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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타히티에서 만난 보헤미안 폴 고갱
lovray 추천 0 조회 58 09.02.09 16: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타히티에서 만난 보헤미안 폴 고갱
 
『전원에 널려 있는 모든 것이 나를 눈멀게 만들었다』(폴 고갱)
 
취재협조 : 타하티누이항공사(www.airtahitinui.com/02-752-0301)
李泰勳 月刊朝鮮 사진기자 (where70@chosun.com
옥빛 바다로 둘러싸인 모레아 섬의 쉐라톤 호텔 리조트.
 산호초로 둘러싸인 南태평양의 작은 섬 타히티.
 
  유럽인들은 이 섬을 「지상의 낙원」이라고 부른다. 타히티의 아름다움은 폴 고갱의 붓으로 완성됐다. 고갱은 타히티가 간직한 태고의 아름다움, 투박하지만 소박한 꿈을 지닌 원주민의 모습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고갱이 없었더라면 타히티는 지금의 타히티가 아니었을는지 모른다.
 
  고갱은 조국 프랑스를 떠나 「히 바오」 섬에서 죽을 때까지 타히티의 자연과 원주민의 모습을 강렬한 남국의 색채로 그려냈다.
 
고갱의 작품인「타히티의 여인들」.

  타히티는 폴 고갱의 그림으로 인해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타히티의 정식 국가 명칭은 「프렌치 폴리네시아」이다. 투아모투 諸島(제도), 마키저스 제도, 오스트랄 제도, 감비어 제도, 소사이어티 제도 등 5개 제도, 118개 섬으로 이뤄져 있다.
 
  타히티 섬은 소사이어티 제도에 있다. 타히티 섬에는 프렌치 폴리네시아의 수도 파페에테가 있다.
 
타히티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라보라 섬의 인터컨티넨탈 리조트.

  하늘빛과 바닷빛이 하나의 색깔을 이룬 타히티 섬은 세계인들의 마음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도시인들은 타히티에서 새로운 삶의 동력을 얻는다. 최근 들어 타히티는 일본인들의 신혼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한국에서 타히티까지는 직항편이 없다. 일본의 나리타나 오사카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한다. 유럽에서도 이곳까지 직항편이 없어,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LA를 거쳐서 프렌치 폴리네시아로 들어간다. 하지만 후기인상파의 巨匠(거장) 고갱의 그림의 영혼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20시간의 비행은 감수할 수 있다.
 
  타히티에 도착하는 순간 왜 고갱이 63일간의 긴 여정 끝에 타히티를 찾았고, 생의 마지막을 이곳에서 보냈는지 알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보라보라 섬의 모습.

젊은 여인들이 타히티 민속춤을 연습하고 있다.

프렌치 폴리네시아의 섬들은 화산 폭발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런 이유로 섬 중앙에는 높은 산이 있고, 그 주변으로 마을과 호텔 리조트들이 들어서 있다.

 
  큰 공과 작은 공 모양을 연결한 모습의 타히티 섬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타히티 섬은 큰 공과 작은 공을 연결한 모습이다. 타히티의 원주민들은 큰 섬을 「타히티 누이(Nui)」 작은 섬을 「타히티 이티(Iti)」라 부른다. 원주민어로 「누이」의 의미는 「크다」, 「이티」는 「작다」라는 뜻이다.
 
  타히티 섬의 둘레는 180km 정도이고, 제주도와 마찬가지로 화산 폭발로 인해 생성되었다.
 
옥빛보다 더 맑고 순수함을 간직한 타히티의 아이들.

  섬 중앙에는 해발 2241m의 「오로헤나」와 2110m의 「피토 이티」 등 고봉들이 자리하고, 그 아래로 마을들이 들어서 있다. 프렌치 폴리네시아의 인구는 약 26만 명인데, 그중 17만 명이 타히티 섬에 살고 있다. 주민 모두 프랑스 시민권을 갖고 있다. 南태평양에 있는 작은 「프랑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언어는 프랑스語와 타히티語를 공용으로 사용하지만 학교에서 프랑스語로 수업하고, 타히티語를 일주일에 2~3시간 정도만 가르친다. TV방송 프로그램은 모두 프랑스語 방송이고, 원주민들을 위한 채널은 한 개뿐이다.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오후 1시에 출발해 다음날 새벽 5시쯤 되어서야 타히티의 아름다운 자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19시간이라는 시차를 극복해야 하는 여행이지만 비행기의 작은 창문을 통해 타히티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자 승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파아아(Faa) 국제공항으로 다가갈수록 타히티의 옥빛 바다와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심장이 심하게 박동 친다.
 
