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國的인 情趣
그동안 다녔던 제주도 여행은 그 종류도 참 다양했던 것 같다. 각급 학교의 수학여행을 비롯하여 연수회, 신혼여행, 효도여행, 골프여행 둥둥. 그런데 요즘은 각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퀴즈나 노래자랑 프로를 보면 시상 종목에 제주도여행이 별로 빠지지 않는다.
내가 젊은 시절에는 제주도 한 번 다녀오는 것이 큰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제주도에 관련된 오래된 속담을 보면 옛날에는 별로 그렇지도 않았던 듯싶다.
제주도민들에게는 민망스럽기 이를 데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지난날은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망아지를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속담이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 같다. 내가 어려서 들었던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제주도(島)가 아직 도(道)로 승격되기 이전의 오래된 속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제주도가 오늘날처럼 눈부시게 발전하기 이전 한라산 기슭의 광활한 초원지대로 말미암아 이런 속담이 유래된 듯하다. 시대에 따라 속담도 변질되는 경우가 많을 듯싶다.
지금은 제주도가 세계 굴지의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내가 가까이 지내는 지방의 모 유지는 세계의 저명한 관광지를 두루 살펴본 경력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그분의 주장에 의하면 제주도 만큼 기후와 자연환경과 설화 등이 잘 조화를 이룬 매혹적인 관광지도 드물 거라는 것이다.
그분이 구체적으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온난한 기후와 한라산과 푸른 바다와 바위, 폭포, 동굴, 그리고 삼성혈의 설화, 항몽유적비, 민속박물관, 수목원, 포근한 인심 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 같았다.
근년에 이르러 세계 강대국의 정상회담이 가끔 이곳에서 열려서 그 명성이 더욱 세계에 널리 알려진 듯싶다.
내가 처음 제주도를 찾은 것은 1960년대 중반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실상 내가 어려서는 제주도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은 보통학교 시절의 교재에 나오는 삼성혈의 설화와 우리나라 남쪽에 위치한 가장 큰 섬이라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 뒤 나는 일제 말기에 일본의 학도병으로 끌려가서 오사카의 중부 제22부대에서 초년병 시절을 보낸 일이 있다. 그때 같은 부대에 제주도 출신의 전우가 두 사람 있어서 그후부터 제주도를 조금 더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 창씨명만 알고 있을 뿐 우리 이름은 알지 못한 채 헤어졌다. 어쩌면 그들이 해방 뒤에는 제주도로 돌아가서 지역사회의 중요한 역군으로 많은 활동을 했을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껏 그들의 소식이 묘연하여 유감스럽기 이를 데 없다.
나는 해방 후에 고향인 충남으로 돌아와서 우여곡절 끝에 교육계에 투신하게 되었다. 뒷날 내가 공주교육대학에서 봉직하기까지는 6.25 전쟁, 3.15 부정선거에 이어서 4.19 학생의거, 민주당 정권 수립, 5·16 군사 쿠데타 등 일련의 사태로 정국이 어수선했다. 6.25 전쟁 후 한동안 우리는 생활 수준도 낮았고, 교통수단도 불편하여 웬만한 지방 나들이도 큰 마음을 먹어야 다녀올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에 우리 대학의 K교수가 전국교육대학 미술과교수의 연수 차 제주도를 다녀왔다고 해서 동료 교수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때는 국외는 말할 것도 없고 국내 항공로도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어서 뭍에서 제주도를 가려면 뱃길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 K교수가 탐라국으로 해외 여행을 다녀왔다고 넉살을 부리며 농담을 했다.
지금은 진짜 해외 여행도 이웃 마을 드나들듯 하는데 그때는 제주도 여행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K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제주도에서는 우리나라 본토와는 판이한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고 견문담을 피력했다. 그 자리에 동석했던 우리 모두는 이국적인 정취라는 말에 은근히 마음이 끌리는 것 같았다.
일단 미술과에서 제주도 연수의 효시가 된 셈인데 그렇다면 조만간 다른 과에서도 그런 기회가 올 것으로 기대했다. 연도는 확실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데 우리 영어과에서도 1960년대 중반 어느 여름 휴가를 이용해서 목포교대에서 연수회를 열게 되었다.
제주도 탐방이 주목적인 셈인데 그때는 아직 제주도에는 교육대학이 설립되지 않아서 집합 장소를 제주항로가 있는 목포로 잡았던 것이다. 그때 목포항에서 배를 타면서 나는 얼마나 혼연작약했던지 지금도 그날의 감동이 새롭기만 하다. 우리가 타고 간 페리의 이름이 도라지호로 기억하고 있는데 높은 파도를 가르며 힘차게 항진하던 정경이 지금도 선연하게 떠오른다. 지난날 학창시절, 그리고 일본 부대에 복무할 때 부관연락선(釜連連絡船)을 탔었는데 실로 오랜만에 다시 타 보는 배였다.
우리 일행 중에는 등반 차림으로 나선 교수가 한 사람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아주 한라산 등반까지 결행할 참이라고 의기가 대단했다. 그뿐 아니라 한라산 등반을 빼면 제주도 탐방은 수박 겉핥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부연하는 바람에 모처럼 마음이 들떠 있던 우리 일행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의 용의주도한 등반 차림이 부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나는 한라산 등반은 다음 기회로 미루더라도 이번에는 수박 겉이라도 구석구석 잘 핥아야 되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나는 힘차게 항진하는 페리의 갑판 위에 올라섰다. 멀리 가물가물 제주도의 원경이 시야에 들어 오면서 나는 이국적인 정취가 넘친다는 미지의 땅을 찾아가는 벅찬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지난날 일본 땅에서 외인부대의 시련을 함께 겪은 제주도 출신의 두 전우의 모습이 어렴풋이 스치고 지나갔다.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