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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기 전반부, 그리고 민수기 후반부의 모세이야기(오경)
방학동에서 하신 첫 번째 강의는 노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두 번째 강의는 아브라함과 야곱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노아의 이야기에서 강조하셨던 부분은?
노아의 홍수 사건과 함께 하느님이 언약을 하셨다, 하느님이 인간과 계약을 맺었다. 무언가 약속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에서 제일 중요한 내용은?
"내가 다시는 이런 식으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라는 약속을 하셨어요. 그러고 사람들에게 "대신에 너희가 나에게 약속해 주어야 할 것이 있어! 이전에는 과일이나 먹었는데 이제는 고기를 먹을 수 있어. 돼지고기를 제외한 다른 고기를 먹을 때 피와 접촉해서는 안돼!"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과 17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계약이 얼마나 중요한지 두 번이나 나옵니다,
그 계약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내리시는 축복인데,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이야기에서도 베텔(Beth-El)이라는 장소에서 한 번은 야곱이 도망가면서, 두 번째는 야곱이 자신의 집(형인 에사우를 만나야 하는 상황)으로 돌아오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때로는 천사와 씨름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또 그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하느님의 약속을 받는 장면이었습니다.
노아의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 야곱의 이야기에서도 계속해서 계단식으로 시나이 계약을 위해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고 있는 겁니다.
각각의 사건 안에서 하느님께서 무언가를 약속하시고 반대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셨다는 그와 같은 계단, 결국 시나이 계약을 세우게 됩니다. 오늘 만나게 될 모세라는 인물을 통해.
창세기에서 보면 아브라함과 이사악,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야기와 함께 요셉 이야기가 상당히 길게 마무리되어 있습니다. 그 요셉과 함께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그 이야기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가나안에 기근이 들었을 때 요셉 덕분에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이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파라오는 그들에게 일정한 땅을 주었습니다.
그 땅의 이름이 고센이라는 곳
그들은 이제 이집트로 옮겨가서 자리를 잡아가게 되는데, 이집트로 이주할 때 야곱의 가족들은 수는
70명, 72명, 75명으로 기억하시는 방식에 따라서 나타납니다.
70이라는 숫자는?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이 첫 번째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12명을 파견하셨는데,
그리고 다시 한번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는 70명을 파견하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70이라는 숫자가 성서적인 전통에서는 상당히 좋은 숫자로 인식이 되는 것 같습니다.(70, 72, 75)
70여 명이 이집트로 가고 어느덧 시간이 흐릅니다. 한 4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릅니다.
또는 430년으로 기억하기도 합니다.
▶ 400년에서 430년이라는 흐르면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신 약속이 있으셨죠?
"너 자신의 숫자가 많아지게 될 것이다."( 일부 내용이 창세기 15,5과 17,5-7절에도 나옵니다.)
"하늘의 별만큼, 바다의 모래만큼, 땅의 먼지만큼..."
그리고 그 하느님의 축복이 이루어집니다. 이집트 땅에 사는 이스라엘의 숫자가 마구마구 늘어납니다.
숫자가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저의 주관적인 느낌 :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으로 자손의 숫자가 늘어났다는 것은 당시에 그 강해짐이 자손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라면, 지금의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강함을 저희에게 주실 수 있다는 의미일까요?.... 묵상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각자에게 주시는 은사? 현세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잘 살아갈 수 있는 동력?....)
그리고 현재 이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는 미국 대통령의 자극된 행동이 있다고 하지만 자극을 부추기는 것의 주원인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의견들이 많습니다.
그 이스라엘에서 전쟁을 부추기는 하나의 집단이 있는데, 하레디라는 사람들. 이스라엘언어로 말하면 하레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스라엘에 나라를 만들어야겠다고 유럽의 강대국들이 후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곳에 나라를 만들려고 하는데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나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구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를 씁니다.
그때에 하느님의 율법에 굉장히 충실했던 동구권에 있던 사람들, 북아프리카에 있던 사람들, 스페인 지역에 있던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이런 약속을 합니다.
"너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나라에서 다 해줄 거야!"
