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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9:22-26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오늘은 아버지의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야곱의 열 한번 째 아들이면서 열한 번째 축복을 받은 요셉에게 주어진 축복의 말씀을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야곱의 축복이라는 복음 성가가 있습니다.
너는 담장 넘어로 뻗은 가지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있죠?
일단 한번 들어 보고 말씀 나누겠습니다.
이 노래가 야곱이 누구에게 한 축복을 근거로 해서 만들었습니까?
요셉에게 한 축복이죠?
야곱은 요셉에게 축복할 차례가 되었을 때 힘이 났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녀들이 들어도 아버지의 억양으로 다르다 라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요셉의 열두 형제들은 그 모든 것들을 초월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입니까?
그럼에도 야곱은 자녀들에게 다 좋고 아름다운 말들만 하지 않았죠?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어떤 권면의 말들을 하여야 할지 가르쳐 주는 아름다운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야곱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성도와 같지 않은 그런 많은 모습들이 보였습니다.
집사람은 야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열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저와 여러분들 보다 월등하게 나은 것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이 아니고요 믿음과 영적인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자녀들이 많았지만 그 많은 자녀들이 다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두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한 아들은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몇 남매라고요.
13남매 그들이 다 믿음안에 섰었다.
정확한 정보는 아니지만 야곱의 딸 디나의 남편은 욥이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들 딸 두명 세명 혹은 한명이래도 믿음안에 살지 못해 그러는데 야곱은 13남매가 다 믿음안에 살도록 하였다, 저와 여러분들 보다 나은 것 같습니까?
그래도 못합니까?
그중에도 남 달리 사랑을 보였던 요셉이 하나님의 은혜로 대성한 가운데 있는 요셉을 축복하는 순간 같은 아들들이었지만 다른 감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향한 축복은 다른 자녀들을 향한 축복과 다른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아버지의 축복이라는 용어를 선택하였습니다.
아니 다른 아들들에게 한 축복은 아버지의 축복이 아니였다는 말입니까 라는 생각을 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축복이었지만 오직 요셉에게만 아버지의 축복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정말 아버지가 자식에게 주고 싶은 축복,
우리 성도님들은 자식에게 축복의 기도를 한다면 어떤 축복의 기도를 하시겠습니까?
어떤 축복의 말을 하여야 할지 모르는 우리에게 야곱은 이런 축복이 있다고 가르쳐 주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해 왔던 자녀들에 대한 축복과 다른 표현이 요셉에게 있다.
아름다운 언어의 표현은 다른 아들들에게도 있었지만 다른 아들들에게 없는 말의 표현이 둘 나옵니다. 혹 무엇인지 찾아내신 분들 있습니까?
예 복과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복과 아버지의 축복입니다.
제가 복과 축복의 의미에 대하여 여러번 말씀을 드렸죠,
믿음의 사람들은 용어 하나 하나에도 신경을 쓸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저는 이해를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과의 대화에서는 더욱 그렇게 해야 되지 않을까요?
친구들에게 사용하는 용어를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사용하는 자녀들 없죠.
그처럼 하나님과의 대화에서도 마구잡이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복은 무엇이고 축복은 무엇이라 했습니까?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축복은 우리가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용어를 하나님께 하지 말자 하나님 축복해 주세요 라는 말은 사람의 표현으로는 들어서 기분이 좋지 않은 용어라는 말씀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축복은 사람이 사람에게 하나님께는 축복해 주세요가 아니라 복을 주세요 이렇게요.
우리 성도님들 마음에 담아서 하나님과 대화를 개선해 나가게 되길 축복합니다.
야곱이 지금까지 열 아들에게 축복의 기도를 하였는데 축복과 복이라는 말을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그럼 다른 자녀들에게는 복을 빌어주지 않았나요?
우리가 나누는 창세기 49장의 총 제목이 야곱의 축복인데 말입니다.
예 창세기 49장이 다 야곱의 축복임에도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한 축복은 요셉에게 한 축복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를 하나님의 복이라는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창 49: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물론 다른 아들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하여 복을 받을 사람이 되어야 했다는 것을 야곱은 알고 그런 저주처럼 보인 그런 축복을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요셉에게 주어진 이 하나님의 복이 다른 모든 자식들이 다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축복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에게 주어진 축복은 또 하나의 장자의 축복이 되었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장자의 축복이라는 내용으로 함께 나눈 일이 있죠.
