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인사 팔만대장경 경판, 수종 분석과 거제도産 나무로 제작> 2011년 作.
자료연구 :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 [1]. 개요(거제도 어디?) [2]. 각종 역사 기록
☛ 참고 논문 : [1]. 박상진 박사(팔만대장경판의 수종분석),
[2]. 배영기 박사(해인사 팔만대장경).
[1]. 개요 : 해인사에 보관 중인 팔만대장경과 거제도 관련 각종 기록을 소개하고 또한 경판 재료인 나무수종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대장경판 제조에 사용된 원목의 수종은 거제도와 남해일대에서 벌목하여 실어온 대부분 산벚나무류로서 전체 시편수 대비 62%에 해당하고 경판부위에서만 보더라도 64%에 달하며 마구리의 구성수종에서도 56%에 해당한다. 또한 돌배나무류는 전체 조사시편수 대비 약 13%이고 채취부위별로는 경판부에서도 14%나 점유하고 있다. 기타 자작나무류 8%, 층층나무류 6%, 단풍나무류와 후박나무류가 각각 3%, 버드나무와 굴거리나무가 각각 1점씩 검출되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경판에는 사용하지 않았고 마구리 혹은 부위불명 재료에서 각각 1-2점이 검출되고 있다.
그리고 <해인사대장경판개간인유>에서 거제목을 인용하면서, 거제도의 거제수나무를 실제의 거제수나무와 혼용한 것이다. 자작나무와 거제수나무는 나무껍질이 종이처럼 벗겨지는 모양이 거의 비슷하며 구분이 어렵다. 한자로도 자작나무를 "화", 거제수나무를 "황화" 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거제목이 거제수를 거쳐 자작나무로 알려진 계기가 된 것으로 추증 할 수 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에서 새긴 목판경으로서 총 목판수는 81,340매이다. 그러나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는 81,268매인 것으로 최종 확인되었다. 대장경은 국보 제 32호이며 경·율·론의 3장을 비롯하여 불교관계 책들을 총망라한 불교총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제작년도는 고려 고종 때인 1235년~1251년 사이 16년간 소요되었다. 경판 1장의 무게는 평균 3.1kg이며 전체무게는(3.1kg×81,340매=252,154kg) 약 250톤에 달하며 8톤 트럭으로 31대 분량에 해당된다. 경판 1장의 규격은 가로 72.6cm×세로 26.4cm×두께 4cm로 되어있으며,
경판의 네모서리는 99.6% 순동으로 된 장식을 부착하였는데, 당시 고려초기 거제도에는 "연정장(鍊汀莊)"이라는 고려시대 철과 동을 제련하던 곳 "거제제련소"가 있었다. 죽토부곡에서 약 5리쯤 떨어진 남서쪽 물가 근처이니, 현재 거제시 연초면 야부 일대인데, 매립과 복토전의 옛 연사리 하천 하류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1026년(현종17년)에 왜구가 약탈해 간, 일본 좌가현(佐賀縣) 동송포군(東松浦郡) 경정(鏡町) 혜일사(惠日寺) 사찰에 있는 하청부곡(河淸部曲) 북사종명(北寺鐘銘),or 거제북사종(巨濟北寺鐘), 청동으로 된 고려범종(高麗梵鐘)이 여기 연초 연사리 제련소 연정장(鍊汀莊)에서 제작되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또한 거제도는 예부터 동광 광산이 존재하여 왔다는 사실로 인해, 구한말 영국과 일본의 동광 광산 쟁탈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 해인사 대장경 장식 모서리와 거제북사종 재질의 함량 분석을 한다면, 위의 사실이 증명되리라 확신한다>.
● <<거제도 초벌경판 제작 사유>>
경판 제작 시기는 최씨 무신정권시대였다. 최우의 식읍이 진주이며, 또한 당시 거제현은 진주목의 관할이었으며, 산남도 역원 연결도로가 진주 평거역에서 고성 배둔역을 거쳐 마지막 종점인 거제 오양역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연유로 인해 진주에 분사장경도감을 설치하자 곧바로 산남도 진주의 속현인 거제도가 팔만대장경의 경판 제작지로 사용되었음은 자명하다.
이 후 삼별초항쟁 때, 거제도까지 점령(1271년)하고 더 이상 부산이나 울산쪽으로 항쟁군이 진격하지 않은 것은 팔만대장경 제작과 진주의 관할지역으로 인한 거제도와 무신정권과의 각별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거제도 경판 작업 항구는 거제 어디일까?>>
경판 네모서리를 부착하기 위하여 사용된 못은 특수처리 한 것으로 당시의 철 정제기술이 매우 정교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경판 재료인 나무는 대부분 거제에서 벌목하여, ①3년간 바닷물에 잠겨 두었다(?)가 건져서 ②소금물에 삶아 그늘에서 말리고 ③대패질을 한 후 각자 작업을 하였다. 각자 작업이 끝난 ④경판은 옻칠을 한 후 ⑤구리로 네모서리에 못질하여 마구리를 부치는 것으로 경판 1매의 공정이 끝나게 된다. 이와 같은 1차 공정(초벌경판)까지는 거제도에서 모든 것을 마친 후에 진주 쪽으로 보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거제도에서 이러한 작업을 하기 위한 장소로는 남부면 율포 다대와 일운면 지세포리, 거제면 서상리, 고현만 수월 에서만 그 여건과 환경이 적합하다.
① 당시 기계 없이 사람의 인력으로만 작업을 했으므로, 최소 5년 이상 동안, 순 작업인원 약 1000 명 이상의 장골이 거제도에서 이 일로 거주했을 것이고,
② 몽고의 침입 등, 중앙정부의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체적으로 의식주를 해결해야 했으므로, 넓은 들판이 있는 곳이 필요 했으리라,
③ 목재를 3년(?)간 바닷물에 담가 두어야 할 곳, 즉 넓은 갯벌과 사구에 의한 석호(潟湖)를 갖춘 곳.(매립 前, 옛 지형 /현재는 100 여년 전부터 매립이 이루어 지고 있음)
④ 그리고 예로부터 염전과 봉산이 있는 곳.(경판을 소금물에 반드시 끓여야 함.)
"반드시 염전이 있는 만(灣)을 끼고 있는 항구".
⑤ 경판 운반을 위한 천혜의 항구를 구비 한 곳. 등등..
위 여러 조건을 만족 시키는 곳은 "남부면 가배리,다대리, 일운면 지세포리,그리고 둔덕면 학산리, 거제면 서상리 일대가" 가 가장 적합한 지역이다.
▶하지만 경판 모서리 동제 장식을 "연정장"(연초면)에서 제작했으니 구신현읍 수양동,수월동(고려시대에는 거제 중앙고등학교에서 수양동사무소까지 모두 바다 갯벌 지역임.)도 유력한 지역이다.◀
당시 거제도 전체가 대장경 초벌경판 제작에 동원되었음이 확실하다.
▶참고 : 지세포에는 지금도 옛 봉산(封山)인 소동(지세포에서 조선말기 분리) 반송재 일대(피맛골)에 그 이야기가 구전되어 오고 있다. (연밭>염밭>염전. 석호).
[2]. 각종 역사 기록
①유진팔만대장경개간인유(留鎭八萬大藏經開刊因由)와 ②해인사 사적비(事跡碑).
③ 그 외 각종 역사 기록.
신라 애장왕(802년)때 창건된 천년 고찰 해인사에는 그 역사만큼이나 많은 고문서가 있는데 몇 고문서의 기록을 근거로 경판을 새긴 당시부터 해인사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대장경판과 직접 관련을 지어 볼 수 있는 문헌은 해인사 유진 팔만대장경 개간 인유(留鎭 八萬大藏經 開刊 因由)와 해인사 사적비(事跡碑)가 있다.
먼저 팔만대장경 개간 인유를 보면 신라 때 化主 이거인(李居仁)이란 사람이 거제도에서 경판을 새기고 해인사로 운반한 것을 기념하여 축하 법회를 연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 있다.
1. 유진 팔만대장경 개간인유(留鎭八萬大藏經開刊因由) 이거인(李居仁) 기록.
