 담배등현수[湛輩登峴首]진(晋)나라 양호(羊祜)가 형주(荊州)에 있을 때에 종사(從事) 추담(鄒湛)과 함께 현산(峴山)에 올라가서 놀다가 눈물을 흘리며, “우주(宇宙)가 있은 뒤로 이 산이 생겼는데 고래(古來)로 현달(賢達)들이 이 산에 논 이가 나와 자네 같은 사람이 많지마는, 모두 지금에 이름을 전하지 아니하니 이것을 생각하면 절로 슬퍼진다.” 하니, 추담이 말하기를, “공(公)의 이름은 이 산과 함께 전하겠지마는 저 같은 사람은 참으로 공(公)의 말씀과 같습니다.” 하였다.
♣ 담병[譚柄]말할 때 손에 잡는 주미(麈尾)를 말하는데, 옛날 사람들은 손에 주미를 들고 청담(淸談)을 하였다. 《天錄志餘》
♣ 담복화[薝蔔花]불경(佛經)에 나오는 꽃인데, “숲 속에 담복화가 있으면 온 숲이 담복화의 향기만으로 가득하다.” 하였다.
♣ 담소각군[談笑却軍]전국 시대 때 제(齊) 나라의 노중련(魯仲連)이 말로 진(秦) 나라 군대를 물러가게 한 것을 말한다. 일찍이 노중련이 조(趙) 나라에 머물러 있을 적에 진 나라가 조 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을 포위하였다. 그때 조 나라에 와 있던 위(魏) 나라의 신원연(辛垣衍)이 조 나라로 하여금 진 나라 왕을 황제(皇帝)로 추대하여 군대를 철수시키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노중련이 신원연을 만나서 진 나라가 무도한 나라임을 역설한 뒤, 진 나라가 칭제(稱帝)한다면 자신은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 것이라고 하여 중지시키니, 진 나라 군사들이 퇴각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 담소자약[談笑自若]위험이나 곤란에 직면해 걱정과 근심이 있을 때라도 변함없이 평상시와 같은 태도를 가짐. 태연자약(泰然自若)
♣ 담소장[曇霄帳]당 현종(唐玄宗) 때 사문(沙門) 담소(曇霄)가 포도곡(蒲萄谷)에서 노닐다가 포도를 먹고는 포도의 마른 덩굴 하나를 가져와 자기의 절에 옮겨 심었는데, 이것이 살아나서 덩굴이 대단히 높고 넓게 뻗어 마치 유개(帷蓋)처럼 되고, 그 열매 또한 구슬처럼 주렁주렁 열리었으므로, 시인(時人)들이 그 포도를 초룡주장(草龍珠帳)이라 불렀던 데서 온 말이다.
♣ 담소절충[談笑折衝]절충(折衝)은 전쟁하는 것인데, 직접 싸우지 않고 담소(談笑)로 외국을 굴복시킨다는 말이다.
♣ 담실[覃室]담계(覃溪)의 실(室)로 옹방장의 서재(書齋).
♣ 담암오여와[澹庵誤黎渦]담암(澹庵)은 송(宋) 나라 명신(名臣)인 호전(胡銓)의 호이며, 여와(黎渦)는 이와(梨渦), 주와(酒渦), 주과(酒窠)로도 쓰는바, 여인의 두 볼이 오목하게 들어가 보조개가 보이는 것으로 미녀를 가리킨다. 호전은 금(金) 나라와의 화의(和議)를 반대하다가 섬으로 멀리 유배된 뒤, 돌아오는 길에 상담(湘潭)의 호씨(胡氏) 집 동산에서 술을 마시면서 여인의 유혹에 빠져 큰 봉변을 당하였다. 그 후 주자(朱子)는 이 고사를 보고 시(詩)를 짓기를 “십 년 동안 호해에서 한 몸 가볍게 여겼는데, 돌아오는 길에 여와를 대하니 도리어 연정(戀情)이 있었네. 세상의 길 인욕보다 더 험한 것 없으니, 몇 사람이 여기에 이르러 평생을 그르쳤나.[十年湖海一身輕 歸對黎渦却有情 世路無如人欲險 幾人到此誤平生]”하였다.
♣ 담연설락[談筵屑落]진(晉) 나라 호모보지(胡母輔之)가 청담(淸談)을 잘하여 톱으로 나무를 끊는 것처럼 가루가 줄줄 쏟아졌다.
♣ 담예[曇蘂]불교의 꽃, 즉 연화(蓮花)를 말한다. 불법(佛法)을 뜻하는 범어(梵語) dharma를 음역(音譯)한 것이 담마(曇摩)이고, 또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성(姓)인 gautama를 음역한 것이 구담(瞿曇)인 관계로, ‘담(曇)’ 자가 불(佛)의 뜻을 지니게 되었다.
♣ 담운미우[淡雲微雨]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淡雲微雨小姑祠 菊秀蘭衰八月時"를 인용한 것임.
♣ 담원[澹園]중국인 곽집환(郭執桓)의 호이며, 봉규(封圭)는 그의 자이다.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이 연경(燕京)에 갔을 때 곽집환을 친하게 사귀어 시를 차운하고는 하였는데, 담헌집(湛軒集)에는 곽환(郭桓)으로 되어 있다.
♣ 담의벽이가[談宜闢二家]양주(楊朱)ㆍ묵적(墨翟)을 가리킨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에 “능히 양주ㆍ묵적 막을 것을 말하는 자는 성인의 무리이다.” 하였다.
♣ 담이[儋耳]담이는 경주(瓊州)에 있는 고을 이름인데, 소식이 일찍이 경주별가(瓊州別駕)로 좌천되어 이곳에 있었고, 이때에 소철 또한 뇌주(雷州)에 귀양가 있었다.
♣ 담자묘[啖蔗妙]감자는 사탕수수를 말하는데, 진(晉) 나라 때 고개지(顧愷之)가 이 사탕수수를 꼬리부터 먹으므로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고개지가 대답하기를 “점점 맛이 더 좋은 부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九十二》
♣ 담자수지취미진[啖蔗須知臭味眞]진(晉) 나라 고개지(顧愷之)가 감자를 항상 꼬리 부분에서부터 먹자,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점차 좋은 맛을 보려고 함이다.[漸至佳境]”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排調》
♣ 담자지여[啖蔗之餘]경황(境況)이 점차로 좋아짐을 뜻함. 감자는 사탕수수인데, 진(晉) 나라 고개지(顧愷之)가 감자를 먹을 때는 반드시 밑부분부터 먹으므로, 누가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맛이 점점 더 좋아지기 때문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담점[黕點]더러운 것. 찌꺼기. 더러운 먼지
♣ 담제[禫祭]대상(大祥)을 지낸 다음다음 달에 지내는 제사.
♣ 담제산정[啖薺山頂]채원정(蔡元定)이 일찍이 서산(西山) 꼭대기에서 나물을 먹으면서 글을 읽었다.
♣ 담조율[啖棗栗]대추와 밤을 먹는다.
♣ 담천[談天]말에 능하여 변론을 잘하는 것을 말한다. 소식(蘇軾)의 시 동정춘색(洞庭春色)에, “모름지기 그대는 염해의 술잔 따라서, 담천하는 나의 입을 적시어 주게.[須君▣海杯 澆我談天口]”하였다.
♣ 담천객[談天客]전국 시대 제(齊) 나라의 음양가(陰陽家)인 추연(鄒衍)을 가리킨다.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 “하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추연[談天衍]”이라는 말이 있다.
♣ 담추집[甔甀集]담추집은 담추동(甔甀洞) 오국륜(吳國倫)의 문집명이다. 명(明) 나라의 문인으로 후칠자(後七子)의 일원들이다.
♣ 담치[湛熾]쌀을 씻고 찌는 일.
♣ 담탕인[澹蕩人]전국시대 제(齊) 나라의 고사인 노중련(魯仲連)이 의리상 무도한 진(秦) 나라를 황제로 섬기지 않았고, 조(趙) 나라 평원군(平原君)이 천금을 주어도 받지 않은 등의 큰 절의를 찬양한 말로, 이백(李白)이 노중련을 읊은 시에 “천금을 주는 것도 하찮게 여겨 평원군을 돌아보고 웃었으니, 내 또한 방일한 사람인지라 어쩌면 분기하여 그와 동조할 수 있을까.[意輕千金贈 顧向平原笑 吾亦澹蕩人 拂衣可同調]” 한 데서 온 말이다. 《李太白集 卷二 古詩》
♣ 담하용이[談何容易]무슨 일이든지 입으로 말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해보면 쉽지 않으므로 쉽게 입을 여는 짓은 삼가야 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담호호지 담인인지[談虎虎至 談人人至]자리에 없는 사람의 말을 하면 공교롭게도 그 사람이 옴.
♣ 담화[曇花]불교 전설에 나오는 우담발화(優曇鉢花)로, 3천 년에 한 번 꽃이 핀다고 하는데, 이 꽃이 피면 금륜명왕(金輪明王)이 나와 태평 시대가 열린다고 한다.
♣ 담화[曇花]사물이나 인물이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담화는 우담발화(優曇鉢華)로, 피었다가는 금방 지는 꽃이다.
♣ 담회[覃懷]지명. 중국 회주(懷州)의 옛 이름이다.
♣ 답가[踏歌]발로 땅을 구르며 장단을 맞추어 노래하는 것을 말한다.
♣ 답고[踏鼓]남의 지휘를 받으며 웃음거리가 된다는 뜻이다.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조홍(曹洪)이 술자리를 크게 베푼 뒤, 여창(女唱)에게 북 위를 밟고 다니게 하자, 모두 크게 웃었다는 고사가 있다. 《三國志 魏志 楊阜傳》
♣ 답답[沓沓]말이 많은 모양, 완만한 모양, 빨리 가는 모양
♣ 답렵[踏獵]군사 훈련을 검열하기 위하여 호위(扈衛)하는 군사만 데리고 사냥하여 짐승을 잡는 것.
♣ 답빈희[答賓戲]답빈희는 문장(文章)의 이름으로, 후한(後漢) 때 반고(班固)가 오직 유학(儒學)에 뜻을 독실히 하면서 저술(著述)로 업을 삼았는데, 혹자가 반고에게, 아무리 박학(博學)하여도 세상에는 아무런 공로가 되지 못한다고 조롱하므로, 반고가 동방삭(東方朔)의 답객난(答客難)과 양웅(揚雄)의 해조(解嘲)를 모방하여 주객(主客)을 가설해서 문답체(問答體)로 지은 것이다. 《文選 卷四十五》
♣ 답사[踏莎]사곡(詞曲)의 이름으로 답사행(踏莎行)을 말한다.
♣ 답습[踏襲]먼저 사람이 밟고 간 길을 따라 그대로 밟는 것. 전부터 내려온 정책이나 방식, 수법 같은 것을 그대로 따라 행하는 것을 말함.
♣ 답연연[踏燕然]적과 싸워 공을 이루었음을 비유한 말. 후한(後漢) 때 두헌(竇憲)이 흉노(匈奴)를 정벌하여 격파하고 연연산에 이르러 공업(功業)을 기술했던 데서 온 말이다.
♣ 답진채원[踏盡菜園]채식(菜食)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양육(羊肉)을 먹은 데 대하여 희롱하는 말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항상 채소만 먹다가 갑자기 양육을 한번 먹었더니, 그날 밤 꿈에 오장신(五臟神)이 말하기를 “양(羊)이 채마밭을 마구 짓밟는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답청[踏靑]답청은 푸른 풀 위를 걷는 놀이로서 여러 가지 설(說)이 있는데, 특히 음력 3월 3일의 곡수(曲水)의 잔치를 말한 것이다. 청명(淸明) 절기 전후의 야유회(野遊會).
♣ 당[璫]당(璫)은 귀에 거는 고리라는 말인데, 옛날에 고관들 복장의 일부였다.
♣ 당[堂]흙을 돋우고 높이 지은 집. 상징적인 건물을 뜻함. 특히 관아나 사원, 집회소 등의 높고 큰 집을 일컫는 경우가 많음. (터를 높이 돋워 지은 남향의 본채를 堂이라 함)
♣ 당가롱서군[唐家隴西郡]당(唐) 나라를 세운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농서(隴西) 성기(成紀) 출신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唐書 卷1》
♣ 당가사[黨家事]금색으로 장식한 화려한 장막 아래서 좋은 양고주(羊羔酒)를 마시며 즐기는 일. 송(宋)의 도곡(陶穀)의 첩은 원래 당진(黨進)의 집 시희(侍姬)였는데, 뒤에 도곡의 첩이 되었다. 어느 날 눈이 내리자 도곡이 그 첩을 시켜 눈 녹인 물로 차를 다리라고 하면서, 당진의 집안에도 그러한 풍류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 첩이 대답하기를, “그들 녹록한 위인들이 어떻게 그러한 풍미를 알겠습니까. 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다만 금색으로 장식한 화려한 장막 아래서 술을 넌지시 부어놓고 낮은 목소리로 노래해 가며 좋은 양고주나 마시는 것이지요.” 하여, 도곡이 부끄러운 기색을 가졌다고 함. 《宋史 卷二百六十九》
♣ 당감[唐鑑]당감은 송(宋)의 범조우(范祖禹)가 찬한 것으로 모두 24권인데, 당 고조(唐高祖)에서부터 소제(昭帝)ㆍ선제(宣帝)까지의 역사에 대하여 기록한 다음 아울러 평론을 가하였다.
♣ 당개[唐介]당개는 송(宋) 나라 때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서 임금을 극간하고 부정한 관원들을 마구 탄핵했던 직신이었다. 재상 문언박(文彦博)을 탄핵하여 강직하기로 유명하다.
♣ 당계[棠溪]당계는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지명으로, 옛날부터 명검(名劍)이 산출되기로 유명한 곳이다.
♣ 당계곡[唐鷄曲]고려가요 중의 효자 문충(文忠)이 지은 유명한 목계가(木鷄歌), 곧 오관산곡(五冠山曲).
♣ 당고[黨錮]후한(後漢) 말의 환제(桓帝) 때에 사대부인 이응(李膺), 진번(陳蕃) 등이 환관(宦官)의 전권(專權)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체포되어 종신토록 벼슬을 못 하는 금고(禁錮)의 형을 받았는데, 이를 ‘당고의 화’라 한다.
♣ 당구[堂構]집터를 닦고 건물을 세운다는 말로, 선조의 유업(遺業)을 후손들이 계속 이어받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뜻한다. 서경(書經) 대고(大誥)의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하여 이미 설계까지 끝냈다 하더라도, 그 자손이 집터도 닦으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집이 세워지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不肯堂 矧肯構]”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당구삼년폐풍월[堂狗三年吠風月]무식한 이도 유식한 사람과 지내다 보면 자연히 견문(見聞)이 넓어지게 됨
♣ 당구풍월[堂狗風月]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음.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오랫동안 늘 보고 들은 일은 쉽게 해낼 수 있음. 또는 무식한 자라도 유식한 자와 같이 있으면 다소 유식해진다는 뜻
♣ 당귀[當歸]약명(藥名). 꼭 돌아오라[當歸]는 뜻을 취하여 쓰기도 함.
♣ 당금지지[當禁之地]다른 사람이 들어와 장사지냄을 허락하지 않는 땅.
♣ 당당[撞撞]계속해서 치는 모양
♣ 당당[唐唐]넓은 모양
♣ 당당[儻儻]얽매이지 않는 모양
♣ 당당[堂堂]용모가 훤칠하고 행동이 정당한 모양, 용기가 있는 모양, 여럿 중에 뛰어난 모양, 지대가 높고 전망이 탁 트인 모양, 국토가 빼어난 모양, 숨기지 않는 모양, 물체가 삐걱거리는 소리, 진용이 정돈된 모양
♣ 당도[當道]당도는 정도(正道)에 부합된다는 뜻으로서 곧 임금을 이끌어 정도에 부합되게 한다는 것.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군자가 임금을 섬길 때는 그 임금을 힘써 이끌어 정도에 부합되게 해야 한다.[君子之事君也 務引其君以當道]" 하였음.
♣ 당돌서시[唐突西施]당돌한 서시라는 뜻으로, 꺼리거나 어려워함이 없이 올차고 다부진 서시라는 뜻의 고사성어.
♣ 당동벌이[黨同伐異]도리와는 관계없이 자기와 같은 패의 사람은 덮어놓고 돕고 자기와 다른 패의 사람은 물리침.
♣ 당랑가경와가식[螳螂可敬蛙可式]앞발을 들어 수레를 막는 사마귀와 우물 안에서 뛰어노는 개구리가 힘이 미약하고 소견이 좁기는 하지만, 강한 적에 대항하는 의기와 양양자득한 뜻은 높이 살 만하다는 것이다.
♣ 당랑거철[螳螂拒轍]당랑(사마귀)이 팔을 벌리고 수레(轍)를 막음. 제 힘으로 당하지 못할 것을 생각지 않고 대적함.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猶螳蜋之怒臂以當拒轍"이라 하였음.
♣ 당랑재후[螗蜋在後]사마귀가 매미를 잡아먹으려 뒤에서 엿보는데 매미는 모르고, 사마귀는 몸을 숨겨 찰싹 붙어 매미를 잡으려 하되 참새가 그 옆에 있음을 모르며, 참새는 목을 늘여 사마귀를 쪼으려 하되 저를 겨눈 탄환이 그 밑에 있는 줄을 모른다는 설원(說苑)에 나오는 얘기로 한갖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덤비고, 해를 입을 것을 생각지 않으면 재화(災禍)를 당하게 됨을 비유한 것이다.
♣ 당랑포선[螳螂捕蟬]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덤비면 결국 큰 해를 입게 된다는 뜻의 고사성어.
♣ 당래수능오헌면[儻來誰能傲軒冕]장자(莊子) 선성(繕性)의 “요즘 사람들은 관직[軒冕]을 얻고는 뜻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몸에 속한 것이지 성명(性命)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서, 우연히 찾아와 몸에 잠깐 붙어 있는 것이다.[物之儻來寄也]”라는 구절을 원용(援用)한 것이다.
♣ 당래지사[當來之事]앞으로 마땅히 닥쳐올 일.
♣ 당로독비[當壚犢鼻]한(漢) 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아내 탁문군(卓文君)과 함께 목로집을 차리고서, 아내에게는 손님에게 술을 팔게 하고 자신은 쇠코잠뱅이를 입고 잡역(雜役)을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당릉[唐陵]당(唐)은 종묘 안의 큰 길을 뜻하는 말로, 왕릉 즉 선조의 능을 가리킨다.
♣ 당림[棠林]아가위나무 수풀, 곧 선정(善政)을 베푸는 곳. 주(周) 나라 소공(召公)이 남순(南巡)할 때 감당나무[甘棠] 아래에서 쉬어 머물기도 했다는 고사. 시경(詩經) 소남(召南) 감담편(甘棠篇)에서 나온 문자로, 김의랑(金議郞)이 방백(方伯)으로 나가는 것을 미화하여 이르는 말이다. 발사(茇舍)는 그때 소공이 임시로 집짓고 일을 보던 초막(草幕).
♣ 당망[曭莽]해가 빛이 없음.
♣ 당명황[唐明皇]당 현종(唐玄宗)의 별칭.
♣ 당무백도아[堂無伯道兒]뒤를 이을 자식이 없는 것을 말한다. 백도(伯道)는 진(晉) 나라 등유(鄧攸)의 자이다. 등유가 하동 태수(河東太守)로 있을 적에 석늑(石勒)의 난을 만나 자기 아들과 동생의 아들을 데리고 피난하였는데, 도중에 적을 만났다. 등유는 두 아이를 다 살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여겨 자기의 아들은 버리고 동생의 아들만 살렸는데, 그 뒤에 끝내 후사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의 행실을 의롭게 여기면서 슬퍼하여 “천도가 아는 것이 없어서 백도로 하여금 아들이 없게 했다.” 하였다. 《晉書 卷90 良吏列傳 鄧攸》
♣ 당무후[唐武后]당 고종(唐高宗)의 황후인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말한다. 고종이 죽자 자기 아들 중종(中宗)을 세웠는데 마음에 맞지 않았으므로 폐위시키고 둘째 아들 예종을 세웠다. 그러나 곧 폐위시키고 자신이 정권을 휘두르면서 국호(國號)를 주(周)라 고치고 요직(要職)에 친족을 앉혔으나, 뒤에 장간지(張柬之) 등에 의하여 폐위되었다.
♣ 당반환제마[唐班煥制麻]당나라에서는 대관 임명장은 누른 마지(麻紙)를 썼다.
♣ 당발[棠茇]당발은 감당나무 아래에 있는 초막이란 말로, 주(周) 나라 때 감당나무 아래에서 어진 정사를 펼친 소공을 가리킨다. 주 나라 때 소공(召公)이 북연(北燕)에 봉해져서 감당나무 아래에서 어진 정사를 펼쳤는데, 소공이 죽은 뒤에 백성들이 소공을 그리워해 감당나무를 감히 베지 못하면서 감당지시(甘棠之詩)를 지어 기렸다. 《史記 卷34 燕召公世家》
♣ 당발[棠茇]당발은 주(周) 나라 소공(召公)이 머물러 쉬었던 감당(甘棠)나무를 말하는데, 시경(詩經) 소남(召南) 감당(甘棠)의 “무성히 자란 감당나무, 자르거나 베지 말라. 우리 소백께서 쉬셨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당발기물전[棠茇期勿翦]시경(詩經)의 감당편(甘棠篇)은 소공(召公)이 방백(方伯)으로 있을 때에 백성에게 은혜가 있었으므로 가고 난 뒤에도 백성들이 그가 자주 쉬던 감당나무를 베지 말자는 노래이다.
♣ 당비[黨碑]원우간당비(元祐奸黨碑)를 말한다.
♣ 당비거철[螳臂拒轍]자기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강적을 대항함이 마치 사마귀가 성난 팔로 수레바퀴를 막음과 같다는 말이다.
♣ 당산[當産]해산할 날이 임박하다.
♣ 당상촉[堂上燭]두보(杜甫)의 시에 “마루 위에 촛불 아직 켜기도 전에, 자리 털고 일어나며 벌써 갓을 바로 쓰네.[堂上燭未秉 座中冠已峨]”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3 詠興五首》
♣ 당성[唐城]남양(南陽)의 옛 이름이다.
♣ 당송총서[唐宋叢書]명(明) 나라 사람 종인걸(鍾人傑)과 장수신(張遂辰)이 공저한 책 이름. 당송(唐宋) 때의 저술을 경사자집(經史子集) 별로 분류 편찬하였는데, 총 40권임.
♣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당(唐)나라와 송(宋)나라 시대의 여덟 명의 저명한 문장 대가(大家). 곧 당나라의 한유(韓愈; 韓退之) 유종원(柳宗元; 柳子厚), 송나라의 구양수(歐陽脩; 歐永叔) 왕안석(王安石; 王介甫) 증공(曾鞏; 會子固) 소순(蘇洵; 蘇明允) 소식(蘇軾; 蘇東坡) 소철(蘇轍; 蘇子由). 당송 팔가, 팔대가라고도 일컬음.
♣ 당수[棠樹]선정(善政)을 베푼 수령을 위해 베지 않고 남겨 놓은 나무로, 송덕비(頌德碑)와 같은 뜻이다. 주(周) 나라 소공(召公)이 감당(甘棠)나무 아래에서 정사를 행하였는데 백성들이 그 덕을 사모하여 나무를 보호하면서 감당(甘棠) 시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史記 燕召公世家》
♣ 당양동패[當陽同敗]조조(曹操)가 형주(荊州)를 함락하자 그 고을 백성들이 모두 유비(劉備)를 따라나섰다. 그리하여 양양(襄陽)을 지나 당양(當陽)까지 오는 동안 조조의 추격군은 하루 1백 리 이상을 달려 추격해 왔으나, 부녀자 노약자를 차마 못 버려 다 데리고 행군을 하는 유비군은 드디어 당양에 이르러 추격군의 세찬 공격을 받고 여지없이 패했던 것이다. 《三國志》
♣ 당요관화[唐堯觀華]당요(唐堯)가 화 지방의 민심을 살펴보러 나갔을 때 그곳의 관리가 당요에게 오래 살고 재물이 많고 아들을 많이 두라는 것으로 축복하자, 대답하기를 “아들이 많으면 걱정이 많고 재물이 많으면 일거리가 많고 오래 살면 욕될 일이 많다.” 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곧 당요 자신은 그와 같은 축복을 받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뜻인 듯하다. 《莊子 天地》
♣ 당우[唐虞]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의 시대로, 요순 시대를 말하며, 태평 시대를 가리킨다.
♣ 당우[唐虞]도당씨(陶唐氏)와 유우씨(有虞氏) 즉 요(堯)와 순(舜)을 말한다.
♣ 당우[唐虞]요(堯)와 순(舜)이 세웠던 두 나라의 이름.
♣ 당우읍양[唐虞揖讓]당우는 요순(堯舜)을 가리키는 말이고, 읍양은 천자(天子)의 지위를 서로 양여(讓與)하는 일을 말한다. 즉 요와 순이 서로 평화롭게 천자의 자리를 주고받은 것을 뜻하는 말로, 공영달(孔穎達) 상서정의 서(尙書正義序)에 “요순은 읍양하여 전(典; 堯典ㆍ舜典)과 모(謨; 大禹謨ㆍ皐陶謨)가 일어났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당위출유분[唐圍黜劉賁]당위는 당(唐) 나라 궁궐을 말한다. 유분(劉蕡)이 태화(太和) 2년에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어 대책(對策)에서 환관들의 폐단에 대해 극언하였는데, 그 당시에 환관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던 탓에 고관(考官)이 감히 뽑지 못하고 낙방시켰다. 그러자 같이 대책에 응하였던 이태(李邰)가 “유분이 낙방하고 우리가 급제하였으니, 어찌 낯두껍지 않겠는가.” 하였다. 《新唐書 卷178 劉蕡列傳》
♣ 당유함[唐類函]명(明) 나라 유안기(兪安期)의 찬으로 총 2백 권. 내용은 예문유취(藝文類聚)ㆍ초학기(初學記) 등의 유서에서 중복되는 것을 제거, 분류별로 수록한 것임.
♣ 당음[唐音]당음은 14권으로 원(元) 나라 양사굉(楊士宏)이 편찬했는데 엄정하게 선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장진(張震)의 주가 붙어 있음.
♣ 당음[棠陰]지방장관 또는 정사를 행하는 관소(官所)를 뜻한다. 주 무왕(周武王) 때 소공(召公)이 서백(西伯)이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는데, 그가 감당나무 그늘[棠陰] 아래에서 쉰 것을 기념하여 백성들이 그 나무를 보존하며 노래를 지어 불렀던 고사가 전한다. 《詩經 召南 甘棠 序》
♣ 당인비[黨人碑]송(宋) 나라 때 정강의 변(靖康之變)을 조성한 육적(六賊)의 괴수로 알려진 채경(蔡京)이 일찍이 원우(元祐) 연간의 당인(黨人)인 사마광(司馬光) 이하 3백 90명의 이름을 비석에 새겨 단례문(端禮門) 밖에 세웠던 것을 말한다.
♣ 당일[唐逸]죽계육일(竹溪六逸)
♣ 당장걸위승[唐將乞爲僧]당 덕종(唐德宗) 때의 명장 이성(李晟)이 일찍이 장연상(張延賞)과 사이가 좋지 않아 그로부터 훼방을 듣게 되자, 중이 되어 해진 우차(牛車)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임금에게 청했던 데서 온 말이다. 《唐書 卷一百五十四》
♣ 당장화흔석상류[唐將靴痕石上留]부여(扶餘) 백마강(白馬江)에 있는 조룡대(釣龍臺)의 전설을 말한다. 나당(羅唐) 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당장(唐將) 소정방(蘇定方)이 백마강에 이르자 용(龍)의 조화로 갑자기 바람이 일고 비가 쏟아졌다. 그래서 백마를 미끼로 하여 그 용을 낚았는데, 그때 용의 무게에 의하여 신발 흔적이 바위에 남아 있다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十八 扶餘縣》
♣ 당저[當宁]현재의 임금을 일컫는 말로, 금상(今上)과 같은 뜻이다.
♣ 당제교횡계백영[唐帝橋橫桂魄盈]당제는 현종(玄宗)을 가리킨다. 현종이 양귀비(楊貴妃)와 칠석날 밤에 죽어 하늘 나라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 당제자[唐帝咨]당제는 요(堯) 임금을 가리킨 것으로, 요 임금이 이르기를 “아, 사악(四岳)아, 성대한 홍수(洪水)가 한창 재해를 일으켜 벌창하게 흘러 산과 언덕을 싸고 넘어서 하늘까지 범람한다.” 하며, 걱정하였던 데서 온 말이다. 《書經 堯典》
♣ 당조헌육잠[唐朝獻六箴]당(唐)의 이덕유(李德裕)가 절서(浙西)의 관찰(觀察)로 있을 때 소의(宵衣)ㆍ정복(正服)ㆍ파헌(罷獻)ㆍ납회(納誨)ㆍ변사(辨邪)ㆍ방미(防微) 등 단의(丹扆) 육잠(六箴)을 왕에게 올렸다. 《舊唐書 卷一百七十四 李德裕傳》
♣ 당중언[唐仲言]중언은 청(淸) 나라 당여순(唐汝詢)의 자이다. 여순은 5세 때 눈이 멀었는데, 눈이 멀기 이전에 벌써 약간의 글자를 알았으며, 눈이 먼 뒤에는 여러 형들의 글읽는 소리를 듣고 하나하나 다 기억하여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시에 능하여 당시해(唐詩解)를 짓기까지 하였는데, 전겸익(錢謙益) 같은 학자도 그의 당시해를 높이 평가하였다.
♣ 당지[唐志]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를 말함.
♣ 당직상언[當直上言]의금부(義禁府)의 당직청(當直廳)에 나아가 원억(冤抑)을 하소하는 글을 임금에게 올리는 것.
♣ 당차홍종[撞此洪鍾]스승을 종에 비유하여 물어오면 가르쳐 준다는 것임. 논어문의통고(論語問義通攷) 자한(子罕) 권9에 “양씨(楊氏)가 말하기를 ‘물음에 잘 응하는 것은 종을 치는 것과 같다. 종은 본디 소리가 없으나 두드리면 울리니, 성인이 아는 것이 없다가 어떤 사람의 물음으로 인하여 아는 것이 나타나는 것 또한 그와 같다.’ 하였다.” 하였음.
♣ 당참[堂參]새로 부임하는 수령(守令)ㆍ진장(鎭將)이 낭청(郎廳)에게 주는 예물을 이른다. 조선조 때에 수령(首領)ㆍ찰방(察訪)ㆍ만호(萬戶) 등이 새로 부임하게 되면, 의정부(議政府)와 이(吏)ㆍ병조(兵曹)에 나아가 인사를 드리는 것이 법례였는데, 그 참알(參謁)할 적에는 으레 그 관사의 낭청(郎廳)들에게 예물을 바쳤던 것이니, 이를 당참 (堂參)이라 하였다.
♣ 당창[唐昌]당창은 당 나라 도관(道觀)의 이름이다. 당 현종(唐玄宗)의 딸 당창공주(唐昌公主)가 옥예화(玉蕊花)를 그곳에 손수 심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당창이라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 당체부화[棠棣敷華]형제간에 의가 좋은 것을 말한다. 당체는 시경(詩經) 소아의 한 편명으로, 형제가 화목하게 술을 마시며 즐기고 있는 것을 노래한 시인데, 상체(常棣)에 “당체의 꽃이여 밝고 곱지 않는가? 지금 사람은 형제만 같음이 없느니.” 하였다.
♣ 당체시[棠棣詩]시경(詩經)의 당체편(棠棣篇)을 말하는데, 이 시는 형제(兄弟)가 화목하게 술을 마시며 즐기고 있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당체는 곧 상체와 같은 것으로, 산앵도나무를 가리킨다.
♣ 당초공수생[塘草共愁生]동생의 안부가 궁금하여 걱정된다는 말이다. 당초(塘草)는 “池塘春草”의 준말이다. 남조(南朝) 송(宋)의 사영운(謝靈運)이 하루 종일 마땅한 시구를 얻지 못해 고민하다가 오매불식(寤寐不識) 간에 족제(族弟)인 사혜련(謝惠連)을 홀연히 보고는 곧바로 “池塘生春草”라는 절묘한 표현을 떠올렸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南史 卷19 謝惠連傳》
♣ 당탑련사방[鼞鞳連四方]옛날에는 일식(日蝕)이 있으면 징을 치고 북을 쳐서 일식을 구(救)한다는 풍습이 있었다.
♣ 당포작[螳怖雀]사마귀[螳螂]가 매미를 잡기에 열중하여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모른다. 《說花》
♣ 당항[党項]부족(部族)의 이름으로, 북송(北宋) 때에 그 족인(族人)인 이원호(李元昊)가 칭제(稱帝)했는데, 사서(史書)에서는 이를 서하(西夏)라 일컫는다.
♣ 당헌종[唐憲宗]당 헌종(唐憲宗)이 회서(淮西)의 오원제(吳元濟)를 칠 때에는 반대론이 많았으나, 그것을 물리치고 재상배도(裴度)의 토벌론을 좇아 3년만에 토평했다.
♣ 당화일반고[棠華一半枯]형제 가운데 한 사람이 죽었다는 말이다. 형제의 우애를 강조한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에서 유래한 것이다.
♣ 당황[堂皇]방 사방에 벽이 없는 것을 황이라 함.
♣ 당후[堂後]승정원(承政院)에서 정7품 벼슬인 주서(注書)가 있는 방, 또는 승정원주서의 이칭이다.
♣ 당희선[唐僖宣]당 나라 제18대 황제 희종(僖宗)과 제19대 황제 선종(宣宗)을 말하는 것이다.
♣ 대[碓]곡식 찧는 방아.
♣ 대[玳]대모(玳瑁)를 말하니, 즉 거북의 일종임. 등껍질은 장식품에 쓰임.
♣ 대[黛]여자가 화장할 때 눈썹을 그리는 청흑색의 먹. 또는 눈썹먹으로 그린 눈썹을 가리킴.
♣ 대[大]장성하다. 성년이 되다.
♣ 대가[代加]벼슬의 자급을 올리는데 있어 부형의 벼슬이 자궁(資窮)인 통훈대부(通訓大夫)가 되어 친히 은전을 받지 못하므로 그 자제(子弟)에게 대신 주는 것을 대가(代加)라 한다.
♣ 대가[大家]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자가 임금을 일컬을 때 하는 말. 태후(太后) 또는 황후(皇后)를 일컫는 말.
♣ 대가[待價]자공이 “여기 아름다운 옥이 있사온데, 궤 속에 감춰 두리이까. 좋은 값을 얻고 팔리이까.” 하니, 공자가 이르기를, “팔고말고, 팔고말고, 그러나 나는 값을 기다리는 자이로라.” 하였다. 논어(論語)
♣ 대간무[戴竿舞]명황잡록(明皇雜錄)에 “임금이 근정루(勤政樓)에 올라 풍악을 갖추고 온갖 기예(技藝)를 벌이게 했는데, 여우(女優) 대랑(大娘)이 대간무를 잘 추었다. 즉, 머리 위에 긴 장대를 이고 목상(木床)을 올려놓은 다음 여러 어린애가 붉은 절모(節旄)를 들고 그 위에 올라서면 춤을 추어 음절(音節)을 맞춘다.” 하였다.
♣ 대간사충[大姦似忠]악한 사람이 본성을 숨기고 충신처럼 보인다는 뜻의 고사성어.
♣ 대감[臺監]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말한다.
♣ 대갑[帶甲]갑옷 입은 병사(兵士).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에, “齊 地方千里 帶甲十萬 粟如丘山”이란 것이 보임.
♣ 대강[太康]진 무제(晉武帝)의 연호
♣ 대객초인사[對客初人事]손님에게 먼저 담배를 권하는 것이 재래 우리나라의 습관으로 먼저 담배를 권함을 이르는 말.
♣ 대갱[大羹]오미(五味)를 일체 첨가하지 않은 담박한 육즙(肉汁). 큰 제사에 쓰는 대갱은 조미를 하지 않는데, 그 질을 중히 여기는 뜻이라고 함.《禮記 郊特牲》 다섯 가지 맛으로 조미하지 않은 종묘(宗廟)의 대례(大禮) 때 쓰는 고깃국이다.《禮記 樂記》
♣ 대건[大蹇]매우 험난한 때라는 말.
♣ 대건타면[待乾唾面]당 나라 누사덕(婁師德)이 그 동생을 지방에 수령(守令)으로 보내면서 “네가 장차 어떻게 처신할 것이냐.” 하니 동생은 대답하기를, “다른 사람이 저의 낯에 침을 뱉으면 닦고 말겠습니다.” 하였다. 누사덕은, “안될 말이다. 남의 뱉은 침을 닦으면 그 사람이 노할 것이다. 그대로 말리는 것이 옳다.” 하였다.
♣ 대게[大偈]대계는 불법을 말한다.
♣ 대경당집[帶經堂集]청(淸) 나라 왕사정(王士禎)의 저서이다.
♣ 대경유가사치여[帶經猶可事菑畬]한(漢) 나라 예관(兒寬)이 품팔이를 할 적에 늘 경서를 몸에 지니고 밭일을 하다가 휴식할 때면 독송을 했던[時行賃作 帶經而鋤 休息輒讀誦] 고사가 있다. 《漢書 兒寬傳》
♣ 대고[大軱]넓적다리 부분의 큰 뼈.
♣ 대고[大苦]메주 또는 된장이다.
♣ 대고[大孤]함양(咸陽)의 남계(灆溪)에 있는 대(臺) 이름이다.
♣ 대곡[大谷]맛 좋은 배가 나는 땅 이름ㆍ반악(潘岳)의 한거부(閑居賦)에 “장공(張公)은 대곡의 배요 양후(梁侯)는 오비(烏椑)의 감이다.” 하였다.
♣ 대곡리[大谷梨]대곡(大谷)의 배는 큰 골짜기에서 나는 배로 반악(潘岳)의 한거부(閑居賦)에 “장공(張公) 대곡의 배와 양후(梁侯) 오비(烏椑)의 감이다.” 하여 천하에 유명하였다.
♣ 대곡서당[大谷書堂]나주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있는 서원으로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獻公)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문정공(文正公)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 등 오현(五賢)을 향사(享祀)하였다.
♣ 대공무사[大公無私]매우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
♣ 대공선[大空禪]소승(小乘)의 편공(偏空)에 상대말로서, 대승 구경(大乘究竟)의 공적(空寂)을 대공이라 하는데, 그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 곧 대승의 열반을 말한다.
♣ 대공신관[帶孔新寬]심약(沈約)이 친하게 지내던 서면(徐勉)에게 “이번에 쾌차(快差)함이 전의 쾌차함만 못하고, 이번 병세가 전번보다 심하다. 백여 일 동안에 야위어 띠 구멍은 넓어지고, 팔목을 재 보니 한 달 동안에 반푼이나 줄었다.” 하였다. 늙고 병들어 몸이 야윔을 말한 것이다.
♣ 대관장영[大冠長纓]큰 갓과 긴 갓끈.
♣ 대관제물[大觀齊物]세상에 서로 옳으니 그르니 하는 물론(物論)을 다 같이 가지런하게 본다는 뜻. 《莊子 齊物論》
♣ 대관혈[臺官血]고려(高麗)의 심양(沈▣)이 충간(忠諫)을 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형신(刑訊)을 받았다. 형신을 받으며 흘린 피가 형구에 묻은 것을 가리킨 말.
♣ 대괴[大塊]천지(天地)를 이른다.
♣ 대구[待扣]남을 지도할 준비가 되어 있음.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남이 묻는 것에 잘 대답하는 자는 마치 쇠북을 두드리는 것과 같아서 작은 채로 치면 작게 울어주고, 큰 채로 치면 크게 울어준다.” 하였음.
♣ 대군[代郡]대군은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태원현(太原縣) 부근인데 전국 시대 조(趙)의 명장(名將) 이목(李牧)이 여기에 있으면서 군사를 훈련하고 수비를 잘하여 명성을 떨쳤다.
♣ 대궤[臺餽]조정에서 하사한 물품을 가리킨 말이다.
♣ 대규[戴逵]진(晋) 나라 사람. 자(字)는 안도(安道).
♣ 대규파금[戴逵破琴]대규(戴逵)는 진(晉)의 은사(隱士). 그는 여러 번 나라에서 불렀으나 벼슬하지 않고 책과 거문고를 즐기면서 살았다. 한번은 무릉왕(武陵王) 희(晞)가, 대규가 거문고를 잘 탄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부르자 “나는 왕의 악공(樂工)은 되지 않겠다.” 하고는 거문고를 사자 앞에서 부수어 버렸다. 《晉書 卷九十四 戴逵傳》
♣ 대균[大鈞]균(鈞)은 질그릇을 만들 때 사용하는 윤전기(輪轉器). 균은 각종 질그릇을 만들어 낸다 하여 흔히 대자연의 조화를 뜻하는데 나라의 재상 역시 정사를 하는 데에 그와 같은 역량을 발휘하는 자리이므로 재상을 가리키기도 한다.
♣ 대균[大均]연파거사(煙波居士) 박개(朴漑)의 자이다.
♣ 대기대용[大機大用]불가 용어로 대승법(大乘法)을 수지(受持)한 보살승(菩薩乘)에 이른 사람. 연자방아의 효용.
♣ 대기만성[大器晩成]큰그릇은 늦게 이루어짐. 큰 인물은 오랫동안의 노력 끝에 완성된다는 뜻으로,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짐의 비유. 만년(晩年)이 되어 성공하는 일. 과거에 낙방한 선비를 위로하는 말로도 쓰임
♣ 대나천[大羅天]도교에서 말하는 삼십육천(三十六天)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하늘이다.
♣ 대년[大年]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소지(小知)는 대지(大知)의 세계를 모르고, 소년(小年)은 대년(大年)의 차원을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 대년춘[大年椿]대년은 고년(高年)이나 장수(長壽)를 가리킨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상고에 큰 춘나무가 있었는데, 8천 년을 봄으로 하고 8천 년을 가을로 한다.” 하였으므로 부모나 노인의 장수를 빌 때에 춘수(椿壽)ㆍ춘령(椿齡)이란 말을 쓴다.
♣ 대단[臺端]어사대 안의 잡사(雜事)를 처리하는 시어사(侍御史)를 가리킨다.
♣ 대대[代代]거듭된 여러 대, 면대(綿代)‧세세(世世)‧열대(列代)‧적세(積世)‧혁세(奕世)
♣ 대대[大大]매우 큼, 맏누이를 이름
♣ 대대손손[代代孫孫]대대로 내려오는 자손.
♣ 대덕현인[大德賢人]지혜와 덕망이 높은 스님을 칭하는 말. 본래는 부처님을 일컫던 말인데 뒤에 사문(沙門)의 존칭으로 되었다.
♣ 대도[大道]대도는 곧 불도(佛道)를 말한다.
♣ 대도[大刀]대도는 대도환(大刀環)으로, 돌아간다는 뜻인 환(還)의 은어인데, 큰 칼에 달린 고리인 환(環)이 환(還)과 음이 같으므로 취해서 쓴 것이다.
♣ 대도[大都]원도(元都) 연경(燕京)
♣ 대도백적[大度百適]관아에 매이는 일이 없이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백적(百適)은 백적(百讁)으로, 한(漢) 나라 때 백 번 견책을 받으면 면직되는 고사가 있었다. 공부(公府)의 연리(掾吏) 진준(陳遵)이 날마다 밖에 나가 술에 취해 업무를 폐한 나머지 백 번 견책을 받은 끝에 면직될 운명에 처했는데, 대사도(大司徒) 마궁(馬宮)이 “이 분은 대도(大度)의 인사인데, 어떻게 자잘한 법규로 문책할 수 있는가.” 하고 우대했던 고사가 있다. 《漢書 游俠傳 陳遵》
♣ 대도입수[大刀入手]대도는 대도환(大刀環)으로, 돌아간다는 뜻인 환(還)의 은어인데, 큰 칼에 달린 고리인 환(環)이 돌아간다는 뜻인 환(還)과 음이 같으므로 취해서 쓴 것이다. 《漢書 卷54 李廣傳 李陵》
♣ 대도절[大刀折]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대도는 대도환(大刀環)으로, 돌아간다는 뜻인 환(還)의 은어인데, 큰 칼에 달린 고리인 환(環)이 돌아간다는 뜻인 환(還)과 음이 같으므로 취해서 쓴 것이다. 《漢書 卷54 李廣傳 李陵》
♣ 대도환[大刀鐶]칼 머리에 달린 고리를 말하는데, 환(鐶)은 환(還)과 음이 같으므로 곧 고향으로 돌아가는 뜻으로 쓰인다.
♣ 대독[帶犢]한 선제(漢宣帝) 때 발해(渤海)에 흉년이 들어 칼을 차고 도적질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공수(龔遂)가 수령이 되자 그들로 하여금 칼을 팔아 송아지를 사게 하며 타이르기를 “무엇 때문에 송아지를 차고 다니느냐?"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전(轉)하여 ‘도적질’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漢書 循使傳》
♣ 대동단결[大同團結]나위었던 단체나 당파가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대립됐던 자신들의 이익을 버리고 뭉치어 한 덩어리가 되는 것.
♣ 대동비[大同碑]사가시전주(四家詩箋註)에 의하면 조선 때 대동전세법(大同田稅法)을 시행하면서 이민구(李敏求)가 비문을 찬(撰)하였다 한다.
♣ 대동소이[大同小異]크게 보면 같지만 작게 보면 다름. 작은 부분에서만 다르고 전체적으로는 같음. 즉, 거의 같다는 말. 혜시(惠施)의 소동이(小同異), 대동이(大同異) 론(論)에서 비롯된 말이다.
♣ 대동천[大洞天]선경(仙境)을 말한다. 도교(道敎)에서는 신선이 사는 땅의 세계로 10대 동천을 설정하고 있다.
♣ 대두[大斗]자루의 길이가 석 자나 되는 큰 국자로, 시경(詩經) 대아(大雅) 행위(行葦)에 “큰 국자로 술을 떠서, 오래 사시라 기원하네.[酌以大斗 以祈黃耈]”라는 구절이 있다.
