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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지금까지 1부 2부에서 죄와 사망을 이기는 방법과 이기기 위해서는 골고다의 십자가 나무를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데요 그것은 사도 베드로 선생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준 말씀은
베드로전서 2장 24절 말씀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지칭하지 않고 그분이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달리신 그 나무가 특정한 그 어떤 나무임을 더 강조하고 중요함을 알리기 위하여 이렇게 귀중하게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 그분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들의 죄를 직접 자신의 몸에 짊어지시고
나무를 짊어지셨다는 얘기입니다.
직접 자기의 몸에 뭘 짊어셨죠? 예수님이 그때 당시에 짊어진 게 뭐 였나요 나무입니다.
자신이 달리실 나무 외에는 짊어 지신것이 없습니다.
그 나무를 친히 몸에 짊어지신 것은 몸을 통해서 바로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몸을 통해서 죄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몸에 짊어지신 것입니다.
사단의 역사는 몸 바깥에 외곽 지역에서부터 침투하고 역사하고 공격합니다.
몸을 통해서 혼으로 들어오고요 혼을 통해서 영을 담고 있는 그 하나님의 영만이 존재하시는
특별한 그 기관에 침투하여서 적셔지게 하여서 훼손시키고 파괴시키고 파쇄시키기 위하여 몸으로
가장 먼저 받아들였지만 하나님의 영은 반대적인 통로를 통해서 영에 오셔서 영을 살리시고 거듭남을
통해서 창조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생명 그게 거듭날 때 들어왔다는 얘기입니다
창조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생명이란 하나님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으로 역사하셔서 나타나시기 때문에 성령님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 이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 역사하는 삶 내주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우리의 영에 성전 삼고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몸에 들어오셔서 성전 삼으신 것입니다.
지금 몸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러분 몸을 함부로 굴리지 마세요.
우리의 죄들을 직접 자신의 몸에 짊어지시고 누가요? 주 예수님께서 왜? 첫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몸에 그 죄를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대신 그 죄의 짐을 짊어 지셨습니다.
그리고 믿고 신뢰하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영을 통하여 창조되지 아니한 생명
하나님 자신을 구원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 생명이 새 창조물이 되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들에 대하여 죽음으로 의에 대하여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채찍에 맞으신것은 몸입니다.
상처를 입으심으로 여러분이 낫게 되었습니다.
이 채찍에 맞고 상처 입으신 것은 바로 예수님의 몸입니다.
여러분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죄들이 벗어났다 라는 것을
2부 교제의 말씀시간에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골고다 사건을 통하여 십자가 나무를 짊어지시고 그 선악과 나무를 짊어지시고
지친 몸을 이끄시고 가셔서 달리어서 고통당하시고 죽으시는 일을 통하여 죄가 능력을
잃었고 죄가 능력을 잃었다는 것은 수명을 다했다는 것으로 사단의 권세가 죄의 삯인
사망을 가져오게 했는데 사망이 그 권세를 잃어 버린것입니다.
곧 무슨 말씀인가 하면 사단의 권세를 무력화 시키고 무효화 시키고 빼앗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자기 것인냥 그 가증스러운 거짓말로 이세상의 영을 통하여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통치의 문제입니다
죄를 버림으로 말미암아 죄를 제거함으로 말미암아 의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의가 들어와야 하나님의 통치가 성령님의 다스림이 역사하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죄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비로소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 안에 통치 안에 있지 못했지만 둘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 허리에서
산출되어진 자들은 영의 통치함을 받아 올바르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지 않고 그리고 사망을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으로 영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그 창조되지 아니한 생명이 부여 될 수가
없었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신뢰하고 받아들이고 믿고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그 생명 하나님 자신을 모신 것이며 받아들이고 내주 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가 영을 통해서 이루어진 거예요.
그 영을 통해서 이루어지면 혼에게 그것이 침투되고 적셔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이 사는 거예요 그 전에는 첫 번째 사람 아담에게 속했을 때는 그 혼의 생명이
죽은 자로서의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러나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 혼이 죽었다고 말한다면
없어지니까 안 되고 혼의 기능이 완전히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이렇게 완전히
영의 통치함을 받아서 의로운 삶을 살게 될 수가 있는거예요.
