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역사 5월 18일
금남로 걷다 보면 생각난다, 민주주의여
푸른 하늘 죄 없어도 떨려오는 가슴 아래
오늘은
너에게 안부를 묻는다
머나먼 그리움의.
생각나지 않느냐, 지울 수 없는 함성들이
잊혀지지 않는구나, 떠나갔던 친구들이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난
그 인식의 죄업 끝에.
오월이 돌아오면 가슴이 떤다, 민주주의여
너는 지금 어느 땅 밑 숨죽여 누웠느냐
철쭉꽃
장미꽃 팬지꽃
모두 만발한 이 봄날에.
-이재창 시인의 「光州에 관하여 - 年代記的 몽타주 · 12」 전문, (시조시학, 1996 하반기호)
“넋이여,/망월동에 잠든 넋이여/하늘이 푸르러 눈물이 나네/산꽃 들꽃 피어나니 눈물이 나네/누가 그날을 잊었다 말하리/누가 그날을 모른다 말하리/가슴과 가슴에서 되살아나는 넋/칼바람 세월 속에 우뚝 솟은 너/진달래 온 산에 붉게 물들어/그날의 피눈물 산천에 물들어/꽃울음 가슴에 문지르는 어머니/그대 이름 호명하며 눈물이 나네/목숨 바친 역사 뒤에 자유는 남는 것/시대는 사라져도 민주꽃 만발하리/너 떠난 길 위에 통일의 바람 부니/겨레해방 봄소식 눈물이 나네” -고정희「누가 그날을 모른다 말하리」
*오늘은 5.18민주화운동기념일 ;
1980년 오늘 광주민주화운동 일어남, 7공수여단 광주시내 주요지역 진출, 전남대생 50여명 교문 앞 등교 저지에 가두시위, 공수부대 작전명 ‘화려한 휴가’
5.19 증파된 11여단 광주역 도착 시민과 투석전, 계엄군 장갑차 시민에 포위되자 발포
5.20 공수부대 만행 목격한 택시기사들 택시 200대와 버스 앞세우고 차량시위, 계엄군 밤11시 광주역 광장에서 시민에게 발포 2명 사망
5.21 도청에서 애국가 울려퍼지자 공수부대 금남로 가득 메운 시민들 향해 무차별총격 시민 다수 사망, 시민들 무장시작, 공수부대 조선대로 철수, 광주를 외부로부터 고립시키는 작전으로 변경
5.21-27 시민학생투쟁위원회, 시민군조직과 사태의 평화적 해결 위한 다각적 노력 개시
5.22 시민군 도청장악 5.18 수습대책위원회 결성
5.23 제1차 범시민궐기대회 시민 5만여명 도청광장 집회
5.25 김수환 추기경의 메시지와 광주항쟁 구호대책비 1000만원 전달
5.26 계엄군 시내 진입하려 하자 시민수습대책위원들 온몸으로 탱크 막겠다며 ‘죽음의 행진’ 나섬
5.27 계엄군 도청 접수 위한 충정작전 시작, 윤상원 등 도청에 끝까지 남았던 시민군 사망
1994.5 5.18민중항쟁연합 광주학살책임자 35명 서울지검에 고소해 법적 투쟁 시작
1995.12.21 5.18민중항쟁특별법 제정
1997.4.17 5.18 책임자에 대한 반란 및 내란죄 확정
1997.5.9 5월18일을 ‘5.18민주화운동기념일’로 정함
2002.1.26 광주민주화운동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정
2018.2.28 5.18진상규명특별법 국회통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혹은 광주민중항쟁(光州民衆抗爭)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다.
당시 광주 시민은 신군부 세력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실행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해 발생한 헌정 파괴·민주화 역행에 항거했으며, 신군부는 사전에 시위 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다. 이후 무장한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지속적인 교전이 벌어져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대한민국 내 언론 통제로 독일 제1공영방송 ARD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그 참상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1995년 자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으로 희생자에게 하는 보상 및 희생자 묘역 성역화가 이뤄졌고, 1997년에 '5.18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 1997년부터 대한민국 정부 주관 기념행사가 열렸다.[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본 사건을 "광주인민봉기(光州人民蜂起)"로 부르며 해마다 기념하고 있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대표적인 영화로 《꽃잎》, 《화려한 휴가》, 《26년》, 《택시운전사》 등이 있으며, 2011년 5월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정식으로 등재되었다
*국제 박물관의 날(International Museum Day)
*세계 에이즈 백신의 날(World AIDS Vaccine Day)
*Piedras 전투 기념일(Battle of Las Piedras Day): 우루과이
*독립기념일: 소말릴란드, 1991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나 아직 승인받지는 못함(unrecognized).
1034년 [음]덕종(德宗) 3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왕가도(王可道)가 사망함
1046년 [음]정종(靖宗) 12년, 왕이 유조를 남기고 훙서함
ㅡ왕의 병이 더욱 심하여 아우 낙랑군(樂浪君) 왕휘(王徽)를 불러 방에 들어오게 하고 임시로 나랏일을 총괄하라는 조서(詔書)를 내렸다. 조서에 이르기를,
“짐이 선왕의 유명(遺命)을 받아 역대 성인의 대업을 계승한 지 열두 해가 되었는데, 하늘의 편안함에 힘입어 나라도 안정되었다. 봄과 여름 이래로 우환과 수고로움이 조화를 잃어 약과 침[藥石]도 효과가 없더니, 마침내 병이 위급하여 왕위[神器]를 덕이 있는 자에게 넘기고자 한다. 내사령 낙랑군(內史令 樂浪君) 왕휘(王徽)는 짐의 사랑하는 아우로 인자하고 효성스럽고 공경하고 검소하여 이웃 나라에도 알려져 있으니, 마땅히 왕위[大寶]를 전하여 광명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날 왕이 훙서하여서 나이가 33세, 재위가 12년이었다. 선덕전(宣德殿)으로 빈소를 옮겼다. 왕은 너그럽고 인자하며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식견과 도량이 넓었다. 무예에 뛰어나고 과단성이 있었으며, 사소한 일에 구애되지 않았다. 시호(諡號)는 용혜(容惠), 묘호(廟號)는 정종(靖宗)이고 북교(北郊)에서 장사지냈으며, 능호(陵號)는 주릉(周陵)이다. 유사(有司)에서 왕의 유명을 받들어 능묘의 제도를 모두 검약하게 하였다. 문종(文宗) 10년(1056)에 홍효(弘孝), 인종(仁宗) 18년(1140)에 영렬(英烈), 고종(高宗) 40년(1253)에 문경(文敬)으로 시호를 더하였다.
1115년 [음]예종(睿宗) 10년, 진사시에서 부정행위가 발각됨
ㅡ조중장(趙仲璋) 등에게 명하여 진사를 선발하게 하였다. 합격한 사람의 답안[對策]이 거의 앞 사람의 것을 그대로 도용한 것이어서[蹈襲], 낙제한 사람들이 그를 고소하였다.
1281년 [음]세조(世祖)8, 원이 탐라에 금년도 세공을 면제해줌
1341년 [윤]충혜왕(후)(忠惠王(後)) 2년, 왕을 독살하려던 현효도(玄孝道)를 처형함
1343년 [음]충혜왕(후)(忠惠王(後)) 4년, 원에서 송·요·금의 역사기록을 요구함
1356년 [음]공민왕(恭愍王) 5년, 기철의 난을 진압하고 그 일당을 처형함
ㅡ대사도(大司徒) 기철(奇轍)·태감(太監) 권겸(權謙)·경양부원군(慶陽府院君) 노책(盧頙)이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당하였고 그 친당(親黨)은 모두 도주하였다. 궁성의 경계를 엄히 하였고, 정지상(鄭之祥)을 석방하여 순군제공(巡軍提控)으로 삼아 시위(侍衛)하게 하였다.
1356년 [음]공민왕(恭愍王) 5년, 정동행중서성 이문소(征東行中書省 理問所)를 폐지함
1356년 [음]공민왕(恭愍王) 5년,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격하고 쌍성 등지를 수복하게 함
ㅡ평리(評理) 인당(印璫),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강중경(姜仲卿)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사윤(司尹) 신순(辛珣)·유홍(兪洪), 전 대호군(大護軍) 최영(崔瑩), 전 부정(副正) 최부개(崔夫介)를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격하게 하였다. 또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전 대호군(大護軍) 공천보(貢天甫), 전 종부령(宗簿令) 김원봉(金元鳳)을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쌍성(雙城) 등지를 수복하게 하였다. 인당이 먼저 출발하였는데 강중경(姜仲卿)이 술에 골아 떨어졌다가 뒤늦게 와서 객기를 부렸다. 인당이 제지했으나 듣지 않자 신순에게 눈짓하여 그의 목을 베어 버린 후에 왕에게 보고하며 말하기를, “강중경이 역심(逆心)을 품었으므로 군법에 따라 처리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국가에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여 물의가 분분하였다.
1360년 [윤]공민왕(恭愍王) 9년, 왜구가 교동현(喬桐縣)을 불태움
1440년 [음]세종 22년, 경관(京官)은 반드시 지방직인 수령을 거치게 함
1441년 [음]세종 23년, 경상·충청·전라도 주민 1,600호를 함길도로 이주시키게 함
ㅡ의정부에서 아뢰기를,
"함길도는 국가의 근본이 되는 땅이오라 군민(軍民)의 생업을 소홀히 할 수 없사온데, 근자에 수어(戍禦)로 인하여 길주(吉州) 이남의 각 고을 정군(正軍) 1천 6백 호(戶)를 뽑아서 강변으로 입거시켰으니, 이로 말미암아 전택(田宅)이 비고 민호(民戶)가 감축되어 진실로 염려되옵니다. 하삼도(下三道)는 승평한 지가 오래 되어 인구가 번식하여서 심지어 해도(海道)에 이르기까지 모두 들어가 사오니, 바라건대 선군(船軍)을 제외하고는, 시위(侍衛)·영진속(營鎭屬)·한량(閑良)은 물론, 5정(丁) 이상 자산이 넉넉한 자 1천 6백 호를 선택하여 강변으로 옮긴 정군(正軍)의 숫자만큼 이사시키되, 경상도에서 6백 호, 전라도에서 5백 50호, 충청도에서 4백 50호를 옮겨다 채우게 하시고, 요역(徭役)을 면제하여 길이 생업을 이루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451년 [음]문종 1년, 진관사(津寬寺)의 수륙사(水陸社)가 준공됨
1452년 [음]단종 즉위년, 조선왕조 단종 즉위
ㅡ노산군(魯山君)이 근정문(勤政門)에서 즉위(卽位)하고, 반교(頒敎)하기를,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태조(太祖)께서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아 대동(大東)038) 을 웅거하여 차지하고, 태종(太宗)·세종(世宗)께서 선업(先業)을 빛내고 넓히어 문치(文治)로 태평에 이르고, 우리 선부왕(先父王)께서 성한 덕과 지극한 효도로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아서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하여 원대한 것을 도모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임어(臨御)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갑자기 여러 신하를 버리었으니 땅을 치고 울부짖어도 미칠 수 없어 애통이 망극하다. 돌아보건대 큰 위(位)는 오래 비워 둘 수 없어 경태(景泰) 3년039) 5월 18일에 즉위하노라. 생각건대 소자(小子)가, 때는 바야흐로 어린 나이에 외로이 상중에 있으면서 서정(庶政) 만기(萬機)040) 를 조처할 바를 알지 못하니, 조종(祖宗)의 업을 능히 담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못[淵]과 얼음을 건너는 것과도 같이 율률(慄慄)하게 염려하고 두려워한다. 모든 사무를 매양 대신에게 물어 한결같이 열성(列聖)의 헌장(憲章)에 따라서 간난(艱難)을 크게 구제하기를 바라니, 너 중외의 대소 신료(臣僚)는 각각 너의 직책을 삼가하여, 힘써 나의 정치를 보좌해서 끝이 있도록 도모하기를 생각하라. 추은(推恩)041) 의 법전과 연방(延訪)042) 하는 조목과 합당히 행할 일들을 뒤에 조목조목 열거한다.