고갱이 프랑스 아를에서 반 고흐와 공동체 작업을 할 때 그린 고흐의 모습.

  폴 고갱은 고갱은 「노아 노아」라는 자신의 수필집에서 타히티를 첫 대면한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63일 동안 우리들은 견디기 어려운 기다림과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설렘을 가지고 항해했다. 모레아 섬을 돌아 최종 목적지인 타히티 섬에 무사히 닻을 내렸다. 처음 보기에 이 작은 섬은 별로 색다른 것이 없고, 다만 태고의 대홍수로 잠긴 산봉우리만 겨우 수면 위로 수줍은 듯 고개를 내밀고 있을 뿐이다』
 
  공항에 내려 주위를 살펴보았을 때 100여 년 전에 고갱이 느낀 것처럼 섬 중앙의 산봉우리가 우리를 압도했다. 프렌치 폴리네시아의 수도인 파페에테는 현대식 콘크리트 빌딩들이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서 있었다. 교통체증이 심했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5km의 거리를 가는데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타히티의 물가는 세계 최고라 할 만했다.
 
  트럭을 개조한 시내버스 요금이 2000원, 맥도날드 빅맥 세트가 1만원, 슈퍼에서 파는 1ℓ 생수 한 병이 2000원, 맥주 500㎖가 3000원이다. 호텔은 기본 1박에 30만원, 5성급 호텔은 50만원 정도다.
 
평일이면 심한 교통체증을 앓고 있는 프렌치 폴리네시아의 수도 파페에테.

  타히티는 서유럽의 자본에 의해 식민화됐다. 토착종교는 가톨릭과 기독교에 의해 대체됐고, 문명사회의 상징인 카페, 레스토랑, 명품 상점 등이 생활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원주민들은 점점 더 산꼭대기로 올라가거나 거친 밀림 속으로 삶의 보금자리 옮겨야 했다.
 
  파페에테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고갱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진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쉴 새 없이 부서지는 에메랄드빛 파도, 오렌지색 햇살,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맞닿은 곳까지 열심히 노를 저어 가도 다시 멀어지는 수평선, 싱그러운 햇살보다 더 부드러운 모래사장, 하늘보다 더 파란 쪽빛 바다, 화려한 네온사인보다 더 아름다운 자연풍광 그리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들….
 
  세상에 있는 아름다운 형용사를 전부 동원해도 타히티가 가진 원시적이고 순수한 자연 풍광을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고갱은 붓을 통해 타히티가 지닌 태곳적 신비함과 원시적 아름다움 그리고 순수한 타히티 여인들을 원색적인 색감을 작은 캔버스 안에 담아 내려고 애썼다.
 
  『전원에 널려 있는 눈부신 모든 것이 나를 눈멀게 만들었다』는 고갱의 말처럼 타히티는 때묻지 않은 자연의 속살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며, 영혼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낼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폴 고갱 박물관의 내부 전경.

 
  「폴 고갱 박물관」
 
고갱이 쓴 수필집「노아 노아」의 책 표지.

  섬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파란 하늘은 어느 새 짙은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강한 소나기를 쏟아 낸다. 열대성 기후에서 흔히 보는 「스콜」이다. 수십 분간 힘껏 내린 비는 거짓말처럼 없어지고 하늘은 다시 쪽빛으로 빛난다. 雨期(우기)인 여름철(10~3월)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런 현상이 반복된다.
 
  다시 맑아진 하늘과 바다 위에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이방인에게 손짓을 보낸다. 이 때 누구나 사진을 찍으면 작가가 되고, 그림을 그리면 화가가 되고, 詩를 쓰면 詩人(시인)이 된다.
 