의로운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되는 방식으로 마음을 갖고 생각을 갖고 의지를 갖고
감정을 갖고 그리고 생각을 하고 살게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행동과 말로 나타난다 라는 거죠
여러분 이 얘기를 제가 1부 그리고 2부의 말씀에서 얘기를 드렸습니다.
사탄이 그의 모든 것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죄와 사망 그것으로 인하여 연약함이 오고 질병이 오고 슬픔이 오고 이별이 오고
사고가 있고 뭐가 있고 모든 것이 다있죠 사탄의 근원적인 죄와 사망의 문제를 예수님께서
모두 다 제거하셨기 때문에 사도 바울 선생님을 통하여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할렐루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가 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하늘의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사라졌어요.
사단이 자기의 권세를 잃어버리니까 하늘이 깜깜해지는 거예요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망도 권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의 권세를 잃어버렸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무덤들이 터지면서 바위가
터지면서 그 죽었던 성도들이 다시 살아나고 활보하고 걷게 된 것입니다.
마태:27:45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46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거기 섰던 자 중 어떤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49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마치 아담 한 사람이 하와가 산출되기 위해서 교회가 산출되기 위해서 하와는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산출되기 위해서 그를 잠재워서 갈비뼈 하나를 취하였으니 물과 피가 나왔겠죠.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서 물과 피가 나오는 그런 고통 그러나 잠들게 하여서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와인 여자가 탄생 산출되었습니다 출산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그 선악과 나무에 달리셔서 로마 군병들의 창에 찔림
받아서 물과피가 나와서 그분이 교회를 산출시킨 것입니다.
둘째 아담을 통해서 새 생명 창조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생명을 부어 주셔서 새 생명을
갖도록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 새 생명 첫사람 첫 아담이 아닌 둘째 아담으로 산출되어진 사람들에게는
죄의 능력을 잃게 하였고 사망의 권세도 빼앗겨버려서 잃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는
죄와 사망이 그들을 우겨싸지 못하는 겁니다 쇠사슬도 그들을 묶여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거듭난 사람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그들의 온 존재 영과 혼과 육의
모든 그 기능들을 통해서 발생되어진 죄 그리고 죄의 삯인 사망에서 부터 완전히 사로잡힌 바 된
밧줄 쇠사슬 그런 우겨쌈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되고 해방받게 되고 완전히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골고다 십자가를 통하여 할렐루야!
우리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이게 중요해요 이게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짊어 지셨다는 말이 없으면 첫사람 아담이 범한
죄의 근원이 선악과 나무 라는 것을 알 재간이 없어요.
그냥 나무에 달렸다 그러면 우리가 그 나무가 어떤 나무지 어떻게 알것입니까?
그러나 그가 짊어진 나무 첫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타락하여서 그 죄의 삯인
사망을 오게한 바로 그 나무를 짊어지고 그 나무에 달리셔서 그 나무에서 고통당하고
그 나무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가 가졌던 능력을 다 무력화시키고
그리고 사망이 가졌던 그 권세를 무효화시켰다는 거예요.
권세는 무효화시키고 죄의 능력은 무력화 무력은 힘이에요 힘을 없애버린 거예요.
사망의 권세를 무효화시킨 거예요
이것을 해결한 것이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야~ 골고다 사단의 해골을 깨어 부숴뜨리신
그러나 예수님은 그로 인하여 발 뒤꿈치를 물림바 되어서 그손과 발에 상처의 흔적을 가지시고
영원한 흔적이 되셔서 내가 너희를 이렇게 낳았다 라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그 손과 발에
옆구리에 찔린 흔적의 창 자국과 그 못 자국을 도마에게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내가 이렇게 너희를 낳았다는 겁니다.