1. 경태(景泰) 3년043) 5월 18일 새벽녘 이전부터 모반(謀反)·대역(大逆)·모반(謀叛)과, 자손(子孫)으로서 조부모(祖父母)·부모(父母)를 모살(謀殺)·구매(毆罵)한 것과, 처첩(妻妾)으로서 남편을 모살한 것과, 노비(奴婢)로서 주인을 모살한 것과, 고의로 살인(殺人)한 것과, 고독(蠱毒)·044) 염매(魘魅)045) 한 것과, 다만 강도를 범한 것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結正)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았거나, 모두 용서하여 면제한다. 감히 유지(宥旨) 이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여 말하는 자는 그 죄로써 죄 주겠다.
1. 제도(諸道) 여러 고을의 인민들이 받은 의창(義倉)의 곡식은 각각 원수(元數)에서 3분의 1을 감하여 민생을 소생시킬 것.
1. 공처(公處)의 모실(耗失)·포흠(逋欠)046) ·일체의 추징(推徵)하는 물건은 모두 다 감면할 것.
1. 옥(獄) 속의 괴로움이란 하루를 한 해같이 지낸다. 원통하고 지체됨이 있어 혹 화기(和氣)를 상할까 염려되니, 모름지기 급히 신리(申理)하고 분변하여 오래 체류(滯留)하게 하지 말고, 그 중에 마땅히 가두어 두어야 할 자도 또한 좋게 보호하여 큰 추위와 더위·장마에 병이 나서 옥중에서 죽는 일이 없게 할 것.
1. 환과 고독(鰥寡孤獨)과 독폐잔질(篤廢殘疾)은 어진 정사의 우선되는 것이니, 중외의 유사(有司)는 곡진히 존휼(存恤)을 가하여 살 곳을 잃지 말게 할 것.
1. 효자(孝子)·절부(節婦)는 중외의 유사가 실적을 명백하게 갖추어 계달(啓達)하여 정표(旌表)047) 에 빙거할 것.
1. 변방을 수비하고 농사에 힘쓰는 것을 제외하고 중외의 긴요하지 않은 공역(工役)과 일체의 부비(浮費)048) 를 모두 다 정지하여 파할 것.
1. 부역(賦役)을 평균하게 하는 것은 민정(民政)의 중요한 일인데, 모든 차역(差役)하는 관리들이 과정(科定)하기를 한결같게 하지 못하여, 호부(豪富)하고 세력 있는 자는 구차히 면하고 고과(孤寡)가 오로지 그 괴로움을 받으니 내가 심히 불쌍하게 생각한다. 이제로부터 감히 전과 같이 불공평하게 하는 자가 있으면 감사(監司)가 규찰하여 다스릴 것.
1. 농상(農桑)과 학교(學校)는 왕정(王政)의 근본이니, 소재(所在)의 수령(守令)들은 허문(虛文)을 일삼지 말고, 독려하고 권과(勸課)하여 힘써서 실효를 보게 할 것.
1. 각도의 절제사(節制使)·처치사(處置使) 및 연변(沿邊)의 진수관(鎭守官)은 힘써 병마(兵馬)를 조련(操練)하고 군사를 무휼(撫恤)하며, 항상 조심스럽게 지키도록 노력하여 일체의 방어 사무를 감히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지 말 것.
1. 감사(監司)는 법으로는 한 방면을 영솔하고 직책은 출척(黜陟)을 오로지 하니, 그 수령들이 위로하고 사랑하는 것이 방법에 어긋나고, 탐하고 방종하여 법대로 하지 않으며, 백성을 병들게 하고 다스림을 해치는 자는 거듭 규리(糾理)를 가할 것.
1. 내가 이제 어리고 학문이 성취되지 못하여 예전의 거상(居喪)하던 대로 예(禮)의 글을 읽음에 있어서, 비록 빈소 옆에 있더라도 학업을 폐하지 않고 항상 경연관(經筵官)과 더불어 함께 있으면서 상례(喪禮)를 읽고, 날마다 경연 대신과 같이 강론에 힘쓰겠다.
1. 고사(古事)의 정사가 모두 중국 서적에서 나왔는데, 하물며 내가 어리고 시위(施爲)에 어두우니 무릇 조치(措置)하는 것을 모두 정부(政府)·육조(六曹)와 더불어 의논하여 행하겠다.
1. 전에 육조에서 항상 직접 아뢰던 공사(公事)를 지금으로부터 모두 정부에 보고하여 계문(啓聞)해서 시행할 것.
1. 당상(堂上) 이상 관원과 대성(臺省) 정조(政曹)와 방어(防禦)에 긴하게 관계되는 연변(沿邊) 장수(將帥)와 수령의 제수는 모두 정부 정조(政曹)와 더불어 함께 의논하여 시행하고 그 나머지 3품 이하의 제수도 또한 모두 살피어 박의(駁議)하라. 무릇 제수에 관하여서는 내가 사사로이 가까운 자들은 쓰지 않고, 모두 공론대로 하겠다. 만일 특지(特旨)로 제수할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모든 정부 대신에게 의논하여 모두 가하다고 말한 연후에 제수하겠다.
1. 대소 과죄(科罪)는 모두 정부에 내리어 의논한 연후에 내가 마땅히 친히 결단하겠고 감히 좌우의 사사로운 청으로 가볍게 하고 중하게 하지는 않겠다.
1. 이미 이루어진 격례(格例)나, 가하다 부하다 할 것이 없는 일체의 항상 행할 수 있는 잡사(雜事)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공사는 모두 승지(承旨)로 하여금 면대하여 아뢰게 할 것이며, 그 중에서도 다시 상량(商量)하고 가부(可否)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정부 대신과 더불어 친히 의논하여 결정하겠다.
1. 승정원(承政院)은 직책으로서 출납을 맡게 되는데 관계되는 일이 가볍지 않으니, 대소 인원들은 일체 사사로운 일은 아뢰지 말 것.
1. 언로(言路)049) 가 열리고 막히는 것은 이란(理亂)050) 에 관계되는 것이니, 대간(臺諫)이 일을 말하는 것과 여러 사람이 진언(陳言)하는 것을 아울러 받아들이고 말이 비록 맞지는 않더라도 또한 마땅히 너그러이 용납하겠다.
1. 대소 신료들이 사사로이 서로 붕비(朋比)051) 하여 공사를 폐하고 사사(私事)를 영위하거나 혹 망령되이 사설(邪說)을 일으켜서 시비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공가(公家)에 이익될 것이 없고 자기에게도 손(損)이 있으니,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경계하는 것이다.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죄 주고 용서하지 않겠다.
1. 군사[兵]를 맡은 대신의 집 군사는 진퇴시키지 못하고 한결같이 《육전(六典)》에 의할 것이며, 어기는 자는 헌사(憲司)가 규리(糾理)할 것.
1. 이조(吏曹)·병조(兵曹)의 집정가(執政家)에 분경(奔競)052) 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이미 나타난 법령이 있지마는, 다만 서무(庶務)를 헤아려 의논하는 정부의 대신 및 귀근(貴近) 각처에서는 분경을 금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무뢰(無賴)·한잡(閑雜)의 무리들이 사사로이 서로 가서 뵈옵는 폐단이 진실로 다단(多端)하니, 이제부터 이후로는 한결같이 집정가들의 분경하는 예에 의하여 시행하고 공사로 인하여 진퇴하는 것과 출사하는 자는 이 한계에 두지 않을 것.
1. 상례(常例)를 제외하고 무릇 특사할 일이 있으면 비록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정부에 의논한 뒤에 행할 것.
1. 대저 기교(奇巧)·완호(玩好)에 관계되는 물건은 진상하지 말고, 대소 신료가 식(式)에 의해 사은(謝恩)·하직(下直)·복명(復命)·문안(問安)하는 등의 일 외에 사사로운 일로 대궐에 나와 인연(因緣)으로 계달(啓達)하는 자는 반드시 유사에 붙이고 혹시라도 용서하지 말 것.
아아! 새로 천명을 받아 특별히 비상한 은혜에 젖었으니, 길이 기쁨을 누릴 것이며 무강한 복을 넓히기 바라노라."
하였다. 처음에 제수하는 조목을 의논할 때에 겸판이조(兼判吏曹) 허후(許詡)는 3품 이하를 모두 정부로 하여금 의논하여 정하려고 하였으나,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계전(李季甸)과 예문 제학(藝文提學) 정창손(鄭昌孫)이 반박하였다. 이날에 위사(衛士)와 백관들은 모두 소리 없이 울었고 세조(世祖)가 가장 비통해 하였다. 이용(李瑢)은 승하한 뒤로부터 매양 대궐 뜰에 들어오면 기뻐하는 것이 얼굴빛에 나타났다. 상제(喪祭)에 곡림할 때 세조께서 애통함이 지성에서 나오니 조신(朝臣)들로 바라보는 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용만은 한 번도 참여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이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세조가 사저(私邸)로 물러나와 자성 왕비(慈聖王妃)와 더불어 서로 대하고 울어서 비통함이 지나쳐 기운이 막히니 약을 먹고 풀기까지 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대행(大行)의 은덕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으랴. 내마음을 다하기를 원할 뿐이다. 대행이 천성이 어질고 효도하여 사람들에게 대하여 신의가 두터워서 가볍게 절물(絶物)을 하지 않았다. 세종의 상사 때 졸곡 후에 내가 본래 일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반드시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하여 항상 와서 시선(侍膳)할 것을 명하였고, 또 나더러 정대하고 충성하고 지식이 다른 사람보다 다르다 하여 항상 더불어 일을 논하였다. 일찍이 진법(陣法)을 만들었는데 말씀하기를, ‘이정(李靖)·제갈량(諸葛亮)인들 어찌 수양(首陽) 보다 나을까?’ 하였다. 또 일찍이 내궁에서 칭찬하기를, ‘수양은 비상한 사람이야.’ 하였다. 대저 형제간에 우애하는 마음이 천성에서 나왔으니, 우리 형제가 이로써 감격하여 울기를 끝없이 하였다."
