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은 결코 죽지 않는다
A Cloud Never Dies
BY ANDREA MILLER| OCTOBER 11, 2023, Lion`s Roar
앤드리어, 라이언즈 로어(불교잡지 사자후) 2023년 10월11일
Andrea Miller on what Thich Nhat Hanh taught her, his inspiring and courageous life, and how — through us — his wisdom will continue.
앤드리어 밀러는 틱낫한 스님의 가르침, 그분의 용감했던 삶, 그리고 그분에게 받았던 영감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어떻게 계속되고 있는지에 대해 썼다.
It was 2013, during his final North American teaching tour, and we were at Blue Cliff Monastery in the Catskills. The retreat had just wrapped up, and I’d stayed to interview him. We talked about many things—his family, karma, the key to happiness.
그분의 마지막 미국 법문 순례였던 2013년 우리는 미국 뉴욕 캣스킬 산 벽암사(碧巖寺)에 있었다. 정진기간을 끝내고 나는 그분과 면담을 가지려고 머물렀다. 우리는 스님의 가족과 업과 행복의 열쇠가 되는 것 등 많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Then at the end, feeling a mix of happy and sad, I put my hands together in gassho. It was wonderful to connect with Thay, as his students call him, but he was getting older, frailer. Would this be the last time I’d see him?
끝날 무렵 나는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감정으로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그분의 제자들이 그를 부르는 호칭인 ‘타이’와 연결되는 일은 경이로운 일이었지만, 그분은 늙었고, 허약 해졌다. 이것이 그분을 뵈는 마지막 시간인가?
If you think that I am only this body, then you have not truly seen me.” —Thich Nhat Hanh
만일 당신이 이 몸을 나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진정한 의미에서 나를 만난 게 아닙니다. – 틱낫한
The next day, almost all of the eight-hundred-plus retreatants were gone, leaving only the monastics, lay volunteers, and me.
그 다음날, 거의 800여명의 결제 참여자 모두 떠나고 스님 몇 분과 자원봉사자를 포함한 나만 남았다.
In the morning, we were a small group eating breakfast under a tarp.
아침에 우리는 차양 아래 가까이 모여서 함께 아침을 먹고 있었다.
Truth be told, I wasn’t chewing my corn on the cob as mindfully as I could have. But suddenly I was brought back to the present moment by the sight of Thay crossing the lawn, coming toward us.
사실 나는 할 수 있는 한만큼 마음을 챙겨 옥수수 알을 씹어 먹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타이(틱낫한 스님을 부르는 애칭, 본문에 나오는 ‘타이’는 전부 스님을 지칭한다)가 푸른 잔디를 가로질러 천천히 걸어오는 걸 보는 현재 순간으로 돌아왔다.
Thay walked with a couple of brown-robed brothers, taking slow, deliberate steps. His facial expression was placid but profoundly aware. Even in movement, he expressed a stillness I’d never seen in anyone else.
타이는 갈색 승복을 입은 몇 분의 스님들과 함께 천천히 주의 깊은 발걸음으로 걸어왔다. 그의 얼굴 표정은 평온하며 깊은 알아차림이 있었다. 움직임 동작에서 누구에게서도 본 적이 없는 고요함이 깃들어 있었다.
Arriving under the tarp, he went from table to table, greeting people individually and smiling widely as children spontaneously hugged him. When he came to me, he patted me on the shoulder and asked if I was enjoying the dharma book he’d lent me. If I’d had the unselfconsciousness of a child, I would have hugged him.
차양 아래까지 오자마자 그분은 테이블을 찾아 다니면서 모든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인사를 하며 활짝 웃으니 사람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분을 안았다. 그분에 내게 와서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빌려준 법문 책을 재미있게 읽었냐고 물었다. 나도 자의식이 없는 어린애처럼 그분을 껴안았다.
Then Thay took his quiet leave, crossing back over the green lawn. Again, I found myself wondering: Is this the last time I’ll see him?
그리곤 타이는 파란 잔디를 가로지르며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다시 자신에게 물었다. 이것이 그분을 뵈는 마지막 시간인가?
Thich Nhat Hanh was still a child when he had his first spiritual experience. On a school trip, he visited a sacred mountain near his home in central Vietnam where a hermit was said to live. Thay, separating from the group, wandered into the forest to look for him. But instead of finding the hermit, he found a natural well with water so clear he could see all the way to the bottom. He scooped up water with his hands and drank deeply. He felt completely fulfilled, his thirst quenched. He didn’t need to meet the hermit—he didn’t need anything. A sentence like a poem sprang into his young mind: “I have tasted the most delicious water in the world.”
틱낫한이 처음 영적인 경험을 했던 때는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이다.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은둔수행자가 살고 있다는 중부 베트남의 성스러운 산을 찾아갔다. 은자를 찾으려다 무리와 떨어져 산속을 헤맸다. 은자를 찾는 대신에 거기서 샘물을 발견했는데, 너무나 맑아 밑바닥까지 비쳐 보였다. 손으로 한 움큼 떠서 깊숙히 마셨다. 너무나 만족스럽게도 갈증이 가셨다. 그는 더 이상 은자를 만날 필요가 없어졌다. 그는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그 어린 마음에 마치 시와 같은 문장이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물을 맛보았네”
At age sixteen, Thay began his Buddhist training as a novice monk at Tu Hieu Temple in Hué. Thay’s teacher, Thich Chan That, was very fond of him and taught him to bring mindful concentration to every task, be it tending cows, harvesting rice, or just shutting a door.
