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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 28. 오늘의 양식 :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삶의 터전에서 드리는 예배
표어 : 오직 예수. 재림 신앙. 땅끝 선교
1. 예배의 부름---------- 마음을 정돈하고 예배를 드리는 데 방해가 없도록 합시다. ------------
2. 찬양과 경배---------- 340 어지러운 세상 중에
375 나는 갈 길 모르니
432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
3. 신 앙 고 백---------- 사 도 신 경--------------------------------------------------------
4. 찬 송---------- 485 세월이 흘러가는데 --------------------------------------------
5. 기 도---------- 주의 나라를 위하여
주의 동력자를 위하여
예배자를 위하여 ---------------------------------------------------
6. 하나님 말씀----------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7. 설 교----------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주님을 문밖에 세워두었다. 목사인 그는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지 못하였다. 주께서는 그의 몸을 성전 삼지 못하시고 그를 떠나 계셨다. 그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경우이다. 그는 문을 열고 그를 영접해야 했다. 그가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면 그는 즐거운 식탁 교제, 즉 주님과의 교제의 회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이기는 자들은 심판날에 주의 보좌에 함께 앉고 그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
20-1] 문밖에서 :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1) '서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스테카'(*)는 현재 완료 시상으로 이미 오셔서 준비가 완료된 상태를 의미한다.
(2) '두드리노니'의 헬라어 '크루오'(*)는 현재 시상으로 지금도 계속해서 두드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은 죄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인내와 사랑을 알리시는 모습으로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초청과 약속의 말씀이다(Mounce, Trench).
(3) '문'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세상이다. (Swete, Beckwith).
* 마 24: 33 -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 약 5: 9 -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의미한다. (Mounce, Johnson).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앞 절에서 현재 회개하고 열심을 내라고 권면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의 '문'은 현재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지칭한다(Ladd).
(4)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 회개를 기다리시는 예수님
성도들의 심령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주님의 간절하심이 가슴 속 깊이 느껴져야 한다.
* 아 5: 2-4 - 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 눅 12: 36-37 -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 요 10: 7 -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 벧전 3: 20 -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0-2] 누구든지 :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1) 누구든지 -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 하나님의 말씀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회개 촉구의 권면을 듣고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의 결과를 나타낸다.
* 신 26: 7 -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 창 27: 22 - 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 욥 37: 2 -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
(2) 문을 열면 : 주님을 영접하면
문을 열라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라는 것이다. 유명한 홀만 혼트의 예수님이 문밖에 서 계시는 그림을 다 보셨을 것이다. 그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면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문 바깥쪽에는 문고리가 없고, 안에만 문고리가 있다. 그러므로 안에서 문을 열어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요즘은 이웃 사람끼리도 마음의 문을 안 연다. 목사끼리도, 장로끼리도, 성도끼리도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으니까 말씀이 들어가지 않고, 그래서 예수님이 마음 밖에, 교회 밖에 계신다. 교회들이 타락하고, 혼합주의, 종교 다원주의가 성행하므로 예수님이 그 속에 계실 수 없다.
20-3] 더불어 먹고 :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1) 주님 -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 주님께서 직접 찾아가신다.
(2)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① '먹고'라는 헬라어는 저녁식사를 의미하는 데이프논[deipnon]에서 유래하였다. 단어의 시제로 볼 때 저녁은 종말을 상징한다.
② 식사의 방법으로 입증된다.
③ 본문의 문맥적 구분으로 입증된다.
* 눅 22: 29-30 -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3) 더불어 먹으리라
천국에서 누리게 될 가장 친밀한 교제의 약속으로 '먹고 마신다'는 말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① 아침은 '아크라티스마(?κρατ?σμα)'인데, 마른 빵 조각을 포도주에 찍어 먹는 것을 말한다.
② 점심은 '아리스톤(?ριστον)'으로 도로가나 가로수, 광장에서 먹는 도시락을 말한다.
③ 저녁은 '데이프논(δε?πνο)'인데, 오래 앉아서 이야기하며 먹는 친교의 식사를 말한다.
