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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정은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
무정의 불성 유무는 유정의 불성 유무보다 훨씬 난해하다. 이에 근원을 찾는다. “불성이 아니라 일컬은 것은 이른바 일체 장벽의 기와나 돌멩이 등의 무정물無情物이다.” 이 문구는 열반경의 가섭보살품迦葉菩薩品에 있다. 아래와 같다.
1) 무정불성의 출처와 그 정의定義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와 불성 열반은 삼세로 거둘 바가 아니라 있다고 명명命名하시고, 허공도 또한 삼세로 거둘 바가 아니지만, 어떤 연고로 있다고 칭명稱名하지 않으십니까?”(迦葉菩薩白佛言 世尊 如來佛性涅槃非三世攝而名爲有 虛空亦非三世所攝 何故不得名爲有耶)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열반이 아니기 때문에 열반이라 명명하고, 여래가 아니기 때문에 여래라 칭명하며, 불성이 아니기 때문에 불성이라 일컬었느니라. 어째서 열반이 아니라 명명했는가? 이른바 일체 번뇌는 유위법이니, 이와 같은 유위의 번뇌를 타파打破하기 때문에 이를 열반이라 명명했느니라. 여래가 아니라 칭명한 것은 이른바 일천제부터 벽지불까지이니, 이와 같은 일천제부터 벽지불까지를 타파하기 때문에 여래라 칭명했느니라. 불성이 아니라 일컬은 것은 이른바 일체 장벽의 기와나 돌멩이 등의 무정물無情物이니, 이와 같은 등의 무정물을 여읜지라 이를 불성이라 일컬었느니라. 선남자여, 일체 세간에는 허공이 아닌 것으로 허공과 대대할 것이 없느니라.”(佛言 善男子 爲非涅槃名爲涅槃 爲非如來名爲如來 爲非佛性名爲佛性 云何名爲非涅槃耶 所謂一切煩惱有爲之法 爲破如是有爲煩惱 是名涅槃 非如來者 謂一闡提至辟支佛 爲破如是一闡提等至辟支佛 是名如來 (非佛性者 所謂一切牆壁瓦石無情之物 離如是等無情之物 是名佛性 善男子 一切世間無非虛空對於虛空)
나의 견해: 하택신회스님은 6조 혜능대사의 무정무불종無情無佛種 종지를 이어받고, 위 열반경의 경문을 증거로 제시하며 무정은 불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불성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무정물이다.”(無佛性者 所渭無情物是也) 이 신회스님의 주장은 두 가지 하자가 있다. 첫째 “불성이 아니라 일컬은 것은 이른바 일체 장벽의 기와나 돌멩이 등의 무정물이니, 이와 같은 등의 무정물을 여읜지라 이를 불성이라 일컬었느니라.”(非佛性者 所謂一切牆壁瓦石無情之物 離如是等無情之物 是名佛性)라는 전문을 오독한 것이고, 둘째 원문을 인용하고 그 대의를 축약縮約하는 가운데 그 원의를 크게 손상했다는 점이다. 원문의 비불성자非佛性者를 무불성자無佛性者로 바꿔버렸다. 원래 비非자는 무無자와 상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해석상의 문제이고, 인용상의 문제는 절대 아니다. 더구나 본의를 크게 손상함에랴.
부처님의 진의眞意는 어떠한가? 위 전문을 자세히 읽어보시라. 열반과 여래 그리고 불성은 모두 동일한 전개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 점이 바로 위 경문을 정확하게 읽는 핵심이다.
일체 번뇌 유위법은 열반이 아니지만 열반이라 명명한다. 번뇌를 타파하면 열반이기 때문이다. 이 번뇌를 떠나서 열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생법사生法師도 “무릇 품질稟質의 이의二儀는 모두 열반의 정인이 있다.”(夫稟質二儀 皆有涅槃正因)라고 하지 않았는가.
또 일천제부터 벽지불은 여래가 아니지만 여래라 칭명한다. 일천제나 벽지불을 타파하면 여래이기 때문이다. 이 일천제나 벽지불을 떠나서 여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일체 장벽의 기와나 돌멩이 등의 무정물은 불성이 아니지만 불성이라 일컫는다. 장벽의 기와나 돌멩이 등의 무정을 여의면 불성이기 때문이다. 기와나 돌멩이 등의 무정을 떠나서 불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장벽의 기와나 돌멩이 등의 무정물은 불성이 없다고 말한다면, 일천제나 벽지불도 또한 여래가 될 수 없어야 옳고, 일체 번뇌 유위법도 마찬가지로 열반을 장엄할 수 없어야 옳다. 이 때문에 나는 무정물도 또한 불성이 있다고 정의定義한다.