♣ 대두인[大頭人]머리 큰 사람이란 말로 이는 나선정벌(羅禪征伐) 때 우리 나라 군사가 모두들 벙거지[전립(戰笠)]를 썼었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이 말의 출처는 흑룡강(黑龍江) 하류 지역에 사는 견부락(犬部落)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 대라[大羅]도가에서 말하는 제천(諸天)의 이름으로, 삼청(三淸)의 위에 있다 한다.
♣ 대라천[大羅天]상상의 천계(天界)로 선계(仙界)의 뜻으로 쓰인다. 삼계(三界)의 밖은 사인천(四人天)이라 하고 사인천 밖은 삼청(三淸)이라 하고 삼청의 위는 대라천이라 한다. 대라천의 위에 또 구천(九天)이 있다고 함.《酉陽雜俎 玉格》 이상은(李商隱)의 시에 “曾記大羅天上事 群仙同日詠霓裳"이라 하였음.
♣ 대란패[臺蘭佩]난초 꽃은 향기가 높아서 예전부터 점잖은 사람들이 그것을 찼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한 것은 실지로 난초꽃을 찬 것이 아니고 그와 같이 향기로운 마음씨를 갖는다는 말이다.
♣ 대랑[大娘]당(唐) 나라 때의 교방기(敎坊妓)로 검무(劍舞)에 뛰어났던 공손대랑(公孫大娘)을 가리킨다.
♣ 대량[大梁]이아(爾雅) 석천에 의하면, 묘성(昴星)의 별칭. 서륙(西陸)이라고도 함.
♣ 대량[大梁]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내 개봉(開封).
♣ 대려[帶礪]대려는 “황하가 허리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아 없어질 때까지[黃河如帶 泰山如礪]”라는 말이다. 《史記 高祖功臣侯者年表》
♣ 대려[大呂]주(周) 나라 종묘(宗廟)에 설치한 큰 종(鐘)의 이름으로, 구정(九鼎)과 함께 주 나라의 보기(寶器)로 전해온 것인데, 전하여 크고 귀중함의 뜻으로 쓰인다.
♣ 대려맹[帶礪盟]사기(史記)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에 “관작 봉하는 맹세에 ‘하수가 옷의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작아질 때까지 나라가 길이 안녕할 것이고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하겠다.’”고 하여, 공신의 가족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하였다.
♣ 대려지서[帶礪之誓]황하(黃河)가 띠와 같이 좁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과 같이 작게 되어도 국토(國土)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공신(功臣) 집안은 영구히 단절시키지 않겠다는 서약이다. 《史記 高祖功臣年表》
♣ 대력[大曆]당 대종(唐代宗)의 연호. (766~779)
♣ 대련[大練]거칠게 짠 두꺼운 비단을 말한 것으로, 즉 검소함을 뜻한다.
♣ 대련지선훈[大練之先訓]한(漢)의 명덕 마 황후(明德馬皇后)가 매우 검소하여 언제나 대련(大練)으로 지은 옷을 입었고, 치마는 가장자리를 싸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明德馬皇后紀》 대련은 거친 명주이다.
♣ 대령[大令]진(晉) 나라 때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아들로서 역시 명필인 왕헌지(王獻之)를 말하는데, 특히 왕헌지를 대령이라 한 것은, 왕헌지와 왕민(王珉)이 당시에 명성이 서로 같은데다 왕헌지가 중서령(中書令)을 먼저 지내고 왕민이 바로 그 다음에 또 중서령을 지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왕헌지를 대령, 왕민을 소령이라 일컬은 데서 온 말이다.
♣ 대령리[大令梨]대령은 왕헌지의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을 지냈는데 직을 떠나자 왕민(王珉)이 갈음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헌지를 대령(大令)이라 하고 민을 소령(小令)이 라 함. 배는 헌지의 송리삼백첩(送梨三百帖)을 말함.
♣ 대로[戴老]대로는 대안도(戴安道)를 말한다.
♣ 대로[大老]나라의 큰 인물을 말함. 맹자(孟子) 이루(離婁) 장구상(章句上)에 “두 늙은이는 천하의 대로인데 돌아왔으니 이는 천하의 아버지가 돌아온 것이다.” 했는데, 그 주에 “두 늙은이는 백이(伯夷)와 태공(太公)이다.” 했다.
♣ 대로[大鹵]대로는 춘추 시대 노 소공(魯昭公) 1년에 진(晉)의 순오(荀吳)가 적(狄)을 격패시켰던 땅 이름인데, 난리를 뜻한다.
♣ 대록[大麓]“순(舜)을 대록에 들이니 매운 바람과 천둥ㆍ비에 미혹치 않았다[納于大麓 烈風雷雨弗述].” 서경(書經) 요전(舜典) 대록에 대하여는 ‘큰 산기슭’ 설(說)과 ‘큰 그릇’ 설, ‘산림(山林)’도 등이 있으나, 요컨대 요(堯)가 순(舜)을 시켜 산림에 들게 하니, 폭풍과 뇌우(雷雨)에 설 길을 잃지 않았다 한 말이다.
♣ 대루[待漏]백관(百官)이 아침 일찍 출근하여 조문(朝門) 밖 대루원(待漏院)에서 입조(入朝)의 시각까지 기다리던 것을 말함.
♣ 대루독조참[待漏獨朝參]각루는 물시계. 백관이 이른 새벽에 대궐에 들어가 임금에게 문안드리는 일을 준비하는 것을 각루를 기다린다고 말하며, 조참은 한 달에 네 번씩 백관이 정전(正殿)에 나와 임금에게 문안을 드리고 정사를 아뢰던 일임.
♣ 대루원[待漏院]당(唐) 나라 때에 설치한 관아의 이름. 백관(百官)이 아침 일찍 출근하여 참조(參朝)의 시각까지 기다리고 있던 곳이다.
♣ 대루청[待漏廳]백관들이 왕에게 아침 인사를 드리기 위해 새벽에 모여 대기하는 장소이다.
♣ 대리본비삼후필[大理本非三后匹]대리는 법관(法官)의 별칭으로, 대사간(大司諫)을 가리킨다. 후한(後漢) 양사(楊賜)가 법관인 정위(廷尉)로 임명되자 “삼후는 공을 이루어 백성을 풍족하게 해 주었는데, 고요는 여기에 끼이지도 못했다.[三后成功 惟殷于民 皐陶不豫焉]”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54 楊賜傳》 또 한유(韓愈)의 시에 “벌써부터 알고말고 대리의 직책이란, 삼후의 반열에 끼이지 못한다는 것을.[早知大理官 不列三后儔]”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대리는 법관을 지낸 고요(臯陶)를 가리키고 삼후는 서경(書經) 여형(呂衡)에 나오는 바, 백이(伯夷), 우(禹), 직(稷)의 3인을 가리킨다. 《韓昌黎集 卷1 赴江陵途中寄贈王李李翰林三學士》
♣ 대리삼자강[大理三字强]법관(法官)이 애매한 누명을 씌워 닦달하는 것을 말한다. 대리(大理)는 옛날 형법을 관장하던 관직 이름이다. 송(宋) 나라 진회(秦檜)가 악비(岳飛)를 무함하여 하옥시키면서 “악비의 아들 운(雲)이 장헌(張憲)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불분명하긴 하나 사체로 볼 때에는 있을 법한 일[莫須有]이다.”고 하자, 한세충(韓世忠)이 “막수유라는 세 글자를 가지고 어떻게 천하 사람들을 이해시키겠는가.” 하였던 고사가 있다. 《宋史 岳飛傳》
♣ 대립[戴粒]개미들이 쉴새없이 머리에 짐을 이고 다니는 것을 말한다. 동해의 별주부가 봉래산을 이고 떠다니는 것을 보고, 개미들이 “저 놈은 어째서 알갱이를 이고 다니는 우리와 달리 산을 이고 다니는가.[彼之冠山 何異我之戴粒]”라고 말했다는 설화에서 대립(戴粒)이 개미의 별명으로 쓰이게 되었다. 《太平御覽 卷947》
♣ 대막[大漠]몽고 고원(高原)의 큰 사막. 한해(瀚海)ㆍ대적(大磧)이라 부르기도 한다.
♣ 대매창[對梅窓]매화나무 창가에서 주역(周易)을 보았다는 뜻이다. 소강절(邵康節)의 시에 “이슬비 내리는 매창에서 주역을 보았네.[梅窓細雨看周易]”라고 하였다.
♣ 대명궁[大明宮]당(唐) 나라 때 장안(長安)에 있던 궁전 이름. 대명(大明)은 동쪽, 태극(太極)은 서쪽, 흥경(興慶)은 남쪽, 이렇게 세 성(省)에서 번갈아가며 조회를 받았는데 그 중에서 대명이 가장 훌륭했다고 함. 《雍錄》
♣ 대모[大茅]대나무를 읊은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작은 것은 잘라서 낚싯대를 만들고, 큰 것은 엮어서 띠집을 잇는다.” 하였다.
♣ 대모[大毛]대모는 시경의 훈고전(訓詁傳)을 지은 전국 시대의 모형(毛亨)을 말한다.
♣ 대모고[玳瑁膏]거북 껍질로 만든 관자(貫子)이다.
♣ 대모군[大茅君]대모군(大茅君)은 한(漢) 나라 때 도인(道人)으로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한 모영(茅盈)을 이르는데, 그의 아우인 고(固)와 충(衷)도 모두 벼슬을 버리고 형을 따라 신선이 되었으므로, 그의 아우들에 대하여 큰 형을 대모군이라 한 것이다.
♣ 대모당[戴帽餳]수(隨)나라 양언광(梁彦光)이 상주수(相州守)로 있을 때 백성들이 친배하여 그를 모자 쓴 엿이라 하여 임금께 청하여 다시 고을 수령으로 갔음.
♣ 대모삼천[玳瑁三千]조 나라의 평원군이 초(楚) 나라의 춘신군(春申君)에게 사신을 보내었는데, 평원군의 사신이 과시하기 위해 대모로 만든 비녀를 꽂고 나가자, 춘신군의 사신은 주옥으로 만든 신발을 신고 나와 맞이하였다. 그러자 평원군의 사자가 기가 꺾였다. 《史記 卷78 春申君列傳》
♣ 대모잠[瑇瑁簪]바다거북 등껍데기로 장식한 비녀.
♣ 대몽선각[大夢先覺]꿈과 같은 이 인생을 먼저 마감하였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그것이 꿈인 줄도 모른 채, 꿈속에서 또 꿈을 점치다가 깨고 나서야 꿈인 줄을 아나니, 크게 깨닫고 난 뒤에야 우리 인생이 커다란 하나의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 대무육성[大武六成]대무는 무왕(武王)의 음악을 말하고, 육성은 여섯 단계로 무악(舞樂)을 연주하는 것을 이른 말로, 자세한 것은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나타나 있다.
♣ 대박[大朴]인심이 아주 순박하여 천하에 전쟁이 없이 태평함을 뜻함.
♣ 대방[帶方]대방은 남원(南原)의 고호(古號)이다.
♣ 대방[大方]큰 도(道)란 뜻인데, 장자(莊子)에서 나온 말이다.
♣ 대배[大拜]정승에 제수되는 것을 말함.
♣ 대보[大寶]왕위(王位)를 말한다. 주역(周易) 계사 하(繫辭下)에 “성인의 대보는 군위(君位)이다.” 하였다.
♣ 대복[大復]대복은 명 나라 때 시인 하경명(何景明)의 호이다. 시(詩)와 고문(古文)으로 당시 십재자(十才子)로 일컬어졌다.
♣ 대부강복[大夫降服]중용(中庸) 18장에 “기년상은 대부에까지 미친다.[期之喪達乎大夫]" 한 데 대하여, 그 주석에 의하면, 대부(大夫)의 방친(旁親)으로 기년복을 입어야 할 자리에 대해서는 한 등급을 내려 대공복(大功服)으로 입는 것을 이른 말이라고 하였다.
♣ 대부송[大夫松]진시황(秦始皇)이 봉선을 행하러 태산(泰山)에 올라갔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나무 아래에서 쉬고는 그 나무를 오대부(五大夫)에 봉했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秦始皇本紀》
♣ 대부인[大夫人]살아 계신 남의 어머니를 일컬음.
♣ 대부작부등고지[大夫作賦登高地]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登高能賦 可以爲大夫"라 하였고, 왕안석 시에 “ 信知大夫才 能賦在登高"라는 글귀가 있음.
♣ 대분[戴盆]머리에 동이를 이고는 하늘을 바라볼 수 없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두 가지 일을 함께 겸하기 어려움을 비유한 말이다.
♣ 대분[大墳]큰 언덕. 뚝
♣ 대분망천[戴盆望天]머리에 동이를 이면 하늘을 볼 수 없는데 보려고 한다. 즉, 두 가지 일을 겸행하고자 하나 할 수 없음을 뜻한다.
♣ 대사[大士]불교(佛敎)에서 보살(菩薩)의 통칭(通稱)으로 쓰는 말이다.
♣ 대사[代舍]전국 시대 맹상군(孟嘗君)의 집에는 문객(門客)을 묵게 하는 상ㆍ중ㆍ하의 관사(館舍)가 있었다 하는데, 대사(代舍)는 그 중에서 상등의 빈객을 접대하는 곳이었다. 《史記 卷75 孟嘗君列傳》
♣ 대사[大姒]주문왕(周文王)의 정비(正妃)인데, 어진 후비(后妃)로 이름이 있다. 덕을 이었다는 것은 역시 어진 후비로 그의 시어머니인 태임(太妊)의 덕을 이었다는 것인데, 시경(詩經)에 있는 말이다.
♣ 대사[岱絲]중국 산동성(山東省) 대령(岱嶺) 지방에서 생산되는 생사(生絲).
♣ 대사명[大司命]사명은 사람의 생명을 맡은 신(神)으로서 하늘을 도와 조화를 행하고, 악한 무리를 죽이고 착한 자를 보호한다고 한다.
♣ 대삼[待三]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창을 잡은 전사(戰士)가 하루에 세 번 대오(隊伍)를 이탈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물음에 “세 번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즉시 처치하겠다.[不待三]”고 대답한 이야기가 나온다.
♣ 대서특필[大書特筆]특히 드러나게 큰 글자로 적어 표시함
♣ 대성[大聖]대성은 대성인으로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 대성[臺省]대성의 대(臺)는 대원(臺院)ㆍ전원(殿院)ㆍ찰원(察院) 등의 어사대(御史臺)를 말하고, 성(省)은 중서(中書)ㆍ상서(尙書)ㆍ문하(門下)의 3성(省)을 말하는데, 이들 관직은 모두 청요직(淸要職)으로 일컬어진다.
♣ 대성[戴星]별을 인다는 것은 곧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한 것을 이름. 무마기는 공자(孔子)의 제자인데, 여람(呂覽) 찰현(察賢)에 “복자천(宓子賤)은 단보재(單父宰)가 되어 거문고만 타고 당(堂)을 내려오지 않았으나 단보가 다스려졌고, 무마기는 별을 이고 출근하였다가 별을 이고 퇴근하였는데 단보가 또한 다스려졌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대성원통[大聖圓通]대성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가리킨 말인데, 관세음보살은 이근원통(耳根圓通)을 얻었으므로, 세계의 음성을 다 안다고 한다. 양양(襄陽)의 낙산사(洛山寺)는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던 곳이다.
♣ 대성이왕[戴星而往]별을 머리에 이고 간다. 날이 새기 전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간다는 뜻.
♣ 대성주무주[大聖住無住]낙산사 바닷가의 굴(窟)은 관음대사가 머무르는 곳이라 하는데, 불법(佛法)에는 주(住)함이 없다 하였다. 그러므로 관음보살이 머물러도 머무르는 상(相)이 없다는 뜻이다.
♣ 대소[大蘇]송(宋) 나라 때의 문장가이며 명필이기도 한 소식(蘇軾)을 말함. 그의 부친 소순(蘇洵)은 노소(老蘇), 아우인 소철(蘇轍)은 소소(小蘇)라고 일컬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상대방이 장자(長子)이며 형(兄)임을 의미한다.
♣ 대소[大素]푸름과 흰 것의 구별된 빛깔이 없는 원시(原始)의 소박(素朴)한 것이다.
♣ 대소공양[大小孔楊]사람의 인품을 비유한 말. 후한(後漢) 때 예형(禰衡)이 뜻이 고상하여 남을 잘 허여하지 않았는데, 오직 공융(孔融)ㆍ양수(楊脩) 두 사람만 친하게 지내면서 항상, 나이 조금 많은 공융을 대아(大兒)라 칭하고 나이 적은 양수를 소아(小兒)라고 칭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八十》
♣ 대소산[大小山]대소산은 대산 소산(大山小山)의 준말로, 한(漢) 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군신(群臣)인 회남소산(淮南小山)의 무리가 지은 편장사부(篇章辭賦)를 말한다. 전하여 편장사부를 저작한 팔공(八公)의 무리를 가리킨다. 왕일(王逸) 초사장구(楚辭章句)에 “초은사(招隱士)는 회남소산왕이 지은 것이다. 옛날 회남왕 유안이 박아(博雅)하고 옛것을 좋아하여 천하의 현사를 초빙하자, 팔공(八公)의 무리들이 모두 그의 덕을 사모하여 각기 재지를 다해서 편장(篇章)과 사부(辭賦)를 저작하여 유(類)로써 서로 따랐기 때문에 혹은 소산이라 일컫고 혹은 대산이라 일컫기도 하였으니, 시경(詩經)의 대아(大雅)ㆍ소아(小雅)와 같은 것이다.” 하였다.
♣ 대소소[大小蘇]대소(大蘇) 소소(小蘇). 송(宋) 나라 때의 문장가인 소식(蘇軾)과 소철(蘇轍) 형제를 말한다.
♣ 대소초[大小招]대산(大山) 소산(小山)의 초은사(招隱士). 대산 소산은, 한(漢) 나라 때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천하의 준사(俊士)들을 불러들였을 적에 팔공(八公)의 무리를 비롯해서 모든 준사들이 회남왕의 덕을 사모하여 각각 재능을 다해서 편장(篇章)을 저술하기도 하고 사부(辭賦)를 짓기도 하여 유(類)끼리 서로 종유하였으므로, 혹은 소산이라 칭하고 혹은 대산이라 칭한 데서 온 말이고, 초은사는 초사(楚辭)의 편명으로 즉 이들 소산이 지은 글인데, 그 내용은 대체로 원통하게 죽은 굴원(屈原)을 불쌍하게 여겨 그를 은사(隱士)로 승화시킨 것이다.
♣ 대수[大隧]대수는 지도(地道) 즉 수도(隧道)로, 춘추 시대 정(鄭) 나라 장공(莊公)이 그의 어미 무강(武姜)을 성영(城潁)에 유폐시켰다가 영고숙(潁考叔)의 권유로 대수(大隧)에 들어가 상봉했던 고사가 전한다. 《春秋左傳 隱公 元年》
♣ 대수[帶水]임진강(臨津江)의 일명.
♣ 대수[大樹]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장수 풍이(馮異)가 유수(劉秀)를 도와 전쟁을 치른 뒤 서로들 공을 자랑하는 제장(諸將)과는 달리 홀로 큰 나무 아래 물러가 있곤 하였으므로 군중(軍中)에서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十七 馮異傳》
♣ 대수장군[大樹將軍]후한(後漢) 때의 장군(將軍) 풍이(馮異)를 비유한 말이다. 풍이는 본디 겸손하여 제장(諸將)이 공(功)을 논할 때에는 항상 그는 큰 나무 밑으로 피해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 호칭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十七》
♣ 대승[戴勝]대승(戴勝)은 여자의 수식(首飾)인데,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대인부(大人賦)에 의하면 “서왕모를 보니 하얀 머리에 대승을 하고 굴속에서 살았다[覩西王母 皜然白首 戴勝而穴處兮]”하였다.
♣ 대시[大始]대도(大道)의 근원으로서 천지가 개벽하여 만물이 생기는 처음인 즉 태초(太初)와 같은 뜻이다.
♣ 대시육물[對時育物]주역(周易) 무망괘(无妄卦)의 상사(象辭)에 “선왕이 거짓 없는 성대한 일로 거짓 없는 때를 당해서 만물을 양육한다.[先王以茂對時育萬物]” 한 데서 온 말이다.
♣ 대식[對食]궁인(宮人)들끼리 서로 부부(夫婦)가 되는 것을 말한다. 한서(漢書) 조후전(趙后傳) 주에 “궁인(宮人)들이 서로 뜻이 맞는 상대끼리 부부가 되는 것을 대식이라 한다.” 하였다.
♣ 대식홍모[大食紅毛]서쪽 나라를 이름.
♣ 대신[大信]공자가 여량(呂梁)의 폭포를 구경할 때에, 폭포가 3천 길이나 되고 물거품이 40리나 되는데 한 남자가 무사히 들어갔다가 무사히 나왔다. 공자가 “그대는 무슨 도술이 있는가?”하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충신(忠信)으로 들어갔다가 충신으로 나온다.” 하였다. 열자(列子)
♣ 대씨[大氏]발해국(渤海國)의 왕.
♣ 대아[大雅]시경(詩經) 육의(六義)의 하나로 훌륭한 정치를 노래한 정악(正樂). 시경 중에 있는 가장 전아(典雅)한 글인데, 왕도(王道)의 융성함을 노래한 시이다. 대개가 주공(周公)이 지은 것이다. 주(周) 나라가 천명을 받아 은(殷) 나라를 치고, 훌륭한 정사를 펴 덕화가 이루어졌다는 내용이다. 육의는 부(賦)ㆍ비(比)ㆍ흥(興)ㆍ풍(風)ㆍ아(雅)ㆍ송(頌)을 말한다.
♣ 대아소아[大兒小兒]사람의 인품을 비유한 말. 후한(後漢) 때 예형(禰衡)이 공융(孔融)을 대아, 양수(楊脩)를 소아라고 칭한 데서 온 말이다.
♣ 대아형경소아영[大兒荊卿小兒贏]대아(大兒)와 소아는 곧 인물의 우열을 말한 것이고, 형경은 즉 전국 시대 자객(刺客) 형가(荊軻)의 별호이고, 영(嬴)은 진왕(秦王) 의 성(姓)이다. 형가는 본디 위(衛) 나라 사람으로 연(燕) 나라에 가 노닐면서 그곳의 개백정[狗屠]으로 축(筑)을 잘 치던 고점리(高漸離)와 친하여 날마다 연시(燕市)에서 그들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서로 즐기다가, 뒤에 연 태자 단(燕太子丹)의 부탁으로 그의 원수를 갚아주기 위해 진왕을 죽이려고 떠날 적에는 또 형가가 슬피 노래하기를 “바람은 쌀쌀하고 역수는 차갑기도 해라, 장사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 하고 떠났는데, 그는 끝내 진 나라에 가서 진왕을 죽이지 못하고 자신만 죽고 말았다. 《史記 卷八十六》
♣ 대악[碓樂]백결선생(百結先生)이 거문고를 타서 방아 찧는 소리를 만들었는데, 세상에서 전하여 이를 대악(碓樂)이라 하였다.
♣ 대악[大樂]한(漢) 나라 이후 음악제도(音樂制度)의 명칭. 음악 중에서 아악(雅樂)만을 고른 것.
♣ 대악문[岱岳文]봉선서(封禪書)를 말한다. 대악은 태산(泰山)의 별칭이다.
♣ 대악행[岱岳行]대악으로 떠났다는 말로, 사람의 죽음을 비유한 말이다. 대악은 대종(岱宗) 즉 태산(泰山)을 말하는데, 고대에 태산은 천손(天孫)으로서 사람의 혼백을 주관하며 수명의 장단(長短)을 맡아본다는 전설이 있었다.
♣ 대안도[戴安道]진(晉) 나라 사람인데 이름은 규(逵)임. 왕자유(王子猷)가 산음(山陰)에 살 때에 야설(夜雪)이 처음 개자 승주(乘舟)하여 대규를 찾아갔다가 그 문에 미쳐 되돌아섰다.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흥을 타고 왔다가 흥을 타고 가는데 반드시 대안도를 볼 게 뭐가 있느냐.”고 하였음.
♣ 대안탑[大雁塔]대안탑은 중국 자은사(慈恩寺) 안에 있는 7층 탑 이름으로, 당(唐) 나라 때 과거 급제자들이 여기에 이름을 써 넣었다고 한다.
♣ 대야[大耶]합천(陜川)의 고호임.
♣ 대약[大藥]선약(仙藥)인 단약(丹藥)의 별칭. 도가(道家)에서 사용하는 금단(金丹)이다. 당(唐) 나라 두보(杜甫)가 이백(李白)에게 준 시에 “아쉽게도 대약의 약재가 모자라서 숲속을 쓸듯이 찾아다녔지.[苦乏大藥資 山林迹如掃]”라고 하였다. 《杜工部草堂詩箋一 贈李白》
♣ 대양각[大揚搉]만물이 서로 다양하게 펼쳐져 있는 가운데 각자 실체를 지니고 뒤섞이지 않은 채 자신의 분한(分限)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에 “頡滑有實 古今不代而不可以虧 則可不謂有大揚▣乎”라고 하였다.
♣ 대어[隊魚]사람이 무리를 지어 있는 것을 비유한 말인데, 곧 함께 모여 공부하던 시절을 뜻한다. 한창려집(韓昌黎集) 제6권 부독서성남시(符讀書城南詩)에 “자라면서 함께 모여 즐겁게 놀았으니, 한 떼의 고기와 다를 바 없네.[少長聚嬉戲 不殊同隊魚]" 한 데서 온 말이다.
♣ 대언[代言]대언은 곧 후세의 승지(承旨)인데 임금의 말[言]을 출납(出納)하므로 후설(喉舌)의 벼슬이라 한다. 그것은 임금의 목구멍과 혀처럼 말[言]을 낸다는 뜻이며, 용(龍)은 임금을 가리킨다.
♣ 대언장어[大言壯語]제 주제에 당치 아니한 말을 희떱게 지껄임. 또는 그러한 말
♣ 대여[岱輿]발해(渤海)의 동쪽에 있다는 다섯 선산(仙山) 가운데 한 산의 이름이다.
♣ 대여원교[岱輿員嶠]바다 가운데 있는 신선이 사는 산이다.
♣ 대역집창[大易執鬯]주역(周易) 진괘(震卦)에 “제사 지낼 때는 큰 천둥소리가 울려도 정신을 잃지 않는다.” 하였다.
♣ 대연[玳筵]대연은 거북 껍데기로 장식한 자리로 궁중을 가리킨다.
♣ 대연[大衍]대연의 역법(易法)을 말함. 당승(唐僧) 일행(一行)의 저술임.
♣ 대연[大衍]주역(周易) 계사 상(繫辭上)에, 대연의 수는 50이다[大衍之數五十]. 하였는데, 이는 설시(揲蓍)의 법을 말한 것임. 주역(周易)으로 점칠 때 서죽(筮竹)의 수(數)가 원래 50개인 것
♣ 대연[代燕]중국의 지명. 즉 대주(代州)와 연주(燕州)를 가리킨다.
♣ 대연력[大衍曆]당 현종 13년(722)에 고승(高僧)인 일행(一行)이 만든 역법(曆法). 그 명칭은 주역(周易) 계사상(繫辭上)에 “大衍之數五十…….”이라고 한 데서 취했다 함. 《新ㆍ舊唐書 曆志》
♣ 대연수[大衍數]천지간의 만물을 상징하는 50의 숫자를 말한다. 1, 3, 5, 7, 9의 홀수를 합한 천수(天數) 25와, 2, 4, 6, 8, 10의 짝수를 합한 지수(地數) 30이 한데 모여 55를 이루는데, 여기에서 대수(大數) 50을 거론하여 만물을 연출해 내는 수로 삼았으므로, 이를 대연수라고 한다. 《周易 繫辭傳上》
♣ 대연영춘[戴燕迎春]옛날 입춘일(立春日)에는 모두 채단을 오려서 제비를 만들어 머리에 이고서 봄을 맞이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荊楚歲時記》
♣ 대연오십[大衍五十]대연수란 천수(天數) 25와 지수(地數) 30을 합친 55에서 그 대수(大數) 50을 말한 것인데, 실제로 점을 칠 때에는 이 50에서 다시 하나를 빼고 49만을 사용하게 되어 있음을 이른 말이다. 《周易 繫辭》
♣ 대엽[大葉]금조(琴操)의 이름으로, 만대엽(慢大葉)ㆍ중대엽(中大葉)ㆍ삭대엽(數大葉) 등이 있다.
♣ 대엽장[大葉章]조선 시대에 궁중(宮中)에서 사용했던 악장(樂章)의 이름.
♣ 대오금무어[臺烏噤無語]한나라 때에 어사대의 앞 나무에 까마귀가 많이 모이므로 오대(烏臺)라 하였다. 송나라 때에 어느 시인이 바른 말 하지 않는 어사를 조롱하여, “까마귀가 입을 다물고 소리 없네.” 하였다.
♣ 대옹[戴顒]남조(南朝) 송(宋) 나라 사람. 자기 형 발(勃)과 함께 동려(桐廬)에 숨어살았는데, 대단한 명망이 있었다. 자기 형이 죽자 동려를 떠나 오하(吳下)에 와 놀았는데 그곳 선비들이 옹을 위해 살 집을 마련해 주었다. 《宋書 卷九十三》
♣ 대옹[戴顒]대규(戴逵)의 아들. 자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벼슬하지 않고 음율(音律)에 능했으며 국가에서 누차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음. 《南史 卷七十五》
♣ 대완[大宛]옛날 서역(西域) 36국(國) 중의 하나이다. 한(漢) 나라 장건(張騫)이 그곳의 한혈마(汗血馬)에 반한 나머지 천마(天馬)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漢書 張騫傳》
♣ 대완[大宛]한 무제(漢武帝)가 이광리(李廣利)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대완국(大完國)을 쳤다. 그것은 대완국에 준마(駿馬)가 많은 것을 탐낸 것이었다. 이겨서 준마는 많이 얻어 왔으나 군사가 많이 죽었고, 그 뒤에 대완이 여러 번 반란을 일으켰다.
♣ 대완국[大宛國]중앙 아시아 페르가나 지방에 있었던 작은 나라.
♣ 대완마[大宛馬]천리마를 말한다. 대완국(大宛國)에서 생산되는 천리마는 붉은 피 같은 땀을 흘린다고 한다.
♣ 대왕[大王]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 및 그 아들 헌지(獻之)가 다 명필로서 천추에 독보하였으므로, 왕희지를 대왕(大王), 헌지를 소왕(小王)이라 칭함.
♣ 대왕소래[大往小來]태왕비래(泰王否來)로 해석된다. “좋은 운이 가고 불행이 왔다.”는 뜻이다.
♣ 대왕풍[大王風]초(楚) 나라 송옥(宋玉)이 지은 풍부(風賦)에 바람을 대왕풍[雄風]과 서인풍(庶人風[雌風])으로 나누어 호화로운 왕이 사는 곳에 부는 바람은 웅풍(雄風)이요, 곤궁한 백성들의 집에 부는 바람은 자풍(雌風)이라 하여 풍자하였다.
♣ 대우[帶牛]백성들이 농사에 힘씀을 비유한 말. 한(漢) 나라 때 공수(龔遂)가 발해태수(渤海太守)로 있으면서 백성들의 허리에 띠고 다니는 도검(刀劍)을 팔아 소를 사게 하고서 말하기를 “어찌하여 소와 송아지를 허리에 띠고 다니는고. 봄여름에는 당연히 논밭으로 나가야 한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대우[大禹]하(夏) 나라의 시조. 9년의 홍수를 다스릴 때 손발에 군살이 배기고 얼굴에 검버섯이 피었다 한다.
♣ 대우탄금[對牛彈琴]소를 앞에 놓고 가야금을 연주한다. 어리석은 자에게 도리를 설명하나 조금도 깨닫지 못함
♣ 대운[岱雲]오난설의 기유도서(記遊圖序)의 대악관운 조(岱岳觀雲條)에 “癸丑五月 謁翁覃溪先生於太安使院 同遊東岳 秦松漢柏 黛色叅霄 由南天門登封禪臺 俯視雲影千峯散落平地"라 하였음.
♣ 대운[大韻]유우씨의 악가로서, 그 뜻은 대체로 순(舜) 임금이 능히 선성(先聖)의 덕을 계승하였음을 칭송한 것이다
♣ 대원자항[大願慈航]부처의 큰 소원은 자비로운 불법으로 우매한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 있다는 뜻이다.
♣ 대월질섬서[對月嫉蟾蜍]사태 수습을 위해 진력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보신택(保身策)만을 강구하여 빠져나간 사람들이 미워진다는 말이다. 예(羿)의 처(妻)인 항아(姮娥)가 서왕모(西王母)에게서 얻은 불사약(不死藥)을 훔쳐 달로 도망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後漢書 天文志上 注》
♣ 대위승[帶圍賸]사형 선고를 받은 아들 걱정에 어미의 허리띠가 한 자나 줄었다.[帶圍滅尺]는 고사가 있다. 《列女傳 母儀 魏芒慈母傳》
♣ 대유[大酉]대유(大酉)와 소유(小酉) 두 산에 동굴이 있어 그 동굴 안에다 고서(古書) 일천 권을 넣어 두었다함. 《郡國志》
♣ 대유령[大庾嶺]중국의 오령(五嶺) 가운데 하나로, 한 무제(漢武帝) 때 유씨(庾氏) 성을 가진 장군이 이곳에다가 성을 쌓았으므로, 대유령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강서성(江西省) 대여(大余)와 광동성(廣東省) 남웅(南雄)의 사이에 있으며, 영남과 영북의 교통 요충지이다. 이곳에는 매화가 많으므로 ‘매령(梅嶺)’이라고도 한다.
♣ 대유사[大酉舍]규장각(奎章閣) 사무를 관장하는 부속건물의 하나.
♣ 대은[大隱]대은(大隱)은 중은(中隱)이나 소은(小隱)과 달리 참으로 크게 깨달아 환경에 구애받음이 없이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는 은자(隱者)를 말한다. 대은은 저잣거리에 살면서도 은자의 정취를 느끼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진(晉) 나라 왕강거(王康琚)의 시 반초은(反招隱)에 “작은 은자는 산림에 숨고, 큰 은자는 저자 속에 숨는다.[小隱隱陵藪 大隱隱朝市]”는 명구(名句)가 있다. 《文選 卷20》
♣ 대은불리성시중[大隱不離城市中]작은 은자는 숲 속에 숨고 큰 은자는 조시(朝市)에 숨는다는 글이 있다.
♣ 대은은조시[大隱隱朝市]옛날에 학문과 재주가 있으면서 세상에 나와서 벼슬길을 구하지 않는 사람을 은사(隱士)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대개 산림(山林) 깊숙한 곳에 살았었다. 그러나 그 중에 특별한 인물은 하급 관료로 자진하여 일생을 보내기도 하였으니, 그것을 조은(朝隱) 혹은 관은(官隱)이라고 하였다. 또 어떤 인물은 저자에 들어가서 조그만 장사로 일생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그것을 시은(市隱)이라 하였다. 그래서 큰 은사는 조정과 저자에 숨고 [大隱隱朝市] 작은 은사는 산이나 수풀에 숨는다[小隱隱陵藪]는 말이 있었다.
♣ 대음[大音]노자(老子) 사십일(四十一)에 “지극히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大音希聲]” 한 데서 온 말이다.
♣ 대음[大陰]아주 깊고 침침한 데를 말한다.
♣ 대의멸친[大義滅親]국가와 국민 등 공공의 이익과 같은 중대한 의리를 위하여 가족, 친척 등 골육의 사사로운 정리(情理)를 희생함. 공공(公共)을 제일로 여기는 자세를 말한다.
♣ 대의명분[大義名分]인륜의 대의와 명분.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고 해야 할 도리와 본분. 인륜의 큰 의를 밝히고 맡은 바 분수를 지키어 정도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것. 또는 인륜상의 중대한 의리[大義]와 도덕상 반드시 지켜야 할 사람의 행위의 한계[名分]
♣ 대인호변[大人虎變]대인이 잘 변혁(變革)한다는 뜻. 주역(周易) 혁(革) 괘 구오효(九五爻)의 효사에, “大人虎變 未占有孚”라는 것이 보임.
♣ 대일[戴逸]대규의 일유. 진(晉)의 대규(戴逵)가 자는 안도(安道)인데 학문도 해박하고 문장도 능한 데다 글씨와 그림도 일가를 이루었고 또 거문고를 잘 타서 당시 성명이 자자했다. 무릉왕 희(武陵王晞)가 그의 거문고 솜씨를 듣고 사람을 시켜 부르자, 그는 그 사자(使者)가 보는 앞에서 거문고를 부수고 끝까지 그 부름에 응하지 않았음. 《晉書 陰逸戴逵傳》
♣ 대일통[大一統]천하의 제후국 모두가 중국 황제에게 복속되어, 그 문물과 제도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원년 첫머리에 ‘원년 춘 왕정월(元年春王正月)’이라고 하였는데, 정월 앞에 왕(王) 자를 넣은 것에 대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는 “대일통(大一統)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 대자대비[大慈大悲]게 사랑하고 크게 슬퍼하는 마음. 넓고 커서 가이없는 사랑. 특히 관음보살이 중생을 사랑하고불쌍히 여기는 마음.
♣ 대자석[代赭石]대현(代縣)에서 생산되는 적철광(赤鐵鑛)의 일종이니, 농토에 퇴비를 주지 않아서 빨갛게 산화한 것을 말한다.
♣ 대작전가[大嚼塡街]하사한 진수(珍需)를 보자 마을 사람들이 맨입을 씹으며 부러워한다는 뜻. 위(魏) 나라 조식(曹植)이 오질(吳質)에게 보낸 편지에 “도수장을 지나면서 크게 씹어보니[過屠門而大嚼] 비록 고기는 얻어먹지 못하여도 마음은 쾌하다[雖不得肉貴目快意]"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 대장[代匠]노자(老子) 74에 “죽이는 일을 맡은 자가 죽이게 마련인데, 죽이는 일을 맡은 자를 대신해서 죽이는 것은 마치 대장을 대신해서 나무를 찍는 것과 같다. 만약 대장을 대신해서 나무를 찍게 된다면 그 손을 다치지 않을 자가 드물다.” 했다.
♣ 대장[臺長]사헌부(司憲府)의 대사헌(大司憲) 이하 지평(持平)까지와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臺司諫) 이하 정언(正言)까지의 모든 관원을 이르는 말.
♣ 대장거[大章車]길의 이정(里程)을 알리는 수레이다. 고금주(古今注) 여복(輿服)에 “수레 위에 상ㆍ하 두 층을 만들고 층마다 목인(木人)을 두어서, 1리를 가면 하층에서 북을 치고 10리를 가면 상층에서 징을 울린다.” 했다.
♣ 대장경[大藏經]석가모니가 돌아간 뒤에, 제자들이 그가 설법(說法)한 것을 경(經)ㆍ율(律)로 나누어 엮은 데다 또 경을 주석한 논(論)을 합쳐서 삼경(三經)이라 하는데, 이 가운데에는 모든 진리가 쌓이고 간직되어 있어 마치 큰 곳간[大藏]과 같다는 뜻에서 장경(藏經) 또는 대장경이라 하는 것이다.
♣ 대장군[大將軍]옛날, 고급 무관의 명칭. 고위장성.
♣ 대재소용[大材小用]큰 재목(材木)이 작게 쓰이고 있다. 사람을 부리는 데 있어서 제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 안됨을 뜻한다. 역설적으로 큰 재목은 큰 일에 쓰여야 한다는 말로도 쓰인다.
♣ 대저용약[代邸龍躍]한 문제(漢文帝)가 고조(高祖)의 중자(中子)로서 일찍이 대왕(代王)에 봉해져 있다가, 여 태후(呂太后) 일족이 몰락한 뒤에 진평(陳平)ㆍ주발(周勃) 등 대신들의 곡진한 요청에 의해 대저(代邸)를 떠나 제위(帝位)에 올랐던 것을 말한다. 《史記 孝文帝紀》
♣ 대전[大全]오경사서대전(五經四書大全)의 약칭. 명 성조(明成祖)는 영락(永樂) 12년 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 호광(胡廣) 등에게 명하여 사서 오경을 다시 정리하여 대전을 편찬하게 하였으므로 영락대전(永樂大全)이라 하기도 한다.
♣ 대정[大庭]대정씨는 상고(上古) 시대 제왕(帝王)의 호. 혹은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별호라고도 한다. 태평세대라는 뜻으로 쓴다.
♣ 대정[大政]천하의 정치. 전국을 다스리는 일. 국정(國政). 정례(定例)로 한때에 모아서 행하는 정사(政事), 곧 도목정사 (都目政事).
♣ 대정백황[大庭柏皇]대정과 백황은 옛날 제왕을 이름. 역(易) 계사(繫辭) 소(疏)에 “女媧氏沒 次有大庭氏柏皇氏"라 하였음.
♣ 대제[待制]벼슬 이름. 매일 교대로 대기(待機)하여 임금의 조칙(詔勅) 등을 초(草)하였다.
♣ 대제[大堤]악부(樂府) 이름인 대제곡(大堤曲)을 말한다. 장간지(張柬之)의 대제곡 시에, “남국에 가인이 많다지만, 대제의 여인들만은 못하다네[南國多佳人 莫若大堤女]”하였음.
♣ 대제[大堤]양양(襄陽)을 가리킨다. 원래는 중국의 호북(湖北) 양양현(襄陽縣)에 있는 큰 제방을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악부(樂府)인 양양악(襄陽樂) 속에 대제곡(大堤曲)이 들어 있는 데에서 기인하여, 양양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 대조[待詔]대조는 황제의 조명(詔命)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한(漢) 나라 이후 관명(官名)이 되었다.
♣ 대조삼년욕일비[大鳥三年欲一飛]춘추시대 초(楚) 나라의 장왕이 왕이 된 지 3년이 되어도 아무런 정치도 하지 아니 하므로 그 신하가 왕에게, “어느 곳에 큰 새가 있는데 3년 동안을 날지 아니하니 어찌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3년을 날지 않았어도 날면 하늘에 닿도록 크게 날 것이니, 좀 기다려 보아라.” 하고, 다시 정치를 잘하여 나라를 훌륭하게 만들었다.
♣ 대조한전열[大阻漢傳閱]대조는 남산의 별칭이며 한전(漢傳)은 한서(漢書) 동방삭전(東方朔傳)을 가리킨다. 동방삭전에 “남산은 천하의 크게 막힌 곳이다.[南山 天下之大阻也]" 하였는데, 이 때문에 대조란 별명을 붙인 것이다.
♣ 대조회[大朝會]모든 벼슬아치들이 다 모여서 임금을 뵙는 일.
♣ 대종[岱宗]대종은 뭇 산의 어른이라는 뜻으로 태산(泰山)을 가리킨다.
♣ 대주[戴冑]자(字)는 현윤(玄胤), 상주(相州) 안양(安陽) 사람이다. 성격이 정직하고 재간이 있었으며, 율령(律令)에 밝고 문장(文章)도 해박하였다. 정관(貞觀) 5년에 태종(太宗)이 낙양궁(洛陽宮)을 수복하려 하자, 상소를 올려 간언한 바 있다. 그가 죽고 난 뒤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증직하고 충(忠) 자 시호(諡號)를 내렸다. 《舊唐書 卷七十 戴胄列傳》
♣ 대중[大中]당 선종(唐宣宗)의 연호.
♣ 대진주[大秦珠]대진(大秦)에서 생산되는 구슬. 위략(魏略)에 의하면 “대진국(大秦國)에서는 명월야광주(明月夜光珠)ㆍ진백주(眞白珠)가 난다.” 하였다.
♣ 대질[大耋]대질은 해가 완전히 넘어가듯 인생을 얼마 남기지 않은 노년기를 말한다. 주역(周易) 이괘(離卦) 구삼효(九三爻)에 “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이라 하였다. 80세 또는 70세의 노인을 가리킨다.
♣ 대질경리측[大耋驚離昃]주역(周易) 이괘(離卦) 구삼효(九三爻)에 “서산에 해가 기우는 형상이니, 질장구 치고 노래부르지 않는다면 노년을 한탄함이니, 흉하도다.[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하였다.
♣ 대집법[大執法]법령(法令)을 집행(執行)하는 관리의 우두머리로, 대사헌(大司憲)을 일컫는 말이다.
♣ 대착[代斲]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감당키 어려운 일을 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노자(老子) 74장에 “거장(巨匠) 대신 칼을 휘두를 경우 손을 다치지 않는 때가 거의 없다.[夫代大匠斲 希有不傷其手矣]”라고 하였다.
♣ 대창제[大倉稊]태창의 좁쌀. 태창은 국가의 곡식 쌓은 창고인데 가장 넓고 큰 것이다.
♣ 대천[大千]대천 세계(大千世界)로 광대무변한 세계를 말한다. 《維摩經》
♣ 대천공[代天工]서경(書經) 고요모(皐陶謨)에 “서관(庶官)을 폐하지 말라. 사람이 하늘의 일[天工]을 대신하는 것이니……"라는 대목에서 인용된 말.
♣ 대천공수천직[代天工修天職]서경(書經)에, “모든 관직을 비우지 말라. 관직이란 것은 하늘의 할 일[天工]을 사람이 대신함이다.” 하였다.
♣ 대천세계[大千世界]불교에서 쓰는 말로,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세계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무수히 많은 세계가 있다고 보는데, 일천 세계가 소천세계(小千世界)가 되고, 소천세계가 천 개 모여서 중천세계(中千世界)가 되고, 중천세계가 천 개 모여서 대천세계가 된다고 한다.
♣ 대첩[大捷]크게 이김. 대승(大勝).