열 여섯이 되자 타이는 후에(중부 월남에 있는 도시)의 뚜휴寺로 출가하여 사미승으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그분의 스승이신 틱찬탓은 스님을 아주 좋아하여 소를 돌본다든지, 쌀농사를 짓든지, 혹은 단순이 문을 닫는 것을 포함한 어떤 일을 하든지 주의를 집중하여 마음을 챙기라고 가르쳤다.
Once, Thay was visiting another temple with his teacher when he saw a Zen monk sitting beautifully straight on a wooden platform. “In my heart as a novice,” Thay later recalled, “there came a vow, a longing, to sit like that. … I would not need to do anything. I would not need to say anything. I would just need to sit.”
한번은 타이가 스승과 함께 다른 절을 방문했는데, 거기서 나무로 된 법상에 똑바른 자세로 아름답게 앉아 있는 선승을 보았다. “사미인 내 가슴에, 나도 저 스님처럼 그렇게 앉으리라는 맹세 내지 서원이 생겼지요.”라고 회상했다. “나는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어떤 것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다만 앉고 싶었다.”
Vietnam was suffering under Japanese occupation and French colonial rule. When the Second World War ended in 1945, a dire famine broke out. Stepping out of the temple and into the streets, Thay would see the bodies of people who’d starved to death. “Suffering impels young men and women to go out and join the revolution,” he later said. “As a young person in such a situation, you have to do something for your country.”
베트남은 일본의 점령과 프랑스의 식민 지배아래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때는 극심한 기근이 일어났다. 절에서 거리로 나왔을 때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고통이 젊은 남녀들을 집에서 나오게 하여 혁명에 가담하도록 하였죠. 그런 상황에 처한 젊은이라면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해야만 했겠죠.”라고 훗날 말했다.
Many young Vietnamese monastics embraced Marxism. Thay, however, believed a reformed, socially conscious Buddhism was the key to relieving his country’s suffering, and he set about sharing his vision. By the time he was in his mid-twenties, he’d penned several books and was renowned for his fresh, insightful perspective.
많은 수의 젊은 스님들은 마르크시즘을 수용했다. 타이는 사회적 의식을 가진 개혁불교가 나라의 고통을 덜어주는 열쇠가 된다고 믿었기에, 자기의 비전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일을 했다. 그가 20대 중반이 될 때까지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그의 신선하고 통찰력 있는 관점으로 인해 유명해졌다.
From 1946 to 1954, war raged between colonial French forces and the nationalist Viet Minh. French soldiers repeatedly raided Buddhist temples, searching for resistance fighters and demanding food. Despite being nonviolent and unarmed, monastics were killed, including some of Thay’s friends. When the Geneva Accords officially ended the conflict, Vietnam was split in two, and the seeds of America’s war with Vietnam were planted.
1946년에서 1954년까지 프랑스 식민주의자와 베트민 민족주의자들 사이에 전쟁이 격화되었다. 프랑스 군대는 저항군을 찾는다고, 식량을 요구하면서 사찰을 반복적으로 쳐들어왔다. 타이의 제자들 몇 분을 포함하여, 스님들은 비폭력적이며 비무장이었음에 불구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제네바 조약으로 공식적으로는 갈등이 종식되었음에 베트남은 남북 양쪽으로 분열되었으며, 미국과 베트남 사이에 전쟁의 씨앗이 뿌려졌다.
Meanwhile, in Saigon, Thay was cofounding the An Quang Pagoda, which would host a reform-oriented Buddhist institute. In 1954, he became its director of education and spearheaded an innovative program for young monastics, which combined traditional Buddhist education with science, math, history, literature, foreign languages, Western philosophy, and creative writing.
그 즈음 사이공에서 타이는 개혁지향적 불교를 수용하는 안쾅 파고다를 공동 개창했다. 1954년에 교육을 맡은 이사가 되어 젊은 승려들을 위한 혁신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지휘했다. 거기에서는 전통불교와 함께 과학, 수학, 역사, 문학, 외국어, 서양철학과 창조적 글쓰기를 결합한 교육이 제공되었다.
In 1956, he was made editor-in-chief of Vietnamese Buddhism, the magazine of the National Buddhist Association. Catholicism was the dominant force in South Vietnamese politics, and Thay used his prominent position to consolidate Buddhist groups to help protect Buddhist traditions and customs. But as a reformer, he met intense resistance from conservative Buddhist elders.
1956년 그는 베트남 민족불교 협회가 발행하는 잡지의 편집장을 맡았다. 카톨릭은 당시 남 베트남의 정치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타이는 불교 전통과 관습을 지키기 위해 불교 단체들을 통합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개혁가로서 그는 보수적인 불교계 원로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았다.
On a personal front, Thay experienced what he described in his journal as the greatest misfortune of his life: his mother passed away. “Even an old person doesn’t feel ready when he loses his mother,” he explained later. “He feels as abandoned and unhappy as a young orphan.”
