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과 공 동 체 라 면?
2012-03
경 북 예 천(禮泉) 을 가 다
박병민 목사(새터공동체)
나에게 갑자기 생각나는 것은, 어느 누군가에 의해서 불러지기 시작한 좋은 말들이다. 은하수(銀河水)를 말하는 미리내, 교회 찬송가에서 불리어지는 계명성(啓明星)을 지칭하는 별인 금성(金星)을 일컫는 우리말인 샛별, 한강의 옛 이름이었던 아리수(阿利水)라는 말도 좋다. 그리고 들어보기만 하였는데, 그 강물이 흐르는 장안에는 연신내가 있고, 모래내가 있단다. 땅 아래로 다니는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학여울 이라고 부르는 곳도 지나친다. 여울 하니, 생각나는 또 하나의 말은 담배공장이 있는 신탄진(新灘津)을 새나루 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새나루 하면 그 곳에서 그 이름을 가지고, 처음 교회를 시작했던 황 선배님이 연상된다. 그런데 그곳 제일교회에 갔던 때가 있었는데, 아주 좋은 새여울 이라는 이름을 쓰기에 정감 있게 여겨졌다. 그러면서 앞에서 늘어놓은 말의 대다수가 “물”과 관련된 말인 것 같다. 사람에게는 물보다 더 좋은 음료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물 박사님이 나올 정도 이니까? 물을 가지고 많은 아픔들도 치료를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성서에서도 그 물이 얼마나 많았든지?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이사야 58:11). 물 하면 마을의 여인네를 함께 떠올리지 않아도 “샘”이라는 말이 연상 된다. 은사님이셨던 김 교수님은 “표주박”이라는 말을 넣어서 제목으로 글을 내보내시면서 “옹달샘”과 “마르지 않는 물”을 함께 말씀하신다. 샘하면 아련함이 찾아든다. 또 좋은 이름을 늘어놓자면, 샘물, 샘터, 두 개의 샘이 있어서였는지, 동기님의 쌍샘이 또 떠오르고, 샘터라고 말하고 나니, 그와 엇비슷한 김 선배님의 “삶터”가 또 그려진다. 그리고 좋아하는 “마당”를 섬기시는 김 형님 생각도 찾아들어 두루두루 글 요기가 된다. 나는 자신을 만져 봐도 늘상 어줍으며, 불학무식(不學無識)하기 그지없는 자이다. 채 천여자도 모르는 한자어를 뺑뺑이를 돌려가며 수천 여의 글자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그 분으로부터 부여 받은 것 같다. 그것을 받침 하여 주는 것으로써는, 컴퓨터와 그리고, 그 옆에는 모국어 사전이 함께 반려자처럼 곁에 있다는 것이며, 이따금 씩 메모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처음 앞의 얘기에서, 교회 찬송가에서 불리어지는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 이 노래는 김재준 박사님이,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영양을 받아 여명 속의 희망을 노래한다. 그런데 샛별을 지칭하는 별인 금성(金星)을 일컫는, 계명성(啓明星)을 성서 이사야서 14:12이하를 끌어다가 천사가 제자리에서 이탈해서 나간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라고 말해서는 아니 될 것 이이다. 컴퓨터를 들여다보면, 성서와 한자어의 연관성을 한자 글의 모양에 근거하여, 성서의 이야기와 대비하여 가며 입증해 보여 가는 학자가 계시다. 예를 들어서 말을 하자면, 그 분은 이렇게 말을 하게 될 것이다. 계명성(啓明星)의 그 계(啓)라는 글자는 “열려진다”는 표현의 글자인데, 성서의 맨 난중 책인 계시록(啓示錄)의 그 “계시(啓示)”라는 말이 “뚜껑이 열려지며 속 안에 있는 것들이 나타나 보여진다”는 의미의 뜻이다. 그래서 계시(啓示)하면 열려서 보여 진다는 말인데, 그 “시(示)”의 “보일시”라는 글자는 바로 “하나님”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단다. 하나님의 육화(肉化)로 인한 자기 자신이 세상을 향한 비쳐짐이다(요한복음 1:18). 그러나 불교에서는 접근 방법이 이와는 반대로 사람 편에서 이르러가는 행자(行者)를 통한 수행(修行)에 이르는 과정을 말 한다. 그들은 수행해 가면서 성숙해져가는 도의 과정에 따라 다섯 단계로 눈이 열려 간다는 오안(五眼)을 말하게 되는데, 그것들은 육안(肉眼), 천안(天眼), 법안(法眼), 혜안(慧眼), 불안(佛眼) 등을 각각 얘기 한다. 교회도 지역별로 묶음이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소위 노회(老會)라고 말을 하게 되는데, 우리 노회에는 대여섯 분의 장애인 목사님들이 계신다. 그 가운데 거의 실명에 가까운, 같은 시각 장애인으로써 내가 좋아하는 길표(吉表 ?) 신발을 신으신 홍길표 목사님이 계신다. 그런데 그 분은 평안을 예비하는 복음의 길표(吉表) 신발을 신으시고 걸으실 것이다(에베소서 6:15). 고대 그리이스의 철학자인 디오게네스(Diogenes)는 해가 중천의 한낮에도 아테네 거리를 등불을 켜들고 다니며 어두워진 사람 사이에서 빛을 갈구(渴求)하였다(시편 119:105). 그래서 성서에서는 그 빛의 드러냄을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말을 하게 된다(에베소서 5:9). 바로 그 목사님이 섬기시는 교회 이름이 생명샘이다(잠언 14:27).