[경상도 합천 땅에 이 거인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집안형편은 비록 가난하였으나 원래 성품이 온순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어서 이웃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좋아하는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서(里胥)라는 말단 관직을 가지고 있을 때 당대중(唐大中) 임술년 가을에 어느 마을을 순회하다가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오는 중 길바닥에서 희한하게도 눈을 셋씩이나 가진 강아지 한 마리를 얻어 집으로 데려가게 되었다. 이 강아지는 자라면서 모양은 마치 사자와 같았으나 성질이 온순하여 마치 착한 사람 같았으며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않으면서도 주인에게는 한없이 충실하였다. 주인이 외출할 때나 귀가 할 때마다 오리쯤은 따라 나와서 전송하고 환영하므로 이 개를 거인은 자기 자식처럼 애지중지 길렀는데 3년 후인 갑자년 가을에 갑자기 병도 없이 앉아서 죽어버렸다. 거인은 그 개의 주검을 슬퍼하여 꼭 사람과 같이 관에 넣어 정중한 장례를 치루어 주었다. 그런데 다음해인 병인년 10월에 거인도 역시 갑자기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죽은 거인이 저승에 가니 난데없는 임금님이 있길래 쳐다보았더니 눈이 셋이고 머리에 쓴 관 모양이 다섯 봉우리 모양이고 손에 보홀(寶?)을 들고 붉은 비단옷을 입었으며 입술이 빨갛고 치아가 가지런한데 상아로 만든 의자에 높이 앉아 있었다. 좌우에 거느리고 있는 신하들은 모두 까만 모자에 붉은 도포를 입고 있었으며 두상이 소머리 모양이고 말 얼굴을 하였으며 삼엄하게 호위하고 있는 모양이 어마어마하여 인간세상의 어느 임금님보다 못지않았다.
그런데 세 눈을 가진 귀왕(鬼王)이 거인을 쳐다보더니 바로 옥좌에서 내려와 허리를 굽혀 절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주인님 어찌된 일이십니까? 저승에서 이렇게 주인님을 뵈오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일찍이 천상에서 죄를 진 바 있어 개의 몸으로 변하여 인간세상으로 귀양살이를 간 것인데 다행히 착한 주인님을 만나 편안히 잘 있다가 다시 돌아와 복직되어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참으로 고맙고 황송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니 이거인도 전에 집에 있던 눈이 셋 달린 개가 바로 지금의 저승 임금이라는 것을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거인도 역시 이 기이한 인연에 놀라 인사를 마치고 눈물로서 대답하였다.
"천한 이 몸이 본래 배우지 못하고 아는 것이 없는데 이제 곧 염라대왕을 찾아 뵈오면 묻는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귀왕께서는 저로 하여금 이롭게 되는 길을 가려쳐주십시요" 하였다.
귀왕이 말하기를
"착하고 어진 주인님이여! 이제 내가 상세히 아르켜드릴테니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염라대왕한데 가면 인간 세상에 있을 때 무슨 좋은 일을 하였느냐고 틀림없이 물으실 것입니다. 몸이 천한 일에만 종사하여 좋은 일은 할 사이도 없었습니다. 항상 부처님 말씀의 귀중함을 받들고 대장경판을 만들어 널리 알리려 하였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저승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라고 대답하라 하였다.
그래서 거인은 귀왕의 말을 명심하여 듣고 나서 곧 사자들의 안내를 받아 저승에 들어가니 염왕이 묻기를 "너는 인간 세상에 있을 때 무슨 좋은 일을 하고 왔느냐?"고 하였다.
"저는 젊은 시절부터 말단 관직에 있었던 탓으로 착한 일을 할 사이가 없었기에 나이가 들면서 장차 큰 불사를 일으켜 부처님과 인연을 만들고자 하였는데 갑자기 저승사자의 부름을 받아 이렇게 죽어 왔사오니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거인의 대답을 들은 염라대왕은 부드러운 얼굴로 친절하게 앞으로 가까이 오라하기에 공손히 앞으로 나가니 염라대왕은
"그러면 네가 인간 세상에 있을 때 무슨 일을 하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말았느냐 사실대로 말하여라" 하였다.
거인은 아까 귀왕이 미리 알려준 바와 같이 "이 천한 몸이 듣건데 부처님의 말씀은 지극히 귀하다 하옵기에 장차 경판을 새겨서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하다가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심히 유감입니다." 하였더니
이 말을 듣고 일부러 뜰로 나려온 염라대왕은 매우 친절한 태도로
"바라건데 잠시 올라와서 일시 쉬도록 하여라" 하였다. 그러나 거인이 계속 사양하자 염라대왕은 판정관에게 명령하여 거인을 귀신명부에서 제외하게 하였다. 이어서 염라대왕은 거인을 칭찬하여 마지않으면서 정해진 수명보다 더 보태어 인간세상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백배사례하고 돌아 나오다가 다시 귀왕의 거처를 찾아 작별인사를 하려하니 미리 자리를 만들어 두고 어가 가까이 오르게 하여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하기를
"주인님 큰일을 맡으셨나이다. 그러나 조금도 염려하시지 말고 집에 돌아가시면 권선문을 지어서 팔만대장경이라 제목을 쓰고 선행을 한 공로 이야기를 판으로 새겨 관청에 납본하여 도장을 받아 보관해 두십시오. 그리하여 내년 봄에 내가 인간세계를 순시할 때를 다시 만나기로 하지요."라 하였다.
거인은 안심하고 유유히 물러나와 크게 기지개를 켜고 잠을 깨치니 한바탕의 꿈이었다. 거인은 곧 공덕문을 지어서 관인을 받아두고 봄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더니 어느 듯 다음해인 정유년 봄이 되었다. 이때 마침 신라의 공주자매가 동시에 병을 얻어 자리에 누워 있다가 어느 날 부왕에게
"바라건대 급히 대장경 화주(化主-중생을 교화 인도하는 학식 높은 스님)를 불러 주십시요. 아니면 여식들은 곧 죽어 버릴 것입니다."
하며 통곡하는지라 임금은 곧 바로 합천 태수에게 연락하여 거인을 서울로 보내게 하였다. 거인이 궐문에 이르니 연락을 받은 공주가 나와서 말하기를
"화주님이시여 잘 오셨습니다. 와 주셔서 아픔은 다 나았습니다. 내가 바로 저승에서 만난 귀왕입니다. 저승에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 한다.
공주는 다시 임금님께 말씀드리기를
"이 사람 거인은 전에 저승으로 들어갔더니 염라대왕께서 다시 인간세계로 되돌려 보냈다하오며 이는 오로지 대장경판을 새겨서 온 누리에 널리 알리도록 하기 위함이니 원하옵건대, 부왕께서는 대단(大檀-불교의 특별한 의식을 치루는데 필요한 단)을 만들어서 이 큰 일을 도모함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리하시면 저희 공주들도 무병할 것이고 나라의 행운이 영원할 것이며 부왕께서도 오래오래 복을 누리실 것입니다."함에 왕은 곧 허락하였다. 이에 임무를 다한 귀왕은 거인과 작별을 고하고 다시 현신하여 천상으로 돌아가 버렸다.
공주에게 있든 귀왕의 혼령이 떠나자 병이 완쾌되고 정신도 본 정신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공주는 다시 부왕과 모후에게 아뢰기를
"저승에서도 이처럼 착한 일만 하였는데 하물며 인간세계에서 어찌 등한히 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님께서는 소홀히 하지 마십시요" 하니 왕이 감복하여 대장경 각판을 허락하였다. 왕은 곧 화주의 착한 마음씨를 칭찬하며 대각승통을 불러 대장도감으로 설치하였다. 사재를 들여 대장경 각판을 잘하는 사람을 불러 모우고 거제도에서 경판을 만들어 금으로 장식하여 옻칠을 하고 해인사에 옮긴 다음 십이경찬법회(十二慶讚法會)를 열었다.]
위 내용 중 {①당대중 임술년/당나라 무종 회창 2년, 842년}과 {②신라 귀왕, 공주자매}라는 말이 이 기록을 믿지 못하게 하고 있다.