♣ 대초[大招]고려의 학자 이자현(李資玄)의 시호. 고려조 선종(宣宗) 때 대악서승(大樂署丞)을 사직하고 전국의 명산을 유람 중 춘천 청평산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선학(禪學) 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 대초[帶草]서대초(書帶草)의 준말로, 한(漢) 나라 정현(鄭玄)의 문인들이 책을 묶었다는 풀 이름이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庭下已生書帶草 使君疑是鄭康成”이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14 書軒》
♣ 대초[大招]초사(楚辭)의 편명. 전국 시대 초 나라의 경차(景差)가 지었다고 하는 부체(賦體)의 글로서, 지하에 떠도는 초 나라 충신 굴원(屈原)의 혼을 불러 달래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 대초장[大招章]초(楚) 나라 굴원(屈原) 이 쫓겨난 지 9년만에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예측하고 스스로 자신의 혼(魂)을 부르는 뜻으로 지은 글 이름이다. 《楚辭 卷十 大招章》
♣ 대춘[大椿]장주(莊周)의 저서인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상고 시대에 대춘(大椿)이란 나무가 있어 8천 년을 봄으로 삼고, 8천 년을 가을로 삼았다.”고 한 데서 온 말로, 즉 장수를 비유한 말이다.
♣ 대치[大癡]원 나라 화단의 사대가 중 한 사람인 황공망(黃公望) 황자구(黃子久)의 호인데 그림을 잘 그려 원 나라 사대가(四大家)의 한 사람임.
♣ 대탄[大灘]경기도 양근군(楊根郡) 남쪽 10리 지점의 여강(驪江) 하류로 용진강(龍津江)과 합쳐지는 곳이다.
♣ 대탄자[大灘子]정백창의 호(號)이다.
♣ 대택[大澤]옛날 못 이름. 안문산(雁門山) 북쪽에 있으며, 사방 천 리라 한다.
♣ 대패[大貝]대패는 가장 큰 바다 조개인데, 무게가 무려 육십 관(六十貫) 정도나 나가고, 갈면 백옥(白玉) 같은 광택이 나므로 여러 가지 장식품으로 쓰인다.
♣ 대포[大布]복지(服地)가 굵은 베옷.
♣ 대포[大庖]천자(天子)의 포주(庖廚)를 이르는데, 전하여 그 포주에 있는 짐승의 고기를 가리키기도 한다.
♣ 대풍[大風]대풍은 큰 새의 일종으로 ‘대봉(大鳳)’, ‘대붕(大鵬)’이라고도 부르며, 날아다니며 큰 바람을 일으켜 가옥 등을 부숴버리는 흉악한 새이다.
♣ 대풍가[大風歌]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한 뒤, 고향인 패(沛)에 가서 친족과 친구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푼 자리에서 술이 거나하여 친히 “대풍이 일어나매 구름이 날리었네. 위엄이 천하에 가해지매 고향에 돌아왔네. 어찌하면 맹사들을 얻어서 사방을 지킬꼬[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守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라고 노래한 것을 가리킨다.
♣ 대풍시[大風詩]한 고조가 천하를 통일하고 고향인 패군(沛郡)에 돌아가 크게 잔치를 베풀면서 읊은 시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큰바람이 일어남이여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나는도다. 위엄이 천하를 뒤흔듦이여 고향에 돌아왔도다. 어떻게 해야 용맹한 사람을 얻어 사방을 지킬 수 있을까" 《史記 高祖本紀》
♣ 대하[大夏]대원(大宛)의 서남쪽에 있던 나라 이름이다.
♣ 대하[大夏]중국의 서북방에 있었다는 나라.
♣ 대하[大夏]하(夏)의 우왕(禹王)이 만든 음악. 좌전(左傳) 양공(襄公) 29년에 “오(吳)의 공자(公子) 계찰(季札)이 대하의 춤을 보고 ‘아름답다, 근면하면서도 덕으로 여기지 않으니 우(禹)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런 덕을 닦겠는가.’ 했다.” 하였다.
♣ 대하[大河]황하.
♣ 대하국[大夏國]일명 박트리아 왕국. 힌두쿠시 산맥의 계곡, 아무 강 상류의 좁은 지역에 있었던 나라.
♣ 대하삼일징[大河三日澄]황하의 물이 천 년에 한 번씩 맑아지는데, 먼저 3일 동안 청수(淸水)가 되고 그 다음은 백수(白水), 적수(赤水), 현수(玄水), 황수(黃水)의 순으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성군(聖君)이 출현하여 태평 시대가 전개되는 상서(祥瑞)로 꼽힌다. 《易乾鑿度》
♣ 대학[大壑]발해(渤海)의 동쪽에 몇 억만리(億萬里)인지 모르는 곳에 대학(大壑)이 있는데, 밑이 없는 골짜기라 하였다. 《列子》
♣ 대해일적[大海一滴]큰 바다 중의 한 방울 물. 아주 큰 것 중에 아주 작은 것. 매우 작다는 뜻
♣ 대행[大行]국상(國喪)이 난 뒤 아직 시호(諡號)를 올리기 전의 칭호. 이는 주공(周公)의 시법(諡法)에 ‘큰 행실[大行]이면 큰 이름[大名]을 받고, 작은 행실이면 작은 이름을 받는다.’라는 데서 나온 것으로 장차 큰 행실의 이름 즉 대명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일컫는 말이다.
♣ 대행[大行]태행산. 그 남쪽에 초나라가 있다.
♣ 대현[大賢]파산(坡山) 즉 파주(坡州)가 고향인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말한다.
♣ 대호[大瓠]큰 박이라는 뜻으로, 신라(新羅)의 시조(始祖)인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말한다. 그가 자줏빛 알 속에서 나왔는데 그 알이 박과 같다 하여 성씨를 박(朴)이라고 했다는 전설이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라 시조 혁거세왕 조(新羅始祖赫居世王條)에 나온다.
♣ 대호[大瓠]혜자(惠子)가 장자(莊子)에게 말하기를, “위왕(魏王)이 나에게 큰 박 종자를 주기에 심었더니 박이 열렸는데, 닷 섬[五石]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여서 거기에 간장을 담아 쓰자니 용량에 비하여 견고하지가 못해 지탱을 못할 것이고, 쪼개서 바가지로 쓰자니 너무 휑하고 커서 마땅히 쓸 만한 곳이 없소…….” 하자, 장자는, 물건은 어느 물건이든지 쓰는 사람이 쓰기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대답하였음. 《莊子 逍遙遊》
♣ 대화[大化]불교의 진여(眞如)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로, 자연(自然)을 뜻한다. 법화현의(法華玄義)에 “설교의 강격(綱格)은 대화의 전제(筌蹄)이다.” 하였다.
♣ 대화[大化]유년기, 청년기, 노년기, 사망 등 인생의 네 단계 커다란 변화를 말하는 것으로, 천수(天壽)를 누렸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列子 天瑞》
♣ 대화루[大和樓]신라(新羅) 때에 창건한 불사(佛寺)로서 울산(蔚山)에 있다.
♣ 대환[大還]도가에서 먹는 단약(丹藥)의 이름임.
♣ 대황[臺隍]누대와 해자를 말한다.
♣ 대황[大荒]중국에서 아주 먼 지역으로, 해와 달이 뜨는 곳을 말한다. 산해경(山海經) 대황동경(大荒東經)에, “동해의 밖, 대황의 안에 대언(大言)이란 산이 있는데, 해와 달이 나오는 곳이다.” 하였다.
♣ 대황지야[大皇之埜]크게 황폐한 들판.
♣ 대효위[臺孝威]대효위는 후한(後漢) 때의 은사인 대퉁(臺佟)을 이름. 효위는 그의 자이다. 대퉁은 무안산(武安山)에 굴을 파고 은거하면서 약 캐는 일을 업으로 삼았고, 뒤에 관직의 소명이 있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後漢書 卷八十三》
♣ 대후[戴侯]장인을 가리킨다. 진(晉) 나라 반악(潘岳)의 회구부(懷舊賦) 첫머리에 “내 나이 열두살 때에 부친의 친구이신 동무 대후 양군(東武戴侯楊君)을 뵈었는데, 그때부터 나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그분의 따님과 혼인까지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대후는 양조(楊肇)의 시호(諡號)이고, 봉호(封號)가 동무백(東武伯)이다.
♣ 덕기[德驥]덕을 갖춘 천리마.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기(驥)는 그 힘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 덕을 일컫는 것이다.”라는 대목에서 인용된 문자다.
♣ 덕기[德機]생동감. 생의(生意).
♣ 덕무상사[德無常師]덕(德)을 닦는 데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
♣ 덕본재말[德本財末]사람이 살아가는 데 덕(德)이 뿌리가 되고 재물(財物)은 사소한 부분이다.
♣ 덕불고[德不孤]덕이 있는 사람은 고립되지 않는다는 뜻임.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 하였음.
♣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덕스러운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 덕빈궁[德嬪宮]덕빈은 순회세자(順懷世子)의 빈(嬪)인 덕빈 윤씨(德嬪尹氏)를 가리킨다.
♣ 덕상지잠[德象之箴]덕상의 잠과 여사의 편[女師之篇]은 모두 옛날 여자의 도리를 교훈한 글들이다.
♣ 덕성[德星]후한 때 진식(陳寔)이 자질(子姪)들과 함께 순숙(荀淑)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덕성이 마침 그 분야에 닿았으므로, 태사(太史)가 “5백 리 이내의 현인(賢人)이 한데 모였다.”고 아뢴 고사이다. 《續晉陽秋》
♣ 덕수미[德秀眉]당 나라 원덕수(元德秀)의 자는 자지(紫芝)였는데 미목(眉目)이 뛰어나게 수려하였다. 그리하여 방관(房琯)이 “자지의 미목을 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명리(名利)에 대한 마음이 모두 사라지게 한다.” 하였다 《新唐書 元德秀傳》
♣ 덕여[德餘]정백창(鄭百昌)의 자(字)이다.
♣ 덕요미[德耀眉]덕요(德耀)는 후한 때 사람 양홍(梁鴻)의 처 맹광(孟光)의 자. 덕요는 얼굴이 아주 추했으나, 양홍을 아주 지성으로 섬겼는데, 밥상을 올릴 때 항상 눈썹 높이로 들었다 한다. 《後漢書 卷八十三 梁鴻傳》
♣ 덕용[德用]심명세(沈明世)의 자(字)이다. 택당의 처남
♣ 덕우[德雨]박황(朴潢)의 자(字)이다.
♣ 덕우[德祐]송 공제(宋恭帝)의 연호.
♣ 덕운[德雲]덕운비구(德雲比丘)의 준말로, 고승(高僧)을 이르는 말이다. 일명 선재동자(善財童子)로도 불림. 일찍이 53의 선지식(善知識)을 두루 뵙고, 맨 나중에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만나서 십대원(十大願)을 듣고 아미타불국토(阿彌陀佛國土)에 왕생하였다는 구도자(求道者)이다.
♣ 덕운[德雲]화엄경(華嚴經)에 “善財童子問法於德雲比丘"라 하였는데 이 덕운은 요원(了元)을 말함. 소식 시의 주에 의하면 불인선사(佛印禪師)의 이름이 요원인데 금산사(金山寺)의 주지로 있을 때 동파가 옥대(玉帶)를 남겨 산문(山門)을 지키게 하니 요원은 납군(衲裙)으로 보답하였다고 한다.
♣ 덕위원[德爲元]천도(天道)인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은 사시(四時)의 춘(春)ㆍ하(夏)ㆍ추(秋)ㆍ동(冬)과 통하는바, 원은 봄에 해당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 덕유역거[德輶易擧]시경 대아(大雅) 증민(烝民)에, “덕이 가볍기가 털과 같으나 그를 들어 그대로 행하는 이는 적네.[德輶如毛 民鮮克擧之]”하였음.
♣ 덕음[德音]백성에게 은덕을 펴는 교서(敎書)나 명령.
♣ 덕이불견대평년[德彝不見大平年]당 태종(唐太宗)이 처음 나라를 다스릴 방침을 세울 때에 여러 신하와 의논하였더니, 위징(魏徵)은 인의(仁義)로, 봉덕이(封德彝)는 형법(刑法)으로 정치를 하기를 주장하였다. 태종(太宗)은 위징의 말대로 인의(仁義)로써 정치를 하여 천하가 태평하게 되었으며 봉덕이는 이미 죽었었다. 태종은, “지금 천하가 이렇게 태평한 것은 위징의 힘인데, 봉덕이에게 오늘날 이것을 보게 하지 못한 것이 한이로다.” 하였다.
♣ 덕인[德人]퇴계(退溪) 이황(李滉)을 가리킨다.
♣ 덕작달존[德爵達尊]달존은 누구나 모두 존경한다는 뜻으로 덕과 지위가 높음을 말한다.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천하에 세 가지 달존이 있으니 벼슬이 높은 사람, 덕이 높은 사람,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 덕장[德璋]남조(南朝) 제(齊)의 공치규(孔稚珪)의 자. 은거생활을 떠나 벼슬길로 나간 벗 주옹(周顒)을 풍자한 북산이문(北山移文)의 작가.
♣ 덕형[德馨]서경(書經)에, “서직(黍稷)의 음식이 향기로움이 아니라 덕이 향기롭다.” 하였다.
♣ 덕혜봉재진[德慧逢災疹]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덕혜(德慧)와 술지(術知)가 있는 자는 항상 진질(疢疾)이 있느니라.” 한 데서 온 말인데, 덕혜는 총혜한 덕을 말하고, 재진은 재환(災患)을 뜻한다. 《孟子 盡心上》
♣ 도[道]‘導’와 통함. 따라 가다.
♣ 도[䆃]도는 벼의 이름으로,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말에 “도는 한 줄기에 이삭이 여섯이다. (䆃一莖六穗)”하였다.
♣ 도[饀]만두(饅頭)의 소를 이름.
♣ 도[淘]일다. 걸러내다.
♣ 도가[道家]노자(老子)⋅장자(莊子) 등.
♣ 도가[陶家]진(晉) 나라 도간(陶侃)의 집을 가리킨다. 범규(范逵)가 그 집을 방문했을 때 대접할 것이 없자 도간의 어미가 머리칼을 잘라 주효(酒殽)를 마련해 주었던 고사가 전해 온다.《晉書 卷66》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杯柈慣作陶家客 絃誦嘗叨孟母鄰”이라는 구절이 있다.《蘇東坡詩集 卷28 潘推官母氏挽詞》
♣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말로 형상화된 도(可道)는 늘 그러한 원래의 도(常道)가 아니다.
♣ 도가명당가주[陶之茗党家酒]송(宋) 나라 학사(學士) 도곡(陶穀)이 태위(太尉)인 당진(黨進)의 집에서 가기(歌妓)를 데려왔는데, 눈을 녹인 물로 차를 끓이면서 “당 태위의 집에서도 이런 풍류를 맛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 가기가 “조금씩 따라 마시며 나직하게 읊조리면서 양고(羊羔)의 미주(美酒)를 맛보곤 하였다.”고 대답한 일화가 전한다. 《綠窓新話 卷下 引 湘江近事》
♣ 도강[徒杠]도보(徒步)로 건널 수 있는 작은 다리를 말한다.
♣ 도강[桃康]신(神)의 명칭.
♣ 도개[到漑]양(梁) 나라 사람으로 성은 도이고 이름은 개다.
♣ 도객유혼[島客幽魂]진말(秦末) 제(齊)의 왕 전횡(田橫)의 종자(從者)들. 전횡이 항우(項羽)와 싸워 제(齊) 땅을 회복하고 3년 동안 왕이 되었으나, 한(漢)에게 눌려 종자 5백명을 데리고 섬으로 망명해 들어가 있다가 한 고조(漢高祖)가 통일한 뒤에 항복하기를 명하매 부득이 두 객을 데리고 낙양(洛陽) 30리 밖까지 와서 자살했다. 섬에 있던 5백여 명도 전횡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자살했다. 동주 앞 바다에 ‘전횡섬’이 있다고 한다.
♣ 도건[陶巾]도잠(陶潛)의 두건. 진(晉) 나라 때 도잠(陶潛)이 술을 매우 좋아하여 매양 술이 익으면 머리에 쓰고 있던 갈건(葛巾)을 벗어서 술을 걸러 마시곤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도검[韜鈐]도검은 고대 병서(兵書)인 육도(六韜)와 옥검편(玉鈐篇)의 병칭으로 무장(武將)을 뜻한다.
♣ 도검중자형[韜鈐重子荊]문관의 몸으로도 작전 참모의 역할을 훌륭히 해낼 수 있다는 말이다. 도검(韜鈐)은 태공망(太公望)의 병서(兵書)에 나오는 육도(六韜)와 옥검편(玉鈐篇)으로, 작전 계획을 뜻하는 말이다. 자형(子荊)은 진(晉) 나라 손초(孫楚)의 자(字)로, 일찍이 석포(石苞)의 군사(軍事)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적이 있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비서는 하손이요, 작전 참모는 자형이라.[記室得何遜 韜鈐延子荊]”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6 贈左僕射鄭國公嚴公武》
♣ 도견상부[道見桑婦]하고 싶은 대로 일시적인 이익을 구하려다가 결국에는 기존에 갖고 있던 것까지 모두 잃게 된다는 뜻의 고사성어.
♣ 도경[陶徑]도잠(陶潛)이 다니던 길.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친구와 다니던 세 갈래 길 거칠게 되었어도 소나무와 국화는 제대로 있구나.” 하였다.
♣ 도경[道經]순자(荀子) 주(註)에, “今虞書有此語而云道經 盖有道之經也”라고 보임.
♣ 도경송균[陶逕松筠]은자(隱者)의 호젓한 오솔길을 말한다.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세 오솔길이 잡초로 무성한 중에, 그래도 솔과 국화 남아 있구나.[三逕就荒 松菊猶存]”라는 표현이 있다.
♣ 도경청풍[陶徑淸風]도연명(陶淵明)이 자기 집에다 세 길[三逕]을 내고 여름이면 북쪽 창에서 들어오는 맑은 바람에 누워 있노라는 시가 있다.
♣ 도경춘부[桃梗春符]도경은 신의 형상을 그린 복숭아나무 널판. 전설에, 중국 도삭산(度朔山)에 큰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 밑에 사는 신도(神荼)와 울뢰(鬱櫑)라는 두 신이 능히 온갖 잡귀를 잡아먹는다는 설이 있으므로 민간에서 정월 초하루에 복숭아나무 널판에 두 신의 형상을 그려서 문위에 걸어놓아 잡귀를 물리쳤다고 한다. 《荊楚歲時記》
♣ 도곡다[陶穀茶]송나라 도곡(陶穀)이 눈 오는 날에 미인을 데리고 눈물[雪水]에 차를 다려 마시는데 미인은 전 당태위(黨太尉)집에 있던 사람이었다. 묻기를, “당태위도 이런 운치를 알던가.” 하니, 미인은, “그는 비단 장막 안에서 고아주(羔兒酒)를 마시면서 우리들더러 나직히 노래 부르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 도공다[陶公茶]도곡(陶穀)이 눈오는 날에 눈물에 차를 다려 먹었다.
♣ 도공사[陶公梭]도공은 도간(陶侃)을 말하고 북은 용(龍)이라는 뜻. 진서(晉書) 권16에 “도간이 젊었을 때 뇌택(雷澤)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북[梭] 하나가 그물에 걸려나왔으므로 벽에 걸어 놓았더니, 조금 있다가 우레치고 비가 쏟아지면서 용으로 변하여 갔다.” 하였다.
♣ 도공석[陶公石]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이 술에 취하면 눕곤 하여 그 흔적이 남았다는 이른바 ‘연명 취석(淵明醉石)’이 여산(廬山)에 있다고 한다. 《朱子語類 卷138》
♣ 도공진의[陶公眞意]도공은 도연명(陶淵明)을 가리킨다. 그의 음주(飮酒) 20수(首) 중 제5수에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다,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 날 저물자 산 기운 더욱 좋아져, 날던 새도 서로들 어울려 돌아오네. 이 가운데 참된 뜻이 들어 있나니, 설명하려 하다가도 어느덧 말을 잊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라는 유명한 표현이 나온다. 《陶淵明集 卷3》
♣ 도공희공[逃空喜跫]외로운 처지에서 친지의 방문을 받거나 소식을 전해 듣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에 “夫逃虛空者 …… 聞人足音 跫然而喜矣”라고 하였다.
♣ 도공희족음[逃空喜足音]외진 곳에 사는 사람은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기쁘다는 뜻으로 덕장 스님이 찾아와 작자에게 인사로 한 말이다.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에 “빈 골짜기에 도망쳐 사는 사람이 잡초가 길을 덮은 그곳에 오래 사노라면 사람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기쁜 법이다.” 하였다.
♣ 도관[道觀]도관은 도교(道敎)의 사원(寺院)을 가리키는데, 도교에서 성단(星壇)을 두고 성신을 제사 지낸다.
♣ 도관[都官]한(漢) 나라 때 사예교위(司隷校尉)의 속관(屬官)이었다.
♣ 도관무호시[都官無好詩]당나라 시인 정곡(鄭谷)이 눈[雪]을 두고 지은 시에, “강 위에 저녁 때 그림 그릴 만한 곳은 어옹이 한 도롱이를 입고 돌아간다 [江上晩來堪畵處 漁翁披得一簑歸].”는 구(句)가 있다. 정곡의 벼슬이 도관(都官)이었다.
♣ 도구[屠狗]옛날에 연(燕) 나라 지방에는 기절이 있는 협객(俠客)이 많았는데, 그들이 때를 만나지 못할 때에는 개 잡는 천한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았다.
♣ 도구[陶句]진(晉) 나라 때의 고사(高士) 도잠(陶潛)의 시구를 가리킨다.
♣ 도구[菟裘]원래는 노(魯) 나라 읍명(邑名)인데, 노나라 은공(隱公)이 이곳에 은거하였으므로, 전하여 관직에서 은퇴하여 여생을 보내는 곳의 뜻으로 쓰인다. 노은공(魯隱公)이 말하기를, “도구에 별장(別莊)을 경영하라. 내 장차 거기에 가서 늙으리.” 하였다 한다. 《左傳 隱公 十一年》
♣ 도군[道君]곧 휘종인데, 휘종이 도교(道敎)를 숭상하므로 휘종의 생전에 전위(傳位)를 받은 흠종(欽宗)이 휘종에게 교주도군황제(敎主道君皇帝)란 존호(尊號)를 올리었다.
♣ 도군[道君]송 나라 도군은 송 나라의 휘종(徽宗)을 가리킨다. 휘종은 도군 황제(道君皇帝)라고 자칭하였으며, 그림을 잘 그렸다.
♣ 도군[道君]송(宋) 나라 휘종(徽宗)의 별칭. 소흥(紹興) 5년(1135)에 금(金)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오국성(五國城)에서 객사하였다.
♣ 도군지주[陶君止酒]진(晉)의 도잠(陶潛)이 음주(飮酒)라는 제목으로 시(詩) 20수를 쓰고, 그 다음에 지주(止酒)라는 제목으로 술을 끊어야겠다는 내용의 시를 썼음. 《陶淵明集 卷三》
♣ 도굴계맹[道屈季孟]계씨와 맹씨는 노(魯) 나라를 집권한 두 대부(大夫)인데, 제경공(齊景公)이 공자를 대접하며 말하기를, “계씨와 같이는 못하겠지만 계씨와 맹씨의 중간으로서 대접하리라.” 하였다《論語 微子》. 계씨는 상경(上卿), 맹씨는 하경(下卿)이니, 두 벼슬의 중간으로 대우하겠다는 뜻인데, 공자는 그들에게 용납되지 못하여 본국을 떠났다.
♣ 도궁[途窮]진(晉) 나라 완적(阮籍)이 나가서 노닐다가 길이 막힌 곳에 이르면 통곡하고 돌아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晉書 阮籍傳》
♣ 도궁곡[途窮哭]완적(阮籍)의 고사. 완적은 가끔 느닷없이 길을 떠나 마음내키는 대로 갔다가 길이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면 곧 통곡을 하고 되돌아왔다고 함. 《晉書 阮籍傳》
♣ 도궁완자곡[途窮阮子哭]완자는 진(晉) 나라 때의 완적(阮籍)을 말함. 이 말은 완적이 수레를 타고 놀러 나갔다가 수레가 통과하지 못하는 곳에 이르러 통곡하고 돌아온 고사에서 온 말인데, 전하여 곤궁함을 슬퍼하는 뜻으로 쓰인다. 《晉書 阮籍傳》
♣ 도궁제읍지삼숙[道窮齊邑遲三宿]맹자가 제(齊) 나라를 떠나면서 3일 동안이나 제 나라 동남쪽에 있는 주(晝)라는 고을에서 묵고 간 일을 말한다.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3일 동안을 묵고 주 고을을 나왔다.[三宿而出晝]" 하였다.
♣ 도규[刀圭]약(藥)을 뜨는 숟가락. 약물(藥物)이나 의술(醫術). 늙지 않게 하는 선약(仙藥)을 말한다.
♣ 도균[陶鈞]도(陶)는 질그릇 만드는 사람, 균(鈞)은 질그릇 만드는 데 쓰는 굴림틀[轉器]. “성왕이 세상과 풍속을 제어함은 질그릇 만드는 사람이 굴림틀을 굴림과 같다.”는 말이 있다. 질그릇을 만들 때 쓰는 선반(旋盤). 녹로(轆轤). 곧 왕자(王者)가 천하를 경영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는 문자다. 사기(史記) 추양전(鄒陽傳)에 “도균(陶鈞)으로 천하를 교화한다.” 하였다.
♣ 도금무보[陶琴無譜]도연명은 무현금(無絃琴)을 연주했다고 한다.
♣ 도기[道氣]도기는 도(道)의 기운으로 세속을 초탈한 청정한 경지를 말한다.
♣ 도기수[盜其嫂]사기(史記) 진평세가(陳平世家)에 “平雖美丈夫如冠玉矣……平居家時 盜其嫂"라 하였음.
♣ 도기희서진탕탕[道寄姬書陳蕩蕩]희(姬)는 주(周) 나라 성이므로 희서(姬書)는 주서(周書)를 말하는데, 즉 서경(書經) 홍범(洪範)을 가리킨다. 홍범은 기자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도를 말한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리킨다. 이 글에 “편당(偏黨)이 없으면 왕도(王道)가 탕탕(蕩蕩)해진다.” 하였는데, 탕탕은 집전(集傳)에 광원(廣遠)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 도남[圖南]송(宋) 나라 진박(陳搏)의 자. 그가 화산(華山)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곡식도 먹지 않고 한 번 누우면 1백여 일씩이나 일어나지 않고 잤다고 함. 《宋史 卷457》
♣ 도남[圖南]송(宋)의 진단(陳摶). 도남(圖南)은 그의 자(字)임.
♣ 도남[圖南]어느 다른 지역으로 가서 큰 사업을 시작하다란 뜻의 고사성어.
♣ 도남붕익능창해[圖南鵬翼凌蒼海]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붕새가 북쪽에서 단숨에 남쪽으로 날아가려는 웅지를 품고 있다.” 하였다.
♣ 도년[徒年]도형(徒刑)을 이른다. 도형의 형기(刑期)에는 1년, 1년 반, 2년, 2년 반, 3년의 5등급이 있다. 그 형기의 단위가 연(年)이므로 도년(徒年)이라 하는 것인데, 이것은 말을 마필(馬匹), 쌀을 미석(米石), 얼음을 빙정(氷丁), 매를 응련(鷹連)이라 하는 것과 같은 예이다.
♣ 도능규공실[道能窺孔室]학문의 조예가 깊은 것을 뜻함. 논어(論語) 자장(子張)의 “궁궐의 담에 비유하면 나의 담은 어깨 정도의 높이로서, 궁궐 안의 방이나 집들의 아름다움은 엿볼 수 있으나, 부자(父子)의 담은 여러 길의 높이라서 …… ” 한 데서 나온 말임.
♣ 도달[挑撻]시경(詩經) 정풍(鄭風) 자금(子衿)의 “도하며 달하니.[挑兮撻兮]"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즉 왕래(往來)하며 뛰어다닌다는 뜻이다.
♣ 도당씨[陶唐氏]고대 성군(聖君)의 하나인 요(堯) 임금을 가리킨다.
♣ 도덕경[道德經]주(周) 나라 이이(李耳)가 저술한 책으로 뒷날 도교(道敎)의 바탕이 됨. 주석서에는, 한(漢) 나라 하상공(河上公)의 노자주(老子註) 2권과 위(魏) 나라 왕필(王弼)의 노자주(老子註) 2권이 있음. 《四庫全書總目提要》
♣ 도도[滔滔]광대한 모양, 물이 흘러가는 모양, 두루 돌아다니는 모양, 지나가는 모양, 별이 뜨거운 모양, 어지러워지는 모양, 탄식하는 모양
♣ 도도[叨叨]말이 많음, 투덜거림, 참됨, 진실함
♣ 도도[淘淘]물이 흐르는 모양
♣ 도도[滔滔]물이 흘러내리는 모양.
♣ 도도[慆慆]오랜 모양, 어지러운 모양
♣ 도도[涂涂]이슬이 많이 내리는 모양
♣ 도도독[陶都督]도잠(陶潛)의 증조부 도간(陶侃)을 말한 것. 간은 진(晉)의 명제(明帝) 때 군공(軍功)으로 교주(交州)ㆍ광주(廣州) 등 7개 주의 도독(都督)을 역임하고 대장군(大將軍)이 되었음. 《晉書 卷六十六》
♣ 도도자개시[滔滔者皆是]공자가 길을 가다가 자로에게 나루터를 물어 오게 하였는데 장저(長沮)가, 자로가 공자의 문인이란 것을 듣고는 “도도(滔滔)한 것이 천하가 다 이러하니 누구와 변역하겠는가.[滔滔者 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微子》
♣ 도도주대화[陶陶鑄大和]천지간의 충화(沖和)한 기운 속에 평화스러운 심리 상태가 조성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 도도탄불귀[慆慆歎不歸]시경(詩經) 빈풍(豳風) 동산(東山)에 “我徂東山 慆慆不歸"라 하였음.
♣ 도도평장[都都平丈]도도평장은 옛날 삼가촌(三家村)의 무식한 몽학 선생이 아동에게 논어를 가르치면서 공자(孔子)가 주(周) 나라의 예(禮)를 일컬어 ‘욱욱호문(郁郁乎文)’이라고 한 것을 잘못 도도평장으로 읽었다는 데서 온 말로, 성인의 글을 고쳐 읽는다 하여 조롱한 말이다.
♣ 도두[渡頭]나루터.
♣ 도두[刀頭]돌아온다는 뜻인 환(還)의 은어(隱語)이다. 도두는 칼끝인데, 칼끝에 달린 고리인 환(環)이 돌아온다는 뜻인 환(還)과 음이 같으므로 취해서 쓴 것이다.
♣ 도두[刀斗]조두(刁斗)로, 군중(軍中)에서 낮에는 밥을 짓는 데 쓰고 밤에는 경보를 알리는 데 쓰는 솥 같이 생긴 것이다.
♣ 도두환[刀頭環]칼 머리에 고리[環]가 달렸는데, 환(環)은 환(還)과 음이 같으므로 귀환(歸還)한다는 은어(隱語)로 쓴다.
♣ 도라[兜羅]초목(草木)의 화서(花絮)를 일컫는 말이다.
♣ 도라면[兜羅綿]목면(木綿)의 일종.
♣ 도랍[刀臘]양면에 날이 있는 칼.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 주(註)에 “도씨(桃氏)가 칼을 만드는데 납(臘)의 넓이가 2촌 반이다.” 하였고, 소(疏)에 “양면에 다 날이 있음.”이라고 하였다.
♣ 도량[道場]모든 불(佛)ㆍ보살(菩薩)이 성도(聖道)를 얻거나 또는 얻으려고 수행하는 곳을 말한다. 보리도량(菩提道場).
♣ 도량죽마[跳踉竹馬]아이들이 대나무 막대를 가랑이 사이에 넣고 말처럼 끌고 다니는 것으로, 어릴 때부터 함께 놀던 친구를 말한다. 죽마고우(竹馬故友). 진서(晉書) 은호전(殷浩傳)에 “환온(桓溫)이 어릴 때에 호(浩)와 함께 대막대를 타고 놀았다고 말하였다.” 했다.
♣ 도려[陶廬]도잠(陶潛)의 집이란 뜻으로 곧 은사의 집을 의미하는데, 도잠의 음주시(飮酒詩)에 “집을 인경에 지어 살지만 거마의 시끄러움 없어라 …… 동쪽 울밑에서 국화를 따며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 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하였다.
♣ 도려[道侶]승려나 도사가 함께 수행하거나 수련하는 동료를 일컫는 말이다.
♣ 도려[盜驪]주 목왕(周穆王)의 팔준마(八駿馬)의 하나인 준마의 이름이다.
♣ 도령[陶嶺]도령은 퇴계 선생이 은거하던 도산(陶山)을 뜻한다.
♣ 도령[陶令]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을 가리킨다. 그가 일찍이 팽택령(彭澤令)을 지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 도령독련향[陶令獨憐香]송(宋) 나라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에 “초목(草木)의 꽃 가운데 사랑스러운 것이 매우 많지만, 진(晉) 나라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했다……" 하였다.
♣ 도령문전오[陶令門前五]도잠(陶潛)이 팽택령(彭澤令)을 지냈으므로 그를 도령(陶令)이라 별칭하였다. 그가 문 앞에 다섯 그루 버들을 심어 놓고 자칭 오류(五柳) 선생이라 하였다.
♣ 도령병[陶令病]도공은 도잠(陶潛)이요, 병은 곧 각기병을 가리킨다. 도잠을 매우 존경하던 주자사(州刺史) 왕홍(王弘)이 함께 놀다가 돌아갈 적에 탈 것을 묻자, 도잠은 “나는 본래 다리병이 있어서 그 동안 남여(藍輿)를 탔으니 또한 스스로 돌아갈 수 있다.” 하며 거절하였다. 《晉書 陶潛傳》
♣ 도령삼경[陶令三徑]도령(陶令)은 팽택 영(彭澤令)을 지낸 진(晉) 나라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장후(蔣詡)가 뜰에 오솔길 세 개를 내고 송(松), 국(菊), 죽(竹)을 심은 고사가 있는데, 도잠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三徑就荒 松菊猶存”이라 하였고, 진서(晉書) 도잠전(陶潛傳)에 삼경(三徑)을 꾸밀 밑천을 마련하려고 팽택 영이 되었던 곡절이 소개되어 있다.
♣ 도로[都盧]서역(西域)의 나라 이름. 그곳의 사람은 몸이 가벼워 나무를 잘 오르므로 함부로 잘 돌아다니는 것을 비유한 것임.
♣ 도로무공[徒勞無功]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보람이나 이익이 없다란 뜻의 고사성어.
♣ 도록[道籙]도가(道家)에서 미래(未來)의 길흉을 예언(豫言)하여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 도룡[屠龍]장자(莊子) 열어구(列禦寇) 편에, 주평만(朱泙漫)이 용 잡는 기술을 지리익(支離益)에게 배우는데 천금의 재산을 다 없애고 3년 만에 기술을 배우게 되었으나 그 묘법을 써볼 곳이 없었다.” 하였음. 그래서 기술만 높고 쓸 곳이 없는 것을 도룡지기(屠龍之技)라 칭함.
♣ 도룡기[屠龍技]세상에서 쓸모 없는 명기. 또는 높이 뛰어난 기예를 말한다. 장자(莊子) 열어구(列御寇)에 “주평만(朱泙漫)이 지리익(支離益)에게서 용 잡는 기술[屠龍]을 배웠는데, 집안의 천금을 다 털어 3년이 지난 뒤에야 그 기술이 이루어졌다.” 하였다.
♣ 도룡수교경무용[屠龍雖巧竟無用]주평만(朱泙漫)이란 사람이 지리익(支離益)에게 용 잡는 기술을 배우면서 천금(千金)의 가산을 탕진하고 3년 만에 성취하였는데,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써먹을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莊子 列御寇》
♣ 도룡예[屠龍譽]출중한 기예를 소유했다는 말로, 장자(莊子) 열어구(列御寇)에, 천금(千金)을 들여 삼 년 만에 용 잡는 기술[屠龍之技]을 터득한 주평만(朱泙漫)의 이야기가 나온다.
♣ 도룡지기[屠龍之技]용을 잡는 재주가 있다. 쓸모 없는 재주를 가르키는 말.
♣ 도륜[陶輪]유마힐경(維摩詰經)에 “斷取三千大千世界 如陶家輪 着右掌中 擲過恒沙世界之外"라 하였음.
♣ 도리[桃李]도리는 훌륭한 문생이나 천거한 현재(賢才)를 말한다. 당(唐)의 적인걸(狄人傑)은 일찍이 요원숭(姚元崇)ㆍ환언범(桓彦範) 등의 많은 인재를 천거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천하의 도리가 모두 공(公)의 문하에 있다.” 한 말에서 온 것이다. 《資治通鑑 唐紀》
♣ 도리[闍梨]사범(師範)이 되는 승려(僧侶)를 말하는데, 전하여 일반적인 승려의 칭호로 쓰인다.
♣ 도리[桃李]도리는 복숭아와 오얏인데 열매가 많이 달린다 하여 선대의 음덕을 받은 자손을 가리키기도 한다.
♣ 도리경무미[桃李競嫵媚]소인들이 권세를 다투는 것을 말한다. 도리는 일시의 봄을 자랑하기 때문에 소인(小人)에 비유한 것이다.
♣ 도리만천하[桃李滿天下]복숭아와 오얏이 천하에 가득하다. 우수한 문하생(門下生)이 많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복숭아와 오얏은 그 열매의 맛이 좋아 따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기에 후배를 교육하거나 자식을 가르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 도리불언하자성혜[桃李不言下自成蹊]복숭아와 오얏은 그 열매의 맛이 좋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그 아래로 많은 사람들이 따먹으러 오게 되므로 자연히 길이 생긴다. 덕행이 있는 사람은 무언중에 남을 심복시킴을 비유한 말이다. 훌륭한 스승 아래로 우수한 인재가 많이 모이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 도리성행[桃李成行]도리가 줄을 지었다는 말은 준수(俊秀)한 인사(人士)가 문하(門下)에 가득하다는 말로, 당(唐) 나라 적인걸(狄仁傑)이 천거한 사람은 모두 명사(名士)가 되었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이 “천하의 도리가 모두 공(公)의 문하에 있소.”라고 한 데서 인용된 말이다. 《資治通鑑 唐紀》
♣ 도리성혜[桃李成蹊]사기(史記) 권109 이장군전(李將軍傳)의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아래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에서 나온 것이다.
♣ 도리원[桃李園]복사꽃과 오얏꽃이 핀 아름다운 정원을 말한다.
♣ 도리월[桃李月]복사꽃과 오얏꽃이 필 무렵에 뜨는 달을 말한다.
♣ 도리혜[桃李蹊]한(漢) 나라의 명장(名將) 이광(李廣)의 덕을 표현하면서 “도리가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찾아와 그 밑에 자연히 길이 이루어진다.[桃李不言 下自成蹊]”고 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109 李將軍傳 贊》
♣ 도리화[桃李花]준수(俊秀)한 인재(人材)를 말한다. 당(唐) 나라 적인걸(狄仁傑)이 천거한 사람이 모두 명사(名士)가 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에게 “천하의 도리가 모두 공(公)의 문하에 있소.”라고 한 데서 인용된 말이다. 《資治通鑑 唐紀》
♣ 도림[道林]동진(東晉)의 명승(名僧)인 지둔(支遁)의 자(字). 왕희지(王羲之) 및 허순(許詢) 등과 함께 막역하게 지냈으므로, 선비와 교유하는 승려의 대칭으로 도림이라는 말을 흔히 쓰게 되었다.
♣ 도림방우[桃林放牛]무력(武力)을 쓰지 않는다는 뜻. 도림은 지명으로 주 무왕(周武王)이 소를 풀어 놓았던 곳. 서경(書經) 무성(武成)에 “무력을 거두고 문덕(文德)을 닦아, 말은 화산(華山)의 남쪽 기슭으로 돌려보내고, 소는 도림의 들에 풀어놓아, 천하에 다시 쓰지 않을 것을 보였다.” 하였다.
♣ 도림선사[道林禪師]당(唐) 나라 고승(高僧). 그의 성은 오씨(吳氏), 이름은 원경(元卿)으로, 진정산(秦亭山)에 들어가 큰 일산처럼 생긴 소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사는데 까치가 그 옆에 둥지를 짓고 깃드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조과선사(鳥窠禪師)라 불렀다. 《傳燈錄 卷四, 淵鑑類函 卷三百十七》
♣ 도마[稻麻]많은 신자(信者)들을 벼와 삼에 비유함.
♣ 도망[悼亡]상처(喪妻)를 이름. 진(晉)나라 반악(潘岳)이 상처를 보고 도망시(悼亡詩) 세 수를 지었는데 그 시가 전송되어 뒷사람이 상처를 당한 용어로 쓰고 있음.
♣ 도망시[悼亡詩]아내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시를 말한 것이다.
♣ 도명[逃名]이름을 숨김.
♣ 도모[道謀]도모는 곧 큰 길 가에 집을 짓는 경우, 길가는 여러 사람들이 각각 이래라 저래라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詩經 小雅 小旻》
♣ 도목[都目]일을 한데 몰아서 행하거나 적는 것. 그러한 행사ㆍ문서를 뜻하기도 한다. 도목안(都目案)ㆍ도목단자(都目單子) 등 문서에도 쓰이고 행사에도 쓰이는 말이며, 도목정사는 경우에 따라 한 해에 한 번 내지 여섯 번 있었다.
♣ 도목정사[都目政事]도목정사는 해마다 유월과 섣달에 벼슬아치의 성적에 다라 벼슬을 떼어버리거나 좋은 데로 올리거나 하던 일.
♣ 도무[兜鍪]도무는 투구이므로 장수(將帥)를 뜻한다.
♣ 도문대작[屠門大嚼]도문대작은 정육점 앞을 지나면서 입을 크게 벌려 고기 씹는 시늉을 하며 잠시 마음을 쾌하게 갖는다는 뜻으로, 위(魏) 나라 조식(曹植)의 여오계중서(與吳季重書)에 “푸줏간을 지나면서 크게 씹으면 비록 고기를 먹지 못한다 할지라도 귀하고 유쾌한 일이다.” 하였다.
♣ 도문오류[陶門五柳]오류선생(五柳先生)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 도문오주류[陶門五株柳]도잠(陶潛)의 문 앞에 있는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말한다. 진(晉) 나라 때 도잠(陶潛)이 팽택령(彭澤令)으로 있다가 뜻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자칭하며 음주와 독서로 즐겼다 한다. 《陶靖節集 卷六 五柳先生傳》
♣ 도문유대작[屠門猶大嚼]사람들이 장안이 즐겁다는 말을 들으면 문에 나가서 서쪽을 향해 웃고, 고기 맛이 좋다 하면 고깃집 문간을 대하여 씹는다. 《桓潭新論》
♣ 도미[酴醾]꽃 이름. 만생(蔓生)하는 관목(灌木)으로 꽃은 초여름 경에 핀다. 도미(酴醾)는 원래 술 이름인데 꽃이 그 술빛처럼 하얗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임. 《歲時記》
♣ 도미[荼미]꽃으로 향기가 매우 강렬한데, 특히 이 꽃은 음력으로 2~3월 사이에 핀다고 한다.
♣ 도미[酴醾]다화(茶花)의 별명으로 동백꽃을 가리킨다.
♣ 도미방지[蹈尾方知]범의 꼬리를 밟다가 위태로움을 당하였다는 말이다.
♣ 도미찬[陶眉攢]연사고현전(蓮社高賢傳)에 “혜원법사(慧遠法師)가 편지로 도연명(陶淵明)을 초청하니, 연명이 ‘술을 마시게 한다면 가겠다.’고 답하자, 혜원법사가 그러겠다고 허락하였다. 그런데 연명이 연사(蓮社)에 도착하자, 혜원법사가 연명에게 연사에 들어오라고 강요하니 연명은 눈살을 찌푸리고 돌아갔다.” 하였다.
♣ 도미화[酴醾花]꽃나무. 이 꽃가루를 술에 타면 술맛이 좋다고 한다.
♣ 도방[都房]도방은 큰 북당(北堂)의 뜻으로서 옛사람들이 그곳에 화초를 심곤 하였으므로 귀인(貴人)의 화원(花苑)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 도방고리[道傍苦李]길가의 쓰디쓴 자두라는 말로 아무도 따는 사람이 없이 버림받는다는 뜻이다.
♣ 도방리고오투육[道傍吏苦烏偸肉]정사(政事)의 치밀함을 비유한 말. 한(漢) 나라 때 황패(黃覇)가 영천태수(潁川太守)로 있을 적에 민정을 사찰할 일이 있어 나이 많은 청렴한 한 아전을 골라 내보냈는데, 그 아전이 직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길가에서 밥을 먹을 때 까마귀가 고기를 훔쳐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황패는 이 일을 다른 백성으로부터 이미 전해 듣고 있다가 그 아전이 사찰을 마치고 돌아오자, 황패가 위로하여 말하기를 “대단히 고통스러웠겠다. 길가에서 밥을 먹다가 까마귀에게 고기까지 빼앗겼구나.” 하니, 그 아전이 크게 놀라 한 가지 일도 속이지 않고 사실대로 보고함으로써 일을 잘 조처하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八十九》
♣ 도변고리[道邊苦李]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하나인 왕융(王戎)이 어렸을 적에 길가의 오얏나무를 보고는 따 먹을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필시 맛이 쓸 것이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하여, 도변고리는 용렬한 인간, 혹은 무용지물의 뜻으로 곧잘 쓰이게 되었다. 《世說新語 雅量》
♣ 도보[道甫]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자. 이광사는 영조 시절 손꼽히던 서예가로서 자기 호(號)를 딴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서체(書體)를 남겼음. 《東國文獻 筆苑編》
♣ 도복여면과[陶復如綿瓜]시경(詩經) 대아 면(綿)의 “외가 달려 저만큼 컸네. ……흙을 구워 흙집 짓고.[綿綿瓜瓞…… 陶復陶穴]"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周) 나라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처음 나라를 창업할 때는 저렇게 한미하게 살았지만, 뒤에 후손인 문왕(文王)이 천명(天命)을 받았다는 뜻으로, 지금은 비록 한미하게 살지만 후손이 현달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 도본준[屠本畯]명 나라 문신. 자는 전숙(田叔), 자호를 감선생(憨先生). 저서에 태상전록(太常典錄)ㆍ전숙시초(田叔詩草)가 있다.