2) 무정과 유정의 동질성과 상호전변相互轉變
열반경 제14권 범행품梵行品에 무정불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법문이 있다. 그리고 열반경 제3권 장수품長壽品에 가섭보살迦葉菩薩의 게송에도 또한 무정의 불성과 관련하여 특이한 법문이 있다. 차례로 인용한다.
경문: “선남자여, 무릇 자심慈心을 닦는 수행자는 진실하여 허망한 생각이 없으니, 자제慈諦도 바로 진실하니라. 만일 성문이나 연각의 자심이라면 이를 허망하다고 말하겠지만, 제불 보살의 자심은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느니라. 어떻게 아는가?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대반열반大般涅槃을 닦는 이라면, 흙을 보면 금이 되고, 금을 보면 흙이 되며, 흙으로 물의 형상을 만들고, 물로 흙의 형상을 만들며, 물로 불의 형상을 만들고, 불로 물의 형상을 만들며, 흙으로 바람의 형상을 만들고, 바람으로 흙의 형상을 만드나니, 그의 뜻을 따라 성취하여 허망이 없느니라. 실중생實衆生을 보면 비중생非衆生이 되고, 비중생을 보면 실중생이 되나니, 이 모두가 그의 뜻을 따라 성취하여 허망이 없느니라.”(善男子 夫修慈者實非妄想 諦是眞實 若是聲聞緣覺之慈 是名虛妄 諸佛菩薩眞實不虛 云何知耶 善男子 菩薩摩訶薩修行如是大涅槃者 觀土爲金 觀金爲土 地作水相 水作地相 水作火相 火作水相 地作風相 風作地相 隨意成就無有虛妄 觀實衆生爲非衆生 觀非衆生爲實衆生 悉隨意成無有虛妄)
나의 견해: 자慈는 여러 가지로 번역할 수 있다. 첫째 자심慈心이고, 둘째 자제慈諦이며, 셋째 자바라밀慈波羅蜜이고 넷째 대자대비大慈大悲이다. 이 자심의 공용功用은 부사의不思議하다. 이 때문에 제불보살은 무정에서 무정으로 전변시킬 수 있고, 또 무정에서 유정 또는 유정에서 무정으로 전변시킬 수도 있다. 이는 사사무애의 경계이다.
경문: “제가 지금 여래께 청법하옵나이다. 이는 모든 보살을 위하기 때문이옵니다. 원컨대 매우 심오하고 미묘한 제행諸行 등을 연설하여 주소서. 일체 제법諸法 중에 모두 안락성安樂性이 있사오니, 오직 원컨대 대선존大仙尊이시여, 저희들을 위하여 분별하여 연설하소서.”(我今請如來 爲諸菩薩故 願爲說甚深 微妙諸行等 一切諸法中 悉有安樂性 唯願大仙尊 爲我分別說)
나의 견해: 제법은 무정이다. 이 무정에도 또한 안락성安樂性이 있다. 이 안락성은 법성일까? 아니면 불성일까? 그도 아니면 이성일까?