  파페에테에서 50km 떨어진 곳에 「폴 고갱 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고갱이 1891년부터 3년간 머물렀던 그의 아틀리에이자 살림집이었다. 지금은 이곳을 박물관으로 개조해 일반인들에게 고갱과 관련된 그림·편지·가족사진, 그의 작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은 크게 셋으로 나뉘어 있다.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전시 1관. 고갱의 가족사진과 가계가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고, 고갱에 관한 일반적인 정보를 한눈에 알 수 있게 전시해 놓았다.
 
  전시 2관. 고갱은 파리에서 열었던 타히티 그림전시가 실패로 끝나자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더 원시적이고 외지인들의 발길이 드문 마키저스 제도의 히바오 섬에서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리며 생활했다. 전시 2관은 이 시절을 담고 있다.
 
고갱은 타히티에서 12년간 살았다가 죽었다. 현재 폴 고갱 박물관에서는 그가 사용하던 유물과 모조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모형으로 만든 그의 아틀리에가 인상적이었다. 고갱의 작업실, 침대 등 생활공간이 그대로 재현됐다. 벽면에는 그의 모든 작품이 엽서로 전시되어 있다. 그의 작품이 일목요연하게 분류되어, 어떤 박물관이 고갱의 어떤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전시 3관에는 고갱의 대표작 중 하나인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가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은 자그마했지만 고갱의 숨결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고갱은 그림뿐 아니라 조각에 일가견이 있었다. 고갱의 조각 작품과 사용하던 도구들도 전시돼 있다.
 
 
  페루 출신 어머니와 페루에서 생활
 
밝고 맑은 웃음을 간직한 타히티의 여인들.

  고갱은 빈센트 반 고흐와 함께 후기 인상파를 선도했다. 원색적인 컬러와 투박한 붓놀림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
 
  고갱은 1848년 6월7일 파리에서 프랑스人 아버지와 페루 출신 어머니 「엘린 마리 샤잘」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문기자였던 고갱의 아버지는 페루에서 신문사를 창간하고 싶어 페루로 향하다가 배 안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그 후 고갱은 페루에서 어머니와 함께 여섯 살까지 살았다. 고갱은 『페루의 리마에서 살았던 시절이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고갱은 문명사회와 동떨어진 세계를 이상향으로 마음에 담아 두게 되었다.
 
  고갱은 어려운 가정 살림 때문에 17세가 되던 해 선원이 됐고 7년간 바다를 누볐다.
 
  그 후 고갱은 주식거래소에서 일하며 경제적인 안정을 찾아갔다. 20代 시절 인상파 화가 피사로와 사귀면서 고갱은 인상주의에 매료됐고,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 갔다. 35세 되던 해(1883년) 고갱은 직장을 그만두고 그림도구를 가지고 브르타뉴의 퐁타방(Pont Aven)으로 그림 여행을 떠났다.
 
  고갱은 사랑하는 아내와 4남 1녀의 자녀를 외면한 채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 나섰다.
 
  고갱은 파리 화단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데 성공했고, 무엇보다 반 고흐가 그의 그림 세계를 인정해 주었다. 고갱은 1888년 10월부터 12월까지 南프랑스의 아를에서 고흐와 함께 작업을 했다.
 
  고흐와의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지만 고갱의 존재가치를 한껏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를을 떠나서 파리에서 작업을 하던 고갱은 도시 생활이 즐겁지 않았다. 삶의 권태가 찾아오면서 그림에 대한 열정이 식어 갔다.
 
망고·바나나 등을 팔아 생계를 이어 가고 있는 타히티 사람들.

  고갱은 1891년 4월 문명사회와 단절된 타히티로 건너갔다. 그는 원주민들과 생활하면서 「나페아 파 이포이포」, 「3인의 타히티人」 등의 대작을 그렸다. 파리 미술계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자신의 그림이 잘 팔릴 거라는 막연한 기대는 사라지고, 그에게 남은 것은 상처받은 자존심뿐이었다.
 
  고갱은 1895년 2월 다시 자신의 안식처이자 예술의 유토피아인 타히티로 돌아왔다. 자신의 그림세계가 파리 미술계에서 무시됐다는 사실에 격분한 고갱은 더욱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에 몰입했다.
 
  6년 뒤인 1901년 고갱은 파리에서 「타히티 작품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고갱은 후기인상파를 대표하는 화가로서 인정받았고, 유럽에서도 그의 명성이 높아졌다. 파리에서 성공을 거둔 고갱은 새로운 자유를 갈망하며 다시 타히티로 떠난다.
 
