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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영동 종행교에서 2016년 봄 모임 문무중대의 2016년 병신년(?) 전반기 모임이 육군행정학교가 위치한 충북 영동에서 지난 4.15~16일에 있었습니다. 이번 행사준비를 위해 이미 1개월전인 3월 16일 재정부장 靑山께서 현장 협조, 예약, 정찰까지 마무리 해놓은 터라 무리없이 스케쥴대로 진행되었고 다만 첫날 행정학교의 통제미숙으로 운동 진행이 늦어져서 저녁식사를 8시 넘어서 하게 된 것이 옥의 티라고나 할 만큼 완벽하게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번 모임은 모두들 재 취업이 되어서 나름대로(?) 바쁘다보니 참석률은 낮았습니다. KIDA 근무중인 김형기, 장삼열, ADD 근무중인 김웅건, 서산비행장에 내려가 임무수행중인 박상률, 그리고 울산의 생업 현장에서 전투중인 박성조, 당일 강의땜시 빠질수 없었던 신현돈, 그리고 박동구, 정재호, 황재윤이 개인사정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함으로써 9가족 17명만 모처럼 邂逅하였습니다. 금요일 오후에 실시된 운동은 남녀 각각 1개팀만 편성되어 권혁성, 이홍기, 정근서, 황병호와 현만숙, 박경인, 민병님, 유영희 회원이 참여를 했고, 김원하, 조인섭, 그리고 김동기 부부, 임흥빈 부부, 조정현 부부는 각자 별도로 내려와 저녁 늦게 참석하였습니다. 식사는 월류회관에서 사전에 주문한 소고기와, 작년 년말 동기회에서 포상받은 Ballentine 30년 産으로 황병호 회장이 손수 폭탄주를 제조하여 다 같이 원-샷을 하면서 시작되어 금새 몇 병을 비우자 점차 분위기가 UP되었습니다. ^^ ^^ ♬ 자주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오랫동안 만날 수 있도록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녁에는 월류회관 3층에서 푹~쉬고 다음날 아침식사를 위해 옥천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고속도로 금강휴게소에서 간단히 조식을 하고, 휴게소 인근 주변에서 사진 촬영을 한 다음, 권혁성, 김원하, 조인섭, 황병호(회관에서 나올 때 미리 헤어짐)는 차후 계획된 약속때문에 먼저 떠나고 김동기, 임흥빈, 조정현부부, 정근서 회원만 옥천 여행에 참가하였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가곡 鄕愁(통키타 가수 이동원과 서울대 교수 박인수 듀엣)라는 詩로 잘 알려진 詩人 정지용 (鄭芝溶 :1902~1950)의 生家를 방문하여 그의 詩的 영감과 동기를 불러 일으켰던 어릴적 성장과정을 돌아 보았습니다.
* 정지용은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에서 한의사였던 부친 정태국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휘문고보에서 박종화, 홍사용과 교우를 맺고 1923년 渡日하여 일본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였다. 대학졸업 후에는 서울 휘문고교에서 해방될 때 까지 약 16년간(1929-45) 영어교사를 하면서 시인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문학활동을 계속해 왔다. 1930년 부터 시인 김영랑, 박용철과 함께 <詩文學> 동인으로 참가하였으며 1933년에는 <카톨릭청년회> 편집고문을 하면서 이 상(李 箱)의 詩를 세상에 알렸다. 1939년 <文場>의 詩 추천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 청록파 시인들을 등단시켰던 정지용은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 여대 교수로 자리를 옮기고 <경향신문>의 논설주간이 되어 김구, 여운형 등 과 궤를 같이 하는 이념노선을 걷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조선문학가 동맹>에 가입하여 활동(1946~48)했다는 이유로 1948년 이승만 정부에 의해 "보도연맹"에 강제적으로 가입하게 되어 사상전향 강연에 종사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피난가지 못 하고 서울(현 은평구 녹번동)에 남아 있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되었으며 유엔군 북진시 평양으로 끌려갔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최근 당시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으로 압송되다가 의정부 소요산 근처에서 미군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하기도 함). 이후 권위주의 시대에 그는 사상적으로 사회주의 성향을 갖고 있다 평가되어서 1988년 까지 그의 작품은 해금되지 못했으나 지금은 자유로운 상태임