♣ 도부[到付]관찰사가 수령의 장보(狀報)에 답하는 문서를 말한다.
♣ 도부[桃符]옛날 새해 아침에 두 개의 복숭아나무 판에다 신도(神荼)와 울루(鬱壘)의 두 귀신 이름을 써서 문 옆에 걸어 둠으로써 사기(邪氣)를 막았던 풍속을 말한다. 이후 춘첩(春帖)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本草 桃符》
♣ 도불습유[道不拾遺]길에 떨어진 것도 줍지 않는다. 생활의 여유가 생기고 믿음이 차 있는 세상의 아름다운 풍속을 이르는 말. 법이 엄격하게 시행되어 길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자가 없을 만큼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는 뜻.
♣ 도비[掉臂]팔을 내저어 돌아본 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누구에게도 응수하거나 돌아본 체하지 않고 조용히 지낸다는 뜻이다.
♣ 도사[陶舍]도사(陶舍)는 도연명의 집이다. 진(晉) 나라 도잠(陶潛)이 문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지었다. 《晉書 卷 94 陶潛傳》
♣ 도사[陶謝]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과 남조 송(宋)의 사영운(謝靈運)을 병칭한 말이다. 각각 전원시(田園詩)와 산수시(山水詩)에 능하여, 자연의 경물 묘사에 최고의 솜씨를 선보이고 있다.
♣ 도삭[度索]동해 바다 속에 있다는 전설상의 섬 이름. 한(漢) 나라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난룡(亂龍)에 “상고 시대에 귀신을 잘 잡는 신도(神荼)와 울루(鬱壘) 형제가 이 산 위의 복숭아나무 아래에 서서 귀신들을 검열하였다.”는 구절이 나온다.
♣ 도삭반도[度索蟠桃]창해(滄海) 속에 도색산(度索山)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는 큰 복숭아나무가 있어 반도가 열린다고 한다. 반도는 전설 속에 나오는 신선들이 먹는 복숭아로, 삼천 년마다 한 번 열매를 맺으며, 이 복숭아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고 한다. 《山海經》
♣ 도산[嵞山]도산(塗山)과 같다. 도산의 소재지에 대해서는 설이 여러 가지다. 첫째는 사천파현(四川巴縣)에 있다는 설인데 촉전(蜀典) 권2, 도산씨강주 조(塗山氏江州條)에 보인다. 둘째는 안휘성(安徽省) 회원현(懷遠縣)에 있다는 것으로 노사(路史), 후기십이(後紀十二) 주(注)와 청(淸) 일통지(一統志)에 보인다. 신화적 관점에서 논하자면 월(越)의 회계(會稽) 월절서(越絶書) 외전기지(外傳記地)에 있다는 설이 비교적 정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우에게 상서로운 징조를 보여주었던 구미호(九尾狐)가 바로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 도산[陶山]송(宋) 육전(陸佃)의 호.
♣ 도산[塗山]수춘현(壽春縣)의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하우(夏禹)가 이곳에다 제후들을 집합시키자 옥과 비단을 폐백으로 가지고 온 자가 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 도산[道山]신선이 사는 선경(仙境)을 말한다.
♣ 도산[陶山]퇴계 이황을 말함.
♣ 도산[塗山]하우씨(夏禹氏)의 후비임. 그가 도산씨(塗山氏)의 딸이었으므로 이렇게 말한다.
♣ 도산로[陶山老]퇴계 이황을 말함.
♣ 도산사일침루경[塗山四日寢屢驚]장가들어 아내를 맞아온 기간. 서경(書經) 익직(益稷)에, “내 도산으로 장가들어 신ㆍ임ㆍ계ㆍ갑(辛壬癸甲)을 지냈으며” 운운했는데, 이는 우(禹)가 치수(治水)에 바빠 신일(辛日)에 도산으로 장가갔다가 그로부터 사흘 후인 갑일(甲日)에 서둘러 돌아와 다시 치수의 일에 나섰음을 말한 것임.
♣ 도산서당[陶山書堂]경상도 안동에 있는 퇴계의 서재이다. 다음의 암서헌에서 부용봉까지는 모두 그 부 속 건물이나 혹은 부근 산천(山川)들이다.
♣ 도산씨[塗山氏]우(禹) 임금이 일찍이 도산씨(塗山氏)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 도산지회[嵞山之會]도산은 회계산(會稽山)으로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에 있다. 옛날 우(禹) 임금은 제후들을 도산에서 모으니, 폐백을 갖고 온 나라가 만(萬)이나 되었으며, 회계산에서 여러 신에게 제사하였다. 《春秋左傳 哀公七年, 國語 魯語》
♣ 도상림[禱桑林]은(殷)나라의 탕(湯)이 7년 대한(大旱)에 큰 가뭄 때에 상림에서 기우제 지낸 것을 말하는 것이다.
♣ 도상문우[道上問牛]정승의 직책을 가리키는 말. 한(漢) 나라 승상(丞相) 병길(丙吉)이 되어 길을 갈 때 사람 죽은 것을 보고는 아무 말을 않더니, 어떤 사람이 소를 쫓아가는데 소가 헐떡이며 혀를 내뽑는 것을 보고 하인을 시켜, “소를 몇 리나 쫓아왔느냐.” 물어보았다. 옆의 사람이 그까짓 것은 왜 묻느냐고 하자 “사람이 죽은 것은 경조윤(京兆尹)이 걱정할 일이요, 삼공(三公)은 음양(陰陽)의 조화(調和)함을 맡았으니 지금 보니까 소가 헐떡이니 혹시 음양이 고르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여 물었노라.” 하였다 한다. 《漢書 丙吉傳》
♣ 도색반도[度索蟠桃]반도(蟠桃)는 신선들이 먹는 복숭아로, 바다 속에 있는 도색산(度索山) 꼭대기에서 자라며, 3천 년마다 한 번 열매를 맺는데, 이 복숭아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고 한다. 《山海經》
♣ 도생[桃笙]도죽(桃竹)으로 만든 돗자리이다.
♣ 도서[圖署]서화(書畵)에 찍는 온갖 도장.
♣ 도서[圖書]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합칭한 말이다.
♣ 도서조박비심전[圖書糟粕匪心傳]제 환공(齊桓公)이 당(堂) 위에서 책을 읽는 것을 윤편(輪扁)이 보고는, 그것은 이미 죽은 옛사람이 먹다가 남긴 술지게미[古人之糟粕]일 뿐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장자(莊子) 천도(天道)에 나온다.
♣ 도선[逃禪]속세(俗世)를 떠나 절에 들어가서 참선(參禪)을 한다는 뜻이다.
♣ 도세[度世]티끌 세상에서 초탈하여 신선이 되는 것을 말한다.
♣ 도소부[搗素賦]한 성제(漢成帝)의 후궁인 반첩여(班倢伃)의 작으로 내용은 흰 비단을 다듬이질하는 것을 읊은 것임.
♣ 도소주[屠穌酒]약을 넣어 담갔다가 음력 정월 초하룻날 온 식구가 이 술을 마시어 온역(瘟疫)을 물리쳤다고 한다. 육계(肉桂)ㆍ산초(山椒)ㆍ백출(白朮)ㆍ길경(桔梗)ㆍ방풍(防風) 등의 한약재를 넣어 담그는데, 이 술을 마실 때는 어른과 어린이가 모두 의관을 정제하고 어린이가 어른께 절을 올린 다음 함께 앉아 서로 축하하면서 가장 어린이부터 이 술을 먼저 마신다고 함. 《荊楚歲時記》
♣ 도소지양[屠所之羊]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양, 즉 죽으러 갈 때.
♣ 도솔[兜率]불가(佛家)에서 말하는 하늘의 하나. 높은 곳에 위치한 절을 말하기도 한다.
♣ 도솔[兜率]도가(道家)에 도솔천(兜率天)이 있는데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사는 곳이니, 곧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도리천(忉利天)이다. 욕계제천(欲界諸天)의 하나이다.
♣ 도솔천[兜率天]도가(道家)의 태상노군(太上老君)이 거처한다는 곳.
♣ 도솔천[兜率天]불가에서 말하는 욕계(欲界) 여섯 천(天)의 하나. 수미산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거리에 있는 천계(天界)로서 원(院)이 둘 있는데, 그 내원(內院)은 미륵보살의 정토(淨土)라고 함. 《大藏法數》
♣ 도솔천[兜率天]불교에서 말하는 천계(天界) 중의 하나. 미륵보살이 이곳에 살고 있으며, 생전에 불경의 수행(修行)을 잘한 사람이 죽어서 이곳으로 가게 된다 하였다. 《法華經 勸發品》
♣ 도수[島瘦]가도의 시가 여위고 딱딱한 것을 숭상하므로 이런 일컬음이 나오게 된 것임. 소식(蘇軾)의 글에, “가도는 여위고, 맹교(孟郊)는 차고, 원결(元結)은 가볍고, 백거이(白居易)는 탁하다.” 하였음.
♣ 도수[塗脩]주 소왕(周昭王) 때의 도수국(塗脩國)을 말한다.
♣ 도수교한[島瘦郊寒]당(唐) 나라 때의 시인인 가도(賈島)와 맹교(孟郊)의 시풍(詩風)을 평하는 말로, 수(瘦)는 바싹 말라 파리하다는 뜻이고, 한(寒)은 옷이 남루한 비렁뱅이라는 뜻이다.
♣ 도수자[盜嫂者]형수를 훔친 자란 한 고조(漢高祖)의 공신(功臣)인 진평(陳平)을 이름. 관영(灌嬰) 등이 일찍이 진평을 참소하여 말하기를 “들으니 진평은 집에 있을 때에 자기 형수를 훔쳐 살았다고 한다.” 하였다. 《史記 陳丞相世家》
♣ 도습[蹈襲]옛 것을 좇아서 그대로 함. 초습(勦襲). 금사(金史) 이경전(李經傳)에 “시를 짓되 각고(刻苦)를 다하며 감히 전 사람을 도습하지 않았다.” 하였음.
♣ 도시[倒屎]신발을 거꾸로 신는다는 말로, 대단히 반가워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도식[桃植]복숭아는 곧 준수(俊秀)한 선비를 도리(桃李)에 비유한 데서 온 말로, 즉 인재 양성을 의미한 말이다.
♣ 도신[到申]옛날에 관리들이 진시(辰時)에 출사하여 신시(申時)에 퇴근을 하였다.
♣ 도신단단[刀身段段]칼이 여러 번 꺾어지는 일.
♣ 도심녕상마우호[道心寧爽馬牛呼]소라고 부르면 소라고 대답하고, 말이라고 부르면 말이라고 대답한다는 옛말이 있는데, 남과 이름을 다투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 도씨경[陶氏徑]도연명(陶淵明)이 팽택령(彭澤令)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세 갈래 오솔길은 묵혀졌으나 솔과 국화는 그대로 있네[三徑就荒 松菊猶存].” 한 데서 나온 것임.
♣ 도안[道安]동진(東晋) 때의 고승(高僧) 불도징(佛圖澄)의 제자, 양양(襄陽) 단계사(檀溪寺)를 세우다.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양양(襄陽)을 취하고 안(安)을 얻고 기뻐하여 말하되, “내가 10만 군사로 양양을 취하여 한 사람 반을 얻었으니, 안공(安公)이 한 사람이요, 습착치(習鑿齒)가 반 사람이다.” 하였다.
♣ 도안[道安]진(晉) 나라 때 고승(高僧)이니, 불도징(佛圖澄)의 제자. 석가(釋迦)보다 존귀한 자가 없다 하여 석(釋)으로서 씨(氏)를 삼았으니, 후세의 불도(佛徒)들이 석씨(釋氏)라고 칭호한 것이 도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梁高僧傳 卷五》
♣ 도안공[陶安公]선인(仙人)의 이름. 원래는 대장장이였는데 뒤에 적룡(赤龍)을 타고 승천했다 한다.
♣ 도야[陶冶]도(陶)는 기와를 굽는 사람이요 야(冶)는 풀무장이인데 이는 화육(化育) 재성(裁成)의 뜻을 빌어서 표현한 것임. 회남자(淮南子)에 “천지를 포괄하고 만물을 도야한다.” 하였음.
♣ 도어[徒御]도보(徒步)로 가면서 연(輦)을 끄는 자와 수레 위에서 말을 모는 자를 합해 일컫는 말이다.
♣ 도어사[都御史]대헌과 같은 말로 대사헌을 뜻한다.
♣ 도연[道緣]도가(道家)와의 인연, 즉 선경(仙境) 속에서 양생(養生)을 할 수 있게 된 특별한 인연이라는 뜻이다.
♣ 도열[桃茢]복숭아나무와 갈대 이삭으로 만든 비. 옛날에 이 비로 집안의 사기(邪氣)를 쓸어내었다고 한다.
♣ 도열강서파[圖列江西派]북송(北宋)의 황정견(黃庭堅)이 새로운 시풍(詩風)을 개창하여 강서시파(江西詩派)라 불렸는데, 여본중(呂本中)이 이들 법사(法嗣) 25인에 대한 강서시사종파도(江西試社宗派圖)를 그렸다.
♣ 도엽[桃葉]진(晉) 나라 왕헌지(王獻之)의 애첩(愛妾) 이름인데, 왕헌지는 도엽을 몹시 사랑하여 일찍이 그를 위해 도엽가(桃葉歌)를 지어 부르기까지 하였다.
♣ 도엽가[桃葉歌]도엽가는 악부(樂府)의 오성곡사(吳聲曲辭) 이름으로, 진(晉) 나라 왕헌지(王獻之)가 그의 애첩(愛妾)인 도엽(桃葉)을 보내면서 지어 불렀던 노래이다.
♣ 도오[堵敖]두오. 초나라의 현인.
♣ 도옥대[賭玉帶]소동파(蘇東坡)가 불인선사(佛印禪師)를 찾아가서, “선사(禪師)의 사대(四大)를 빌려서 상(床)을 만들어 봅시다.” 하니, 불인(佛印)이 말하기를, “내가 한 마디 말을 할터이니, 그 말에 답하지 못하면 띠고 계신 옥대(玉帶)를 내기로 합시다.” 하였다. 소동파가 허락하니, 불인(佛印)이, “사대(四大)가 본시 없는 것인데, 어디에 앉으시렵니까.” 하므로 소동파가 곧 답하지 못하니, 불인(佛印)이 시자(侍者)를 불러서, “이 옥대(玉帶)를 받아서 절[寺]에 두라.” 하였다.
♣ 도온[道韞]재능이 출중한 여성. 진(晉) 나라 사안(謝安)의 질녀(姪女)인 사도온(謝道韞)을 말한다. 사안이 눈 내리는 모습을 표현해 보라고 하였을 때, 조카인 사랑(謝郞)이 “공중에 소금을 흩뿌린 것과 조금 흡사하다.[撤鹽空中差可擬]”고 하자, 도온이 말을 받아서 “버들개지가 바람에 날린다는 것이 낫지 않을까.[未若柳絮因風起]”라고 하여 극찬을 받았던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言語》
♣ 도온고풍[道蘊高風]진(晉) 나라 태부(太傅) 사안(謝安)이 눈 내리는 날에 자질(子姪)들을 모아 놓고 분분한 백설(白雪)을 형용해 보라고 하자, 형의 아들인 호아(胡兒)가 “소금을 공중에 뿌려 놓은 듯하다.”고 하였는데, 이에 형의 딸인 도온(道蘊)이 “그것보다는 버들개지가 바람에 날리는 듯하다고 하는 것이 낫겠다.[未若柳絮因風起]”고 하자, 사안이 크게 웃으며 즐거워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言語》
♣ 도옹[陶翁]도옹은 이황(李滉)의 또 다른 호이다.
♣ 도와[陶瓦]오지기와
♣ 도외시[度外視]가욋것으로 봄. 안중에 두지 않고 무시함. 문제삼지 않음. 불문에 붙임.
♣ 도요[桃夭]시경(詩經) 주남(周南)의 편명이다. 그 시에 “싱싱한 복숭아나무, 꽃이 활짝 피었도다. 그녀 시집감이여, 집안 살림 잘 하리라.[桃之夭夭 灼灼其華 之子于歸 宜其室家]”라고 하였는데, 보통 원만하게 이루어진 혼례(婚禮)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 도요저[都要渚]김해(金海)ㆍ밀양(密陽)의 경상(境上)에 있다. 이 곳 주민 수백여 호는 대대로 생선 장사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농사를 짓지 않았는데, 음란한 짓을 한 부녀자가 있어 그의 집을 파서 방죽을 만들고, 그녀는 배에 실어 강에 띄워서 내쫓았다.
♣ 도원[道員]관명(官名). 청(淸) 나라 때 절강성(浙江省)ㆍ복건성(福建省)에 전운사(轉運使) 한 명씩을 두었었는데 뒤에 도원(道員)이라 개칭(改稱)하였다.
♣ 도원[道源]김세렴(金世濂)의 자(字)이다. 광해군 9년(1617) 사간원 정언이 되어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한 자들을 탄핵하다가 귀양살이를 하였으며, 반정(反正) 뒤에 다시 기용되고 나서 인조 11년(1633)에 공신(功臣) 이귀(李貴)가 이조 판서로 방자하게 자천(自薦)하는 것을 상소하였다가 현풍 현감(玄風縣監)으로 좌천되었다. 정경세(鄭經世)는 그를 ‘당대 제일의 인물’이라 하였고, 김류(金瑬)는 ‘진학사(眞學士)’라고 칭송하였다.
♣ 도원[桃源]도원은 진(晉) 나라 때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말하는데, 그 도화원기에 의하면 어부(漁父)가 뜻밖에 가게 된 별경(別境), 즉 도화원에는 옛날 진(秦) 나라 때의 난리를 피하여 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陶淵明集 卷六》
♣ 도원[陶園]도원은 진(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의 전원(田園)을 가리킨다.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전원에 장차 풀이 우거지리니 어찌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한 말이 있으므로 여기에서 빌려온 말이다.
♣ 도원가[桃源歌]도연명(陶淵明)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무릉(武陵)의 어부(漁父)가 길을 잃고 배를 타고 물을 따라 올라가니, 산에 구멍이 뚫려져 있어 들어간즉 전부가 복숭아꽃이요, 촌락이 있는데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진(秦)나라 때에 모진 정치를 피하여 들어온 사람들로 6백 년이 되도록 바깥 세상과 교통하지 않고 평안하게 살고 있었다.” 하였다.
♣ 도원결의[桃園結義]중국 촉(蜀)나라의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가 일찍이 도원(桃園)에서 생사를 같이하기로 형제의 의를 맺었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어 의형제를 맺는다는 의미로 쓰인다.
♣ 도원경[桃源境]무릉도원처럼 속세를 떠난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을 일컫는 고사성어.
♣ 도원국[陶園菊]진(晉) 나라 때 도연명이 뜻이 고상하여, 전원(田園)에 돌아가 유유자적할 생각으로 일찍이 팽택령(彭澤令)을 지내다가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었는데, 거기에 “내 전원이 묵어가는데 왜 돌아가지 않으랴……삼경(三徑)이 다 묵었으나 송국(松菊)은 그대로 있구나.” 한 데서 온 말이다. 《陶淵明集 歸去來辭》
♣ 도원도[桃源圖]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안평대군(安平大君) 용(溶)이 꿈에 무릉(武陵)도원(桃源)에 놀아본 경치를 명화가 안견(安堅)이 그린 명화(1447).
♣ 도원량[陶元亮]진(晉) 나라 도연명(陶淵眀)의 또 다른 자가 원량(元亮)이다.
♣ 도원송죽황삼경[陶園松竹荒三逕]진(晉) 나라 때 고사(高士)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삼경(三逕)은 묵었으나 송국(松菊)은 남아 있도다.” 하였다. 삼경이란, 한(漢) 나라 때 은사(隱士) 장후(蔣詡)가 문정(門庭)에 세 길을 내고 송(松)ㆍ국(菊)ㆍ죽(竹)을 심었다 한다.
♣ 도원자[桃源子]진(晉)의 도잠(陶潛)이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썼는데, 그 내용이 무릉(武陵)의 어부가 진(秦)나라 난리를 피하여 도원(桃源)을 찾아 들어간 것을 기록하였음. 《陶潛 桃花源記》
♣ 도위[都尉]관직명.
♣ 도위[陶衛]도읍(陶邑)에 봉지(封地)를 받고 왕실에 버금가는 부(富)를 차지한 전국 시대 진(秦) 나라 대신 위염(魏冉)과, 진 나라를 부강케 했던 위앙(衛鞅) 즉 상앙(商鞅)으로, 풍부함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 도위[都尉]선조(宣祖)의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결혼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진 박미(朴瀰), 즉 중연(仲淵)을 말한다.
♣ 도위방미[都尉厖眉]도위는 안사(顔駟)로, 한 나라 때 낭관(郞官)으로 있었는데, 어느날 한 무제가 연(輦)을 타고 낭서(郞署)를 지나다가 안사의 머리가 희고 눈썹이 희끗희끗한 것을 보고는 “노인네는 어느 때에 낭관(郞官)이 되었으며, 어찌 그리 늙었는가?”하자, 답하기를, “신은 문제(文帝) 때 낭관이 되었는데, 문제는 문(文)을 좋아하였는데 신은 무(武)를 좋아하였으며, 경제(景帝) 때에 이르러서는 얼굴이 아름다운 사람을 좋아하였는데 신은 얼굴이 못생겼으며, 폐하께서 즉위하여서는 나이 어린 자를 좋아하였는데 신은 이미 늙었습니다. 이 때문에 3대토록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낭관으로 늙은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황제가 감동해서 회계 도위(會稽都尉)로 발탁하였다. 《文選 張衡 思賢賦》
♣ 도유[陶劉]도연명(陶淵明)과 유령(劉伶)으로, 둘다 술을 즐겼다.
♣ 도유[都兪]도유는 아름답게 여기는 찬사.
♣ 도유비[道猶肥]한비자(韓非子) 유로(喩老)에 “선왕(先王)의 도의(道義)와 부귀의 영예(榮譽)가 가슴속에서 싸우면서 승부를 가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동안 수척하였는데, 지금은 선왕의 도의가 이겼기 때문에 이렇듯 통통하게 살이 찌게 된 것이다.”는 말이 나온다.
♣ 도유우불[都兪吁咈]도는 찬미하는 말이고, 유는 동의하는 말이고, 우는 동의하지 않는 말이고, 불은 반대하는 말이다. 본디 요, 순, 우 등이 조정에서 정사할 때에 쓰던 말인데, 후대에는 군신간에 온화한 모습으로 조정의 정사를 논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 도유우불제[都兪吁咈際]모두 대답하는 말인데, 도는 감탄사로 ‘아아’의 뜻이며, 유(兪)는 승낙하는 말이며, 우(吁)는 부정하는 말로 ‘아니아니’의 뜻이며, 불은 매우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는 말이다. 이것은 모두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로 임금과 신하 사이의 원만한 의견 교환을 말한 것이다.
♣ 도유유취향[陶劉遊醉鄕]술을 즐기는 도연명(陶淵明)과 유령(劉伶)을 말하는데, 당 나라 왕적(王績)이 지은 취향기(醉鄕記)에 이 사람들이 취향에 놀았던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 도은[陶隱]이숭인(李崇仁)의 호. 자(字)는 자안(子安), 본관은 성주(星州).
♣ 도은거[陶隱居]도홍경(陶弘景)을 말한다. 남북조(南北朝) 때 말릉(秣陵) 사람인데 자는 통명(通明)이다.
♣ 도의비[道義肥]옛날 자하(子夏)가 선왕(先王)의 의리와 세속의 부귀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다가 의리의 마음이 승리를 거두면서 살이 찌게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韓非子 喩老》
♣ 도의산[陶猗産]도주공(陶朱公)과 의돈(猗頓)의 재산. 도주공은 춘추 시대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신하 범여(范蠡)의 변명(變名)으로, 화식(貨殖)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하여 세 번이나 천금(千金)을 소유한 부자가 되었으며, 의돈은 도주공에게 상술(商術)을 배운 뒤 목축업으로 거부(巨富)가 되었다. 《史記 貨殖傳》
♣ 도이부인사[悼李夫人辭]이 부인을 슬퍼한 노래. 이 부인은 이연년(李延年)의 동생으로, 아름답고 가무(歌舞)에 능해 한 무제의 사랑을 받더니, 얼마 안가서 요절하게 되자, 무제가 그녀의 화상을 감천궁(甘泉宮)에 그려 놓고 잊지 못해 하며 이 노래를 지었다 함. 《漢書 外戚傳》
♣ 도입천요[道入天寥]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전환에 자연스러워 조화가 함께 돌아가므로, 적정한 데 들어 하늘과 더불어 일체가 된다.”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 도자왜[屠子倭]임진왜란 때 성질이 잔학하여 무차별 살상을 하던 왜병을 일컫던 말. 당시 구미 지역에 주둔했던 왜병은 조총이 없이 칼과 활만으로 무장을 했는데 성질이 잔학하여 무차별 살생을 하였으므로 ‘백정왜’라 불렀다.
♣ 도잠[陶潛]도잠은 진(晉)의 처사(處士)로 41세 때 팽택령(彭澤令)으로 있다가 윗사람의 제재가 싫고 전원(田園)이 그리워 재직한 지 80일 만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음. 《陶淵明集 文 歸去來兮辭 自序》
♣ 도잠건[陶潛巾]진(晉) 나라 때 도잠이 뜻이 매우 고상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와 야인(野人) 옷차림에 갈건(葛巾)을 쓰고 다녔는데, 술자리를 만나면 문득 갈건을 벗어 가지고 술을 걸러 마시고 술이 다하면 다시 쓰곤 했다 한다. 《宋書 隱逸傳》
♣ 도잠녹주[陶潛漉酒]도잠(陶潛)이 머리에 갈건(葛巾)을 썼다가 술이 익으면 갈건을 벗어서 술을 걸러서 마시고는 다시 그 갈건을 머리에 썼다.
♣ 도잠오류문[陶潛五柳門]도잠은 진(晉)의 고사로 자는 원량(元亮). 일찍이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지어 자신을 말하였는데 여기에 “선생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집가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는 스스로 오류선생이라 했다.” 하였다. 《晉書 陶潛傳ㆍ陶靖節集》
♣ 도잠오작비[陶潛悟昨非]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오늘이 옳았고 어제까지가 글렀음을 깨달았다.” 하며 자신의 용퇴(勇退)를 자축했다.
♣ 도잠취[陶潛趣]거문고는 없어도 취미만 있으면 된다는 뜻이다. 진(晉) 나라 때 고사(高士)인 도잠은 거문고의 음절을 본디 모르는데 항시 줄 없는 거문고를 하나 두고서 친구들과 술자리를 벌이면 그 줄 없는 거문고를 만지며 노래하기를 “거문고의 취미만 알면 되는 것인데 어찌 수고롭게 줄을 타랴.”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九十四 陶潛傳》
♣ 도장[道漿]도가(道家)에서 먹는 장물이란 뜻으로 술에 대한 은어.
♣ 도장경[屠長卿]장경은 명(明) 나라 문인 도륭(屠隆)의 자(字). 그는 희곡(戱曲)에 능했으며, 저서에는 고반여사(考槃餘事)ㆍ유구잡편(游具雜編) 등이 있음.
♣ 도장벽지전[叨將璧至前]밤에 야광주(夜光珠)가 창졸히 앞에 닥치면 사람들이 놀랜다. 사기(史記)
♣ 도재귀[倒載歸]술에 크게 취하여 곤드레만드레된 것을 비유한 말이다. 동진(東晉)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산도(山濤)의 아들 산간(山簡)이 술을 매우 즐겨 항상 주식(酒食)을 싣고 못 위[池上]에 떠서 진탕 마시고 곤드레만드레 취하여 돌아오므로, 그때 아이들이 노래하기를 “산공이 어디로 나가느뇨, 고양지로 나가는구나. 해 저물면 거꾸로 실려와서, 잔뜩 취해 정신이 없다네.[山公出何許 往至高陽池 日夕倒載歸茗艼無所知]" 하였다. 《晉書 卷四十三 山簡傳》
♣ 도재산공[倒載山公]산공은 진(晉)의 산간(山簡)을 이름. 산간이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양양(襄陽)에 있으면서 그 곳 토호(土豪)인 습씨(習氏)의 아름다운 원지(園池)에 가 허다히 취해 돌아갔기 때문에 당시 아동들이 노래하기를, “밤낮 거꾸로 실려 돌아가면서, 푹 취해 아무 물정 모르네.” 하였음. 《蒙求》
♣ 도재제패[道在稊稗]장자(莊子)에, “도는 어디에도 있어서, 돌피와 가라지에도 있다.” 하였다.
♣ 도저[道樗]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나무 이름으로, 크기만 했지 옹이투성이라서 목수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가죽나무처럼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도절[陶節]도잠의 정절. 진(晉)의 도잠(陶潛)은 뜻이 고결하고 벼슬을 좋아하지 않아 팽택령(彭澤令)으로 부임한 지 80여일 만에 차고 있던 인끈을 풀어 던지고 전리로 돌아오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써 자기 뜻을 나타냈는데, 세상에서는 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고 불렀음. 《晉書 卷九十四》
♣ 도정몰와부[跳井沒蛙跗]장자(莊子) 추수(秋水)에 “메워진 우물의 개구리는 발등이 겨우 덮일 만한 물을 갖고도 제낙으로 여긴다.” 하였다.
♣ 도정절[陶靖節]정절(靖節)은 진(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의 시호(諡號). 그는 팽택 령(彭澤令)이 된 지 80여일 만에 연말이 되어 상급인 군(郡)에서 감독하는 관리가 왔는데, 의관을 정돈하고 맞이하라 하자 “어찌 시골의 젊은 애들에게 허리를 굽히겠는가.” 하고는 그날 즉시 사임하였다. 하후자(夏侯孜)는 당(唐) 나라 사람으로 자는 호학(好學). 동평장사(同平章事)로 있었는데, 당사(堂史)가 서명(署名)을 하다가 하후자의 품안에 넘어져 죽었으므로 이 때문에 파직을 당하였다. 《晉書 陶潛傳ㆍ新唐書》
♣ 도제[荼薺]씀바귀와 냉이
♣ 도조[刀俎]단두대와 칼
♣ 도조[屠釣]우양(牛羊)을 도살(屠殺)하는 일이나 물고기를 낚는 일을 말한 것으로, 즉 비천(卑賤)한 사람의 일을 이른 말이다.
♣ 도종의[陶宗儀]자는 구성(九成), 호는 남촌(南村).
♣ 도주[陶鑄]도주의 도(陶)는 범토(笵土)를 이름이요, 주(鑄)는 주금(鑄金)을 이름이니, 다 그릇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인재를 만들어내는 뜻으로 쓰여졌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편에, 요순(堯舜)을 도주(陶鑄)한다는 말이 있음. 다시 말해, 질그릇 만드는 사람이 손으로 만져서 질그릇의 형상을 만들 듯이, 무쇠 그릇 만드는 사람이 무쇠를 녹여 부어서 무쇠 그릇을 만들 듯, 그 사람을 교양하여 사람이 되게 하였다는 말이다.
♣ 도주[盜酒]진서(晉書) 필탁전(畢卓傳)에 “필탁이 이부랑(吏部郞)으로 있으면서 늘 술에 젖어 직사(職事)를 폐기하였었는데, 하루는 이웃집 동료 낭(郞)의 집에 술이 익자 탁이 취한 김에 가서 술을 훔쳐 마시다가 관리자에게 붙잡혔다. 주인이 아침에 보니 필 이부(畢吏部)였으므로 포박을 풀어 주고 같이 술을 마셨다.” 하였다.
♣ 도주[道州]청도(淸道)의 고호임.
♣ 도주[陶朱]춘추 시대에 월(越) 나라가 거의 망하게 되었던 것을 범려(范蠡)라는 사람이 힘과 충성을 다하여 강국을 만들고, 원수인 오(吳) 나라를 정복한 뒤에 자기는 조그만 배 하나를 타고 강과 호수로 떠나가서, 도주공(陶朱公)이라 이름을 고치고 목축업에 전심하여 다시 큰 부호가 되었다.
♣ 도주공[陶朱公]도주공은 춘추 시대 월(越) 나라 사람인 범려(范蠡)의 변명(變名)이다. 범려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섬겨서 오(吳) 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을 세웠으나, 구천의 사람됨이 환란은 함께 할 수 있으나 안락은 함께 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하면서 배를 타고 제(齊) 나라로 가서 이름을 치이자피(鴟夷子皮)로 바꾸고 재산을 수천만 금이나 모았다. 제 나라에서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정승을 삼고자 하자, 그는 다시 모았던 재물을 다 흩어 나누어 준 다음 도(陶)로 가서 도주공이라고 자호하고는 또다시 수천만 금의 재물을 모았다. 《史記 卷一百二十九 貨殖列傳》
♣ 도주공[圖周公]무제가 늙어서 어린 아들 불릉(弗陵)을 장차 후계자(後繼者)로 삼으려 하여 신하 중에 가장 충성스럽고 믿을 만한 곽광(霍光)에게 불릉을 부탁하려고 화공(畵公)을 시켜 옛날 주공(周公)이 어린 임금 성왕(成王)을 등에 업고 조회 받는 그림을 그려서 곽광에게 주었다.
♣ 도주노도[陶朱老饕]도주(陶朱)는 도주공(陶朱公)의 준말로, 춘추 시대 월(越) 나라 대부 범려(笵蠡)의 별칭이다. 월왕 구천(勾踐)을 도와 오(吳) 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벼슬을 버리고 도(陶) 땅으로 들어가 주공(朱公)으로 행세하며 거금(巨金)을 벌어 번번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41 越王句踐世家》
♣ 도주몽[刀州夢]진(晉) 나라 때 왕준(王濬)이 집의 대들보 위에 칼 세 자루가 매달려 있는 데다 다시 칼 한 자루가 더 매달리는 꿈을 꾸고는 흉조(凶兆)라고 여기었다. 이의(李毅)가 이를 해몽하기를, “삼도(三刀)는 주(州) 자가 되고, 거기다 또 칼 한 자루가 더해졌으니, 당신께서는 익주(益州)를 맡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왕준이 익주 자사(益州刺史)가 되었다. 《晉書 卷42 王濬列傳》
♣ 도주민[道州民]도주(道州)의 백성들에 대해 읊은 시의 제목. 백장경집(白長慶集) 풍유(諷諭)에 보임.
♣ 도주시구[道州詩句]당(唐) 나라 때의 직신(直臣) 양성(陽城)이 직간(直諫)을 했던 관계로 도주 자사(道州刺史)로 좌천되었을 적에 매우 선정을 베풀어 큰 업적을 이루었으므로, 이에 대하여 백거이(白居易)가 도주민(道州民)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어 양성의 선정을 크게 격찬한 것을 가리킨다. 《唐書 一百九十四》, 《白樂天詩集 卷三》
♣ 도주의돈부[陶朱依頓富]도주공과 의돈의 부유함이라는 말로, 단한 부자를 뜻하는 고사성어.
♣ 도주지부[陶朱之富]도주공(陶朱公)의 부(富)란 뜻으로 큰 부를 일컫는 고사성어.
♣ 도죽[桃竹]대[竹]의 일종인데, 일명 도생(桃笙)이라고도 한다.
♣ 도증주인[盜憎主人]도둑은 주인이 밉게 마련이다. 즉 자기와 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미워지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감정이다.
♣ 도지신서[桃枝神荼]신서는 악귀(惡鬼)를 물리치는 신(神). 산해경(山海經)에 “창해(滄海)의 도삭산(度朔山)에 큰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동북쪽으로 뻗은 가지를 귀문(鬼門)이라 하여 모든 귀신들이 이곳으로 출입하며, 이 위에 신서(神荼)ㆍ울률(鬱壘)이라 하는 두 신이 있어 나쁜 귀신을 잡아서 호랑이에게 먹인다.” 하였다.
♣ 도진[島鎭]명(明) 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우리나라의 철산(鐵山) 가도(椵島)에 개설했던 군진(軍鎭)을 말한다.
♣ 도진[道眞]무릉도원을 처음 찾아 들어갔다는 어부 이름으로,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온다.
♣ 도처사[陶處士]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을 가리킨다. 도잠(陶潛)은 국화를 아주 좋아하였다.
♣ 도처선화당[到處宣化堂]가는 곳마다 대접을 잘 받음을 이르는 말이다. 宣化堂은 관찰사가 사무를 보는 政堂을 말함.
♣ 도척[盜跖]춘추 시대, 성인(聖人) 공자(孔子)와 같은 시대를 살다 간 같은 노(魯)나라 사람으로 큰 도둑. 도당 9000여 명과 늘 전국을 휩쓸며 같은 악행(惡行)을 일삼음으로 해서 대악당(大惡黨)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함.
♣ 도척포인간[盜跖飽人肝]옛날 도척이 날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간(肝)을 꺼내어 회(膾)를 쳐서 먹으며 천하를 횡행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六十一》
♣ 도천지수[盜泉之水]아무리 목이 말라도 도둑 도字가 들어있는 이름의 샘물은 마시지 않는다. 아무리 형편이 어렵더라도 결코 부정한 짓은 할 수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
♣ 도철[饕철]탐욕스럽고 잔인하다는 전설상의 괴물.
♣ 도청도설[道聽塗說]길에서 들은 이야기를 길에서 말함. 말을 들으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말해 버림. 또는 근거 없이 나도는 소문.
♣ 도총부산행[都摠府山行]도총부에서 번(番)드는 군사들의 군장(軍裝)을 점검할 때, 부당한 방법으로 군사들에게 금품을 갈취하는 것.
♣ 도출신구부[圖出神龜負]복희씨(伏羲氏)가 천하를 다스리던 때 황하(黃河)에선 용마(龍馬)가 도(圖)를 지고 나타나고, 낙수(洛水)에선 신구(神龜)가 서(書)를 지고 나왔다 한다.
♣ 도출천하언[圖出天何言]하늘이 직접 말하지 않고 하도(河圖)를 나오게 하여 역학(易學)을 알려 주었다.
♣ 도탄[塗炭]진흙과 숯불. 전하여 몹시 더러운 곳을 말한다.
♣ 도탄지고[塗炭之苦]진구렁에 빠지고 숯불에 타는 듯한 고통. 가혹한 정치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당하는 심한 고통.
♣ 도퇴교[桃椎屩]당 나라 주도퇴(朱桃椎)가 산 속에 오막살이를 짓고 살면서 항상 짚신을 삼아 길거리에 갔다 놓았는데, 사람들은 그 짚신을 보고 “주 거사(朱居士)의 신이다.” 하고 쌀로 바꾸어 갔다. 《新唐書 卷一百九十六 朱桃椎傳》
♣ 도투[挑鬪]도발하여 싸우다.
♣ 도팽택[陶彭澤]진(晉) 나라 때 고사(高士)로서 일찍이 팽택령(彭澤令)을 지냈던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 도포석[陶匏席]도포는 뚝배기와 바가지로, 조촐하고 검소한 술자리를 뜻한다.
♣ 도필[刀筆]문서(文書)나 기록하는 하급 역리(役吏)를 가리킨 말이다.
♣ 도필[刀筆]옛날 중국에서 종이가 발견되기 전에 대쪽에 문자를 기록하던 붓과 그 틀린 것을 깎아내던 칼.
♣ 도필리[刀筆吏]칼이나 붓을 다루는 낮은 관리.
♣ 도하반[徒何反]이는 도 자의 ‘ㄷ’과 하 자의 ‘ㅏ’를 합쳐 ‘다’로 발음한다는 말이다. 한서(漢書) 고금인명표(古今人名表)에는 경치(景瑳)의 치에 대한 음을 자하반(子何反)으로 기재하고 치(瑳) 자는 치(差)로도 쓴다고 되어 있는데, 도하반은 글자의 오기(誤記)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 도하상[渡河象]하수를 건너는 향상(香象)을 이름. 열반경(涅槃經)에 “저 급히 흘러가는 하수에 능히 코끼리가 떠가는 것 같다.[如彼駃河 能漂香象]"하였고, 전등록(傳燈錄)에는 “부처 곁에 함께 있어 듣고 이야기한 똑같은 법에도 증(證)한 바가 천심이 있어 비하자면 토끼ㆍ말ㆍ코끼리 세 짐승이 하수를 건너는데 토끼는 건너면 뜨고 말은 절반이 빠지고 코끼리는 철저히 흐름을 끊고 가는 것과 같다.”라 하였음. 문자를 철저히 평하는 데 인용하여 씀.
♣ 도해[蹈海]동해를 밟고 빠져 죽겠다는 뜻. 전국시대 제(齊) 나라의 고사(高士). 그가 조(趙) 나라에 가 있을 때 진(秦) 나라 군대가 조 나라의 서울인 한단(邯鄲)을 포위했는데, 이때 위(魏) 나라가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 나라 임금을 황제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진 나라가 방자하게 황제를 칭한다면 나는 동해를 밟고 빠져 죽겠다.” 하니, 진 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후퇴시켰다 한다. 《史記 卷十八》
♣ 도해[倒薤]서법(書法)의 일종임.
♣ 도해고절[蹈海高節]전국 시대 때 제(齊) 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진(秦) 나라에서 황제를 자처하는 꼴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겠다.[蹈東海而死]고 말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83》
♣ 도해지[渡海枳]남쪽에서 자라는 귤을 청수(淸水)와 회수(淮水) 북쪽에 심으면 탱자로 변한다고 한다.
♣ 도행[跳行]글을 쓸 때에 경의(敬意)를 나타내는 구절(句節)은 평두(平頭)보다 한 자 또는 두어 자쯤 높이 올려서 쓰는 것을 말한다.
♣ 도행역시[倒行逆施]거꾸로 행하고 거슬러 시행함. 곧 도리(道理)에 순종하지 않고 일을 행하며 상도(常道)를 벗어나서 일을 억지로 함을 뜻한다.
♣ 도헌[都憲]도헌은 공과 급사중(工科給事中)의 별칭이다.
♣ 도현[道玄]당(唐) 나라 때의 화가인 오도현(吳道玄)을 가리키는데, 불화(佛畫)와 산수화(山水畵)에 뛰어나 화성(畫聖)으로 알려졌다.
♣ 도협[倒峽]두보(杜甫)의 시에, “시의 수원(水源)은 삼협물을 거꾸로 한 듯”이란 글귀가 있는데, 삼협은 양자강(揚子江) 상류(上流)의 물이 급하게 흐르는 곳이다.
♣ 도형인[禱衡人]당 나라의 한유(韓愈)를 가리킴. 한유의 알형악묘시(謁衡嶽廟詩)에 “내가 정히 가을 비 내리는 계절을 만나 음기만 깜깜하고 맑은 바람 없기에 조용히 맘속으로 기도해 응험이 있었으니 어찌 정직으로 감동시킴이 아니리오. 잠시 후엔 음기 걷히고 뭇 봉우리 나와서 우뚝히 하늘 괴는 높은 산을 우러러보네[我來正逢秋雨節 陰氣晦昧無淸風 潛心黙禱若有應 豈非正直能感通 須臾掃盡衆峯出 仰見突兀撑靑空]” 한 데서 온 말로, 즉 한유는 성심으로써 형산의 구름을 걷히게 했다는 것이다.
♣ 도혜[桃蹊]복사꽃 길은 “복사꽃과 오얏꽃이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고 찾아와 그 아래에 자연히 길이 이루어진다.[桃李不言下自成蹊]”는 도리성혜(桃李成蹊)의 고사를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다.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 贊》
♣ 도호극시[桃弧棘矢]도호(桃弧)와 극시(棘矢)는 복숭아나무로 만든 활. 극시는 가시나무로 만든 화살. 옛날에 피사(避邪)의 도구로 쓰였음. 좌전(左傳) 소공(昭公) 4년 조(條)에, “唯是桃弧棘矢以除其災”라고 보이는데, 그 주에, ‘桃弓棘箭所以禳除凶邪 將御至尊故也’라 하였음.
♣ 도홍[陶泓]도홍은 벼루를 가리킨다. 한유(韓愈)가 붓ㆍ먹을 의인화(擬人化)해서 쓴 모영전(毛穎傳)에 보인다.
♣ 도홍경[陶弘景]남북조(南北朝) 때 말릉(秣陵) 사람인데 자는 통명(通明)이다. 1만권의 서적을 독파하였고 금기(琴棋)ㆍ도술ㆍ음양ㆍ오행 등에 밝았다.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숨어 화양은거(華陽隱居)라 자호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산중재상(山中宰相)이라고 불렀다. 본초(本草)에 주를 달고 혼천상(渾天象)을 만들었으며 제대연력(帝代年歷)등의 저술이 있다. 특히 솔바람 소리를 좋아하여 뜨락 가득 소나무를 심고는 매번 그 소리를 들으면서 좋아하였다. 《南史 卷76 隱逸列傳下 陶弘景》
♣ 도홍경[陶弘景]양(梁) 나라 사람. 자는 통명(通明). 호는 화양은거(華陽隱居), 또는 화양진일(華陽眞逸), 시호는 정백선생(貞白先生). 젊었을 때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을 읽고 양생(養生)의 뜻을 품음.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함. 천성이 저술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숭상하였음. 또 음양(陰陽)ㆍ오행(五行)ㆍ지리(地理)ㆍ의술(醫術)ㆍ본초(本草)에 정통하였음.
♣ 도화랑[桃花浪]도화랑은, 복숭아꽃이 필 때 시냇물이 불어나서 위로 오르는 물결이다. 도화랑이 일 때면 용문(龍門)에서 잉어가 뛰어오르는데 넘으면 용이 되며 용이 될 때에는 우레가 고기의 꼬리를 불태워 없앤다고 한다.
♣ 도화미[桃花米]오래 묵어서 붉게 변질된 쌀을 이름.
