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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네가 무엇을 보느냐?/렘 1:11-19
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1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슥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하리라
1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북방 모든 나라의 족속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면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을 치리라
16.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17.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두렵건대 내가 너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게 할까 하노라
18.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19.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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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김태복목사
내일은 60주년이 되는 광복절입니다. 그러나 이 날을 맞으면서도 우리 국민들의 마음속에 감격이 별로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우리나라는 진정한 광복이 안 된 채 남북한이 양단되어 반세기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가서는 민족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북한 핵 문제’ 때문에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가 나서서 해결해주겠다는 입장이니 민족의 자존심은 꾸겨질 대로 꾸겨진 상태입니다.
더 한심한 것은 북한은 지구상에 무서운 독재를 했음에도 50년 끝에 얻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얼마나 형편없이 못사는 나라가 되었는지, 경제규모는 남한의 27분의 1, 1인당 국민 소득은 13분의 1, 대외 무역규모는 128분의 1이 되어 버렸습니다. 더 나가서는 엄청난 식량부족으로 굶주리다 못해 탈북 하는 백성들이 속출하고 강대국들에게 핵을 가지고 흥정하는 나라가 되므로 민족적으로 너무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서 속히 남북한이 통일됨으로 진정한 해방을 맞아야 합니다. 어제 경향신문에서 독립기념관 김상웅 관장은 시론에서 쓰기를, 주변 4강의 역학관계는 10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면서 통일을 가장 막고 있는 것은 오히려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 4대강국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남한 만이라도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이 민족이 바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정신을 차려야 할 자들은 우리 한국교인들입니다. 국민 전체의 기독교인 비율은 20내지 25%이지만, 상류층으로 갈수록 30-40%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상류층의 부패는 빛과 소금으로 살지 못한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대단히 크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부패로 얼룩진 삶을 청산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날이 오지 않을까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왜 북한을 해방시키지 않고 저렇게 놓아두시고 계십니까? 마지막 때에 남한을 강하게 쓰시기 위해 몽둥이로 남겨 놓으셨다는 생각을 저는 언제나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에는 늘 보호하셨지만, 잘못된 길로 갈 때에는 주변 강대국을 들어서 징계하심으로 바른 길을 가게 하셨던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무엇을 보느냐?”는 질문을 받은 때는 남 유다 나라의 말기였습니다. 이제 나라가 존망의 위기 속에 처한 때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동북쪽으로 세 시간 반쯤 가는 아나돗이라는 동리에서 힐기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B.C 628년경 젊은 청년으로 부르심을 받고 50여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중에 특별히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을 많이 흘린 분입니다.
그래서 그를 눈물의 선지자, 혹은 책망의 예언자, 고통의 예언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는 위태한 조국 현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개 정국을 바라보면서 심히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그 때 예레미야의 눈이 열리면서 놀라운 환상을 봅니다. “오 주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또 다시 하늘의 음성이 그에게 임합니다.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다시 눈이 열리면서 환상이 보입니다. “오, 주님, 끓는 가마가 보이나이다. 그 면이 북쪽에서 기울어졌나이다.” “네가 잘 보았도다.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하리라” 예레미야는 나라가 위기 정국을 맞을 때에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때에 그에게 하나님은 두 가지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살구나무 가지와 끓는 가마입니다. 그 환상이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이 오늘 우리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살구나무 가지 환상은 깨어 있는 자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살구나무는 히브리 원어로 ‘쇠퀘드’인데 그 뜻은 ‘깨어 있는 자, 파수자’입니다. 유대 나라의 살구나무는 다른 나무들이 다 추위 속에서 잠자는 1월에 싹이 트고 꽃이 피어 3월에는 제일 먼저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이 살구나무를 보여 주신 것은 ‘너는 이 민족의 깨어 있는 하나님의 파수자가 되라는 의미와 네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사명을 감당할 때에 내가 깨어 있는 자가 되어 너를 지키고 보호하리라’는 뜻이 담기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나라나 어느 도시에 복을 내리시거나 벌을 내리시는 기준을 하나님을 모르는 정치가나 백성들을 중심해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할 자, 남은 자, 그루터기를 중심해서 복을 내리기도 하시고 벌을 내리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 사는 모든 시민의 회개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의인 50명을 찾고 계셨습니다. 당시 그 도시는 인구가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대단히 번창하고 화려한 도시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만약에 5만의 시민이 살았다면 하나님은 그 중에 1,000분의 1의 의인을 요구하신 것이요, 최저의 하한선인 의인의 수가 10명이었다면 5,000분의 1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이 우리나라에게 복을 내리시거나 벌을 내리시는 판단 기준이 믿지 않는 정치가들이나 악한 기업가나 강남의 탕자들을 중심한 것이 아니라, 바로 1,200만 기독교인 따라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깨어 있으면 하나님도 깨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복을 내리시지만, 우리 한국교회가 파수군의 역할을 못하고 오히려 죄악의 잠에 빠져 있을 때 경고의 채찍을 내리신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아니, 1,200만은 못 되더라도 5천만의 1,000분의 1인 5만 명의 의인만 깨어서 파수군의 역할을 다한다면 아무리 강대국이 쳐들어온다고 할지라도 히스기야왕 때처럼 강하게 지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겨울 속에 깨어 싹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살구나무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은 지금 암담한 환경 가운데서라도 깨어서 의의 싹을 내고 꽃을 피우며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합니까?