그 죄의 능력을 무력화시키고 사단의 권세를 무효화시키는 일을 골고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해서
이루었는데 너희는 그것을 영원히 잊지 말거라 해서 못자국과 창자국을 영원히 인성과 신성을 입으신
그분은 그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표요 사랑의 징표 사랑의 증거 기념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의 능력이 힘이 없게 되고 무력화되고
잃어버리게 되고 그리고 죄를 안 짓게 된다는 얘기죠
그리고 사망의 권세가 무효화돼요 빼앗겨버린 권세를 예수님이 가져가셨으니
이제는 우리에게 뭐 주장 할 수가 없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어떻게
사망을 이기는 것을 성경은 어떻게 얘기를 하고 있는지 그냥 은연 중에 이렇게 알아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사망의 현실적인 조그만 체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이런 주님의 재림 때에
우리가 주님의 손길에 의해서 창조되지 아니한 생명을 지닌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의 피와 물로
거듭난 자들은 반드시 확실하게 하나님의 품으로 그리스도의 품으로 하늘로 올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 일을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망을 이기는 방법이에요.
지금 얘기한 이 골고다 십자가의 나무를 선악과 나무를 짊어지시고 가시고 그 나무에 달리시고
고통받아 죽으셔서 죄의 능력을 무력화시키고 사망의 권세를 무효화시켜서 잃어버리게 빼앗겨버리게 한
이 주님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일들을 믿어야 된다는 거에요 이게 방법이라는 겁니다.
간단하지만서도 엄청난 깊이 있는 말씀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사망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골고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라~ 그곳에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골고다 십자가 언덕에서 선악과 나무에 우리가 달려야 될
우리가 범죄하여 타락하여서 죽음과 사망을 가져오게 된 그러한 근원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을 믿는 자들에게는 사망의 쏘는 표적이 더 이상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더이상 주장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망을 이기는 방법 중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신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이처럼 그리스도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내동댕이 쳐가면서까지 그리고 그분의 부르짖는 소리에도 귀를 막으시고 등을 돌리시고 눈으로
쳐다보지 아니 하시고 정말 뒤로 한 채 너무나 무자비하게 너무나 너무나 예수님을 내 동댕이 친체
내버려 두기까지 한 그런 이처럼 사랑하신 그 사랑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죄를
무력화시키고 사망의 권세를 무효화시킨 이 일들을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서 믿게 하여서
영접하게까지 하는 그리고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영접하는 삶을 살게 하기까지는 절대 내가 죽을 수 없습니다~
제가 어저께 기도한 것처럼 하나님 나를 이 일을 완성하기까지는 죽지 않게
할 것이라고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약속하신 그 말씀을 붙잡고 기억하는 것이
사망을 이기는 방법 중에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일을 이루기까지는 완성하기까지는 마치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이루기까지는
결코 죽을 수 없기 때문에 피해 다니신 것처럼 우리도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선악과 나무를 대신 짊어지시고 나무에 달리신
이 의미를 믿고 신뢰하고 영접하는 자들은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집이 내 몸을 통해서 성전이 완성되어지고 그리고 성전이 완성되어진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동역하여서 합작하여서 일체가 되어서 연합하여서 세상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보여주고 나타내는 일이 펼쳐지기 까지는 결코 죽을 수 없다 라는 그러한 마음의 각오를 새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망을 대적하는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나는 결코 죽을 수 없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셔야 되고 나를 통하여 내 몸에 그리스도께서 성전 삼으셔야 된다
그리고 이 일이 골고다에서 이루어진 죄를 무력화시키고 그리고 사망을 무효화시킨 이 일들을 남들에게
전파되기까지는 내가 결코 죽을 수 없다 라는 이것을 반드시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이 사망을 대적하는
방법입니다 사망을 어떻게 우리가 대적해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싸울 때 내가 조그만 사람과 싸울 때 건장한 우리 형님이나 또는 아버지가 뒤에서
딱 버티고 옆구리에 팔짱을 딱 끼고 네 이놈 우리 아들을 건드리기만 해봐라 넌 결코 내가 내버려 두지
않는다 라고 뒷짐만 지고 있어도 우리는 힘이나고 큰 소리 칩니다.
왜? 뒤에 서 있는 든든한 배경 든든한 후원자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내 뒤에 그림자처럼 버티고
있기 때문이에요 다윗이 그것을 알았던 거에요 그래서 골리앗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망과 죽음을 대적하는 것이 내 뒤에 계신 하나님이 든든한 백그라운드 보호자 되심을
인식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를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이스라엘 땅 아래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제자를 통해서 이루어야 될 그러한 사명의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결코 사망과 죄를 죄와 사망을 대적하여서 이기기 전까지는 결코 죽으실 수
없었기에 위험이 닥쳤을 때 예수님은 피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명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자신을 통해서
죄를 무력화시키고 사망을 무효화시킨 이 일들이 마쳐지기까지는 십자가에 달려 그 나무를
짊어지고 나무에 달려 죽는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절대 예수님이 죽어서는 안되었어요.