♣ 도화부인[桃花夫人]식후(息侯)의 부인인 식위(息嬀)를 말한다. 식위는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는데, 채 애후(蔡哀侯)의 충동에 의하여 초왕(楚王)이 식 나라를 멸망시키고 식위를 빼앗았다. 식위는 초왕과 살면서 도오(堵敖)와 성왕(成王)을 낳았으나 말을 않고 살므로 초왕이 그 이유를 물으니, 답하기를 “나는 여자로서 두 남편을 섬겼으니, 비록 죽지는 못하였을망정 다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左傳 莊公 十四年》
♣ 도화수[桃花水]3월 경 복숭아꽃이 필 무렵에 얼음이 풀려 강물이 불어나는 것을 말한다.
♣ 도화수[桃花水]북제(北齊) 때에 노사심(盧士深)의 처 최씨(崔氏)가 복숭아꽃으로 아이의 낯을 씻으면서 빌기를, “붉은 꽃과 흰 눈[白雪]으로 아이 낯을 씻어 곱고 빛나게 한다.” 하였다.
♣ 도화수창[桃花水漲]복사꽃 필 무렵 불어난 봄 강물을 가리키는 말.
♣ 도화원수[桃花源水]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어부가 복사꽃 떠내려오는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서 이상적인 세계를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 독견[獨見]남들이 견득(見得)하지 못한 것을 혼자만이 견득하는 것을 이름.
♣ 독견[獨繭]누에고치 하나의 실만으로 지은 옷을 말한다.
♣ 독곡[獨谷]조선 초기의 문신 성석린(成石璘). 독곡은 그의 호. 고려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고,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조선 왕조 창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뒤에 대제학을 거쳐 영상(領相)에 이르렀다.
♣ 독곡가[讀曲歌]악부(樂府)의 오성가곡(吳聲歌曲)의 이름이다.
♣ 독교낙아각[毒蛟落牙角]초(楚) 나라 검사(劍士)인 차비(佽飛)가 강을 건널 때, 두 마리의 교룡이 배를 습격하자, 그 목을 베고 물결을 잠잠하게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淮南子 道德訓》
♣ 독누[篤耨]칠과(漆科) 소속의 식물(植物). 줄기에 상처를 내면 수지(樹脂)가 나오는데 독누향(篤耨香)이라 하며 약용으로 쓰임. 《本草》
♣ 독대[獨對]본래는 군주가 수시로 홍문관 입직원을 편전으로 단독 소입하여 사관(史官)이 불참한 가운데 자유로이 강론함을 뜻하였으나, 후에는 대신(大臣), 혹은 명소 (命召)된 신료가 단독으로 문대(問對)에 참여하는 것을 모두 독대하고 하였다. 독대에서는 국가의 대사가 간간이 논의되어 그 결과로 정국에 대파란을 초래 한 예도 있으니, 경종조의 ‘정유독대(丁酉獨對)’가 좋은 예이다.
♣ 독락당[獨樂堂]독락당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사랑채로 현재 경주(慶州) 안강(安康)의 옥산리(玉山里)에 있으며, 회재를 모신 옥산서원(玉山書院)의 안쪽 계곡에 위치해 있다.
♣ 독락원[獨樂園]송(宋) 나라 때 사마광(司馬光)이 재상에서 파면된 뒤에 만든 원명(園名)인데, 사마광 자신이 기문(記文)을 지었다.
♣ 독련[獨憐]유독 사랑스럽다.
♣ 독로[獨勞]시경(詩經) 소아(小雅) 북산(北山)에 “대부가 공평하지 못하여 유능하다고 나만 일을 고달프게 시키네[大夫不均 我從事獨賢]” 한 데서 온 말로, 그 내용은 바로 부역을 나가는 사람이 자기 부모는 봉양할 겨를이 없이 항상 부역에만 시달리게 됨을 원망하여 노래한 것이다.
♣ 독록편[獨漉篇]진(晉) 나라 때의 악부(樂府) 불무가사(拂無歌辭)의 이름으로, 혼란한 세속을 풍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첫 구절이 “獨漉獨漉 水深泥濁 泥濁尙可 水深殺我”로 시작된다.
♣ 독립[獨立]어버이 모심을 말함.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다른 날 또 홀로 서 계시거늘……[他日又獨立]”에서 나온 말임.
♣ 독립당시[獨立當時]공자(孔子)가 홀로 서 있을 때에 그의 아들 이(鯉)가 뜰 앞을 지나니 공자가, “너는 시(詩)를 배우고 예(禮)를 배우라.” 하였다.
♣ 독목불성림[獨木不成林]홀로 선 나무는 숲을 이루지 못한다. 여럿이 힘을 합쳐야 일이 된다는 의미.
♣ 독무지기사연명[獨無知己似淵明]국화를 지극히 사랑했던 도연명(陶淵明)처럼 돌보아 가꾸어 주는 사람 없이 홀로 피었다, 홀로 진다는 말이다.
♣ 독반제인[獨返齊人]한 아내와 한 첩을 데리고 살던 한 제(齊) 나라 사람이 밖에만 나가면 주육(酒肉)을 실컷 먹고 들어오는데, 물어 보면 모두 부귀한 사람들과 술을 먹었다고 하므로, 한번은 그 아내와 첩이 서로 약속을 하고 그가 가는 곳을 미행해 보니, 그는 끝내 동곽(東郭)의 묘지(墓地)가 있는 곳에 가서 여기저기서 남은 제물(祭物)들을 빌어서 먹고 돌아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孟子 離婁下》
♣ 독배[牘背]문서(文書)의 이면(裏面)을 말하는데, 사기(史記) 주발세가(周勃世家)에 “발(勃)이 천금(千金)을 옥리(獄吏)에게 줌으로써 옥리가 독배에 써서 보이기를 ‘공주(公主)로써 증거를 삼는다.’ 했다.” 한 데서 온 말로, 죄인(罪人)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데 비유한 말이다.
♣ 독배[牘背]억울하게 고발당한 것을 말한다. 한 문제(漢文帝) 때 강후(絳侯) 주발(周勃)이 모반죄(謀反罪)로 고발당해 하옥(下獄)되고 나서 어찌할 줄을 모르자, 옥리(獄吏)가 주독(奏牘)의 뒷면[牘背]에 “공주(公主)를 증인으로 내세우라.”고 써서 가르쳐 준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57 絳侯周勃世家》
♣ 독보[獨步]홀로 걸음. 어떤 분야에서 남이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앞서감. 즉,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빼어남
♣ 독부[獨夫]악정(惡政)으로 인심을 잃은 외로운 임금을 지칭. 은(殷) 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주(紂)가 무도하여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떠남으로써 주는 한 사람의 남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데서 온 말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말하기를, “옛 사람의 말에 ‘우리를 어루만져 주면 임금이지만, 우리를 학대하면 원수이다.’라고 했다. 독부 수(受)는 크게 위압을 일삼고 있으니, 그대들 대대로의 원수이다.”라고 하였다. 수(受)는 은(殷) 나라 끝 임금인 주(紂)의 이름. 《書經 周書 泰誓下》
♣ 독불견[獨不見]악부 가사(樂府歌辭)의 하나. 양(梁) 나라 때 유운(柳惲)이 처음 지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상심하는 뜻을 서술한 것이다
♣ 독불장군[獨不將軍]혼자서는 장군이 되지 못함. 일은 혼자 하기 어렵고 여럿이 같이 해야 함. 또는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
♣ 독비곤[犢鼻褌]쇠코잠방이. 베로 허리 전면을 덮고 뒤로 돌려 매었다. 《漢書 司馬相如傳 犢鼻褌注》
♣ 독서망양[讀書亡羊]책을 읽느라 양을 잃어버림. 마음이 밖에 있어 도리를 잃어버리는 것. 다른 일에 정을 뺏겨 중요한 일이 소홀하게 되는 것. 《莊子 騈拇篇》
♣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남. 책을 읽을 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여러 번 반복해 읽다보면 저절로 뜻을 알게 됨
♣ 독서삼도[讀書三到]남송 때 주희가 한 말로 책을 읽을 때에는, 口到(구도)로서 입으로 소리를 내어 읽을 것, 眼到(안도)로서 눈으로써 읽을 것. 心到(심도)로서 마음을 집중하여 읽는다면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 독서삼도[讀書三到]독서의 삼법. 즉 입으로 다른 말을 하지 아니하고[口到], 눈으로 딴 것을 보지 않고[眼到], 마음을 하나로 가다듬고[心到] 반복, 숙독하면 그 참뜻을 깨닫게 된다는 뜻
♣ 독서삼매[讀書三昧]독서에 마음을 집중하는 경지.
♣ 독서삼여[讀書三餘]책 읽는 좋은 시기에 대해서 한 말로서 일년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겨울철, 하루에 마지막으로 남은 밤, 밖에서 일할 수 없는 비가 오는 날을 말한 것으로 이처럼 남은 시간을 이용하면 독서나 공부가 잘 되는 것이라 하였다.
♣ 독서상우[讀書尙友]책을 읽어 위로 성현들과 벗함. 독서를 통해 옛 선현과 사상적인 공감을 하여 마치 살아있는 인물과 만나 사귀듯 함
♣ 독서상우[讀書尙友]책을 읽어서 옛날의 현인을 만남
♣ 독서상우[讀書常友]책을 읽음으로써 옛 현인들과 벗이 될 수 있다는 뜻.
♣ 독서파만권 하필약유신[讀書破萬卷 下筆若有神]두보(杜甫)의 시 증위좌승(贈韋左丞)에, “만권의 책을 독파하고 나니 붓을 들어 글을 짓는 것이 신들린 듯하더라”하여, 자신의 공부를 술회하였음.
♣ 독성[獨醒]‘어부사(漁父辭)’에 “온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 홀로 맑고, 사람들 모두 취했는데 나만 혼자 깨어 있네.[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라 하였다.
♣ 독성불여포조취[獨醒不與餔糟醉]초사(楚辭) 어부사(漁父辭)에 “세상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만 깨어 있노라"고 하자, “어찌 술지게미라도 먹으면서 세상과 함께 어울려 지내지 않느냐.” 하였다.
♣ 독성인[獨醒人]속류(俗流)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초사(楚辭) 어부(漁父)에, “온 세상이 모두 탁하거늘 나 홀로 맑으며, 뭇사람이 모두 취했거늘 나 홀로 깨어 있다.” 하였다.
♣ 독수공방[獨守空房]부부가 서로 별거하여 여자가 남편 없이 혼자 지냄을 이르는 말.
♣ 독숙공방[獨宿空房]빈 방에서 혼자 잠. 부부가 별거. 여자가 남편 없이 혼자 지냄. 독수공방(獨守空房)
♣ 독안룡[獨眼龍]애꾸눈의 영웅 또는 용맹한 장수, 애꾸눈의 고덕(高德)한 사람이란 뜻의 고사성어.
♣ 독야청청[獨也靑靑]홀로 푸르고 푸름. 홀로 높은 지조와 절개를 드러냄.
♣ 독옥[櫝玉]자공(子貢)이 묻기를, “여기에 미옥(美玉)이 있다면, 독에 넣어 감추어야 합니까, 충분한 값을 받고 팔아야 합니까?”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팔리기를 기다리는 자이다.” 하였다. 《論語 子罕》
♣ 독옹[禿翁]늙어서 머리가 빠지고 정계에서 실권도 없는 사람을 말한다. 한(漢) 나라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이 보영(寶嬰)을 비난하면서 붙인 호칭이다. 《史記 魏其武安侯列傳》
♣ 독왕[獨往]세속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롭게 사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재유(在宥)에 “상하 사방을 드나들고 온 천하를 유람하면서 홀로 오고 홀로 가는 것을 나 자신의 삶이라 한다.[出入六合 遊乎九州 獨往獨來 是謂獨有]”하였고, 회남자(淮南子)에 “강과 바다, 산과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은 천지를 가볍게 여기고 만물을 작다랗게 여기면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다.[江海之士 山谷之人 輕天地 細萬物而獨往也]”라고 하였다.
♣ 독우[督郵]속현(屬縣)을 순찰하면서 관리의 성적을 조사하는 관리. 지방 감찰관. 찰방(察訪)의 별칭이다. 진(晉) 나라 때 도잠(陶潛)이 팽택령(彭澤令)으로 있을 때 군(郡)에서 독우(督郵)가 나오자, 아전이 도잠에게 의관(衣冠)을 갖추고 독우를 뵈어야 한다고 하므로, 도잠이 말하기를 “오두미(五斗未)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小人)을 섬길 수 없다.” 하고 그 즉시 팽택령을 그만두고 돌아가 버린 고사가 있다.
♣ 독우[督郵]평원독우(平原督郵)의 준말로 나쁜 술을 가리킨다. 사문유취(事文類聚) 연음부(燕飮部) 주(酒)에 “진(晉) 나라 환온(桓溫)에게 술맛을 잘 아는 주부(主簿)가 있었는데, 그는 좋은 술은 청주종사(靑州從事)라 하고 나쁜 술은 평원독우(平原督郵)라 하였다. 청주에는 제군(齊郡)이 있고 평원에는 격현(鬲縣)이 있으니, 제군을 맡는 청주 종사는 배꼽[臍] 아래로 내려간다는 뜻이고, 격현을 맡는 평원 독우는 가슴[膈] 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제군의 제(齊)와 격현의 격(鬲)은 제(臍)나 격(膈)과 음과 모양이 같으므로 한 말이다.
♣ 독우청주[督郵淸酒]술의 은어(隱語)로서 탁주(濁酒)는 평원독우(平原督郵)라 하는데, 평원에 격현(鬲縣)이 있었다. 격(鬲)자는 격(膈)자와 통하는데, 탁주를 먹으면 흉격(胸膈)에까지 밖에는 내려가지 않는다는 뜻이요, 좋은 청주(淸酒)는 청주종사(靑州從事)라 하는데, 청주에는 제현(齊縣)이 있다. 제(齊)는 제(臍)와 통용(通用)하는 글자로서, 좋은 청주는 배꼽[臍]까지 내려간다는 뜻이라 한다. 독우(督郵)는 평원 지방의 과직 이름이요, 종사(從事)는 청주(靑州) 지방의 관직 이름이다.
♣ 독원[獨園]급고독원(給孤獨園)의 준말로, 사원(寺院)의 별칭이다.
♣ 독의[獨倚]홀로 서다. 외로이 살다.
♣ 독의루[獨倚樓]두보(杜甫)의 시에, “공업은 자주 거울을 보고, 행장(行藏 身世)은 홀로 다락에 기대었네[勳業頻看鏡 行藏獨倚樓].”라는 명구(名句)가 있다.
♣ 독창근제[督昌覲帝]고려 창왕(昌王)이 중국 명 태조(明太祖)를 직접 찾아가 사실을 밝혀야 한다는 주장. 당시 신흥 제국인 중국 명(明) 나라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여 명에서는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자기들이 차지하겠다고 하였다. 이를 계기로 최영(崔塋)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요동정벌(遼東征伐)을 착수했는데,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 회군으로 그 계획이 좌절되고 최영이 밀려난 후 이성계에 의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된 이색(李穡)은 주장하기를, “지금 국가 관계에 틈이 생겨서 왕과 집정(執政)이 친조(親朝)를 않고서는 해결할 수가 없는데, 왕은 어려서 갈 수가 없으니 늙은 내가 모든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 하고는 자청하여 경사(京師)에 갔었음. 《牧隱集 行狀》
♣ 독천장오[瀆川藏汚]신하의 잘못을 너그럽게 감싸 안는 임금의 덕을 말한다. 좌전(左傳) 선공(宣公) 15년의 “강과 못이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고 산과 숲이 독충을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川澤納汚 山藪藏疾] 임금도 그렇게 포용할 줄을 알아야 한다.”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 독표[獨豹]거위를 말함.
♣ 독학모귀요[獨鶴暮歸遼]옛날 정령위(丁令威)라는 사람의 고향이 요동이었는데, 신선이 되어 갔다가 천(千) 년 만에 다시 고향에 돌아올 때에는 학(鶴)이 되어서 돌아왔다 한다. 그래서 요양백탑(遼湯白塔) 위에 앉아서 노래한 시가 있다.
♣ 독항구[督亢溝]백구하의 옛 이름.
♣ 독항도[督亢圖]전국 시대 연(燕) 나라의 기름진 땅인 독항(督亢)의 지도. 연 태자(燕太子)가 진시황(秦始皇)을 죽이려고 자객(刺客) 형가(荊軻)를 보내며, 신물(信物)로 독항(督亢) 땅을 바치겠다고 지도(地圖)를 함에 넣어 보내었는데, 형가가 지도 밑에 감추었던 비수(匕首)로 진시황을 찌르려다가 실패하자, 진시황이 크게 노하여 연나라를 쳐서 멸하였다. 《史記 刺客列傳》
♣ 독항이강린[督亢餌强隣]독항도는 곧 독항구(督亢溝)의 지도이고, 강한 이웃이란 곧 진(秦) 나라를 가리킨다. 전국 시대 연 태자 단(燕太子丹)이 자객 형가(荊軻)를 시켜 독항구를 바치겠다 하고 독항도 속에다 비수검을 감추어 가지고 진 나라에 들어가 시황(始皇)을 죽이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史記 卷八十六 刺客列傳》
♣ 독행[篤行]독행은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의 “말이 충성스럽고 진실하며 행실이 후하고 근실하면……[言忠信 行篤敬……]"에서 나온 것임.
♣ 독현[獨賢]불공평하게 자기 혼자만 애쓰는 심정. 시경(詩經) 소아(小雅) 북산(北山)의 “대부도 많은데 불공평해라, 나만 혼자 잘났다고 뛰어다니니.[大夫不均 我從事獨賢]”라는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 독혼노어[讀混魯魚]노(魯) 자와 어(魚) 자를 분변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아주 무식(無識)함을 이른 말이다.
♣ 돈[暾]해가 처음 뜰 때 온화하고 밝은 모습.
♣ 돈간[敦艮]주역(周易) 간괘(艮卦) 상구(上九)의 효사(爻辭)인데 ‘성실한 머묾’을 뜻한다.
♣ 돈견[豚犬]자기 아들을 남에게 말할 때 낮추어 ‘돈견’이라 하는데, 그 유래를 보면, 오대(五代) 때에 양주(梁主) 주온(朱溫)이 진주(晋主) 이극용(李克用)의 죽음을 틈타서 진나라를 치다가 극용의 아들에게 크게 패하자, “자식을 낳거든 이아자(李亞子; 극용을 말함)처럼 낳아야 한다. 내 아들은 돼지나 개이다.” 하여, 후세에서 자기 아들을 겸사(謙辭)로 말할 때에는 ‘돈견’이라 한다.
♣ 돈돈[沌沌]물결이 잇닿아 치는 모양, 어리석고 분별이 없는 모양, 모든 사물이 확실히 구별되지 않는 모양. 빙빙 도는 모양
♣ 돈돈[惇惇]어질고 순후한 모양
♣ 돈돈[旽旽]잘못된 발음, 바른 뜻과 음은
♣ 돈돈[暾暾]햇빛이 구석구석 비치는 모양, 불빛이 환한 모양
♣ 돈물[惇物]돈물은 남산 부근에 있는 산 이름인데, 일설에는 남산은 토산물이 많이 나기 때문에 남산의 형용사라 하기도 한다. 서경(書經) 우공(禹貢)편에 “종남산과 돈물산에서 조서산(鳥鼠山)에 이른다.[終南惇物 至于鳥鼠]" 하였다.
♣ 돈복[敦復]선(善)으로 회복하는 데 돈독히 한다는 뜻. 《周易 復卦 六五》
♣ 돈시[敦詩]이시백(李時白)의 자(字)이다.
♣ 돈아[豚兒]자신의 아들을 일컬음.
♣ 돈어[豚魚]돼지와 물고기, 곧 감각 작용이 둔한 생물. 또는 사람을 대할 때 예절이 없는 것.’돈어도 믿었다.’ 함은, 인애(仁愛)와 신의(信義)가 지극하여 돈어와 같은 미물에까지 미쳤다는 말이다.
♣ 돈우[돈우]벌레 이름. 매미 비슷하면서 좀 긴 벌레인데, 알을 깔 때면 반드시 풀잎에다 누에 같은 알을 까고 그 알을 누가 가져가면 반드시 그 가져간 곳으로 어미가 찾아온다고 함. 《異物志》
♣ 돈장[敦牂]고갑자에서 지지(地支)가 오(午)에 해당하는 해를 가리킨다.
♣ 돈장우병문[敦牂遇炳文]돈장은 구갑자에서 오(午)를 뜻하고 병문은 병(丙)을 풀이한 것으로, 병오년을 가리킨다.
♣ 돈점[頓漸]이른바 남돈북점(南頓北漸)의 설로서, 혜능의 남종(南宗)은 돈오성불(頓悟成佛)을 주장하고, 신수의 북종(北宗)은 점점수증(漸漸修證)을 위주로 하는 것이다. 《傳燈錄》
♣ 돈제일주[豚蹄一酒]돼지 발굽과 술 한 잔이라는 말로, 작은 물건으로도 많은 물건을 구하려고 하는 것을 비유한다
♣ 돈제풍년축[豚蹄豊年祝]돼지 발목을 차려 놓고 풍년을 빈다는 말인데, 밑천을 적게 들이고 큰 것을 얻으려는 것에 비유되기도 한다. 《史記 滑稽傳》
♣ 돈황[燉煌]돈황은 서역(西域)으로 현재의 감숙성(甘肅省) 서부에 있었던 지역이다.
♣ 돈흡[敦洽]전국 시대 진(陳) 나라의 추녀(醜女). 《呂氏春秋 過合》
♣ 돌돌[咄咄]돌돌은 돌돌괴사(咄咄怪事)의 준말로, 뜻밖의 괴이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놀라는 것을 말한다. 진서(晉書) 은호전(殷浩傳)에 “은호가 조정에서 쫓겨난 뒤 담소하고 음영(吟咏)하는 일을 끊지 않았으므로 자기 식구들도 쫓겨난 데 대한 유감의 기색을 전연 볼 수 없었는데, 온종일 허공에다 ‘돌돌괴사’라는 네 글자만 쓰고 있을 뿐이었다.” 하였다.
♣ 돌돌[咄咄]뜻밖의 일에 놀라 지르는 소리
♣ 돌돌괴사[咄咄怪事]돌돌괴사는 놀랄 만한 괴이쩍은 일을 말하는데, 즉 내가 어째서 이 지경이 되었을까 후회하는 뜻이다. 동진(東晉) 때 은호(殷浩)가 모함을 받고 조정으로부터 먼 곳에 추방당하였으나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이 하루종일 ‘돌돌괴사(咄咄怪事)’ 넉 자만 쓰고 있었다 한다. 《晉書 卷七十七 殷浩傳》
♣ 돌돌서공[咄咄書空]뜻밖의 일에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는 데에 비유한 말이다. 돌돌(咄咄)은 돌돌괴사(咄咄怪事)의 준말로 놀랍고 괴이한 일이라는 뜻인데, 진(晉) 나라 때 은호(殷浩)가 임금에게 파출(罷黜)되고 나서도 담영(談詠)을 평상시와 같이 하므로, 집안 식구들도 그에게서 임금에게 유방(流放)된 데 대한 유감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종일토록 공중에다 ‘돌돌괴사(咄咄怪事)’ 네 글자만을 썼다. 돌돌괴사는 놀랄 만한 괴이쩍은 일이라는 말로, 이유 없이 임금에게 유방(流放)당한 것을 탄식하는 뜻이다. 《晉書 卷七十七 殷浩傳》
♣ 돌돌은호[咄咄殷浩]돌돌(咄咄)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는 소리. 진(晉)의 도독(都督)이었던 은호(殷浩)는 환온(桓溫)에게 미움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자 종일토록 공중에 ‘돌돌괴사(咄咄怪事)’ 넉 자를 썼다 한다. 《晉書 殷浩傳》
♣ 돌돌향공서[咄咄向空書]돌돌괴사(咄咄怪事)는 놀랄 만한 괴이쩍은 일이란 뜻으로, 진(晉) 나라 때 은호(殷浩)가 조정에서 쫓겨난 뒤로는 종일토록 허공에다 ‘돌돌괴사’ 네 글자만 쓰고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七十七》
♣ 돌불검 석불난[突不黔 席不暖]반고(班固)의 답빈희(答賓戲)에 “성철(聖哲)들은 세상을 구제하기에 항시 급급하여 늘 천하를 주유하느라 공자(孔子)가 앉은자리는 따스해질 겨를이 없었고, 묵자(墨子)가 사는 집에는 굴뚝에 그을음이 낄 여가가 없었다.” 하였다.
♣ 돌불연불생연[突不燃不生煙]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까? 곧 어떤 소문이든지 반드시 그런 소문이 날만한 원인이 있다는 뜻.
♣ 돌제[突梯]각이 없고 원만함.
♣ 동가[東柯]동가는 중국 진주(秦州) 동남쪽 50리 지점에 있다는 골짜기 이름인데, 두보(杜甫)가 약초를 캐며 노년을 보내고 싶다면서[採藥吾將老] 읊은 ‘동가는 기막히게 좋은 골짜기[東柯好崖谷]’라는 시가 있다. 《杜少陵詩集 卷7 秦州雜詩》
♣ 동가[董賈]한(漢)의 동중서(董仲舒)와 가의(賈誼).
♣ 동가구[東家丘]동가구는 동쪽 집의 공구(孔丘)라는 뜻으로, 즉 노 나라 사람으로서 공자의 서쪽 이웃에 살던 한 어리석은 자가 공자가 성인인 줄을 모르고 “저 동쪽 집의 공구를 내가 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孔子家語 本姓解ㆍ傳習錄》
♣ 동가미오[董家郿塢]간사한 자가 재물을 쌓아 두고서 노년을 즐기는 장소를 말한다. 동가는 한 나라의 동탁(董卓)을 가리킨다. 동탁이 초평(初平) 3년에 미(郿)에다가 오(塢)를 쌓고는 만세오(萬歲塢)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높이가 7장으로 장안성(長安城)과 같았으며, 그 안에 많은 재물을 쌓아 두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72 董卓傳》
♣ 동가부서가귀[東家富西家貴]제(齊) 나라의 한 여자가 자기에게 청혼을 해온 동쪽 집은 부자이면서 추남이고, 서쪽 집은 가난하면서 미남이었으므로, “동쪽 집에서 먹고 서쪽 집에서 자겠다[東家食兮西家宿].”고 한 데서 온 말로, 사람이 이끗을 대단히 탐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동쪽에 가서 먹고 서쪽에 가서 잔다는 뜻으로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니며 이 집 저 집에서 얻어먹고 지낸다는 뜻이다.
♣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옛날 중국의 한 여인이 재물이 많고 음식이 훌륭한 동쪽 집에서 먹고, 아름다운 사내가 있는 서쪽 집에서 잠자기를 원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말로 먹을 곳, 잘 곳이 없어 떠도는 사람 또는 그런 짓.
♣ 동가홍상[同價紅裳]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란 말로 같은 값이면 좋은 물건을 가진다는 뜻.
♣ 동가회[動葭灰]후기(候氣)의 법에 의하면, 삼중의 밀실(密室)을 만들고 그 안에 명주[緹]를 펴고서 그 위에 십이율관(十二律管)을 각각 방법대로 안치한 다음, 그 율관에 갈대의 재를 채우고 다시 그 위에 명주로 덮어놓으면, 동지절(冬至節)이 될 경우, 율(律)이 황종관(黃鐘管)에 맞아서 황종관에 들어있는 갈대 재가 날아 움직이게 되는 것 등을 이른 말이다.
♣ 동각[東閣]동각은 동합(東閤)과 같음. 동방(東方)에 있는 소문(小門)인데, 한(漢) 나라 공손홍(公孫弘)이 재상이 된 뒤에 객관(客館)을 세워 동합을 열고 어진이를 영접하여 함께 국사를 의논하였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재상이 빈객을 초치하여 대접하는 곳을 뜻한다.
♣ 동각관매[東閣官梅]남조(南朝) 양(梁) 나라 하손(何遜)이 심취했던 양주(揚州) 고을 관아의 매화꽃. 하손이 일찍이 양주에 머물면서 매화 한 그루를 사랑하였는데, 뒤에 이를 못 잊어 다시 양주를 자청해서 부임한 뒤 종일토록 나무 밑을 서성이며 시를 읊었던 고사가 있다.
♣ 동각관매[東閣觀梅]추운 겨울에 매화를 감상하면서 시흥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남조 양(南朝梁)의 하손(何遜)이 양주(揚州) 고을의 매화를 잊지 못한 나머지 다시 자청해서 그곳으로 부임한 뒤 마침 만개한 매화꽃을 보며 하루 종일 그 곁을 떠나지 못했던 고사가 전하는데, 이를 인용하여 지은 두보(杜甫)의 “동각의 관매에 일어나는 시흥이여, 양주 고을 하손도 어쩌면 이와 같았으리.[東閣觀梅動詩興 還如何遜在揚州]”라는 유명한 구절이 전해 온다. 《杜少陵詩集 卷9 和裵迪登蜀州東亭送客逢早梅相憶見寄》
♣ 동각로[東閣老]한(漢) 나라 공손홍(公孫弘)이 승상이 되어, 동각을 지어 어진 선비를 맞아들인 고사.
♣ 동각서곤[東閣西崑]동각은 학사원(學士院)의 별칭이고, 서곤(西崑)은 서방의 곤륜군옥산(崑崙群玉山)으로 고대 제왕의 장서각(藏書閣)이 있던 곳이다.
♣ 동각심매흥도시[東閣尋梅興到時]고을 관아에 핀 매화에 시흥(詩興)이 절로 우러날 것이라는 말이다. 남조(南朝) 양(梁)의 하손(何遜)이 양주(揚州) 고을의 매화에 심취하여 하루 종일 그 옆을 떠나지 못한 채 시를 읊던 고사가 있는데,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 ‘화배적등촉주동정송객봉조매상억견기(和裵迪登蜀州東亭送客逢早梅相憶見寄)’에 “東閣官梅動詩興 還如何遜在揚州”라는 구절이 있다.
♣ 동각흥[東閣興]양(梁) 나라 하손(何遜)이 동각(東閣)을 개방하고 문인(門人)을 초빙하여 매화를 감상했던 고사를 말한다. 두보(杜甫)의 시에 “東閣官梅動詩興 還如何遜在揚州”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9 和裵迪登蜀州東亭 送客逢早梅 相憶見寄詩》
♣ 동강[東江]개성과 풍덕군(豐德郡)에 있는 강 이름이다.
♣ 동강[東岡]동강은 김우옹(金宇顒)의 호로, 송사(宋史)를 부연하여 지은 속강목(續綱目)이 유명하다.
♣ 동강[東岡]동쪽의 산 언덕. 세상을 마다하고 은둔하는 곳의 뜻으로 쓰임. 후한서(後漢書) 주섭전(周燮傳)에, “선세(先世)이후로 국가에 대한 공로와 임금의 은총으로 대를 이어왔는데, 어찌하여 그대 혼자 동강(東岡)의 언덕만을 지키려고 하는가.” 하였음.
♣ 동강[桐江]옛날 광무제(光武帝)의 벗인 엄광(嚴光)이 동강(桐江)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질하며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嚴光傳》
♣ 동강구진[東江舊鎭]명(明) 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설치했던 가도(椵島)의 진영을 말한다.
♣ 동강도[董江都]강도는 한 무제(漢武帝) 때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킴. 그는 처음에 강도의 상(相)이 되었는데 공손홍(公孫弘)의 미움을 받아 교서왕(膠西王)의 상(相)으로 좌천됨. 무제(武帝)에게 상주(上奏)하여 유교(儒敎)를 국교로 정하게 한 것으로 유명함. 저서에 춘추번로(春秋繁露)가 있음.
♣ 동강도[董江都]동중서(董仲舒)가 한 무제(漢武帝) 때 강도상(江都相)이 되었기 때문에 동 강도라고 한 것이다. 《漢書 卷 56 董仲舒傳》
♣ 동강수[桐江叟]후한(後漢)의 엄광(嚴光)을 말한다. 광무제(光武帝)의 절친한 벗으로서, 동강(桐江)에 숨어 낚시질로 세월을 보내었다. 《後漢書 卷83 嚴光傳》
♣ 동강신정[東岡新亭]옛날 동진(東晉)의 명사(名士)들처럼 난세(亂世)를 개탄하는 우국지정(憂國之情)이 솟구친다는 말이다. 진서(晉書) 왕도전(王導傳)에 “주의(周顗)가 신정(新亭)에 앉아 탄식하기를 ‘풍경은 똑같은데 강산은 모두가 바뀌었구나.’ 하니, 참석한 이들 모두가 서로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였다.
♣ 동강칠리탄[桐江七里灘]전당강(錢塘江)이 동려현(桐廬縣)을 지나는 부분의 이름. 한(漢) 나라 때 광무제(光武帝)의 친구 엄광(嚴光)이 세상을 피하여 숨어살면서 낚시를 했다는 곳.
♣ 동객[峒客]옛날 황제(黃帝)가 공동산(崆峒山)에서 신선인 광성자(廣成子)에게서 도를 닦았다는 고사가 있으므로, 도인(道人)의 뜻으로 쓰인다.
♣ 동갱[銅坑]매화가 많이 나는 곳임.
♣ 동경[同庚]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말로, 동갑(同甲)과 같다.
♣ 동경[東京]경주(慶州)의 별칭이다.
♣ 동경[東京]동경은 낙양(洛陽). 전한(前漢)의 도읍지인 장안(長安)을 서경(西京)이라 한데 대하여, 후한(後漢) 시절의 도읍지를 이른 것.
♣ 동계거사[東溪居士]저자의 아우인 산광(山光)의 호가 동계(東溪)이다.
♣ 동계공[東溪公]이백의, “동계공(東谿公)의 유거(幽居)에 제(題) 한다.”는 시가 있다.
♣ 동고[東皐]동고는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이준경(李浚慶)의 호이다.
♣ 동고동락[同苦同樂]같이 괴로워 하고 함께 즐거워 함.
♣ 동고서소[東皐舒嘯]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동고에 올라 휘파람 불고, 맑은 물에 다달아 시를 짓는다[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賦詩].”는 귀절이 있다.
♣ 동고소[東皐嘯]진(晉)나라 도잠(陶潛)이 팽택령(彭澤令)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에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분다.[登東皐以舒嘯]" 한 데서 온 말이다.
♣ 동공원자건[董公元自健]한(漢) 나라 동탁(董卓)이 임금을 폐(廢)하고 새 임금을 세우려고 조정에 의논하니, 원소(袁紹)가 성을 내며, “천하에 건장한 자[健者]가 어찌 동공(董公)뿐이냐.” 하였다.
♣ 동공이곡[同工異曲]표면은 다른데 내용이 똑같다는 뜻으로, 경멸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 동곽[東郭]전국 시대에 은자(隱者)인 동곽자기(東郭子綦)를 말한다.
♣ 동곽리[東郭履]매우 가난하다는 뜻의 고사성어.
♣ 동곽지랑[東郭之良]제(齊) 나라 사람이 처첩(妻妾)을 거느리고 사는데, 매일 나가 술과 밥을 실컷 먹고 돌아와, “부귀한 사람들과 함께 먹었노라.” 자랑했다. 처첩이 의아하여 남편을 뒤쫓아 가 보니 그가 동곽(東郭) 묘지(墓地)에 가서 제수(祭需)의 나머지를 빌어먹고 오는 것이었다.
♣ 동관[冬官]공부(工部)를 동관(冬官)이라 한다. 주(周) 나라 때 육관(六官)의 하나로 토목(土木)ㆍ공작(工作) 등의 일을 맡은 관직명인데, 그 일이 주례(周禮)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에 적혀 있는데 육부(六部)를 천지(天地)ㆍ사시(四時)로 배열하여, 이부(夷部)는 천관, 공부는 동관이라 칭한다.
♣ 동관[冬冠]술[酒]의 별칭. 추운 겨울에 모자를 쓴 것처럼 따뜻하다는 뜻이다. 이규보의 시에, 술은 무서운 추위도 견딜 수 있어[酒能防凜冽] 항간에서 이것을 동관이라 한다네[俗諺號冬冠] 그대 같은 대머리는[禿首如吾子] 추위를 막아 보지 않으려나[能無備禦寒] 하였다.
♣ 동관[彤管]자루에 붉은색을 칠한 붓을 말한다. 고대에 후부인(后夫人)의 공과(功過)를 기록하던 여사(女史)의 붓으로, 적심(赤心)을 나타내기 위하여 붉은 대롱의 붓[彤管]을 썼다 하는데, 일반적으로 여인의 문묵(文墨)에 관한 일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
♣ 동관[東觀]한(漢) 나라 때 궁중(宮中)에 있던 관명(觀名)인데, 주로 교서(校書)와 장서(藏書)를 하던 곳이다.
♣ 동관귀래[童冠歸來]성인의 기상을 나타낸 말이다.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공자가 제자들의 소회를 물었더니, 증자가 ‘관자(冠者) 5~6인과 동자(童子) 6~7인으로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소풍하고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 하니, 공자가 허여하였다.” 하였다.
♣ 동관기[彤管記]동관의 기록. 여사(女史)가 붉은 대롱의 붓을 잡고 후비(后妃)의 언행을 하나하나 기록한 것을 말한다.
♣ 동관청금[彤管靑衿]동관은 시경(詩經)의 패풍(邶風) 정녀(靜女) 편을 가리키며 청금(靑衿)은 정풍(鄭風) 자금(子衿) 편을 가리키니, 이는 정녀 편의 ‘靜女其戀 貽我彤管’과 자금 편의 ‘靑靑子衿 悠悠我心’이라 한 대문에서 따온 것이다. 소서(小序)는 한(漢)의 위굉(衛宏)이 찬한 것으로 시경(詩經) 각 편의 머리에 붙인 서문을 말한다.”정녀는 그 당시의 무도한 임금과 부덕한 부인을 풍자한 것이며, 청금은 난세가 되어 학교가 폐한 것을 풍자한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을 따른 정현(鄭玄)의 전주(箋注)에 “동관은 붓대를 붉게 칠한 붓인데 옛날에는 여사(女史)가 이 붓으로 왕후의 행적을 기록하였으니, 이는 곧 정덕(靜德)과 미색(美色)이 있고 또 옛법을 행하여 임금의 훌륭한 배필이 됨을 말한 것이며, 청금은 푸른 옷깃을 가리키니 이는 곧 청금을 입은 학생을 그리워한 것이다.” 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주자(朱子)의 집전(集傳)에는 모두 음분시(淫奔詩)로 해석하였다.
♣ 동관한기[東觀漢紀]후한 유진(劉珍)의 찬으로 총 24권인데, 진(晉) 나라 적에는 사기ㆍ한서(漢書)와 함께 3사(史)라 하고 많이 읽혀졌다 함.
♣ 동교[東橋]중국 장안성(長安城)에 있는 파교(灞橋)의 이칭으로, 동쪽에 있다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
♣ 동교[東郊]한(漢) 나라 소광(疏廣)이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갈 때 동대문 밖에서 송별을 하였는데, 그때 전송을 나온 수레가 수백 대나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疏廣傳》
♣ 동교별업[東郊別業]별장 전원의 뜻과 같다.
♣ 동교요[董嬌饒]전등여화(剪燈餘話)에 나오는 미인(美人)의 이름이다.
♣ 동군[桐君]동군은 황제(黃帝) 때 사람인데 일찍이 약을 캐며 도(道)를 구하여 동려현(桐廬縣)의 동산에서 살았다. 초목(草木)과 금석(金石)의 성미(性味)를 잘 알아 삼품(三品)의 약물(藥物)을 정하여 약성(藥性) 4권과 채약록(採藥錄)을 저술하였음.
♣ 동군[東郡]동쪽의 고을을 가리킨다.
♣ 동군[東君]봄의 별칭. 봄의 신(神). 봄이 오행(五行)상으로 동방(東方)과 목(木)과 청색(靑色)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동제(東帝), 청제(靑帝), 청황(靑皇), 태호(太皥)등으로 칭하기도 한다.
♣ 동군미옥절[東君弭玉節]동군은 봄을 맡은 동쪽의 신(神)을 말하고, 옥 부절[玉節]은 곧 봄 소식을 의미한다.
♣ 동궁[彤弓]동궁(彤弓)은 붉은 활인데, 주(周) 나라 때에 제후(諸侯)가 전공(戰功)이 있으면, 천자(天子)가 동궁을 주는 것이다. 주 평왕(周平王)이 진 문후(晉文侯)를 방백(方伯)에 임명하면서 동궁과 노시를 하사한 데서 온 말이다. 《書經 文侯之命》
♣ 동궁[東宮]사시(四時)에 봄은 동쪽에 해당하는데, 주역(周易)의 진괘(震卦)는 장남괘(長男卦)로서 방위로는 동쪽이므로 동궁이라 한 것이다.
♣ 동궁훈업[彤弓勳業]동궁은 붉은 칠을 한 활인데 옛날 제후(諸侯)가 공을 세우면 천자가 이것을 하사했으므로 공훈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 동궤[同軌]좌전(左傳) 은공(隱公) 원년에 “천자가 죽은 지 일곱 달이 되어 장례를 행하게 됨에, 동궤가 모두 이르렀다.[天子七月而葬 同軌畢至]”하였는데, 동궤(同軌)는 왕자(王者)가 일어나 천하를 통일함에 온 세계가 수레바퀴를 같이하고[車同軌] 글 쓰는 문자를 같이하게 되었다는[書同文] 중용(中庸)의 말에서 나온 것으로, 제후들을 가리킨다.
♣ 동귀[東歸]고향 산천을 찾아가는 날이라는 말이다. 옛날 한(漢), 당(唐) 시대에 모두 장안(長安)이 수도였던 관계로 중원과 강남 인사들이 고향을 찾아갈 때 흔히 동쪽으로 돌아간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후 동귀(東歸)를 귀향의 시어(詩語)로 쓰게 되었다.
♣ 동귀석화광[同歸石火光]부싯돌 불빛이 번쩍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처럼 짧은 인생을 홀연히 마감했다는 말이다.
♣ 동귀초수[同歸楚水]진(晉) 나라 뇌환(雷煥)이 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두 명검을 얻어 하나는 자기가 차고 하나는 장화(張華)에게 주었는데, 그 뒤에 장화가 복주(伏誅)되면서 그 칼도 없어지고 뇌환의 칼은 아들이 차고 다니다가, 복건성(福建省) 연평진(延平津)에 이르렀을 때 차고 있던 칼이 갑자기 물속으로 뛰어들면서, 없어졌던 장화의 칼과 합하여 두 마리의 용으로 변한 뒤 사라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張華傳》
♣ 동근연지[同根連枝]같은 뿌리와 잇닿은 나뭇가지. 즉, 형제자매(兄弟姉妹)를 일컫는 말이다.
♣ 동기[童欺]두보의 모옥위풍우소파가(茅屋爲風雨所破歌)에 “南村群童欺我老無力"이란 어구가 있음. 이 연(聯)은 자기의 신세를 두보에게 비하여 쓴 말임.
♣ 동기상구[同氣相求]기풍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서로 동류를 찾아 모인다.
♣ 동낙서경[東洛西京]낙양(洛陽)과 장안(長安)을 가리킨다.
♣ 동남[東南]東南은 모두 여울과 먼지 구덩이.
♣ 동남누접[童男樓艓]진시황(秦始皇)이 방사(方士) 서불(徐市)에게 명하여 동남동녀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속으로 들어가서 삼신산(三神山)을 찾아 선약(仙藥)을 구하도록 했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秦始皇本紀》
♣ 동남비[東南轡]한(漢)나라 범방(范滂)이 지방의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안찰사(按察使)로 임명되자, 수레에 올라 말고삐를 잡으면서 개연(慨然)히 천하를 밝힐 뜻이 있었다.
♣ 동녀[童女]결혼하지 않은 소녀.
♣ 동녀시[童女詩]지원(至元) 12년(1352 元 順帝 12년, 恭愍王 元年) 원 나라에서 우리 나라에 명령하여 양가(良家)집 딸 50명을 뽑아 데려갔으니, 대개 옛날 종주국(宗主國)ㆍ번국(藩國) 간의 혼인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 동년[同年]같은 방(榜)에 급제한 사람을 말한다. 국사보(國史補)에 “급제(及第)한 것을 진사(進士), 서로 공경하는 것을 선배, 함께 합격한 것을 동년, 시관(試官)을 좌주(座主)라 한다.” 하였다. 동년방(同年滂). 동방급제(同榜及第)
♣ 동대[東臺]동도 어사대(東都御史臺)의 준말로, 도성(都城)을 가리킨다.
♣ 동도주[東道主]주인이 되어 내방(來訪)한 손을 안내하는 사람을 말한다. 좌전(左傳) 희공삼십년(僖公三十年)에 “촉지무(燭之武)가 진백(秦伯)에게 말하기를 ‘만약 정(鄭) 나라를 동도(東道)의 주(主)로 삼아 행리(行李)의 내왕에 있어 그 곤핍(困乏)한 것을 지공하게 한다면 군(君)도 해로울 것 없으리라’ 했다.” 하였다.
♣ 동도주인[東道主人]손[客]이 주인을 이르는 말. 춘추시대 때에 정(鄭) 나라가 진(秦) 나라에 대하여, “동도 주인이 되겠다.” 하였으니, 그것은 진 나라 동쪽으로 나올 일이 있으면 정 나라가 주인노릇으로 편리를 보아주겠다는 뜻이다.
♣ 동도풍우[東都風雨]동한 말기에 세상이 요란함을 말한 것인 듯하다.
♣ 동동[憧憧]마음이 잡히지 않는 모양, 끊임없이 오가는 모양
♣ 동동[冬冬]문을 두드리는 소리
♣ 동동[橦橦]북소리
♣ 동동[洞洞]착실함, 텅 빈 모양, 형태가 없는 모양, 더 할 나위 없이 효경스런 모습, 검은 모양
♣ 동동[曈曈]해가 돋을 때의 해 모양, 태양처럼 빛나는 모양
♣ 동동촉촉[洞洞燭燭]매우 공경하고 삼가하여 조심스러운 모양.