하였다. 대행왕께서 병환이 위독하자 좌우에 말하기를,
"수양이 보고 싶다."
하였으나, 좌우에서 그릇 숙의(淑儀)로 알아듣고 마침내 부르지 않았는데, 대개 후사를 부탁하고자 함이었다.
[註 038]대동(大東) : 우리 나라를 말함.
[註 039]경태(景泰) 3년 : 1452 단종 즉위년.
[註 040]만기(萬機) : 임금이 보살피는 여러 가지 정무.
[註 041]추은(推恩) : 은혜를 미치게함.
[註 042]연방(延訪) : 두루 방문하여 조사함.
[註 043]경태(景泰) 3년 : 1452 단종 즉위년.
[註 044]고독(蠱毒)· : 뱀·지네·두꺼비 등의 독(毒)을 먹여서 배앓이·가슴앓이·토혈(吐血)·하혈(下血)·부종(浮腫) 등의 증세를 일으키게 하여 사람을 해치던 일.
[註 045]염매(魘魅) : 방술(方術)을 써서 사람을 고의로 해치던 일.
[註 046]포흠(逋欠) : 관청의 물건을 사사로이 써버림.
[註 047]정표(旌表) : 선행을 칭찬하고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알림.
[註 048]부비(浮費) : 어떤 일에 드는 비용.
[註 049]언로(言路) : 신하가 임금에게 진언할 수 있는 길.
[註 050]이란(理亂) : 다스리는 일과 어지럽게 하는 일.
[註 051]붕비(朋比) : 붕당을 이루어 자기편을 두둔함.
[註 052]분경(奔競) : 조선 때 관리들이 엽관 운동(獵官運動)을 하기 위하여 권문 세가(權門勢家)를 찾아 다니는 것을 말함.
1497년 [음]연산 3년, 창덕궁 밖 100자 안의 민가를 철거하도록 함
1503년 [음]연산 9년, 연철(鉛鐵)로 은을 불리는 법을 개발함
1504년 [음]연산 10년, 성균관과 사학 유생들이 국정을 논하는 것을 금함
1517년 [음]중종 12년, 유담년(柳耼年)이 우참찬, 최숙생(崔淑生)이 대사헌이 됨
ㅡ유담년(柳耼年)을 우참찬으로, 황형을 공조 판서로, 이유청(李惟淸)을 형조 판서로, 최숙생(崔淑生)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허굉(許硡)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유관(柳灌)을 집의로, 공서린(孔瑞麟)을 홍문관 응교로, 한충(韓忠)을 지평으로, 민수원(閔壽元)을 사간원 헌납으로, 이청(李淸)·윤자임(尹自任)을 홍문관 교리로, 황효헌(黃孝獻)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황형(黃衡)은 성종조(成宗朝)에 친병(親病)으로 정사(呈辭)하고서는 기생집에 오래 있다가 선전관(宣傳官)을 파직당한 일이 있고, 임금이 즉위한 뒤에는 경상좌도 절도사가 되었으나 탐욕이 이를 데 없어 파직을 당하였다. 또 이유청은 번다한 서무를 처결하는 재간은 남보다 나은 점이 없는 듯하지마는, 그러나 추호도 범하는 일이 없고 일을 볼 때 사곡(邪曲)하게 하지 않았다.
1556년 [음]명종 11년, 이황(李滉)이 홍문관 부제학이 됨
1567년 조선의 최초 부대부인, 하동부대부인 정씨 작고.
1604년 [음]선조 37년, 평양부에서 《효경대의(孝經大義)》를 간행함
1664년 [음]현종 5년, 장악원(掌樂院)의 악생(樂生)에게 보인(保人)을 배정하여 주게 함
1702년 [음]숙종 28년, 서울 근교의 산에서 3일 동안 송충(松蟲) 3,972석(石)을 잡음
1726년 [음]영조 2년, 대사헌 권변(權變) 죽음
1733년 [음]영조 9년, 남편의 신주(神主)를 지키려다 죽은 자에게 정문(㫌門)을 내려 줌
ㅡ황해도 해주 교생(海州校生) 간철석(簡哲碩)의 처(妻) 이씨(李氏)의 정문(旌門)을 세우라 명하였다. 이씨는 나이 75세로 잘못하여 집에 불이 났는데 불속으로 갑자기 뛰어 들어가 그 지아비의 신주(神主)를 껴안고 죽었다. 도신(道臣)의 장문(狀聞)으로 특별히 정포(旌褒)하라 명한 것이다.
1733년 [음]영조 9년, 남원 괘서(掛書) 사건 죄인들을 의금부 도사를 보내 압송하게 함
ㅡ금오 당상(金吾堂上) 송인명(宋寅明) 등이 구대(求對)하여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보내 호남(湖南)의 죄인을 붙잡아 올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전라 감사 조현명(趙顯命)이 남원(南原)에 괘서(掛書)한 죄인 이위(李葳)·최두징(崔斗徵)·김윤귀(金潤龜)·길희징(吉喜徵) 등 네 사람을 포박하여 용안 현감(龍安縣監) 윤우주(尹遇周)로 하여금 압송(押送)케 한다는 일을 장계(狀啓)로 주달했기 때문이었다.
1738년 [음]영조 14년, 을사년(1725년) 이후 창설된 서원은 철폐하게 함
1743년 [음]영조 19년, 큰 비가 내려 태묘(太廟)에 보사제(報謝祭)를 거행하게 함
1817년 [음]순조 17년, 호군(護軍) 김이재(金履載)가 환상곡[還上穀]과 저치미(儲置米)의 폐단에 대해 상소함
ㅡ행 호군 김이재(金履載)가 상소하기를,
"신은 작년부터 주사(籌司)066) 의 유사(有司) 직책을 맡아 왔습니다. 큰 계책을 품재(稟裁)하여 처리하는 일은 비록 모두 대신(大臣)과 여러 당상의 손에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문첩(文牒)의 봉행(奉行)과 부적(簿籍)의 점검은 실로 신의 소임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조략하나마 대충 짐작하고 파악한 바가 있는데, 대관절 폐단이 없는 일이 없고 폐단치고 극도에 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지금 그 백공 천창(百孔千瘡)이 겹쳐 일어나고 층층이 나타나서 참으로 한꺼번에 다 거론할 수는 없으나, 그 중에서 가장 시급하여 당장 고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환자곡[還上穀]과 저치미(儲置米)에 대한 일입니다. 신이 근일에 강도(江都)의 군향(軍餉)을 보니, 총계 16만 석(石)이나 되던 것이 일조에 탕진되었고, 관서(關西)의 향곡(餉穀)도 40여만 석이나 되던 것이 십수년 동안에 바닥이 났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을 따져 보면, 비단 각처의 이획미(移劃米)와 근년의 정봉(停捧)과 재감(災減)에 의해서만이 아니고, 이는 오로지 모곡(耗穀)067) 을 가지고 경비를 쓰는데, 수용(需用)은 날로 늘어나고 모곡이 지급되지 않으면 그저 현재 있는 대로 가져다 쓰면서 본곡(本穀)이 남고 모자람을 살피지도 아니하므로, 마침내 해마다 잘리고 줄어들어 필경에는 하나도 남음이 없게 된 뒤에라야 비로소 더 달라고 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작년 겨울 두 곳에 나누어 공급하는 것도 백배나 더 어려워, 동쪽에서 끌어다가 서쪽을 보충하여 겨우겨우 끝을 맺었으니, 비유하자면 병자(病者)의 원기가 다하여 아무리 약을 쓰고 치료하려고 해도 손을 쓰기 어려운 것과 같았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다른 것은 가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諸道)의 곡부(穀簿)를 시험삼아 점검하여 그 대략을 파악해 보니, 각양(各樣)의 곡물 원총(元摠)이 가는 곳마다 점차 줄어들어 옛날에는 여유가 있던 곳이 지금에는 겨우 유지할 정도이고, 옛날에 겨우 유지하던 곳은 이제 잘리고 줄어들었습니다.
이를테면 영남(嶺南)의 사군목(射軍木) 대미(代米)는 균역청(均役廳)에서 연례로 작전(作錢)하는 것이 쌀로 4백 석이나 되었으나, 병자년068) 에는 본곡(本穀)으로 남아 있는 총계가 1백여 석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년부터는 이 곡식마저 없어져버릴 것입니다. 관동(關東)의 월과곡(月課穀)도 연례로 작전하여 의승(義僧)의 급대(給代)와 군기(軍器)의 가본(價本)069) 으로 쓰는 것이 절미(折米)로 4백여 석이나 되었는데, 본곡의 병자년 마감(磨勘) 총계는 5백여 석이니 명년 안으로 이 곡식도 없어질 것입니다. 관서에서 관리하는 영미(營米)는 그 영(營)에서 연례로 작전하는 것이 2천 석이 되었는데, 본곡의 병자년 마감 총계는 2천 5백여 석으로, 반분모(半分耗)070) 가 부족하여 원곡에서 잘라 쓴 것이 이미 4백 50석이니, 5년 후에는 이 곡물도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첩별비곡(帖別備穀)071) 을 상정미(詳定米)072) 의 부족에 급대한 것이 1년이면 절미 3천여 석이 못되지는 않은데, 원곡의 병자년 마감 총계가 1만 6천여 석에, 분모(分耗)가 부족하여 원곡에서 잘라 쓴 것이 이미 2천 3백여 석이니, 6년 후에는 이 곡물도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관서 감영의 저류미(儲留米) 가운데 각진(各鎭) 화세(火稅)073) 의 급대와 강계(江界)의 인삼 값을 보태 주는 데에 쓴 것이 매년 8백 40석이나 되는데, 원곡의 병자년 마감 총계 4천여 석에 진분모(盡分耗)074) 가 부족하여 원곡에서 잘라 쓴 것이 이미 4백 석이나 되니, 7년 내에 이 곡물도 없어질 것입니다. 당아성(當峨城)의 곡물 가운데 성첩(城堞) 보수와 성(城)에 딸린 인원의 급료에 쓰고, 이와 더불어 훈련 도감에서 연례로 작전한 것이 절미 1천 2백 18석인데, 본곡의 병자년 마감 총계가 1만 4백 6석에 응당 유치(留置)해야 할 분모(分耗)가 부족하여 원곡에서 잘라 쓴 것이 이미 4백 70여 석이니, 9년 후에는 이 곡물도 없어질 것입니다. 환은미(換銀米)도 연례로 작전하여 천은(天銀)075) 1천 냥을 사서 내탕고(內帑庫)에 상납하느라고 1천 석이 들었는데, 본곡의 병자년 마감 총계가 9천 2백 80석에 진분모가 부족하여 원곡을 잘라 쓴 것이 이미 70여 석이고, 영남의 우병영(右兵營) 별향미(別餉米)도 본 병영에서 조치하여 작전한 것이 매년 8백 석이 되는데 원곡의 병자년 마감 총계가 6천 5백 70석에 진분모가 모자라서 원곡을 잘라 쓴 것이 이미 1백 40여 석이며, 호남의 순영미(巡營米)도 매년 급료를 지불하는 데에 쓴 것이 1만 1천 2백여 석인데 원곡의 병자년 마감 총계가 10만 3천 석에 진분모가 부족하여 원곡을 잘라 쓴 것이 이미 9백여 석입니다.