▶ 잘못된 기록 : 당나라 대중 연간이란 847년 정묘년~859년 기묘년 13년간이니 대중연간에는 임술년이 없으며, 또 귀왕과 만나기로 한 다음해 봄 정묘년은 신라 제46대 임금인 문성왕 9년(847년)이므로 신라공주는 문성왕의 딸을 말하는 셈이다. 해인사 창건후 50여년이 지난 셈이다.
왜냐하면 現 대장경판에는 말미에 {고려국대장도감 봉칙조조(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라하여 고려 고종때 각판하였다는 사실은 너무 명백하여 이론을 제기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 <해인사유진팔만대장경개간인유>는 경판 새김의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것 이외에는 지금의 해인사팔만대장경과 너무나 잘 맞아 떨어진다. 우선 명칭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팔만대장경과 같다.
특히 거제도에서 경판을 만들었다는 내용은 주목을 끈다. 거제도를 비롯한 남부 섬지방에는 경판 재료로 쓰인 산벚나무와 돌배나무 및 후박나무 등이 풍부했고 이를 통털어 거제목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 같다.
오늘날 우리가 경북 봉화군 춘양지방에서 나오는 나무를 춘양목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제도에서 새겨진 완성 경판, 혹은 바로 글자를 새길 수 있는 "초벌 경판" 이 개경포를 통해 해인사로 옮겨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시대는 전혀 맞지 않지만, 팔만대장경을 새긴 분사대장도감의 위치로써 다른 어느 곳 보다 유리하므로 전설이나 믿을 수 없는 자료로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이거인(李居仁) : 생몰년 미상. 신라 문성왕 때의 불교신도. 합천 출신. 가야산 해인사의 사간장경판(寺刊藏經板)을 만드는 데 공헌한 전설적인 인물로 전하여진다. 온순한 성품을 지녔으며, 지금의 면장에 해당하는 이서(里胥)를 맡고 있었으므로 동네사람들은 그를 인서(仁胥)라고 불렀다. 842년(문성왕 4) 가을에 동네를 다니면서 세를 받다가 저녁에 귀가하였는데, 길가에서 눈이 세개 달린 강아지를 발견하고 데려다 집에서 길렀다. 강아지는 마치 사자처럼 생겼고 성품이 어진 사람과 같아서 하루에 한번씩만 먹고 주인을 잘 따랐다. 이거인 내외도 개를 무척 귀여워하였는데, 844년 가을에 앉아서 해를 쳐다보며 병도 없이 죽었다. 그는 시체를 관에 넣어 묻고 제물을 차려서 장사를 지냈다. 846년 10월 이거인이 죽어서 명부(冥府)에 갔는데 세 눈을 가진 왕이 오봉관(五峰冠)을 쓰고 심판을 하고 있다가 그를 보자 반가이 맞았다. 왕은 자신이 명부에서 허물을 지어 3년 동안 강아지로 변해서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그때 주인의 은혜에 감사한다고 하면서 은혜를 갚을 수 있게 하여달라고 하였다. 이거인은 앞으로 명부에서 물을 말에 대한 대답을 가르쳐줄 것을 요구하자, 왕은 이를 일러주었다. 이거인은 그 가르침대로 염라대왕 앞에서 “법보(法寶)가 소중하다고 하기에 경판을 새겨서 널리 유포하려 하다가 일을 이루지 못하고 명부로 왔다.”고 하였다. 이에 염라대왕은 명부에서 이거인의 이름을 없앤 뒤 돌려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세 눈을 가진 왕을 찾으니, 돌아가서 책을 매어 ‘장경판각공덕문(藏經板刻功德文)’이라 쓰고 관청에 가서 도장을 받아두도록 하였다. 그가 승낙하고 물러나면서 기지개를 하고 깨어나니 한바탕의 꿈이었다. 곧 권선문을 만들어놓고 기다렸다. 그런데 847년 봄에 궁중의 공주들이 한꺼번에 병이 나서 고칠 수 없었는데, 하루는 왕에게 불경 화주(化主)를 불러올 것을 요구하였다. 이거인이 왕궁으로 가자 세 눈 왕의 혼을 의탁받은 공주가 왕에게 불경간행에 시주할 것을 부탁하여 왕이 허락하자 곧 병이 나았다. 왕은 사재를 보시하고 나라 안의 여러 양공(良工)들을 모았으며, 거제도에서 재목을 내고 불경을 새기게 한 뒤 가야산 해인사에 모시고 열두번 경찬회(慶讚會)를 베풀었다. 이거인 내외는 그 뒤 편안히 오래 살다가 극락왕생하였다고 한다. 생애라기보다는 일종의 전설로서, 그로 말미암아 해인사의 사간장경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밝힌 영험담이다. 이 설화에 어떤 역사성을 부여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영험담이 널리 알려지고 있다는 것은 불교의 민간신앙형태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그 나름대로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해인사 사적비>
2. 해인사 사적비(事跡碑). [해인사복고사적비(海印寺復古事蹟碑)]
한편 해인사 사적비는 조선 영조45년(1769)에 새운 것인데 비문내용중에 {....高麗文宗時藏大藏經板 我惠莊大王 戊寅歲 重修板閣又印其經文焉....}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고종보다 거의 200여년이나 앞선 고려문종(재위기간1046-1083)시대에 경판을 해인사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으로서 이 역시 같은 이유로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다.
한편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기록된 이거인 관련 내용을 보면 <해인사유진팔만대장경개간인유>와 거의 비슷하나 말미에 주목할 부분이 있다. "---이 때 거제도 앞바다에는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모를 큰 배가 떠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배안에 팔만대장경이 가득 실려 있었는데 글자는 모두 금은으로 되어 있었다. 애장왕은 온 나라 기술자를 동원하여 이거인과 함께 대장경을 간행하고 해인사에 옮겨서 보관하게 했다.
▶ 한편 1769년(영조45년)에 세운 <해인사 사적비 비문>을 보면 고려의 고종보다 거의 200년이나 앞선 고려 제11대 임금인 문종(1046~1083년) 시대에 경판을 해인사로 안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인사 고문서에 나타난 이 두가지 기록은 경판을 새긴 연대로 보아 팔만대장경판과 직접 관련시키기는 어려울지라도 해인사에 예로부터 경판이 있었다는 사실을 추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설은 기록의 연대가 맞지 않음으로써 대부분의 학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 유기(有璣) : 1707년(숙종 33)∼1785년(정조 9). 조선 중기 편양문파(鞭羊門派)의 승려. 속성은 문화유씨(文化柳氏). 호는 해봉(海峯) 또는 호은(好隱). 청주 원안촌(園岸村) 출신. 9세 때 속리산에 들어가 독서를 하다가 16세에 출가하였다. 28세에 가야산 해인사의 의눌(義訥)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낙암에게서 화엄학(華嚴學)을 배워 화엄에 통달하였다. 31세에 개당(開堂)하여 학승들을 가르쳤으며, 15년 동안 해인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772년(영조 48)에 표충사를 수호하는 책임을 맡은 총섭(摠攝)이 되었으며, 나이 78세로 해인사에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호은집》4권 1책, 《보권문 普勸文》 1책, 《해인사사적비문 海印寺史蹟碑文》이 있다
▶ 해인사복고사적비(海印寺復古事蹟碑) : 해인사(海印寺)는 합천군(陜川郡) 가야산(伽倻山)에 있는 사찰(寺刹)로, 신라(新羅) 애장왕(哀莊王) 때 승려(僧侶) 순응(順應)이 세운 곳이다. 사찰에는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판(板)을 보관하였는데, 1458년(세조 4년)에는 판각(板閣)을 중수(重修)하고 경문(經文)을 인쇄한 일이 있었다. 사찰은 1743년(영조 19년)과 1763년(영조 39년)에 두 차례 불에 탔고 당시의 관찰사(觀察使)였던 김상성(金尙星)과 김상철(金尙喆)이 각각 자신의 재물을 내어 복구하였으므로, 해인사 사적비(海印寺事跡碑)는 두 도백(道伯)을 공로를 기려 세웠다. 비문에는 해인사의 중요성과 두 도백의 공로, 그리고 왕비(王妣)와 주상(主上), 세자(世子)의 장수(長壽)를 기원하고 공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맡았던 일과 성명을 기록하고 있다. 승려 유한(有漢)이 비문(碑文)을 짓고, 신몽준(申夢遵)이 글씨를 쓰고 전액(篆額)하였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주] 거제수나무(Betula costata) : 거제수나무는 황화수(黃樺樹) 붉은자작나무 , 황단목(黃檀木) 묽은박달나무 물작나무, 라고도 하며 재앙을 쫓아낸다는 의미를 부여하여 거재수(去災水)나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추정한다
3. 해인사 대장경 경판 나무, 거제도 관련 각종 기록.