위험이 닥쳐서도 안 됩니다 죽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전에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 나무에 달리시기 전에 죽어버린다면
지금까지 한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며 헛된 것이 돼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게 된 겁니다.
사망의 문제를 우리에게 이기게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골고다의 십자가에 그 언덕에서 선악과 나무를 짊어 지시고 가시고 나무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삼일 후에 부활하시는 이일을 통하여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사망의 문제가
무효화되어서 사단이 우리를 주장 할 수 없는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는
해방받게 되는 일을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결코 골고다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결코 어떤 해나 상함을 받아서도안 되고 받을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골고다의 언덕에 가는 일외에 다른 해와 상함은 하나도 거절하지 않고 하나도 무시하지 않고
모두 다 인류를 구원한 일이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무력화시키고 사망의 권세를 무효화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모든 고통을 다 온전히 감당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망을 대체했을까요.
이것을 알면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아~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그러한 방법과 그런 과정들
아~ 우리가 아무 때나 목숨을 잃으면 안되는 구나 "나 예수 믿는 사람이야 죽일려면 죽여"
이렇게 해서 죽음을 당해야 될 필요가 없는 거구나 분별력을 갖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 어떤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길로 죽어야 될 곳에서 죽어야 되고
살아야 될 곳에서 살아야 되는데 만약에 믿는 자들이 살아야 될 곳에서 엉뚱하게 필요 없는 죽음을 당하고
죽어야 될 곳에서 본의 아니게 사는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이 돼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그 선악과 십자가 나무를 짊어 지기 전에 필요 없는 죽음을
당하셨다면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죽음이에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죽음인 것입니다.
죽어야 될 때 죽어야 되고 살아야 될 때 살아야 되는 이것을 분별하여서 아는 일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사도들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서 배워야 됩니다.
그래서 사망을 대적하고 대항하고 이기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4장 29·30절을 한번 보십시다 읽어보십니다.
29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30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예수님이 본의 아니게 이적과 표적과 기사 귀신들을 쫓고 질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속성을 모르는 자들은 그 질투와 시기로
인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사망 가운데 거하고자 이 동족들 유대인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취급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신분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철저하게 인성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못 알아보았지만 그분이 펼친 이적과 표적과 기사와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알아 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몰라 봤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유대인들이 주 예수님을 낭떨어지로 아니!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라고 얘기하느냐 하면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그것은 사실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취급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피하셔서 지나가셨어요.
성경은 피하셔서 지나가셨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실제 죽음과 사망을 벗어나기 위해서
도망갔다 라는 얘기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피하셨다고요 예수님이 그곳을 지나가셨다고요 말이 좋은 말로 해서
지나가신 것이지 그 쓴 환경을 예수님은 잠시 뒤로했다는 것입니다.
왜 더 큰 죽음이 그런 헛된 죽음이 아니라 더 큰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모든 인류 전체를 포함한
첫 사람 아담의 죽음과 연합한 죽음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그 죽음이 생명으로 되고 그 사망이 생명으로
되고 죄가 의가 되게 하는 일을 이루기 위하여 성취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잠시 잠간의 일순간에
펼쳐진 그 쓰디쓴 환경을 뒤로 하고 영원한 문제 참 죽음을 경험하셔야 될 십자가 사건을 위해서
그것을 물리쳤던 것입니다 진정한 죽음을 예수님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7장 1절도 한번 읽어볼까요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왜 그렇습니까? 왜 갈릴리에서만 활동하셨을까요.
왜 유대 그 예루살렘 성 거기에 많은 사람들 많은 지식인들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곳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지 않으셨을까요.