아이를 낳으면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온 가족이 평생 먹을 수 있도록, 풍족한 삶을 보장해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군대 면제도 약속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남자도 여자도 모두 군대를 갑니다.
그런데 하레디에 소속된 사람들은 군대면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외견의 모습은 복장부터 강한 외투를 입고, 머리를 기르는 모습인데 그들이 아이를 낳을 때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몇억씩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혜를 받은 하레디들은 아이를 많이 낳았을 겁니다. 요즘의 통계상으로 한 명의 여성이 7.5명 정도의 아이를 출산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이스라엘의 들어온 하레디들의 인구수의 비해 지금의 이스라엘에 하레디들이 차지하는 인구의 수는 전체 20%가 넘어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란과의 전쟁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작 본인들은 군대에 가지 않으면서....
"나는 군대를 안 가지만 이 전쟁은 계속해야 돼!"라는 마음
현재 이스라엘에서 이란과 전쟁에 대해서 휴전을 해야 하는지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여론조사를 해보면, 65% 이상이 휴전을 반대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유다민족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적인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갖고 있는 생각이 과연 하느님의 뜻인가? 하는 부분으로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아닐 것 같다고 여겨집니다.
다시 본래의 성경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이집트로 들어간 이스라엘의 숫자가 요셉을 통해서 늘어났습니다. 이집트를 떠날 때 이스라엘의 숫자는 약 60만 정도가 되었습니다.
70여 명에서 => 60만으로
그렇게 늘어나자 이집트인들은 유다인들, 이스라엘을 좋아했을까요? 무서워했습니다.
더욱이 이집트의 새로운 파라오는 요셉을 몰랐다.라고 탈출기의 저자는 기록합니다.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커다란 힘을 갖게 되고 파라오의 왕권도 강해졌던 역사가 있는데 그것을 몰랐다.
따라서 파라오는
요셉을 몰랐다. 요셉을 몰랐다는 것은 요셉이 섬기던 하느님도 몰랐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에 두려움을 느낀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산파들에게 이스라엘 여자들이 남자아이들 낳으면 다 죽이게 하고 여자아이들은 낳게 합니다. 하지만 산파들은 파라오의 말에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산파들을 통해 은밀하게 했던 이스라엘에 대한 억압을, 이제 드러내놓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공포합니다.
파라오의 공포, 두려움은
오늘날 심리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폭력성의 기저에는 두려움이 있다.
자신의 두려움으로 인간은 폭력적인 된다는 것으로, 파라오도 이와 같은 상황이었을 겁니다.
결국 이 세상이 평화롭게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두려워할 필요 없어. 그대들이 갖고 있는 그 두려움에 휩싸일 필요가 없어. 우리는 모두 한 형제야."
지금 미국이 갖고 있는 두려움은 무엇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꼭대기에 있는 이유는, 이란이 핵무기를 갖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 핵무기로 자신들을 공격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으로 실은 더 지혜롭지 못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그들이, 그들의 미움이 쉽게 치유될까요?
치유되지 않고 언젠가 이스라엘과 미국에 나쁜 일이 될 겁니다. 그 전쟁으로 인해 미국과 이스라엘은 더 안전하지 않은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 새로운 파라오는 두려움으로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아이들을 죽입니다.
나중에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이집트로 해방시키시면서, 파라오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자,
모두 열 가지의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 열 번째 재앙이 바로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 맏배의 죽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너무 심하신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겠지만
성경의 논리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탈출기의 시작에서 파라오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죽였습니다.
그 파라오의 범죄에 대한 동태복수, 그게 하느님의 재앙입니다.
이스라엘 아들들의 죽음에 대해서, 그 죽음에 대한 정의로운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이집트의 아들들도 죽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이 갖고 있는 복수의 논리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그와 같은 복수가 신적정의입니다.
"하느님은 내가 당한 불의한 일을 복수해 주시는 분" 그래서 하느님은 정의로운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이 구약성경의 세계에서는 신적정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이 구약성경에서는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동태복수법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눈 하나를 다쳤을 경우, 똑같이 하나의 눈만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두 눈다 멀게 하는 것은 안됩니다.