1). 해인삼미(海印三味)씨는 내 본산(本山)자랑이라는 잡지의 {海印寺의 藏經閣과 經板}이라는 글에서
["경판(經板)의 전면(全面)에 칠을 하고 用材는 백화[白樺(자장나무)]인데 제주도, 완도, 거제도 등에 산출(産出)한 것이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2). 무능거사(無能巨士)씨는 {李朝佛敎史}라는 글에서
["용재(用材)는 장목[樟木(조선에서는 厚朴이라 칭함, 제주도, 완도, 거제도, 울릉도(鬱陵島)에 産함)]인데"]라 하였다.
3). 한편 萬海 한용운은 {海印寺巡禮記}라는 수필에서
["체재(體裁)로 말하면 백화[白樺(자작나무 혹은 거재나무)]의 質인데"]라고 하였다.
4). 기타 李 ?永씨는 {高麗大藏經, 그 歷史와 意義}라는 글에서
["목재는 제주도, 완도 및 거제도산인 자작나무를 ?는 데 조조(雕造)가 시작되기까지는 나무를 오래도록 해수(海水)에 저려 부패를 방지하는 조치를 취하고 그것을 다시 충분히 말린 후에야 판목을 만들었고 조조(雕造)가 시작되었다"]고 하였으며
5). 조명기(趙 明基씨)는 {國寶高麗大藏經의 價値}라는 글에서
["용재(用材)는 제주도, 완도, 거제도, 울릉도 등지에서 산출하는 후박[厚朴(화樺, 자작나무 혹은 거재나무라고도 함)]이다. 강화도 本司에는 적당한 목재가 없기 때문에 영남지방의 남해 거제도 등에서 생산하는 원목을 벌체하여 천리 길을 운반하였다가 수년간 해수에 담그고 또 염수(鹽水,소금물)에 증(蒸,찌다)하고 2.3년씩 건조하여 이것을 판자로 제재한 다음에 필사(筆寫)한 경문을 조각한 뒤 옻칠을 하여 영구히 부식함이 없도록 제작한 것이다"] 라고 하였고
6). 서수생(徐首生)씨는 {伽倻山 海印寺 八萬大藏經 硏究}에서
["용재는 백화(白樺)인데 자작나무라고도 한다. 일명 거제도나무라고도 한다. 이 나무는 제주도, 완도, 거제도, 울릉도 등지에서 많이 생산된다. 이 나무를 벌채하여 3년동안 바닷물에 담궜다가 꺼내어 짝을 쳐서 다시 소금물에 삶아서 그늘에 말린 뒤에 대패질을 하고 경문(經文)을 모필(毛筆)로 써서 판에 새긴 것이 이 경판이다. 그리고 뒤틀리지 않도록 두 끝에 각목으로 마구리를 붙이고 옻칠을 가볍게 하고 네귀에 동제(銅製)로 장식하여 성판(成板)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 논문>>
☛ [1]. 박상진 박사(팔만대장경판의 수종분석), [2]. 배영기 박사(해인사 팔만대장경).
[1]. 팔만대장경판의 수종분석과 보존현황(修多羅,97.2) /박상진 박사
그림 1. 대장경판 산벚나무 현미경사진(왼쪽부터 힁단면, 방사단면, 접선단면)
그림 1. 대장경판 돌배나무 현미경사진(왼쪽부터 힁단면, 방사단면, 접선단면)
1. 머리말 박상진 박사
고려대장경판은 국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전 국민이 일치단결 하여 불심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겠다는 일념으로 장장 16년의 대장정을 거쳐 이루어진 우리 민족의 위대한 유산이다. 이는 단순히 불교라는 어느 종교의 경전으로서의 값어치뿐만 아니라 선조들의 집념과 끈질긴 투혼을 엿볼 수 있는 증거로서 우리 모두 옷깃을 여미게 한다. 대장경판은 나무로 만들어 졌으면서도 75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거의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든 조상의 슬기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면서 경판의 재질은 무엇이며 어디서 어떻게 그 많은 나무를 조달하였는지는 신비로움을 알아내는 데는 오늘의 발달된 과학적인 지식으로도 불가사의이다.
2. 경판 나무종류와 재질
경판에 사용한 나무는 우선은 재질이 균일하고 미세하여 글자 한 획 한 획이 깨끗하게 파져야 하며 너무 단단하여 글자를 새기기가 여려워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너무 연한 나무는 印經을 할 때 빗침부분이 떨어져 나가버리므로 적당치 않다. 이런 조건에 맞는 나무는 그렇게 많지 않으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나무, 잣나무, 젓나무 등의 침엽수는 세포크기가 크고 (머리카락의 1/2정도) 春秋材의 세포차이가 너무 뚜렷하여 부적합하다. 또 밤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물푸레나무 등은 물관의 직경이 무려 0.3mm나 되므로 쓸 수 없다. 그렇다면 적당히 단단하고 세포의 크기가 고르며 조각하기가 쉬운 나무는 대단히 한정되며 그나마 경판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직경이 크게 자랄 수 있는 나무라야 하는데 이런 나무는 10여종에 불과하다. 경판의 수종분석방법은 나무의 세포형태나 배열형식을 광학현미경과 전자현미경을 이용하여 목재조직학적인 기법으로 분류하고, 그 특징을 이미 조사한 세포형태특징과 비교검토하여 해당수종을 확정하는 것이다. 대장경판을 대상으로 약 250여점의 표본을 선정하여 분석한 결과는 다음 표와 같다.
표에서 처럼 대장경판 제조에 사용된 원목의 수종은 대부분 산벚나무류로서 전체 시편수 대비 62%에 해당하고 경판부위에서만 보더라도 64%에 달하며 마구리의 구성수종에서도 56%에 해당한다. 또한 돌배나무류는 전체 조사시편수 대비 약 13%이고 채취부위별로는 경판부에서도 14%나 점유하고 있다. 기타 자작나무류 8%, 층층나무류 6%, 단풍나무류와 후박나무류가 각각 3%, 버드나무와 굴거리나무가 각각 1점씩 검출되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경판에는 사용하지 않았고 마구리 혹은 부위불명 재료에서 각각 1-2점이 검출되고 있다.
