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2. 근본분열과 제2결집
“계율에 관한 이견으로 상좌부 대중부 분열”
● 근본분열(根本分裂)
부처님이 입멸한지 대략 100여년이 지난 후 통일돼 유지되어왔던 승가가 상좌부(上座部, Therava-da)와 대중부(大衆部, Maha-sam.ghika) 두 개의 승가로 나뉘어 분열(sam.ghabheda)된 것을 근본분열이라고 한다. 근본분열이 발생한 뒤에 상좌부 내부에선 다시 내부 분열이 일어나고 대중부 내에선 다시 내부 분열이 일어난 것을 지말분열이라고 한다. 이렇게 승가가 18개 내지 20개가 분열한 시기의 불교를 소승불교, 부파불교라고 지칭한다.
근본분열의 원인에 대해 불교 전통 문헌에서는 크게 두 가지 서로 다른 전승이 있다. 남방불교의 문헌에서는 ‘10가지 계율에 관한 이견’으로 인해 근본분열이 일어났다고 하는 반면 북방불교의 문헌에서는 아라한에 대한 이견으로 분열이 발생했다고 전하고 있다.
바이샬리 남쪽 4km 지점에 위치한 제2결집지. 불교신문 자료사진
먼저 남방에서 전해지는 ‘10가지 계율에 관한 이견’에 대해 살펴보겠다.
남전(南傳)의 〈디파밤사(Dpavam.sa)〉와 〈마하밤사(Maha-vam.sa)〉에 의하면, 불멸 후 백년 경 바이샬리에서 발지(Vajji)족 출신의 비구들이 전통적인 계율을 완화한 십사(十事)를 정법(淨法)이라고 주장한 것과 달리, 장로 비구들은 비법(非法)이라고 선언한데서 근본분열이 비롯되었다. 십사를 비법이라고 선언한 쪽이 상좌부로, 십사를 정법으로 주장한 쪽이 대중부가 되어 교단이 두개의 부파로 분열되었다. 밧지족 비구들은 다음의 십사를 정법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① 염정(鹽淨): 원칙적으로 출가 비구는 음식을 저장할 수 없다. 그러나 바이샬리 비구들은 소금을 약(藥)으로서가 아니고 음식물로서 보관해 두었다가 먹는 것을 합법적(淨)이라고 주장했다.
② 이지정(二指淨): 비구는 정오까지의 정시에 모든 식사를 끝내야 한다. 그러나 바이샬리 비구들은 태양의 그림자가 정오에서 두 손가락 길이 정도를 지날 때쯤까지는 식사는 허용된다는 것.
③ 취락간정(聚落間淨): 한번 탁발을 해서 식사를 한 후에도 오전 중이라면 다른 마을에 가서 탁발 할 수 있다는 견해.
④ 주처정(住處淨): 한 곳에서 포살을 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도 포살을 할 수 있다. 같은 경계(sma)안에 있는 비구들이 전부 모이기가 번거로우므로 각 주처에서 따로 포살행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⑤ 수의정(隨意淨): 원칙적으로 상가의 일을 논의할 땐 전원 참석이 요구되는데 모든 비구가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사항을 결정한 후에 나중에 다른 비구들이 왔을 때 결정된 사실을 알리고 허가를 받아도 정법이다는 것이다.
⑥ 상법정(常法淨): 스승의 시대부터 관습적으로 행해온 것을 자신이 행하는 것도 합법적이며, 출가하기 이전에 행하던 것을 출가이후에도 행하는 것은 합법적이라고 주장했다.
⑦ 생화합정(生和合淨): 정오 이후엔 물이나 과즙과 같은 액상음료 외에는 먹는 것이 금지 되어 있었는데 바이샬리 비구들은 오후에 석밀(石蜜) 등을 섞은 우유를 정오 이후에 마시는 것도 합법적이라고 봤다.
⑧ 음도루가주정(飮樓伽酒淨): 아직 발효되지 않은 술을 마시는 것은 합법적이라는 주장하였다.
⑨ 좌구정(坐具淨): 좌구를 만들 때 규정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취향대로 만들어도 무방하다.
⑩ 금은정(金銀淨): 금은이나 돈을 소유하거나 저축하여도 합법적이다.
위의 십사는 모두 계율 문제들에 관한 것인데 금은정이 논쟁의 핵심이었다. 밧지족의 비구들의 10가지 주장은 모두 십사비법이라고 판정되었다. 그러나 결정에 승복하지 않은 다수의 비구들이 별도로 집회를 열어 대중부라고 칭하였으며, 이에 대해 장로들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의 비구들은 상좌부라 칭하였다. 즉 불멸 후 백년 무렵 바이샬리에서 야기되었던 십사의 논쟁을 계기로 승가는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되는 근본분열이 있었다고 남전에서는 전하고 있다.