그 이상의 복수는 정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그것조차 너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만, 동태복수법만의 윤리적 관념만 지녀도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동태복수법을 우리가 뒤집어서 생각한다면 바로 황금률입니다.
"다른 사람이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도 남에게 해 주어라."
동태복수법은 복수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뒤집으면 그게 바로 다른 사람에게 주고받는 사랑과 은혜, 행복에 대한 황금률
동태복수법과 황금률이 공통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파라오가 아들들을 죽이는 상황이 자행되었을 때 레위지파에서 아이가 하나 태어납니다. 바로 모세
탈출기 1장과 2장 모세가 태어나는 장면에서는 모세의 부모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탈출기 6장에서 족보가 나오는데,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레위가 크핫을 낳고 크핫이 아므람을 낳습니다. 그 아므람이 요케벳을 아내로 맞았는데, 당시에는 이스라엘에서 근친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삼촌과 조카, 고모와 조카 사이에도 혼인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레베카, 야곱과 레아와 라헬도 친척관계)
모세의 부모의 이름인 아므람과 요케벳(탈출기 6,20)입니다.
이 두 사람이 아들을 낳았는데 파라오의 명령에 따르면 아이를 죽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죽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탈출기에 나옵니다. "그 아이가 잘 생겼더라. 그래서 죽이지 않았다."
그 탈출기의 내용을 정말 잘못이해하면 "예나 지금이나 잘생기면 좋아......"
하지만 탈출기에서 잘생겼다는 의미는,
히브리어로 TOV라는 형용사로 사용됩니다.
그 토브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라고 말씀하실 때 Tov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 말은 단지 잘생겼다는 의미보다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지셨던 하느님의 의도와 충실하게 이루어졌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나중에 철학자들은, "보시니 좋았다. 토브라는 의미 안에는 진, 선, 미가 담겨있어야 한다."
보시니 좋으시기 위해서는 그것이 참되야 하고, 선해야 하고,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린 아기였던 모세에게 보시니 좋은, 토브의 모습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모세가 어느 정도 자라서 광주리에 담아서 띄워 보내게 되는데, 이때의 광주리도 노아의 이야기에서 나왔던 테바와 같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동물들, 어린 모세가 물에 빠지지 않고 탈 수 있었던 테바,
광주리 같은 것으로 만들고 그 안에 역청 같은 것을 발라서 물이 새어 들어오지 않게 방수처리를 한 것.
그 광주리를 이집트의 공주가 발견하고 왕자처럼 키우는데 그때에 필요했던 유모를 모세의 어머니가 하게 됩니다.
본래는 모세의 어머니가 키워야 하는데, 공주의 양자가 되면서 모세의 어머니는 월급까지 받으면서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 사실 구약성경에서 이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파라오는 자신이 똑똑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오히려 그 일로 파라오는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모세가 파라오에게 가서 "저희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하고 말했을 때 파라오가 모세의 말을 허락했다면,
열 가지 재앙을 겪을 일도 없었을 테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인 약속의 땅을 가게 되었을 때 탈출기를 보면 이집트 사람들로부터 금과 은 여러 가지 쇠붙이를 선물처럼 받아가는데,
그렇게 빼앗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모세가 간다고 했을 때 파라오가 보내주었다면 이렇게 어리석은 상황을 겪지 않았을 겁니다.
이것이 탈출기에서 계속해서 드러나는 파라오의 어리석음입니다.
파라오의 어리석음은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한 작은 실수를 만회하려다가 점점 더 일이 커지는 경험을 우리는 한 번씩 다 하게 되는 것처럼요.
모세가 이집트의 공주의 양자로 자라게 되는데 이 공주에 관한 이야기도 탈출기 안에서는 특별한 정보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대기를 보면 그 공주의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비트야, 모세를 양자로 맞은 파라오의 딸 이름입니다. 비트야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집트를 떠날 때 동행한 것으로 유다 전통은 기억합니다. 비트야는 모세와 함께 광야로 나와서 시나이 산으로 갔다가 약속의 땅으로 간 이집트인으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가지 못했죠?…)
그리고 이집트에서 성장한 모세가 마흔 살쯤 되었을 때, 그 중간에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 텍스트는 설명하지 않지만 모세는 유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점점 더 인식하게 되고 그 무렵, 이집트인이 이스라엘인을 때려죽이는 것을 보면서 화가 나서 이집트인을 때려죽입니다.