환은미(換銀米) 이하 세 가지 곡물은 그 본곡에서 잘라 쓴 분량을 비교하자면, 비록 반드시 10년 내에 다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점차 축이 나서 필경엔 이 곡물도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또 광주(廣州) 소관(所管)의 곡물 가운데 관서와 호서에 있는 것이 본래 1만 1천여 석이 되는데, 기사년076) 이후 연달아 정봉(停捧)과 재감(災減)을 당하여 모조(耗條)까지 감축됨으로써 원곡을 잘라 쓴 것이 2천 89석이니, 이 때문에 모조가 부족했던 병자년에 급대한 것이 4백 6석이었습니다. 화성(華城) 소관의 곡물 가운데 양서(兩西)077) 와 양남(兩南)078) 에 있는 것도 본래 3만 1천여 석이었는데, 각년의 정미봉(停未捧)과 임신년079) 에 양남에 있는 곡물로 왜학(倭學)의 무삼가(貿蔘價)를 급대함으로써 결축(缺縮)된 것이 1만 9천 2백 석이나 되고 모조의 부족도 1천 9백여 석이나 되니, 비록 연전에 떼어 준 호남의 가분모(加分耗) 5백 석을 제한다 하더라도 여타로 급대한 것이 오히려 1천 4백여 석이나 됩니다. 이 급한 1천 8백 석의 두 곡물로써 지금의 수용으로 삼아 보고가 들어오는 대로 떼어 주기 때문에 아직은 원곡을 다시 잘라 쓸 일을 면하고 있으나, 기실은 해마다 변통하여 주었기 때문에 앞으로 다른 곡물이 이 때문에 잘리어 바닥이 날 것입니다. 이 밖에도 이와 같은 결축처럼, 곳에 따라 보전(補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루 다 셀 수 없습니다. 또 호조의 원회(元會)080) 및 원회처럼 통용되는 곡물과 진휼청의 상진(常賑)081) 및 상진처럼 통용되는 곡물을 방출하고 유치하며 취모(取耗)082) 하는 것을 각각 그 규례에 따르되, 차차 회록(會錄)에 보태어 매년 시재(時在)의 실수(實數)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각도(各道)의 소용을 10년을 소급(遡及)하여 다(多)·중(中)·소(小) 3등급으로 나누고 절충하여 매년 지출의 대솔(大率)083) 로 삼으면, 경기(京畿)의 원회(元會)와 별회(別會)의 시재 실수 중에서 가하(加下)084) 3천 4백 50여 석을 제하면 1만 1천 3백여 석이 되는데, 지출의 대솔이 1천 4백여 석이 되니 원곡을 잘라 쓴 것이 이미 7백여 석이 됩니다. 상진(常賑)의 시재 실수 중에서 가하(加下) 5천 7백여 석을 제하면 1만 7천 8백 30여 석이 되는데 지출의 대율은 3천여 석이니 7년 내에 원곡이 다하게 됩니다. 호서(湖西)의 원회와 별회의 제곡(諸穀)은 시재 실수가 1만 1천 3백여 석인데 지출의 대솔이 1천 9백여 석이 되니 9년 내에 원곡이 다하게 됩니다. 상진의 시재 실수는 1만 5천 1백 70여 석인데 지출의 대솔이 9천 6백여 석이니, 명년 내에 원곡이 다하게 됩니다. 호남(湖南)의 원회 시재 실수는 4천 석인데 지출의 대솔이 1천 8백여 석이고 가하(加下)가 2만 7백여 석이니, 원곡이 다한 지 이미 오래 되며, 상진(常賑)의 시재 실수는 10만 5천 9백 80여 석인데 지출의 대솔이 1만 5천여 석이니, 9년 내에 원곡이 다하게 됩니다. 영남(嶺南)의 원회 시재 실수는 6만 4천 7백여 석인데 지출의 대솔이 6천 6백여 석이니 10년 내에 원곡이 다하게 되며, 상진은 시재 실수가 8만 7천 1백여 석인데 지출의 대솔이 1만 2천 7백여 석이니, 8년 내에 원곡이 다하게 됩니다. 해서(海西)의 원회와 군향의 시재 실수 중에서 가하(加下) 2천 6백여 석을 제하면 2천 4백여 석이 되는데 지출의 대솔이 1천여 석이니, 명년 뒤에는 원곡이 다하게 되며, 상진의 시재 실수 중에서 가하(加下) 1천 5백 30석을 제하면 1만 2천 8백 20여 석이 되는데, 지출의 대솔은 2천 1백여 석이 되니, 7년 내에 원곡이 다하게 됩니다. 관동(關東)의 원회와 별회의 시재 실수는 2만 3천 2백여 석인데 지출의 대솔이 1천 7백여 석이니, 원곡을 잘라 쓴 것이 이미 7백여 석이고, 상진의 시재 실수가 3천 70여 석인데 지출의 대솔이 2천 6백여 석이니, 명년 내에 원곡이 다하게 됩니다. 관서(關西)와 관북(關北) 양도(兩道)의 원회와 상진의 현재 있는 숫자와 용하(用下)는 사실 걸맞지 않은 바가 있지만, 수세미(收稅米)를 해마다 회록하고 작년 겨울에 각양 곡물과 더불어 구획·첨보(添補)하여 통틀어 함께 용하한 것이 있기 때문에 목전의 지급을 겨우 충당할 수 있었으나, 혹 항구적이 아닌 용도(用途)가 있기 때문에 그곳 역시 원곡을 잘라 써야 할 걱정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상의 제반 곡물 중, 어느 것인들 경용(經用)의 필수적인 것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만, 원회와 상진에 있어서는 바로 사직과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수용(需用)과 상격(賞格)·휼전(恤典)·지공(支供)085) ·늠료(廩料)086) 의 재원이 되느니만치, 이것이 없으면 나라의 구실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대체로 금년의 마감 총계를 가지고 말씀드린 것이라서 금년이 지나면 감축됨이 또 판이하게 될 것이니, 지금의 사세(事勢)로 비록 인순(因循)·고식(姑息)하고자 하더라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령 원회와 상진 이외의 제반 곡물로써 계산하더라도, 만일 그 원총곡을 보충하고 모곡을 넉넉히 하여 원곡을 모두 잘라 쓰는 염려가 없게 하고 급대의 폐단을 없게 하고자 하려면, 모름지기 절미 9만 석이 있어야만 비로소 배비(排比)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종전에 이른바 조처했다는 것은 회록곡(會錄穀)의 이획(移劃)과 유고조(留庫條)의 가분(加分)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고조로 말하자면, 각 영읍(營邑)에서 구폐(扶弊)하고 급대하기 위하여 매년 으레 가분(加分)하는 것이 이미 정례가 되어 그것만도 80만여 석이 되기 때문에, 환곡을 나누어 준 뒤에 산성(山城)의 유고 군향(留庫軍餉)을 제외하면 각 고을의 창고는 거의 다 비게 되어 비축의 허술함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다시 가분에 대하여 생각할 수나 있겠습니까? 회록곡으로 말하자면, 각 아문(衙門)의 모조(耗條)를 처음에는 비록 모두 회록(會錄)하였으나 결국에는 지출로 돌려지고 실제로 총계에 보태진 것은 많지 않은데, 그나마 각처에 흩어져 있고 수량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까탈스러워 옮기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현재 관서의 향곡(餉穀)을 마저 보충해 주지 못한 것도 오히려 다 조처하지 못하였으니, 절미(折米) 9만 석을 어디에다 손을 써서 조판(措辦)하겠습니까? 이것만 가지고도 이미 대단히 군색한데, 더구나 원회와 상진의 그 많은 부족량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종전에는 원회곡과 상진곡을 혹 서로 융통하여 보충해 주기도 하고 만일 양쪽이 다 부족하면 향곡을 잘라서 보태어 주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축이 나지 않은 곡물이 없어 서로 도와주기를 바랄 수도 없으니, 모름지기 소관하는 각사(各司)에서 별도로 기획하는 방책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조운(漕運)한 곡물의 상당량을 유고(留庫)할 길이 없을 뿐더러 분모(分耗)와 작전(作錢)을 다 중지할 수도 없으니, 그저 모자라는 대로 바로 마련하여 즉시 지용(支用)하는 것만이 구차하나마 목전의 급함을 지탱해 나가는 길이 되겠으나, 옥초(沃焦)087) 의 누수를 막자 해도 그 비용에 한계가 없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기초를 세워 영구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면, 두 곡물의 매년 수용을 계산하여 모름지기 원곡이 부족한 절미 30여만 석을 마련하여 전량을 나누어주고 모조(耗條)를 받아야만 비로소 알맞게 되겠지만, 지금의 국계(國計)를 헤아려 보면 실로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가에서 환자곡의 제도를 설치한 것은 본래 병란(兵亂)과 재황(災荒)에 대비하기 위함이고, 환자곡을 풀고 거두는 과정에 모곡이 있게 된 것은 그 흠축(欠縮)을 보충하기 위함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제도를 창설한 이래로 수량이 불었으면 불었지 줄지는 말았어야 하는데, 한번 대농(大農)의 경비가 점점 커지면서부터는 해마다 실어다가 붙여도 넉넉치 못하자, 환자곡의 모조(耗條)에 힘을 빌기 시작한 준례가 길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안팎의 지용(支用)을 일체 여기에 의지하여 마련하고 있기 때문에 모곡이 부족하면 또 원곡까지 잘라 쓰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이른바 ‘가죽[皮]이 없으면 털도 붙을 데가 없다.’는 말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강도(江都)를 밖에 있는 부고(府庫)처럼 여겼는데, 강도의 부고가 고갈되자 다음에는 양서(兩西)에서 가져다 마련하였고, 양서가 바닥나자 이제는 또 삼남(三南)으로 돌렸으나, 삼남도 이제는 이미 지탱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연전부터의 거듭된 흉황으로 연해(沿海) 지방은 발가벗은 땅이 되었고, 죽거나 유리(流離)된 집에 쌓인 포흠(逋欠)은 산과 같은데, 영읍(營邑)에서 견감(蠲減)을 청해도 위에서는 못들은 체하여 왔습니다. 