위대한 시인은 특별하게 탄생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릴적 부터 농촌의 보통사람들이 공유했던 정겹고, 따뜻한 마음, 소박한 생각을 바탕으로 주변의 친구 시인들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습작함으로써 점차 아름다운 詩想을 싹 튀울 수 있었으며, 때로는 밤잠을 설치면서 번민하던 괴로움, 애닯음, 안타까움을 빛나는 언어로써 승화시켜 캄캄하고 무미건조한 세상을 새롭게 밝힐 수 있는 詩的 재능을 갖게 되었습니다. 옥천을 떠나면서 우리들의 문학적 교양도 더불어 높아졌습니다.. 정지용 시인의 집에서 곧 바로 약 1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故 육영수 여사의 生家에 들려 여성 문화 해설가로 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 육영수(1925~74)는 옥천의 3정승 집 대저택에서 살았던 대지주면서 사업가(인삼판매, 광산개발로 부자가 됨), 육종관과 이경령의 1남(오빠 육인수) 3녀(언니1, 여동생1) 中 둘째 딸로 태어남. 1938년 죽향 보통학교를 졸업 후 서울 배화여고에 진학하였으며 졸업후 고향 옥천의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에서 약 1년 3개월 동안 가사 교사로 활동하였음. 6.25 피난시절 육본 정보국 소속의 박정희 소령과 같이 근무했던 이종 사촌 오빠 송재천 소위의 소개로 맞선을 보게 되어 서로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부친 육종관은 사위될 사람이 이미 결혼한 적이 있다고 하여 결사 반대했으나 육영수는 박정희 소령의 신념에 찬 눈빛에 반해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고 모친 이경령 여사도 점쟁이로부터 딸이 "재혼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좋다"라는 얘기를 듣고 적극 지원하였다고 함.) 1950년 12월 대구 계산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육영수 부친 육종관씨는 참석하지 않았고 사위가 대통령 된 이후에도 끝까지 만나지 않았음) 당시 결혼식 주례였던 대구시장 허 억씨는 "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 ....."이라고 잘못 소개하여 모두를 당황하게 만든 에피소드는 매우 유명함. 박대통령과 본처 김호남 여사와 사이에는 딸 박재옥씨(남편 : 한병기 前주미 대사)가 있었으나 육영수 여사는 그녀를 늘 따뜻하게 보살펴주었으며, 대통령 영부인이 된 이후에도 한복을 즐겨 입는 등 단아한 용모와 겸손한 언행으로 모두에게 존경을 받음. 또한 소위 청와대 야당이라는 애칭을 들을 정도로 박대통령에게 올바른 건의를 자주하였으며 소록도 나환자들처럼 병들고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과 어린이들을 위해 적극적, 헌신적으로 관심을 갖고 도와줌으로써 지금까지도 국민들에게 최고의 영부인으로서 각인되고 있음. 참고적으로 육영수 여사 생가에는 선친 육종관씨의 세 첩들이 살았던 별채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모친 이경령 여사는 육여사 결혼과 동시에 옥천에서 나와 딸과 함께 살았으며, 박정희 대통령도 항상 "어머님"으로 호칭할 만큼 각별하게 모셨다고 함. 내 생각엔 앞으로도 육영수 여사와 같이 아름다운 婦德을 갖춘 퍼스트 레이디는 또 다시 나오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5.16혁명 이후 가난한 나라의 令夫人이 되어 內憂外患의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夫君을 잘 內助하여 나라를 발전시키고 성공하도록 도울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어렸을 적 부터 부모로 부터 엄격하고 반듯한 가정교육을 통해 양반집 규수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 성품을 涵養하였고, 또 성장하는 동안 따뜻한 인간미, 절제력, 겸손함 등 내적인 교양과 지혜를 스스로 터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곳 옥천의 地勢가 나라의 큰 위인을 보필할, 어질고 지혜로운 國母를 배태하게 되어 있는 瑞氣어린 땅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점심은 육영수 여사가 잠깐 교편을 잡았던 옥천공립 여자전수학교(한옥 가옥)가 음식점으로 변하여 유명한 곳이 되었는데 우리는 그 곳에서 식사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다같이 반가웠습니다. 모두들 늘 건승하시길 바라면서, 후반기에는 서울 근교에서 모임을 갖기로 했음을 알리고 이만 줄입니다! 나중 또 봐요~안 뇽!!!
2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