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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빈 최씨 (淑嬪 崔氏)
본관은 해주(海州). 훗날 영의정으로 추증된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구전에 따르면 현종 때 무수리로 입궐하였다고 한다. 英祖의 명으로 찬술된 "숙빈최씨신도비명"의 기록을 보면 최숙빈은 1670년 11월 6일 출생하였으며, 1676년에 입궁하였으니 나이 겨우 7살 때 즉, 숙종 2년에 입궁한 것이다.
숙종으로부터 승은을 입고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의 후궁 첩지를 받고, 이후 숙의, 귀인 등을 거쳐 마침내 그 품계가 정1품 빈(嬪)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출신성분이 미천한 무수리라, 본인은 물론 아들인 英祖에게까지 매우 커다란 콤플렉스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는 그녀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의 교전비로 입궐하였다가 숙종과 우연히 만났다는 기록도 있다. 숙종의 제1계비, 인현왕후와는 친분이 두터웠으며, 장희빈이 중전으로 있을 때에는 그녀에게 모진 박해를 받다가 인현왕후가 갑술환국으로 북위되자 평상을 되찾았다. 하지만 숙종이 장희빈의 일이 다시 발생할까 염려되어, 宮女에서 왕비로 오르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도 최숙빈은 왕후가 될 수 없었다.
무수리
무수리는 궁중에서 여러가지 잡일을 맡은 여자 종이다. 주된 임무는 물긷기, 불때기 등 여러가지 허드렛일이었고, 물긷기가 가장 중요하였으므로 수사(水賜)라고도 불렀다. 옛날 궁중에는 전각(殿閣)마다 밖에 우물이 있어 물을 길어나르는 일이 큰 일이었다.
뭉긷기 이외에도 각기 그 처소의 담당업무에 따라 막일, 잡일은 전부 이들이 맡았다. 무명에 아청색(鴉靑色 ..붉은빛이 나는 검은색)물을 들여 아래위를 똑같은 색으로 입었기 때문에 우중충한 차림이었다. 머리는 방석같이 둥글게 틀어 올리고 치마 중간에 같은 천으로 널찍한 허리띠를 매고 앞에는 패(牌)를 찼다.이 패(牌)는 아침저녁의 출,퇴근과 각 別宮 사이를 심부름으로 무상 출입하는 신분증과 같은 것이었다.
이당시 나인(內人)들이나 양반 부녀자들의 복식은 "동그래저고리"라고 하여 저고리 길이가 몹시 짧았는데, 무수리의 저고리는 머슴의 옷 같이 긴 것이 특징이었다. 이들은 민간의 아낙네들 중에서 나인(內人)들의 소개로 궁을 출입하였으며 대개는 기혼녀이었다. 무수리는 궁 밖으로 출입하기 때문에 어릴 적에 궁중으로 들어와서 관례를 치룬 宮女와는 구별되는, 궁 밖에서 도와주는 하녀라고 할 수 있다.
세종과 태종 그리고 숙종과 영,정조
조선 제19대 왕, 숙종(肅宗)은 절대군주를 지향하던 임금이었다.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피폐해진 나라와 옹색해진 왕의 권위를 다시 살리고자 재위 46년 동안 꾸준히 애쓴 흔적을엿볼 수 있다. 太宗이 있어 世宗이 두루 큰 정치를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숙종이 있어 英,正祖시대가 열릴 수 있었던 것이다.
14세에 왕위에 올라 수렴청정을 거부하고 강력한 왕권의 확립을 평생 추구하여온 숙종, 그의 후궁 중 두 사람은 천인(賤人)이었으며 그들로부터 얻었던 두 아들은 모두 임금이 되었다. 경종과 영조가 그들이다.
숙종의 女人들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1674~1720)은 46년 동안의 재위기간,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이래 손상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臣權에 대한 왕권의 우위를 확보하려고 당시 극에 달하였던 노론과 소론의 극심한 당쟁을 이용할 만큼 치밀하고 카리스마있는 왕이었다.
숙종은 3명의 왕비를 포함하여 모두 9명의 여인을 곁에 두었으며, 자녀는 모두 6남 2녀를 생산하였다. TV 드라마의 단골소재인 장희빈, 인현왕후 그리고 요즘 "동이"라는 이름으로 방영 중인 숙빈초씨 등이 모두 숙종의 여인들이었다. 이들 여인들은 당시 극에 달한 당쟁과 맞물려가면서 나라에 피비린내 나는 환국의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1. 인경왕후 김씨 (仁敬王后. 1661~1680)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로 1670년 10살 때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하였으며, 이듬해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지만,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인이다.
슬하에 공주 2명이있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으며, 그녀 또한 천연두를 앓다가 8일만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이후 젊은 나이에 죽은 인경왕후와 다음으로 왕비의 자리에 올랐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인현왕후(仁顯王后) 때문에 인현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西人과 희빈 장씨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이 대립하는 계기가 되어 후일 인현왕후가 폐위되는 기사환국(己巳換局)과 갑술환국(甲戌換局) 등 조선 역사의 비극을 초래한다.
2. 인현왕후 민씨 (仁顯王后. 1667~1701)
숙종의 초비 인경왕후가 죽은 지 1년 후, 대비 김씨와 서인세력의 추천으로 중궁으로 뽑혔다. 하지만 가례 초기부터 숙종은 궁녀출신 후궁 장씨(張禧嬪)의 미색에 혹하여 인현왕후를 멀리하게 된다. 1688년 장희빈이 아들균(畇. 후일 경종)을 낳자, 숙종은 이 왕자를 원자로 정하고자 했으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이 문제는 결국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이어져 1689년 西人들이 쫒겨나고 南人들이 집권하게 된다. 인현왕후 역시 페서인(廢庶人)되어 안국동 사가로 내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6년 후인 1694년 다시 숙종이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기용한 후 (甲戌換局), 인현왕후 민씨는 환궁한 뒤 왕비로 복위되었다.