근래에 다소 풍년이 들어 곡물은 천하고 돈은 귀해졌는데, 가난한 백성들은 민역(民役)을 뽑아 내느라고 집을 팔아 파산되었으며, 경외(京外)에서는 작전(作錢)을 더하여 백성의 살을 깎아 뼈에까지 미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어찌 백성들의 처지가 매우 가긍(可矜)하며 방본(邦本)088) 이 두려울 만한 존재임을 몰라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경용(經用)이 급하다 보니, 그 이외의 일은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오늘날 안팎의 비축은 일시에 고갈되고 황급한 형세가 실로 위에서 나열한 바와 같으나, 1년의 경비를 계산하면 오히려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메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례를 상고하여 전의 수용이 줄어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에 따라 새로운 지출만 자꾸 생기자 사람들이 모두 걱정스러운 일인 줄 알면서도 억제할 줄을 모르니, 전(傳)에 이른바, ‘절제(節制)하는 정사(政事)가 없으면 재용(財用)이 부족하다.’라고 한 말은 바로 이를 이르는 말입니다. 때문에 성인이 정사를 말함에는,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백성을 아껴야 한다.’라고만 말한 데 불과하였으며, 지자(智者)가 나라를 위하여 도모함에는 또한 ‘재용에는 정도가 있고, 취함에는 절제가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 데 불과하였습니다. 지금 해야 할 도리는 오직 먼저 경비부터 재감(裁減)하여야 하는데, 그런 연후에야 다급한 국계(國計)가 다소나마 펴지게 되고 살아남은 백성들도 보전할 수 있을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참으로 백성과 나라가 어느 지경에 이를런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경비를 맡은 관사(官司)는 호조와 선혜청이고 그 다음은 병조(兵曹)와 군문(軍門)입니다. 그런데 무릇 한 해의 용도(用度)에서 무엇이 남고 모자라는지, 무엇이 급하고 덜 급한지, 무엇을 살리고 없애야 하는지는 오직 호조와 선혜청만이 작량(酌量)할 수 있습니다. 만일 거리끼는 데에 구애하지 않고 집안 살림을 하듯 힘쓰게 한다면, 그중에 어찌 일정한 한도 내에서 헤아려 잘못된 것을 고치고 과람한 것을 없앨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어공(御供)의 막중함에 대해서는 각사(各司)에서 감히 말할 바가 아니나, 이 또한 성상께서 유지(諭旨)를 분명하게 내려 절약하는 뜻을 보이신다면, 오늘날의 대신(大臣)은 바로 옛날 태재(太宰)의 직책인만큼 구식(九式)089) 으로 고루 절감할 수 있을 터이니, 참으로 지금부터 시작할 일입니다. 대신(大臣)이 호조 및 선혜청의 여러 신화들과 더불어 회동하여 강구하고 전심 전력하여 아침에 한 일을 검토하여 정당하게 하고, 저녁에 한 일을 모색하여 확실하게 하며, 일이 불필요하면 그치고 비용에 허비(虛費)가 있으면 감손하며, 관(官)에 긴요하지 않은 자리가 있으면 도태(淘汰)하고 군병(軍兵)에 쓸 데 없는 것이 있으면 버려서, 기어코 금년 내에 개혁하고 결말을 지어 안으로는 경사(京司)에서 밖으로는 영곤(營閫)090) 에 이르기까지 모든 급하지 않은 사무나 절제없는 지출은 일체를 감축하게 한다면, 3년에 1년의 비축이 남는 것까지는 바랄 수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1년의 수입으로 족히 1년의 지출을 감당하여 다시는 환자곡이나 저치미에서 가져다가 꾸려나가는 일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야 환자곡과 군향곡을 막론하고 원곡과 모조도 각각 제자리를 잡아 모두 여유가 있게 될 것이며, 원회곡(元會穀)과 상진곡(常賑穀) 같은 것도 비로소 서로 변통되어 목전의 쓰임에 보탬이 될 것이며, 머물러 두었다가 식리(殖利)하여 후일의 계용(繼用)이 될 수도 있으며, 두 곡물 이외의 곡물도 차례로 손을 써서 하나씩하나씩 정돈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그 큰 것을 먼저 구제하지 않고 좀스럽고 작은 것에 힘쓰다 보면, 아무리 심력을 다하여 조처한다 하더라도 장차 기울어질수록 그것을 받치는 것은 더욱 커지고, 무너질수록 그 보충은 더욱 많아지게 되어, 결국엔 받치지도 못하고 보충도 못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자고로 국가의 승평(昇平)이 오래되면차차 폐단이 생기게 되고 점점 침체되어 마침내 다시는 떨치지 못하게 되는 법이니, 어찌 일찍이 인순(因循)과 고식(姑息)이 병통이 되는 데서 연유하지 않았을 때가 있었습니까? 가령 수십년 전에 조처하려고 했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이 고갈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일전의 실수를 어떻게 오늘날 다시 되풀이할 수 있으며, 오늘날의 뉘우침을 어떻게 후일로 다시 물려 줄 수 있겠습니까? 신은 혹여 지금에 또다시 실수하면 그 실수는 구제될 수 없게 되고, 지난 뒤에 후회하면 그 후회 또한 이를 데 없을 것이 걱정되니, 삼가 재처(裁處)하시기를 원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사연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8책 116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병참(兵站) / 재정-국용(國用) / 재정-창고(倉庫) / 금융-화폐(貨幣) / 구휼(救恤)
[註 066]주사(籌司) : 비변사(備邊司).
[註 067]모곡(耗穀) : 각 고을 창고(倉庫)에 저장한 양곡(糧穀)을 봄에 백성에게 대여했다가, 추수(秋收) 후 받아들일 때 말[斗]이 축나거나 창고에서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하여 10분의 1을 첨가하여 받는 곡식.
[註 068]병자년 : 1816 순조 16년.
[註 069]가본(價本) : 밑천.
[註 070]반분모(半分耗) : 반절을 분급하여 얻어진 모곡.
[註 071]첩별비곡(帖別備穀) : 공명첩(空名帖)으로 별도 조비한 곡물.
[註 072]상정미(詳定米) : 상정법(詳定法)에 의하여 징수하던 쌀. 각 지방의 사정으로 인하여 일률적으로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기 어려우므로 어느 지방에 대해서는 특별히 세율을 상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쌀을 징수하였는데, 이를 상정법이라고 하였음. 광해 초년에 경기에 실시하여 토질의 상·중·하를 막론하고 농지 1결(結)에 춘추로 쌀 8두씩을 징수하였고, 영조 30년에는 강원도에 실시하여 매 결에 쌀 12두를 징수하였으며, 동 34년에는 황해도에 실시하여 매 결에 쌀 12두씩을 징수하였음.
[註 073]화세(火稅) : 화전세(火田稅).
[註 074]진분모(盡分耗) : 전부를 분급하여 얻어진 모곡.
[註 075]천은(天銀) : 상질(上質)의 은.
[註 076]기사년 : 1809 순조 9년.
[註 077]양서(兩西) : 황해도와 평안도.
[註 078]양남(兩南) : 전라도와 경상도.
[註 079]임신년 : 1812 순조 12년.
[註 080]원회(元會) : 원회부곡(元會付穀)의 약칭.
[註 081]상진(常賑) : 정상적인 진휼용 곡물.
[註 082]취모(取耗) : 모곡을 받음.
[註 083]대솔(大率) : 대략적인 수량·대출.
[註 084]가하(加下) : 초과 지출.
[註 085]지공(支供) : 접대.
[註 086]늠료(廩料) : 봉록(俸祿).
[註 087]옥초(沃焦) : 불경(佛經)에서 나온 말로, 큰 바다 밑에 물을 빨아들이는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아래는 아비 지옥(阿鼻地獄)이 있어 그 화기(火氣) 때문에 바위가 항상 펄펄 끓어 아무리 물을 부어도 식지 않는다고 함.
[註 088]방본(邦本) : 백성.
[註 089]구식(九式) : 아홉 가지의 절약할 수 있는 의식 비용, 첫째 제사 비용, 둘째 손님 접대 비용, 셋째 상례(喪禮) 비용, 넷째 의복 비용, 다섯째 공사(工事) 비용, 여섯째 폐백 비용, 일곱째 말을 먹이는 비용, 여덟째 신하에게 나누어 주는 비용, 아홉째 궁인(宮人)들에게 주는 비용.
[註 090]영곤(營閫) : 감영(監營)과 병영(兵營).
1866년 [음]프랑스 신부 리델과 교도 10여 명, 천주교 병인박해를 피해 국외로 탈출
1866년 조선의 가톨릭 순교자 손자선 작고.
1879년 [음]일본과 〈관세율〉 제정, 일본 화폐 통용, 등대 설치 등 허가
1904년 러일전쟁 직후 주러 공사관 철폐, 이범진 공사 소환
1904년 정부, 러시아와 체결했던 모든 조약과 협정 폐기를 선언.
1904년 대한민국의 시인 이육사 출생.
1908년 내부, 〈공립신보〉·〈대동공보〉·〈합성신보〉·〈해조신문〉 반포 금지, 압수
1915년 시인 서정주 출생
1924년 통의부 의용군, 국경을 시찰중인 조선총독 습격
1927년 제1회 연희전문대-경기의전 정기야구전 열림
1942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임시정부 광복군에 편입
1943년 조선용 목재수급으로 태백산 남벌 개시
1943년 대한민국의 소설가 서영은 출생.
1946년 조선공산당 본부 수색, 해방일보 정간 처분, 정판사 폐쇄
1948년 소설가 이문열 출생
1949년 대한민국의 경희대학교가 개교
1954년 한·미군사회담 열고 한국군 증강문제 등을 토의
1956년 전국에 비상경계
1961년 장면 내각 총사퇴. 혁명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 혁명내각 조직(내각수반에 장도영 의장 겸임)
1961년 군사혁명위원회 이름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고침.