벌 받을 것이 두려운 모세는 도망을 갑니다.
모세의 인생은 모두 120년입니다.
이집트에서 살아왔던 40년,
그리고 도망 나와서 미디안 땅으로 와서 미디안의 사제인 르우엘(이트로,호밥)의 딸인 치포라와 결혼해서 살았던 40년,
그리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와서 이스라엘을 이집트로 해방시켜서 광야에서 함께 유랑하던 40년
그래서 모두 모세의 인생은 120년
그 모세가 이집트에서 도망 나와 미디안의 우물가에서 미디안의 사제의 딸들을 만나게 되고 그중 한 명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모세가 장인의 양 떼를 돌보는 일을 하다가 호렙산으로 가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있는데 떨기나무가 불타버리지는 않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떨기나무와 불,
이것은 두 가지 세상이 겹쳐져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세상과 거룩한 세상
지상과 천상으로 떨기나무는 지상에 있고, 불은 천상에 있습니다.
떨기나무가 불에 붙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떨기나무는 불이 붙은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 두 가지의 상이 겹쳐져 있지만 불타지 않는 묘한 광경을 모세가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 광경을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간 모세가 천사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 너의 신발을 벗어라."
▶ 이 부분에 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이슬람인들도 우리와 같은 성경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쿠란이라는 경전입니다.
쿠란에는 구약성경의 내용도 담고 있고 신약성경의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 쿠란에는 예수님의 이야기도 나오고 성모님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대신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 중에 한 명처럼 소개합니다.
그 쿠란이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과 나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하실 때 우리 구약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천사가 나타나서 이사악을 대신해 양을 바치게 해서 목숨을 잃지 않습니다. 모리야 산에 일어나는 야훼이레(야훼 이르에) 사건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런데 쿠란에서는 그 장면에서 이사악이 아닌 맏아들로 이야기하고, 그래서 이스마엘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지금의 아랍민족입니다.
따라서 쿠란과 구약성경은 아주 비슷합니다.
또 비슷한 점은,
우리는 성당을 짓지만 그들은 모스크를 짓습니다. 그 모스크 안에 들어가면 카펫이 깔려 있고, 머리를 땅바닥에 대고 절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모스크 안에 들어가려면 무조건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 모스크, 하느님이 계시는 장소에 들어가려면 정결해야 하므로 신발을 벗어야 한다.
▶ 두 번째로 신발은 고대인들에게는 일정한 지위를 상징했습니다.
옛날의 노예들은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종들은 외출한 주인이 돌아오면 그의 신발을 벗겨서 발을 씻겨주는 일을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묶어드릴 자격도 없다." 또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만찬을 하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종의 해야 할 일을 예수님께서 해주신 것입니다.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 너는 신발을 벗어라."(탈출 3,5)
; 정결한 모습으로, 그리고 네가 갖고 있는 사회적인 지위를 버리고 하느님 앞으로 나와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이 일을 모세에게 맡기십니다.
"모세야, 이제 내가 부탁할 일을 해줘야겠어. 고향으로 돌아가 내 백성을 데리고 가서 너희의 성조들에게 약속했던 그 땅으로 돌아가서 왕국을 세우도록 해라."
모세는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들었을까요?
잠시 앞으로 되돌아가서,
파라오가 이스라엘의 아들들만 죽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노역을 시켰었습니다. 그 노역 중에 하나가 벽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당시의 고대 사람들이 만드는 벽돌은 흙에다가 지푸라기를 넣어서 벽돌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벽돌을 쌓아서 만든, 고대 근동의 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지구라트.
피라미드도 일종의 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이 머물렀던 고센 지방에서, 미디안으로 갔던 모세가 호렙산으로 가서 하느님을 만나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와서 파라오를 만나게 되는데 파라오가 그들을 내보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열 가지 재앙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열 가지 재앙은 1.2.3/ 4.5.6/ 7.8.9 으로 셋, 셋, 셋이라는 순환적인 구조를 갖고 있고 마지막에 이집트의 맏아들과 맏배를 죽게 하는 재앙입니다.