♣ 동둔무사객[東屯無事客]두보(杜甫)가 파촉(巴蜀)에서 논농사를 지으며 한가로이 보낸 것을 말한다. 두보의 시에 “東屯稻畦一百頃 北有澗水通靑苗”라는 구절과 “東屯大江北 百頃平若案”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15 夔州歌 6, 卷19 行宮張望 補稻畦水歸》
♣ 동래자기[東來紫氣]노자(老子)가 올 때 보라색 기운이 하늘에 감도는 것을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보았다는 “紫氣東來”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史記 老子韓非列傳 注》
♣ 동량지재[棟樑之材]기둥이나 들보가 될 만한 훌륭한 인재. 한 집이나 한 나라의 큰 일을 맡을 만한 사람
♣ 동려[桐廬]후한(後漢)의 엄광(嚴光)이 광무제(光武帝)가 부르는데도 나가지 않고 동강(桐江)에서 낚시질하며 숨어살았다 한다. 《後漢書 嚴光傳》
♣ 동령[動鈴]구걸(求乞)하는 일. 조선 후기에 수령(守令)이 부임하면, 그 관아의 사령(使令)들이 수령에 대한 문안을 핑계하여 동령 혹은 조곤(釣鯤)이라 칭하면서 백성에게 그 비용을 거두었는데 동령은 맨손으로 구걸하는 것, 조곤은 술을 가지고 구걸하는 것이다.
♣ 동로가[東魯家]주인 없이 텅 빈 고향 집을 가리킨다. 이백(李白)의 시 ‘동로에 있는 어린 두 자식에게 부치다.[寄東魯二稚子]’에 “동로에 붙어사는 우리네 가족, 귀음의 전답에다 누가 씨를 뿌려 줄까.[我家寄東魯誰種龜陰田]”라는 구절이 나온다. 《李太白集 卷12》
♣ 동로옹[東魯翁]공자(孔子)를 가리킨 말이다.
♣ 동뢰수연[同牢壽宴]결혼 60주년을 축하하는 잔치를 말한다. 신혼 부부가 침실에서 함께 혼례 음식을 드는 것을 동뢰(同牢)라고 하였다. 《禮記 婚儀》
♣ 동료[凍醪]봄에 먹기 위하여 겨울에 빚어 둔 술을 말한다.
♣ 동룡[銅龍]동룡문(銅龍門). 한대(漢代) 태자궁(太子宮)의 문 이름. 제왕의 궁궐의 뜻으로 빌려 쓰기도 한다. 한서(漢書) 성제기(成帝紀)에 “왕이 급하게 태자를 부르니 용루문(龍樓門)에서 나왔다.” 한 주(注)에 “문루(門樓) 위에 구리로 만든 용[銅龍]이 있으므로 용루(龍樓)라고 한다.” 하였다.
♣ 동룡문[銅龍門]구리로 만든 용으로 장식한 한(漢) 나라 태자의 궁문(宮門) 이름인데, 보통 제왕의 궁궐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漢書 成帝紀》
♣ 동루[銅樓]동루는 한대(漢代) 태자궁(太子宮)의 문루(門樓)인 동룡루(銅龍樓)의 준말,
♣ 동류[東流]사물이 점차 사그라져서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말한다.
♣ 동류불일[東流不溢]동쪽으로 흘러 넘치지 않는다.
♣ 동륙[東陸]태양이 운행하는 동방 칠수(東方七宿)의 구역을 말한다.
♣ 동릉[東陵]진(秦) 나라 때 소평(召平)이 동릉후(東陵侯)로 있다가 진 나라가 망한 뒤에 포의(布衣)를 입고 지내면서 장안성(長安城)의 동쪽에 오이를 심었는데, 맛이 아주 좋았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동릉오이’ 또는 ‘청문오이’라고 불렀다.
♣ 동릉과[東陵瓜]한(漢) 나라 소평(邵平)이 동릉후(東陵侯)를 그만두고 청문(靑門) 밖에서 가꾼 감미로운 오이를 말한다.
♣ 동릉과지[東陵瓜地]동릉은 진(秦) 나라 때 동릉후에 봉해진 소평(召平)을 말함. 그는 진 나라가 망하자 가난한 선비가 되어 장안(長安) 동쪽 땅에 오이를 심어 가꾸었는데, 오이가 매우 맛이 좋아 세속에서 이를 ‘동릉과(東陵瓜)’라 불렀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五十四》
♣ 동릉소평포[東陵邵平圃]소평(邵平)이 진(秦) 나라 때 동릉후에 봉해졌는데, 진 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가난한 선비의 신분으로 장안(長安)의 성(城) 동쪽에 오색과(五色瓜)를 심어서 생활을 영위했던 데서 온 말이다.
♣ 동릉주선포인간[東陵晝膳脯人肝]도척(盜跖)이 동릉(東陵)에서 사람의 간(肝)으로 회를 쳐서 점심 반찬으로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 동릉후[東陵侯]동릉후는 곧 진(秦) 나라의 소평(召平)의 봉호. 소평은 진 나라가 망하자 포의(布衣)로 장안성(長安城) 동쪽에 살면서 오이를 심어 생활을 영위했다. 세상에서는 이 오이를 동릉과(東陵瓜)라 하였다. 《史記 蕭相國世家》
♣ 동리[東里]동리는 춘추 시대 정(鄭) 나라 자산(子産)이 살았던 지명으로 곧 자산을 지칭하는 말인데,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사명(辭命)을 짓는 데는 비심(裨諶)이 초(草)하고, 세숙(世叔)이 토론하고, 자우(子羽)가 수식(修飾)하고, 동리가 윤색(潤色)한다.” 하였다.
♣ 동리국[東籬菊]도연명의 시 ‘음주(飮酒)’에 “동쪽 울 밑에서 국화꽃을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陶淵明集 卷3》
♣ 동리연분[東籬緣分]국화를 가장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 도잠(陶潛)의 시에, “동리 아래서 국화를 따다가 물끄러미 남산을 바라보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하였음.
♣ 동리옹[東籬翁]동리 노인은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도잠이 동쪽 울타리 가에 국화를 심었으며, 갈건(葛巾)으로 술을 걸러서 마셨다.
♣ 동리유상원[東籬幽賞遠]진(晉) 나라 때 도잠(陶潛)이 전원 생활을 즐기면서 국화를 몹시 좋아하였는데, 그가 지은 시에 “동쪽 울서 국화꽃을 따 들고, 한가로이 남쪽 산을 바라다보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하였다. 《南史 卷75 隱逸列傳上 陶潛》
♣ 동리일타[東籬一朶]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 잡시(雜詩)의 “동쪽의 울밑에서 국화를 따다 무심히 남녘 산을 바라본다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에서 나온 것으로, 국화를 가리킨다.
♣ 동리진물색[東籬眞物色]도연명이 9월 9일 중양절에 좋아하는 술도 없이 울타리 가의 국화꽃을 따면서 하염없이 그 옆에 앉아 있었는데, 때마침 자사(刺史)인 왕홍(王弘)이 보낸 백의 사자(白衣使者)가 술을 가지고 왔으므로, 취하도록 마시고 돌아갔다는 고사가 전한다. 《宋書 卷93 陶潛傳》
♣ 동림[東林]동림서원(東林書院)의 약칭. 송(宋)의 양시(楊時)가 강소성 무석현(無錫縣)에다 동림서원을 세워두고 학문을 강론했는데, 당시 사대부들로서 가슴에 경륜을 지니고 세상과 맞지 않은 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그때 집권파인 위충현(魏忠賢) 일파로부터 동림당(東林黨)이라는 지목을 받고 숙청까지 당했다가 충현이 복주(伏誅)된 후 다시 번성하였음. 《明史 顧憲成傳》
♣ 동림[東林]동쪽에 있는 숲으로, 일본을 가리킨다.
♣ 동림사[東林寺]중국에 있는 절인데 백거이(白居易)가 있었다.
♣ 동림사[東林寺]진(晉) 나라 고승(高僧) 혜원법사(慧遠法師)가 머물던 여산(廬山)의 절 이름으로, 이곳에서 당시의 고사일인(高士逸人) 18인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함께 모여 노닐었다. 《蓮社高賢傳 慧遠法師》
♣ 동림승패[東林勝敗]사화(士禍)나 당쟁(黨爭)을 말함. 송(宋)의 양시(楊時)가 무석(無錫)에다 동림서원(東林書院)을 세웠는데, 명대(明代)에 와서 고헌성(顧憲成)등이 그것을 중수하고 학문을 강마하면서 혹은 국정을 논평하기도 하고 인물을 품평하기도 하여 당시 사대부들이 많은 향응을 하였고 그리하여 드디어 동림당(東林黨)이 형성되었다. 그 후 위충현(魏忠賢)이 득세하자 그간 동림당을 시기하고 있던 자들이 그것을 기회로 중상모략을 하여 당옥(黨獄)을 일으켜 거의 망타가 되었다가 충현이 복주(伏誅)되고 나서 공론이 다시 밝아졌다고 함. 《明史 顧憲成傳》
♣ 동마부[董馬賦]동중서(董仲舒)와 사마천(司馬遷)의 부(賦).
♣ 동명[東明]고구려시조(始祖). 그의 아버지, 북부여왕(北夫餘王) 해모수(解慕漱).
♣ 동명왕[東明王]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인 고주몽(高朱蒙)을 가리킨다.
♣ 동모[桐帽]오동잎으로 만든 모자를 이르는데, 옛날 은자(隱者)가 착용했다고 한다.
♣ 동모산[東牟山]요령성 심양현(瀋陽縣) 동쪽에 위치한 산. 일명 천주산(天柱山)으로 당 나라 고종이 고구려와 발해(渤海) 등을 평정하고 군대를 두어 지키게 한 산임.
♣ 동무[同畝]같은 밭에 심다.
♣ 동무음[東武吟]동무음은 악부(樂府) 초조곡(楚調曲)의 이름인데, 당(唐) 나라 이백(李白)에게 가사(歌辭)가 있다. 그 내용은 대체로 시사(時事)의 변천과 영화(榮華)의 덧없음을 상심하는 뜻을 담고 있다.
♣ 동묵[銅墨]지방 수령이 차는 동인(銅印)과 묵수(墨綬)의 준말로, 지방의 수령을 가리키는 말이다.
♣ 동문[同文]동문은 천하가 같은 문자(文字)를 쓴다는 말로, 중용(中庸) 이십팔장에 “지금 천하가 수레는 제도가 같고, 책은 문자가 같고, 행동은 질서가 같다.[今天下 車同軌 書同文 行同倫]" 하였다.
♣ 동문과[東門瓜]동문은 성(城)의 동문. 옛 진(秦)의 동릉후(東陵侯)였던 소평(召平)은 진이 멸망하자, 포의(布衣)로 장안(長安)의 성 동쪽에 오이를 심고 살았는데, 오색(五色) 오이가 있어 유명하였다. 《史記 蕭相國世家》
♣ 동문궤[同文軌]온 천하가 통일되었다는 뜻. 문궤(文軌)는 ‘서동문(書同文) 거동궤(車同軌)’란 말에서 온 것이다.
♣ 동문동궤[同文同軌]천하를 통일하는 것을 뜻함. 同文은 문자를 통일하게 하는 것이고, 同軌는 법을 같게 한다는 것이다.
♣ 동문동적[東門銅狄]장생불사하는 신선의 일을 가리킨다. 선인(仙人) 계자훈(薊子訓)이 장안(長安) 동문 패성(覇城) 가에서 어떤 노인과 함께, 진시황(秦始皇) 때 이적(夷狄)의 거인(巨人)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는 동인(銅人)을 쓰다듬으며 “이것을 만드는 것을 본 뒤로 5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後漢書 方術列傳 子訓傳》
♣ 동문서답[東問西答]동쪽에서 묻는데 서쪽에다 대답함. 묻는 말에 대하여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 동문수학[同門修學]한 스승 밑에서 같이 학문을 닦고 배움.
♣ 동문오[東門吳]위(魏) 나라 사람 동문오는 아들이 죽었는데도 슬퍼하지 않았다. 이에 그의 가신(家臣)이 묻기를 “공의 아들 사랑은 천하에 둘도 없었는데, 이제 자식이 죽었는데도 슬퍼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하니, 대답하기를 “나는 옛날에 자식이 없었는데, 자식이 없다고 그때 슬퍼하지 않았었다. 지금 자식이 죽은 것은 옛날에 자식이 없었던 것과 똑같은데, 내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겠는가.”라고 하였다 한다. 《列子 力命》
♣ 동문일궤[同文一軌]천하가 통일되어 글은 글자가 같고, 수레는 궤(軌)의 제도가 같다[車同軌 書同文字]는 말이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 동문지요상[東門之堯顙]공자가 정(鄭) 나라 동문(東門)에 혼자 섰더니 어느 사람이 보고 말하기를, “동문에 한 사람이 있는데, 이마는 요(堯)와 같고 얻어먹지 못한 상가구(喪家狗)와 같다.” 하였다.
♣ 동미함음[桐尾含音]채옹(蔡邕)이 타다 남은 오동나무를 가지고 거문고를 만들었다.
♣ 동방[同榜]과거 시험에 함께 합격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 동방[洞房]깊숙한 데에 있는 방. 전하여 부인의 침방(寢房)을 말한다.
♣ 동방[東方]당(唐)의 시인(詩人) 동방규(東方虯)를 말하는데, 사람의 시재(詩才)를 극구 칭찬한 말이다.
♣ 동방규[東方虯]당(唐) 나라 시인.
♣ 동방만청[東方曼倩]만청은 한(漢) 나라 동방삭(東方朔)의 자(字). 그는 문사(文辭)에 능하고 해학(諧謔)도 잘하였다. 속설(俗說)에는 “그가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먹고는 장수(長壽)하였으므로, 삼천갑자 동방삭(三千甲子東方朔)이라 일컫는다.” 한다.
♣ 동방삭[東方朔]동방삭은 한 무제(漢武帝) 때 사람으로 자(字)는 만청(曼倩). 해학(諧謔)과 골계(滑稽)에 뛰어났으며 벼슬이 태중대부 급사중(太中大夫給事中)에 이르렀는데, 그는 또한 선술(仙術)로도 널리 알려졌다. 《漢書 卷六十五》
♣ 동방삭[東方朔]태평광기(太平廣記)에 의하면, 동방삭이 살았을 때에 동사랑(同舍郞)이 말하기를 “천하에 아무도 동방삭을 알 자가 없고, 오직 태왕공(太王公)만이 안다.” 하였는데, 동방삭이 죽은 뒤에 무제(武帝)가 그 말을 듣고는 태왕공을 불러 “네가 동방삭을 아느냐?”고 묻자, 태왕공이 천문(天文)으로 알 수 있다고 하므로, 무제가 또 묻기를 “모든 별이 다 갖춰져 있느냐?”하니, 태왕공이 대답하기를 “다른 별들은 그대로 있으나 다만 세성(歲星)은 18년 동안 보이지 않다가 이제야 다시 보입니다.” 하자, 무제가 하늘을 쳐다보고 탄식하기를 “동방삭이 살아서 18년 동안을 내 곁에 있었는데, 그가 바로 세성이었음을 내가 몰랐구나.”고 했다 하므로, 이것이 곧 동방삭의 전신이 세성이었음을 말한 것이다. 또 참된 은자[大隱]가 되었다는 것은 동방삭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같은 사람은 조정(朝廷) 사이에서 세상을 피하는 사람이다. 속세에 묻혀 살며 금마문에서 세상을 피하노니, 궁전(宮殿) 안이 곧 세상을 피하여 몸을 온전히 할 수 있는 곳인데, 하필 깊은 산중을 들어갈 것이 있겠는가.”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二十六, 李太白集 卷十一 書懷贈南陵常贊府詩》
♣ 동방지일[東方之日]제풍(齊風)에 실린 장명. 그 내용은 “東方之日兮 彼姝者子 在我室兮 在我室兮 履我卽兮 東方之月兮 彼姝者子 在我ꞟ兮 在我ꞟ兮 履我發兮”라는 것으로 2장(章) 5구(句)임.
♣ 동배주창류[同杯酒娼類]한 잔의 술을 같이 마신 창녀(娼女). 곧, 한 사내에게 약속하고 몸을 맡긴 창녀.
♣ 동번[東樊]조선 철종(哲宗) 연간의 문신이며 시인이었던 이만용(李晩用)의 호이다.
♣ 동벽[東壁]동벽은 문장(文章)을 맡은 별 이름으로, 전하여 천자(天子)의 도서(圖書)를 관장한 비부(祕府)를 이름. 《大象 列星圖》
♣ 동벽[東壁]홍문관원의 별칭. 홍문관원이 사진(仕進)하여 앉는 좌차(座次)가 그 벼슬의 별칭이 되었으니, 곧 직제학(直提學)ㆍ전한(典翰)ㆍ응교(應敎)ㆍ부응교(副應敎)를 동벽, 교리(校理)ㆍ부교리(副校理)ㆍ수찬(修撰)ㆍ부수찬(副修撰)을 서벽, 박사(博士)ㆍ저작(著作)ㆍ정자(正字)를 남상이라 했다. 그리고 모두 경연을 겸임하였으며, 부제학에서 수찬까지는 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 동벽성[東壁星]이십팔수(二十八宿) 중의 하나, 이 벽성은 문장을 맡은 별이라 한다.
♣ 동벽휘[東壁輝]제(齊)나라에 서오(徐吾)라는 가난한 부인이 있었다. 이웃 부인들과 밤에 촛불을 어울려 방적(紡績)을 하는데, 서오는 가장 가난하여 촛불을 계속해 대지 못하니 이웃 부인들이 촛불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서오는, “내가 가난하여 촛불을 같이 대지 못하므로, 항상 먼저 와서 소제(掃除)하고 자리를 정돈하여 당신들 오기를 기다린다. 한 방에서 나 한 사람 더 있음으로 해서 촛불이 따로 소비될 것도 아니니 동벽(東壁)의 남은 빛을 왜 아끼는가.” 하니, 이웃 부인들이 서오에게 촛불을 같이 쓰기를 허락하였다.
♣ 동병상련[同病相憐]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위로하며 살아가는 것 또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잘 이해해 줌
♣ 동보[同甫]동보는 진량(陳亮)의 자(字)로 학자들이 용천 선생(龍川先生)이라고 불렀다. 가슴에 웅대한 계책을 품고 있었으나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몇 번이나 하옥되었다가 겨우 풀려나곤 하였다. 주희(朱熹)와 황제 왕패(皇帝王霸)의 학문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주희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또한 그의 뜻을 뺏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宋元學案 卷56》
♣ 동복[僮僕]말구종 드는 하인.
♣ 동봉[東峯]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별호임.
♣ 동봉[東封]사마상여가 임종(臨終) 전에 지은 봉선문(封禪文)을 가리킨다. 그 내용을 보면, 한 무제(漢武帝)에게 동쪽으로 태산(泰山)에 가서 봉선(封禪)의 제사를 드리라고 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 동봉[東封]옛적에 제왕(帝王)이 천하가 태평한 공을 이루면 태산(泰山)에 올라가서 하늘에 제사하고 옥첩(玉牒)을 땅에 봉하는 것이니, 이것을 봉선(封禪)이라 한다.
♣ 동봉자[東峯子]김시습(金時習)의 별호.
♣ 동부[銅符]구리쇠로 만든 부신(符信). 동어부(銅魚符)의 준말로, 지방관이 차는 인끈. 동인(銅印)과 같은 말로, 지방 수령을 뜻한다.
♣ 동부[洞府]도교(道敎)의 용어로, 신선(神仙)들이 사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宋史 禮志》
♣ 동부담병[同父談兵]동보는 송 효종(宋孝宗) 때의 학자인 진량(陳亮)의 자임. 재기(才氣)가 뛰어나 병법을 담론하길 좋아하였으며, 일찍이 옛사람이 무력을 사용한 것과 승리하고 패배한 것에 대한 사적을 상고하여 작고론(酌古論)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宋史 卷四百三十六 陳亮傳》
♣ 동북[東北]관동(關東)과 관북(關北). 곧 강원도와 함경도.
♣ 동분서주[東奔西走]동쪽으로 뛰고 서쪽으로 달린다. 사방으로 이리저리 부산하게 돌아다님을 뜻한다.
♣ 동빈[洞賓]동빈은 8선(仙)의 하나로 불리는 당(唐) 나라 여암(呂巖)의 자(字)인데, 자신에게는 3검(劍)이 있다고 하면서 각각 번뇌(煩惱)와 탐진(貪嗔)과 색욕(色慾)을 끊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 동빙한설[凍氷寒雪]얼음이 얼고 눈보라가 치는 추위
♣ 동사[彤史]궁중 생활의 기록을 맡은 여관(女官), 또는 그 생활의 기록. 붓대가 붉은 붓을 잡고 궁중(宮中)에서 군후(群后)의 일을 기록하였으므로 이렇게 일컫는다.
♣ 동사[桐社]동향(桐鄕)의 사당으로, 어진 수령을 제사 지내는 사당을 말한다. 동향은 중국 안휘성(安徽省) 동성현(桐城縣)에 있는 지명이다. 한(漢) 나라 때 주읍(朱邑)이 젊어서 동향(桐鄕)의 색부(嗇夫)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면서 존경하였다. 그 뒤에 주읍이 병들어서 죽게 되었을 때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옛날에 동향의 관리가 되었을 적에 그 백성들이 나를 사랑하였다. 그러니 반드시 나를 동향에 장사 지내라.” 하였다. 주읍이 죽자 그 아들이 동향에 장사 지내었는데, 동향의 백성들이 과연 사당을 세워서 세시(歲時)로 제사를 지냈다. 《漢書 卷89 循吏傳 朱邑》
♣ 동사백[董思白]명 나라 동기창(董其昌)을 말함.
♣ 동사부[東槎賦]사행(使行) 길에 지은 시를 말한다. 중종 16년(1521)에 중국 사신 당고(唐皐)와 사도(史道)가 조선에 왔을 때 우리측의 접반사 이행(李荇), 종사관 정사룡(鄭士龍)ㆍ소세양(蘇世讓) 등 당대의 저명한 시인들과 서로 많은 시를 수답하였는데, 그들이 돌아간 뒤에 그 시들을 묶어 동사집(東槎集)이라 이름한 데서 나온 말이다. 《稗官雜記 卷四》
♣ 동사자수[同舍自羞]한 문제(漢文帝) 때 직불의(直不疑)가 낭관(郞官)으로 있었는데, 이 때 동사인(同舍人)이 금(金)을 잃어버리고 직불의를 의심하자, 직불의는 아무런 변명도 없이 그 금을 보상해 주었던 바, 뒤에 직불의의 억울함이 밝혀지자, 금을 잃었던 사람이 대단히 부끄럽게 여겼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三》
♣ 동산[東山]동산(東山)은 시경(詩經) 빈풍의 편명이다. 일찍이 주 무왕(周武王)이 주(紂)를 멸하고 그의 아들 무경(武庚)을 대신 세운 다음, 자기 아우인 관숙(管叔)ㆍ채숙(蔡叔)을 은(殷)에 보내서 무경을 감시하게 하였는데, 무왕이 돌아가고 이린 성왕(成王)이 즉위함에 미쳐서는 관숙ㆍ채숙이 무경에게 붙어 “주공(周公)이 장차 유자(孺子; 성왕)에게 불리할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자, 성왕이 그 말을 듣고 숙부인 주공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주공이 동쪽으로 정벌하여 무경과 관숙ㆍ채숙을 모두 토멸하였는데, 이 동산시는 바로 주공이 무경 등을 토멸하고 3년 만에 돌아와서 병사들을 위로한 노래이다.
♣ 동산[東山]동산은 중국 절강(浙江) 상우현(上虞縣) 서남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진(晉)나라 사안(謝安)이 처음에 좌저작랑(佐著作郞)을 지내다가 병이 들어 그만두고 그곳에 은거하여 조정에서 여러 번 불러도 나가지 않자,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안석(安石)이 나오려 하지 않으니 장차 이 창생을 어찌할꼬.” 하였는데, 40세에 다시 나가서 환온(桓溫)의 사마(司馬)가 된 뒤에 사도(司徒)까지 지냈다. 《晉書 卷七十九 謝安傳》 ☞ 고와동산(高臥東山)
♣ 동산[銅山]철산(鐵山)의 옛 이름이다.
♣ 동산각소노[東山覺小魯]공자가 노(魯) 나라의 동산(東山)에 올라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는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 上》
♣ 동산고와[東山高臥]동산에 은거하며 자유로운 생활을 함. ☞ 고와동산(高臥東山)
♣ 동산기[東山妓]진(晉)의 사안(謝安)이 동산(東山)에서 놀면서 기생을 늘 대동하였다고 함. 《晉書 謝安傳》
♣ 동산부[銅山富]돈이 풍부한 것을 말한다. 한 문제(漢文帝)가 일찍이 촉(蜀)의 엄도동산(嚴道銅山)을 영신(佞臣) 등통(鄧通)에게 주어서 임의로 주전(鑄錢)하게 하였다.
♣ 동산화옥[東山華屋]동산은 진(晉) 나라 사안(謝安)이 은거(隱居)하던 곳이다. 사안(謝安)이 죽은 뒤에 존경하던 양담(羊曇)이 그 집을 지나다가 조자건(曹子建)의 시에 “살아서는 좋은 집[華屋]에 거처하더니 죽어서는 산으로 돌아간다"라는 글귀를 읊고 통곡한 고사가 있다.
♣ 동상[東床]극감(郄鑒)이 문생(門生)으로 하여금 왕도(王導)의 문하(門下)에서 사윗감을 간택하게 하였더니 왕씨 문중(王氏門中)의 여러 소년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자신(自身)을 칭양하였으나, 왕희지(王羲之)만은 배를 드러내고 동상(東床)에 누워 모른 체하자 그를 사위로 삼았다. 《晉書 卷八十 王羲之傳》
♣ 동상[董相]동상(董相)은 한 나라 무제(武帝) 때 강도상(江都相)을 지낸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킨다.
♣ 동상이몽[同床異夢]같은 잠자리에서 서로 다른 꿈을 꿈. 겉으로 같이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서로 딴 생각을 품음 또는 같은 처지와 입장에서 저마다 딴 생각을 함.
♣ 동생[董生]동생은 한(漢)나라 광천(廣川)사람인 동중서(董仲舒)를 말한다.
♣ 동생심장려[董生深長慮]동생(董生)은 한(漢)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 동중서가 재이지기(災異之記)를 써서 사람의 잘못이 결국 천재지변을 부른다는 경고의 뜻을 담았는데, 그 속에 풍자가 들어 있다 하여 천자(天子)로부터 죄를 받고 그후로는 끝내 재이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함. 《史記 儒林列傳》
♣ 동생유견[董生乳犬]동생은 당(唐) 나라 때의 은사(隱士)인 동소(董召)를 이름. 동소의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므로, 개도 새끼를 먹일 것이 없어 어미가 먹이를 구하러 나간 사이에 닭이 와서 벌레를 쪼아가지고 개 새끼를 먹이려 하였으나, 개 새끼는 먹지 않고 슬피 울기만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董生行》
♣ 동서[東序]하(夏) 나라 시대의 태학(太學)으로 이곳에서 국로(國老)를 봉양하기도 하였는데 서경(書經) 고명(顧命)에 “대옥(大玉) 등은 동서(東序)에 둔다.”고 하였다.
♣ 동서계[東西階]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主人就東階 客就西階 客若降等 則就主人之階”라고 보임.
♣ 동선[銅仙]동선은 한 무제(漢武帝) 때에 구리를 가지고 ‘선인(仙人)이 손으로 쟁반을 받쳐들고 감로(甘露)를 받는 형상’으로 주조한 기물(器物)이다.
♣ 동선[同船]후한(後漢) 때 곽태(郭太)가 낙양(洛陽)에 노닐면서 고사(高士) 이응(李膺)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이응이 그를 대단히 기특하게 여기어 서로 친구가 되었는데, 뒤에 곽태가 향리로 돌아올 적에 수천 명의 선비들이 배웅을 나왔는바, 이때 곽태가 오직 이응하고만 함께 배를 타고 건너갔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六十八》
♣ 동선사한[銅仙辭漢]임금이 도성을 떠나 파천(播遷)한 것을 가리킨다. 삼국 시대 위(魏) 나라 명제(明帝)가 한 무제(漢武帝) 때 세워진 동선(銅仙) 즉 선인장(仙人掌)을 장안(長安)에서 낙양(洛陽)으로 옮기려 할 때 승로반(承露盤)이 땅에 떨어져 크게 소리를 내며 부서지자 동선이 눈물을 흘렸다는 ‘동선사한(銅仙辭漢)’의 고사가 전한다. 《三國志 魏書 明帝紀 注》
♣ 동선장[銅仙掌]천상(天上)의 선로(仙露)를 받기 위하여 한 무제(漢武帝)가 구리로 만들어 세웠다는 선인(仙人)의 손바닥. 연꽃잎.
♣ 동선하로[冬扇夏爐]겨울의 부채와 여름의 화로. 아무 소용 없는 물건을 말한다.
♣ 동성[東城]서울 중구 광희 2동에 위치한 조선시대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광희문(光熙門)을 말한다. 당시 도성에서 나오는 모든 하수가 빠져나가는 수문으로, 각종 오물과 쓰레기를 폐기했던 곳이자, 공동묘지가 있던 곳으로 보인다. 《서울六百年史 第一卷》
♣ 동성상응[同聲相應]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여 어울린다. 의견을 같이 하면 자연히 서로 합치게 된다는 의미.
♣ 동성이속[同性異俗]사람의 성질은 본래는 같으나 습관에 따라 변함을 뜻함.
♣ 동속[同俗]예기(禮記) 왕제(王制)에 “팔정을 고루 행하여 음란함을 예방하고, 도덕을 일관되게 펼쳐 풍속이 같게끔 한다.[齊八政以防淫 一道德以同俗]”라는 말이 나온다.
♣ 동손[桐孫]동목(桐木)의 손지(孫枝). 즉 오동나무 가지에서 다시 생겨난 가지를 말한다.
♣ 동수[銅綬]동수는 구리 인장의 인끈. 한(漢) 나라 제도에 지방 수령은 구리 인장을 사용하였다 하여 현감이나 군수 등의 별칭으로 사용한다.
♣ 동시[東市]낙양성 동쪽에 있었던 우마시(牛馬市).
♣ 동시[東市]동시는 장안(長安) 동쪽 시가지로 여기에서 사형을 집행하곤 하였다.
♣ 동시[東施]미인 서시(西施)가 가슴병을 앓아 찡그리매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그 마을의 못 생긴 여인 동시(東施)가 보고 부러워하여 가슴을 쥐고 찡그리니 사람들이 보기 싫어 문을 닫았다.
♣ 동시[彤矢]시경(詩經) 소아(小雅) 彤弓(동궁)의 “시위 느슨한 붉은 활을 받아서 간직하네. 내게 좋은 손님 있으니 성심으로 내려주네[彤弓弨兮 受言藏之 我有嘉賓 中心貺之]"에서 나온 말로, 공을 세우면 천자가 붉은 화살을 상으로 내렸다 한다.
♣ 동심결[同心結]실 같은 것으로 두 고를 내고 맞맺어서 풀리지 않도록 굳게 맺는 매듭을 말하는데, 이는 곧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뜻을 부친 것이다. 양무제(梁武帝) 유소사시(有所思詩)에 “허리에 띤 두 비단띠가 꿈에 동심결이 되었다.[腰間雙綺帶夢爲同心結]" 한 데서 온 말이다.
♣ 동심루[同心縷]실이 풀리지 않도록 굳게 맺는 매듭. 이 또한 부부가 굳게 서로 사랑하는 뜻을 부친 것이다.
♣ 동심인성[動心忍性]더욱 큰일을 하기 위하여 자기의 마음을 분발시키고 자기의 성질을 참아 강인하게 만드는 것을 뜻하는 말로,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온다.
♣ 동심지언[同心之言]같은 마음에서 나온 말. 절친한 친구 사이
♣ 동심화[同心花]다른 두 나무의 꽃이 서로 맞붙어 한 꽃을 이룬 것이라 한다.
♣ 동쌍성[董雙成]옛날의 여선(女仙)으로 서왕모(西王母)의 시녀(侍女)였다고 한다.
♣ 동씨유[董氏帷]동씨(董氏)는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킨다. 동중서는 춘추(春秋)를 전공하였으며, 경제(景帝) 때에 박사(博士)가 되어 장막을 드리우고 제자를 가르쳤는데 아무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며 3년 동안 밖에 나오지도 않았다. 《漢書 董仲舒傳》
♣ 동아왕[東阿王]曹植. 魏 文帝 曹丕의 동생.
♣ 동악[動樂]궐희(闕戱) 때의 놀이의 한가지. 사학(四學)에서 보낸 사신을 예조(禮曹)에서 대접할 때 어린아이에게 솥뚜껑을 치며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 동악[東岳]이안눌(李安訥)의 호이다.
♣ 동악상제[同惡相濟]함께 악을 행하여 서로 돕는 것.
♣ 동악신묘[東嶽神廟]광녕(廣寧)의 동쪽 성 밖 몇 리 되는 곳에 있는 묘우(廟宇)로, 동악, 즉 대악(岱岳)의 신인 제천인성제(齊天仁聖帝)를 모신 사당이다.
♣ 동안심법[同安心法]심경부주(心經附註) 권3에 “오늘날 배우는 이들이 장족의 발전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소년 시절에 동안에 있으면서 밤에 종소리를 들었는데, 하나의 종소리가 끊어지기도 전에 이 마음이 벌써 다른 곳으로 치달리는 것이었다.[嘗記少年時在同安 夜聞鍾聲 聽其一聲未絶 此心已自走作] 그리하여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을 경책하고 반성하여 학문은 모름지기 전심치지(專心致志)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는 주자(朱子)의 말이 실려 있다.
♣ 동안현리종성단[同安縣裏鐘聲斷]주자(朱子)의 제자 장현보(張顯父)가 주자에게 올린 편지에 “선생께서 ‘지난번 동안현(同安縣)에서 종소리를 들음으로 인하여 마침내 마음 거둬들이는 법을 깨달았다.’고 하시셨습니다. ……" 한 데에 대하여, 주자의 답서에 이르기를, “그것은 다만 사람의 마음이 수시로 드나들어서 종소리 하나가 쉬지 않음으로써 내 마음도 이미 수없이 변하던 것을 말한 것일 뿐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朱子大全 卷五十八》
♣ 동액[東掖]당 나라 때 왕명의 출납과 국가의 문서를 관장하던 문하성(門下省)의 별칭으로, 우리 나라의 승정원을 뜻한다.
♣ 동야[東野]동야는 당(唐) 나라 때의 시인인 맹교(孟郊)의 자인데, 그는 연해 세 아들을 낳았으나 낳을 때마다 수일 만에 잃었으므로, 한유(韓愈)가 그를 위로하는 뜻에서 지은 맹동야실자시(孟東野失子詩)에 “하늘에게 묻기를 인간을 주관하되 후박을 왜 안 고르게 하는가 하니 하늘이 이르되 하늘과 땅과 사람은 본래부터 상관이 없다 하였네[問天主下人 薄厚胡不均 天曰天地人 由來不相關]”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八十七ㆍ韓昌黎集 卷四》
♣ 동야[東冶]지명.
♣ 동야거빈가구소[東野居貧家具少]당나라 시인(詩人) 맹동야(孟東野)의 이거(移居)하는 시에, “수레를 빌어 가구(家具)를 실으니 가구가 수레보다 적구나.” 하였다.
♣ 동약[僮約]동약은 노예(奴隷)의 계약(契約)을 기술한 문장명(文章名)으로, 한(漢) 나라 때 왕포(王褒)가 지은 것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노예를 사서 부리는 데에 있어 매우 까다로운 조건으로 노예를 혹사시킴을 기술하고 있다.
♣ 동양[東陽]선조(宣祖)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결혼한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을 가리킨다.
♣ 동양[東瀼]중국 기주(蘷州)에 있는 물이름으로, 당 나라 두보(杜甫)가 그곳에 부쳐살았다 하여 타향의 뜻으로 쓰인다.
♣ 동양[東陽]평산(平山)의 옛 이름이다.
♣ 동양대공이[東陽帶孔移]동양 태수(東陽太守)를 지낸 남조 양(南朝梁)의 시인 심약(沈約)을 가리킨다. 태수로 나간 지 1백여 일 만에 허리띠를 몇 번이나 다시 졸라맬 정도로[革帶常應移孔] 몸이 수척해졌다고 한다. 《梁書 沈約傳》
♣ 동양도위[東陽都尉]선조(宣祖)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결혼한 신익성(申翊聖)의 봉호이다.
♣ 동양소수[東陽銷瘦]몸이 바짝 말라 쇠약해진 것을 말한다. 양(梁) 나라의 시인 심약(沈約)이 동양 태수(東陽太守)로 나가서 힘들게 신경을 쓰는 바람에 허리띠가 자꾸 줄어들고 팔뚝이 반으로 가늘어졌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梁書 沈約傳》
♣ 동양위[東陽尉]선조(宣祖)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결혼한 신익성(申翊聖)의 봉호(封號)이다.
♣ 동양진[動梁塵]양진(梁塵)은 들보 위의 티끌. 옛날 노(魯) 나라의 우공(虞公)은 소리를 발하면 매우 청월(淸越)하여 노래하면 들보 위에 있는 티끌이 움직였다 한다.
♣ 동어[銅魚]동어부(銅魚符)의 준말로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 부신(符信)을 이름. 관등(官等)에 따라 금(金)ㆍ은(銀)ㆍ동(銅)의 구별이 있다.
♣ 동어부[銅魚符]구리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부신(符信)인데, 옛날 지방관이 이를 몸에 지니었었다.
♣ 동엽봉제[桐葉封弟]장난 삼아 오동나무 잎으로 동생을 제후(諸侯)에 봉(封)한다는 뜻으로, 제후를 봉하는 일을 뜻하는 고사성어.
♣ 동엽전규[桐葉剪圭]규는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나게 옥으로 만든 것인데, 천자가 제후를 봉(封)할 때에 내려 주는 것이다. 주(周) 나라 성왕(成王)이 어릴 적에 아우 강숙(康叔)과 희롱하면서, “오동잎[桐葉]을 오려서[剪] 규를 만들어 강숙에게 주며 이것으로 너를 봉(封)해 주리라.” 하였다.
♣ 동영[冬榮]겨울 꽃.
♣ 동영[東瀛]조선 시대에 홍문관(弘文館)을 영각(瀛閣)이라 했으니, 동영은 바로 홍문관을 가리킨 것이며, 선화(仙化)했다는 말은 홍문관에 들어가 영광을 누리는 것이 신선이 된 것과 같다는 뜻이다.
♣ 동오[東吳]춘추시대 오(吳) 나라 지방으로 오늘날의 절강성(浙江省)과 호남성(湖南省) 일대인데, 산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 동오[童烏]한(漢) 나라 양웅(揚雄)의 아들 신동(神童) 오(烏)를 가리킨다. 그는 무척 총명하여 일곱 살에 웅이 논한 현문(玄文)에 참여하였는데, 불행히도 아홉 살에 요절하였다. 《華陽國誌 先賢揚雄傳》
♣ 동온하청[冬溫夏凊]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데 있어 겨울에는 따습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해드린다는 뜻이다. 《禮記 曲禮》
♣ 동옹[東翁]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을 가리킨다.
♣ 동요[棟撓]주역(周易) 대과(大過)에 “대과는 들보가 휜 것이다.[大過棟撓]”하였고, 단사(彖辭)에 “들보가 휜 것은 본말이 약한 때문이다.[棟撓本末弱也]” 한 데서 온 말이다.
♣ 동용[動容]초목이 모습을 바꾸는 것
♣ 동우인[桐偶人]동우인은 동목(桐木)으로 만든 우상(偶像)인데, 한 무제(漢武帝)가 병이 났을 적에, 일찍이 여태자(戾太子)와 사이가 나빴던 강충(江充)이 태자를 제거하기 위해, 상(上)의 병환은 무고(巫蠱)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라 하고 옥사를 일으켜 수만 명을 죽이고, 끝내는 무당을 시켜 동우인을 만들어서 태자의 궁중에 묻어 놓았다가 뒤에 이것을 파내어 마치 태자가 임금을 저주한 것처럼 꾸밈으로써 결국 태자와 황후까지 모두 자살하게 되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四十四》
♣ 동원[東垣]금(金) 나라 때의 명의(名醫) 이고(李杲)의 별호임.
♣ 동원[董源]남당(南唐)사람. 자는 북원(北苑). 그림을 잘 그렸고 특히 산수화(山水畫)에 능하였음. 《十國春秋》
♣ 동원[東園]동원은 한(漢) 나라 때 왕공 귀족의 무덤에 쓰이는 기물을 만들어 제공하는 일을 맡았던 소부(少府)에 소속된 관서의 이름이다.
♣ 동원기[東園器]동원기는 즉 동원 비기(東園秘器)의 준말로, 한(漢) 나라 때에 동원이란 관서(官署)에서 제작한 최상품의 상장 도구(喪葬道具)를 말하는데, 이것은 주로 제왕(諸王)이나 공훈이 큰 대신(大臣)이 죽었을 때 하사하던 것이다. 《晉書 宣帝紀》
♣ 동원비[東園秘]동원은 한(漢) 나라 때 장구(葬具)를 만들던 관서(官署)의 이름이고, 비기는 곧 장사(葬事) 때 쓰는 관(棺) 이하 여러 가지 장구를 가리킨다. 한 나라 때 특히 공신(功臣)ㆍ대신(大臣) 등이 죽었을 적에는 관례적으로 이 동원의 비기를 하사했다고 한다.
♣ 동원숙자환[東垣叔子環]아들이 어려서 일찍 죽은 슬픔을 말한다. 서진(西晉)의 정남장군(征南將軍) 양호(羊祜)가 다섯 살 되었을 적에, 이웃에 사는 이씨(李氏)의 동쪽 담 뽕나무 밑으로 곧장 가서 금환(金環)을 찾아내어 가지고 놀았는데, 이씨 집에서 이것을 보고는 “어려서 죽은 내 아들이 가지고 놀다가 잃어버렸던 물건이다.”라고 경악해 마지않았으며, 당시 사람들도 이씨의 아들이 양호로 환생(還生)했다고 믿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晉書 卷34 羊祜傳》 숙자(叔子)는 양호의 자(字)이다.
♣ 동월[東越]지금의 절강성 동부와 남부, 복건성 동남부 지역에 걸쳐 있던 나라.
♣ 동월작부[董越作賦]동월은 명(明) 나라 영도(寧都) 사람이다. 헌종(憲宗) 때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효종(孝宗) 때에 우서자(右庶子)가 되어 사신으로 조선(朝鮮)에 나와서 저술을 많이 남기었고 사동일록(使東日錄)이 있다. 《國朝獻徵錄 卷五十二》
♣ 동위[東闈]왕세자 있는 곳
♣ 동유[董帷]동중서(董仲舒)의 장막을 말한다. 한(漢) 나라 때 동중서는 일찍이 박사(博士)가 되어 학문에 전념하느라 장막을 내리고서 강의하였으며, 제자들에게 차례로 학업을 가르치므로 혹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한다. 《漢書 卷五十六 董仲舒傳》
♣ 동의[童衣]동의는 청의동자(靑衣童子)를 줄인 말이다. 옛날 전진왕(前秦王) 부견(苻堅)이 사람들을 물리치고 혼자서 사면령(赦免令)을 쓰고 있었는데, 쉬파리[靑蠅]가 한 마리 날아들어와 쫓으면 다시 오곤 하였다. 조금 뒤에 사람들이 사면령 내릴 것을 전부 알고 있으므로, 사실을 알아보니 한 청의동자(靑衣童子)가 길거리에 사면령이 내렸다고 소리치고 다녔다 했다. 그제서야 부견은 전의 쉬파리가 바로 청의동자로 화했음을 알았다 한다. 《白孔六帖》
♣ 동이누[東夷陋]공자가 구이(九夷)에 살고자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되, “누(陋)하리이다.” 공자가 말하되, “군자가 살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 하였다.
♣ 동이불화[同而不和]겉으로는 동의를 표시하면서도 내심은 그렇지 않음.
♣ 동이수[童二樹]동이수는 청 나라 산음(山陰) 사람인데 이름은 옥(鈺), 자는 박암(璞巖), 호는 이수이다. 산수(山水)ㆍ난죽(蘭竹)ㆍ목석(木石)에 두루 공력이 있었음.
♣ 동인[銅人]구리로 주조하여 궁문(宮門)과 묘문(廟門) 앞에 세웠던 동상. 동적(銅狄)이라고도 함. 후한서(後漢書) 방술전(方術傳)에 계자훈(薊子訓)이 장안(長安) 동쪽 패성(霸城)에서 한 늙은이와 함께 동인을 마사(摩挲)하며 서로 이르기를 “마침 이것을 지어붓는 것을 보았는데 이미 5백 년이 가까웠다.” 하였음. 소식의 시에 “摩挲古銅人 歲月不可計"라 하였음.
♣ 동인[銅印]동인은 지방 관원이 차는 동호부(銅虎符)를 말한다.
♣ 동인[同人]뜻을 같이하는 벗을 말한다.
♣ 동인[同仁]피차(彼此)의 차별없이 평등하게 인애(仁愛)를 베푼다는 뜻. 한창려집(韓昌黎集) 권11 원인(原人)에 “성인(聖人)은 온 천하를 한결같이 보아 인애를 같이 베푼다.” 하였다.
♣ 동인괘[同人卦]뜻이 맞는 사람들의 화합을 상징함.
♣ 동자[董子]동중서(董仲舒)로 중국 전한 때의 대학자로 한때는 학문에 열중하여 3년 동안이나 자기집 밭을 들여다보지 않기까지 하였다고 전해진다. 《史記 儒林列傳》
♣ 동자하유[董子下帷]이 말은 한서(漢書) 동중서전(董仲舒傳)에, “下帷講誦 弟子傳以久次相授業 或莫見其面”이라고 보임.
♣ 동작대[銅雀臺]동작대는 악부가사(樂府歌詞)의 이름. 이 동작대 가사의 내용은 위 무제(魏武帝 삼국(三國)시대의 조조(曹操))가 죽을 무렵에 그의 기첩(妓妾)들을 연연(戀戀)한 일과 그의 기첩들이 무제가 죽은 뒤에 쓸쓸히 무제의 은총을 추모하는 등의 일을 서술하였다.