(l)우리 기독교인들은 감사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골4:2에는 “감사로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들이 앓고 있는 가장 큰 병은 욕심 병입니다. 너 나 없이 지나친 과욕에 빠지므로 감사가 사라지고 불만만 팽배해 있습니다.
안됩니다. 축복을 아무리 주어도 감사는커녕 더 큰 것을 주지 않는다고 불만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는 대단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자는 빼앗기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8.15 광복이나 6·25 사변을 생각하면서 오직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36년 동안 나라를 잃고 말과 이름을 뺏긴 입장에서 나라를 되찾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신 것처럼, 일제의 사슬에서 우리나라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해방된 지 얼마 안 되어 일어난 6;25 전쟁은 단군 이래 가장 처참한 비극이었습니다. 세계 2차대전 보다 70억불이 더 많은 200억불의 전비와 300만 명의 사상자, 1,000만의 이산가족을 내었습니다. 지금도 사변 시 남편과 부모를 잃은 분들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리고 낙동강 이남 지역만 남기고는 완전히 빼앗긴 땅이 되었습니다. 이제 2-3일만 있으면 완전 공산화가 될 위기였습니다. 그런 위기에서 극적으로 구함을 받은 나라, 완전히 잿더미로 변한 나라가 변하여 세계 수출의 11위 국가가 되었고 이제 선진국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나라가 되어 이렇게 풍족하게 살게 된 것은 천천만만 감사해야 옳습니다.
이번 여름휴가는 제게는 큰 도피처였습니다. 7개월 내내 영락교회 문제로 너무나 스트레스를 받은 데다 전교인수련회로 완전히 탈진되었음으로 휴가는 너무나 고마운 것이었습니다. 승용차를 몰고 속초와 강릉, 정선, 평창을 돌아보면서 심신이 회복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가 지금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산하를 돌아보면서 너무나 기름지고 잘산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같은 기후대에 있는 땅에서 북한은 계속 흉년이 들므로 굶주리는 나라가 된 반면, 남한은 매년 풍년이 들어서 쌀이 남아돌아가는 나라가 된 것이 어찌 우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북한은 하나님을 거역한 결과 징벌을 받고 있는 것이요, 남한은 하나님을 잘 섬긴 결과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남한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자가 많지 않은데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감사를 잊고 사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일 때가 많습니다. 저는 열 살 때 6·25 사변을 겪었는데 세 번이나 피난을 해야 했고 공산당 치하에서 인민 학교에도 강제로 출석해 ‘김일성 장군’ 노래도 배웠고, 피난 간 외갓집이 중공군의 숙소가 되는 바람에 그들이 퍼트린 무서운 열병에 걸리어 죽을 지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변 이후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점심시간이면 밖으로 나가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속내의나 양말, 혹은 신발이 없어 추석이나 설날을 손꼽아 기다렸다가 선물로 받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새 속내의나 양말을 신으면 때가 찌들도록 입습니다. 벗어 놓으면 또 다른 형제가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연필이 없어 몽당연필에 탄피 껍데기를 꽂아서 사용하여야 했고, 치약이 없어서 굵은 소금으로 이를 닦았습니다. 변소에 화장지로 쓸 신문지를 구하기 힘들어 나뭇잎이나 지푸라기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때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쌀밥도 맛이 없을 정도이고 한우 고기를 먹어도 ‘맛이 있니 없니’ 불평할 정도로 기름졌습니다. 아무리 못 사는 집이라도 50년대 부잣집보다 더 잘 살 정도로, 집집마다 TV, 냉장고, 가스 렌지, 세탁기, 컴퓨터 등이 있고 승용차를 가진 가정들이 점점 늘어갑니다.