▶ 이 열 가지 재앙을 학자들마다 설명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 열 가지 재앙이 이집트에서 매년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있었던 자연재앙이었다고 생각하였고, 또 다른 학자들은 열 가지 재앙은 그 재앙과 관련된 이집트 사람들이 섬기던 다신적인 신들을 하느님께서 무찌르는 내용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개구리, 등에, 어둠등의 신들이 있었는데 하느님께서 압도하시는 내용이다)
이 열 가지 재앙과 함께하는 열 번째 재앙을 겪고 나서 파라오는 모세가 이스라엘인들을 데리고 이집트를 떠나는 것을 마침내 허락해 줍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파라오
파라오의 어리석음은,
인간적으로 세속적으로 생각해 보면 파라오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 파라오가 살았던 이집트의 기본적인 경제는 노예경제였습니다. 노예들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경제
그런데 그 노예들이 이집트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파라오에게는 대안이 없습니다.
재앙이 보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면서도, 재앙을 통해서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놓아주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그들을 놓아주지 못하는 겁니다. 파라오의 딜레마입니다. 노예제도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26년에도 노예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노예들이 없는 좋은 제도 속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와 다른 지역의 세상은 옛날과 비교하여 노예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결국 파라오도 노예제도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대안이 없기에 열 가지 재앙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의 우리와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로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면서 기후위험의 상황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낮의 낮기온이 30도가 넘었다고 합니다. 5월인데...
지금 계속해서 지구의 온난화가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는 상황임에도 우리는 특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 노력들을 하고 있을 겁니다. 많은 면에서 부족한 것 같습니다.
지금 정부나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소비를 줄이고 생산을 줄이고 에너지를 아껴 쓰면서 지구 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더 모색하고 노력하며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강하게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역시 생산하고 소비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에너지를 쓰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파라오처럼 우리 역시 이렇게 재앙을 맞이하면서도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탈출기의 파라오를 만나면서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파라오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파라오는 열 가지 재앙을 만나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는 것을 허락하는데, 그들이 어떻게 이집트를 떠나갔을지에 대한 전통적인 길입니다. 또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모릅니다.
시나이 산의 위치도 사실은 정확히 모릅니다. 이곳이 시나이 산일 거야! 하고 생각한 것은 십자군 전쟁 때 사람들이 "아! 이쪽이 시나이 산이 아닐까?"라고 어림잡아 짐작한 것이지 학문적인 연구의 결과는 아닙니다.
예루살렘에는 예수님 승천 성당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서지리학적으로 정확한 위치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통적인 방법에서는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고 카데스로 가서 약속의 땅으로 갔을 것이다. 전통적인 신학은 이스라엘의 이동 경로를 설명합니다만,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는 과정에서 파라오가 자신이 잘못된 결정을 했다고 생각하면서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뒤쫓아 옵니다.
그리고 갈대바다를 이스라엘이 먼저 건너고 이집트의 군대가 뒤따라 건너는 와중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갈대바다를 건널 때는 바람을 불어서 그 바다를 갈라지게 하시고, 이집트 군대가 갈대바다를 건널 때는 그 갈대바다가 다시 합쳐지게 해서 이집트 군대가 몰살당하는 마지막 장면을 탈출기는 보여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집트의 군대가 탈출기의 역사적인 모습에서 사라졌다는 것과 못지않게 하느님께서 바다를 가르시고 마른땅을 만드셨다는 고백입니다. 창세기에서 설명하셨지만 고대의 신학적인 세계관에서 물과 땅이 상징하는 바는,
물은 죽음이고 땅은 생명입니다.
따라서 물을 가르시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땅, 새로운 생명을 인도하셨다.라는 고백이 갈대바다 사건이 갖고 있는 중요한 고백입니다.
그 갈대바다 사건을 겪고 나서 모세와 미르얌이 노래를 부릅니다.
왜 노래를 부를까요?