자기 일기장에 썼던 것처럼 개인적으로 가장 큰 불행을 경험했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자식이 아무리 늙더라도 자기 어머니의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됐다고는 할 수 없다.” 는 말이 있듯이 “나는 어린 고아가 된 것처럼 버림받은 것 같은 불행을 느꼈다.”고 훗날 술회했다,
Then Thay had a powerful, healing dream in which his mother was young and vibrant again, and he spoke to her without any grief. When Thay awoke, he had the insight that being and nonbeing, birth and death, are just concepts. The idea he’d lost his mother was only an idea; it wasn’t the truth.
그때 타이는 치유가 되는 강한 에너지를 주은 꿈을 꾸었는데, 젊어 져 다시 생기에 넘친 어머니에게서 어떤 슬픔도 느끼지 않은 채 대화를 나누었다. 깨고 난 다음 그는 존재와 비존재, 탄생과 죽음은 단지 개념일 뿐이라는 걸 통찰하게 되었다. 그가 어머니를 잃었다는 생각도 단지 하나의 생각일 뿐,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Being able to see my mother in my dream, I realized that I could see my mother everywhere,” he wrote. “When I stepped out into the garden flooded with soft moonlight, I experienced the light as my mother’s presence. It was not just a thought. I could really see my mother everywhere, all the time.”
“꿈 속에서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어디서든지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썼다. “내가 밖으로 나왔을 때 정원은 부드러운 달빛으로 흘러 넘치고 있었다. 나는 달빛에서 어머니의 현존을 느꼈다. 그건 생각이 아니라, 나는 어디에서나 언제나 실제로 어머니를 만난다.”
“Some young people are angry with their father,” Thay said at my first retreat with him, at the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in 2011. “They cannot talk to their father. There is hate.”
“어떤 젊은 이들은 아버지에게 화를 낸다”고 2011년 브리티시 콜롬비아 대학에서 첫 번째 수행프로그램을 할 때 타이가 말했다.”그들은 아버지께 말을 걸 수 없었다. 거기엔 미움이 있기 때문이다.”
My own father had left us when I was four. One day, my mother and I came home and there was a note on the table. He’d gotten on a plane to a faraway city where a woman was waiting for him. I didn’t see my father for two years.
내 아버지는 내가 네 살 때 우리를 버렸다. 어느 날 어머니와 내가 집에 왔을 때 테이블 위에 쪽지 하나가 있었다. 아버지는 비행기를 타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여자가 있는 먼 도시로 떠났다. 나는 이년 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Time went on, I grew up. Then one night while I was sleeping, the phone rang. It was him, drunk. “I have cancer,” he said.
Less than a year later, I was with him as he took his last, gasping breath. In his death, my father abandoned me again, and this sparked a rage that was all mixed up with grief.
시간이 지나 내가 어른이 되었다. 어느 날 밤 내가 잠들어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는데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었다. 술 취한 목소리로 “나는 암에 걸렸어.”라고 말했다. 일년이 안 되어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몰아 쉬는 임종을 맞았다. 아버지는 죽음으로써 다시 한번 더 나를 버렸다.
Now I was in a university gym turned dharma hall. Thay, who was sitting onstage flanked by pots of orchids, was addressing the children sitting on the floor directly in front of him. But the adults were listening just as raptly.
이제 나는 법당으로 변한 대학교 체육관에 있다. 타이는 난초 화분이 놓인 무대에 앉아서 바로 앞 마루에 앉은 아이들에게 법문을 하고 계신다. 그러나 어른들은 들커덕 소리를 내면서 듣고 있었다.
“If you look deeply into a young man,” Thay said, “you will see that his father is fully present in every cell of his body and he cannot take his father out of him. So, when you get angry with your father, you get angry with yourself.”
“당신 내면에 있는 청년을 깊이 들여다본다면 당신은 당신의 몸 세포 전체에 당신의 아버지가 깃들어 있음 보게 될 것이고, 그땐 당신 밖으로 아버지를 쫓아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 아버지에게 화를 낸다면 당신은 곧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과 같다.”
Imagine, Thay said, if a plant of corn got angry at the grain of corn from which it sprang.
상상해보라. 옥수수가 제가 자라 나온 옥수수 낫알에게 화를 낸다는 것을.
“We are the continuation of our father and our mother, like the plant of corn is the continuation of the seed of corn,” he taught. “Your father is in every cell of your body; your mother is in every cell of your body. So, when your father dies, he doesn’t really die. He lives on in you, and you bring him into the future.”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연속이다. 마치 옥수수가 옥수수 씨앗의 연속인 것처럼.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의 몸 안 전체 세포에 있고, 당신의 어머니는 당신의 몸 전체 세포에 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죽는다 해도 진짜로 죽은 게 아니다. 그분은 당신 내면에 살아 있다. 당신은 그분을 미래로 데려간다.”
According to Thay, if we’re angry with our father or mother, we have to breathe in and out, and find reconciliation. This is the only path to happiness, and if we can live a happy, beautiful life, our father and mother in us will be more beautiful also.
타이는 말씀하시길 “만일 당신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화가 난다면 들 숨과 날 숨을 훈련하면서 화해의 길을 찾으라. 이것이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만일 우리가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 간다면, 우리 안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는 더 더욱 아름답게 되리라.”
“During sitting meditation,” said Thay, “I like to talk to my father inside. One day I told him, ‘Daddy, we have succeeded.’ That morning, when I practiced, I felt that I was so free, so light, I did not have any desire, any craving. I wanted to share that with my father, so I talked to my father inside: ‘Daddy, we are free.’”