|
부 위 수 종 |
경 판 |
마구리 |
나무못 |
부위불명 |
계 |
시편수대비점유율(%) |
|
산벚나무류 |
135(64) |
15(56) |
- |
1 |
151 |
62 |
|
돌배나무류 |
31(14) |
1(3) |
- |
- |
32 |
13 |
|
자작나무류 (거제수나무) |
18(9) |
1(3) |
- |
1 |
20 |
8 |
|
층층나무류 |
12(6) |
3(12) |
1 |
- |
16 |
6 |
|
단풍나무류 |
6(3) |
1(3) |
1 |
- |
8 |
3 |
|
후박나무류 (거제수나무) |
5(2) |
2(7) |
- |
- |
7 |
3 |
|
버드나무류 |
1(1) |
- |
- |
- |
1 |
1 |
|
굴거리나무 |
1(1) |
- |
- |
- |
1 |
1 |
|
소나무 |
- |
2(7) |
- |
1 |
3 |
1 |
|
잣나무 |
- |
2(7) |
1 |
2 |
5 |
2 |
|
계 |
209(100) |
27(100) |
3 |
5 |
244 |
100 |
이상에서 본 것처럼 경판의 수종은 산벚나무류와 돌배나무류가 전체 검출된 조사수종의 75%로서 대부분을 차지하며 지금까지 자작나무로 알려진 수종은 8%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 안 될 사실은 8만여 장의 대장경판중에 불과 250여장을 조사한 결과를 가지고 대장경경판 전체수종을 논의 할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물론 필자도 표본크기가 모자라는 점은 인정하나 조사대상이 국보라는 특수성과 한정된 조사기간이라 어쩔 수 없었고 조사경판의 선정에 있어서는 가능한 대표성을 나타낼 수 있게 충분히 배려하였다. 조사표본수를 늘리면 앞 표에서 제시한 각 수종의 비율은 다소 변할 수 있겠으나 대체적인 경향을 알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산벚나무류, 돌배나무류, 단풍나무류, 층층나무류, 버드나무류 등은 북쪽의 추운 지방을 제외하고 우리나라
의 어디에서나 비교적 흔히 자라는 수종이고 자작나무류는 추운 북쪽지방이나 남쪽에는 지리산 중복이상
의 비교적 한랭한 기후를 선호한다. 반면에 후박나무류와 굴거리나무는 그 분포지역이 남해안의 난대림으
로 경판의 판각지역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주요 경판수종인 산벚나무류, 돌배나무류, 자작나무류의 특징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산벚나무류 (Prunus sp.)
산벚나무는 장미과라는 대단히 많은 나무종류가 포함된 집단에 속하는 나무이다. 좀더 좁혀 본다면 벚나무,
왕벚나무, 산벚나무, 올벚나무, 개벚나무. 섬벚나무, 꽃벚나무등 식물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사람들은 좀처럼 구별할 수 없는 비슷비슷한 벚나무류중의 한 종류이다.
이른 봄 古家의 뜰 안이나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흔히 매화, 산수유 등의 화사한 꽃을 보고 이제 막 봄의 시작을 느낄 즈음 다른 나무들은 아직 새잎의 푸르름이 시작도 하기 전에 화사한 분홍빛 꽃을 지천으로 달고있는 나무이다. 이 꽃이 필 무렵이면 멀리서도 쉽게 산벚나무를 구별할 수 있어서 몽고군에 유린당한 육지에서 몰래 몰래 한 나무씩 베어오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산벚나무는 꽃의 아름다움 만큼 우량한 재질을 가진 나무이다. 높은 산꼭대기가 아니면 전국의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고 섬지방에도 잘 자라고 있다. 높이 20m, 직경이 거의 1m까지도 자라는 나무이나 대체로 높이 10여m, 직경 5-60cm에 달하는 큰 나무이다.
心邊材의 구분이 확실하고 심재는 짙은 적갈색이며 조직이 치밀하고 곱다. 기건비중 0.62정도이고 잘 썩지 않으며 가공이 쉽다. 용도는 조각재, 칠기심재 등이며 목판인쇄의 재료로서는 최우량재이다.
2). 돌배나무류 (Pyrus sp.)
우리 조상들이 즐겨 먹든 과일나무의 한 종류로서 돌배나무는 잘 알려져 있다. 전국의 산 속에 흔히 자라든 돌배나무는 기껏 작은 주먹만한 앙증맞은 크기로서 재삿상의 棗栗枾梨의 마지막 과일이 될 만큼 사랑을 받아왔다. 배의 식용역사는 굉장히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데 약 4천년전의 일산신도시 선사시대유적에서 발견되기 도하며 약 2천년전의 의창다호리 가야고분에서 밤, 천선과와 함께 돌배가 출토된바 있어서 무척 오래 전부터 애용해온 것으로 생각된다. 배나무는 감나무, 밤나무와 마찬가지로 과일나무이면서 목재로도 좋은 재질을 갖고 있어서 우리 선조들이 귀중히 여겨온 것 같다.
직경 60cm, 높이 10m 까지 잘랄수있으며 옅은 붉은 빛이 도는 목재이고 조직이 매우 치밀하고 균일하다. 기건비중 0.73으로 약간 무거우면서 강도가 강하고 단단한 반면 가공은 비교적 용이하다. 가구재, 기구재, 조각재등으로 사용되었으며 1915년 전체적인 대장경 印經작업을 하면서 누락된 경판18매를 발견하고 다시 새겨넣을 때 서울근교의 배나무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3). 자작나무류 (Betula sp.)
대장경판은 지금까지 자작나무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필자의 조사결과로는 앞에서 본 것처럼 경판의 수종은 대부분이 산벚나무류와 돌배나무류이고 자작나무류는 8%에 불과하였다. 자작나무로 알려진 나무는 식물학적으로 자작나무속에 속하는 나무의 총칭으로서 흔히 알고있는 수피가 새하얀 자작나무(Betula platyphylla var. japonica)와 거제수나무(Betula costata) 및 사스래나무(Betula ermani)를 비롯하여 박달나무(Betula schmidtii), 물박달나무(Betula davurica)도 여기에 해당된다. 자작나무와 거제수나무, 사스레나무는 형태가 비슷하여 거의 구분할 수 없으므로 편의상 자작나무류로 구분하였으나 분포지역은 자작나무가 북한의 추운 고산지방에서 시베리아까지 분포하는 대표적인 寒帶수종인데 비하여 거제수나무와 사스레나무는 지리산을 비롯한 남부지방의 고산에 분포하는 수종이다. 대장경판의 재료가 자작나무인지 거제수나무 혹은 사스래나무인지는 중요한 의미가 있으나 현재의 지식으로서는 양자를 구분하는 방법은 없다.
의사 지바고의 영화에서 광활한 시베리아의 수해를 이루는 새하얀 껍질을 가진 나무가 자작나무(白樺)이다. 너와집의 재료이고 이른 봄 줄기에 구멍을 뚫어 위로 올라가는 물을 인간에게 뺏기고도 의연히 서있어서 흰 수피 때문에 다가오는 처량함과 아울러 생명의 경외마저 느끼기도 한다. 새하얀 수피가 얇게 벗겨지므로 종이가 일반화 되기 전에는 종이의 대용으로 쓰였고 천마총의 天馬圖도 이것으로 그렸다. 수피에 기름 끼가 많아 태우면 짜작짜작 소리가 나는데서 이름이 유래되었고 흔히 말하는 화촉(華燭)이란 말도 이 나무와 관련이 있다.
3. 자작나무와 대장경판
팔만대장경판을 만든 나무가 대부분 산벚나무와 돌배나무인 것은 앞에서 알아보았다. 그러나 지금의 해인사 수다라장 앞에는 경판을 자작나무로 만들어 졌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크게 붙어 있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로서 팔만대장경판의 재질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단순히 흥미의 차원이 아니라 이 위대한 민족의 유산이 갖고 있는 문화적, 역사적 의미를 해석하고 나아가서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移運 경로를 비롯한 신비의 열쇠를 갖고 있다고 본다. 그러면 왜 지금까지 경판이 자작나무로 만들어 졌다는 설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몇 가지 측면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우선 기록에서 보면 고려사, 이조실록을 비롯하여 李圭報의 東國李相國輯, 徐有?의 林園十六志등 대장경에 관한 어느 문헌에도 명확한 材種기록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경판의 재질이 자작나무라는 것은 근세에 들면서 대장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그대로 사실처럼 받아들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구체적인 몇가지 예를 문헌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海印三味씨는 내本山자랑이라는 잡지의 {海印寺의 藏經閣과 經板}이라는 글에서
---經板의 全面에 칠을 하고 用材는 白樺(자장나무)인데 제주도, 완도, 거제도 등에 産出한 것이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② 無能巨士씨는 {李朝佛敎史}라는 글에서
---用材는 樟木(조선에서는 厚朴이라 칭함, 제주도, 완도, 거제도, 鬱陵島에 産함)인데---라 하였다.
③ 한편 萬海 한용운은 {海印寺巡禮記}라는 수필에서
---體裁로 말하면 白樺(자작나무 혹은 거재나무)의 質인데---라고 하였다.