그런데도 너 나 없이 더 좋은 음식, 더 좋은 옷, 더 좋은 주택, 더 좋은 자가용이 없다고 불평불만으로 팽배해 있습니다. 속된 말로 ‘먹을수록 양양’ 이라는 말이 바로 지금의 한국인에게 해당되는 말이 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만이라도 감사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감사하지 않으면 뺏기는 날이 올지 모릅니다.
(2)한국 성도들은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해방이 홀연히 왔다고 하지만, 수많은 애국지사들이나 독립군들이 목숨을 걸고 해방을 위해 투쟁한 결과라고 할 수 있고, 한국의 수많은 성도들인 교회당에서, 혹은 골방이나 토굴에서 눈물로 기도한 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25 사변 당시 부산 지역만 남기고 며칠 후면 완전히 적화되는 위기에서 권력자들이나 부자들은 외국으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국교회는 무엇을 했습니까? 이제는 더 피할 길이 없는 줄 알고 교회당에서, 바닷가 모래 벌에서, 혹은 골방에서 집중적으로 기도했고, 1·4 후퇴 시에는 부산에 대개 다 몰려 와서 거국적인 기도회를 열고 주님의 큰 보호를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신교 각파의 연합체인「기독교연합 전시비상대책위원회」를 결정하고 미국 대통령과 유엔 사무총장에게 각각 메시지를 발송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하심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라”는 것이 성경의 명령이요, 이스라옐 민족이나 초대교회는 비상시에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한 것은 기도였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지금은 자다가 깨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북한 땅의 회복을 위해서 집중적으로 기도할 때인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한국의 성도들은 빛과 소금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 자기를 모르는 백성들을 중심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의인의 행동, 의롭게 사는 자의 수를 헤아리십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어떻습니까? 풍요하게 잘 살게 되어서인지 점점 물질만능주의에 빠지고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너나없이 세상에 머리를 향하고 무엇을 더 먹을까, 무엇을 더 가질까, 무엇을 더 즐길까에 깊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또한 음란이 만연되어 심지어는 교사가 어린 제자들을 범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지고, 심지어 의붓아버지와 의붓오빠가 어린 자녀와 동생을 밤마다 추행했다는 짐승이하의 소식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합니다. 더 나가서는 돈을 위해서라면 부모까지 살해하는 일들이 점점 자주 뉴스거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도덕이 땅에 떨어진 책임이 어느 누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음을 자복하여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각각의 위치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았다면 이 사회는 이렇게 병들어 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도 물질만능주의 풍조 속에서 맘몬신이라는 우상을 섬기었음을 솔직히 고백치 않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70년대 80년대 한국교회는 물질 축복을 열심히 설교하였고, 그러한 축복을 받는 자만이 진정한 성도인양 부추기는 잘못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러한 결과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축복이라는 신앙을 가진 자들이 판을 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때일수록 뜻있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빛과 소금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어떠한 부패한 상황에서도 및을 발하는 것이요, 짠맛을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빛은 사랑의 삶을 말하고, 소금은 의로운 삶을 말합니다.