“좌선 수행 중에 내면의 아버지께 말을 걸고 싶었다. 하루는 내가 말을 걸었다. ‘아빠, 우리는 성공했어요.” 그날 아침 수행에서 나는 아주 자유로움과 경쾌함을 느꼈다. 나에겐 어떤 욕망이나 갈망도 없었다. 나는 그걸 아버지와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내면의 아버지께 말을 걸었다. “아빠, 우리는 자유로워졌어요.”
In the late fifties, Thay spent a month in a Saigon hospital where, it’s believed, he almost died. The death of his mother, the turmoil in his homeland, and the opposition of the Buddhist hierarchy to his progressive ideas had left him suffering from acute insomnia. His body was weak, he was depressed, and his sense of hope was all but snuffed out.
1950년대 후반에 타이는 사이공 병원에 한 달 간 입원했는데, 거기서 그는 거의 죽을 뻔했다. 그의 어머니의 죽음과 조국의 혼돈 상태, 그리고 그의 진보적인 사상에 대한 불교 고위층의 반대는 그를 극심한 불면증으로 몰아갔다. 몸은 쇠약 해 졌고, 의기소침해졌으며, 희망이 있다는 느낌이 거의 다 날아가버렸다.
But Thay had a hunch: if he could achieve complete awareness of breathing and walking, he’d be able to heal. As a young monastic, he’d learned the principles of following the breath and slow walking meditation. Now he experimented with combining his breath and steps while walking more naturally; instead of counting only the breath, he counted the steps and breath in harmony. This turned out to be an effective way for him to embrace his despair without being swept away by it, and he recuperated.
그러나 타이는 직감했다. 만일 그가 호흡훈련과 걷기 명상에서 완전한 알아차림을 성취한다면 낫을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젊은 스님이었기에 호흡과 천천히 걷는 명상의 원칙을 배웠다. 그리고 이제는 호흡과 걷는 동안의 발걸음을 더 자연스럽게 하는 것을 결합하면서 실험을 해보았다. 다만 숨을 헤아리는(수식관) 대신에 발걸음과 호흡을 함께 헤아렸다. 이것이 그에게 효과가 있어서 절망에 휩쓸리는 대신에 오히려 절망을 끌어안게 했다. 그러자 회복했다.
In 1959, while giving a lecture series for university students, Thay met Cao Ngoc Phuong, the future Sister Chan Khong and his closest collaborator. She was just a young biology student but was already leading social work projects in the slums of Saigon.
1959년 대학생들에게 시리즈 강의를 하던 중 차오 옥 푸옹-훗날 찬콩(眞空)비구니이자 그와 가장 친밀했던 조력자를 만났다. 당시에 그녀는 한낱 젊은 생물학과 학생이었지만, 이미 사이공 빈민가에서 사회사업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었다.
In 1964, a great flood hit war-torn Vietnam. The most devastated populations were those living in conflict zones, where virtually no one dared deliver aid. But Thay and Phuong were willing. They organized a small team to travel by boat from village to village, distributing food, knowing they could be shot at any time. They met people whose whole families had drowned, children injured by gunfire, and mothers who urged them to take their babies because they saw no other hope for them.
1964년 전쟁에 시달리는 베트남에 홍수가 덮쳤다. 가장 피해를 크게 본 사람들은 분쟁지역에 사는 주민이었다. 그들에게 구호의 손길이 미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타이와 푸옹은 어쨌든 해보려고 하였다. 타이는 작은 팀을 꾸려 보트를 타고 마을마다 방문해서 식량을 나눠주었는데, 언제라도 총을 맞고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족이 물에 빠져 죽었거나, 자식들이 총상을 입은 사람들을 만났고, 실낱 같은 희망도 찾을 수 없어 자기가 낳은 아기를 구호팀에게 억지로 맡기려는 엄마들도 만났다.
In 1965, with the war against Communist North Vietnam going badly, American combat troops entered South Vietnam for the first time. With the violence escalating, Thay and his friends reached out to prominent intellectual and spiritual leaders in the West, asking them to speak out against the Vietnam War. Thay personally wrote to civil rights leader Martin Luther King Jr., and the two men bonded.
1965년 북 베트남 공산주의자와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미군 전투부대가 처음으로 남부 베트남에 들어왔다. 폭력이 증폭되었기에 타이와 그의 동료들은 서양의 저명한 지식인과 영적 지도자들에게 손을 내밀어, 베트남 전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내 달라고 요청했다. 타이는 개인적으로 시민 운동가 마르틴 루터 킹 목사에게 편지를 했고,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이 맞았다.
Meanwhile, Thay established the School of Youth for Social Service (SYSS), a grassroots relief organization that mobilized young people to go into villages devastated by war and poverty. The young idealists set up medical centers and schools, organized agricultural cooperatives, and resettled the homeless. Being neutral, they angered both sides in the war.
그러는 동안 타이는 사회참여 청년학교(SYSS)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젊은이들을 모으고 조직하여 전쟁과 빈곤으로 피폐해진 마을로 들어가게 하는 풀뿌리 구호 단체였다. 젊은 이상주의자들은 의료센터를 세우고 학교를 만들고, 영농 조합을 조직하고, 홈리스(집 없는 사람)를 정착하게 해주었다. 이념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켰기에 싸움을 벌이는 좌파와 우파 양쪽을 화나게 했다.
