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장 1-9 (총리 다니엘)
성경본문 : 다니엘 6: 1-9
1. 다리오가 자기의 심원대로 방백 일백 이십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2. 또 그들 위에 총리 셋을 두었으니 다니엘이 그 중에 하나이라 이는 방백들로 총리에게 자기의 직무를 보고하게 하여 왕에게 손해가 없게 하려함이었더라
3.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4.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5. 그 사람들이 가로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그 틈을 얻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수 없으리라 하고
6.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모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말하되 다리오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7. 나라의 모든 총리와 수령과 방백과 모사와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율법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려 하였는데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8. 그런즉 왕이여 원컨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어인을 찍어서 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
9. 이에 다리오왕이 조서에 어인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
=================================================================
출 처| 정근두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오늘 우리 교회에 처음 오신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계속해서 구약 성경 다니엘서를 살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다니엘서 6장은 신앙을 포기하는 대신 사자굴을 택한 다니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읽은 부분은 처음 아홉절이지만 우리는 6장 전부의 구조를 마음속에 두고 설교를 듣는 편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을 정복하고 메데와 바사의 왕이된 다리오의 등장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새로 정복한 넓은 땅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그는 방백 일백 이십명을 세웠습니다. 말하자면 지방 장관 일백 이십명을 세웠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자기의 마음의 소원을 따라' 방백 일백 이십 명을 세웠다는 기록은 참으로 흥미있는 구절입니다. 통치자가 자기가 신뢰하는 사람을 세워서 각 지역을 다스리지 아니하면 어떻게 전국을 통치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현대의 정치도 마찬가지고 오늘의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은사에 따라서 모든 성도들에게 일을 분담시켜야 효율적인 목회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당히는 그것을 뒷받침 해 주어야 되고 제직회는 그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다리오 왕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세워서 각 지역을 다스리고 그들을 통해서 세금을 거두어 들이려고 120명의 방백을 세웠습니다. 또 그들 위에 세명의 총리를 세웠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오늘 우리가 살피려고 하는 다니엘입니다. 총리들의 직무는 무엇입니까? "이는 방백들로 총리에게 자기의 직무를 보고하게 하여 왕에게 손해가 없게 하려 함이었더라"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는 말이 있듯이 방백들도 지방을 통치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것도 부패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에게 통치하는 책임을 위임하는 동시에 책임을 맡은 자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관리하며 그 방백들이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해서 왕에게 손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세사람의 총리를 왕은 임명했습니다. 요즈음처럼 컴퓨터로 관리되는 현대 사회에서도 공무원의 부패나 복지 부동은 골칫꺼리인데 옛날 어두운 시절은 말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120명 위에는 세 사람의 관리자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불신하는 성격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마음에 들어서 세운 일백 이십명을 세우고 나서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사람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을 감독하는 감독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파악한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부패했기 때문에 상호견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가장 괜찮은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우리교회의 직무들도 그렇게 바뀌어져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는 일들은 장립집사 선에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살펴 보는 일은 장로님들이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일을 하는 사람과 감독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야 합니다. 감독하는 사람이 그 일을 전체 다 하게 되면 뒤에서 불평 많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일은 책임지는 사람이 있고 소신껏하되 그 일이 제대로 되는지에 대해서 당회원들은 살피는 임무를 맡아야 서로 견제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믿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우리 안에도 죄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돕지 아니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세사람 가운데서 다니엘은 단연 탁월했다고 3절은 밝힙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말하자면 왕의 신임을 얻어 수석 총리, 아니면 국무총리의 자리에 세울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세 총리중에서 다니엘을 가장 신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임을 못 받은 사람들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순조롭게만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왕의 특별한 신임을 받게 되니까 상대적으로 신임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니엘은 시기와 모함의 표적이 된 것입니다.
위엣 사람의 신임을 얻는 것은 지금도 동료들의 시기의 표적이 되는 것을 우리 경험속에서 알고 있습니다.
어른들이라고 해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십니까?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구역장을 해도 누가 더 인정을 받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구역장은 집사니까 그렇다고 치고 장로님들과 교역자들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력이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때로는 동료들의 시기와 모함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4절을 보십시오.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더라"고 기록합니다. 오늘 우리는 동료들의 시기의 표적이 된 총리 다니엘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첫 째로 그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그의 사람됨에 대해서 3절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말하자면 탁월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어떻게 탁월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러면 다니엘은 어떻게 탁월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 되었을까요?
남달리 좋은 환경이, 아니면 열성적인 부모의 뒷받침이 그를 오늘의 탁월한 식견을 갖춘 총리로 만들었을까요?
