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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산소
히12:14-17,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볼수 없습니다.
지난주에는 성도의 믿음을 통한 인내를 다루었다면 오늘은 인내로서 생활을 하라는 권고입니다. 시작하는 말씀으로 화평함과 거룩을 좇으라고 하십니다. 화평과 거룩을 위협하는 것은 분열과 육신의 욕망, 탐욕, 경계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속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거룩으로 나를 포장하려 하고 그러면 거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우리의 의지로 주님의 거룩으로 나아가라 하십니다. 나의 의지와 결단으로 주의 길에 그리스도와 함께 서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겸손함으로 화평과 거룩을 좇아야 합니다.
단어를 살펴볼까요? '좇으라''디오케테'의 원형 '디오코'는 '추적하다''뒤좇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단어는 사냥꾼이 사냥감을 뒤좇는 연상케하는 단어로 헬라 문헌에는 '열심히 어떤 것을 추구하다''어떤 것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다''얻으려고 애쓰다'등을 나타내는데 쓰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명령법 현재시제로 쓰고 있어 우리 성도들에게 열심히 추구하고 일관되게 유지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누구처럼, 사냥꾼이 사냥감을 좇는 것처럼 그런 열정을 가지고 간절함으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을 누리도록 추구하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엡6:15절에서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평안'은 화평입니다. 우리에게 평안의 신을 신으라하십니다. 누가는 눅10:5,에서 어느 집에 들어가던지 성도는 먼저 할기도가 '평안할지어다'라고 전하라 했습니다. 바울은 또 롬12:18절에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같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 화평해야 합니다. 왜그럴까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고전14:33) 또 "그리스도 예수님도 화평이라"(엡2:14)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힘들기는 하지만 나를 대적하는 사람까지도 화평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도우심을 청하며 간절히 노력하고 애써야 합니다. 주께서 도우시면 성령께서 도우시면 분명히 이 땅에 주의 화평이 이루어 질것입니다. 그렇게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사람도 더불어 용납하고 화평을 이루게 될것입니다.
주께서 친히 모델이 되어 주셨습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3), 우리가 주님을 본받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겸손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주님께 기도할 때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는 낮은 마음을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목의 직책을 주셨기때문입니다.(고후5:18), 또한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약3:18)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성도는 거룩의 대한 열정도 가져야 합니다.
"거록"'하기아스몬'은 원형이 '하기아스모스'로 '영적, 도덕적 더러움에서 벗어나 점차 거룩하게 하는 성화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성화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성취하려고 추구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화평과 거룩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한쪽이 허술해지면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어떻게 입을까요? 성화만 가져오면 독선이 되기쉽고 화평만 가져오면 비진리와 타협하기 쉽기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볼수 없다고 했습니다. 굉장히 심각한 말씀입니다. '이것이''후'는 남성 단수 명사로 관계대명사로서 화평을 빼고 거룩을 받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5:8절에서 "마음이 청결한자는 저희가 하나님을 볼것이임이요" 했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계21:27)하고 사도요한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 에스겔 선지자는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은 내성소에 들어 오지 못하리라(겔44:9)에서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겐 어떻게 적용될까요? 우리의 마음속에서 또 삶속에서 거룩함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성전인 우리속에 성령님이 오시지 않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에게 거룩함이 없다면 하나님에 대하여 외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허락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수도 없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의 눈이 어디를 바라보아야 하는지 우리의 삶이 어찌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있어도 기도를 많이 하여도 거룩함이 우리에게 없다면 주님앞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거룩하여지며 성품이 변화되어 거룩함에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의 거룩이 아닌것입니다. 우리가 좇아가야 하는 거룩입니다.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으로서 거룩함에 들어가야하는 것입니다.(요17:17)거룩하신 하나님처럼 모든 행실에 거룩한자가 되라고 하십니다.(벧전1:15)
다시 14절에서 '주를 본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로서 영이신 하나님을 볼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딤전6:16절에서 하나님은 '가까이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볼수 없는 자시니'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볼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모세도 등만 볼수 있었습니다(출33:18-23), 여기서 말하고 있는 요지는 육안으로 보는 하나님이 아닌 것, 단어를 보면 '옵세타이'는 하나님의 속성을 깊이 이해하고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수도 없고 깊이 경험할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표현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가 뵙는 것의 유일한 길은 거룩함입니다.
쓴뿌리가 있나요, 그것으로 남을 괴롭히면 안됩니다.
