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인(塞人)
1. 내 친구
내 친구는 첫 딸을 낳자마자 산고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아내와 사별하였다. 당시 지방 은행원이었던 그는 눈물로 며칠을 보내다가 마른기침을 뱉어내더니, 은행원 생활을 접고 딸아이를 혼자 키웠다. 그의 딸은 예쁘진 않았지만 그의 바람대로 잘 자랐고, 그는 그의 수중에 돈이 바닥나자 건설 현장의 막노동이나 은행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그런대로 세월을 이겨냈다. 딸이 스무 살이 되던 무렵, 딸은 아버지의 시든 꽃 같은 삶이 싫다며 가출을 해버렸다. 그는 또 아내와 사별했을 때처럼 눈물로 며칠을 보내다가 체념한 듯 마른기침을 몇 번 하더니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몇 년 후, 딸이 집으로 돌아왔다. 한 남자를 데리고. 둘은 서로가 선택한 운명이라며 결혼을 하겠다고 내 친구 앞에서 무릎을 조아리면서도 입맞춤을 해댔다. 남자는 어느 지방 군수의 아들이라 했다. 내 친구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모든 재산을 딸의 결혼에 쏟아 부을 수밖에 없었다.
1년이 지나자, 가끔 소식만 전하며 뜸했던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저 딸아이를 낳았는데요. 언청이예요. 요새 언청이 수술은 별것도 아니고 흔적도 남지 않는다는데 시어머니는 우리 집 유전이라며 악다구니를 써대네요. 몸은 아파 죽겠는데 속상해요.”
“그냥 살아라”
속은 찢어지는데도 그는 무심한 척 딸에게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나서 딸은 손녀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 이혼했어요. 시어머니 등살에 남편도 내게 등을 돌려버렸어요. 애를 내가 키우는 조건으로 위자료 몇 푼 주대요.”
손녀는 언청이 수술도 안한 상태였다. 그는 손녀의 언청이 수술을 하러 의사인 동창을 찾아가야만 했다. 내 친구는 이제 딸을 키울 때처럼 손녀를 키우기 시작했다. 딸은 거의 매일 외출을 했고 밤이면 술에 취해 들어와 제 딸은 쳐다보지도 않고 제 방으로 흐느적거리며 들어가 곯아떨어지는 날이 허다했다. 가끔은 남자를 데리고 오기도 했다. 그는 그러한 딸을 무심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떤 때는 2,3일간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칭얼대는 손녀를 안고 거실을 왔다갔다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딸이었다. 인터폰수화기에 들려오는 딸의 목소리는 여전히 혀가 꼬부라져 있었지만, 늘 ‘나예요’하고 한마디만 던지고 들어왔던 때와는 달리 계속 울고 있었다.
“아빠,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요? 무슨 인생이 이래요? 인생이 뭐예요? 인생이 뭐냐구요?”
그는 멍하니 수화기를 잡고 있는 상태에서 안고 있는 손녀를 팔에서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말을 자신에게 되묻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인생이 뭐냐구?”
2. 나
나는 이제까지 별의별 직업과 사업을 전전하며 산다고 살아왔지만 함양 박씨 오한공파 8대 종손인 지금의 내 수중에 남은 건, 종손으로 물려받은 돈 가치가 별로 없는 평범한 시골의 논밭 몇 마지기가 전부다. 산업이 발달하고 있었던 젊을 적 직업은 회사원이었다. 젊은 호기에 유행에 따라 양복점에서 기성복으로 옮아가며, 마네킹에 입혀진 베이지색 바바리코트에 눈을 팔거나, 같은 회사 젊은 직원들과 나이트클럽의 화려한 조명아래에서 서투른 디스코를 추면서 성적 카타르시스를 풀거나, 고향친구들이 그리워 한 달에 두 번 주말이면 수원에서 광주까지 내려가 밤새 술로 보낸 덕분에 돈이 모일 새가 없었다.