그는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왕손이나 귀족 출신입니다만 그는 소년 시절에 전쟁포로로 잡혀온 사람입니다. 전쟁의 와중에서 부모조차 잃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전쟁고아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당대 최고의 강대국 메데와 바사 제국에서 가장 탁월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 되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을 상상해 보십시오. 결코 순탄하지만 아니했을 것입니다.
유다를 침공해서 그를 잡아가지고 온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전제군주의 대명사로 통하는 인물입니다. 수틀리면 사람을 풀무불에 던지거나 그 몸을 쪼개고 집을 거름터로 삼는 일을 자행하는 폭군입니다. 본래 풀무불은 쇠붙이를 던져서 녹이는 곳입니다. 거기에다가 칠배나 뜨겁게 해서 사람을 던지는 무시무시한 왕이었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잘하게는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하는 것이 많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부족한 것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무조건 어떤 사람을 찍어서 그 사람이 하는 것은 전부 다 나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인생을 굉장히 편협하게 보는 것입니다. 느브갓네살의 뛰어난 정책중 하나는 인재를 귀히 여기고 널리 양성한 점입니다.
자기 나라 뿐 아니라 전쟁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도 쓸만한 사람을 발굴해서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때 다니엘은 "몸에 흠이 없고 용모가 잘 생기고 모든 일을 지혜롭게 처리할 수 있으며 지식이 있고 통찰력이 있고 왕궁에서 왕을 모실 능력이 있는 소년" 가운데 포함되어서 바벨론의 언어와 문학을 3년간 배웠습니다. 그 기간동안 느부갓네살 왕은 그들을 최고 수준의 생활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왕이 지정하여 자기의 진미와 자기의 마시는 포도주에서 그들의 날마다 쓸 것을 주어" 3년을 길렀다고 합니다.
일정 기간 동안 후원해서 사람을 키우는 일은 어제만 아니라 오늘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우리 울산 교회가 이 일에 관심을 가지고 후원하는 것을 생각할 때 아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비전 5555의 일부로 50명의 유학생을 파송해서 이 나라와 교회의 내일을 위한 일꾼을 양성할 수 있다는 것을 매우 큰 특권으로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한 거룩한 소원을 주시고 좋은 인재를 만나게 하셔서 우리가 후원한 일꾼이 장차 통일 한국을 경영하고 열방을 섬기는 일꾼이 되도록 계속 기도해 주십시오.
그 때 다니엘과 함께 대우를 받고 공부를 했던 사람들이 한 둘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더불어 단연 탁월한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그의 탁월한 실력 배후에는 그의 탁월한 신앙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포로되어 온 많은 왕족과 귀족의 자녀 가운데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세 친구와 더불어 일찍부터 결단했습니다.
그는 비록 잡혀온 포로였지만 그의 신앙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이 네 청년들에게 특별한 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네 젊은이들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고 문학과 학문을 능통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에게는 특히 환상과 온갖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을 탁월한 사람이 되게 한 원동력은 신앙이었다고 말입니다. 목숨을 걸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아끼시는 것을 여러분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생명과 같이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신앙은 다니엘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에 차이를 만듭니다. 특히 젊은 날 신앙을 가지고 인생을 출발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는 현저합니다. 지금 메데와 바사제국의 일급 관료 다니엘은 일찍 느브갓네살 왕에게 교육을 받을 때부터 달랐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탁월한 총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는 어제의 우리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의 우리도 오늘의 우리의 연장선상에서 바라 보아야 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사람됨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봄에 씨를 뿌린 밭에서 새싹이 움트고 여름 녹음 아래 무성하게 자라서 가을날 풍성한 결실을 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법칙입니다. 봄날 씨뿌리지 아니한 밭에서 여름날 자라나지 아니한 그 밭에서 가을에 풍성한 추수를 거둔다고 하는 것은 창조의 질서에 위반입니다.
젊은 날 결단한 그 신앙고백의 연장선상에서 오늘 총리 다니엘이 있습니다.
내일 여러분의 헌신은 오늘 여러분의 신앙고백에 따라 결정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순종할 것인지에 따라서 내일의 여러분의 삶이 바뀌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씨 덥다고 손을 놓지 않습니다.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 주님을 따르기로 한 결단은 여러분의 내일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하기 봉사를 위한 헌신의 연장 선상에서 내일 민족과 열방을 위한 헌신자들이 배출됩니다.