④ 기타 李 ?永씨는 {高麗大藏經, 그 歷史와 意義}라는 글에서
---목재는 제주도, 완도 및 거제도산인 자작나무를 ?는 데 雕造가 시작되기까지는 나무를 오래도록 海水에 저려 부패를 방지하는 조치를 취하고 그것을 다시 충분히 말린 후에야 판목을 만들었고 雕造가 시작되었다---고 하였으며
⑤ 趙 明基씨는 {國寶高麗大藏經의 價値}라는 글에서
---用材는 제주도, 완도, 거제도, 울릉도 등지에서 산출하는 厚朴(樺, 자작나무 혹은 거재나무라고도 함)이다. 강화도 本司에는 적당한 목재가 없기 때문에 영남지방의 남해 거제도 등에서 생산하는 원목을 벌체하여 천리 길을 운반하였다가 수년간 해수에 담그고 또 염수(鹽水,소금물)에 蒸하고 2.3년씩 건조하여 이것을 판자로 제재한 다음에 筆寫한 경문을 조각한 뒤 옻칠을 하여 영구히 부식함이 없도록 제작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⑥ 徐首生씨는 {伽倻山 海印寺 八萬大藏經 硏究}에서
---용재는 白樺인데 자작나무라고도 한다. 일명 거제도나무라고도 한다. 이 나무는 제주도, 완도, 거제도, 울릉도 등지에서 많이 생산된다. 이 나무를 벌채하여 3년동안 바닷물에 담궜다가 꺼내어 짝을 쳐서 다시 소금물에 삶아서 그늘에 말린 뒤에 대패질을 하고 經文을 毛筆로 써서 판에 새긴 것이 이 경판이다. 그리고 뒤틀리지 않도록 두 끝에 각목으로 마구리를 붙이고 옻칠을 가볍게 하고 네귀에 銅製로 장식하여 成板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몇 분의 글을 인용해 보았으나 해인사 대장경판의 수종을 기록한 어느 논문에서도 과학적인 조사를 바탕으로 하였거나 수종명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누가 제일 먼저 대장경판의 재질을 표기한 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한자로 백화(白樺)로 기록하고 자작나무 혹은 거재(去災)나무 및 거제도나무(정확한 명칭은 去災樹나무임)로 기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趙明基씨등은 厚朴이라고 표기하고 자작나무와 같은 나무로 잘못 기록하고 있다. 無能巨士는 같은 類의 誤記로 생각되는데 녹나무를 말하는 樟木으로 기록하고 후박(厚朴)이라고 주석까지 붙여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분포지역의 기록도 자작나무가 남해안에 분포한다고 단정하고 있으나 식물학적인 지식으로는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왜 명확한 근거도 없이 오늘날 대장경판은 자작나무 혹은 거제수나무로 알려졌으며 심지어는 후박나무라고 까지 말하고 있는가?. 앞에서 본 것처럼 대장경판의 극히 일부는 자작나무류와 후박나무류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산벚나무류와 돌배나무인 대장경판이 왜 자작나무로 알려져 왔는지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추정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필자가 과문(寡聞)하여 아직까지 찾지 못하였으나 경판을 제작한 후 전해 지지 않은 문헌의 어디엔가 화목(樺木)이라는 기록이 있었거나 구전되었을 가능성이다. 즉 "樺"의 표기의 미묘성인데 先人들은 자작나무와 벚나무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모두 樺木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관하여는 任慶彬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바, 『林園十六志에서 樺에 대한 인용은 자작나무에 대한 것과 벚나무에 대한 것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 本草綱目<李 時珍>의 인용을 보면 樺는 山桃와 비슷하여 색은 황색이고 분홍의 작은 반점이 있다. 수피는 두껍고 부드러우며 신발의 뒤창에 붙이고 때로는 칼집에 이것을 쓴다. 또 말안장이나 활을 싸기도 하고 껍질은 蜜蠟을 감아서 초를 만들어 불을 붙이기도 한다.
이 記述에서 꽃의 색깔이나 수피의 용도로는 벚나무를 말하는 것 같고 뒷부분의 말안장에 쓴다거나 밀납으로 이용한다는 내용은 자작나무를 가리키고 있어서 서로의 구별이 불명하다. 또 海東新書<徐 浩修>의 種藝항목에는 樺는 깊은 산중에 나는데 이것을 뜰에 옮겨 심을 수 있고 수고가 높게 된다. 3월에 엷은 분홍색의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데 열매는 처음에는 푸르나 뒤에는 분홍색으로 된다. 앵두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익는데 일본사람들은 이 꽃을 무척 소중하게 여긴다고 하여 樺木을 벚나무로 본 경우이다. 즉 자작나무와 벚나무를 동일한 漢字인 樺로 표기하고 混用하여 온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벚나무와 자작나무의 특성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樺木을 벚나무류로 알고 있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자작나무로 알고 있다. 따라서 대장경판은 대부분 樺木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나 口傳을 자작나무로 알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巨濟島産나무가 거제수나무로 변형된 과정에서 추정해 볼 수 있다. 巨濟島에는 옛부터 우량재가 대량으로 분포한 것으로 추정되며 시대적으로 맞지 않아 전설로만 치부하고 있는 이거인(李居仁)에 관한 기록에서도 伽倻山海印寺大藏經印出文에『羅王招致工匠亦運?板於巨濟島成列不止時入指云杞梓皆稱巨濟木至今仍名馬入我』라 하여 거제도에서 생산된 목재를 사용한 기록이 있다. 즉 "경판을 판각하는 데는 옛 부터 거제도에 나는 나무를 많이 이용"하였으며 대장경판을 각판할 때도 몽고군에 유린된 육지보다는 수집과 운반이 손쉬운 거제도, 남해도, 완도, 진도, 멀리는 제주도까지 섬지방에서 많은 경판재를 조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반드시 춘양에서 나지 않더라도 재질이 우량한 소나무는 모두 春陽木이라고 부르듯이 남해지방에서 조달한 경판용재의 나무를 흔히 거제목이라고 통칭되었다고 본다.
즉 巨濟島産나무는 흔히 巨濟木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다시 巨濟樹로 변형되고, 공교롭게도 지리산, 가야산 등 남부지방의 고산지대에는 去災樹라 불리는 나무가 본래부터 자라고 있었으므로 거제도에 나는 나무 전부에 대한 일반명으로서의 巨濟樹를 남부지방의 고산에 분포하는 고유수종인 去災樹로 잘못 알려지게 되지 않았나 추정된다. 그런데 去災樹나무는 고산지대에 분포하므로 일반인들이 잘 모르고 또 흰 수피가 종이처럼 잘 벗겨지는 모양이 흔히 알려져 있는 자작나무와 거의 비슷하여 구분이 어렵다. 한자로도 거제수나무와 자작나무는 같은 화자(樺字)표기를 하므로 자작나무로 알려지게 된 것 같다.
4. 경판의 현황과 보존상태
750여년의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오늘날 거의 완벽한 형태로 대장경판이 보존될 수 있었든 신비는 무엇인가?. 우선은 억불숭유(抑佛崇儒)라는 이조의 사회환경에서 오직 불심하나만으로 경판을 사수하여온 스님들과 불자들의 공로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음은 나무라는 재질의 특징을 잘 살려서 알맞은 환경에 보존토록 한 조상의 슬기가 여기에 어울러져 오늘의 위대한 민족의 유산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1).경판의 치수와 무게
길이는 양쪽의 마구리를 포함하여 68cm, 70cm, 73cm, 75cm, 78cm등이나 68cm인 경판이 조사판수에 대하여 약 33%, 78cm가 54%정도이고 기타는 수%씩에 불과하다. 경판의 폭은 평균 24cm로서 占頌경판의 19cm인 경우도 있으나 다른 경판은 모두 23.4-24.8cm의 범위에 있다. 경판의 두께는 信華手經이나 扶毗奈耶破僧事경판처럼 2cm를 약간 넘은 경판도 있으나 대부분은 2.5-3cm전후이며 평균 2.8cm정도이다.