1961년 치안국 전국에서 폭력배 1,500여명 검거
1961년 육군사관학교 생도들, 5·16 군사 정변 지지 시가 행진
1961년 군사정변 주도세력, 혁신계 3,300여 명과 조용수 등 『민족일보』 관계자 체포
1963년 최초의 서양의학의사 오긍선 세상떠남
1964년 KBS 라디오, 〈김삿갓 북한 방랑기〉 첫 방송
1968년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 한국방문
1968년 경상북도 안동시 문화극장 앞에서 육군 신영식 하사 수류탄 투척 사건이 발생
1970년 한국-캄보디아, 국교수립
1970년 사학자 이홍직 세상떠남
1970년 충남 금산에 우리 나라 최초의 위성 통신 지구국 세움, 첫 중계 실시
ㅡ체신부의 위성통신 금산 지구국이 1970년 5월 18일 오전, 일본 오사카 엑스포 한국의 날 기념식 실황을 TV중계로 성공, 한국통신도 위성시대에 접어들었다. 6월 2일 개국을 앞두고 이날 문공부 요청으로 조심스럽게 중계방송을 한 지구국의 기능은 거의 완전했고, TV에 비친 화면도 아주 선명했다.
이날 중계는 일본 NHK-TV의 협조로 일본의 위성지구국을 통해 통신위성 인털새트 3호로 보낸 기념식 실황화면을 금산지구국이 받아 마이크로웨이브로 대전근교 중계소로 송신, 다시 서울시외전화국의 회선을 통해 서울의 3개 TV방송국에서 각 가정의 수상기에 보낸 것이었다.
금산지구국 개국으로 지금까지 일본을 경유해야 했던 미국 등 각종 국제통신도 미국의 통신위성 인털새트 3호를 통해 직접 송ㆍ수신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세계적 뉴스와 사건도 직접 위성중계를 통해 볼 수 있게 됐다. 한국이 통신위성중계국이 된 것은 세계에서 44번째인데 금산 지구국엔 높이 35m의 지주에 직경 6m의 원형안테나가 장치되어있다.
1973년 한국문화재보호협회 발족
1976년 경부고속도로 양산근처서 고속버스 전락 23명 사망, 25명 중경상
1978년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투표율 79%)
1978년 가출청소년4백명 인신매매한 이용백에 영장 신청
1979년 농수산부, 정부미를 가공 일반미로 속여 팔아 말썽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발생. 학생.시민 대규모 데모. 25일 최규하 대통령 특별방송담화 발표
ㅡ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자,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12.12사태를 야기해 권력을 장악하고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민주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투옥을 감행했다.
이에 항의하는 산발적인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으나, 특히 광주에서는 투입된 계엄군과 전남대 학생들과의 충돌로 유혈사태가 빚어졌다. 시위군중에 대한 계엄군의 초기 과잉진압은 시민들의 반정부감정을 폭발시켜 시위가 급속도로 확대됐다.
계엄군의 발포로 사상자가 속출하자 시위대는 시민군을 체계적으로 조직, 계엄군에 대항했으나 27일 새벽 0시 외곽도로를 봉쇄하고 탱크등으로 무장한 계엄군이 총을 난사하며 광주 전역의 시위를 진압함으로써 광주 민주화운동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비극적인 막을 내렸다.
이 운동은 광주사태, 광주항쟁 등으로 불려오다가 1988년초 민주화합추진위원회의 건의에 따라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됐다.
1980년 계엄 사령부, 계엄 포고령 제10호 발표, 모든 정치 활동 중지·전국 대학 휴교령. 광주민주화운동 항쟁 시작.
1980년 전남대학교 학생 6백여 명, 계엄 해제 등 요구 가두 시위
1980년 7공수여단 33대대 광주 조선대학생 43명 체포.11공수여단 추가 투입
1980년 미국 국무부, 한국의 계엄령 확대에 우려 표명 성명
1980년 박찬희, 6차 방어전에서 일본의 오쿠마 쇼지에게 패배
1981년 일본 아사히 신문 서울지국 개설재개 및 마이니치 신문 특파원 서울 상주를 허용
1981년 미국 잉여농산물 (PL 408호) 도입 종결
1982년 검찰, 장영자의 형부 이규광( 전 광업진흥 공사장)을 구속
1983년 피랍 중공 민항기, 납치범만 남기고 중공으로 귀환
1983년 한국·프랑스 경제회담 개막
1983년 김영삼 단식 시작 (~6월9일
1984년 정주영 KOC 위원장, 제3차 남북한체육회담을 비공개로 열자고 北에 제의, 23일 북측 수락.
1984년 인부 노임 수송차 습격-교통경찰 위장 실패하자 음독
1984년 민주화 추진 협의회(민추협) 발족 : 김영삼과 김대중계의 야당 인사가 조직한 재야 정치 단체.
1985년 노태우 민정당대표, 국회 연설에서 현 헌법하의 정권교체 실현을 언명
1986년 명동성당 청년신도 1천여명 광주진상 규명대회 후 가두시위
1987년 광주 등 전국 곳곳서 5.18 추모 시위
1987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대표 김승훈 신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됐다고 주장
1987년 경주발굴조사단, 구황동 황룡사지 외곽에서 신라시대 집터 발굴
1988년 현정화 양영자, 제9회아시아탁구선구권대회(日)에서 우승
1988년 야3당 총재, 정국운영5개항 합의(5共비리, 光州사태규명, 비민주악법개폐등 6개특위구성 합의
1988년 국제통화기금 농산물수입개방과 원화절상을 촉구
1988년 전국 13개 시도 106곳에서 대학생·시민들 광주항쟁 8주년 기념식 및 추모제 등 거행
1989년 조순부총리, 기자회견을 갖고 한미양국은 한국을 포괄적 우선 협상대상국 지정에서 제외키로 합의
1990년 정부, 남예멘과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1990년 광주민중항쟁 10주년을 맞아 광주에서는 망월동 5·18 묘역에서 추모제 및 기념식'5·18 항쟁 계승대회'
1990년 외무부,18일자로 남예멘과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했다고 발표.
1990년 한국여성단체연합․서울지역여대생대표자협의회 반일시위, 노태우 대통령 일본방문에 앞서 일본정부가 위안부문제에 대한 사실은폐 중단과 진상규명, 공식사과를 촉구
1991년 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 소련의 칼미크 자치공화국의 유전을 공동개발키로 칼미크공화국과 합의
1991년 김기화 분신자살 유서대필논란-유서대필 공방 치열
1991년 검찰, 숨진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의 유서 필적이 자필이 아니라고 발표
1991년 5.18 광주민중항쟁 11주년을 맞아 망월동 묘지에 1만명, 금남로 추모행사에 10만명이 참가.
1992년 남북한, 판문점 연락사무소와 군사.경제 교류협력.사회문화교류협력공동위 등 4개 실천기구 공식발족
1992년 한국은행,1~3월중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 인은 77만 7000명- 6억 6900만 달러를 사용 집계
1992년 서울대 의대 이정상교수팀, 5년간 유행성 출혈열환 자는연평군 747명으로 보사부집계 보다 11.4배 지적
1993년 4.19, 5.18 명예회복-수유리 망월동 성역화 복권
1993년 동화은행 비자금조성 사건 관련 혐의를 받고 있는 이원조 의원 극비 출국.
1993년 외무부, 우리나라 해외동포 수는 92년말 현재 129개국에 494만 3000여명에 이른다고 발표.
1993년 국내 30대 재벌그룹 총수들의 12월 결산 배당 금이 모두 205억원=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이 52억원 최고
1993년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안 국회통과
1993년 희극배우 김희갑씨 별세
ㅡ우리시대의 희극인 ‘합죽이’가 50년 웃음인생을 마감하고 잠들었다. 1993년 5월 18일 노환으로 별세한 원로 희극배우 김희갑씨(71). 영화 ‘팔도강산’으로 일세를 풍미한 배우로, ‘불효자는 웁니다’를 목놓아 부르며 실향민의 아픔을 어루만진 가객으로 그는 7백여 편의 영화와 악극, TV에 출연한 한국 연예계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김씨는 22년 함경남도 장지군 개마고원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아버지를, 수년 뒤엔 어머니를 잃고 어렵게 자라났으나 1940년 일본에 밀항, 메이지(明治)대학 2년을 수료했다. 1946년 반도가극단에 입단, 유랑극단 생활을 시작했다. 1952년 12월 김씨는 극단 동료 김영구씨(예명 김문희)와 결혼했다.
1958년 ‘청춘쌍곡선’으로 영화에 데뷔한 김씨는 1959년 ‘오부자’로 인기배우가 된다. 합죽이 김희갑과 막동이 구봉서, 홀쭉이 양석천, 뚱뚱이 양훈, 그리고 아버지 이종철 등 다섯명의 희극배우가 배꼽을 쥐게 한 ‘오부자’는 그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줬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는 좋든 싫든 정치권력층과 가까워졌고 때로는 협박과 회유를 받았다. 1959년 자유당정권 홍보를 목적으로 한 ‘코리아 코미디’라는 단체의 구성에 응하지 않았다가 정치깡패 임화수에게 폭행 당한 ‘합죽이 상해사건’은 유명하다. 김희갑의 전성기는 5·16이후. 1962년엔 국내에서 제작된 영화 1백10편 중 김희갑이 출연한 작품이 50편이 넘었다.
1994년 시베리아벌목공 귀순-북한 노동자 5명 서울에
1994년 빌크린턴 미국대통령 국방장관에게 북한 핵시설 공습명령 김영삼 대통령 만류
1995년 타이완과 구상 무역 재개
1996년 김종필 자민련 총재, 내각제는 협력지향 내지 협조적이라는 점에서 내각제도입의 필요성을 강조
1996년 쌍용, 노태우 전대통령 비자금 은닉 적발
1998년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 수석 비서관, 직무 유기·직권 남용 혐의로 구속
1998년 박세리 동양인 최초로 LPGA 메이저대회(맥도널드 LPGA챔피언십) 최연소 우승,
ㅡ2007년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 명예의 전당과 미국여자프로골프 명예의 전당에 이름 오름
ㅡ박세리는 1998년 5월 18일(한국시각) 98맥도널드 LPGA챔피언십 최종 라운드서 3언더파 68타를 기록, 합계 11언더파 273타로 리사 해크니와 도나 앤드루스를 3타차로 제치고 우승했다.
이로써 박세리는 1997년 미국 여자프로골프 투어 프로테스트를 1위로 통과한 지 7개월 만에 첫 승을 메이저대회에서 장식했다. 또 만 20세 7개월20일 만에 정상에 올라 1997년 타이거 우즈가 마스터스에서 세운 최연소 메이저대회 우승기록(20세 8개월23일)을 1개월 3일 앞당겼다. 신인이 이 대회서 매 라운드 선두를 달리며 우승한 것도 지난 1955년 이 대회 창설이래 처음이었다. 박세리가 세계적인 골프스타가 된 데는 초인적인 훈련과 엄격한 아버지의 지도가 있었다.
박세리가 골프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은 유성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89년. 허들과 투포환 선수로 활약했던 박세리가 골프채를 잡은 이후 아버지는 그녀의 코치이자 캐디였다. 스파르타 훈련덕에 박세리는 중학교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대전 갈마중 3학년이었던 1992년 라일앤스코트 여자오픈대회에 출전해 프로 언니들을 모두 물리치고 우승, 국내 골프계가 경악했다.