지금껏 우리 울산교회는 주로 장기 선교사들을 지원했습니다. 이제 총회 선교부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후원하는 소극적인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청년부 자체에서 훈련되고 각종 선교단체를 통해 파송받는 단기 선교사역에도 여러 형제 자매들이 헌신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미 그 수가 거의 찬 장기 선교사 50명 후원뿐 아니라 새로이 단기 선교헌신자들을 후원할 계획을 비전5555는 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젊은이 뿐 아니라 노년에 접어드신 여러분, 이제 나이가 많아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이라도 헌신하십시오. 노년의 갈렙은 하나님의 나라를 개척하는 일에 앞장을 서서 젊은이들을 능가한 헌신을 하였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신앙의 결단은 내일 새로운 헌신을 하게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연장선상에서 내일의 헌신을 바라봅시다.
둘째로 다니엘의 사람됨에 이어서 그의 사역을 살펴봅시다.
다니엘은 어떻게 자기 업무를 수행했습니까? 4절은 그가 아무런 고소할 틈을 주지 않았고, 그에게는 아무 허물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너무나 정직하게 자기의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고발 당할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세히 살피고 있는데도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의 정직성을 살펴봅시다. 그는 허물이 없는, 말하자면 부패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혜에 있어서 탁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정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직은 마땅히 모든 그리스도인이 개발해야할 공통자산입니다. 지능지수는 차이가 있지만 정직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정직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자신을 속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직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오래동안 숨길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을 알아보는 신비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영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분명한 증거를 댈 수 없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신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조그마한 부정직은 우리 인생 전부를 파국으로 치닫게 만듭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부정직한 사람은 부정직한 대우를 받습니다.
남을 속이는 자는 결국 남에게 속게 된다는 보편적인 법칙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인 야곱은 뒤에 외삼촌에게 수없이 속임을 당합니다. 자기 아들들에게조차 속임을 당합니다. 자기가 뿌린 씨는 자기가 거두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고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동시에 성경의 황금률은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여러분은 남에게 속임을 당하고 싶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남을 속여서는 안됩니다.
정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크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옹졸한 마음의 소유자들입니다. 물론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도 거창한 계획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직하지 못한 자기 중심성은 그것들을 옹졸한 자기 중심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정직함으로서 그리스도인답게 크게 생각하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의 문제들을 인정하고 정직을 습관화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탁월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부정직하게 잔재주를 피우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인생에서 성취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거짓 행위를 가리기 위하여 또 다른 거짓을 고안하는 에너지 낭비를 막을 수 있습니다.
4절 하반절은 다니엘의 삶의 또 다른 측면을 소개합니다. 왜 다니엘의 동료들을 그를 고소할 꺼리를 찾지 못했습니까?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더라" 정직했을 뿐 아니라 그는 태만하지 않았습니다. 소위 요즈음 흔히 나도는 말로 표현하면 '복지부동'하는 (고위)공무원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시간만 가면 퇴근한다는 마음으로 근무하지 않았습니다. 날자만 지나가면 월급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근무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대학을 졸업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요즈음은 아주 일자리 찾기가 힘든 시대입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는 대학 들어가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처럼 느껴졌는데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려고 보면 취직하기는 더욱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고용해야 하는 사업주 입장에서 보면 쓸만한 사람 찾기가 정말 하늘의 별따기처럼 느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직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세로 다니엘처럼 일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쉬고 노는 하나님이 아니시며 아직도 창조역사를 계속하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왜 안식일날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아버지께서 오늘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안식일이야 말로 생명을 살리는 역사에 하나님께서 마음을 쏟는 날이신 것을 예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안식일은 다른 사람을 찾는 날이 아니라 나하고 행동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올무에 거는 날이 아니라 안식일은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날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입니다. 인간은 한계가 있는 존재인만큼 완벽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자기의 최선을 다할 수는 있습니다. 크리스챤이라고 해서 언제나 모두 다 일등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최선을 다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때 좋은 결과를 바랄 수 있으며 혹 그렇지 못하더라도 실망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환경의 희생자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다음과 같은 것들을 선택하는 사람만이 환경의 희생자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원망십시오.
-환경을 탓하십시오.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십시오.
-자신에 대한 연민에 빠지십시오.
-꼭같이 손해를 보고도 자신은 두 배나 더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끝까지 희생자로 남아 있을 것을 약속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희생자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환경의 희생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더불어 환경을 극복하고 승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살 때 최선을 다해 부지런하게 살아야 합니다. 적어도 이 시대 한국 일터의 고질병인 적당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루 하루를 마감하시면서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루 하루 일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최선을 다한 일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기쁘시지요. 제가 보람을 느낍니다."고 선언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살아가십시오. 그러기 위해 우리의 일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고 일을 하면 아마추어도 프로 뺨칠만큼 효율적으로, 성공적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무엇이 성공이냐에 대해서는 사람들 사이에 오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공은 다만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 어떻게 올라가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축적한 것과 자신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느냐로 성공을 측정합니다.