그리고 장희빈은 다시 희빈(禧嬪)으로 강등된다. 하지만 복위된 지 8년만인 1701년 민씨는 사망한다. 민씨가 죽은 후 숙종은 왕세자의 생모인 장희빈에게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인현왕후는 예의바르고 정숙하였다고 하나 장희빈에게 매를 드는 등 단호한 면을 보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3. 인원왕후 김씨 (仁元王后. 1687~1757)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로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후 궁궐에 들어가 이듬해에 왕비로 책봉된다. 인경왕후처럼 천연두를 앓았으나 기적적으로 회생하였다고 하며, 소생은 없다.
4. 희빈 장씨 (禧嬪 張氏. 1659~1701)
본명은 장옥정(張玉貞)으로 중인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여종이었기 때문에 천민(賤民)의 신분이었다. 역관이며 재력가이었던 삼촌과 남인세력의 추천으로 입궁하여 장렬왕후(장렬왕후.. 仁祖의 계비)의 나인(內人)이 되었다. 입궐하자마자 빼어난 미모로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그 사실이 명성왕후(明聖王后 .. 숙종의 어머니)에게 발각되어 궁에서 쫒겨났다.
명성왕후가 죽자 다시 궁으로 입궐한 장옥정은 후궁읻 ㅚ었으며 이때부터 인현왕후와 갈등관계가 시작된다. 당시 장옥정은 南人세력이었고, 인현왕후는 당시 정치실세이던 서인을 대표하였기에 이 두 여인의 대립은 극에 달하게 된다.
하지만 장희빈과 숙종 사이에 왕자 균(畇 ..후일 경종)을 낳게 되고, 균은 곧바로 원자로 책봉되었다. 이때 세자 책봉을 반대하던 송시열(宋時烈) 등이 사사(賜死) 되는 등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현왕후는 폐위되고, 西人세력은 위축된다.
왕비가 된 후 오빠인 장희재와 전횡을 일삼던 장희빈은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들이 정권을 잡자 희빈(禧嬪 ..후궁)으로 강등된다. 숙종 27년 인현왕후가 죽자, 장희빈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翠宣堂)에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인현왕후 죽음의 원인이라고 지목되어 숙종으로부터 자결의 명령을 받았다.
5. 명빈 박씨 (明嬪 朴氏. ? ~1703)
원래 상궁이었다가 숙종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되었지만, 승은을 입은지 10여 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에야 숙원(淑媛)에 책봉되었고, 이듬 해인 1699년에는 단종의 복위를 기념하여 숙의(淑儀)에 진봉되었다.이어 귀인(貴人)에 올랐다가 1702년에 정1품 빈(嬪)의 자리에 올라 명빈(明嬪)이되었다.
하지만 명빈에 오른지 1년도 안되어 사망한다. 당시 그녀가 낳은 유일한 아들인 왕자 헌(萱)이 겨우 5살이었는데, 왕자 군(君)으로 책봉되지 않은 상태여서 상주노릇을 할 사람이 없자, 숙종은 같은 해 9월에 왕자 헌을 연령군(延齡君)에 봉하여 그녀의 상주노릇을 하게 하였다.
女人天下 그리고 숙종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숙종의 이미지는 "궁중의 여인천하에 휘둘리는 유약한 지아비"일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이미지는 동시대를 살아간 김만중의 소설 "사씨남정기(사씨남정기)"에 근거한 바가 크며, 또한 현대에 들어와 열병처럼 유행하던 사극 드라마 그 중에서도 악녀로 이름을 날린 장희빈(張禧嬪)의 역할이 주는 탓일 것이다. 장희빈의 치마바람에 속수무책인 숙종..
당쟁과 세 女人에 대한 숙종의 태도
숙종 어필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 광해군 축출) 이후 51년간, 조선의 집권세력은 기본적으로 西人들이었다. 그런데 숙종이 즉위한 해 1674년에 발생한 제2차 예송논쟁을 통해 南人이 집권에 성공한 이후 숙종의 재위기간(1674~1720)에는 집권세력이 수시로 교체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정권이 부활하였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정권이 기사회생하고, 1694년에는 갑술옥사로 서인정권이 되살아났다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면서 소론정권이 나타나고, 1710년에는 경인환국으로 노,소론 균형국면이 조성되었다가 1716년 병신처분으로 노론정권이 성립하였다.
이 복잡한 정국 속에서 숙종은 일종의 "균형자" 혹은 "조정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격한 대결의 와중에 어느 일당의 독주를 견제하고, 한쪽이 너무 커지기 전에 다른 세력에 힘을 실어주는 전략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과정에서 "당파에 대한 숙종의 태도"와 "처첩에 대한 숙종의 태도"사이에 고도의 상호 연관성이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당파와 妻妾의 상호 연관성
西人출신의 인현왕후가 중전이 된 것은 西人이 재집권(1680)에 성공한 직후의 일이었다. 만약 남인이 계속 정권을 잡고 있었다면, 인현왕후가 인경왕후의 뒤를 이어 1681년에 중전의 자리를 차지하지는못 하였을 것이다. 西人 출신의 새로운 왕비는 서인 정권의 부활과 함께 출현하였던 것이다.
인현왕후가 중전이고, 西人이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에, 숙종은 南人의 지원을 받는 장옥정(張禧嬪)의 위상을 계속 높여 주었다. 장옥정은 1686년에 종4품 숙원(淑元)에 책봉되었고, 1688년에 정2품 소의(昭儀)로 승진한데 이어, 1689년 초에 정1품 빈(嬪)으로 승격되었다. 서인과 인현왕후가 너무 강해지지 못하도록 하는 힘의 원천이 숙종에게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숙종의 태도는 단순히 인현왕후나 장옥정 개인에 대한 애증(愛憎)의 관계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1689년 인현왕후가 쫒겨나고, 西人정권이 붕괴하면서 장옥정과 남인의 세상이 도래했지만, 숙종은 이번에는 장희빈에 맞설 대항마를 서서히 육성한다. 최숙빈의 바로 그 대항마이었다. 정옥정이 중전의 자리에 있었던 시기에, 최숙빈은 궁녀에서 후궁으로 뛰어 올랐다.