경판중량은 경판에 따라 차이가 많고 최소 達9卷 37,38張의 2312g에서 최고 背舍利弗呵毗曇論 第9卷 19,20張의 4444g까지 거의 2배에 달하는 중량의 차이가 있다. 68cm 및 70cm경판의 경우는 약 2600-3300g, 78cm경판의 경우는 약 3200-3800g의 범위에 있다. 이는 길이와 두께의 차이도 영향이 있겠으나 사용재료의 수종에 따른 비중의 차이 때문으로 생각한다.
2). 경판의 보존상태
전체적으로 경판의 보존 상태는 과연 750여년이 지난 목판인지를 의심이 갈 만큼 잘 보존되어있다. 경판의 刻字部를 제외한 가장자리에는 옻칠이 된 경판이 상당수 있었고 양쪽에는 마구리를 끼워 운반이나 보관중 각자부가 맞닿는 것을 방지하고 통풍을 원활하게 하는 등의 역할이외에 경판이 휘는 것을 막아주는 조치를 슬기롭게 하고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경판은 근세까지도 수시로 반출하여 印經을 하였으며 이때 전분질의 식물성 풀과 먹물을 혼합하여 사용한 후 소금물로 닦아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엄밀하지 않아 덜 건조된 상태로 經板架에 다시 넣었거나 먹물을 충분히 제거하지 않아 먹딱지가 두껍게 붙어있는 등 제작 후 보관과정에도 문제는 있었든 것으로 생각된다.
경판의 결함은 腐朽, 굽음, 할열, 충해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항목별 상태는 다음과 같다.
3). 경판의 부후
경판의 부후는 쉽게 표현하여 썩는다는 말로서 만약에 부후가 진행된다면 이는 경판보존에 치명적인 문제이다. 목재가 부후하기 위하여는 擔子菌에 속하는 木材腐朽菌이 생육해야 가능한데 이는 함수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함수율이 20-30%이상일 때만 활동한다. 현재의 경판의 함수율은 필자의 조사로는 16%전후로서 부후균이 자랄 수 없는 환경이며 경판은 계절에 따른 함수율 변동이 거의 없다. 이는 목재의 주성분인 셀룰로오스에 붙어있는 물분자수가 750여년 이라는 장기간 동안 거의 안정이 되어 설령 장마철에 주위의 상대습도가 올라가더라도 목재자체의 함수율은 거의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장마철에 경판의 표면에 일시적으로 곰팡이가 생기는 것은 인경때 사용한 식물성 풀의 전분 때문이고 닦아낸다거나 가을철이 되어 주위가 건조하면 자연적으로 없어진다.
법보전 동편 시렁에 보관되어 있는 폐판과 일부 경판에서 과거에 부후균에 의한 부후가 진행된 흔적은 찾을 수 있었으나 현재에도 부후가 진행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4). 경판의 굽음과 할열 및 충해
일부 경판에서 너비굽음(平面橫굽음, cupping), 비틀림(twisting), 길이굽음(平面縱굽음, bowing), 할렬(割裂, check) 등의 결함이 발생한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너비굽음은 총 조사경판의 26%에 해당하는 268장에서 관찰되었고 이중 33장은 그 정도가 심하였으며 경판에 따라 차이가 크다. 비틀림이 관찰되는 경판은 151장으로 조사경판수 對比 15% 정도이고, 이중 비틀림의 정도가 심한 경판은 14장으로서 1%에 해당했다. 이에 비하여 길이굽음은 조사경판수 對比 3%인 30장에서 관찰되며 너비굽음이나 비틀림에 비하여 발생한 경판수가 훨씬 적었다.
한편 경판이 갈라진 할열은 육안으로 틈을 볼 수 있는 열린할렬과 갈라졌든 틈이 다시 닫혀버린 닫힌 할렬로 구분할 수 있었다. 할렬이 한 개라도 분포하는 경판개수는 열린 할렬의 경우 196 장으로 전체조사경판의 19%에 해당한다. 닫힌 할렬이 관찰되는 경판은 21장으로 총조사 경판수 對比 2%에 불과하였다. 이미 생겨있는 할렬의 끝부분에 가로로 짧은 칼자국을 넣어 더 이상 할열이 확대되지 않도록 한 8장의 경판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이는 대장경판의 보존에 얼마만큼 정성을 들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증거이다.
경판표면에서 관찰되는 충해로 추정되는 직경 1∼2㎜인 벌레구멍은 전체 조사경판수의 약 2%에 해당하는 17장에서 관찰되었다.
경판의 굽음과 할열 및 충해등도 일부 경판에 불과하며 현재 이들 결함이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5. 경판에 사용된 목재의 양
경판에 사용한 목재의 양은 크기별 전체 경판수에 대한 점유비율을 개략적으로 환산한 總材積과 마구리에 사용한 목재의 양을 합하면 구할 수 있다. 추정한 경판의 재적은 약 370m3, 양마구리 재적이 약 80m3로서 경판과 마구리에 사용한 목재의 총량은 약 450m3에 달한다. 이를 무게로 환산하면 비중을 0.6-0.7로
보아 약 300톤 정도인데 4톤 트럭에 싣는 다면 7-80여대에 해당하는 방대한 양이다.
그러면 450m3에 달하는 경판재와 마구리재를 얻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원목을 벌채하였으며 운반하는데
는 얼마의 인원이 동원되었는지 추정해보자.
우선 450m3의 목재를 가공하는 데는 당시의 조악한 기술로 볼 때 원목에서 경판재를 만드는 調製收率은 적게는 원목의 10수%, 많게도 40-50%를 넘을 수는 없다. 따라서 원목은 적어도 1000m3이상이 필요하였다고 본다.
경판길이가 64cm, 74cm인 것이 대부분이므로 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통나무의 길이는 적어도 90cm는 되었을 것이다. 또 통나무의 직경은 경판폭이 24cm이므로 적어도 40cm이상이라야 한다. 한편 산벚나무와 돌배나무의 枝下高는 약 1-2m정도이므로 직경 40cm의 경우 통나무 한 토막에서 粗經板은 2장 채취 가능하고 한 나무 벌채에서 약 1.5개의 통나무 토막이 생산 가능하다. 물론 실제로는 40cm이상의 대경목도 다수 사용되었을 것이나 운반 및 취급의 편의성을 고려한다면 사용 통나무 개수는 10,000-15,000본 정도로 추정되고 통나무를 선정 벌채하여 각판 장소까지 운반하는 데만도 동원된 연인원은 10만명 전후가 아닌가 생각된다.
6. 맺음말
이상 필자는 대장경판의 보존을 위한 과학적인 조사의 일환으로 수행한 주요결과를 정리해 보았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전체 81,340여장의 경판에서 수종분석에 250여장, 보존현황조사에 1000여장을 조사한 내용이므로 이 결과가 대장경판 전부를 대표한다고는 보기 어렵고 일부내용은 필자의 주관적인 추정임을 밝혀둔다. 따라서 이와 같은 조사는 앞으로도 계속되어 필자의 조사결과가 수정보완되어 이 위대한 민족의 유산을 자손만대에 물려 줄 수 있는 종합대책이 하루 빨리 완벽하게 수립되기를 바란다.
[2]. 해인사 팔만대장경 / 배영기 박사.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에서 새긴 목판경으로서 총 목판수는 81,340매이다. 그러나 경북대
학교 박물관에서는 81,268매인 것으로 최종 확인되었다. 대장경은 국보 제 32호이며 경·율·론의 3장을 비
롯하여 불교관계 책들을 총망라한 불교총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제작년도는 고려 고종 때인 1235년~1251
년 사이 16년간 소요되었다. 경판 1장의 무게는 평균 3.1kg이며 전체무게는(3.1kg×81,340매
=252,154kg) 약 250톤에 달하며 8톤 트럭으로 31대 분량에 해당된다. 경판 1장의 규격은 가로 72.6cm×
세로 26.4cm×두께 4cm로 되어있으며 경판의 네모서리는 99.6% 순동으로 된 장식을 부착하였다. 이를 부
착하기 위하여 사용된 못은 특수처리 한 것으로 당시의 철 정제기술이 매우 정교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자 탈자 없는 5천2백만 刻字 대장경판은 세로로 23줄의 종서에 한 줄에 14자 꼴로 쓰여 졌으며 경판 1
면의 총 자수는 322자(23줄×14자)이므로 양면으로 총 644자인 셈이다. 따라서 대장경판의 총 글자 수는
52,330,152자(81,258매×644자)로서 1자도 오자나 탈자가 없는 완전무결 판이다. 또한 경판 1매의 두께
는 4cm이므로 전체를 포갠 높이(4cm×81,258매=325,032cm)는 325m이므로 이는 63빌딩 249m보다 약
76m나 더 높다.