먼저 단어 '너희는 돌아보아''에피스코푼테스'는 '주의 깊게보라''감독하라'는 명령의 의미입니다. 이는 은혜가운데 있나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왜그럴까요, 은혜가운데 있지 않으면 믿음에서 떨어지고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를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배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뒤떨어져 있는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곧 구원에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쓴 뿌리'는 무엇을 말할까요? 내안에 쓴뿌리가 아니고 사이비, 이단을 의미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천지, 통일교, 안상홍, 안식일교등 입니다. 거짓교리, 교훈으로 미혹하여 구원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내안에 쓴뿌리를 이차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만 죄짓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끌어 들여 같이 망하게 되는 것 말이죠, 다시 말하면 내안에 죄성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집사님이 전도를 해왔습니다. 새로오신 성도님은 성경을 많이 모릅니다. 그런데 주일날에 교회를 안나오시고 그 새로나오는 성도는 교회에 나왔는데 그 성도에게 바쁘면 빠져도 괜찮아 하면 그성도는 그런줄 알고 아무 죄책감없이 일만 생기면 핑계를 대고 주일에 예배를 빼먹을 것입니다. 이것이 점점 확산되어 방종하게되고 신앙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무너지게 될것입니다. 혹은 점집을 들락 거린다면 그 영향은 파급이 더 클것입니다. 나의 죄로 인해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큰 죄악인것입니다. 구약에서 한사람 아간으로 인해 전쟁에서 패하고 자신의 가족 전체에 고통을 주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통로로서 존재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전 15:34절에 말씀합니다. "속지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또 예수님은 말씀 하시기를 소자하나를 실족시키면 차라리 연자맷돌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라고 했습니다.(마18:6,7), 왜 이렇게 험하게 말씀 하셨을까요? 죄의 속성 때문입니다. 죄는 누룩과 같습니다. 적은 양으로 많은 가루를 부풀게 하는것처럼 내가 지은 죄로 남도 죄를 짓게 하는 통로가 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범죄함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하거나 걸려 넘어지게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특히 리더라면 더욱이 조심을 해야 하는데 그 죄의 영향의 파급이 크기 때문입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죄를 지은 아간으로 해서 이스라엘이 전쟁에 패한 사건은 귀중한 교훈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주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한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6,17절입니다.
우리는 에서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본문에는 에서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데 음행하는자, 혹...망령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음란에 대한 부분이 상세하게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추론해 볼수는 있습니다. '음행하는자''포르노스'는 창녀와 성관계를 갖는 사람''돈때문에 잘못된 길인줄 알면서 이용당하는 자''남창'등의 의미입니다. 이는 도덕적 규범에서 벗어난 불륜의 행위와 동성애,매춘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에서가 이방여인과 잡혼을 한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창26:34-27:30-40), 에서의 행동은 부모의 마음을 근심시켰으며(창26:35), 단어 '마음의 근심''히'모라트 르아흐'는 '영의 비통'을 의미합니다. 에서의 행동이 부모를 슬프게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다음으로 '망령된 자' '베벨로스'는 '누구도 가까이 할수 없는''더러운''사악한''신을 무시하는 자' 이단어의 의미로 보아 에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외하지 않는 자였다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의 위임장으로 부모의 유업을 이어받을 권리, 한 가정에 지도자로서 권위와 책임인데(창27:1-4, 35-37) 에서는 배고픈 것을 못 참아서 한 그릇의 식물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쉽게 포기하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였습니다. 다른의미로 보면 그는 세속적인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못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하늘 기업을 상속할 상속자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영권으로 이땅을 통치하고 높임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속의 즐거움, 쾌락, 물질, 등등으로 바꾸어 버린다면 우리는 에서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핍박이나 환란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등질 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축복에서 밀려난다고 하십니다. 다시'망령되다''베벨로스'는 거룩한 것을 멸시하고 혹은 가볍게 취급하고 저주하는 것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과 약속, 심판과 축복들을 거부하거나 업신여기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멸시하고 게을리하고 함부로 할때 우리는 에서를 생각해야합니다. 그가 뉘우치고 눈물로 용서를 구했으나 버린바되어 회개할 기회를 놓쳐버린 불행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아셨나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을 소훌히 대하고 행동으로 나타날 때 그결과가 어떤지를, 혹 구원의 길에서 탈락될수도 있습니다.
내안에서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근심시키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주를 영접하고 믿어야 하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 "(삼상12:15), 갈5:16,17,
성도입니까? 그렇다면 자신에게 약속하신 복을 잃어 버리면 안됩니다. 에서는 받은 것을 지키지 못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썩어질 세상의 것을 좇다가 하나님의 영원한 복을 잃어버리면 그가 바로 망령된자 입니다. 우리 앞에 앞서가신 믿음의 증인들의 자취를 거울삼고 말씀의 검을 들고 주의 부르심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달려가시면 영광의 축복이 준비되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축복과 은총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하늘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