1999년 미국 금창리방문단 북한 금창리 현장방문(-5.24까지) 핵시설과 무관 결론
1999년 취재정보 빼내 주식투자한 기자, 국내처음으로 입건
2000년 김대중 대통령, 현직 대통령 최초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 참석, 특별법 제정 발언
2002년 김대중 대통령 3남 김홍걸씨 알선수재 등 혐의로 구속
ㅡ김대중 대통령의 3남 홍걸씨가 2002년 5월 18일 구속됐다.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로비 청탁 등 각종 명목으로 기업들과 최규선(미래도시환경 부사장)씨로부터 주식과 현금·수표 등 36억7000여 만원을 받은 혐의다.
검찰은 이 중 대가성 등 범죄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가 인정된 액수는 15억9000만원이라고 밝혔다. 홍걸씨에게는 최씨로부터 받은 돈 중 9억4914만원을 차명으로 관리하면서 증여세 2억2474만원을 포탈한 혐의(조세범처벌법 위반)도 적용됐다.
한편 검찰은 최씨 등의 부탁을 받고 2001년 4월, 6개 계열·협력사들에 시가 2만원이던 타이거풀스 주식 20만주를 주당 3만5000원에 매입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혐의(배임)로 포스코 유상부 회장과 김용운 부사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또 김희완(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씨가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로비 청탁과 함께 타이거풀스 주식 2만3000주(시가 4억6000만원)와 3개 계열사 주식 3만4800주를 받은 혐의를 잡아내고 구속기소했다. 검찰은 이미 기소된 최규선씨에 대해서도 타이거풀스 주식 2만6000주(시가 5억2000만원)를 받은 혐의 등을 추가로 잡아내고 이 부분을 추가기소했다.
2004년 ‘5.18’ 추도행사에 처음으로 대통령, 여.야 모두 참석
ㅡ대통령과 여야 수뇌부가 광주 망월동 5·18묘역에 함께 자리한 것은 광주민주화운동 24주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분열을 극복하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과제”라며 “용서하고 화해해서 하나가 되자”고 말했다.
한편, 박근혜 대표가 묘역을 돌 때 “박근혜다”, “어머니 영락없네”라며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하는 시민들도 있었지만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여기 뭐 하러 왔어”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박 대표가 도착하기 전 행사장 주변에서 몇몇 청년들이 전단을 뿌리며 “박근혜는 물러가라”고 외치다 경호원들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여야 간 건널 수 없는 응어리의 상징이었던 ‘5월의 광주’에서 여야 지도부가 24년 만에 화해로 가는 먼 여정의 첫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2004년 서울대생 고 박종철씨 추모비 모교 부산 혜광고에 건립
ㅡ지난 87년 서울대 재학 당시 민주화 운동을 벌이다 경찰 고문으로 숨진 고(故) 박종철씨를 기리는 기념조형물과 ‘박종철 쉼터’ 제막식이 18일 오전 박씨의 모교인 부산 중구 보수동 혜광고등학교 교정에서 열렸다.
가로·세로·높이 각각 60㎝×60㎝×190㎝에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펜 모양의 기념조형물에는 ‘당신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나는 아직도 눈을 감지 않았습니다’라는 시인 이산하씨의 비문이 새겨졌다.
기념 조형물 왼쪽에는 재학생들을 위해 ‘박종철 쉼터’라고 명명된 야외 휴게소가 마련됐다.
이날 행사는 박씨의 동기인 혜광고 28회 졸업생들이 지난해 졸업 20주년 행사를 가지면서 제안해 동문들이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아 마련했다고 동창회측은 밝혔다.
2007년 태안 앞바다에서 주꾸미 낚던 어부 김용철 씨 고려시대유물 발견,
ㅡ문화재청이 7월24일 12세기중반 침몰된 배 인양해 고려청자, 고려시대 목간 등 유물1만9천여점 찾아냄, 고려시대 목간은 첫 발견
2007년 북한 신임외상에 박의춘
ㅡ북한은 2007년 1월 사망한 백남순 외무상의 후임에 박의춘((朴義春.75) 전 러시아 주재 대사를 임명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2007년 5월 18일 발표한 정령(政令)에서 내각외무상으로 박의춘을 임명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신임 박 외무상은 1932년생으로 알제리·시리아 주재 대사, 외교부 부부장 등을 거쳐 1998년부터 2006년까지 8년 동안 러시아 주재 대사를 지낸 외교관 출신이다
2009년 서상희 충남대교수 연구팀 신종플루의 인체백신 세계최초로 개발
2009년 화성 남양지구 공사장 붕괴
ㅡ5월 18일 오전 7시15분쯤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 도시개발사업 지구 내 산 121-1 지역 절개지가 붕괴해 인부 4명이 매몰됐다. 이 중 1명은 구조됐으나, 3명은 끝내 숨진 채 발견됐다.
이날 사고는 사업 시행사 태평양개발㈜의 하도급업체인 청안건설 인부 8명이 야산을 잘라 터널형태의 길을 내는 개착(開鑿)공사를 위해 공사장 벽에 거푸집을 만들고 점검하던 도중 발생했다. 당시 높이 70m의 절개지 중 높이와 폭 각 40m 정도가 무너져 내려 2000t 이상의 흙과 암반이 현장에 있던 인부 8명을 덮쳤다.
매몰된 나머지 인부 3명은 사고 현장과 가까운 바닥 쪽에서 거푸집을 만드는 작업을 하다 변을 당했다.
현장 조사에 참여한 수원과학대학 토목과 강인성 교수에 따르면 며칠 동안 내린 빗물이 옹벽에 스며들면서 절개면 지반이 약해진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2010년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코스타리카의 크리스티나 피게라스를 신임 UNFCCC 사무총장으로 지명
2011년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거점지구로 대전(신동·둔곡 지구) 선정
2012년 대한민국의 우주발사체인 아리랑 3호가 발사
2013년 남덕우 전 총리 세상떠남
2013년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도 남쪽 44km 해역에서 규모 4.9의 지진이 발생
2015년 방한 모디 총리 ‘동포와의 만남’ 전국서 3000명 경희대에 모여
ㅡ모디 총리는 해외 순방 때마다 고국 동포들과 만남의 자리를 마련해왔다. 1박 2일의 짧은 한국 방문에서도 박근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가기 직전의 시간을 쪼갰다.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주한 인도 대사관을 통해 전해지자 1만여 재한 인도인 사회가 들썩였다.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서도 참가 문의가 쇄도했고, “도울 일 없느냐”는 자원봉사 문의도 쏟아졌다.
삼엄한 보안 체크를 끝내고 인도 국기가 찬란하게 내걸린 공연장을 메운 관객의 손에는 저마다 작은 인도 국기가 쥐여 있었다. 인도문화원의 한국 수강생이 준비한 시바반다나(시바 신을 숭배하며 추는 춤) 공연이 끝난 1시 40분. 모디 총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3000여 청중이 한꺼번에 소리질렀고, 휴대전화 플래시가 수없이 터졌다. “제이(Jai·‘만세’라는 뜻) 모디”의 외침이 그칠 줄 모르면서 10여분이 흘러갔다. 모디 총리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연단에 선 모디 총리는 40여분 역동적 연설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을 ‘동방의 등불’이라며 위로했던 시성(詩聖) 타고르 이야기를 꺼낸 뒤 “그 나라가 100년도 안 돼 번듯한 경제 강국이 됐으니 얼마나 탁월한 안목인가”라며 한국과 타고르를 동시에 치켜세웠다.
40분 동안 ‘고국 팬’들을 들었다 놨다 한 모디 총리는 청와대로 가기에 앞서 배웅하러 달려온 동포들과 악수를 나눴다.
2017년 손흥민(토트넘) 시즌 21호골로 한국인 유럽리그 한 시즌 최다골(차범근 19골 1985-86시즌) 31년만에 갱신, 영국진출 2시즌만에 29골로 한국인 통산최다골(박지성 27골) 갱신
2020년 코리아 소사이어티 2020년 밴플리트상 수상기관으로 대한상공회의소 선정
2021년 김부겸 총리, 광주서 첫 국무회의 주재...5.18 기념식 참석
2022년 ‘코로나 전사’ 정은경 질병청장 퇴임
1048년 페르시아의 수학자 오마르 하이얌 출생.
1152년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결혼.
1160년 스웨덴의 국왕 에리크 9세 작고.
1268년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맘루크 무슬림 군이 안티오크 점령, 학살사건이 일어났다.
1498년 포르투갈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 인도 도착,
ㅡ1497년 포르투갈왕의 명령으로 세 척의 배 끌고 리스본 떠나 그해 12월 희망봉(아프리카 최남단) 거쳐 폭풍과 반란 이겨내며 인도양 횡단, 이 항해로 인도로 가는 뱃길 열려 포르투갈이 아시아무역 독점, 가마는 포르투갈령 인도총독 되었다가 그곳에서 세상떠남
1675년 미시시피강의 발견자 마르케트 사망
1799년 프랑스의 극작가 피에르 보마르셰 작고
1800년 러시아 제국의 명장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작고
1804년 나폴레옹 프랑스황제에 오름
1848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개원
1864년 미국소설가 나다니엘 호오도온 세상떠남 『주홍글씨』
1868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1895-1917) 니콜라이2세 출생
1872년 영국 철학자 러셀 출생
1885년 브라질의 대통령(1945-50) 두트라 출생 - 입헌민주주의 회복
1889년 미국의 기계기술자, 화학자 토머스 미즐리 출생
1899년 제1회 만국평화회의 네덜란드 헤이그서 열림,
ㅡ러시아황제 니콜라이2세 제청으로 26개국 대표 참가해 국제분쟁의 평화적 처리조약에 따라 국제사법재판소 설치, 전쟁법규 확정
1904년 백인 노예 판매금지 조약
1909년 미국 연방의회 흑인 차별대우 철폐 결정
1910년 지구가 핼리 혜성의 꼬리를 통과
1911년 보헤미아 태생의 오스트리아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세상떠남 ‘대지의 노래’ “모짜르트!”-최후에 남긴 말
1913년 샹송가수 샤를 트레네 출생
1920년 폴란드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출생.