거제와 남해의 나무 사용 경판의 나무는 거제도와 남해에서 벌목하여 실어온 산벗나무 70%, 돌배나무
10%, 동백나무, 단풍나무, 박달나무, 후박나무가 20% 소요되었으며, 자작나무는 경판의 양쪽 끝에 끼우는
마구리용으로만 사용되었다. 벌목나무의 크기로는 둘레가 40cm, 길이 1-2m로서 한 그루당 경판 6장을 제
재하였으므로 1만 5천 그루의 나무로 8만개의 경판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렇게 경판 목재로 사용할 수 있
는 나무는 50년~60년생이어야 한다. 경판의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서 추운 겨울에 벌목하거나, 그늘진
북쪽에서 자란 나무만 골라서 베어야만 했기 때문에 목재 확보가 어려웠던 것이다.
옻나무 40만 그루로 옻칠 강화에 대장경 도감 본사(本司)를 설치하고, 진주에 분사(分司)를 설치한 후, 제
작공정은 강화 본사에서 맡고, 통나무의 벌목 조달은 진주 분사에서 담당하였다. 강화에 도착한 원목은 ①3
년간 바닷물에 잠겨 두었다가 건져서 ②소금물에 삶아 그늘에서 말리고 ③대패질을 한 후 각자 작업을 하
였다. 각자 작업이 끝난 ④경판은 옻칠을 한 후 ⑤구리로 네모서리에 못질하여 마구리를 부치는 것으로 경
판 1매의 공정이 끝나게 된다. 경판 1장에 소요되는 옻의 양은 약 5g정도다. 하루에 옻나무 150그루를 베
어야 750g의 옻을 채취할 수 있다. 전체 경판에 소요되는 옻 양을 400kg으로 친다면 옻나무 40만 그루를
베어야 경판에 소요되는 옻칠을 할 수 있게 된다.
刻字에만 연인원 125만명 동원 각자공 1인이 1일 40~50자씩 양각으로 판다고 할 때 1매당 양면 644자를
각자 하는데 약 15일이 소요된다. 연인원 8만명이 동원되어 각판장까지 통나무를 운반하여 왔다. 약 5천2
백만자를 각자하기 위해서는 연인원 125만명이 동원되어야 한다. 이처럼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제재, 옻
칠, 교정, 운반, 못질, 글자선정, 각자를 하였는데, 염불승이 1자3배(一字三拜)로 정성들였다. 불제자 보조,
큰스님의 감리, 전국최고 각자공의 모집 등으로 13만명이 투입된 것으로 추산되며 이는 오늘날 10년 이상
이 소요된 한국 최대국책사업인 새만금 방조제공사나 핵 폐기장 매립장건설 소요 인원보다 더 큰 규모의
국책사업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국력이 소모되는 국책사업을 고려는 왜 해야만 했을가.
3災8難3危 피할 수 있는 가야산에 보관 대장경은 처음에는 강화도 선원사에 보관해 오다가 조선 태조 7년
(1398년) 서울 지천사에 잠시 두었고, 다시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해인사로 옮겼
다. 당시 조선은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를 억압하던 때였지만 대장경의 보존만은 3재8난을 피할 수 있는
천혜의 깊은 산중인 가야산을 선택했던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3재는 수재, 화재, 풍재 또는 병란, 역란, 기
근난을 말하며, 8난은 배고픔, 목마름, 추위, 더위, 물, 불, 칼, 병란이며, 3위는 전쟁, 짐승, 전염병이다. 이러
한 경판을 오늘 날까지도 매년 아낙네의 머리로 이고 이운관경(移運觀經)행사를 재현하고 있다. 이는 참으
로 경판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 주는 행사로 우리 민족정신을 하나로 결집시켜 주는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불심으로 외적을 물리쳐 백성 단결을 도모키 위해 제작 그렇다면 이처럼 고려국의 국력을 쏟아 부어 대장
경을 제작해야 할 배경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당시 만주 거란군, 몽고군이 끊임없이 개성(서울)까지
쳐들어오자 임금이 가피력(加被力) -부처나 보살이 중생에게 베푸는 힘 또는 자비심-으로 적을 물리치려는
불교신앙의 발원에서 시작되었다. 둘째, 몽고군의 재침략으로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하자 호국불법으로 국
난극복의 소원을 실현시켜 보려는 고려인의 의지의 소산이다. 세 번째는 중 일연의 ‘삼국유사’ 저술, 금속활
자로 된 인쇄술의 발달, 단군을 강조한 ‘제왕운기’의 찬술 등으로 고려인의 문화의식을 고양시키려는 데 있
었다. 넷째, 몽고군에게 하루 고려인이 20여만 명이 포로로 잡혀가거나 전사자가 속출하게 되어 이를 방어
하기 위한 항몽정신을 불심에 결집시켜 보고자 했던 것이다. 다섯째는 항몽의 한계를 인식한 후 대장경사
업을 통해 불심으로 백성들의 단결을 도모하여 외적을 물리치려는 데 있었다.
끊임없는 수난 겪은 대장경 (1) 조선이 억불정책을 보고 일본은 숭불정책을 구실삼아 무려 83회
(1389~1509)나 요청→간청→위협→공갈→강제력을 쓰며 대장경을 일본국에 넘겨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거절하였다. (2) 조선을 침략하는 왜구(원나라군대)를 격퇴시켜줌과 동시에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 조선인을 송환시켜 줄 터이니 대장경과 교환하자는 제의를 여러 번 하였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
다. (3) 선조 25년(1592년) 임진란 때 왜군이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해인사로 진격하였으나 홍의장군 곽재
우가 가야산 인근의 거창, 합천에 있던 승병(의병 포함)들을 규합하여 격퇴시켰다. (4) 1915년 일제 강점기
때 데라우치 총독이 대장경 전부를 일본으로 강탈하여 갈 계획을 세웠으나 총경판 무게 250톤을 운반할 소
달구지 400대를 모으기가 어려워 포기 하였다. (5) 6.25전쟁 시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 1천여명이 미처
북으로 퇴각하지 못한 채 가야한(해인사) 주변에서 게릴라활동을 펼치자 이를 소탕 격멸시키기 위해 미군
사령부는 김영한 대령에게 F-15에 5천파운드짜리 폭탄 2개를 적재한 후 출격명령을 내렸으나 김 대령은
대장경보호에 신명을 바칠 각오로 거부한 것은 전쟁사에 길이 남을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
인사는 창건 이후 4번이나(1695년 두 번, 1743년, 1763년)화재로 인해 전소되었으나 대장경판당은 그 때
마다 화재를 피할 수 있었다. 이는 해인사 앞산 꼭대기에 소금을 묻어 놓았기 때문에 매번 화재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고 있다.
UNESCO 세계문화재로 등록 대장경은 UNESCO에 세계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경주사지, 종
묘, 창덕궁, 수원화성, 대장경판, 고인돌, 불국사, 석굴암 도합 7가지가 세계문화재로 지정 받았다. 그 외에
도 한글, 허준의 동의보감의 등록을 추진 중에 있다. 우리나라의 세계문화재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대
장경은 아직도 거미줄, 쥐똥, 새집 등으로 인한 손상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신비스러운 것은 5천2백만
자 중에서 단 1자도 오자나 탈자가 없다는 사실은 정교한 판각기술과 정성, 그리고 불심의 3합의 결과로 인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조상의 지혜, 불력, 과학의 3합작의 걸출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끝
으로 대장경이라고 불리울 때는 경(부처의 직접 설함)․율(불제자의 지킴)․론(계율의 해설)이 3합 되었을 때
만이 대장경 또는 3장경이라 뜻함을 기억하여 둘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