인현왕후 대 장희빈의 대결 구도로 전개되던 여인천하에 최숙빈이라는 대항마가 끼어들게 된 것이다. 전혀 의외의 인물을 등장시켜 여인천하를 복잡하게 만드는 한편 중전 張玉貞의 지위를 불안하게 만든 인물이 바로 숙종인 것이다..
인현왕후, 장희빈 그리고 최숙빈
1694년에는 인현왕후와 西人정권이 함께 복귀하였고, 이때 정계에서는 南人정권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장희빈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세 여인이 궁궐 내에서 공존하게 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장희빈의 아들인 이윤(李胤.. 후일 경종)이 무사히 왕위를 잇도록 하기 위한 숙종의 배려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승리한 인현왕후의 힘이 너무 커지지 않게 하는 것에 기여하였다.이러한 조치가 결과적으로 인현왕후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 기여하였고, 이러한 상태는 숙종시대 여인천하가 끝나는 1701년까지 계속되었다.
끝나는 여인천하
당쟁과 여인천하가 상호 맞물려 돌아간 위의 과정들을 보노라면, 숙종이 결코 여인천하에 휘둘린 유약한 군주가 아니었다는 판단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세 여인이 "때때로"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숙종이 성취한 목적에 비할 것이 못 되었다. 숙종은 처첩을 다루는 과정을 통하여 매번 당쟁의 균형을 조절하는 소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숙종시절의 여인천하가 끝난 1701년에는 매우 주목할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숙종 27년(1701) 음력 8월14일에 여인천하의 한 축이었던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최숙빈은 " 인현왕후 생전에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였다"고 숙종에게 귀뜸하여 장희빈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물론 장희빈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없었다. 하지만 숙종은 이를 명분으로 음력 10월8일에 장희빈에게 자진(自盡)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여인천하의 세 주역 중 2명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최후의 승자 최숙빈, 그러나...
이렇게 해서 최숙빈이 여인천하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여인천하 안에서의 승리"에 불과하였다. 두 여인의 잇달은 죽음으로 최숙빈에게도 중전을 노려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장희빈이 죽기 전 날인 음력 10월7일에 숙종이 " 앞으로 다시는 후궁이 중전이 될 수 없도록 한다"는 왕명을 내림에 따라 최숙빈이 혹시라도 품었을지도 모르는 "왕후의 꿈"은 순식간에 허망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중전은 못 되더라도 최숙빈이 그대로 대궐에 남아 있었더라면, 내명부(內命府)는 최숙빈의 "독재체제" 하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 점을 경계하였던 숙종은 1702년에 내명부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새로운 중전으로 인원왕후(仁元王后)를 맞아들인데 이어 세 명의 후궁을 승진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새로운 내명부는 인원왕후 밑에 영빈김씨, 명빈박씨, 소의유씨 등이 포진하는 구도로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숙빈을 대궐을 떠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최숙빈은 1701년~1704년 사이에 숙종 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인현왕후, 장희빈, 최숙빈 등 세 여인의 여인천하를 끝내고, 인원왕후 중심의 새로운 내명부 체제를 만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다름 아닌 숙종인 것이다.
여인천하를 이용한 숙종의 냉혹함. 비정함
여인천하가 그 끝을 향해 치닫던 1701년에 숙종이 취한 태도를 보면, 여인들의 힘이 자신의 힘을 능가하지 못 하도록 항상 고심했음을 알 수 있다. 인현왕후가 죽자 장희빈에게 자살을 명령하고, 최숙빈에게도 궁궐을 떠날 것을 요구하는 숙종의 모습에서, 그리고 내명부의 그 어떠한 여인도 절대권력을 갖지 못 하도록 하여 노심초사했던 냉혹하고 비정한 숙종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만약 숙종이 여인들에게 휘둘리는 신세이었다면, 여인천하가 끝나기 전에 그의 권력이 먼저 끝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도리어 숙종은 여인천하를 종결시키고 자신은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다. 이런 숙종의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여인천하에 휘둘리는 숙종"이 아닌 "여인천하를 이용하는 숙종"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여인천하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자신의 정치적목적을 달성해 가는 숙종의 모습, 여인천하를 종결시키고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숙종의 모습, 이런 결과를 보노라면 우리는 "사씨남정기"가 만들어낸 숙종의 이미지가 얼마나 역사적 실제와 동떨어져 있는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
장희빈의 묘
숙종과 최숙빈의 만남
역사학은 일종의 재판과 같은 것이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진실이 있더라도, 그 진실을 입증할 증거가 없으면 심증만으로 그것을 역사학적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 기록이나 유물로 입증되는 것만이 역사학적 사실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학적 사실이란 "실제 있었던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史料에 의하여 입증된 일"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학에서는 사실과 진실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인정된다. 이는 사건 당사자가 알고있는 진실과 판사가 인정한 사실이 다를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최숙빈과 숙종의 첫 만남과 관련하여서도 역사학적 사실과 진실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흔히 하는 말처럼 남녀간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첫 만남에 대한 기록
최숙빈과 숙종이 처음 만난 때는 숙종 18년(1692)이었다. 이때 최숙빈의 나이는 23세이었다. 최씨가 7세의 나이로 入宮한 때가 숙종 2년(1676)이므로, 두 사람은 무려 16년간이나 같은공간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다.
아무리 궁녀의 행동반경이 제한되고 왕과의 접촉이 극히 힘들었다고 해도, 한 공간에서 16년간이나 같이 살다 보면 어쩌다 한 번이라도 한쪽이 다른 쪽을 보았거나 혹은 양쪽이 서로를 보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료(史料)에 남아있는 그들의 첫 만남은 다음과 같다.