1922년 프랑스의 의사. 병리학자 라베랑 사망 - 1880년 말라리아 기생충 발견
1932년 독일의 법학자 에른스트 폰 벨링 작고
1933년 미국 테네시강 유역개발공사(TVA) 설립
1939년 독일의 물리학자 페터 그륀베르크 출생
1944년 몬테카시노 전투가 연합군의 승리로 종결
1950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이사회 집단방위군 창설등을 결의
1951년 한국전쟁중 유엔총회 중국에 대한 전략물자수출금지안 가결
1963년 인도네시아 의회, 수카르노를 종신원수로 결정
1968년 셀라시에 이디오피아 황제 내한
1969년 미국의 아폴로 10호가 발사
1973년 미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랜킨 사망
1973년 러시아의 항공기 Aeroflot Flight 109가 테러리스트에 의해 납치되어 공중에서 폭발 82명 승객 전원이 사망
1974년 인도 지하핵실험 성공, 세계 6번째 핵보유국
ㅡ5월 18일 오전 8시 5분, 인도가 서부 라자스탄주의 타르사막에서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했다. 핵폭발 장치와 원료 플루토늄은 모두 국산으로 실험은 지하 100m에서 행해졌다. 이로써 인도는 미국, 소련, 중국, 영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에서 6번째의 핵보유국이 됐다. 인도정부는 이 실험이 평화이용연구의 일환으로 광산이나 토사이동 등을 위해 계획된 것이며 핵병기보유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날의 핵실험은 자국내에서는 환영받았지만 국외로부터는 핵확산의 위협을 고조시켰다고 판단, 일제히 반발의 목소리가 높았다. 특히 1956년이래 인도에 원자력기술원조를 해 온 캐나다는 22일 원조의 전면 중지를 발표했다. 또 인도와 오랫동안 대립관계를 유지해 오고 1971년에 전쟁을 한 바 있는 파키스탄도 이에 반발, 6월 10일에 예정돼 있는 인도-파키스탄 실무협의 개최를 거부했다
1977년 미국 소련 우주평화이용협정 조인
1977년 환경파괴병기금지조약 조인식이 제네바서 열림. 33개국 조인
1977년 미국-영국-소련 3국 핵무기 및 대량파괴무기 해저저장 금지조약 비준서 교환
1978년 이탈리아 상원, 인공임신중절 허용하는 법안 가결
1980년 중국 대륙간탄도탄(ICBM) 실험발사 성공
1980년 미국 워싱턴주 세인트 헬렌즈산에서 화산 폭발
ㅡ미국 태평양 연안의 워싱턴주 세인트 헬렌즈산에서 1980년 5월 18일 123년 만에 매그니튜드 5.0의 화산이 폭발했다. 분화조짐은 3월20일부터 포착되었고 27일부터는 소규모의 분화가 시작됐다. 4월부터 산의 북쪽 중턱이 불룩해지기 시작하자 관측소는 24시간 대기상태로 폭발에 대비했다.
화산 폭발은 강력한 원자폭탄보다 8배나 더 강했다.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던 폭탄이 2만7천개 모였을 때와 맞먹는 헬렌즈산의 폭발은 9시간 이상 계속됐다. 해발 2950m인 산 정상이 화산 내부의 압력을 견디다 못하고 폭발해 뜨거운 마그마가 산 정상의 눈과 만나 수증기가 되어 대기권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 결과 눈사태와 진흙사태가 일어나 시속 100-400km의 허리케인과 맞먹는 속도로 맹렬하게 산 아래로 흘러 내려갔다.
자그만치 28km나 쏟아져 내려오고 나서야 모든 것을 초토화시킨 대장정은 막을 내렸다. 폭발음이 양 300km나 떨어진 캐나다의 밴쿠버에까지 들릴정도였다. 숲은 파괴되었고, 인명피해가 속출했다. 재구름이 북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3일에 불과했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약 70명이었다
1988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윈도우 2.1이 출시
1990년 프랑스의 TGV가 고속철도의 최고 기록인 시속 515.3km를 기록
1990년 동-서독 `경제통일` 협정 조인
ㅡ동서 양독은 1990년 5월 18일 오후 1단계 통독과정으로 1990년 7월 1일을 기해 경제-통화 및 사회통합을 실현시키기로 하는 역사적인 국가조약에 조인했다. 이번 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독일 통일의 꿈이 현실화됐다. 양독은 정치-군사-경제 등 독일통일을 이루는 3대기둥 가운데 첫번째로 경제기둥을 세움으로써 통일을 위한 첫번째 공식단계를 밟은 것이다.
테오 바이겔 서독 재무장관과 발터 롬버그 동독 재무장관은 이날 본에 있는 서독 연방정부청사인 샤움부르크성 내 콘라드 아데나워 전 서독 총리 집무실에서 양국 총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양독 간의 통화동맹, 경제 사회공동체 창설에 관한 조약에 조인했다.
이날 조인된 조약은 양독의 경제-사회제도를 통일하는 기본법규로, 동독은 이 조약에 따라 서독에 경제주권을 이양, 독일의 경제적 통일이 실시됐다. 조약이 발효된 후에는 통화면에서는 서독은행이 통화적인 통화-금융정책을 맡게되고 동독 금융 당국은 서독 연방은행의 관리하에 놓이게 됐다
1997년 나차긴 바가반디, 몽골 대통령에 당선
ㅡ5월 18일 몽골 역사상 두번째로 실시된 직선 대통령 선거에서 공산당 후신인 인민혁명당(MPRP)의 나차긴 바가반디 후보는 60.79%의 높은 득표율로 현 대통령인 푼살마긴 오치르바트 민주연합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지난 1950년 몽골서부 자반지역에서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난 바가반디는 1968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구 소련 레닌그라드의 대학에 4년 간 유학했다. 유학을 마치고 1972년 몽골로 돌아온 그는 울란바토르의 맥주주정공장에서 4년간 일해 학비를 모은 뒤 또다시 구 소련으로 건너가 식품공학을 전공하기도 했으며, 이후 모스크바 사회과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등 학문적 열의가 대단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의 정치입문은 1980년부터 시작됐다. 인민혁명당에 입당한 바가반디는 당원으로서 의욕적인 활동을 하다가 1990년 당중앙위원회 서기로 등용됐다. 이후 1992년 구 소련 붕괴 후 처음으로 열린 총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 지난 1996년 6월까지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1997년 2월의 당대회에서 당수로 선출됐다.
1999년 에후드 바라크 노동당 당수, 이스라엘 새 총리에 당선
ㅡ‘이스라엘에서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군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노동당의 에후드 바라크가 1999년 5월 18일 이스라엘의 새 총리로 당선됐다. 그는 5월 17일의 총선에서 44%의 득표에 그친 베냐민 네타냐후 전 총리를 56% 득표율로 누르고 새 총리에 당선됐다.
군참모총장 출신인 바라크는 뛰어난 전략적 능력뿐만 아니라 동안에다 땅딸막하고 배가 불뚝하게 나온 외모 때문에 ‘이스라엘의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바라크는 예루살렘의 히브리대를 거쳐 미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체계분석) 석사학위를 받았다. 1959년 군대에 징집되면서 이후 탁월한 능력을 발휘, 이스라엘에서 가장 많은 훈장을 탄 군인이 됐다. 1967년 6일전쟁, 1973년 욤기푸르전쟁 등에서 활약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72년엔 특공대를 이끌고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 의해 납치된 벨기에 항공기 인질 구출작전에 나서 수백명을 구해냈다.
특히 1973년 그가 여장을 한 채 특공대를 이끌고 베이루트에 침투해 뮌헨올림픽 당시 이스라엘 선수단을 학살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검은 9월단’ 요원 3명을 암살한 것은 이스라엘에선 전설적인 무용담으로 회자되고 있다.
2000년 그룹 젝스키스 공식 해체 선언
2004년 미국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랜디 존슨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
200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성전환 선수의 올림픽 출전 자격 인정 발표
ㅡ국제올림픽위원회(IOC) 집행위원회는 2004년 5월 18일(한국시각) 수술로 성별을 바꾼 선수도 올림픽 출전 자격을 가질 수 있다고 발표, 성전환자들이 그리스 아테네서 열리는 2004올림픽에 출전할 길이 열렸다.
단, 외과수술을 통해 생식기를 비롯한 신체가 해부학적으로 새로운 성에 맞게 변화되어야 하며, 해당 국가로부터 법적으로 새 성별을 인정받아야 하고, 최소한 2년간 호르몬 요법을 거쳐야 한다는 3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때 가능하다.
지금까지 IOC의 일부 위원들은 남성이 여성으로 성전환수술을 받을 경우 선천적으로 여성인 선수들보다 힘이 세고, 심폐기능이 우수해 상대적으로 유리할 수 있다는 걱정을 해 왔다. 하지만 남성이 성전환수술과 여성 호르몬 요법을 거치면 근육과 지방의 비율이 ‘여성화’된다는 조사 결과가 나옴에 따라 규정을 정비한 것이다. IOC는 의무적이었던 성별 검사도 2000시드니올림픽 때부터 없앴다.
가장 잘 알려진 성전환 선수로는 1970년대 여자 테니스에서 활약했던 리니 리처즈가 있으며, 지난 3월엔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을 바꾼 미앤 배거가 호주 여자오픈 골프대회에 참가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이날 IOC의 결정에 대해 일부에선 “성적 정체성 때문이 아니라 단지 돈과 명예를 위해 트랜스섹슈얼이 되어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들이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2007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피에르질 드 젠 작고
2009년 스리랑카 내전 26년만에 끝남, 타밀족의 ‘타밀일람 해방호랑이’ 항복, 마지막 5개월 동안 타밀족 4~10만명 학살
2010년 가상화폐 비트코인 첫 실물거래인 ‘플로리다 피자사건’ 일어남, 미국 플로리다 잭슨빌의 누리꾼 ‘laszlo’가 비트코인포럼 게시판에 피자 두판에 1만 비트코인 지불하겠다는 글 올림, 거래는 4일만에 성사됨
2014년 보스니아-세르비아 120년만에 최악의 홍수 이재민1만여명
2015년 ‘피겨 스타’ 아사다 마오 “은퇴 일러 … 현역 복귀한다”
ㅡ일본의 여자 피겨스케이팅 스타인 아사다 마오(25·사진)가 은퇴를 미루고 현역 선수로 계속 뛰겠다고 선언했다.
아사다는 18일 기자회견을 열고 “1년간 휴식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경기가 그리워졌고, 좋은 연기를 했을 때의 성취감을 다시 느끼고 싶어 졌다”고 말했다.
아사다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출전에 대해선 “일단 올림픽은 생각하지 않고 내가 가진 목표를 향해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아사다는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라이벌이었던 김연아(25·은퇴)에 이어 2위를 했고, 작년 소치 동계올림픽 땐 6위에 그쳤다.
소치 올림픽 이후 열렸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통산 세 번째 우승을 하고 난 이후엔 1년간 쉬며 진로를 고민했다.
2018년 미국 텍사스 주 산타페 고등학교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해 10명이 사망
2018년 쿠바나 항공 972편 추락 사고가 발생해 112명이 사망
2022년 美의회 50년만에 UFO 청문회...국방부 “미확인 비행현상 400건”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