관정소: 선남자여, 무릇 자심慈心을 닦는 수행자 이하는 두 가지 답변으로 난제難題를 없앴다. 또 둘이 있으니, 처음은 진실을 창도唱導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문 가상假想의 허물을 들고, 보살이 진실임을 드러냈다. 어떻게 아는가? 이하는 둘째로 이 진실을 널리 천명하니, 또한 다섯 가지 진실이 있다. 첫째 진실은 경계를 전변轉變할 수 있고, 둘째 진실은 미혹을 대치對治할 수 있으며, 셋째 진실은 본심을 선량하게 할 수 있고, 넷째 진실은 제법을 두루 펼칠 수 있으며, 다섯째 진실은 사의思議할 수 없다. 처음에 셋이 있으니, 하나는 창도이고, 둘은 해석이며, 셋은 결말이다. 첫째는 상문上文과 같다. 해석 중에 그 대의는 무엇인가? 이를 해석함에 둘이 있다. 첫째 진실은 경계를 전변할 수 있고, 둘째 단지 보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만일 금을 흙으로 전변시킨다면 곧 진실로 전변하는 것이고, 만일 중생으로 하여금 비중생이 되게 한다면 단지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어떤 대사大師는 이와 같이 이르고, 경문은 전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두 가지 해석을 어찌해야 하는가? 보살은 단지 금을 전변하여 흙이 되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중생을 전변하여 비중생이 되게 할 수도 있다. 비중생이란 바로 초목草木이니, 비중생을 전변시켜 중생이 된다. 만일 중생이 본래 허망하여 무소유無所有라 말한다면, 응당 중생이 비중생인 줄 알아야 하고, 만일 제법은 안락성安樂性이 있다고 말한다면, 바로 비중생도 또한 중생이다. 유정과 무정 그리고 유성有性과 무성無性도 이를 준거하면 알 수 있다.(善男子夫修慈者下 二答奪難 又二 初倡眞實 故舉聲聞假想之非 顯菩薩是實 云何知耶 第二廣明是實 又五 一實能轉境 二實能治惑 三實能善本 四實能遍諸法 五實不可思議 初爲三 一倡 二釋 三結 初如文 釋中意者 解此有二 一實能轉境 二但能令見 若轉金爲土則可實轉 若令衆生爲非衆生但能令見 一師云 經云能成 云何二解 菩薩非但能轉金成土 亦轉衆生成非衆生 非衆生者即是草木 轉非衆生成於衆生 若言衆生本來虛妄無所有者 當知衆生有非衆生 若言諸法有安樂性 即非衆生亦是衆生 情與無情有性無性準此可知)
나의 견해: 가정법의 가정은 그 결과가 진실로 귀결될 수도 있고, 단지 가정으로 끝날 수도 있다. “만일 중생이 본래 허망하여 무소유無所有라 말한다면,” 이 가정은 어떠한가? 하자가 있는가? 중생의 이 육신이 허망하다고 말하면, 아마도 혜충국사는 꾸짖을 것이다. 그러나 원각경은 “응당 몸과 마음은 모두 환화나 때와 같은 줄 알라. 때의 형상이 영원히 없어지면 시방세계가 청정하느니라.”(當知身心皆爲幻垢 垢相永滅十方清淨)라고 하니, 그 가정이 또한 무방하다. 이에 “응당 중생이 비중생인 줄 알아야 한다.”라는 결론은 크게 무리가 없다. 다시 “만일 제법은 안락성安樂性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가정은 열반경에 근거가 있다. 이 때문에 “바로 비중생도 또한 중생이다.”라는 결론도 또한 옳다. “제법은 안락성安樂性이 있다.”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心自性인 줄을 알아야 한다.”(知一切法即心自性) 이 안락성은 바로 심자성의 묘용 중에 하나가 아닌가? “열반은 적정하고 무위하며 안락하다.”(涅槃寂靜無爲安樂) 이 안락은 열반의 묘용 중에 하나이다. 이에 일체법도 또한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
관정소 담연재치湛然再治: 사문私問이다. 만일 중생과 비중생이 실제 교대로 전변한다면, 유정이 무정이 되고 무정이 유정이 되는 것이니, 이 경계는 믿기 어렵다. 만일 실제로 전변하지 않는다면 성력聖力만 헛되게 버릴 뿐이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오직 제불 보살만이 스스로 이미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둘이 아니지만 둘이고, 둘이지만 둘이 아닐 따름이며, 중생으로 하여금 다시 이와 같게 할 수 있으니, 이는 곧 영원한 전변이다. 만일 잠시 전변한 것이라면 이러한 경계는 없지 않다. 또한 전변한 이로 하여금 몸소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데, 하물며 자심慈心이 곧 여래이고, 여래가 바로 자심임에랴. 자심은 곧 불성이고, 불성은 바로 제법이다. 삼가 청하나니, 후덕後德은 이를 생각하고 거듭 생각하시라.(私問 若衆生與非衆生實更互轉 情作無情無情作情是義難信 若不實轉聖力徒施 總而言之 只是諸佛菩薩 自既依正 不二而二二而不二 能令衆生亦復如是 此則永轉 若暫轉者 不無斯義 亦令轉者不自覺知 況復慈即如來如來即慈 慈即佛性佛性即諸法 敬請後德思之思之)
나의 견해: 믿기 어려운 것은 해탈경계이기 때문이다. 중생은 정보와 의보가 남남이다. 제불은 일여하여 정보가 성불하면 의보도 따라서 성불한다. “만일 중생과 비중생이 실제 교대로 전변한다면, 유정이 무정이 되고 무정이 유정이 된다.” 전변에 왜 자심이 주체가 되는가? 전변한 이로 하여금 몸소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며, 또한 이 자심이 여래이고, 불성이며, 제법이기 때문이다.