이들의 첫 만남을 증언하는 사료는 이문정(李聞政 1656~1726)이 지은 수문록(隨聞錄)이다. 이문정은 최숙빈보다 14세가 많은 사람이다. 동지중추부사(종2품. 지금의 차관급)를 지낸 이문정은 신임사화(辛任士禍. 1721~1722) 이후 학문과 집필에만 전념한 인물이다. 숙종의 게비(繼妃)인 인현왕후가 폐서인(廢庶人)되고 장옥정(張禧嬪)이 중전으로 있을 때인 숙종 18년 (1692)의 상황을 보여주는 "수문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대왕(先大王 .. 죽은 임금 즉 숙종)이 하루는 밤이 깊어진 후에 지팡이를 들고 궁궐 안을 돌아다니다가 나인(內人)들의 방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유독 한 나인(궁녀)의 방만 등축이 휘황찬란하였다. 밖에서 몰래 엿보니,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한 나인이 두 손을 마주 잡고 상 앞에 꿇어 앉아 있었다. 선대왕이 매우 이상하게 여기어 그 문을 열고 연유를 물었다.
위의 내용에 따르면, 어느 날 한 밤중에 궁권 안을 거닐던 32세의 숙종이 한 궁녀의 방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방의 조명이 유독 화려해서 시선이 그곳으로 쏠린 것이다. 숙종은 평소에 최측근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리 품위있는 군주는 아니었던 듯하다. 위신을 중시하는 왕 같았으면, 위와 같은 상황에서 궁금증을 억제하고 그냥 지나치거나, 아니면 측근들에게 알아보라고 명령하였을 것이다.그러나 숙종은 여인에 대한 관심이 좀 "솔직하였던" 왕이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숙종은 그 의문의 방을 향해 뚜벅뚜벅 걸아갔다. 방문 앞에 다가선 숙종은, 창호지에 침을 발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국왕은 체면을 내팽긴 채 방안을 몰래 들여다 보았다. 그랬더니 방안에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궁녀가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상 앞에 꿇어 앉아 있었던 것이다. 남들 다 자는 야심한 시각에...
궁금증을 참지 못한 숙종은 결국 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는 그 궁녀에게 물어보았다. 대체 왜 이러고 있는거냐고... 이 궁녀가 바로 훗날 英祖를 낳게 될 崔氏이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우연한 첫만남이었다.
이날 밤 궁녀 최씨는 폐서인(廢庶人)된 인현왕후의 생일을 기념하는 의식을 홀로 거행하다가 숙종에게 우연하게 들켰고, 그러한 모습에 감동된 숙종이 최씨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 "수문록(隨聞錄)"의 설명이다.
"수문록" 기록의 진실성
여기서 수문록 기록이 과연 진실한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수문록"은 당시 당쟁이 극심하던시절 노론의 정치가 이문정이 저술한 개인의 정치평론서 비슷한 것이지, 官撰의 역사서가 아니다. 그리고 이문정은 당시 궁궐 안에서 근무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런 인물이 어떻게 최숙빈과 숙종의 첫 만남을 알 수 있을까?수문록을 지은 이문정(李聞政)은 위의 이야기 앞에 그 정보의 출처를 스스로 제시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효교(孝橋) 옆에 유경관(劉敬寬)이라는 사람이 있다. 사람됨됨이가 근후(謹厚 ..조심스럽고 신중함)하고, 지식이 있어, 일찍이 사알(司謁)로서 선왕(先王 ..숙종)을 6~7년 모시다가 병이 들어 은퇴한 사람이다 "
효교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에 있었다. 그리고 사알(司謁)이라는 직책은 궁중에서 왕명의 전달을 담당하는 액정서(掖庭署)의 책임자인 정6품 관직이었다.비록 품계는 낮지만 국왕과 가까이에서 접촉할 수 있는 자리이었다. 바로 그 액정서의 책임자 司謁을 지낸 유경관으로부터 이문정은 위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우리는 위의 내용에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고 보아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국왕을 6~7년 보좌한 사람이 증언을 하고 있고, 참판급(요즘의 차관급)을 지낸 인물이 집필하였다는 사실이 갖는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혈기왕성한 32세의 국왕이 한밤중에 궐내를 돌아다니다가 한 궁녀의 불켜진 방을 보고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생겨 방문을 열어본 일이 계기가 되어, 훗날 그 궁녀가 정1품 빈(嬪)이 되고, 그 여인의 몸속에서 英祖 임금이 태어났다는 사실.. 한밤중에 이루어진 이 역사는 별다른 윤색과 허구를 가미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다.
장희빈과 숙빈최씨
천민 출신의 무수리에서 정1품 후궁으로 수직상승하고, 英祖라는 걸출한 임금을 길러낸 최숙빈의 일대기를 묘사하고 있는 드라마 "동이"는 위와같이 최숙빈의 정치적,신분적 성장에도움을 준 핵심요소로서 최숙빈과 장희빈 사이에 "조폭 수준 이상의 義理"를 설정하였다.
"서민 출신"이라는 두 여인의 공통점 때문에, 드라마 속의 그러한설정이 꽤 그럴싸하게 보이기도 하고, 그래야만 훗날 발생할 두 여인의 정면 충돌이 보다 더 드라마틱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이" 홈페이지의 기획의도에서 천명한 바와 같이, 이 드라마의 기본취지는 "가장 밑"에서 "가장 위"로 올라간 한 여인의 성공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숙빈의 일생을 움직인 원동력이라든지 ㄱ의 정치적 성장을 일구어낸 핵심요소와 관련하여서는, 어느 정도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100%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드라마가 될 경우 시청자들은 최숙빈의 삶으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수문록(隨聞錄)으로 본 최숙빈과 장희빈
장희빈의 아들인경종의 치세를 주로 정리한 기록물 중에는 이문정(李聞正)이 지은 수문록(隨聞錄)이라는 책이 있다. 일종의 정치평론서인 이 책에는 최숙빈과 장희빈이 어떠한 인연으로 맺어지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담겨 있다. 이 일화는 두 여인의 남편인 숙종의 낮잠으로부터 시작한다. 음력 기준으로 숙종 19년(1693) 연초의 이야기이다. 다만 이 수문록의 저자 이문정은 당시의 집권세력이며, 최숙빈에게 우호적인 서인의 입장에 철저하였던 인물이었으므로, 역시 객관적인 기록은 아닐 것이라는 전제는 불가피하리라...
