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록 4막26장 (1부)
1983년.
26세.
벌써 내가 20대 중반이 되였다.
무엇을 한것도 없고 타이어가게 하다 포기한것 이왼 한것이 없다.
군대도 다녀왔고 사회생활에 약간은 적응할 나이가 되였다.
무엇을 할까 고민할것도 없었다.
1980년대는 실업자가 없는 시기였다.
누군든지 돈을 벌고 싶으면 돈을 벌수 있는 시기였다.
88올림픽 준비로 전국이 시끌 법석하였고 누구나 돈을 벌려면 일거리가 넘쳐났다.
요사이 실업자문제가 대두된것은 상상도 못하였다.
5년뒤에 치를 88서울 올림픽과 3년뒤에 있을 서울 아시안게임 준비로 서울은 대변신을 꾀하였다.
도로를 정비하고 낡은 건물을 재건축하며 잠실에는 거대한 올림픽 타운이 조성되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돈이 넘쳐났다.
전두환정권의 정통성은 미심쩍으나 국민들은 삶의 질이 윤택해 짐에 더할나위 없이 즐거워하였다.
출근시간이면 차가 많아져 교통체증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서서히 강남개발로 인해 집값이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10년간 이어진 강남의 개발로 강북을 뛰어넘는 서울의 요충지로 변신하게 된것이다.
그때 우리집은 관악구 봉천본동으로 집을 사서 이사를 가게 되였다.
이층집이였으며 넓은 마당에 1층은 주차장이 있었고 반층 위에는 거실, 부엌, 욕실과 안방을 포함 방2개가 있었다.
그리고 이층에는 마당과 정원도 있었으며 거실과 방이 2개 그리고 욕실도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1년뒤 결혼을하였고 2층은 신혼방으로 쓰기도 하였으며,아들(후)와 딸(정)을 낳고 키운 곳이기도 하다.
※추후 아들은 편리상"후"라 칭하고 딸은 "정"으로 칭하기로 한다.
그집은 차고지옆에 연탄을 쌓아두는 창고가 있었으며 종종 우리 가족은 소부위인 염통과 고기를 연탄불에 구어먹곤 하였다.
주차장은 커서 차가 두대를 주차하여도 넓은 공간이였고 이층방에는 다락도 있어 쓸모가 있는 집이였다.
나는 남동생과 이층방 1개씩을 사용하였고 여동생은 부엌옆 방을 이용하였는데 그방은 창문이 있어도 옆집과의 간격이 협소하여 컴컴하였다.
아버님은 그집에서 민정당에 입당하여 무주구천동도(민정당 하계 단합대회 개최지) 다녀오시고 지역유지로 활동하시여 나는 예비군 훈련을 면제(?)받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님은 그당시에 고가차량인 현대의"마크5"차량을 소유하였다.
차량번호는"서울 ○○ 1622"였다.
나는 그차를 무척 애지중지하였다.
친구들하고 중대한 약속이 있으면 아버님보고 차를 빌려 경춘가도를 달리기도 하였다.
요사이 말하면 "제네시스"급이였다.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하였다.
이층집에 고급차량을 가진 우리 집안은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