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화 작가의 소설집 『그가 나에게로 왔다』(푸른사상 소설선 52).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차별받는 여성들의 모습, 나이와 세대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고통에 노출된 현대인들의 고단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소외된 자들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며 현실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향한 가능성을 꿈꾼다.
2023년 10월 23일 간행.
■ 작가 소개
연세대학교에서 「김남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 경희대학교, 가천대학교 강사, 평택대 교수를 거쳐 현재 평택대 명예교수이다. 여성문학학회, 한국문학연구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문학수첩 기획위원장, 작가포럼 대표를 맡고 있다.
소설집으로 『은밀한 테러』 『블랙 레인』 『하늘 아래 첫 서점』 『흔들리며 피는 꽃』 『아웃사이더』 등이, 학술서로 『박경리와 최명희, 두 여성적 글쓰기』(2000) 『여성문학에 나타난 근대체험과 타자의식』(2005) 『한말숙 작품에 나타난 타자윤리학』(2012) 『‘너’ 속의 ‘나’, ‘나’ 속의 ‘너’, 타자 찾기』(2013) 『아시아적 신체와 혼종적 정체성』(2016) 『일제하 작가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 본 문학적 대응』(2021), 공저로 『페미니즘과 소설비평:근대편』(1995) 『페미니즘과 소설비평:현대편』(1997)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다』(2000) 등이 있다.
혼불학술상, 노근리문학상, 자랑스런 이화인상을 받았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카프카가 동네 공원을 산책하다가 어린 소녀가 슬피 우는 모습을 보았다. 소녀가 아끼던 인형을 잃은 것이다. 카프카가 그 소녀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 말했다.
“네 인형은 말이야, 그냥 여행을 떠난 거란다.”
놀란 소녀가 쳐다보았다.
“나한테 편지를 보내서 그렇게 말했어.”
“정말요? 편지는 어디 있죠?”
“편지는 집에 있단다. 내일 여기 다시 오면 내가 가져다줄게.”
그날 밤 카프카는 소녀에게 갖다줄 인형의 편지를 썼다. 다음 날 소녀에게 편지를 읽어주었다. 3주일 동안 편지를 쓰고 읽어주는 일이 계속되었다. 인형이 사랑에 빠지고, 약혼을 하고 결혼식을 하고 소녀에게서 떠날 수밖에 없게 된 시점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카프카와 도라는 그사이에 사랑이 싹트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 작품 세계
이덕화에게 예술(소설)은 일종의 꿈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것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스런 삶을, 그 실제보다 더한 리얼함으로 전달하는 하나의 상상적 실제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것은 현실 너머의 새로운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덕화의 소설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은 주로 예술을 통해서 가능하다. 「달려라 토끼」에서도 교수였던 남편을 폐암으로 잃고 “청소 아줌마”(82쪽)로 살아가는 재인은 디자인과 회화를 섞어서 “작품을 하고 싶”(84쪽)어 한다. 「메타버스 홈」에서도 소령은 전통적인 예술은 아니지만 새로운 창조를 통하여 자신의 현실적 곤란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표제작인 「그가 나에게로 왔다」에서 ‘나’의 여자 친구인 지혜도 대학을 졸업하자 그림을 그리겠다고 선언한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지만, 지혜는 새로운 방식의 예술을 통하여 자신의 미래를 열어나간다. “메타버스 갤러리를 열어 플랫폼을 만드는”(14쪽) 것에 관심이 있던 지혜는, 선배가 마련한 메타버스 갤러리 작품전에 몇 점의 작품을 출품하는 것이다. 나중에는 주부들 중에 그림을 그리다 그만둔 사람들이 모여서 전시회를 여는데, 그것을 이야기와 함께 메타버스 갤러리와 연결하는 일을 하기도 한다. 한국이라는 이국 땅에서 고생하는 차말 역시 그림을 그리며, 차말은 그림을 그리면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종수는 지혜의 작업에 차말의 그림이 활용되도록 노력한다. 그 결과 메타버스 갤러리 플랫폼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통해 다양한 배경 속에 배치된 차말의 그림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러한 차말의 그림은 거의 다 팔리기까지 하며, 차말은 “화가”(34쪽)로 다시 태어난다. 예술이야말로 새로운 삶과 세계를 열어내는 비상구였던 것이다. 이덕화의 소설집 『그가 나에게로 왔다』 역시 하나의 예술(꿈)로서 우리 앞에 오롯이 놓여진 귀중한 선물임에 분명하다.
― 이경재(문학평론가, 숭실대학교 교수) 해설 중에서
■ 작품 속으로
다들 일어서려는 순간, 한 명이 이번 방학에 아르바이트를 그만하겠다고 선언했다. 다들 일어서려다 멈칫 그 친구를 쳐다보았다. 남인도와 스리랑카를 간다는 것이다. 멍한 채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새꺄 로또 맞았냐? 인생 끝날 것처럼 살지 않기로 했어! 뭐? 뭔 말이야.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도 그 길만이 길인 줄 알았지, 근데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 다 같이 목적도 모르는 골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애. 출세가 목적인 것처럼, 왜 돈을 벌어야 하고 출세를 해야 돼? 그 길 외에는 방법이 없어? 우선 난 나에게 일어나기 시작하는 질문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 우선인 것 같애. 무조건 달리지만 말고. 한 학기 꿇더라도 이번 방학에는 여행을 가려고 해. 잠시 멈추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처음부터 생각해보려고.
(「그가 나에게로 왔다」, 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