In early 1966, Thay founded the Order of Interbeing, a community dedicated to his vision of a modern, socially engaged Buddhism, and following a revised and expanded version of the ten bodhisattva precepts. Since fanaticism leads to war, Thay made nonattachment to views a cornerstone of the order. The original six members included Cao Ngoc Phuong and another young woman, Nhat Chi Mai.
1966년 초반에 타이는 인터빙 교단(接現宗)을 창립했다. 이는 현대화 되고 사회참여적인 불교를 지향하는 자신의 비전을 따르는 4부 대중 공동체였다. 그들은 보살 10계를 수정하여 확장된 계율을 지켰다. 전쟁에 광기가 더해지자, 타이는 견해에 대한 무집착을 교단의 기초로 삼았다. 최초의 여섯 회원은 차오 옥 푸옹을 비롯한 또 다른 젊은 여신도 낫치마이였다.
A few months later, Thay embarked on an intense, three-month speaking tour of nineteen countries, calling for peace in his homeland. In Washington, just two weeks into that tour, the situation came to a head. Thay presented a proposal for ending the war in Vietnam that included a schedule for the withdrawal of U.S. troops, and the government of South Vietnam immediately branded him a traitor and revoked his right to return home. He was exiled.
몇 달 후 타이는 3개월 동안 19개국을 다니며 법문을 하는 일정을 강행하면서, 조국의 평화를 호소했다. 법문 일정을 시작한 지 2주 후 워싱턴에서 상황이 정점에 달하게 된다. 타이는 베트남에서 종전할 것을 제의하였는데, 그건 미군의 철수계획도 포함된 것이라, 남부 베트남 정부는 곧 그를 반역자라는 꼬리표를 붙이면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권리를 박탈했다. 그는 추방되었다.
In 1967, Thay received an onslaught of devastating news. His student Nhat Chi Mai immolated herself as a plea for peace; eight of his SYSS students were kidnapped and never returned; and five of his young SYSS social workers were led to the bank of a river by armed men and shot, leaving only one survivor.
When Thay cried, a friend tried to comfort him, saying, “There’s no need to cry. You are a general leading an army of nonviolent soldiers. It is natural that you suffer casualties.”
1967년 타이는 충격적인 뉴스를 받고 거의 죽을 뻔했다. 그의 학생이었던 낫치마이가 평화를 호소하며 분신을 한 것이다. 사회참여 청년학교(SYSS)학생 여덟 명은 납치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학교(SYSS) 학생 가운데 다섯 명의 사회운동가들은 무장한 남자들에게 강둑으로 끌려가 총살당했으며, 오직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 타이는 울었다. 친구들이 “울 필요 없어요. 당신은 비폭력 병사로 이뤄진 군대를 이끄는 장군이잖아요. 당신이 희생당한 당신의 병사들 때문에 고통받은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라 말하며 그를 위로했다.
“No, I am not a general,” Thay replied. “I am just a human being. It is I who summoned them for service, and now they have lost their lives. I need to cry.”
“아니요, 나는 장군이 아닙니다. 나는 한 인간일 뿐입니다. 내가 그들을 봉사의 길로 불러 냈던 겁니다. 이제 그들은 목숨을 잃었어요. 나는 울어야 해요.”
The following year was again marked by loss—the assassination of Martin Luther King. Thay had been instrumental in persuading him to take a stand against the Vietnam War, and the first time King publicly did so, he quoted from Thay’s book Lotus in a Sea of Fire. King had nominated Thay for a Nobel Peace Prize, and Thay had told King that the people of Vietnam described him as a bodhisattva. In the face of the tragic assassination, Thay made a deep vow to continue building what King had called “the beloved community,” not only for himself, but for King also.
다음 해는 다시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된 사건으로 아로새겨진다. 타이는 킹 목사가 월남전 반대의 입장이 되도로 설득하는 데 주된 역할을 했다. 킹 목사가 처음 그 주제로 연설할 때 타이의 책 <불타는 바다에 핀 연꽃>를 인용했다. 킹 목사는 타이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고, 타이는 베트남 사람들은 킹 목사를 보살이라 한다고 말해줬다. 비극적인 암살을 당한 타이는 킹 목사가 말했던 “사랑스러운 공동체”를-자기를 위할 뿐만 아니라 킹 목사를 위해서-건설할 것을 맹세했다.
On the fiftieth anniversary of Martin Luther King’s famous “I Have a Dream” speech, I was attending that retreat with Thich Nhat Hanh at Blue Cliff Monasrey.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유명한 연설 “나에겐 꿈이 있어요.”가 나온 지 50년을 기념하는 자리에 나는 벽암사에서 틱낫한과 함께하는 결제에 참여했었다.
To mark the anniversary, many of the retreatants gathered under a tent to ring a large bell. Breathing in, breathing out, we formed a messy, accommodating circle as a man read one of Thay’s poems and the rest of us repeated it. We were a powerful human microphone that could be heard even over the hard rain that was falling.
기념하기 위해 진정 대중의 많은 분들이 큰 종을 울려 텐트 아래로 모였다. 숨을 들이쉬고, 내 쉬면서, 우리는 처음엔 다소 두서없었지만, 한 사람이 타이의 시를 읊으면 다른 사람들이 따라서 반복하면서 천천히 원을 그리며 돌았다. 우리는 강한 빗줄기 속에서도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울리는 강력한 인간 확성기가 되었다.