♣ 동장[東墻]송(宋) 나라 조사행(趙師睪)의 호(號). 그 당시에 정권을 잡은 한탁주(韓侂冑)가 애첩(愛妾) 14명을 두었는데, 어떤 사람이 북주관(北珠冠) 4개를 선사하였다. 탁주는 4명의 애첩에게만 나누어주었으므로 나머지 10명이 모두 욕심을 냈으나 주지를 못했다. 사행은 그 소문을 듣고 돈 10만 꾸러미를 들여 북주(北珠)를 사서 관(冠) 10개를 만들어 바치고, 자기의 첩을 시켜 벼슬을 구하도록 하여 공부 시랑(工部侍郞)에 승진되었다. 《宋史 卷二百四十七》
♣ 동장[銅章]지방 수령이 차는 구리로 된 관인(官印)을 말한다. 동부(銅符)라고도 한다.
♣ 동장묵수[銅章墨綬]지방관이 차는 관인(官印)과 인끈으로, 외직(外職)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때 2천 석(石) 이하의 관리가 몸에 차던 동인(銅印)과 묵수(墨綬)로, 보통 현령(縣令)을 뜻하는 말이다.
♣ 동적[銅狄]동인(銅人)이라고도 하고 금적(金狄)이라고도 하는데, 진시황(秦始皇)이 만들어 함양(咸陽; 장안)에 세워 두었던 것이다. 후한(後漢) 때 도사 계자훈(薊子訓)이란 사람이 장안의 동쪽 패성(覇城)에서 어떤 노인 한 사람과 동인을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나누기를 “내가 때마침 이것을 주조한 일을 보았는데 벌써 5백이 다 되어 간다.” 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로, 장수를 누린다는 뜻으로 인용된다. 《後漢書 卷八十二下 薊子訓傳》
♣ 동전미긍부[董傳未肯附]양웅(揚雄)의 당시의 세력 가진 정부(丁傅) 동현(董賢)에게 붙지 않고 태현경(太玄經)을 짓다가 뒤에 왕망(王莽)에 붙어서 미신부(美新賦)를 지었다.
♣ 동정[動靜]고려 시대에 이부(吏部)가 해마다 백사(百司)의 서리(胥吏)를 가려서 유임시키거나 이동하는 것.
♣ 동정[東征]고려와 원(元)의 연합군으로 일본을 쳤는데, 제1차 동정은 원종(元宗) 15년(1274) 10월, 제2차가 충렬왕(忠烈王) 7년(1281) 5월이었다.
♣ 동정[銅鉦]구리로 된 종 모양의 북으로 상고 때 전쟁에서 군대의 진격을 중지시키는 신호로 치던 것이다.
♣ 동정[洞庭]남방에 있는 수택(水澤) 이름. 지금의 동정호(洞庭湖).
♣ 동정[彤庭]대궐의 뜰을 말함. 천자의 궁정(宮庭)은 붉은 칠(漆)로 바르기 때문임.
♣ 동정[東井]동정은 동쪽에 있는 정수(井宿)로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하나이다.
♣ 동정[彤廷]동정은 붉은색을 칠한 한(漢) 나라 대궐의 뜰이다.
♣ 동정동감적[動靜洞感寂]주역(周易) 계사 상(繫辭上)에 “고요히 움직이지 않다가 느낌을 받으면 마침내 천하의 일을 통한다[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한 데서 온 말인데, 곧 마음의 영묘(靈妙)함을 말한 것이다.
♣ 동정서벌[東征西伐]전쟁을 하여 여러 나라를 이리 저리로 정벌함.
♣ 동정심존육이곤[動靜心存六二坤]속마음은 곧고 바르게 하면서 외부에 드러내는 행동은 유순(柔順)하게 한다는 말이다. 곤괘(坤卦) 육이효(六二爻)는 지도(地道)를 상징하는 곤괘의 주체가 되는데, 그 효사(爻辭)에 “정방형의 땅처럼 광대한지라,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느니라.[直方大 不習 無不利]”라고 하였다.
♣ 동정지부[彤庭持斧]대궐 뜰에서 도끼를 손에 쥔다는 것은 곧 죽기를 각오하고 임금을 극간(極諫)하는 일이다.
♣ 동정춘색[洞庭春色]동정(洞庭)에서 나는 귤(橘)이 가장 유명한데 귤의 빛깔을 비유한 것이다.
♣ 동정향[洞庭香]동정산(洞庭山)에서 생산되는 감귤을 말함. 동정산의 감귤은 특히 껍질이 얇고 맛이 좋다고 한다. 동정호 근처에서 나는 것이 제일 향기롭다는데, 회수를 넘으면 탱자가 된다 한다.
♣ 동정호위근[動靜互爲根]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설(太極圖設)에, “양(陽)은 동(動)하고 음(陰)은 정(靜)한데 동이 극도에 가면 정이 되고 정이 극도에 가면 동이 되어 서로 뿌리가 된다.” 하였다.
♣ 동제[東帝]봄을 맡은 신인 동방청제(東方靑帝)를 가리킨다.
♣ 동제란도[銅鞮攔道]남조(南朝)때 양양(襄陽)의 동요(童謠) 가운데 “양양백동제(襄陽白銅鞮)”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양 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이 즉위한 뒤에 이를 고쳐서 백동제(白銅鞮)라는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편 이백(李白)의 시에 “양양의 어린것들 일제히 손뼉치며, 거리 막고 다투어 백동제 노래 부르누나.[襄陽小兒齊拍手 攔街爭唱白銅鞮]”라는 구절이 있다. 《李太白集 卷6 襄陽歌》
♣ 동제속환천[東齊俗還遷]한(漢) 나라 때의 어진 수령인 공수(龔遂)가 제(齊) 지역에 가 보니, 사람들이 사치를 좋아하고 농사에 힘쓰지 않았다. 이에 공수가 검약을 실천하면서 백성들에게 농상(農桑)에 힘쓰게 하니 백성들의 풍속이 바뀌어졌다. 《漢書 卷89 循吏傳 龔遂》
♣ 동조[東朝]동조는 한(漢) 나라 미앙궁(未央宮) 동쪽에 있던 장락궁(長樂宮)의 별칭으로, 늘 태후가 이곳에 거하였으므로 황태후(皇太后)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동조[同調]취향이 서로 같은 사람을 말한다.
♣ 동조간서도[東棗間西桃]제삿상을 말하는 것인데, 원래 복숭아는 제사에 사용하지 않으나 신선들이 먹는 과일을 들었기 때문에 쓴 것이다. 한(漢) 나라 때 방사(方士)였던 이소군(李少君)은 “일찍이 해상(海上)에 유람하다가 안기생(安期生)이 오이만한 큰 대추를 먹는 것을 보았다.”《漢書 卷二十五 郊祀志》 하였는데, 안기생은 옛 신선의 이름이며, 서왕모(西王母)라는 천도(天桃)가 있었는데 이 복숭아를 먹으면 천 년을 산다 한다. 한(漢)의 동방삭(東方朔)은 이 복숭아를 3개 훔쳐 먹어 3천 살을 살았다 한다. 《漢書 卷六十五 東方朔傳》
♣ 동족방뇨[凍足放尿]언 발에 오줌누기.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임시변통.
♣ 동주[銅柱]구리로 만든 기둥. 국경을 표할 때 쓰는 것으로, 중국의 남쪽 변방 지방을 가리킴. 후한서(後漢書) 마애전(馬援傳)에 “마원이 교지(交趾)에 이르러 동주(銅柱)를 세워, 한(漢) 나라의 경계를 만들었다.”라 하였다.
♣ 동주[東周]동주는 동방의 주 나라임. 인으로써 나라를 잘 다스려 매우 이상적인 나라인 옛 주 나라처럼 만들어보려고 했다는 것임.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만일 능히 나를 써주는 자가 있다면 나는 주도(周道)를 동방에 다시 일으키겠다.[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 하였음.
♣ 동주마형잉도지[銅柱磨瑩仍塗脂]은(殷) 나라 주왕(紂王)이 구리 기둥에 기름을 칠하고 그 밑에 탄(炭) 불을 깔아 놓은 다음 죄인을 구리 기둥에 매달려 있게 하였는데, 죄인이 탄불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웃지 않던 왕비 달기(妲己)가 비로소 웃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列女傳 卷7 殷紂妲己》
♣ 동주상구[同舟相救]사람은 알건 모르건 친하건 미워하건 상관없이 위급한 경우를 함께 만나면 서로 도와주게 된다는 의미.
♣ 동주의[東周意]동쪽 나라를 주(周) 나라 같은 이상국가로 만들어보겠다는 뜻. 《論語 陽貨》
♣ 동주장군[銅柱將軍]마원(馬援)이 동주(銅柱)를 세웠다.
♣ 동주지지[東周之志]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만일 나를 써 주는 자가 있다면 내가 동주(東周)를 만들겠다.” 하였는데, 주(周)는 서(西)에 있으므로 동방에서 자기를 써 주는 이가 있다면 동주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 동주표[銅柱標]후한 때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교지(交趾)에 가서 구리로 만든 기둥을 세워 한(漢) 나라의 끝 경계로 삼았던 것을 말한다.
♣ 동중서[董仲舒]동중서는 한(漢)나라 광천(廣川) 사람으로 한대(漢代)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젊었을 때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공부하여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가 되었으며, 3년 동안 밖에 나오지 않고 책만 읽어 그의 제자들 중에는 스승의 얼굴도 보지 못한 자가 있었다 한다. 평생 동안 학문을 강론하고 책을 저술하였는데 유학을 떠받들고 잡가(雜家)를 배격함으로써 후세에 유학을 정통으로 삼는 국면을 열어놓았다. 유향이 그를 일러 왕좌지재(王佐之才)가 있다고 하였으며, 당시에 순유(醇儒)라 하여 모든 학사(學士)들이 그를 스승으로 존경하였다. 《史記 董仲舒傳ㆍ漢書》
♣ 동중천[洞中天]신선이 산다고 하는 명산(名山) 승경(勝景)을 말한다.
♣ 동지[彤墀]전정(殿庭)을 이름.
♣ 동지력[冬至曆]옛날에는 동짓날 관상감(觀象監)에서 달력을 만들어 모든 벼슬아치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을 동지력이라 불렀다.
♣ 동지발[銅指鈸]동발(銅鈸)과 같은 말로, 동(銅)으로 만든 악기(樂器)이다.
♣ 동진두릉시[東津杜陵詩]두릉(杜陵)은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그의 시에 “면주 땅 부강(涪江) 동쪽 나루터[綿州江水之東津]”로 시작되는 ‘관타어가(觀打魚歌)’와 “고기잡이 구경하러 동진에 다시 왔네.[東津觀魚已再來]”라는 구절의 ‘우관타어(又觀打魚)’가 있다. 《杜少陵詩集 卷11》
♣ 동차궤[同車軌]모든 제도를 통일하여 왕권을 이룩한다는 말. 중용(中庸) 이십팔장(二十八章)에 “이제 온 천하가 수레는 바퀴의 제도가 같고, 글은 문자가 같고, 행하는 데에는 도가 같다.” 하였다.
♣ 동창[東窓]송(宋) 나라의 간신(奸臣) 진회(秦檜)의 별칭이다. 그가 충신인 악비(岳飛)를 죽이려고 할 때 그의 처 왕씨(王氏)와 동창(東窓) 아래에서 모의하였는데, 나중에 죽어 지옥에 떨어져서 온갖 고통을 맛보는 가운데, 자기 부인에게 “동창의 일이 발각되고 말았다[東窓事發矣]고 전해 달라.”고 도사에게 말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西湖游覽志餘 倖盤荒》
♣ 동창계[東窓計]충신을 해치는 음모를 말하는데, 송(宋) 나라 때 간신 진회(秦檜)가 악비(岳飛)를 죽이기 위해 동창(東窓) 아래서 음모를 꾸몄던 일에서 유래한다.
♣ 동척[銅尺]건초(建初) 동척의 원품(元品)에 “建初六年八月十五日造"라고 전예(篆隸)간의 문자로 명각(銘刻)된 것인데 옹성원(翁星原)이 추사에게 진척(眞尺)의 탁본(拓本)과 목척(木尺)의 탁본 두 종을 기증하였음.
♣ 동천[洞天]도가(道家)의 용어로, 골짜기 안에 따로 있는 별천지(別天地)라는 뜻으로 신선이 사는 세계를 가리킴.
♣ 동천[東遷]동쪽으로 추방되다.
♣ 동천[僮千]만석군의 집에 동복(僮僕)이 천여 명이나 됨을 이른 말이다.
♣ 동천[東遷]주 유왕(周幽王)이 견융(犬戎)에게 살해된 뒤에 그의 아들인 평왕(平王)이 동쪽 낙읍으로 왕도(王都)를 옮긴 일을 가리킨다.
♣ 동천남도공잉주[東遷南渡孔仍朱]공자(孔子)는 서주(西周)가 약해져서 동천한 뒤에 태어났고, 주자는 북송(北宋)이 약해지자 남도(南渡)할 때의 사람이다.
♣ 동천복지[洞天福地]신선이 사는 곳에 있다는 36동천(洞天)과 72복지(福地)로, 천하의 절승(絶勝)을 의미한다.
♣ 동천왕부[洞天王府]천하의 승경(勝境). 신선이 산다는 곳으로 십육동천(十六洞天)이니, 또는 삼십육동천(三十六洞天)이니 하는 따위다.
♣ 동청[冬靑]동청은 항시 푸르른 사철나무의 이름이다.
♣ 동춘[動春]봄에 움직이다. 꽃망울이 움틈.
♣ 동취[銅臭]구리 냄새, 즉 동전 냄새라는 말로, 재산을 써서 관직을 얻는 사람이나 재물을 탐하는 사람을 일컫는 고사성어.
♣ 동치[童稚]어린 자식.
♣ 동타[銅駝]진(晉) 나라 색정(索靖)이 낙양궁문(洛陽宮門)에 서 있는 구리쇠 낙타[銅駝]를 가리키며, “장차 네가 가시밭에 서 있는 것을 보리다.” 하였다. 그것은 나라가 곧 망할 것이란 말이다.
♣ 동타[銅駝]진(晋)나라 장한(張韓)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낙양(洛陽) 궁문에 있는 구리쇠로 만든 낙타를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장차 네가 가시덤불 속에 누워 있는 모양을 보리로다.” 하였다.
♣ 동타예형극[銅駝翳荊棘]진(晉) 나라 색정(索靖)이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미리 알고는, 낙양(洛陽)의 궁문 앞에 서 있는 동타(銅駝)를 가리키며 “너도 형극(荊棘) 속에 묻히고 말겠다.”고 탄식한 고사가 전한다. 《晉書 索靖傳》
♣ 동타형극[銅駝荊棘]진(晉) 나라 상서랑(尙書郞) 색정(索靖)이 장차 서진(西晉)이 멸망할 줄을 예감하고는, 낙양(洛陽) 궁문(宮門) 앞에 서 있는 구리 낙타[銅駝]를 가리키며 “앞으로는 네가 가시나무 덤불 사이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되겠구나.[會見汝在荊棘中耳]”라고 탄식했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60 索靖傳》
♣ 동택[董澤]중국 산서성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다.
♣ 동파[東坡]동파는 송(宋) 나라 문장가 소식(蘇軾)의 호. 그는 항주(杭州; 송대의 임안(臨安))의 지부(知府)로 좌천되었을 때 그곳 산수를 몹시 사랑하여 많은 유적(遺蹟)을 남겼다.
♣ 동파계[東坡界]소식(蘇軾)이 정혜흠장로(定慧欽長老)에게 하답한 시에, “유마힐(維摩詰)에게 그만 기대고 한번 이 동파의 세계를 찾아오게나.[請判維摩憑 一到東坡界]” 한 것이 있다.
♣ 동파역[東坡驛]경기도 문산(汶山)이다.
♣ 동파옥상동[東坡屋上銅]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뜻. 소식(蘇軾)이 황주(黃州)에서 귀양살이하면서 그 고을 동쪽 언덕에다 집을 짓고 살면서 자기 스스로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했는데, 당시 큰 부자를 상징하는 구리기와[銅瓦]를 얹을 턱이 없었기에 한 말임.
♣ 동파점[東坡店]경기도(京畿道) 파주(坡州)에 있는 역 이름이다.
♣ 동파회록좌무전[東坡懷祿坐無田]동파는 소식(蘇軾)의 호인데, 소식의 차운주개조장관견기시(次韻周開祖長官見寄詩)에 “점차 전사를 꾀하면서도 녹봉에 연연하고, 파도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또 물가를 곁하였네[漸謀田舍猶祿 未脫風濤且傍洲].”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十九》
♣ 동판[銅板]구리로 만든 판. 운판(雲板)이라고도 한다. 역시 이를 두드려 소리를 낸다.
♣ 동편[彤編]궁중 생활의 기록을 맡은 여관(女官), 또는 그 생활의 기록을 뜻한다.
♣ 동평선락[東平善樂]동평은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의 여덟째 아들인 동평헌왕(東平憲王) 유창(劉蒼)을 말하는데, 누가 그에게 묻기를 “집에서는 무슨 일이 가장 즐거운가?”하니, 대답하기를 “선을 하기가 가장 즐겁습니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동평완[東平阮]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일찍이 동평상(東平相)이 되었던 완적(阮籍)을 가리킨다. 《三國志 卷21》
♣ 동포[東浦]동포는 맹사성(孟思誠)의 호이고, 온양(溫陽)은 맹사성이 태어난 곳이다.
♣ 동포물아[同胞物我]우주에 있는 만물은 똑같이 천지(天地)를 부모로 하여 태어났으니 한 동포라는 뜻.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백성은 나의 동포이며 물건은 나의 친구이다.[民吾同胞 物吾與也]" 하였다.
♣ 동포전[洞布錢]대원군(大院君)이 섭정할 때 장정 한 사람에게 1년에 2민(緡)씩 받아들이던 세금.
♣ 동표[銅標]오랑캐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북쪽 변방이라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멀리 교지(交趾)를 정벌한 뒤, 두 개의 구리 기둥을 세워 한 나라의 영토임을 알린 고사가 있다. 《後漢書 馬援列傳》
♣ 동풍[東風]봄바람.
♣ 동풍기[東風起]도리(桃李)가 다 지고 나면 다른 꽃들이 다시 피기 시작할 것이라는 말이다.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북쪽 동산에 동풍이 건듯 불어오니, 별의별 꽃들이 차례차례 피는구나.[北園東風起 雜花次第開]”라는 구절이 있고, 소식(蘇軾)의 시에 “수줍은 꽃의 자태 아쉬워하지 마소, 뒷날 동풍이 건듯 불어오리니.[幽姿不可惜 後日東風起]”라는 구절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9 北園ㆍ蘇東坡詩集 卷20 雨中看牧丹》
♣ 동필[董筆]동필은 동호필(董狐筆)의 약칭으로 사실을 숨김없이 바르게 쓴 춘추 시대 진(晉) 나라 사관(史官) 동호의 사필(史筆)을 말함.
♣ 동합영군현[東閤迎羣賢]동합은 동쪽으로 난 소문(小門)을 가리키는데, 전한(前漢) 때에 승상공손홍(公孫弘)이 동합을 열어놓고 어진 선비들을 맞아들인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五十八 公孫弘傳》
♣ 동해견래조호발[東海遣來朝虎發]회계(會稽) 지방에서 정월 14일이 되면 무당을 불러 백호(白虎)의 신(神)에게 제를 지낸 뒤 홍록색의 실로 백호의 화상을 매어 문 위에 부착시켜 놓고 “백호를 떼어 보낸다.” 하는 의식에서 인용된 말이다.
♣ 동해노련비[東海魯連悲]강포(强暴)한 적에게 짓밟히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국사(國士)의 처절한 마음을 말한다. 전국 시대 제 나라 노중련(魯仲連)이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蹈東海而死] 포악한 진(秦) 나라가 천하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것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선언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83》
♣ 동해비[東海碑]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가리킴. 미수 허목이 이 비에 글씨를 썼다.
♣ 동해삼세[東海三世]동해는 선경(仙境)인 봉래도(蓬萊島)가 있다는 동쪽 바다를 가리키고, 삼세는 선녀(仙女)인 마고(麻姑)가 왕방평(王方平)에게 이르기를, “동해가 세 번 상전(桑田)으로 변한 것을 내가 보았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동해상전[東海桑田]선녀(仙女) 마고(麻姑)가 왕방평(王方平)에게 말하기를, “동해(東海)가 물이 말라서 뽕밭으로 변하는 것을 세 번이나 보았다.” 하였다.
♣ 동해제련[東海齊連]전국시대 장평전(長平戰) 이후 진(秦)이 조(趙) 나라 서울을 포위하자, 위(魏) 나라 임금은 신원연(新垣衍)을 조 나라에 보내어 진왕을 황제로 추대하도록 조왕을 설득하라고 시켰는데, 마침 조 나라에 와 있던 제(齊) 나라 사람 노중련(魯仲連)이 신원연을 만나 그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이 때 노중련은, “만일 진 나라가 황제가 된다면 우리 선비와 인민들을 종으로 부릴 것이니, 나는 차라리 동해 바다에 빠져 죽겠다.” 하였다 한다.
♣ 동해직구[東海直鉤]동해는 동해 사람인 강태공(姜太公)을 말하고, 직구(直鉤)는 고기가 걸리지 않도록 낚시바늘을 곧게 한 것을 이르는데, 즉 강태공이 주(周) 나라에 등용되기 전에 위수(渭水)에서 항상 곧은 낚시바늘로 낚시질을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 동해효부[東海孝婦]한나라 때 동해에 주청周靑이라는 효부가 있었는데, 그녀의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고생만 시키는 것을 걱정하여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이에 시누이가 주청이 시어머니를 목매달아 죽였다고 모함하였고, 관부에서는 곧 주청을 체포하였다. 가혹한 형벌 때문에 주청은 자신이 죽였다고 거짓 자백을 하고 말았는데, 형이 집행되기 전 주청은 만약 자신이 정말로 죄가 있다면 목의 피가 아래로 흐를 것이고, 죄가 없다면 목의 피가 거꾸로 솟구쳐 흐를 것이라고 맹세하였다. 형이 집행된 후, 과연 목의 피는 거꾸로 흘러 사형장 깃대 끝으로 솟구쳤다. 주청이 죽은 후, 그 지방에는 삼 년 동안이나 큰 가뭄이 들었다.
♣ 동향[桐鄕]중국 안휘성(安徽省) 동성현(桐城縣)에 있는 지명인데, 수령이 어진 정사를 베푼 고을을 뜻한다. 한(漢) 나라의 대사농(大司農) 주읍(朱邑)이 젊은 시절 동향(桐鄕)의 색부(嗇夫)가 되었는데, 청렴하고 공평하게 정사를 하였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면서 존경하였다. 그 뒤에 주읍이 병들어서 죽게 되었을 때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옛날에 동향의 관리가 되었을 적에 그 백성들이 나를 사랑하였었다. 그러니 반드시 나를 동향에 장사 지내라.” 하였다. 주읍이 죽자 그 아들이 동향에다가 장사 지내었는데, 동향의 백성들이 과연 사당을 세워서 세시(歲時)로 제사를 지냈다. 《漢書 循吏傳 朱邑傳》
♣ 동향유애[桐鄕遺愛]지방관이 정사를 잘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음을 비유한 말. 한(漢) 나라 때 주읍(朱邑)이 동향색부(桐鄕嗇夫)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는데, 그가 죽은 뒤에 그곳 백성들이 그의 묘 옆에 사당을 짓고서 세시(歲時)에 향사를 올렸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循吏傳》
♣ 동현문동취[東縣聞銅臭]촉 땅 사람들이 철전(鐵錢)을 사용하다가 무산을 지나면 동전(銅錢)을 쓰기 시작한다고 하는데, 이에 연유하여 무산의 강 위에 있는 두 돌이 동전퇴(銅錢堆)와 철전퇴(鐵錢堆)로 명명되었다 함.
♣ 동호[銅壺]누수(漏水)를 만들 때에 밑에 물 담는 것을 호(壺)라 하는데, 구리쇠로 만들었다.
♣ 동호[東湖]독서당(讀書堂)의 별칭.
♣ 동호[童號]동호는 자는 정서(廷瑞). 명(明) 나라 홍치(弘治) 연간에 공부 시랑(工部侍郞)을 지냈고, 저서에는 고매화시집(古梅花詩集)이 있음.
♣ 동호[董狐]춘추 시대 진(晉) 나라의 사관(史官)으로서 어떤 위세(威勢)에도 굴하지 않고 사실대로 직필(直筆)하였기 때문에 아주 훌륭한 사관으로 이름 높았다. 영공(靈公)이 조순(趙盾)을 죽이려고 하니, 조순은 외지로 도망갔는데 이윽고 조천(趙穿)이 영공을 죽였다. 조순은 환국하여 조천을 토죄(討罪)하지 아니하므로 동호는 사책에 쓰기를, “조순이 그 임금을 죽였다.” 하였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동호는 고대의 양사(良史)이다.” 하였음. 《左傳 宣公 二年條》
♣ 동호[東胡]흉노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으로, 중국 동북방의 호족(胡族)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 동호부[銅虎符]한대(漢代)에 구리로 범 모양처럼 만든 부절(符節). 지방관이 차던 신부(信符)로, 오른쪽은 경사(京師)에 두고 왼쪽은 군국(郡國)에 주어 군사를 출동하는 데에 썼다. 한서(漢書) 제4권 문제기(文帝紀)에, “처음에 군수(郡守)에게 동호부와 죽사부(竹使符)를 주었다.” 하였다.
♣ 동호여계[董狐厲階]동호는 여악(厲惡)의 계제가 되었다.
♣ 동호지필[董狐之筆]중국 진(晉)나라의 사관(史官)인 동호의 직필(直筆). 권세나 외압에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대로 적음
♣ 동호직[董狐直]동호(董狐)는 춘추(春秋) 시대 진(晉) 나라 사관(史官). 영공(靈公)이 조돈(趙盾)을 죽이려 하자, 조돈은 망명했었다. 뒤에 조천(趙穿)이 영공을 시해하자, 조돈은 돌아와 조천을 토벌하지 않았다. 동호는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 ‘조돈이 그 임금을 시해했다.’ 하여, 직접 시해하지는 않았지만 동조한 것과 같다는 뜻으로 이렇게 쓴 것인데, 공자는 “동호는 옛날의 양사(良史)다.”고 칭찬했으므로 후세에 직필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左傳 宣公二年》
♣ 동호직필[董狐直筆]동호는 춘추 시대 진(晉) 나라의 태사(太史)인데, 조순(趙盾)이 그 임금 영공(靈公)을 시해했다고 곧장 쓴 고사를 말함. 실제로 임금을 시해한 자는 조천(趙穿)이었는데, 이때 조순이 정경(正卿)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를 토벌하지 않았으므로 죄를 그에게 돌린 것으로서 기록을 하는 자가 거리낌없이 바른 대로 쓰는 것을 말함. 《春秋左氏傳 宣公 二年》
♣ 동홍[冬烘]겨울에 불 땐 듯이 뜨거운 것. 겨울에는 머리가 식어서 차야 할 텐데 그렇지 않고 따뜻하다는 말로, 당(唐) 나라 정훈(鄭薰)이 시험관이 되어, 안표(顔標)를 안진경(顔眞卿)의 후손인 줄로 잘못 알고 장원을 매겼다는 고사이다. 전(轉)하여 훈장(訓長)을 기롱하는 말로 쓰인다.
♣ 동화[東華]동화는, 중국의 중앙 관서가 동화문(東華門), 즉 도성의 동문(東門) 안에 있었던 데에서 조정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동화[東華]송나라 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처음 임명되면 동화문(東華門)으로부터 들어가서 좌승천문(左承天門)에 이르러서 말[馬]에서 내렸다.
♣ 동화문[東華門]궁성(宮城) 동문(東門)의 이름인데, 학사(學士)들이 이 문으로 출입하였다고 한다.
♣ 동화문[東華門]명(明) 나라 때 궁성의 동쪽에 있던 문인데, 중앙 관서가 이 문 안에 모여 있었다.
♣ 동화잠[東華簪]중앙 관서에서 벼슬살이하는 것을 말한다. 동화는 궁성의 동쪽 문 이름인데, 이곳에 중앙 관서들이 모여 있다.
♣ 동화잠신[東華簪紳]조정의 관직을 뜻한다. 중국의 중앙 관서가 모두 궁성의 동화문(東華門) 안에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 동황[東皇]봄을 주관하는 신(神)의 이름이다. 봄은 동방(東方)과 청색(靑色)으로 대표되기 때문에 동제(東帝), 동군(東君), 청황(靑皇), 청제(靑帝) 등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상서위(尙書緯)에 “봄은 동황이 되고 또 청제(靑帝)가 된다.” 하였다.
♣ 동황태을[東皇太乙]굴원(屈原)의 구가(九歌)에 동황태일(東皇太一)이 나오는데, 태일은 천신(天神)의 이름으로, 동제(東帝)에 배비(配比)하기 때문에 동황태일이라 한다 하였다. 태을은 태일과 같다.
♣ 동황태일[東皇太一]봄을 주관하는 신(神)의 이름이다.
♣ 동회[東淮]호가 동회거사(東淮居士)인 신익성(申翊聖)의 호이다.
♣ 두[斗]두는 북방 현무(北方玄武) 7성의 하나. 《協紀辨方書義例五》
♣ 두가구원[竇家仇怨]후한(後漢)의 두무(竇武)가 태후(太后)의 명으로 영제(靈帝)를 받아들여 제위(帝位)에 앉힌 공로로 대장군(大將軍)이 되고 문희후(聞喜侯)에 봉해졌으며, 아들과 조카들까지도 모두 후에 봉해져 그 위세가 천하를 흔들었다. 그러나 두무는 조금도 자만하지 않고 태부(太傅) 진번(陳蕃) 등과 함께 국사에 진력하면서 당시 정권을 농락하는 고질적인 존재인 환관(宦官)들을 숙청하려다가 뜻을 못 이루고 도리어 환관 조절(曹節)ㆍ왕보(王甫) 무리들에 의해 멸족지화를 당했다. 그런데 두무가 처음 태어날 때 그의 어머니가 두무와 함께 한 마리의 뱀을 더 낳아 그를 숲 속으로 보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는 장차 두씨 집안에 무슨 일이 있을 것임을 미리 알았다고 함. 《後漢書 卷六十九》
♣ 두각[頭角]머리끝이라는 뜻으로, 여러 사람들 중에서 학식이나 재능이 특히 뛰어난다는 말.
♣ 두각열[頭角熱]머리를 자구 조아렸다는 말이다.
♣ 두각참연[頭角嶄然]이 말은 한유의 유자후 묘지명(柳子厚墓誌銘)에, “雖少年 已自成人 能取進士第嶄然見頭角”이라 했음.
♣ 두각초상소[頭角稍相踈]이 시구는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에, “年至十二三 頭角稍相疎”이라고 보이는데, 글을 읽은 자는 학식과 재능이 두각을 나타내서, 점점 글을 읽지 않은 자와 차이가 생긴다는 뜻.
♣ 두간용광[斗間龍光]진(晉) 나라 무제(武帝) 때, 하늘의 두우(斗牛) 사이에 자기(紫氣)가 뻗치는 것을 보고, 뇌환(雷煥)이 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두 명검(名劍)을 얻었던 고사가 있다. 《晉書 卷36》
♣ 두강[杜康]주(周) 나라 사람으로 술을 맨 처음 만들었다 하는데 이 때문에 술 이름으로도 전용 되었다 한다. 《尙友錄》
♣ 두강[頭綱]차의 이름. 북원다록(北苑茶錄)에 “백차(白茶)와 승설(勝雪)은 경칩(驚蟄) 전에 따서 경사(京師)에 올라오므로 두강옥아(頭綱玉芽)라 일렀다.” 하였음.
♣ 두강생[杜康生]두강은 황제(黃帝) 때의 재인(宰人)으로 맨 처음 술을 만들었던 사람이다.
♣ 두강주[杜康酒]술 이름인데 옛날 술을 잘 만들었던 두강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 두개회[豆稭灰]콩깍지를 태운 재. 눈[雪]을 비유하기도 함.
♣ 두견상재배[杜鵑尙再拜]촉(蜀) 나라의 망제(望帝)란 임금이 타인에게 위(位)를 전하고 서산(西山)에 들어가 숨었다가 뒤에 두견(杜鵑)이 되었는데, 후인들이 망제의 덕을 사모하여 두견새의 울음을 듣고 절을 하였다는 전설을 말한다. 《華陽國志 蜀誌》
♣ 두계련무죄[杜雞憐無罪]두계는 당 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읊은 박계행(縛鷄行)을 말하는데, 이는 어떤 종이 벌레를 잡아먹는 닭을 미워하여 꽁꽁 묶어가지고 시장으로 팔러 가는 것을 보고 읊은 것으로, 닭도 팔려가면 죽게 될 것이니 벌레나 닭이나 죽는 건 마찬가지인데, 왜 닭만을 묶는단 말인가? 닭을 풀어줘라 한 내용에서 온 것이다.
♣ 두곡[杜谷]서천(舒川)의 속역(屬驛)이었던 마을 이름이다.
♣ 두곡[杜曲]중국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 남쪽에 위치한 지명. 당(唐)나라 때 대성(大姓)인 두씨(杜氏)들이 대를 이어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함.
♣ 두곡종남[杜曲終南]두곡은 당(唐) 나라 대성(大姓)인 두씨(杜氏)가 대대로 살아 온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의 동남쪽 지역을 가리키고, 종남은 그곳의 산 이름이다.
♣ 두공부[杜工部]당 나라 시인(詩人) 두보(杜甫)의 벼슬이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이었으므로, 세칭 ‘두공부’라 하였다.
♣ 두공부집[杜工部集]당(唐) 나라 두보의 시문집(詩文集). 공부(工部)는 관명인데. 두보가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을 지냈으므로 두공부라 부름.
♣ 두구[荳蔲]두구는 풀 이름임. 이 꽃이 활짝 피기 이전의 꽃망울을 마치 소녀(少女)가 임신한 것과 같다는 데서 함태화(含胎花)라 부르기도 하므로, 전하여 소녀가 임신한 것을 가리키는데, 두목(杜牧)의 시에 “예쁘고 간드러진 십삼 세 남짓의 소녀여 두구 가지의 꽃망울이 이월 초승이로다[娉娉嫋嫋十三餘 荳蔲梢頭二月初]”하였다.
♣ 두구초두[荳蔲梢頭]두구는 육두구(肉荳蔲)의 준말로, 이 꽃이 활짝 피기 전의 불룩한 상태를 함태화(含胎花)라고 하기 때문에 나이 어린 아가씨가 임신(妊娠)한 데에 비유한 것이다. 당(唐) 나라 두목(杜牧)의 시에 “아리따운 아가씨 십삼여 세에, 두구의 초두가 두 달째라네 [娉娉嫋嫋十三餘 荳蔲梢頭二月初]" 하였다.
♣ 두기[斗箕]두 별의 이름. 이 두 별의 사이는 은하(銀河)가 가로놓였으므로, 간격이 있어 원활하지 못한 것의 비유.
♣ 두기[杜夔]중국 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음악가로 음률에 정통했다. 위 문제(魏文帝)가 빈객 가운데서 생(生)과 금(琴)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기는 난색을 지었다. 문제는 이를 좋아하지 않아 두기를 내쫓아 버렸다. 《三國志 魏志》
♣ 두기[豆萁]형제끼리 화목하지 못하고 상대를 해치려 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는 노래라는 뜻이다. 조식이 문제의 위협에 쫓겨 지은 ‘칠보시(七步詩)’ 가운데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으니, 콩이 솥 속에서 눈물 흘리네.[煮豆燃豆萁 豆在釜中泣]”라는 구절이 있다. 《三國志 卷19》
♣ 두남[斗南]“相一星在北斗南”이라는 진서(晉書) 천문지 상(天文志上)의 기록에서 비롯되어 재상(宰相)의 지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두남[斗南]북두성(北斗星)은 하늘의 북쪽에 있으므로 북두의 남쪽이란 천하를 말하는 것이다.
♣ 두남명[斗南名]두남은 북두성(北斗星) 남쪽이란 뜻이니, 두남의 명성이란 곧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임을 의미한다.
♣ 두남일인[斗南一人]두남은 북두칠성의 남쪽. 즉, 온 천하에서 제일 가는 현재(賢才)를 의미한다.
♣ 두노[杜老]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 두당양[杜當陽]두 당양은 당양현후(當陽縣侯)에 봉해진 진(晉) 나라 두예(杜預)를 가리킨다. 그 역시 문제(文帝)의 누이동생인 고륙공주(高陸公主)와 결혼했는데, 청빈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유명(遺命)을 남긴 내용이 진서(晉書) 권34에 나온다.
♣ 두대주[斗大州]말만 한 고을이라는 뜻으로, 보통은 작은 읍성을 가리킨다.
♣ 두덕기[杜德機]생동(生動)하는 기틀을 막는다는 뜻으로, 죽음을 뜻함. 신무(神巫) 계함(季咸)이 열자(列子)와 함께 호자(壺子)를 보고 나와서 열자에게 말하기를 “자네 선생은 죽을 것이다.” 하자, 열자가 다시 들어가 호자에게 그 사실을 고하니, 호자가 이르기를, “아까 내가 그에게 대지(大地)의 조용한 형상을 보여 주었더니, 그가 나의 두덕기를 약간 본 모양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應帝王》
♣ 두랑[荳娘]묘령(妙齡)의 소녀를 가리킨다.
♣ 두랑납량[杜郞納涼]두랑(杜郞)은 두생(杜生)이니, 송(宋) 나라 때의 은사(隱士), 송사(宋史) 두생전(杜生傳)에 “두생이 문 밖을 나오지 않은 지가 15년이었다. 여양위(黎陽尉) 손진(孫軫)이 이유를 묻자 웃으며 ‘전하는 사람들이 너무 지나친 것이오.’ 하고는 문 밖에 있는 뽕나무 한 그루를 가리키며 ‘15년 전에 일찍이 저 뽕나무 아래에서 바람쐰 기억이 나는데, 어찌 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할 수 있겠소.’하였다.” 한다.
♣ 두로[杜老]두로는 바로 두보(杜甫)를 높여 이른 말인데, 그의 곤오어숙자위이시(昆吾御宿自逶迤詩)에서 세상이 태평하지 못함을 걱정하는 뜻을 은밀히 부치어 “벽오동은 봉황이 깃들던 가지만 늙은 채로 남았구나[碧梧棲老鳳凰枝]”고 하였다. 《杜少陵集 卷十七》
♣ 두로[頭顱]머리를 이름.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暴骨草澤 頭顱僵仆 相望於境”이라고 보임.
♣ 두로강촌흥[杜老羌村興]두로(杜老)는 두보(杜甫)를 말한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권5에 오언 고시(五言古詩)로 강촌(羌村) 3수가 실려 있다.
♣ 두로견응착[杜老見應錯]두로는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두보의 시 장부성도초당도중유작(將赴成都草堂途中有作)에, “새 솔은 천 척 높이 안 자라서 한스럽고, 나쁜 대는 만 줄기를 낫으로 쳐낼 거네.[新松恨不高千尺 惡竹應須斬萬竿]”하였다.
♣ 두로고응비호락[杜老故應悲濩落]두로(杜老)는 두보(杜甫)를 말한다. 참고로 그의 시에 “居然成濩落 百首甘契濶”이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4 自京赴奉先縣詠懷》
♣ 두로미[杜老眉]두보(杜甫)는 당 나라 때 시인으로 그는 현종(玄宗) 천보(天寶) 14년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국가가 어지럽자, 관산융마(關山戎馬) 등 나라를 걱정하는 시를 많이 읊었다.
♣ 두로음시수[杜老吟詩瘦]이백(李白)이 두보를 두고 한 말이다. 이백이 장난으로 지어 두보에게 준 [戱贈杜甫] 시에 “묻노니 그대는 작별한 뒤로 왜 그리 수척한가. 이는 모두 그 동안 시를 읊느라 그런 것이네.[借問別來太瘦生 總爲從前作詩苦]" 하였다. 《李太白集 卷三十 詩文拾遺》
♣ 두로추잠태임빈[杜老抽簪太恁頻]벼슬을 그만두는 일을 자꾸만 반복하고 있다는 말이다. 두보(杜甫)의 ‘누상(樓上)’이라는 오언 율시(五言律詩) 첫머리에 “천지간에 부질없이 머리만 긁적이며, 백옥의 비녀를 자꾸만 뽑는구려.[天地空搔首 頻抽白玉簪]”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22》
♣ 두류산[頭流山]지리산(智異山)의 별칭이다.
♣ 두륜산[頭輪山]해남(海南)에 있음.
♣ 두릉[杜陵]두릉(杜陵)에 거하며 두릉포의(杜陵布衣)라고 자호(自號)했던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 두릉[杜陵]두릉은 오늘날 섬서(陝西) 서안시(西安市) 동남에 있던 지명.
♣ 두릉계졸[杜陵計拙]당 나라 시인 두보(杜甫)는 생계가 곤궁하여 늘 타향을 떠돌아다녔다.
♣ 두릉노[杜陵老]두릉(杜陵)에 살았던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말한다. 이백(李白)과 함께 당대(唐代) 시인의 쌍벽(雙璧)으로 일컬어지는 불후의 시성(詩聖)으로서, 두릉야로(杜陵野老)라고 자호(自號)하기도 하였다.
♣ 두릉대아질소사[杜陵大雅軼騷些]두릉은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 말이고 대아는 곧 큰 문장이라는 뜻이다. 초소(楚騷)는 춘추시대 초(楚) 나라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을 말한 것으로, 즉 두보의 문장이 굴원보다 훌륭하다는 뜻이다.
♣ 두릉야로[杜陵野老]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말함.
♣ 두릉옹[杜陵翁]당(唐) 나라 때의 시인으로 호가 소릉(少陵)인 두보(杜甫)를 높여 이른 말이다.
♣ 두릉인[杜陵人]난리로 인해 떠돌이 생활을 하며 우국(憂國)의 심정을 읊었던 두보(杜甫)를 말한다.
♣ 두릉증식노장군[杜陵曾識老將軍]두릉(杜陵)은 두보(杜甫)를 지칭하고 노장군(老將軍)은 엄무(嚴武)를 지칭한다. 두보가 성도(成都)를 다스리던 엄무(嚴武)의 깊은 지우(知遇)를 입어 보살핌을 받다가, 그가 죽은 후 의지할 데 없이 유랑하였다. 《舊唐書 列傳 卷一百九十》
♣ 두릉추흥팔수[杜陵秋興八首]두릉(杜陵)은 두릉야로(杜陵野老)의 준말로,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호이다. ‘추흥팔수’는 대력(大曆; 唐代宗의 연호) 원년에 기주(玘州 사천성 동북방의 진절현(秦節縣)) 서각(西閣)에 있을 때 지은 연작시(連作詩)이다. 《杜少陵詩集 卷17》
♣ 두릉팔애[杜陵八哀]두보의 팔애시. 당(唐) 나라 때의 현신(賢臣)인 왕사례(王思禮)ㆍ이광필(李光弼)ㆍ엄무(嚴武)ㆍ왕진(王璡)ㆍ이옹(李邕)ㆍ소원명(蘇元明)ㆍ정건(鄭虔)ㆍ장구령(張九齡) 등 여덟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여 노래한 것이다. 《杜少陵集 卷十六》
♣ 두림칠서[杜林]두림은 후한 때의 경학자이고, 두림이 일찍이 칠서(漆書)로 된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얻어 매우 소중히 간직해 오다가, 마침내 위굉ㆍ서순을 만나 그들에게 전수함으로써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二十七》
♣ 두모[杜母]두모(杜母)는 후한 때 남양태수(南陽太守)로서 남양을 대단히 잘 다스려, 백성들이 그를 어머니와 같다 하여 두모라 호칭했던 두시(杜詩)를 가리킨다. 《後漢書 卷三十一》
♣ 두목[杜牧]만당(晩唐) 시인, 자(字)는 목지(牧之) 호(號)는 번천(樊川), 당(唐) 나라 때 명신(名臣)이다. 시부(詩賦)에 능(能)하고 풍류(風流)와 아량(雅量)이 있었으며 강개롭게 병사(兵事)를 논하기를 즐겼다. 《唐書 卷一百六十六 杜牧傳》
♣ 두목중서루배낭[杜牧中書屢拜囊]조낭은 검은 베로 만든 전대인데 여기에 글을 싸서 임금에게 올렸다. 당(唐) 나라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낸 두목은 성품이 매우 강직하고 뛰어난 절개가 있어 매양 조정의 대사(大事)와 시폐(時弊)를 잘 논술하여 당시 직소(直疏)로 유명하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新唐書 卷六十六 杜牧傳》
♣ 두목지[杜牧之]두목(杜牧)의 자(字), 호(號)는 번천(樊川), 당(唐) 나라 때 명신(名臣)이다. 시부(詩賦)에 능(能)하고 풍류(風流)와 아량(雅量)이 있었다. 《唐書 卷一百六十六 杜牧傳》
♣ 두목참[杜牧慙]당(唐) 나라 문장가로 자(字)는 목지(牧之)이며, 진사로 뽑힌 뒤 호주 자사(湖州刺史) 등을 지냈다. 그가 포의(布衣)로 있을 당시 친구가 자사(刺史)로 있는 호주(湖州)에 놀러갔다가 10여 세에 지나지 않는 절색의 기생을 만났는데 그때 그는 10년 후 자기가 자사로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 하고 돌아왔다. 14년 만에 자사로 부임하자 이미 그녀는 결혼하여 자식을 둘이나 거느린 부인으로 변해 있었다.