선대왕(先大王)이 베개에 기대어 조는 사이, 홀연히 꿈에서 신룡(神龍)이 땅속에서 나오고자 하되 나오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머리의 뿔을 드러내고는, 울며 선대왕에게 말하기를 "전하, 속히 저를 살려 주십시요 !"라고 하였다.
여기서 선대왕은 숙종을 가리킨다. 숙종이 죽은 후 기록된 글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숙종의 꿈에 나타난 신룡(神龍)은 태아를, "땅속"은 여인의 몸을 상징하고 있다.
신룡이 땅속에 갇혀 울부짖는 꿈에 놀란 숙종은 얼른 눈을 떴다. 누군가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였으며, 지금 그 아이가 뱃속에서 위급한 상황에 빠져 있을 것이라는 직감이 숙종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숙종의 머릿속에 가장먼저 떠오른 "땅속"은 장옥정(장옥정 ..장희빈)이었다. 당시 장옥정이 중전 자리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두 차례나 아들을 낳은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장옥정의 둘째 아들은 생후 10일만에 사망하고, 당시에는 장남인 세자 아들 이윤(이윤 ..훗날 경종)만 살아 있었다.
"옥정이 세 번째 아들을 낳았나?"라는 궁금증이 생긴 숙종은 중궁전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는 다른 여인의 몸속에 자기 아들이 생겼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중궁전에 도착한 숙종은 장옥정의 모습을 살펴보았지만, 그에게서는 임신의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숙종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러자 담장 밑에 있는 큰 독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다. 독이 엎어진 상태로 있었기 때문이다.
" 저 독은 어째서 거꾸로 세워두었느냐 ?"
" 빈 독은 본래 거꾸로 세워둡니다 "
중전 장옥정이 그렇게 대답하였지만, 숙종은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환관에게 독을 똑바로 세워보라고 명령하였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수문록"은 전한다.
그 속에서 결박당한 여인이 나타났다. 선대왕이 크게 놀라 살펴보니, 얼마 전 밤에 가까이하였던 나인(內人)이었다.
독 안에 결박돼 있던 여인은 다름 아닌 무수리 최씨(후일, 최숙빈)이었다. 임신의 주인공은 장옥정이 아니라 무수리 최씨이었던것이다. 얼마 전에 한밤중에 우연히 만난 숙종과 무수리 최씨가 급속하게 가까워지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로 최씨의 배가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숙종은 무수리 최씨가 임신하였을 것이라는 생각도 못하였던 것이다.
왕의 승은을 입은 궁녀의 몸에 태기가 있다는 첩보를 누구보다 빨리 입수한 쪽은 장옥정이었다. 그래서 장옥정이 문제의 궁녀를 불러다놓고 체벌을 가하던 중에 숙종이 갑자기 들이 닥쳤던 것이다. 체벌이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최씨의 아이는 "땅속"에 영원히 갇혀버렸을 것이다. 아버지 숙종의 꿈에 나타나 "살려달라!"고 애원한 神龍은 바로 그 아이이었던 셈이다.
최숙빈 성공의 원동력은 장희빈에 대한 원한
"수문록"에 실린이 일화가 최숙빈과 장희빈의 첫 인연을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그러하다. "인연"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악연"이라고 표현해야 더 정확하다. 수문록에 담긴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최숙빈과 장희빈은 처음부터 악연으로 뭉친 여인들이었다.
이러한 악연이 계기가 되어 그들은 그후에도 계속해서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치열한 싸움을 전개한다. 이때 생긴 원한이 계기가 되어, 훗날 최숙빈은 장희빈이 사약을 받도록 하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최숙빈은 비약적인 신분상승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악연으로 시작된 두 여인의 실제 관계를 살펴보면, 끈끈한 의리로 뭉쳐진 드라마 "동이"속 두 여인의 관계가 역사적 실제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드라마 "동이"는 어차피 픽션이므로, 역사 교과서나 논문처럼 사료에 얽메일 필요는없다. 하지만, 아무리 픽션일지라도 실존 인물을 다루고 있는 픽션에서는 그 인물과 관련된 핵심부분에서만큼은 사료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최숙빈의 출세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 중 하나가 장희빈과의 악연이었다.이러한 악연이 원동력이 되어 최숙빈은 "걸어서 하늘까지" 출세한 성공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英祖 .. 최숙빈과 김춘택의 아들 ?
영조는 최숙빈과 숙종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즉 영조는 그 어머니가 최숙빈인 것을 맞지만 그 아버지는 숙종이 아니라 김춘택(金春澤)이라는 것이다. 특히 영조 초기에 발발한 이인좌의 난(이인좌의 난) 때에는 "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천민 출신인 숙빈최씨가 김춘택(金春澤)과 밀통하여 낳은 아들"이라는 소문까지 많았을 정도이었다.
김춘택 金春澤
김춘택은 1670년 최숙빈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숙종의 첫째 왕비 인경왕후(인경왕후)가 그의 고모이다. 그러니 그는 숙종의 조카인 셈이다. 할아버지는 숙종의 장인 김만기(김만기), 종조부는 구운몽의 작가로 유명한 김만중(김만중)이다. 아버지 김진구는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작은아버지 김진규는 대제학에 오른 西人의 대표적인 명문 가문이었다. 그런데 장희빈이 등장하면서 이 집안이 갑자기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것이다.