I walk on thorns, but firmly, as among flowers.
I keep my head high.
Rhymes bloom among the sounds of bombs and mortars.
The tears I shed yesterday have become rain.
I feel calm hearing its sound on the thatched roof.
Childhood, my birthland, is calling me,
and the rains melt my despair.
나는 가시 밭을 걸어가지만 꽃밭 사이를 걷듯 든든합니다.
나는 고개를 높이 듭니다.
폭탄과 박격포 소리 가운데 운율이 피어납니다.
어제 흘린 눈물이 비가 되었습니다.
나는 지붕위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며 차분해집니다.
어린 시절, 나의 조국은 나를 부릅니다.
그리고 비는 나의 절망을 녹여줍니다.
I thought then of a dharma talk that Thay had given during this retreat. “When you look into tea, what do you see?” he’d asked. “I see a cloud. Yesterday the tea was a cloud up in the sky. But today it has become the tea in my glass. When you look up at the blue sky and you don’t see your cloud anymore, you might say, ‘Oh, my cloud has died.’ But in fact, it has not. When I look mindfully into my tea, I see the cloud, and when I drink my tea, I drink the cloud.
나는 타이가 정진기간 동안 했던 법문 한 자락을 떠올렸다.”茶를 들여다볼 때 당신은 무엇을 봅니까? 나는 구름을 봅니다. 어제 茶는 하늘에 올라 구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것은 내 유리잔 속의 차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을 볼 수 없을 때 ‘아, 나의 구름은 죽었구나’라 말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그건 죽지 않았습니다. 내가 알아차림을 가지고 차를 보면 나는 거기서 구름을 봅니다. 내가 차를 마시면 나는 구름을 마시는 겁니다.”
“You are made of cloud—at least 70 percent of you,” Thay had continued. “If you take the cloud out of you, there’s no you left. A cloud has a good time travelling. When it falls down, it does not die. It becomes snow or rain. The rain becomes a creek, and the creek flows down and becomes a river. The river goes to the sea, then heat generated by the sun helps the water evaporate and become a cloud again. Now the cloud has become tea, and Thay is going to drink it. Then what will become of this tea? It will become a dharma talk.”
“당신은 구름으로-최소한 당신의 70페센트는 구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티이는 덧붙였다. “만일 당신에게서 구름을 빼낸다면 당신은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구름은 즐겁게 여행을 다닙니다. 구름은 떨어질 뿐, 죽지 않습니다. 구름은 눈이 되고 비가 됩니다. 비는 개울이 되고, 개울은 흘러서 강이 됩니다. 강은 바다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태양에 의해 생긴 열기는 바다를 증발시켜 다시 구름을 만듭니다. 지금 구름은 차가 됩니다. 타이는 차를 마시려 합니다. 그러면 이 차는 무엇이 될까요? 그건 법문이 됩니다.”
Thay lived in exile from his homeland for thirty-nine years. As he put it, this made him feel in the early years like a bee separated from its hive, but through strong practice he was able to find his true home wherever he went—in the here and the now.
타이는 39년 동안 자기 나라에서 추방당했다. 이 경험이 처음에는 벌집에서 쫓겨난 한 마리 벌과 같은 심정이라 표현했다. 그러나 강한 수행으로 어디에 가든지 자기의 진정한 고향-지금 여기-를 찾을 수 있었다.
At first, Thay settled in Paris, where he was joined by Phuong. He became the chair of the Vietnamese Buddhist Peace Delegation, and they set to work organizing international sponsorship for thousands of Vietnamese children orphaned by violence. With the fall of Saigon, Thay and his friends took refuge in Fontvannes, in north-central France, where they named their mindfulness community Les Patates Douces (Sweet Potatoes). Continuing their work to support Vietnamese orphans, they also began sending relief to Vietnamese artists, writers, musicians, and intellectuals.
처음 타이는 파리에 자리를 잡았는데, 거기서 푸옹(찬콩비구니)를 만났다. 그는 파리 평화회담의 불교대표 의장이 되었다. 그들은 폭력으로 인해 발생한 수천 명의 베트남 고아들을 후원하기 위한 국제적인 기구를 조직하는 일을 시작했다. 사이공 이 함락되자, 타이와 그의 친구들은 프랑스 북부 중앙지역인 퐁반느에 정착촌을 세웠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마음챙김 공동체를 <르 빠따뜨 두세(달콤한 감자)>라 이름했다. 베트남 고아들을 후원하는 일을 계속하면서 베트남 예술가와 작가, 음악가와 지식인들 도움의 손길을 보냈다.
In 1976, Thay learned that thousands of refugees were adrift at sea, attempting to flee Vietnam. These “boat people” were not only living a nightmare of pirates, storms, and overcrowding; when they did manage to make port somewhere, they were often turned away.
1976년 타이는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베트남에서 도망쳐 나와 바다에 표류하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사람들을 “보트 피플”이라 하는데, 해적들에게 산 채로 악몽을 꾸는 듯한 피해를 당하기고 하고, 폭풍에 시달리며, 좁은 배에 사람이 너무 많이 태운 까닭으로 고통은 심각했다. 그들은 근처 항구에 가까스로 정박할 수 있었다 해도, 상륙하는 걸 거절당했다.