누구에 대한 축복을 나누면서 들은 말씀입니까?
예 유다를 향한 야곱의 축복을 저는 장자의 축복이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지의 장자의 축복처럼 유다에게서는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왕의 자리가 주어졌고요. 요셉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로 땅을 형제들 중에서 장자의 두 몫을 상속 받았습니다.
우리도 자녀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복이 임하길 바라십니까?
그러면 자녀들을 위하여 축복의 기도를 많이 하시길 바랍니다.
돈 많이 벌게 해 달라는 기도도 좋지만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드려야 될까요? 예 그런 기도 많이 드려지길 소망합니다.
그럼 야곱의 축복에 대하여 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샘 곁에 있는 무성한 가지에 대하여 좀 생각을 해 보려 합니다.
창 49:22-24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요셉은 무성한 가지 뭐 곁에 무성한 가지라고 합니까? 샘 곁에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무엇을 넘었다고요? 담을 넘었도다.
한편의 그림이 연상이 됩니까?
공동번역에는 이렇게 번역을 하였습니다.
“요셉은 열매가 주렁주렁한 가지, 샘가에 늘어진, 열매가 주렁주렁한 가지, 담장 너머 뻗어가는 가지라”
좀 더 아름다운 번역 같습니까?
킹제임스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요셉은 열매 맺는 포도나무 샘 곁에 있는 열매 맺는 포도나무” 이렇게요.
조그마한 옹달샘 옆에 한 그루의 포도 나무가 있고요. 담이 있는데 포도 넝쿨이 그 담을 넘어 충실한 아름다운 열매들이 달려있는 그림을 한번 그려 보시길 바랍니다.
샘 옆에 있는 포도나무는 가뭄을 타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다 샘 곁에 무성한 담을 넘는 포도 넝쿨처럼 가뭄을 모르는 믿음의 삶이 되길 축복합니다.
제정 적으로도 가뭄이 없는 하나님의 복이 함께하길 축복합니다.
건강에도 샘 곁의 나무처럼 항상 푸르른 건강의 은혜의 복이 함께하길 축복합니다.
더움 믿음의 복을 많이 받으시어 믿음의 영적 가뭄이 들지 않으시는 은혜가 함께하길 축복합니다.
요셉이 그런 복을 받은 거 같습니까?
그 다음 말씀은 이런 말씀이 있죠?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 말씀을 보니 요셉의 유년 시절이 떠올려지지 않습니까?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요셉의 형들이 그렇게 하였지만 도리어 그 형들이 요셉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다.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을 향해 적개심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그들도 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여러분들에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구원받는 은혜의 역사가 함께하길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다른 번역에는 좀 특이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새 번역입니다.
“요셉은 들망아지, 샘 곁에 있는 들 망아지, 언덕 위에 있는 들나귀다”
완전 다른 말씀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샘 곁의 포도나무를 무엇으로 번역했습니까? 망아지.
망아지가 어떤 동물입니까? 말 새끼나 나귀 새끼를 가지고 망아지라고 합니까?
뒤 절이 나귀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나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좀 비슷한 번역입니까? 완전 다른 번역입니까? 완전 다르게 느껴지죠?
왜 이런 번역이 나올까? 번역을 한 성경학자들은 많은 고심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번역한 것은 원어가 그렇게 번역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할 수 없는데 그렇게 번역했다는 말입니까?
예 그렇게 번역할 수 있는 원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번역한 번역을 옹호하는 학자들은 그 다음 말씀을 이야기를 합니다.
창 49: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포도나무를 향해 활을 쏘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들 나귀는 사람들이 잡으려고 활을 쏘지만 탐 스런 포도가 있다고 그 포도를 향해 활을 쏘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번역을 번역하시는 분들은 포도가 아니라 들 나귀로 번역하는 것이 바른 번역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앞 절들에 대하여 다른 형제들도 다 동물에 비유했는데 이곳에 요셉만을 식물에 비유한다는 것은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샘 곁에 있는 들 망아지로 번역된다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저는 포도 나무나 망아지나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를 합니다.