김춘택의 초상화
숙빈최씨가 당시 장희빈의 미모를 능가할 만큼 미인이었다면, 김춘택은 당대의 멋장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여인들, 특히 北村의 사대부 여인들에게 인기를 얻었던 사내이었다.김춘택은 몰락하는 집안과 西人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끊임없이 북촌의 명문 집안 西人세력들을 하나로 묶고 있었다. "김춘택이 북촌에 나타나면, 하루만에 북촌은 음험한 기운이 가득하였다 "라는 기록은 당시 김춘택의 위력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김춘택은 북촌뿐 아니라 대궐에 들어서면 궁녀들이 난리이었다. 그만큼 김춘택은 여인들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매력있는 사내이었다. 김춘택은 미남계를 동원하여 궁녀들을 모두 자기 손아귀에 넣고, 또한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喜宰)의 妾도 건드려 자신의 여자로 만든다. 중년의 여인은정적(정적)이었지만, 너무도 멋진 김춘택에게 모든 정보를 바쳐가며 사랑을 얻는다. 이 정보들을 김춘택은 西人의 집권을 위하여 활용한다.
1701년 장희빈이 숙종의 미움을 받고 10월10일 죽음을 맞이할 때에도 김춘택은 궁녀들을 동원하여,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궁궐 안에 저주의 물건( ??)들을 땅에 묻었다고 조작하여 장희빈을 죽게 만들었다. 김춘택의 이러한 정치적 모략은 대개 西人정권의 안정과 최숙빈의 궁궐 내 입지를 확고하게 하기 위한 것들 이었다.
최숙빈과 김춘택
김춘택은 인생의 1/3을 귀양지에서 보냈다. 김춘택은 영조 탄생의 비밀을 알고있는 핵심 당사자이다. 숙빈최씨와 사랑을 나누던 김춘택이 임금의 씨가 아닌 자기 씨앗을 숙빈최씨에게 잉태시켜 그래서 태어난 것이 英祖라는 것은 당시 18세기를 살던 조선사람들 태반이 믿었던소문이다. 그리하겨 김춘택은 숙종시절 내내 도성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인물..
김춘택과 숙빈최씨 사이의 사랑의 행로는 1689년에서 1693년 약 4년 동안이었다. 1693년 4월23일 숙종이 통명전에서 무수리이었던 최숙빈을 품고 사랑을 나눌 때까지 숙빈최씨를 대궐로 이끈 인물도 김춘택이고, 그래서 임금의 눈에 뜨이게 한 것도 김춘택이었다.
그의 40대 행적은 역사에서도 그 자취를 찾기 힘들만큼 묘연하다. 그의 나이 20대 중반 갑술환국(서인의 집권)을 주도하고, 30대 중반부터 48세로 죽을 때까지 귀양지를 떠덜던 그는 1717년 4월22일 객지에서 숨을거두었다. 그리고 1년 후, 1718년 3월9일, 숙빈최씨도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었다. 김춘택이 죽은 뒤 원인 모르게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숙빈최씨..
김춘택은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불편한 이름이었다. 영조의 출생 비밀 혹은 의혹 역사학계에서는 전혀 언급도 하지 않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가 죽은 뒤 김춘택이 그토록 원하였던 서인의 노론세력이 200년 이상 집권하였지만, 그의 이름은 복권되지 않고 죄인의 신분으로 있었다. 그리고 1886년 12월 4일 고종은 영의정 심순택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를 " 불천위 죽어도 그 공이 사라지지 않으니 그를 영원히 받들어 모시라"는 전교를 내린다.
1689년 감고당(감고당 ... 인현왕후가 장희빈에 의하여 쫒겨난 후 머물던 사저) 언덕길 어느 모퉁이에서 숙빈최씨와 김춘택은 푸릇푸릇한 청춘 스무살로 사랑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리고 불과 4년만에 한 사람은 임금의 총애를 받아 후궁자리를 차지하였으며, 한 사람은 서인정권을 등장시켜 권력의 막후 실력자로 등장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스물셋이란 나이이었다. 과연 영조의 출생은 그 두 사람의 결실일까?
英祖 출생의 비밀 .. 숙종의 의심
최숙빈의 아들이며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가 태어난 1694년은 갑작스러운 냉해 등으로 흉년이 들고 추위로 140만 명의 굶어죽은 사람으로 조선 전체는 시체구덩이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당쟁이 격화되어 남인과 서인의 대결로 숱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첫 아들 그리고 英祖의 출생
이러한 상황에서 1694년 9월13일 영조가 창덕궁 보경당에서 태어났지만, 그후 7일 동안 영조의 탄생은 비밀이었다.왜 숙종은 아들 영조의 탄생을 한동안 비밀로 하였을까? 영조 탄생의 비밀은 이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숙종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최숙빈을 의심하였다. 당시 이인좌의 난을 일으킨 이인좌도 난을 일으키며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김춘택과의 야합에서 태어난 소생이라고 주장하였고, 또한 민간에서도 그러한 소문은 사실처럼 퍼져 있었다.
최숙빈은 영조를 낳기 이전에 "영수"라는이름의 첫 아들을 낳았었다. 그러나 그 아이가 태어난지 두 달만에 죽자 숙종은 비밀리에 장사를 지내라고 지시한다. 임금이 자신의 아들을 비밀리에 묻으라고 한 것이다. 이상하다.