“It’s not enough just to talk about compassion,” Thay later said. “We have to do the work of compassion.” He and his friends rented three large boats and a small airplane and, within a few weeks of searching the seas, they’d rescued some eight hundred people. But all too soon the U.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 forced them to terminate their efforts.
“자비를 다만 말로만 이야기하는 걸로는 충분치 않아요” 타이가 훗날 증언했다. “우리는 자비를 실천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와 친구들은 세 척의 큰 배와 작은 비행기를 빌려서, 몇 주 동안 바다를 정찰하며 약 800명의 사람들을 구조했다. 그런데 유엔 피난민 위원회 고위 당국자가 그들이 하는 구조활동을 강제로 중지시켰다.
Thay sought a true answer to war and injustice. As he saw it, angrily demonstrating for peace was pointless. For someone to create peace in the world, they first had to find it in their own hearts, and mindfulness was a powerful tool to do that. So in the 1980s, Thay turned his attention more fully to building mindful community.
타이는 전쟁과 부정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찾았다. 그가 알아낸 것은 분노를 드러내면서 평화를 요구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세계속에서 평화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가슴에서 평화를 발견해야 하고, 알아차림이 그렇게 하는 강력한 도구라는 것이다. 그래서 1980년대에 타이는 마음챙김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더 온전히 주의를 쏟았다.
In 1982, Thay and his students bought a farm in southern France and converted the dilapidated barns into meditation halls, the sheep sheds into dorms. When they planted over a thousand plum trees, they named their new abode Plum Village.
1982년 타이와 그의 제자들은 남 프랑스에 농장을 사서, 허물어진 헛간을 명상홀(meditation hall)로 바꾸었고, 양떼가 있는 우리는 기숙사로 개조했다. 그들이 천 그루가 넘는 자두나무를 심고 나서, 그들이 사는 곳을 <플럼 빌리지, 자두마을>이라 새로 이름을 지었다.
That first summer, 117 people went to Plum Village, then year by year more people attended their summer retreats. In time, Plum Village would grow to be the largest Buddhist retreat center in the West, welcoming more than 10,000 retreatants a year.
그 해 첫 번째 여름 117명의 사람들이 플럼빌리지로 왔다. 그리고 해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여름 결제에 참여했다. 시간이 지나자 플럼빌리지는 연중 일만 명이 넘는 결제 참여자를 수용하는 서양에서는 최대 규모의 불교 결제 센터로 성장했다.
At long last, in 1988, Thay began ordaining his own monastic disciples. Although nothing could be more traditional in Buddhism than monasticism, Thay took a modern approach, creating a fully revised monastic code, establishing greater gender equality, and promoting consensus instead of top-down authority. Over time additional monastic-led mindfulness practice centers were founded, including Green Mountain Dharma Center in Vermont, Deer Park Monastery in California, the Asian Institute of Applied Buddhism in Hong Kong, and Stream Entering Monastery in Australia.
1988년에 드디어 타이는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계를 주어 출가시키는 수계의식을 시작했다. 불교 전통 가운데 수계하는 의식이 제일인데, 타이는 그 계의 내용을 현대적으로 접근하여 완전히 수정된 승려계율을 만들어 냈다. 남녀평등을 크게 반영하고, 하향식의 권위보다 공동의 합의를 진작시키는 것을 선택했다. 시간이 지나자 스님들이 이끄는 마인드풀니스 센터가 더 늘어났다. 버몬트 주에 그린 마운틴 다르마 센터(靑山法中心)와 캘리포니아 주의 디어 파크 템플(鹿苑精舍), 홍콩의 응용불교 아시아 협회와 호주의 예류(豫流, 수다원) 수도원다.
In the mid-2000s, Thay was finally granted permission to return to Vietnam. Despite the Communist government strictly limiting publicity, he was accorded a warm welcome with thousands attending his retreats. In Vietnam today, as in many Asian countries, Buddhism is often seen as old-fashioned, not relevant to the modern world. But Thay’s teachings inspired young people, and many ordained as monastics, finding a home at Bat Nha Monastery in the Central Highlands. This was viewed by the government as a threat. The four hundred nuns and monks at Bat Nha were harassed, and in September 2009, forced out. The monastery was shut down.
2000년대 중반에 타이는 드디어 베트남으로 돌아갈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공산주의 정부는 그가 대중에 알려지는 걸 극도로 제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진하는 처소에 수천 명의 사람이 참여하는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오늘날 베트남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아시아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불교는 오래되고 낡아서 현대 세계에 맞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타이의 가르침은 젊은 사람들의 혼을 불러일으켜 중부 베트남에 있는 밧나 사원으로 출가하게 함으로써 승려가 되게 했다. 이 사건을 베트남 정부는 위협적으로 받아드렸다. 밧나 사원의 400명의 비구, 비구니들이 괴롭힘을 당하다가, 드디어 2009년9월에 사원은 강제로 문을 닫고 말았다.
In 2014, Thay suffered a stroke leaving him unable to talk or walk. Though doctors believed he wouldn’t survive, he made a remarkable recovery and was eventually able to communicate his wish to spend his remaining days offering his presence and support to his students, first in Plum Village, France, then in Thai Plum Village, Thailand, and later at Tu Hieu, the temple in Vietnam where he’d trained as a novice.