인간은 왜 노래를 합니까? 공원에서 산책을 하면서도 연세 높으신 어른들이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산책을 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때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정말 음악을 사랑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나 요즘 음악 프로그램을 보면서 노래를 잘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모세의 노래와 미르얌의 노래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은?
그들은 왜 그러한 노래를 만들었을까?라는 물음이고,
그것은 잊지 않기 위해서,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다를 가르시고 마른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셨다! 는 그 사건을 너희는 잊지 말아라! "하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앞서서 열 가지 재앙의 마지막 맏아들과 맏배를 죽게 하는 그 재앙과 함께 이와 같은 사건을 잊지 않는 두 번째 방법도 등장합니다.
맏아들과 맏배를 죽이는 사건이 탈출기 12장에서 등장하는데,
그 12장을 전후해서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축제를 명령하십니다.
"파스카 축제를 지내라!"
축제를 지내는 이유도 기억하기 위해서,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파스카 축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셨다. 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갈대바다의 사건을 통해서는 모세의 노래와 미르얌의 노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죽음(바다)을 가르고 우리를 마른땅(생명)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 파스카 축제가 나중에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이 오늘날 그리스도교회 미사의 전형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미사를 드리는 이유도 또한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셨지만,
그 전날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면서 빵을 떼어 주시고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너희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해!" 하신 그 당부의 말씀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한편으로는 미사 제의를 통해서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누는 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신부님, 저는 매일매일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했습니다."하고 말한다면 반쪽뿐인 신앙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나머지 반은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빵을 나누고 마실 것을 나누며 우리들의 삶을 나누는 모습에서 채워질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나누어 주신 그 생명을 나누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부하신 그 기억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미사를 드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인데, 그 기억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그 시간을 현재화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현장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미사를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억이라는 단어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현재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현재화하는 것! 단지 잊지 않는 것이 아니라ㅡ
그와 같은 삶이 우리 안에서 이어지는 것, 계속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저는 이번 신부님 강의를 들으면서,
미사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 때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금의 삶을 통해 현재화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씀으로 와닿았고 정리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파라오와 모세의 대결 구도였습니다.
갈대바다를 건너고 나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들이 이집트를 떠나서 광야로 나와서 시나이 광야로 가는 여정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차라리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하던 때가 더 좋지 않았을까?"라고 모세에게 불평을 합니다.
시나이 계약을 맺기 전까지 모세에게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데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믿고 이집트에서부터 따라 나오긴 했는데 야훼라는 신이 정말 있기는 한 겁니까?"
야훼라는 신의 존재에 관해서 질문하면서 모세에게 불평을 합니다.
그리고 시나이 계약을 맺고 나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과정에서 역시 또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평을 합니다.
시나이 계약 전에 불평의 내용은 비슷합니다.
"먹을 것이 없다. 마실 것이 없다. 누군가가 우리를 공격한다. 우리가 위험에 처해있다."
하지만 시나이 계약을 맺고 나서 약속의 땅으로 갈 때까지 그들의 불평은,
"야훼라는 신이 있다는 것은 이제 알겠는데, 그 신이 정말 우리에게 약속의 땅을 줄 정도로 능력이 있습니까?"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나이 계약 전에는 야훼의 존재에 대한 불평을 했고, 시나이 계약을 맺고 약속의 땅으로 갈 때까지는 야훼의 권능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를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텍스트를 읽어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어리석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사실 그 안에서 이스라엘이 점점 더 하느님을 알아가고 성장해 가는 이스라엘 신앙에 성장의 여정으로 이야기를 읽어가게 됩니다.
그 이야기의 틀을 봅시다.
모세오경은,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 권의 책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는 모세가 나오지 않습니다. 마지막 신명기는 모세의 회고록(연설문)과 같은 책입니다.
이 두 가지 책을 빼놓으면,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인데,
탈출기의 후반부부터 레위기, 그리고 민수기의 전반부까지는 모두 법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모세의 이야기는 탈출기의 전반부와 민수기의 후반부입니다. 그 가운데는 모두 법전입니다.
그 탈출기의 전반부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갔다가 이집트에서 탈출해서 시나이 산으로 가서 계약을 맺는 이야기까지입니다.