1693년 4월23일 궁에서 쫒겨난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생일날, 창경궁 통명전에 불을 환하게 밝히고 인현왕후를 생각하며 생일상을 차리고 눈물을 흘렸다는 당시 무수리 최씨.. 그 모습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날 밤 무수리 최씨를 안은 숙종... 그리고 그 3일 후 1693년 4월26일 숙종은 "최씨를 숙원(淑媛)으로 삼으라"라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그런데 그 해 10월6일 대궐에서 한 아이가 최씨의 뱃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 아이가 바로 英祖의 형 "영수"이다. 사람들은그 아이가 숙종의 씨가 아니라고 의심하였다. 7삭동이가 아니면 숙종의아이가 아닌 것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영수라는 그 아이는 그 해 12월13일 태어난지 두 달만에 죽었다. 숙종은 자기 아들이 아닐 것이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英祖의 탄생
첫 아들이 두 달만에 죽고, 이어서 다시 그 다음해 1694년 9월13일 영조가 최숙빈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실록에는 9월20일 영조의 탄생이 기록되어 있다. 왜 7일 동안이나 영조의 탄생을 비밀로 한 것일까? 최숙빈의 첫째 아들이 죽은지 두 달만에 또 임신을 하였다면, 英祖의 9월13일 찬생은 의혹을 가질 여지가 없다. 그런데 기록에는 숙종은 산후조리 90일 동안 최숙빈의 방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영조는 태어나면서부터 숙종의 아들이 아닐 것이라는 의혹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영조의 출생이 7일동안 비밀에 붙쳐진 이유가 아닐까? 영조는 죽을 때까지 " 난 정말 숙종의 아들이 아닐까?"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의심하며 살았다고 한다.
영조는 죽기 직전 손자 正祖에게 경희궁 태령전에 보관된 궤를 자기의 재궁(임금의 관)에 두게 하라고 유언으로 남겼다. 정조는 그 지시대로 도승지를 시켜 태령전(泰寧殿)에서 영조가 고이 간직하였던 작은 상자를 가져와 열어보고 갑자기 눈물을 쏟기 시작하였다. 그 속에는 英祖가 평생 껴안고 살았던 자신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궤 속에는 영조의 어진(御眞)이 있었고, 또한 생모 최숙빈의 한성부 여경방 탄생을 알리는 호적단자(戶籍單子)가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다.또한 여러 문서 가운데 영조가 6살 때(1699년), 숙종이 친필로 "아들 금(昑)을 연잉군(延仍君)으로 봉한다"라는 어찰이 들어 있었다
영조 21세, 연잉군시절의 초상화 .. 보물 제1491호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은 옳은 것 같다. 특히 조선 후기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장희빈과 최숙빈의 기록이나 평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당시의 정권 다툼에서 승자인 老論(서인)과 여타 당파에 관한 기록이 그런 것처럼, 영조의 모친 최숙빈과 그의 라이벌 장희빈의 관계도 시종일관 勝者인 최숙빈의 입장에서 기록되었고, 노론은 최숙빈을 우호적으로 묘사하였지만 한편 영조의 모친 추숭작업에도 제동을 걸었다. 국왕의 생모라 하더라도 신분제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英祖의 컴플렉스
영조는 평생 경종 독살설과 모친 최씨의 미천한 신분이라는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최숙빈은 장희빈의 라이벌이었다. 여러 야사에서, 여러 드라마에서 최씨는 선한 인물로, 장씨는 악독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최씨가 인현왕후 및 노론과 정치적 입장, 운명을 같이한 덕분이었다. 위의 수문록(隨聞錄)을 지은 이문정(李聞正) 역시 철저한 노론세력이었다. 수문록은 일관되게 최숙빈의 입장에서 우호적으로 그녀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기록은 달리 전하고있다. 영조가 즉위 1년(1725)에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짓게 한 "숙빈최씨신도비명(淑嬪崔氏神導碑銘)"에는 "만 6세 때 궁녀로 선발되어 들어왔다(選入宮甫七歲)"고 전하고 있다. 인현왕후가 만 14세에 숙종과 가례를 올릴 때 최씨는 만 11세이었다. 최씨가 6세 때 궁녀로 들어왔다면 인현왕후가 그녀를 데려 갈 수는 없게 된다. 또한 6세 때 궁녀로 입궁하였다면 무수리 출신도 아닐 것이다.
소령원 昭寧園
숙빈최씨는 일개 무수리에서 후궁의 자리에까지 올라 영조를 낳지만, 영조가 즉의하기 5년 전에 죽어, 왕실이 법도에 따라 왕비의 무덤인 "능(陵)"에 모셔지지 못하고 "묘(墓)"에 모셔지게 된다. 영조는 즉위 후, 어머니 숙빈최씨의 미천한 출신 배경을 컴플렉스로 여겨 "소령묘(昭寧墓)"를 왕비릉으로 격상시키고자 애썼지만, 조정 신료의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영조 29년(1753) 소령묘는 "소령원"으로 봉해진다.
소령원 → 소령릉
영조는 생모의 묘가 능(陵)으로 모시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승격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조정 중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가장 반대가 심한 중신 박사정(朴師正)을 소령원 제사지낼 때에 보내, 숯불이 이글거리는 향로를 맨손으로 들게 하니, 열 손가락 사이로 기름이 흘러 내리는 순간, 영조가 이래도 능으로 책봉하지 않겠는냐고 하문하니.. 박사정은 "소신은 죽사와도 능지하원지상(陵之下園之上)입니다"라고 해서 결국 능으로 격상하는 것을 단념하였다.
어느 날, 한 나무꾼이 도성에 들어오면서 모화관부근에서 나무를 팔고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영조가 이 나무꾼을 보고 어디서 해 온 나무이냐고 물었다. 그 나무꾼은 평소에 말하던대로 "양주 소령릉이 있는 마을에서 해왔다고 대답하자, 영조는 이 나무꾼을 궁궐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대신들 앞에서 다시 물으니 역시 같은 대답이었다.
이때 영조는 대신들에게 백성들은 소령릉이라고 하는데, 조정대신들은 왜 소령원이라 부르느냐고 호통을 친 일도 있었다. 후에는 대신들이 능으로의 승격을 주장하였다지만 영조는 궁중의 법도에 맞춰 그대로 원이라 했다. 이후 영조는 나무꾼에게 통훈대부의 작위를 내리고, 대대로 능세원(능세원 .. 능에서 나무를 관리하는 직책)을 지내게 하였다고 한다.