-몇 평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까?
-어떤 차를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골프 회원권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으로 성공 여부를 측정하려고 듭니다.
성공은 돈이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별로 무관합니다.
성공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위해서 얼마나 공헌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잠깐동안 세상을 살아 갈 때에 내 한 삶을 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 하
는데 있습니다. 성공이란 자아에서 해방되어 다양한 방법으로 동료 인간들을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도록 격려하는 아버지가 되는 것도 해당됩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어머니가 되는 것도 해당합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일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로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십대 후반기에 곡갱이와 삽을 가지고 밭에 물이 들지 않도록 물꼬를 내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에 생각해도 그날 제가 했던 일에 긍지를 가지고 있고 최선을 다해 한 일에 대한 만족을 느꼈고 '일꾼들을 시킨 것보다 더 잘했다'는 어머니의 칭찬까지 받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기쁨은 혼자의 힘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것입니다.
일은 결코 범죄의 결과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더운 여름철에 산소땜을 한다고 땀을 흘릴 필요가 없이 에덴 동산에서 산들바람에 과일이나 따먹고 살았을거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정말 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지혜도 알지 못한 소치입니다. 일은 결코 저주의 결과가 아닙니다. 범죄한 사람을 동산에서 추방시킨 사건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만 하나님은 이미 창세기 2장에서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 두시고 그들로 땅을 "다스리며 지키게" 일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일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주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아야 부지런히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 낙원에 살면서도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커다란 계획 속에 사람도 조화된다는 사실을 느끼도록 아담에게 일을 주셨습니다. 일은 인간을 참으로 인간답게 해주는 놀라운 기회입니다. 일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과 타인 사이, 자신과 자신의 재능 사이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아담은 동산을 다스리는 일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를 발견했습니다. 우리 역시 일을 통해서 우리 모습의 일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게에서 물건을 파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손님이 필요한 것을 정성을 다해서 친절하게 해 주면 그 집에 들어 갔다가 나오는 사람이 하루종일 기분이 좋을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에 여러분의 일을 통해서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훗날 만나서 "총동원 전도주일에 교회에 나갑시다"라고 하면 그 말이 씨가 먹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쌀쌀맞게 행동하면 전도가 먹혀들어 가지를 않습니다.
아담은 동산을 다스리는 일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를 발견했습니다. 우리 역시 일을 통해서 우리 모습의 일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중요한 사람인 이유는 그가 어떤 종류의 일을 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있지 우리가 하는 일의 종류나 직함에 있지 않습니다. 평사원이나 이사나 직함이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짓는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게임이 끝나면 모두 원위치에 오는 것입니다. 게임을 할 때에 거기에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어떤 직책을 가졌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주어진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할 일이 없다는 것도, 아무도 우리를 사용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우리의 가치를 결코 떨어뜨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음식과 마찬가지로 일은 몸과 마음과 영혼의 건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 곧 당신의 양식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일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주님처럼 일을 바라보십시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부지런히 우리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집안 청소나 식사준비 등 모든 일상사 속에서 기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현장의 노동이나 회사의 일이나 다같이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일이 어렵게 꼬일 때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아담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도 성도는 인내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옛 성도 총리 다니엘을 통해서 신앙의 교훈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탁월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의 모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비결은 그의 신앙, 특히 젊은 날부터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신앙이었음을 살폈습니다. 그의 행사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어떻게 총리의 직무를 수행했습니까? 시기하는 동료들이 아무런 고소할 틈을, 비난할 근거를 주지 아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정직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조국은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대한민국은 그리스도인인 여러분과 제가 정직한 사람으로 알려질 때 밝아올 것입니다. 또 총리 다니엘, 그는 성실했습니다. 복지부동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날마다 하는 일에 늘 그대로 하는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아닙니다. 똑같은 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지혜를 배워갈 수 있습니다. 그냥 되는데로 살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지혜를 주셨습니다. 늙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얼마든지 우리는 살날이 남아있는 만큼 우리의 능력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실 때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고 시편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원문에 보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까운 수준으로 여러분과 저는 날마다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시대의 경제 파국을 딛고 열방을 섬기는 민족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일에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옛 성도 총리 다니엘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지혜를 묵상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