그리고 그 놈의 회사가 형제지간에 지분 싸움으로 인해 주식 숫자에 밀린 동생 사장의 부름으로 전남 강진에서 2년, 충남 예산에서 2년, 전북 정읍에서 2년, 자리를 잡으려고 하면 이사하고 또 이사하게 하더니, 이 와중에 결혼까지 해 종족생존을 위해 아이를 둘까지 갖는 통에 도무지 돈에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서울 서초동 본사에서 나를 불렀을 때, 나는 서울에 월세집도 장만하기 힘들어,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하는 일말의 희망적인 이 말을 증오하고 저주하고 경멸한다.
그동안 회사원, 제조업, 판매업, 보습학원 강사, 농업, 건설업 등 수많은 직업과 사업을 거쳤지만, 모든 일에 내 나름대로 정성과 열정을 다하여 일을 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사람 좋다는 소리만 말 웃음처럼 히힝거리며 들려올 뿐, 돈은 내 손에는 쥐어지지 않고 늘 내 상대편에서 맴돌았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 투자의 속삭임도 너무 두려워 아예 손사래 치기가 일쑤다. 하지만, 전 회사에서 배운 아이템 몇 개로 제조업을 하다가 영업에 아둔한 사람을 썼던 이유로 3년도 안되어 완전히 말아먹었다.
1년을 백수로 지내다가 알음알음으로 어느 대학교 매점의 운영을 맡았을 때, 그 시절이 새옹이 준마를 얻었던, 잠깐 쏠쏠한 시점이었다고 생각된다. 처음엔 과자와 문구만을 팔던 소규모 매점에서, 학교가 교외로 옮겨가면서 황량한 주변 환경 덕분에 학생들 대부분이 하루 한 번씩은 들러가는 장소로 변해, 매출이 급성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5년 넘게 전셋집만 전전하던 나는 아파트도 한 채 마련하고, 새 자동차도 장만했으며, 일요일엔 식구들과 교외에 나가 외식도 할 만큼 생활의 여유가 생겼던 것 같다.
그러나 4년이 지나자 반 평 남짓의 계산대에서 13시간 이상씩 수많은 학생들과 상대하며 한없이 반복된 일상을 되풀이하면서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70kg을 넘나들던 체중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1주일에 서너 번씩 마시는 밤술에 의해 어느새 78kg까지 늘어나 걸을 때면 온 몸이 출렁거리는 느낌을 받았고, 손목에 맥을 집어보면 맥박이 세 번 뛰고 한 번 쉬는 부정맥이 감지되었으며, 가슴이 찡하니 아리고 아파오는 증상도 오고 만 것이었다. 더구나 아침이 되어 매점에 들어서면 저기 보이는 계산대가 그렇게 보기 싫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점점 가슴의 통증이 잦아지자 어쩔 수 없이 하루 틈을 내 2년 후배인 보훈병원 순환기 내과부장인 김완에게 나를 내밀었다. 내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몇 번 요리조리 대보더니 그가 바로 내뱉은 말이었다.
“ 형님, 심장병입니다.”
어느 날 나는 혼자 소주를 마셨다. 밖은 어둡고 막막하였다. 내가 사는 이 시대의 내 삶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 내 살아온 발버둥에 대해서, 세상이 나를 버리는 것에 인정할 수가 없었다. 내 피가 소주에 잠기며 고통의 물살을 일으킬 때쯤 내 정신은 의외로 선명해져 갔다. 곳곳에서 버려졌던 이제까지의 내 모든 삶이여. 변방에서 포만의 성으로만 향해 내달렸던 내 모든 삶이여. 저 어둠이 두려워 컹컹 짖는 개가 되더라도 되돌아가자. 다시 변방으로. 가면 좋은 날도 올 것이다. 이렇게 유목민으로 계속 살아갈 바엔 다시 정착민으로 돌아가자. 모든 그리움을 버리마. 모든 싸우기를 버리마.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을 버리마.
나는 다음날 시골로 내려갔다. 가을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