  그는 그의 모든 예술적 영혼과 열정을 이곳에 바친다. 고갱은 열네 살 어린 「파후라」와 살면서 그의 대표작인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완성시켰다.
 
  이 작품을 완성한 후 고갱은 건강이 나빠졌다.
 
  모차르트가 죽기 전까지 4년 동안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레퀴엠」 등의 위대한 작품을 작곡했듯이, 고갱은 1901년부터 3년 동안 「아담과 이브」, 「오두막 안의 타히티 여인들」, 「부름」, 「해병의 말 탄 사람들」, 「원시의 이야기」, 「부채를 든 아가씨」 등의 작품을 쏟아 냈다.
 
  고갱은 1903년 5월8일 파란만장한 삶을 마친다. 그의 이젤에는 미완성의 「눈 덮인 브르타뉴 마을」이 걸려 있었다.
 
폴 고갱과 그의 아내인 매트 개드의 모습 .

 
  끈질긴 인연 폴 고갱과 반 고흐
 
고갱이 즐겨 치던 오르간.

  전시관을 둘러보는 관람객들이 유독 오랫동안 서 있는 곳이 있다. 고흐와 관련이 있는 전시물 앞이다. 고갱과 빈 센트 반 고흐는 끈질긴 인연으로 얽혀 있다.
 
  두 사람은 프랑스 아를에서 2개월간 공동 작업을 하지만 상이한 성격 때문에 공동체 작업은 오래 가지 않았다. 출신과 성장 배경에 있어서 둘은 너무나 달랐다.
 
  고갱은 홀어머니 밑에서 궁핍하게 자랐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자신이 페루인의 피가 흐르는 「혼혈아」라는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귀족적이고, 자신감이 넘쳐 나는 행동으로 자신의 속내를 감췄다.
 
  반면 고흐는 네덜란드의 학식 있는 성직자와 부유한 畵商(화상)을 배출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프랑스語와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정도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다. 너무나 다른 성장배경을 지닌 두 사람이 프랑스 아를에서 만났을 때 조화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자신의 열등감을 위장하기 위해 가식적이고 귀족적인 품위를 구사하는 고갱과, 광기와 발작 그리고 성직자로서 실패한 경험을 가진 고흐의 공동체 작업은 이별을 예약한 동거였다.
 
  고갱은 남이 자신의 그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비평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하지만, 고흐는 고갱의 작업에 대해 간섭하고 예술에 대해 논쟁하고 싶어 했다. 이런 저런 이유들이 복잡하게 얽혀 둘의 공동체 작업은 파탄났다.
 
  1888년 12월23일 고갱이 아를을 떠나는 날, 반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랐다. 엽기적인 사건이었다.
 
  아를에서의 짧은 동거는 두 巨匠이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고갱과 헤어진 이후 고흐는 생레미 병원으로 들어가 더 좋은 작품을 그렸다. 고갱은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찾아 「인상주의로부터 탈출」을 이루는 순간을 맞이했다.
 
  서로 다른 성격, 서로 다른 화풍을 가졌지만 둘은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끝없이 충돌하면서 상생하는 관계였다. 암스테르담의 「빈 센트 반 고흐 미술관」에서 고갱을 만나고, 타히티의 「고갱 박물관」에서 반 고흐를 만나게 된다. 둘은 죽어서도 공동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두 시간 남짓 고갱 박물관을 꼼꼼히 둘러보고 나면, 외로운 이방인 고갱의 그림에서 가슴이 짠한 감동이 느껴진다. 타히티의 수많은 섬들이 神의 조화로 만들어졌다면, 타히티의 명성은 고갱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폴 고갱은 43세의 나이에 타히티를 찾아와 이곳의 섬들을 여행하면서 55세의 일기로 생애를 마감했다. 10여 년간 프렌치 폴리네시아에 머물렀던 고갱은 가끔 무의식적 충동과 절제할 수 없는 강한 에너지로 인해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타히티 섬은 고갱을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하게 감싸 주었다. 그래서 타히티는 고갱에게 지상에 남은 마지막 안식처이자 낙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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