3) 불설인연승호경佛說因緣僧護經의 전변상轉變相
불설인연승호경이 있다. 사리불존자의 제자 승호비구僧護比丘의 지옥견문기地獄見聞記이다. 담연湛然스님의 지관보행전홍결止觀輔行傳弘決을 인용하고, 차례로 연수스님의 종경록宗鏡錄을 인용하겠다. 당대唐代 담연스님은 지관보행전홍결 제9권에서 불설인연승호경을 인용하고, 아래와 같이 전개했다.
“이와 같은 등의 지옥은 해주海洲 변경 여러 곳에 있다. 어떤 곳은 지옥중생의 신체가 육승상肉繩床이나 육림肉林 제일병第一이 되니, 응당 색법이 모두 마음을 따라 감응함을 알아야 한다. 색법은 정체定體가 없으니, 마음을 따라 전변하는 바이다. 관법觀法도 만일 성취하면 모두 색법을 전변할 수 있다. ... 또 천지만물 중에 일체는 모두 전변할 수 있는 이성이 있으니, 이 때문에 신통인神通人과 수관자修觀者는 이를 전변할 수 있다. 이 이성은 원래 여래장如來藏 중에 부사의법不思議法이다. 마음을 따라 취착取著하면 성외성소成外成小한다. 너희들이 행한 바가 바로 보살도이며, 평등한 법계는 방촌도 줄어듦이 없다.”(如是等獄於海洲畔隨處而有 或身爲床林瓶等也 當知色法皆隨人感 色無定體隨心所變 觀法若成皆能轉色 ... 又諸物中一切皆有可轉之理 故神通人及修觀者而能轉之 此理元是如來藏中不思議法 隨心取著成外成小 汝等所行是菩薩道 平等法界方寸無虧)
종경록 제62권 중에 무정법문은 아래와 같다.
질문: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조불祖佛의 정종正宗이다. 지금 삼라만상을 목도目睹하니, 초학자는 이해하기 어렵다. 자세히 개시開示하지 않으면 어떻게 의심을 끊겠는가? 반드시 징힐徵詰의 사유事由를 의거하여 정진情塵의 법집法執을 타파해야 한다.”(問 心外無法祖佛正宗 今目睹森羅初學難曉 不細開示何以斷疑 須憑徵詰之由以破情塵之執)
답변: “앞에서 이미 널리 천명했지만, 지금 거듭 인증引證하겠다. 유식송唯識頌에 이르기를, ‘이 모든 식은 전변하니, 능분별能分別과 소분별所分別이니라. 이로 인하여 저것도 모두 없으니, 이 때문에 일체는 오직 식識뿐이니라.’(是諸識轉變 分別所分別 由此彼皆無 故一切唯識)라고 한다. 천지만물 중에 일체는 모두 전변할 수 있는 이성理性이 있으니, 마치 승호비구僧護比丘가 그 지옥인地獄人의 신체身體를 육승상이나 제일병 등으로 본 것과 같다. 응당 색법色法이 모두 감응을 따라 나타남을 알아야 한다. 색법은 정체가 없으니, 마음을 따라 전변하는 바이다. 이 이성은 원래 여래장 중에 부사의법이다. 마음을 따라 취착하면 성외성소한다. 너희들이 행한 바가 바로 보살도이며, 평등한 법계는 방촌도 줄어듦이 없다.”(答 前已廣明 今重引證 唯識頌云 是法識轉變(是諸識轉變) 分別所分別 由此彼皆無 故一切唯識 諸物中一切皆有可轉之理 如僧護見身爲床瓶等 當知色法皆隨感現 色無定體隨心所變 此理元是如來藏中不思議法 隨心取著成外成小 汝等所行是菩薩道 平等法界方寸無虧)
나의 견해: 양사兩師의 생존연대가 담연스님은 당조이고, 연수스님은 송조이다. 아마도 연수스님이 담연스님의 글을 인용한 듯하다. 연수스님은 글을 쓰면서 일부는 인용처를 밝히고, 일부는 섞어찌개를 만들었다. 이성理性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무정법문의 핵심이다. “일체는 오직 식識뿐이다.” 이를 되받는다. “천지만물 중에 일체는 모두 전변할 수 있는 이성理性이 있다.” 유정은 불성만 있고, 무정은 법성만 있다고 한정하면, 결코 유정이 무정으로 전변할 수 없다. 유정과 무정은 모두 이성이 있다. 불교의 수행은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최우선 과제이다.