이런 냇가라든가, 샘에 대해서 얘기를 꺼내게 되는 것은, 바로 한 달 남짓 전에 제천에 계시는 손 목사님과 함께 경북에 있으면서 예(禮)가 철철 넘쳐난다는 예천(禮泉) 읍에 있는, 그러면서 높게 평가되는 마을이라는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보다는 아마도, 높은 평지에 자리해서 일 것이다. 고평교회를 순례자(巡禮者)가 되는 듯이, 타는 목마름으로 물 한잔을 기울이듯 바테리를 충전 받고 왔다. 나는 여러해 전에 “공자 왈, 맹자 왈”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늘어놓듯 써갔었다. 우리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이 필요하다(누가복음 15:20). 보통 유교(儒敎)의 4대 덕목으로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말한다. 여기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을 각각 맹자(孟子)의 4단(四端)이라고 한다. 인(仁)은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써 측은지심(惻隱之心)이고, 의(義)는 의롭지 않은 일에 대하여 부끄럽고 미워하는 마음의 수오지심(羞惡之心)이고, 예(禮)는 남을 배려 할 줄 아는 마음으로 사양지심(辭讓之心)이며, 그리고 지(智)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의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예수도 성서에서 그런 얘기를 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薄荷)와 회향(茴香)과 근채(芹菜)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태복음 23:23).그 예천(禮泉)이 이라는 글자와 같이, 성서에서도 하나님의 그 풍부함을 샘이 치솟듯 하는 말로 표현을 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한복음 7:38). 그래서 샘솟는 살아 있는 현장을 풍성한 것들로 보며 지내는 것이다. 예전의 어른들은 그런 말씀을 하셨다.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지” 나는 그 예전에는 이와 상충되는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얘기 한 바가 있다. 나 스스로가 어쩌면 모순된 얘기를 한샘이 되고 만다. 굳이 변명의 너스레를 떨자면, 어쩌면 위대한 보통사람들도 빈(貧)과 풍(豊) 사이를 하나님을 붙여지는 풀로 삼아서 포개가며 한채한채 씩 언치어지는 결처럼뒤섞임일 것이다.
옛날 양반 한 사람이 시중꾼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 어느덧 가지고 간 음식을 다 먹어 버렸는데 의외로 길은 멀고 민가라곤 보이지 않았다. 양반은 배고픔을 참다못해 시중꾼 하인을 보고 어서 당장 먹을 만한 음식을 장만해 오라고 호통을 쳤다, 하인은 즉시 밭에 가서 콩알 두 줌을 얻어왔다. “아니 그게 뭐냐?” “예 이것은 늦가을 밭에서 주운 콩알 이온데, 이제 곧 불에 구어 올리겠나이다” 그러나 양반은 대뜸 호통을 쳤다, “예끼 놈! 그래 지체 높은 양반인 나더러, 너희 쌍놈들처럼, 주어온 콩알을 구어 먹으란 말이냐?” “어서 썩 다시 구해 오너라” 그리하여 이번에는 감자 몇 개를 주어왔다. “그건 또 뭐냐?” “예 감자 이온데, 이제 곧 불을 지펴 따근따근하게 구어 올리겠나이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양반은 또 소리쳐 꾸짖었다, “에끼 놈! 그래 나를 뭘로 보고 이따위를 음식이라고 갖어오느냐?” “어서 썩 내던지지 못할꼬?” 이짓을 반복하다가 며칠을 보낸 양반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냥 쓰러지고 말았다. 하인은 얼른 콩과 감자를 다시구어 먹일려고..... 얼굴을 가면히 쳐다보니 수염만 잔뜩 자란 수척해진 어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양반님 어서 일어나십시요” 어쨌든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지, 죽고서야 어찌 양반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에 양반도 깨달은바 있었던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눈을 뜨더니 감자를 와락 잡아채서 입에 넣고 하는 말이...... “옳다 옳아, 네 말이 옳다” “구운 감자 그것 다 날 주고 양반은 니 해라”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다”란 속담은, 바로 이렇게 해서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로 전해져서 온다.
성서에서의 하나님의 샘솟는 풍성함인 예천(禮泉)의 얘기를 시편 15편에서는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공 동 체 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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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터 공동체 가족
예성만 김진구 박성찬 조창봉 이은주 김복순 지명수 권희숙 채경일 주송례 진영택 김정화 박소웅 박정임 라홍채 최성재 최영애 정무래 박종만 박병민 진선미 박한솔 박진솔
* 여러 가지의 육신과 정신적 아픔 중에 있는 새터공동체 식구들의 건강한 몸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세요.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금성교회.충전교회.김기홍.진명구.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16인).정무래.신평교회.최영애.라홍채.박종만.이은주.최성재.수영교회.양오석.채윤기(박현실).대덕교회.동춘교회6여전도회.신건태.김복순.반석전원교회.김명렬.주식회사EG(이광형).금산주부클럽(4인).사랑의쌀나눔공동체(장진성).그리스도의집(파리바게트.옹인숙.2회).임영호외1인.대한적십자금산군추부봉사회(성삼순외1인).오정교회(최세영).류일호.김용환(최정숙).남부중앙교회중고청년부(23인).김재범.금산군모란회(6인)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