이제는 한국 성도들이 축복 받는 열심에서 벗어나 사랑과 의의 일에 열심을 내야 할 때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학생으로, 주부로서, 직장인으로서, 혹은 공무원으로, 정치인, 군인, 기업가, 예술가로서 어느 위치에 있든지 빛과 소금으로 살 때에 하나님은 여러분을 의인의 숫자로 하나하나 세실 것이요, 그것이 바로 이 나라 위에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축복을 받게 하실 줄로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끓는 가마 환상은 진노의 막대기임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예례미야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할 때에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유대 나라가 범죄한 결과 북쪽에 있는 갈대아인들이 끓는 가마처럼 전쟁 준비를 하였다가 때가 되면 침략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살구나무처럼 깨어 있지 못할 때에 이러한 진노의 칼, 진노의 막대기가 임한다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대로 시용하시기 위해서 애굽, 블레셋, 앗 수르, 바벨론, 로마를 몽둥이로 시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한국과 한국교회의 끓는 가마는 해방 전에는 일제요, 해방이후에는 바로 북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북한에 김일성과 김정일이라는 가장 잔인한 독재자와 그의 왕국을 두셔서 남한을 반세기 동안 압박하시는 뜻이 무엇입니까?
바로 한국을 마지막 때 세계적인 선교 국가로 쓰시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 끓는 가마를 두시어 남쪽을 향하여 기울어질 듯 만들어 두심으로 한국 교회는 늘 깨어서 기도하게 함으로 부흥 성장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또한 온 국민이 늘 긴장 속에서 살게 하심으로 선교 두 번째의 강국으로 세계 앞에 우뚝 서도록 만드신 것이요,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하는 것을 막고 계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북쪽에 끓는 가마를 두어 언제 기우려 부을 지 모르는 위기감을 주시는 이유는, 복음 선교 국가로 크게 쓰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는 동안 남한은 50 년대 건국기(建國期)를 거쳐서 60년대 70년대의 경제성장기와 8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기로 발전되었고, 이제 90년대 이후부터는 세계화를 이룩할 시기를 눈앞에 두게 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큰 뜻이 뒷받침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교회가 깨어서 세계선교 사명을 감당하면 하나님도 깨어 계셔서 이 나라를 강하게 지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 있지 못하고 세상의 잠에 빠져서 세상과 야합을 하고 맘몬신이라는 우상을 교회 안으로 끌어 들여 섬기기를 계속한다면 하나님은 끓는 가마를 우리나라에 부으실지 모르는 것입니다. 사실, 6·25 사변은 하나님의 징벌이었습니다.
해방을 홀연히 주시고 기독교 대통령과 정치가들에게 정권을 맡겼는데 끝없이 정적을 암살하는 데만 골몰하고 한국교회는 사분오열 싸움질만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 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죄악을 징계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때는 온 한국교회는 전력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때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북쪽에는 마치 가마가 끓어 언제 넘칠지 모르는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사실, 거의 반세기 동안 북한이 한 일은 전쟁준비를 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한 군사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현역은 65만, 예비군 450만인 반면, 북한 현역은 100만, 예비군은 500만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무기는 거의 80프로가 구식이고 남한은 현대식입니다. 남한군사력이 세계 9위고 북한이 11위입니다.
그러나 ‘너 죽고 나 죽자’면서 목숨을 걸고 전쟁을 일으키면 이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면 그런 식으로 할 것이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많은 전쟁의 위험성이 있어 왔습니다. 4;19 혁명 혼란 시, 6·3 사태 시, 71년 1월 김신조 사건 시, 70년대 중반 월남 패망 시, 70년대 후반 땅굴이 발견되기 전 박대통령 시해사건 시, 12;12 사태 시, 80년도 광주사태 시, 2001년 미국 9;11사태 등, 얼마든지 남침의 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은 기적 가운데 막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 안에는 기도하는 교회, 기도하는 성도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보면 생활이 풍족해져서인지 기도하는 열기가 점점 식어지고 있습니다. 주일날도 자가용 몰고 식구와 놀러가기 바쁜 성도들이 점점 급증하고 있습니다. 결코, 결코 안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살구나무처럼 깨어서 감사하고 깨어서 기도하고 깨어서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때에 어떤 전쟁의 위험에서 큰 방패로 막아 주실 것이요, 더 나가서는 해방을 홀연히 열어주신 것처럼 북한과 동방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을 홀연히 열어주시는 날이 옴으로 정주, 선천, 신의주, 함흥, 해주를 회복시키시어 중국과 러시아 등, 북방 선교와 동남아시아와 회교권 선교의 기지로 강하게 사용하실 날이 머지않을 줄로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