위 양편의 글 중에 핵심은 무엇인가? “천지만물 중에 일체는 모두 전변할 수 있는 이성理性이 있다.”(諸物中一切皆有可轉之理) 오행五行에 목생화木生火란 말이 있다. 나무는 불이 아니지만, 천지만물 중에 하나인 나무는 불로 전변할 수 있는 이성이 있다. 어찌 불뿐이랴. 디시 근원으로 돌아가면 수생목水生木이라 하니, 또한 나무에 어찌 물로 전변할 이성이 없으랴. 다시 거듭 돌아가면 금생수에 이르고, 토생금에 이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천지만물 중에 전변하지 못할 곳이 하나도 없다.
승호비구僧護比丘는 그 지옥인地獄人 곧 지옥중생의 신체를 육승상肉繩床이나 육림肉林 또는 제일병第一瓶이나 제이병第二瓶 등으로 보기도 한다. 지옥중생은 유정이고, 상이나 숲 병 등은 무정이다. 유정이 무정으로 전변한다. 다시 전변하는 인유를 설명한다. 색법은 모두 마음을 따라 감응하고, 색법은 정체가 없기 때문에 마음을 따라 전변할 수 있다.
물을 사례로 들어보자. 천인天人은 물을 유리로 보고, 물고기는 집으로 보며, 사람은 물로 보고, 아귀는 불로 본다. 선타바에 네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이 물도 또한 네 부류의 중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어느 하나가 옳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아귀는 물이 물로 보이지 않고 불로 보이기 때문에 그 물을 마실 수 없다. 만일 아귀의 업식이 조금 맑아지면 그 물이 물고기처럼 집으로 보일 것이고, 조금 더 맑아지면 사람처럼 물로 보일 것이며, 더욱 많이 맑아지면 천인처럼 유리로 보일 것이다. 다시 더욱더 맑아져서 무한대에 이르면 어떠할까? 그 물이 제불보살처럼 부처로 보일 것이다.
다시 강조한다. 천지만물 중에 일체는 모두 전변할 수 있는 이성이 있다. 이 때문에 신통인神通人과 수관자修觀者는 이를 전변할 수 있다. 이 이성은 원래 여래장 중에 부사의법이기 때문이다.
일체 번뇌 유위법은 열반이 아니지만 열반으로 전변할 수 있고, 또 일천제부터 벽지불은 여래가 아니지만 여래로 전변할 수 있으며, 또한 일체 장벽의 기와나 돌멩이 등의 무정물도 불성이 아니지만 불성으로 전변할 수 있다. 어째서 그러한가? “제법은 안락성이 있기 때문이고,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이기 때문이며, 천지만물 일체는 모두 전변할 수 있는 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4) 부처님의 수상좌정법문水上坐定法門
용수보살龍樹菩薩의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2권에 관공觀空이 있다. 아래와 같다.