여기서 먹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마 24: 45에 보면 '때를 따른 양식'이다. 여기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 저녁은 특징적으로 종말을 의미한다. 아침은 구약 시대를, 점심은 신약 시대를 예표 한다면 저녁은 종말 시대, 재림의 때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마지막 때 작은 책, 계시록이 열릴 것이며, 주님의 재림의 복음이 너희 안에 들어가서 이 말씀의 교제가 있겠다. 너와 내가 말씀으로 교제하고, 말씀으로 하나 되는 것을 얘기한다.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는 문을 열어야 하고, 열심히 믿어야 한다. 마지막 때는 계시록이 확 열릴 것(역사 속에 현실로 드러날 것)이다.
마지막 때에 일곱 영, 성령의 농사가 여물 때 늦은 비가 쏟아지듯이,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여 작은 책 요한계시록이 폭발적으로 죽은 영혼들을 살려내고 주님이 오신다. 따라서 지금은 열매 맺을 때다.
* 아 5: 1 -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 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
* 암 9: 14 -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을 먹으리라.
* 눅 17: 8 -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 약 5: 3 -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1) 더불어 먹음에 대한 여러 견해.
① 현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영적 교제를 의미한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는 영적인 교제를 말한다.
렌스키[Richard C. H. Lenski] : 이 잔치는 천국에서 열려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구절은 종말론적인 사상이 내포되지 않았다. [성경주석 계시록, p. 138]
존슨[A. F. Johnson] : 이것은 동양의 풍습으로 가장 가까운 친구와 격의 없는 친교를 나누는 중요한 기회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우리와 친교를 나누기 위하여 오시는 일을 성령을 통하여 하신다.[요 14:23]. [엑스포지터스 요한계시록, p. 385]
② 현세에서 시작하여 재림으로 완성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의미한다.
성도들이 회개로 주님을 영접하고 나누는 교제다. 현재로 시작하여 내세에서 온전히 누릴 때까지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본다.
핸드릭슨[W. Hendriksen] : 그리스도와 성도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특별한 우정과 언약의 관계를 의미한다. 즉, 성도는 구주시요 주인이신 분과 더불어 복된 교제를 갖는다.[요 14: 23. 15: 5. 요일 2: 24] 이 교제는 금세에서 시작하여 이기는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보좌에 앉으며 동시에 승리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와 함께 보좌에 앉을 때인 내세에 완전하게 된다.[성경주석 요한계시록, p.93]
③ 종말론적인 의미의 식사를 의미한다.
본문은 미래적인 메시아 왕국 안에서 성도와 그리스도가 누리게 될 교제의 향연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으로 해석한다.
로버트슨[A. T. Robertson] : 메시아왕국 안에서의 교제를 말한다.[눅 22: 30. 막 14: 25. 마 26: 29]. 고린도전서 6: 13에서처럼 비유적인 의미가 분명하다. [신약원어 연구해설 요한계시록, p. 205]
백위드[Beckwith] : 상징은 완전히 종말론적이다. 성만찬의 의미는 전혀 없다. [마운스, 성경주석 요한계시록, p.152]
(2) 저자의 견해.
영적 교제를 포함하여계 10: 10에서 작은 책을 먹어버림으로 약속이 성취되는 미래의 것으로 해석한다.
① 원어적으로 입증된다.
'먹고'의 헬라어 '데이프네소'(*)는 교제를 나누며 즐기는 식사를 가리킨다(Morris, Ladd, Johnson, Mounce).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경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안에 거하셔서 그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시며 친밀한 관계를 이루신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현재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과 성령을 통해 교제하신다.
* 요 14: 23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② 식사의 방법으로 입증된다.
③ 본문의 문맥적 구분으로 입증된다.
8. 기 도 ---------- 받은 은혜와 귀한 사명을 통하여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자가 되기 위하여 ------------------------------
9. 찬 송 ---------- 494 만세 반석 열리니 ---------------------------------------------
10. 폐 회 ---------- 주기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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