마른 땅에 있는 망아지가 아니라 샘 곁에 있는 망아지가 어떤 모습입니까?
시편 23편이 떠 오르지 않습니까?
시 23:1-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우리 성도님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심을 믿으시나요?
그가 우리를 푸른 풀밭 가장 기름진 초장으로 그리고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나요? 진짜요?
그거 믿으면 진짜 믿으면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진다고 저는 믿습니다.
가장 우선 순위를 어떻게 할지를 잊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시편 기자가 그렇게 하시는 이유를 그 다음 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분이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라는 말씀입니까?먼저는 나에게 평안과 행복을 주시고 그다음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인도 하신다.
사랑하는 귀하신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심을 항시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릴 풀밭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풀밭을 찾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양처럼 제 멋대로 행동하지 않으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양 이야기를 하니 또 생각나는 성경절이 있죠?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어떻게 하였다고요? 제 길로 갔다. 잘 갔다는 말씀인가요?
잘못된 길로 갔다는 말입니까? 잘못된 길로 갔다.
그래서 누가 맞았다는 말씀입니까? 우리가 잘못한 것 우리가 말 듣지 않고 다른 길로 간 것도 우리의 목자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대신 다 맞으셨다.
오늘도 맞으십니까?
예 우리가 곁 길고 가면요. 누가 대신 맞으신다고요? 예수께서
우리 성도님들 곁길로 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면서도 잘 안되죠?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양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양들은 항상 생각이 짧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멋대로 행동할 때가 많다고 합니다.
위험한 곳도 모르고 가다가 떨어지고 한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양으로 묘사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우리도 다 제 멋대로 내 생각으로 내 고집으로 살아가지만 그래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 믿음안에 진리안에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합시다 아멘
이제는 우리 모두를 양들로 표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시고요 우리 생각을 쫒아가면 벼랑이다 라고 생각하시고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는 은혜가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그 포기도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여 오늘도 저의 모든 것 주님께 내려 놓습니다. 주님 저를 인도하시어 저의 마음대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사탄은 샘 곁에 망아지로 묘사된 요셉을 잡으려고 활을 쏘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셉의 활이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어떻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그 활이 요셉으로 하여금 바로의 아들이 되게 하였다. 아멘입니까?
저는 새번역 창세기 49장 23절과 24절은 그런 의미가 있는 말씀이라고 이해를 합니.
누가 우리를 해롭게 하여도 활을 쏘아도 하나님께서 도와 주신다면 그것까지도 복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야곱의 축복에서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이웃에게서 오는 화살을 두려워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성도들을 통하여서도 화살을 맞을 때가 있죠?
그럴 때 더 깊은 상처가 되고 아파도 하나님께서 그 일 때문에 더 큰 은혜를 주실 것이라는 것을 야곱의 축복은 가르쳐 주지 않습니까?
혹 형제들로 인한 화살의 아픔이 있어도 야곱의 축복을 생각하시고 우리도 믿음으로 받아 들이고 우리 모두 힘을 내어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그 다음 야곱의 축복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49:24-25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요셉의 활이 더 큰 힘이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 합니까?
“전능자의 손을 힘 입음이라” 우리 성도님들 우리는 연약하여 말씀을 바르게 순종하지 못하여도 우릴 덮고 계시는 손은 전능자의 손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요셉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 모두를 인도하시어 가장 좋은 길로 우리 모두를 인도해 주시길 축복합니다.
그 다음 26절은 아버지의 축복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창 49:26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아버지의 축복이 할아버지의 축복보다 낫다고 하죠?
사랑하는 성도님들 자녀들에게 축복 많이 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축복을 많이 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축복이 그들의 머리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라는 야곱의 축복이 이루어진 것을 보시고 우리의 축복도 우리가 축복하는 그들의 머리로 돌아 올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으로 많이 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긍극적인 소망 우리 주님 구름타고 오시는 날 우리가 기도하였던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 우리 이웃들 함께 주님을 맞이할 수 있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