“부처님이 기사굴산 가운데서 비구승과 함께하셨다. 왕사성王舍城에 들어가는 도중途中에 대수大水를 보시고, 부처님이 수상水上에 니사단尼師壇을 펼치고 좌정하시며, 모든 비구에게 고하셨다. ‘만일 비구가 입선入禪하고 마음에 자재를 얻으면, 대수大水로 하여금 대지大地로 변작變作시킬 수 있으니, 바로 실지實地가 되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이 물 가운데는 지분地分이 있기 때문이니라. 이 물과 같이, 불이나 바람 금은 등 갖가지 보물도 곧바로 모두 실지가 되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이 물이나 불 가운데는 모두 그 지분이 있느니라.’라고 하셨다.”(如佛在耆闍崛山中 與比丘僧俱 入王舍城 道中見大水 佛於水上敷尼師壇坐 告諸比丘 若比丘入禪 心得自在 能令大水作地 即成實地 何以故 是水中有地分故 如是水火風金銀種種寶物即皆成實 何以故 是水中皆有其分)
“또다시 예를 들면 어떤 미인美人과 같다. 음인婬人이 이를 보면 정묘淨妙하다 여기고 마음에 염착染著이 생기며, 부정관不淨觀 수행인이 이를 보면 갖가지 악상惡相이 드러나 정묘한 곳이 하나도 없다. 등류等類의 부인이 이를 보면 질투로 성내고 증오하여 눈으로 쳐다보기도 싫어하며 부정하다고 여긴다. 음탕한 사람은 이를 보고 즐거워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이를 보고 괴로워하며, 수행인은 이를 보고 득도得道하고, 희열喜悅이 없는 무심도인은 이를 보고 좋아하거나 싫어할 바가 없어서 마치 토목土木을 보는 것과 같다. 만일 이 미색이 진실로 정묘하다면 네 부류 사람의 관색觀色이 모두 응당 정묘함을 보아야 하고, 만일 진실로 정묘하지 못하다면 네 부류 사람의 관색이 모두 응당 정묘하지 않아야 한다. 이 때문에 미색의 호추好醜는 마음에 있고 외모로 정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관공觀空도 또한 이와 같다.”(復次 如一美色 婬人見之以爲淨妙 心生染著 不淨觀人視之 種種惡露 無一淨處 等婦見之 妬瞋憎惡 目不欲見 以爲不淨 婬人觀之爲樂 妬人觀之爲苦 行人觀之得道 無豫之人觀之 無所適莫 如見土木 若此美色實淨 四種人觀 皆應見淨 若實不淨 四種人觀 皆應不淨 以是故 知好醜在心 外無定也 觀空亦如是)
나의 견해: 위 글은 용수보살의 대지도론 중에 관공觀空을 해석한 것이다. 이 때문에 말미에 관공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한 것이다. 니사금은 좌구坐具 또는 부구敷具라 번역한다. 양털로 만든 좌복坐服이다. 부처님이 부구를 펴고 앉으신 곳이 해인사 장경각본은 수상水上이고, 어떤 본은 수상樹上이다. 이 때문에 도중에 본 대수도 또한 장경각본은 대수大水이고 다른 본은 대수大樹이다. 물 위는 평평하여 부구를 펴고 좌정하기가 편하지만, 나무 위는 가지런하지 못하여 부구를 펴기가 마땅하지 않다. 이에 물 위의 수상水上을 취한다. 경명經名은 확인하지 못했다.
마음 밖에 법이 없다.(心外無法) 일체는 오직 식識뿐이다.(一切唯識) 일체를 오직 마음이 창조한다.(一切唯心造) 법계는 오직 마음뿐이다.(法界唯心) 마음에 자재를 얻는다. 이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대수大水를 대지大地로 변작變作시킬 수 있다. 가상공간의 땅이 아니고 바로 실지實地가 된다. 이 물 가운데는 지분地分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삼계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구성되어 있다. 위에서 대수大樹를 취하지 않고 대수大水를 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수대水大와 지대地大는 위에 이미 나왔다. 이에 화대火大와 풍대風大를 이끌어내어야 한다. “이 물과 같이, 불이나 바람 금은 등 갖가지 보물도 곧바로 모두 실지가 되느니라.” 지수화풍地水火風은 각각 지분地分과 수분水分 화분火分 풍분風分을 모두 구족하고 있다. 이 때문에 대수행인은 삼계의 유정과 무정 일체를 서로 전변시킬 수 있고, 또한 창조할 수도 있다.
또다시 어떤 미인美人과 관련하여 등장인물이 다양하다. 음인婬人과 부정관不淨觀 수행인, 등류의 부인, 그리고 대수행인 곧 희열喜悅이 없는 무심도인 도합 넷이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이 때문에 미색의 호추는 마음에 있고 외모로 정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2023년 1월 16일 74세 길상묘덕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