금은정 등 밧지족 비구의 10사 주장은 불멸후 변화된 사회 문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바이샬리 비구들이 금은으로 보시를 받아 소유하는 것을 합법적이라고 주장한 것은 바이샬리가 상업도시로 번창하여 화폐 생활이 익숙해 진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대중부는 부처님이 이전에 제정한 계율은 현재 상황에 맞게끔 수정하거나 완화시켜야 한다는 현실적인 요청에 중심을 두었던 반면에 상좌부는 부처님이 제정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경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상의 남전의 분파설에 대비하여, 북방불교에서 전하는 ‘아라한에 대한 이견’은 〈이부종륜론〉에 전해지고 있다. 이 문헌에 의하면 불멸 후 100년경 아쇼카왕 시대에 상좌부와 대중부로 근본분열이 일어났다고 한다. 마하데바(Maha-deva, 한역어는 대천(大天)이라 한다)라는 비구가 아라한의 경지에 대하여 밝힌 다섯 가지 견해에 대한 이견에 의한 것이라 한다. 대천이 아라한의 경지를 폄하하는 다섯 가지 설을 동조하는 진보주의자와 이것을 비법이라고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 간에 이견이 생겨 진보주의자는 대중부, 보수주의자는 상좌부로 나누어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① 여소유(餘所誘): 탐욕을 벗어난 아라한은 알고서 음행을 하는 일은 없어도 천녀에 의한 몽정과 같은 일은 있을 수 있다.
② 무지(無知): 무명을 끊은 아라한도 자신이 이전에 가보지 않은 장소의 이름이나 처음 만나는 사람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③ 유예(猶豫): 아라한도 처음 보는 물건의 이름이나 사람에 대해 의심이 있을 수 있다.
④ 타령입(他令入): 스스로 아라한과를 얻었지만 스스로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알려줌으로써 자각하는 경우가 있다.
⑤ 도인성고기(道因聲故起): ‘아 괴롭구나’하는 소리를 밖으로 내어 무상.고.무아 등을 통절히 느끼고 성도에 들어가는 일이 있다.
이상의 오사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성자인 아라한에 대한 폄하이다. 기존의 보수적인 장로들은 이 오사를 비법(非法)이라고 선언하였다. 아라한을 최고의 경지로 삼는 장로들은 아라한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대천의 오사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대천의 오사에 반대하는 측은 상좌부로 대천을 지지한 측은 대중부로 분열되었다.
힌두교 사원으로 변한 제2결집지에 있는 조그만 스투파.
● 제2결집
제2결집은 남전에 의하면 위에서 살펴본 십사 논쟁의 결과로 이루어졌다. 제2결집을 도모하게 한 사람은 야사(Yasa)라는 서방 출신의 장로비구였다. 그는 당시 상업도시였던 바이샬리를 방문하는데, 거기에선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이 신도들로부터 금은을 보시 받는 것을 보고 그 잘못을 지적했다. 그러나 야사는 오히려 바이샬리 비구들로부터 참회를 강요받았다.
이에 야사는 각 지역의 대표적인 스님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시정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00명의 비구가 바이샬리에 모여 논의했다. 동쪽지역에서 4명이 선출되고 서쪽 지역에서 4명의 비구가 선출되어 8인의 소위원회가 구성되어 10사를 하나씩 논의하였다. 밧지족 비구들이 주장한 십사는 불법(不法)이므로 금지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었다.
회의는 십사가 정당한가 부당한가를 심사하기 위한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었지만, 이 회의에서 성전도 결집했다는 설이 스리랑카의 〈디파밤사〉와 〈마하밤사〉에 나온다. 이들 문헌에 의하면 10사 논쟁 후 700명의 장로가 레바타(Revata)를 상수로 하여 법결집(dhamma-sam.gaha)을 행하여 8개월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결집을 제2결집(dutiya-sam.gaha), 바이샬리 결집, 칠백결집(七百結集)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디파밤사〉에 의하면 장로들에 의해 추방된 대중부 비구들도 1만명의 지지 세력을 얻어 법결집(法結集)을 했다고 전한다. 즉 이들 문헌에 의하면 10사로 인하여 상좌부와 대중부가 분열하고 각각 결집을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율장(Vinaya)의 700건도에서는 10사의 심의를 언급할 뿐, 제2결집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북전의 〈이부종륜론〉은 대천의 5사로 상좌부와 대중부로 근본분열이 일어난 것만 이야기하고 결집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근본분열의 계기로 남전에서는 10사라는 계율의 이견을, 북전에서는 5사라는 교리의 이견을 제시하고 있다. 어느 설이 더 역사적인 사실에 부합하는 지 택일할 수 없지만 동남아시아의 불교인들은 계율을 중시하고 있으며 동북아시아인의 불교도들은 교리를 중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십사의 사건은 변화된 시대 상황에 맞게끔 부처님이 제정한 계율을 완화내지 수정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대천의 5사는 그 당시 편협한 아라한 중심의 불교를 비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중 구제와 유리된 아라한 이상주의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이 두 가지 사건은 교단 안에 진보와 보수의 두 갈래 사상이 교단 분열의 원인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교단의 근본분열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분열에 분열이 더하여 20여 개의 부파에 이르는 부파시대를 형성한다. 이 시대에는 부파들 사이에 여러 가지 이론과 이설이 성행하여 불교는 이론과 학문이 두드러지게 발전하기도 하였다. 화합을 중시하는 승가의 입장에서 보면 분열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정체된 승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측면에선 분열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안양규/ 동국대 교수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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