그리고 민수기 후반부는 민수기 10장에 와서야 이스라엘이 비로소 시나이 산을 떠납니다.
그 시나이 산을 떠나서 요르단 강 동편까지 오는 이야기.
탈출기의 전반부와 민수기의 후반부가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 탈출기의 전반부 내용의 질문은?
야훼라는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그리고 민수기 후반부의 내용은, 그 하느님은 정말로 능력이 있는 분이신가? 하느님의 권능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 두 가지의 질문이 모세오경에 던지는 질문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함께 하느님을 알아가는 과정,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체의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면서 계약을 맺게 됩니다.
왜 세 번이나 질문할까요?
이것은 고대 사람들이 법적인 효력을 갖기 위한 것입니다. 구두로 대답했을 때 한 번 대답한 것은 법적인 효력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두 번, 세 번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야훼께서 말씀한 것, 율법입니다.
그것을 모두 지키겠다고 이스라엘이 약속했습니다. 세 번.
나중에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어보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어보십니다.
세 번 물어보시는 첫 번째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기 때문에 물어보셨다고 대답할 수 있고
그보다 더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이제 베드로를 통해서 교회와 예수님의 관계가 서로 법적으로 혼인한 관계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고 베드로가 교회를 대표해서 예수님께 사랑을 약속하는 것이 법적 효력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나이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특별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고 나서 살갗이 빛나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는 너울 같은 것을 쓰고 나왔다고 합니다.(탈출 34,29)
그런데 히브리 말이 번역하는 것이 조금 까다롭습니다.
이 부분을 히브리 말에서는 살갗이 빛났다고 번역할 수도 있고, 살이 돋으라 졌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살이 돋우라진 것은 뿔이 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서 옛날 성경에서는 모세의 머리 부위에 뿔이 났다고 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모세의 상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시기에는 히브리말 성서를 번역하면서 살갗이 빛났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살갗이 돋아나왔다고 썼습니다.
그런데 그 모세는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요?
미디안에서 모세는 결혼도 했고, 자식도 낳았으니 행복하게 살았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집트로 돌아옵니다.
이집트에서 파라오와 긴장감 넘치는 대결을 하고, 백성들을 데리고 광야로 나옵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은 모세를 잘 따르지도 않고 계속 불평하고 대들었습니다. "야훼라는 신이 있는 겁니까?"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을 때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증언판을 받아옵니다.
그런데 내려오니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에 화가 난 모세는 증언판을 깨버리고 다시 하느님께 백성들을 위해 용서를 청합니다. 그리고 다시 시나이 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다시 증언판을 받아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겁니다.
그 약속의 땅으로 가는 중에도 백성은 모세에게 불평을 합니다. 그리고 카데스에 가서 약속의 땅으로 열두 명의 정찰대를 보냅니다.
정찰을 다녀온 사람들이 여호수아와 칼렙을 제외하고는 "그곳에는 힘센 사람들이 있어서 가면 안 됩니다."라고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습니다. "너희는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야 한다."
그들이 사십 년 동안 헤매다가 요르단 강 동편에까지 가서 그곳에 있는 느보산 피스가 꼭대기(신명 34,2)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저 요르단 강 서편에 있는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고 한 땅을 보아라. 나에게 불평하는 세대 중에 너도 하나였기 때문에, 너도 저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너는 여기에 묻힐 것이다."
모세는 그곳에서 숨을 거둡니다. 신명기 마지막을 보면 모세의 무덤의 자리를 알지 못한다고 전합니다.(신명 34,5-6)
모세의 형인 아론의 자손들은 대사제가 되는 동안, 모세의 후손에 관해서는 구약성경에서는 어떠한 약속도 전하지 않습니다.
세속적으로 보면,
모세는 행복한 삶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유다 전통과 구약성경을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모세는 누구보다 더 위대한 예언자의 모습이었고 하느님을 마주 보고 이야기했던 시간을 우리에게 전하는 인물로서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옵니다.
모세가 전한 신앙의 삶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성장해 가는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탈출기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영광송으로 마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첫댓글 아멘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