♣ 두목호주거교지[杜牧湖州去較遲]당(唐) 나라 두목이 호주(湖州)에 노닐 때 그곳 자사(刺史)와는 절친한 사이였으므로 그는 자사의 주선으로 여러 미녀를 두루 보았으나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다가 10여 세 된 소녀가 하나 왔는데 자세히 보니 참으로 절색이었다. 그러자 두목은 10년 뒤에 맞이하겠다면서 만약 10년 뒤에 맞이하지 못할 경우에는 다른 데로 출가해도 좋다는 약속을 남기고 돌아왔는데 14년이 지난 뒤에야 가 보니, 그녀는 이미 3년 전에 출가하여 아이를 둘씩이나 낳았으므로 두목은 “봄을 찾는 약속이 늦었으니 꽃다운 시절 한할 필요 없으리. 광풍이 붉은 꽃 다 떨어뜨려 푸른 잎 짙게 피고 열매가 주렁주렁하구나.”라는 시를 남기고 섭섭해하였다. 《張君房 麗情集》
♣ 두무악[頭無岳]남방 해변에서 해채(海採)를 생업으로 하는 제주인(濟州人)으로 이들은 조주(操舟)ㆍ잠수(潛水)에 능하였다. 두무악은 본디 한라산(漢拏山)의 이명(異名)이다.
♣ 두문불출[杜門不出]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음. 곧, 집안에만 틀어박혀 밖에 나가지 않음. 세상과 인연을 끊고 세상에 나가지 않음.
♣ 두미[斗尾]전북 진안(鎭安)의 산골 이름이다.
♣ 두미삼전[斗米三錢]옛날에는 쌀값이 쌀수록 백성이 살기가 좋다는 것이다.
♣ 두방[杜房]당 태종(唐太宗) 때의 명재상 두여회(杜如晦)와 방현령(房玄齡)을 말한다.
♣ 두번천[杜樊川]번천은 당(唐) 나라 두목(杜牧)의 호이다.
♣ 두병[斗柄]두병은 북두칠성의 손잡이를 뜻한 것인데 북두성이 바가지[杓] 형태로 생겼다 하여 다섯째에서 일곱째 별까지의 셋을 가리켜 손잡이라 한다.
♣ 두보[杜甫]중국 당(唐)나라 시인.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 소릉이라고 불리는 것은, 장안(長安) 남쪽 근교의 소릉(小陵)이 선조의 출신지인 데서 유래한다. 하남성(河南省) 공현(鞏縣)을 본거지로 하는 소호족(小豪族) 출신.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뜻에서 시성(詩聖), 이백(李白)과 아울러 일컬을 때는 이두(李杜), 당나라 말기의 두목(杜牧)에 견줄 때는 노두(老杜)ㆍ대두(大杜)라 불린다. 먼 조상에 진(晉)나라 초기의 위인 두예(杜預)가 있고 당(唐)의 초기 시인 두심언(杜審言)은 조부이다.
♣ 두보[杜保]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자는 계량(季良)인데, 자로써 행세(行世)하였다. 그는 특히 의협심이 강하기로 유명하였다. 《後漢書 卷二十四》
♣ 두보배두견[杜甫拜杜鵑]당(唐) 나라의 두보가, 금수들조차도 촉제(蜀帝)의 혼(魂)이 화하여 된 새인 두견새에 대해서는 존경을 표하는데 사람으로서 천자를 존경하지 않으니 새만도 못하다는 내용으로 두견행(杜鵑行)을 지어서 세상의 인심이 나쁨을 한탄하였다.
♣ 두사[蠹死]포박자(抱朴子)에 “뽕나무가 잘리워지면 나무굼벵이가 죽는다.[桑木見斷而蠹殄]”하였음.
♣ 두사훈[杜司勳]당 나라 시인 두목(杜牧)을 가리킨다. 두목이 일찍이 사훈원외랑(司勳員外郞)을 지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 두상옹초선[頭上擁貂蟬]초선(貂蟬)은 담비 꼬리로, 높은 고관이 되었다는 뜻이다. 옛날에 고관들의 관에는 담비 꼬리로 장식하였다.
♣ 두소[斗筲]두(斗)는 열 되, 초(筲)는 대그릇 두 되들이. 모두 작은 그릇인데, 짧은 재주와 얕은 도량(度量)을 지닌 소인을 “두초의 사람”이라 한다.
♣ 두소릉[杜少陵]소릉은 두보(杜甫)의 호.
♣ 두소지인[斗筲之人]한 말 두 되 들이의 대그릇 같은 사람. 즉, 사람의 식견이나 그릇이 좁은 것을 비유한다.
♣ 두솔궁[兜率宮]도솔궁은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 있는 칠보(七寶)로 된 궁전. 석가여래가 전생에 도솔궁에서 머물렀는데, 중생 제도의 인연을 품부받고 이 세계에 내려왔다 한다.
♣ 두수삼년적[杜叟三年笛]두보의 청적(聽笛) 시에, “3년 피리 속에 관산의 달이요, 만국 병장기 앞에 초목 바람[三年留裏關山月 萬國兵前章木風].”라고 하였다.
♣ 두수여점부[斗水如霑鮒]미천하고 곤궁한 사람을 구원해 주는 것을 비유한 말.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주(周)가 어제 오는데 도중에서 누가 부르는 자가 있기에 뒤를 돌아보니, 수레바퀴 자국의 괸 물 속에 붕어가 있었다. ……그 붕어가 말하기를 ‘나는 동해(東海)의 파신(波臣)인데, 당신이 두승(斗升)의 물로써 나를 좀 살려주지 않겠느냐?’ 했다.” 하였다.
♣ 두순압[杜荀鴨]당나라 두순압(杜荀鴨)은 시인(詩人) 두순학(杜荀鶴)을 사모하여 순압(荀鴨)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 두시정오[杜詩正誤]채흥종(蔡興宗)이 두시정오(杜詩正誤)를 지었는데 주자(朱子)가 칭찬했다.
♣ 두심언[杜審言]당(唐)의 문인. 두보(杜甫)의 종조부(從祖父).
♣ 두십이[杜十姨]양용수(楊用修)가 말하기를 “항주(杭州)에 두습유(杜拾遺)의 묘(廟)가 있는데 촌학구가 두십이(杜十姨)라 쓰고 드디어 여상(女像)으로 만들어 유령(劉伶)과 짝을 지었다.” 하였다.
♣ 두압[杜鴨]당나라 두순압(杜荀鴨)은 시인(詩人) 두순학(杜荀鶴)을 사모하여 순압(荀鴨)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 두약[杜若]향초(香草)의 이름. 초사(楚辭) 구가(九歌) 상군(湘君)에 “저 방주(芳洲)에서 두약을 캐노라.” 하였다.
♣ 두약주[杜若洲]두약은 향초(香草)인데 물가에 나며, 잎은 능하(菱荷)와 같고 줄기 끝에 꽃이 핀다. 초사(楚辭) 구가상군(九歌湘君)에, “방주에서 두약을 뜯는도다.[採芳洲兮杜若]”하였다.
♣ 두양[竇梁]동한(東漢) 때의 권신(權臣)인 두헌(竇憲)과 양기(梁冀)를 가리킨다.
♣ 두어오[蠹魚惡]비파기(琵琶記) 효부제진(孝婦題眞)에 “향초 잎 향기 진동하자 책 벌레 모두 달아나네.[芸葉分香走魚蠹]”라는 시구가 있다.
♣ 두엄[竇儼]송(宋)의 어양(漁陽) 사람. 재주가 높고 글을 잘했으며 박학다식하여 당시의 사사(祀事)ㆍ악장(樂章)ㆍ종묘(宗廟)ㆍ시호(諡號)등 제도에 관하여도 많은 것을 찬정(撰定)하여 주위로부터 해박하다는 찬사를 받았음. 《宋史 卷二百六十三》
♣ 두여방[杜與房]당 태종(唐太宗)을 도와 정관(貞觀)의 치적을 구현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두여회(杜如晦)와 방현령(房玄齡). 방모두단(房謀杜斷)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태종조의 쌍벽이었음. 《唐書 卷九十六》
♣ 두예[杜預]진(晉)나라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으로 자는 원개(元凱)이다. 하남 윤(河南尹)과 탁지상서(度支尙書)를 지내다가 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와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이 되어 수리사업(水利事業)을 추진, 1만여 두락의 논을 옥토로 만들었고 태강(太康) 원년(元年)에는 군사를 거느리고 오(吳)나라를 쳐서 멸망시킨 전략가인데, 유가의 경전에도 조예가 깊어 춘추좌씨전집해(春秋左氏傳集解)를 저술하였다. 《晉書 卷三十四 杜預傳》
♣ 두예[杜預]진(晉)나라 초엽의 명장‧정치가‧학자. 자는 원개(元凱). 진나라의 초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오(吳)를 정벌하고 삼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무공을 세움. 춘추(春秋), 고문상서(古文尙書)에 통달한 학자로도 유명함. 저서로는 좌전집해(左專集解), 춘추석례(春秋釋例)등이 있음.
♣ 두예침비[杜預沈碑]진(晉) 나라 때 오(吳) 지역을 평정하는 큰 공을 세운 두예(杜預)는 평소에 후세에 이름 남기기를 좋아하였다. 이에 일찍이 “높은 언덕이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가 구릉으로 된다.” 하면서, 자신의 공을 새긴 비석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만산(萬山)의 아래에 묻고, 하나는 현산(峴山)의 위에 세워놓았다. 《晉書 卷34 杜預列傳》
♣ 두예침비[杜預沈碑]진(晉)나라 두예(杜預)가 형주(荊州)를 지키는 대장으로 있으면서, 부하들과 함께 현산(峴山)에 올라가 탄식하기를, “이 산은 항상 있건마는 이 산에 놀던 사람은 천추 뒤에 누가 알겠는가.” 하고, 비석(碑石) 돌을 만들어 자기의 사적을 새겨서, 하나는 산 위에 세워 두고, 하나는 후일에 산천이 변하여 산이 못이 되고, 못이 육지가 될 때를 예상하여 연못 속에 던져두었다.
♣ 두오랑[杜五郞]두오랑은 송(宋) 나라 때의 은사로서 이름을 알 수 없어 당시에 두오랑으로 일컬어졌고, 초막집에 살면서 30년 동안이나 문 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고을 사람들에게 택일(擇日)이나 해 주고 의약(醫藥)을 팔아서 생활을 근근히 영위하였다 한다. 《宋史 卷四百五十八》
♣ 두우[杜佑]당 헌종(唐憲宗) 때 사람. 그는 유질(劉秩)이 만든 정전(政典)에다 신례(新禮)를 더 첨가, 통전(通典) 2백 편을 엮었음.
♣ 두우[斗牛]두성(斗星)ㆍ우성(牛星). 오(吳)ㆍ월(越) 지방의 분야(分野)에 해당한다. 유신(庾信)의 애강남부(哀江南賦)에 “상수ㆍ한수에서 길이 나누어지니 두성ㆍ우성을 바라본다.[路已分於湘漢 星猶望於斗牛]" 하였다.
♣ 두우륙[杜郵戮]충신이 죄없이 죽음을 당하다란 뜻의 고사성어.
♣ 두우정기[斗牛精氣]옛날 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명검이 땅속에 묻혀서 하늘의 두우(斗牛) 사이에 자기(紫氣)를 발산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36 張華傳》
♣ 두우혼[杜宇魂]두우혼이란 두우의 넋이란 뜻으로, 옛날 촉제(蜀帝) 두우(杜宇)가 타향에 나갔다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 그의 넋이 새로 화했다고 하는데, 이 새가 피를 토하며 비통하게 울어대므로 이 새를 촉제의 이름을 따서 두우(杜宇; 두견새)라고 했다 한다.
♣ 두운[杜韻]두운이란 두보(杜甫)가 지은 시의 운(韻)을 그대로 쓴 것이다.
♣ 두원[頭黿]당(唐) 나라 때 화성(畫聖)으로까지 일컬어졌던 오도자(吳道子)는 특히 공자(孔子)의 초상(肖像)을 비롯해서 불화(佛畫)들을 많이 그렸는데, 소식(蘇軾)이 오도자의 불화를 예찬한 시에 “오랑캐 임금 귀신 우두머리 천명 만명이 서로 밀치고 다퉈 들어와 머리가 자라 같구나[蠻君鬼伯千萬萬 相排競進頭如黿]”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四》
♣ 두원[杜園]두보(杜甫)의 동산.
♣ 두위랑[杜韋娘]당(唐) 나라 기생.
♣ 두율천궁[兜率天宮]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이며 욕계의 정토(淨土)에 있는 천궁으로 지상에서 32만 유순(由旬)의 거리에 있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이곳에 살면서 석가의 교화를 받지 못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한다고 한다.
♣ 두인[豆人]그림 속의 콩알만한 사람이란 뜻으로,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의 형상을 일컫는 말이다.
♣ 두인[斗印]두인은 무장(武將)의 관인(官印)이다.
♣ 두입[斗入]북두성 모양으로 휘어져 들어간 것을 말한다.
♣ 두자미[杜紫薇]당 나라 시인 두목지(杜牧之)인데, 이 시의 첫귀가 두자미의 시이다.
♣ 두자미[杜子美]중국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자, 호는 소릉(少陵).
♣ 두자진회야[杜子秦淮夜]두목(杜牧)의 야박진회(夜泊秦淮)시에, “연기는 찬물에 자욱, 달은 모래에 휘영청. 밤에 진회에 대니 술집이 바로 옆에 있네[煙寒實水月籠沙 夜泊秦淮近酒家].”라는 구절이 있다.
♣ 두장[斗帳]작은 휘장. 말[斗]을 덮을 정도로 작다 하여 이렇게 일컫는다.
♣ 두전표[斗轉杓]해와 달이 바뀜을 뜻한다. 두표는 북두성(北斗星)의 꼬리 부분인 자루 모양으로 된 별을 말하는데, 이 별이 일년(一年) 십이개월(十二個月)에 걸쳐 십이진(十二辰)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정월에는 인(寅)을 가리키고, 2월에는 묘(卯)를 가리키고, 3월에는 진(辰)을 가리키는 등이다.
♣ 두점방맹[杜漸防萌]애시당초 싹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는다. 점(漸)은 사물의 처음. 맹(萌)은 싹. 곧 좋지 못한 일의 조짐이 보였을 때 즉시 그 해로운 것을 제거해야 더 큰 해(害)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
♣ 두종[杜悰]당(唐)의 두종(杜悰)은 문음(門蔭)으로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고 뒤에 장상(將相)을 역임했으나 자신의 자봉(自奉)에만 힘쓰고 인재를 천거 기용한 일이 없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일러 독각서(禿角犀)라고 하였음. 《唐書 卷一百六十六》
♣ 두주[杜酒]두주는 집에서 빚은 박주(薄酒).
♣ 두주[頭籌]제일 첫머리의 산가지. 어떤 기예(技藝)를 겨루어서 먼저 승리를 거둔 것.
♣ 두주백편[斗酒百篇]이태백(李太白)처럼 한자리에서 술 한 말을 해치우고 백 편의 시를 지을 만큼 문재(文才)가 뛰어나고 기개가 호방한 것을 말한다.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한 말 술에 시 백 편 짓는 우리 이태백, 장안 저자 주막에서 잠을 자누나.[李白一斗詩百篇 長安市上酒家眠]”라는 구절이 있다.
♣ 두주불사[斗酒不辭]한 말 술도 사양하지 않음. 주량(酒量)이 세다는 뜻.
♣ 두주쌍감[斗酒雙柑]남조 송(南朝宋) 때 대옹(戴顒)이 봄날에 술 한 말과 밀감 두 개를 가지고 나가므로, 누가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꾀꼬리 소리를 들으러 간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두준[杜濬]명말(明末)의 학자로서 명이 망하자 금릉산(金陵山)에 은거하였다.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저서로는 변아당집(變雅堂集)이 있다.
♣ 두찬[杜撰]근거 없이 저술하는 일. 두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하나를 들면, 야객총담(野客叢談)에, “두묵(杜黙)이 시(詩)를 짓되 율(律)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일이 격에 맞지 않은 것을 들어 두찬이라 한다.” 하였음.
♣ 두천[斗千]두십천(斗十千)의 준말인데, 십 천은 곧 일만 전(一萬錢)으로, 미주(美酒) 일두(一斗)에 돈이 일만 전이나 됨을 이른 말이다.
♣ 두초[斗筲]두(斗)는 열 되, 초(筲)는 대그릇 두 되들이. 모두 작은 그릇인데, 짧은 재주와 얕은 도량(度量)을 지닌 소인을 “두초의 사람”이라 한다.
♣ 두타[頭陀]불가(佛家)의 말로 고행(苦行)을 하여 온갖 번뇌(煩惱)를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 두탕호청사[杜蕩護淸司]연산군 때에 늙은 흥청(興淸)들이 말썽을 일으킬까봐 집을 마련하여 살게 하고 관리하던 곳.
♣ 두통첩[肚痛帖]장욱의 초서 서간(書簡)으로 두통첩이 있음.
♣ 두평[斗萍]두평(斗萍)은 크기가 말만한 평실(萍實)로, 큰 공훈이나 맛있는 음식을 뜻한다. 초(楚) 나라 소왕(昭王)이 강을 건널 적에 크기가 말만한 어떤 물체가 배에 다가오자, 소공이 괴이하게 여겨 건져 올리게 한 다음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공자에게 사신을 보내어 물어보니, 공자가 “이것의 이름은 평실(萍實)이라고 하는데, 쪼개면 먹을 수가 있다. 다만 패왕(霸王)이 될 만한 사람이라야만 그것을 얻을 수 있는바, 상서로운 징조이다.” 하였다. 《孔子家語 致思》
♣ 두풍[頭風]병명(病名). 머리가 항상 아프거나, 또는 계속하여 부스럼이 나는 병.
♣ 두풍유[頭風愈]시문이 뛰어남을 이른 말이다. 삼국 시대에 원소(袁紹)가 진림(陳琳)을 시켜 조조(曹操)를 성토하는 격문(檄文)을 초하게 하여 조조에게 보냈더니, 조조는 때마침 두풍(頭風)을 앓고 있다가 그 격문을 보고는 모골이 송연하여 부지중에 두풍이 나았다 한다.
♣ 두함[頭銜]관리(官史)의 위계(位階)를 적은 관함(官銜)을 이름.
♣ 두헌[竇憲]동한(東漢) 때의 권신(權臣). 두헌은 화제(和帝) 때 황제가 어린 틈을 타 두 태후(竇太后)의 오빠로서 권력을 차지하여 마음껏 권력을 부리다가 화제가 장성한 뒤에 자살을 명 받고 자살하였다. 《後漢書 卷23 竇融列傳 竇憲》
♣ 두후침비[杜侯沉碑]두후는 두예(杜預)를 가리킨다. 진서(晋書) 두예전(杜預傳)에 “두예는 후세에 이름 남기기를 좋아하여 자기의 훈적(勳績)을 기록한 비석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만산(萬山) 아래 있는 못에다 잠겨 놓고 하나는 현산(峴山) 위에 세워 놓고는 ‘후세에 골짜기가 언덕이 되고 언덕이 골짜기가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했다.” 하였다.
♣ 두흑[頭黑]머리가 아직 검은 젊은 시절.
♣ 두힐[豆肹]전라도 나주목(羅州牧) 회진폐현(會津廢縣)의 백제(百濟) 시대 이름. 《新增東國輿地勝覽》
♣ 둔곡[遯谷]둔곡은 운둔자가 살기에 합당한 골짜기라는 말이다. 주역(周易) 택풍대과괘(澤風大過卦)의 상사(象辭)에 “못의 물이 나무 위에까지 차오르는 것이 대과괘의 상이니, 군자는 이 점괘를 보고서 홀로 우뚝 서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피해 살면서도 후회하지 않는다.[澤滅木 大過 君子 以 獨立不懼 遯世無悶]”하였다.
♣ 둔괘삼효[遯卦三爻]둔괘는 날로 정의가 없어지고 부정 부패가 만연되는 때에 군자가 은둔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데, 구삼효(九三爻)에는 은둔하고 싶어도 처자 권속 때문에 차마 버리고 가지 못한 채 집에서 가만히 쉬는 내용이 담겨 있다.
♣ 둔덕령[屯德嶺]충청도 비인(庇仁) 동쪽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 둔세[遁世]세상을 피해 숨음.
♣ 둔암시[遯庵詩]돈암은 중종(中宗)~광해(光海) 때의 문신 황섬(黃暹)의 호. 광해군 때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화를 입자, 영경의 처남으로서 이에 연좌되어 파직당하였음.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열중하였음.
♣ 둔옹[鈍翁]둔옹은 청(淸) 나라 왕완(王琬)의 호. 왕완은 경사(經史)를 비롯하여 예학(禮學)에 이르기까지 발명(發明)한 것이 많았다.
♣ 둔옹[遯翁]송(宋) 나라 주희(朱熹)의 호이다.
♣ 둔옹[遁翁]이집(李集)의 별호.
♣ 둔운[屯雲]뭉친 구름인데, 궂은 운명의 상징이다.
♣ 둔일[遁逸]숨어 살다.
♣ 둔전병[屯田兵]변경(邊境)에 주둔(駐屯)‧토착(土着)시켜 평상시에는 농사도 짓게 하던 군사.
♣ 둔황공업[屯湟功業]송(宋) 나라 휘종(徽宗) 때 왕후(王厚)가 황주(湟州)에 진을 치고 강족(羌族)을 정벌하여 대승을 거두고 실지(失地)를 한꺼번에 수복했던 고사를 말한다. 《宋史 卷328, 卷492》
♣ 득가서[得家書]두보(杜甫)가 안녹산(安祿山) 난리 때 봉상(鳳翔)에 있으면서 부주(鄜州)에 있는 식구들 소식이 궁금해 서신을 보냈으나 답신이 없어 안절부절하다가 늦게야 서찰을 받고는 ‘득가서(得家書)’라는 제목으로 시를 읊어 기쁨을 나타내었음. 《杜少陵詩集 卷五》
♣ 득노병[得老兵]술친구를 찾아 술을 마신다는 뜻이다. 진(晉) 나라 때 사혁(謝奕)이 술 마시기를 아주 좋아하였는데, 술에 취하면 조정의 예의를 따지지 않았으므로, 그의 상관인 환온(桓溫)이 그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피해 도망쳤다. 그러자 사혁은 다시 환온의 수하에 있는 장수를 붙잡고 함께 마시면서 말하기를, “한 노병이 도망치자 또다시 한 노병을 얻었으니, 또한 무슨 괴이할 것이 있는가.” 하였다. 《晉書 卷79 謝奕列傳》
♣ 득득[得得]일부러, 새삼스러이, 득의의 모양, 의기가 오르는 모양
♣ 득록[得鹿]상고 때 정(鄭) 나라의 어떤 사람이 들녘에서 나무를 하다가 놀란 사슴을 만나 잡아죽인 뒤에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엉겁결에 구덩이에 밀어넣어 파초잎으로 덮고 나서 기쁨을 가누지 못하다가 얼마 후에 그곳을 찾아내지 못해 결국 꿈이 되고 말았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참과 거짓이 되풀이되는 인간사의 허무함을 비유한 것이다. 《列子 周穆王》
♣ 득롱망촉[得隴望蜀]후한(後漢) 초(初)에 광무제(光武帝)가 롱(隴)을 정복하고 보니 촉(蜀)이 욕심나서 또다시 촉나라를 쳤다는 데서 나온 말.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뜻한다.
♣ 득마괴거장적후[得馬愧居張籍後]당 나라 시인(詩人) 장적(張籍)이 배도(裴度)에게서 말[馬]을 한 필 선물로 받고는 시를 지어 사례(謝禮)하였더니, 한퇴지(韓退之)ㆍ백낙천(白樂天)이 화답한 시가 있다.
♣ 득마실마[得馬失馬]인간의 이해 득실(利害得失)이 무상하여 예측할 수 없음을 비유한 것으로, 회남자(淮南子) 인간훈(人間訓)에 나오는 새옹마(塞翁馬)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득실양장곡[得失羊臧穀]현상적으로는 잘되고 못 되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똑같은 결과가 되고 말 것이라는 뜻이다. 장(臧)과 곡(穀) 두 사람이 양(羊)을 돌보던 중에, 장은 책을 읽다가 양을 잃어버리고 곡은 노름을 하다가 양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장자(莊子) 변무(騈拇)에 나온다.
♣ 득실여환[得失如環]진(晉)의 양호(羊祜)가 다섯 살 때 유모(乳母)에게 “내가 가지고 놀던 금환(金環)을 가져오라.” 하니, 유모가 “애당초 가지고 놀던 금환이 없었는데 무슨 말이냐.” 하자, 즉시 이웃집 이씨(李氏)의 동쪽 담장 밑에 있는 뽕나무 사이로 가서 금환을 찾아냈다. 이씨가 알고 깜짝 놀라며 “이는 나의 죽은 아이가 잃었던 것인데 어찌된 셈이냐.” 하였다. 그는 그 죽은 아이의 후신(後身)이었다. 《晉書 羊祜傳》
♣ 득어망전[得魚忘筌]장자(莊子) 외물(外物)의 “통발은 물고기를 잡는 도구인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린다.”에서 나온 말로, 일단 목적을 이룬 뒤에는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잊어버리는 것에 비유한다.
♣ 득어이군[得御李君]이군은 동한(東漢)의 명사 이응(李膺)을 가리킨 것으로 훌륭한 사람을 모시게 되어 영광스럽다는 뜻. 후한서(後漢書) 이응전(李膺傳)에 “순상(荀爽)이 일찍이 이응을 만나 수레를 몰고는 집에 돌아와서 ‘내가 오늘 이응을 위하여 수레를 몰았다.’ 하면서 기뻐하였다.” 하였다.
♣ 득여[得輿]수레를 얻는다는 것은 주역 박괘(剝卦)의 “상구는 큰 과일은 먹지 않는 것이니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집을 헐릴 것이다[上九 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에서 나온 말이다.
♣ 득의만면[得意滿面]뜻한 바를 이루어 기쁜 표정이 얼굴에 가득함.
♣ 득의양양[得意洋洋]만족스런 듯 기뻐하다란 뜻의 고사성어.
♣ 득일[得一]도가의 지순한 도를 터득하다.
♣ 득일망십[得一忘十]한 가지를 얻고 열 가지를 잃어버림. 기억력이 좋지 못함을 뜻한다.
♣ 득전어주종무상[得全於酒終無傷]술에 취한 사람이 수레에서 떨어져도 상(傷)하지 않는 것은 그 천진(天眞)을 온전히 한 까닭이다. 《莊子》
♣ 득정사증씨[得正師曾氏]숨을 거둘 때까지 바른 도리를 잃지 않았다는 말이다. 증자(曾子)가 임종(臨終)할 무렵, 대자리를 바꿔 깔도록[易簀] 자제에게 명하면서 “吾得正而斃焉 斯已矣”라고 한 말에서 연유한 것이다. 《禮記 檀弓上》
♣ 득지[得之]김대덕(金大德)의 자(字)이다.
♣ 등[滕]등 나라는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있었던 작은 나라로 곁에 큰 나라인 제(齊)와 초(楚)가 있어 이러할 수도 저러할 수도 없었던 나라이다. 등 문공(滕文公)은 맹자에게 “등 나라는 작은 나라입니다. 제(齊)ㆍ초(楚)의 사이에 끼어 있으니 제 나라를 섬겨야 하겠습니까, 초 나라를 섬겨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孟子 梁惠王下》
♣ 등가[登歌]나라의 대제(大祭) 때 당상(堂上)에 올라가 부르는 노래를 말함.
♣ 등가[登歌]나라의 제사를 거행하거나 대규모의 조회 때 악사가 마루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는 것. 그 악사가 연주하는 노래를 말함.
♣ 등가[登伽]마등가녀(摩登伽女)의 준말. 불교에서 말하는 음녀(淫女)의 이름인데, 그의 딸 발길제(鉢吉帝)를 시켜 환술(幻術)로 석가모니의 수제자인 아난(阿難)을 유혹하여 파계하게 하자, 석가모니는 이를 알고 신주(神呪)를 외어 아난을 구제하였다 한다.
♣ 등각장천[滕閣長天]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가을 물은 긴 하늘과 한 빛이로다[秋水共長天一色].”란 말이 있다.
♣ 등거[登車]동한(東漢) 사람 범방(范滂)이 청조사(淸詔使)가 되어 기주(冀州)의 도적들을 평정하러 떠날 때 수레에 올라 개연히 천하를 깨끗하게 할 뜻을 가졌었다 함. 《後漢書 卷六十七黨錮列傳》
♣ 등경산[鄧景山]당 나라 사람. 문관(文官)으로서 태원윤(太原尹)에까지 이르렀으나, 너무 각박하게 부하들을 다루다가 그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했음.
♣ 등계적[登桂籍]문과(文科)에 등과하여 관원으로 되는 것을 계적에 올랐다 한다.
♣ 등고[謄告]말을 달리며 부르다.
♣ 등고[登高]음력 9월 9일의 이칭. 후한(後漢) 때 환경(桓景)이 비장방(費長房)을 따라 선술(仙術)을 익히던 어느 날 밤 장방으로부터, 오는 9월 9일에 환경의 집에 재앙이 있을 터이니 급히 가서 가족들에게 붉은 주머니에 수유(茱萸)를 넣어 팔뚝에 걸고 높은 산에 올라 국화주(菊花酒)를 마시도록 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고 그대로 시행했는데, 과연 9월 9일에 닭ㆍ개들은 모두 죽었으나 그의 가족은 무사했다고 한다.
♣ 등고구일[登高九日]전거에는 구일등고(九日登高)로 되어 있다. 남조(南朝) 양(梁) 오균(吳均)이 지은 속제해기(續齊諧記) 구일등고에 “여남 환경(桓景)이 비장방(費長房)을 따라 여러 해 동안 유학하였다. 비장방이 오균에게 말하기를, ‘9월 9일에 너희 집에 재앙이 있을 것인데 빨리 집으로 가 식구들마다 붉은 주머니를 만들어 거기에다 수유를 담아 팔에 차고 높은 곳에 올라가 국화주(菊花酒)를 마시면 그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환경이 그의 말처럼 온 가족이 산에 올라갔다가 저녁에 돌아와 보니 가축이 갑자기 죽어 있었다.”고 하였다.
♣ 등고난만취[登高爛慢醉]세속에서, 9월 9일이 되면 높은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는 속례를 말한다. 《續齊諧記》
♣ 등고자비[登高自卑]높은 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낮은 곳부터 밟아야 한다. 일을 하는데는 반드시 차례를 밟아야 한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스스로를 낮춘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 등고작부[登高作賦]높은 데 올라가서 부를 짓는다.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보임.
♣ 등공기구추[滕公起廐騶]등공(滕公)은 한(漢)의 하후영(夏侯嬰)을 말함. 하후영은 패(沛)땅 사람으로 처음에 패에서 말을 관리하는 천역(賤役)을 하던 자였는데, 유방(劉邦)과 사이가 좋았던 관계로 뒤에 유방이 한 나라를 세우고 천자(天子)가 되자 하후영은 태복(太僕)이 되었으며 한 나라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음. 《漢書 卷四十一》
♣ 등공신천[滕公新阡]등공은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같은 고향 사람으로, 유방을 도와 한 나라를 세운 하후영(夏侯嬰)의 별칭이다. 그가 죽어 장사를 지낼 때 공경들이 상여를 따라 도성의 동문 밖에 당도하자 말이 더 이상 가지 않고 땅바닥에 쓰러져 슬피 울었다. 그곳을 파보니 석곽(石槨)이 나왔는데 거기에 “암울했던 가성(佳城)이 삼천 년만에 태양을 보았도다. 아, 등공이여 이 집에서 살지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마침내 거기에다 묻었다 한다. 《史記 卷九十三 夏侯嬰傳注》
♣ 등공장[滕公葬]등공은 한 고조(漢高祖)의 명신인 하후영(夏侯嬰)의 봉호. 등공이 일찍이 말을 타고 동도문(東都門)에 이르렀을 때 말이 가지 않고 발로 땅을 허비적거리므로, 그곳을 파 본 결과 석곽(石곽) 하나가 나오자, 이를 깨끗이 씻어서 보니, “답답하던 가성(佳城)이 삼천 년 만에 태양을 보았도다. 아, 등공이 이곳에 거처하리라.[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滕公居此室]"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하여 등공의 유명(遺命)에 의해서 등공이 죽은 뒤에 그곳에 장사지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등과기[登科記]합격자 성명록.
♣ 등누점자기[登樓占紫氣]노자(老子)가 서쪽으로 길을 떠나 함곡관(函谷關)에 거의 이르렀을 때,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누대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다가, 보라색 기운[紫氣]이 관문 위로 떠오는 것을 살펴보고는, 분명히 진인(眞人)이 올 것이라고 예측을 하였는데, 얼마 뒤에 과연 노자가 푸른 소를 타고 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列仙傳 上ㆍ關令內傳》
♣ 등단[登壇]대장(大將)에 임명되었다는 말이다. 옛날 사령관의 권위를 높여주기 위해 단을 쌓고 예식을 행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淮陰侯列傳》
♣ 등단[登壇]회맹(會盟), 제사, 사신 접대 등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말한다.
♣ 등단주소호[登壇周召虎]주(周)나라도 한 때에는 국가가 쇠약하였던 것을 선왕(宣王)이라는 왕이 중흥시켰는데, 그때에 대장으로서 전쟁에 성공한 사람이 소호(召虎)였다. 예전부터 대장은 단(壇)을 모으고 거기에 올라가서 하늘과 전군에 맹서하였으므로 대장되는 것을 등단(登壇)한다고 말한다.
♣ 등당입실[登堂入室]마루를 거쳐 방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순서를 밟아 학문을 닦으면 깊은 경지에 이르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論語 先進》
♣ 등대자미[登臺子美]자미(子美)는 두보(杜甫)의 자. 그의 9월 9일 등고(登高) 시 세째 연(聯)에, “만 리에 가을을 슬퍼하니 늘 나그네의 신세, 백 년에 병이 많아 홀로 대에 올랐네.”라 했다.
♣ 등래[登萊]등래는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합칭으로 중국 산동성(山東省) 일대를 말한다.
♣ 등롱[燈籠]대나무 또는 나무나 쇠 같은 것의 살로 둥근 바구니 모양을 만들고, 거기에 비단 또는 종이를 씌워 그 속에 등잔을 넣는 것이다.
♣ 등루[登樓]한(漢) 나라 말에 왕찬(王粲)이 난을 피하여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가서 의지해 있으면서 뜻을 얻지 못함에 누각에 올라가서 등루부(登樓賦)를 읊어 시름을 달랜 고사를 말한다. 《三國志 魏志 卷二十一 王粲傳》
♣ 등루거제[登樓去梯]누상(樓上)에 오르게 하고, 오르고 나면 사다리를 치운다. 즉, 처음엔 남을 기쁘게 해놓고 뒤에 괴롭게 한다.
♣ 등루부[登樓賦]삼국(三國) 시대 위(魏) 나라 왕찬(王粲)이 17세 때 황문시랑(黃門侍郞)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동탁(董卓)의 난을 피해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의탁해 있으면서, 강릉(江陵)의 성루(城樓)에 올라가 고향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며 지었다 한다. 《三國志 卷二十一 王粲傳ㆍ文選 卷十一 遊覽》
♣ 등루장소[登樓長嘯]진(晉) 나라 때 유곤(劉琨)이 진양 태수(晉陽太守)로 있을 적에, 호병(胡兵)에게 겹겹으로 포위를 당하자 유곤이 성루에 올라 긴 휘파람을 부니 호병이 이 소리를 듣고는 향수에 젖어있는 틈을 타서 포위망을 풀고 달아났다는 고사. 《晉書 劉琨傳》
♣ 등륙[滕六]전설 속의 눈 귀신[雪神] 이름이다.
♣ 등륜[燈輪]불사(佛事) 때 등을 달아 놓는 곳. 당 예종(唐睿宗) 선천(先天) 2년에 안복문(安福門) 밖에 20장(丈) 높이의 등륜을 설치하고 5만 개의 등을 달아 놓아, 마치 미묘한 꽃과 같았다 한다. 《朝野僉載》
♣ 등림[鄧林]등림은 좋은 나무만 있다는 숲으로, 신선이 구름을 타고 다니며 노는 곳이라 한다. 필원(畢沅)은 산해경(山海經) 중산경(中山經)의 “夸父之山, 北有桃林.”이라는 구절에 근거해 ‘도림(桃林)’이 ‘등림(鄧林)’이며, 그 땅은 초(楚)의 북쪽 경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 등림[鄧林]회남자(淮南子)에, “과보가 막대를 버린 것이 등림이 되었다 [夸父棄其策是爲鄧林].”라는 말이 있다. 과보는 신수(神獸)인데, 하수(河水)를 마시고도 부족하여 서해(西海)를 마시려고 가다가 중로에서 목이 말라죽었다. 그가 막대기를 심은 것이 살아나 큰 수풀이 되었는데, 전설에 나오는 아름답고 무성한 수풀이다.
♣ 등문객[登門客]등용문객(登龍門客). 인정과 추천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말함. 후한서(後漢書) 卷六十七 李膺傳에 “이응의 명망이 높아 그의 인정을 받는 사람들을 세상에서는 용문에 올랐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 등사[螣사]용처럼 생긴 뱀. 운무(雲霧)를 제맘대로 일으켜 그 속에서 논다고 함. 《爾雅 釋魚》
♣ 등산극[登山屐]등산을 하지 않았음을 뜻한 말로, 남조(南朝) 송(宋) 때 사영운(謝靈運)이 등산할 때면 반드시 나막신을 신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등산사[登山謝]사영운(謝靈運)은 남조(南朝) 시대 송(宋) 나라의 문장가. 산수를 좋아하여 회계(會稽)에 있을 때 언제나 나막신을 신고 산에 오르곤 하였다. 《宋書 謝靈運傳》
♣ 등산임수[登山臨水]친지를 떠나 보내는 서운한 마음을 표현할 때 보통 쓰는 표현으로, 초사(楚辭) 구변(九辯)의 “산에 올라 멀리 강물을 바라보며 돌아가는 길손을 전송한다.[登山臨水兮 送將歸]”라는 유명한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 등상[騰傷]등상은 호랑이가 날뛰어 이광에게 상처를 입혔다[虎騰傷廣]는 데서 온 말이다.
♣ 등생구절군[滕生求浙郡]늙음을 이유로 외임(外任)을 자원함. 송의 등원발(滕元發)이 강직한 성품 명쾌한 안목으로 신종(神宗)때 많은 치적(治績)을 내외에 남기고는 뒤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늙음을 이유로 회남(淮南)을 맡아 나갈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음. 《宋史 卷三百三十二》
♣ 등석[燈夕]상원(上元). 즉 정월 대보름날 밤을 말한다. 예부터 이날은 밖에 등을 켜놓아 밤을 밝게 하였으므로 이름된 것이다. 속칭 원소절(元宵節)이라고 한다.
♣ 등석[燈夕]음력 4월 8일 밤에 등대를 세우고 등을 달고서 석가모니의 탄일(誕日)을 기념하는 날.
♣ 등석연[燈夕宴]음력 4월 초파일에 ‘등석(燈夕)’이라 하여 등을 달고 등대를 세우고, 밤에 불을 켜서 석가모니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잔치이다. 관등(觀燈) 놀이와 같다.
♣ 등설[滕薛]춘추 시대에 독립된 두 소국(小國)의 이름인데, 전하여 지방관을 비유한 것이다.
♣ 등씨동산[鄧氏銅山]등씨는 전한(前漢)의 등통(鄧通)을 말한다. 문제(文帝)가 등통을 매우 총애하여 그를 부자(富者)로 만들기 위해, 촉(蜀)의 엄도(嚴道)에 있는 동산(銅山)을 떼어 주어, 거기서 나는 동(銅)으로 돈을 주조해서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했기 때문에, 등씨의 돈이 온 천하에 퍼졌었다. 《漢書 佞幸傳, 史記 佞幸列傳》
♣ 등아[燈蛾]등촉(燈燭)을 보면 서로 불을 뺏으려고 빙빙 돌다가 등유(燈油)에 빠지거나 불에 타서 죽는 불나방. 색욕과 탐욕에 어두워 신명(身命)을 망치는 우인(愚人)을 비유한다.
♣ 등영[登瀛]선비가 총애와 영광을 입은 것을 신선의 세계에 오른 것에다 비유한 것인데, 영주는 전설에 신선이 사는 산이라고 하였다. 당(唐) 무덕(武德) 4년에 태종(太宗)이 태자가 되어 궁성의 서쪽에 문학관(文學館)을 열고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등 18명을 학사(學士)로 삼고 정사를 자문하였다. 그 선발에 든 사람을 사람들이 선망(羨望)하여 등영주(登瀛洲)라고 일컬었다. 《新唐書 卷一百二 褚亮傳》
♣ 등영주[登瀛洲]영주는 당 태종(唐太宗)이 설치한 문학관(文學館) 이름으로, 여기에 임명된 두여회(杜如晦), 방현령(房玄齡) 등 이른바 ‘십팔학사(十八學士)’를 당시에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영주에 올랐다[登瀛洲]’고 일컬었던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卷102 褚亮傳》
♣ 등오정[登鼇頂]동해에 자라[鼇]가 산을 이고 있는데, 그 위에 신선이 산다 한다.
♣ 등왕각[縢王閣]당나라 문인 왕발(王㪍)이 교지령(交趾令)으로 있는 아버지 복치(福畤)를 보러 가는 길에, 꿈에 강신(江神)이 와서 말하기를, “내일 9월 9일에 남창(南昌)의 등왕각(滕王閣)을 중수(重修)한 낙성식(落成式)이 있으니 참석하여 글을 지어 이름을 내라.” 하였다. 왕발이 대답하기를, “여기서 남창까지 7백 리인데 하룻밤 사이에 당도할 수가 있읍니까.” 하니, 강신(江神)은, “배에 오르기만 하면 내가 바람을 빌려 주리라.” 하므로, 왕발은 과연 하룻밤 사이에 남창에 도착하니 홍주 자사(洪州刺史)가 등왕각에 낙성식을 크게 열고 여러 손들에게 필묵(筆墨)과 종이를 돌려 글을 짓게 하였다. 사실은 자사(刺史)가 자기의 사위를 시켜 미리 글을 지어 두고 여러 손들이 사양하기를 기다려 사위의 글을 자랑하려 하였던 것이다. 다른 손은 모두 사양하는데 왕발이 사양하지 않고 붓을 드니 자사는 불쾌하여 사람을 시켜 왕발의 글을 쓰는 대로 엿보고 와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중간에 가서, “떨어진 놀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고, 가을 물은 긴 하늘과 한 빛이다 [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 하는 구절을 쓰니, 자사가 듣고, “참으로 기이한 재주로다.” 하였다. 왕발은 끝에 다시 시(詩)를 쓰기를, “그림 그린 기둥은 아침에 남포의 구름에 날고 주렴은 저녁에 서산 비에 걷는다 [畵棟朝飛南浦雲 珠簾暮捲西山雨].” 하였다. 등왕각은 등왕(滕王)에 봉해진 당고조(唐高祖)의 아들 이원영(李元嬰)이 홍주(洪州)의 도독(都督)으로 있을 때에 세운 누각이다.
♣ 등용[登龍]후한(後漢) 환제(桓帝) 때의 명망가인 이응(李膺)의 집을 찾아가 그의 대우를 받는 것을 당시에 영광으로 알아 “용문에 올랐다.[登龍門]”고 했던 고사가 있다.
♣ 등용문[登龍門]용문(龍門)은 황하 상류에 있는 급류로, 잉어가 여기를 통과하면 용이 된다는 말이 있음. 입신출세의 관문에 오름
♣ 등우[鄧禹]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장군으로, 일찍 대공(大功)을 세우고 24세의 나이로 대사도(大司徒)가 되었었다. 《後漢畫 卷十六》
♣ 등원실목지도율[騰猿失木只掉慄]혼란한 세상을 만나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뛰어다니는 원숭이[騰猿]들이 큰 나무 위에서 걱정없이 지내다가 가시나무 사이로 떨어지게 되어서는 오직 눈치를 살피고 벌벌 떨면서[危行側視 振動悼慄] 지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莊子 山木》
♣ 등유[鄧攸]아들이 죽어 후계자가 없게 된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등유가 어린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피난 도중 모두 온전하게 살릴 수 없게 되자 아들을 버리고 조카를 구했는데, 그 뒤에 아들을 다시 얻지 못해 후사(後嗣)가 없게 되자 사람들이 “하늘도 무심하다.[天道無知]”고 탄식했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良吏傳 鄧攸》
♣ 등창[背瘡]한의학에서, 등에 나는 큰 부스럼을 일컫는 말.
♣ 등춘대[登春臺]“뭇사람들 즐거워 봄 대에 오른 듯[衆人熈熈 如登春臺].” 장자(莊子) 그 주석(注釋)에 이르기를, “봄엔 음양이 교통하고 만물이 감동하므로 대(臺)에 올라 바라보면 기분이 아주 흐뭇하다는 뜻이다.” 하였다.
♣ 등춘대[登春臺]태평 성대의 백성들은 마치 풍성한 잔치상을 받은 듯, 또는 봄에 높은 대관에 올라가 사방을 전망하듯 즐거워한다는 노자(老子)의 말에서 온 것으로, 즉 태평 성대를 비유한 말이다. 《老子 二十章》
♣ 등파[藤婆]죽부인(竹婦人)의 일종.
♣ 등하[登霞]멀리가다. 제왕(帝王)의 죽음을 말함. 하(霞)자는 하(遐)자의 뜻으로 하늘에 오른다는 뜻.
♣ 등하불명[燈下不明]등잔 아래가 어둡다. 곧 가까운 곳을 도리어 잘 모른다.
♣ 등화[燈花]등잔불 심지 끝이 타서 맺히는 꽃 모양의 불똥을 말한다. 불이 꺼지려 할 즈음에 이 등화 현상이 일어나면 조만간 기쁜 일이 있게 된다고 한다. 《本草 燈花ㆍ西京雜記 3》
♣ 등화가친[燈火可親]가을밤은 서늘하여 등불을 가까이 두고 글읽기에 좋다는 말
♣ 등후[鄧侯]등우(鄧禹)를 말한다. 등우는 한 광무제(漢光武帝)를 섬겨 천하를 평정하고 중흥(中興)의 제일공신이 되었는데, 나이 24세에 대사도(大司徒)가 되고 찬후(酇侯)로 봉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