2014년 타이는 말하거나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뇌졸증을 겪었다. 의사들은 회복할 수 없을 거라 했지만 그는 놀랄만한 회복을 보여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소원을 결국 이룰 수 있었다. 처음엔 플럼빌리지, 그리고 태국의 플럼빌리지, 타일랜드, 나중엔 자기가 사미시절을 보냈던 베트남 절인 뚜휴寺에 자기의 현존을 보이면서 제자들을 격려하면 자기의 마지막 남은 날을 보냈다.
In 2019, I saw beautiful photos of Thay in his wheelchair, enjoying the lush, green gardens of Tu Hieu. It was wonderful to know he was back in Vietnam, full circle. If only I could see him there, I thought. I said wistfully to my husband, “If the kids were older, we could take them.” But any hope I’d get myself and two young kids all the way to Vietnam crumbled when the pandemic hit. Then in January, I got the email from a colleague: “Thich Nhat Hanh has died.”
2019년 나는 휠체어를 타고 뚜휴사의 푸르게 우거진 정원을 즐기는 타이의 아름다운 사진을 보았다. 타이가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아 베트남에 돌아왔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내가 만일 거기서 그분을 뵈었다면, 난 생각했다. 난 생각에 잠긴 채 남편에게 말했다. “아이들이 더 나이가 들면 저기로 데려 가고 싶어.” 그런데 나와 어린 두 아이들이 베트남까지 가자는 바램은 판데믹(코로나)때문에 부서졌다. 그런데 1월에 나는 친구에게서 “틱낫한이 돌아가셨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On January 23, the casket ceremony was livestreamed with thousands of people from all over the world watching from their homes. I watched too, of course.
1월23일 입관의식이 집에서 지켜보는 수 천 명의 세계 불자들에게 라이브 스트림으로 중계되었다. 몰론 나 역시 그걸 보았다.
At Tu Hieu, monastics were gathered, saffron shoulder to shoulder. As the crowds’ singing swelled and broke, a procession of monks carried Thay’s body from his hut to the Full Moon Meditation Hall. There he was lovingly placed in his coffin. Then the coffin was shut tight and festooned with chrysanthemums, his favorite flower.
뚜휴寺에서 사프란 색깔의 가사로 어깨를 두른 스님들이 모였다. 대중의 염불 소리가 울려 퍼지며, 타이의 육신을 나르는 스님들의 행렬이 오두막에서 보름달 선방까지 이어졌다. 그리곤 그가 사랑했던 국화 꽃줄이 드리워진 관이 단단히 닫혔다.
I had been right, back in 2013. I never would see Thay again in the same form—and now none of us will. But we will see Thay again. Even as the casket ceremony was unfolding, we were seeing him.
나는 2013년에 돌아왔다. 나는 타이의 평시와 같은 상태의 몸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우리들 역시 그럴 수 없지만-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타이를 다시 볼 것이다. 입관(入棺)의식이 행해질 때도 우리는 그분을 볼 수 있다.
“If you think that I am only this body, then you have not truly seen me,” Thay once said. “Every time I see one of my students walking in mindfulness, I see my continuation. There will be a dissolution of this body, but that does not mean my death.”
“만일 당신이 이 몸을 나라고 여긴다면 당신은 진정한 의미에서 나를 만난 건 아닙니다.” 한 번은 타이가 말했다. “내 제자들이 알아차리면서 걸을 때 나는 나의 연속을 봅니다. 이 몸은 해체될 것이나, 그것이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All the people gathered to honor him, all the people around the world whose messages of gratitude were rolling across my screen, all of us who have been touched by his teachings, all of us reading this now, we are Thay’s continuation.
모든 사람들이 그분을 기리기 위해 모였다.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감사하다는 메시지가 나의 스크린에 흘러가고, 그분의 가르침에 감동받은 우리 모두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동안, 우리는 타이의 연속이다.
Andrea Miller is the editor of Lion's Roar magazine. She’s the author of Awakening My Heart: Essays, Articles, and Interviews on the Buddhist Life, as well as the picture books The Day the Buddha Woke Up and My First Book of Canadian Birds. Miller is also the editor of several anthologies, including Buddha’s Daughters: Teachings from Women Who Are Shaping Buddhism in the West, and sits on the board for the interreligious journal CrossCurrents. She has an MFA in creative writing and undergraduate degrees in journalism and English literature. Before joining Lion’s Roar, she taught English at a university in Mexico.
앤드리어 밀러에 대하여
사자후의 편집위원이다. 그녀는 <내 가슴의 깨어남:불자의 삶에 대한 수필, 기사 및 인터뷰>와 그림책 <부처님이 깨어나던 날>과 <카나다 새들에 관한 나의 첫 번째 책>의 저자이다. <부처님의 딸들: 서양에서 불교를 세운 여성들>을 비롯한 여러 권을 편집했다. 종교 간의 대화를 나누는 신문 <크로스 커런트>의 이사로 재직 중이다. 창조적 글쓰기에 대한 학사자격과 신문과 영문학의 대학원 석사 자격을 가지고 있다. 사자후에 일하기 전에는 멕시코에 있는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첫댓글 격동의 시대를 몸소 자비실천 살아내신 감동적인 글~
🙏🪷🙏
기꺼이 통역해서 글 올려주신 은혜~🌼🌻🍂
🌾이렇게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