세 개의 비석
이곳 소령원의 왼쪽에는 비각(碑閣)이 두 개있고, 각각의 비각 안에는 내용이 다른 영조의 친필 비문(碑文)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숙빈최씨의 아들 연잉군(延仍君)은 이복형인 경종시절,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던 험난하였던 시절을 극복하고 결국 임금이 되었다. 영조이다.
영조는 임금이 되자마자 미천한 출신으로 마음고생이 많았을 어머니를 위하여 소령원의 비문을 소령묘에서 소령원으로 격상시키고 싶었지만, 후일을 기약하고 숙빈해주최씨소령묘(淑嬪海州崔氏昭寧墓)라는 친필 비석을 세우는 것에 만족하여야 했다.
그후 영조는 임금이 된지 29년이 지나서 다시 한번 소령원에 친필 비석을 세우게 된다. 어머니 숙빈최씨에게 화경(和敬)이라는 시호(諡號)를 붙인후 조선국화경숙빈소령원(朝鮮國和敬淑嬪昭寧園)이라는 친필 비문을 새긴 비석을 만들어 세웠다.
高宗이 회고하는 최숙빈
고종은 후궁들에게 "최숙빈과 英祖의 대화"를 들려주면서 최숙빈은 침방나인 출신이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영조의 5대손인 고종은 왕실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기초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고종이 후궁들에게 들려준 일화에 따르면, 하루는 어머니 최숙빈과 아들 英祖(연잉군..세자 시절의 이름)사이에 "어머니의 과거"에 관한 대화가 오갔다고 한다. 최숙빈의 생전에는 영조가 아직 왕이 되지 않았으므로, 이 대화가 있은 때의 영조는 연잉군이라는 왕자의 신분이었다.
연잉군 : 침방에 계실 때 무슨 일이 가장 하시기 어려웠습니까?
최숙빈 : 중누비,오목누비,납작누비 다 어렵지만, 세누비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누비란 것은 두 겹의 천 사이에 솜을넣고 줄이 죽죽 지게 바느질한 옷을 말한다. 솜을 그냥 집어 넣으면 솜이 옷 위아래쪽으로 쏠리기 때문에 중간중간에 줄잊 ㅜㄱ죽 지게 마느질을함으로써 솜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최숙빈의 말에 나오는 중누비란, 줄의 간격이 듬성듬성한 것이고, 오목누비란, 줄을 굵게 잡아 골이 깊은 것이다. 세누비란 촘촘하고 고운 누비를 말한다.
누비옷을 벗어 던진 英祖
어머니의 회고를 들은 영조는 그 자리에서 누비옷을 벗어던졌다.그리고 다시는 그런 옷을 입지 않았다.이 일화가 영조에게 얼마나 큰 일이었으면, 그 후로 조선 왕실에 대대적으로 전승되다가 대손인 고종이 궁궐사람들을 모아놓고 마치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듯 그렇게 이야기 하였을까? 말하자면 영조의 어머니 최숙빈은 조선시대의 女工이었다.
육상궁 毓祥宮
英祖의 生母이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淑嬪 崔氏)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는 즉위하자 바로 1724년에 육상궁을 세워 숙빈묘(淑嬪廟)라고 하였으나, 영조 29년(1753)에 육상궁이라고 고쳐 불렀다.
1882년(고종 19)에 화재를 당하여 다음해에 복구하였다. 육상궁은 七宮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1908년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던 7개의 궁들을 이곳에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칠궁은 육상궁,저경궁,대빈궁,연호궁,선희궁,경우궁,덕안궁을 일컫고 있는데, 이들은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親母로써 정비(正妃)에 오르지 못한 7인의 신위를 모셔 제사지내는 곳이다.
육상궁은 나즈막한 담에 둘러싸여 있고, 인쪽에는 네 개의 사당이 각기 독립하여 서로 접하며 서있다. 이 사당 앞쪽에는 제사를 지내는 곳과 우물이 있으며, 그 앞에 정문이 있다. 제사를 지내는 건물 주위의 뜰은 한국식 정원의 전형을 이루어 정숙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소령원도 ... 보물 1535호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의 무덤인 양주(楊州 .. 현재의 파주)의 소령원을 그린 묘산도이다. 이 소령원도는 네장의 그림으로 이루어졌으며, 닥종이에 그려진 화화식 지도로써 의궤와 더불어 왕실 언묘와 관련된 중요한 시각자료로 가치가 높다.
소령원도 昭寧園圖
소령원도는 산도(山圖)의 형식을 취하였으며, 가운데 묘소와 좌측의 제청(祭廳), 우측의 비각(碑閣)을 배열하고 아랫쪽에는 전답이 그려져 있다. 산수 표현에서 가늘고 기다란 피마준(披麻準)이 미점(米點)과 더불어 사용되었으며, 화면 곳곳에 밝은 담채를 가하였다.
소령원화소정계도 昭寧園化巢定界圖
능원에 산불이 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일정한 거리까지 초목을 불살라 제거하는 화소(火巢)를 표시한 것이다. 붉은 朱線으로 화소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산도(山圖)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거칠고 빠른 필치로 산수의 표현을 하였다.
배치도 配置圖
소령원의 석물(石物) 배열을 나타낸 그림이다. 봉분주변의 담장과 비석, 혼유석, 상석, 장명등, 망주석, 문인석 등을 실제 위치에 맞추어 그렸다.
묘소도형여산론 墓所圖形與山論
두꺼운 종이에 먹으로 상단에 제목을 쓰고 가운데에 산도(山圖)를 그리고, 하단에는 산론(山論)을 적었다. 이는 무덤 자리로 吉地를 택하는과정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718년에 제작된 원본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