유대인들이 혈안이 되어서 눈을 부릅 뜨고 사람들을 동원해서 자신을 죽이려고 찾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헛된 죽음을 경험하지 않기 위하여 왜? 인류 전체 모두를 위한 죽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죽음이기 때문에 그 죽음을 의도적으로 고의적으로 경험해야 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위험한 상황인 예루살렘 땅에 유대 땅에 들어가지 않으신 거예요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이 잠시 덮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이런 경우가 종종 있어요.
어떤 큰 것 때문에 조그마한 것들이 때로는 소홀이 되고 때로는 무시되고 때로는 간과해야 되고
때로는 그렇게 사람들이 보기에는 오해할 수 있죠 아니 예수님이 그렇게 큰 능력을 큰 이적과 표적과
기사 또 죽은 자를 살리고 그걸 아니! 자랑하고 다니고 내보이고 하면 예수를 믿을 사람이 많을 텐데
왜 그렇게 피하기만 하고 도망다니기만 하고 왜 이렇게 숨어서 지냅니까 이해가 안 되죠
왜 더 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만인을 구원하는 영원한 시간대에서 영원한 첫사람 아담에게
속한 모든 이들을 구원하는 원론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유대에 다니지 아니하시고 갈릴리
땅에 그렇게 활동을 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59절도 한번 읽어봅시다 요한복음에 그런 말씀이 많이나와요
그들이 돌을 들어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 나가시리라
하나님의 아들 내가 바로 하나님과 내가 하나이다.
그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얘기인데 여호와 하나님은 분명히 유대인들 생각에 한 분 하나님이라고
알고 있는데 아니! 그 사람으로 나타나고 육체를 지니시고 인성을 갖추신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초라한
보잘것없는 그 예수님이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니 사람들이 어떠한 마음을 가졌겠어요.
망령되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해서 그 주 예수님을 쳐 죽 이는 일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죽이려 했으나 예수님은 그 성전에서 어떻게 했나요
도망갔어요. 성경은 좋은 말로 나가셨다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나가시니라 라고 표현했지만 이 얘기는 돌로 쳐죽이려 할 때 그들이 살기가 등등했던 겁니다
죽기 살기로 그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원수 하나님의 명예를 온전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죽기 살기로 그 예수님께 달려들었을 때 예수님은 그 성전에서 도망하여 피하였던 것입니다.
좋은 말로 나가시니라 그런 것이지 도망간 것이에요.
왜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죽음을 피하셨습니까 아니! 예수님이 죽음을 피했다는 것을
그 얘기만 딱 단편적으로만 보면 이해가 안되잖아요.
예수님이 왜 죽음을 피해 그런 능력이 있고 그러한 하나님이 어떻게 죽음을 무서워해
왜냐면 인성을 가지고 오셔서 인성의 본성을 가지고 그 일을 이루셔야 인성을 가진 첫 사람 아담의
문제를 몸을 통해서 들어온 그 죄의 독소를 온전히 빼내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인자로서 오신 겁니다.
하나님의 높은 우월하신 그 모든 것을 다 뒤로 한 채 버리시고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하나님도 버리시고
사람으로 오셔서 그렇게 정말 우습게 까지 보일 정도로 저게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저가 아니! 우리 앞에서 무엇이 무서워서 생쥐가 숨어들듯이 그렇게 도망을가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고 얼마나 조롱거리가 되고 얼마나 멸시와 조롱을 받았겠는냐고요? 왜? 왜? 왜?
죽음을 그렇게 그렇게 피하시고 지나가시고 왜 대적하지 않으시고 왜 도망가는 그런 삶을 사셨느냐
그 자신의 혼자만의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닌 영원한 인생의 삶인 첫 사람 아담의 문제 그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오신 요한일서 3장을 8절 말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9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멸하신다 라는 것은 없이 하신다는 것은 무효화시키고 무력하였다는 거예요.
무엇을 무력화시켰어요? 죄의 능력
무엇을 무효화시켰어요? 사망을 권세를 무효화시켰어요 잃어버리게 했어요.
빼앗겨버렸어요 주장할 수 없게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해방되고 그래서 우리가 자유화되고 그래서 우리가 벗어나게 된 거예요.
주 예수님은 이것을 알고 자신의 때가 골고다 언덕에서 유월절날 금요일 날 오후 3시에
반드시 그렇게 죽으셔야 돌아가셔야 되기 때문에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은 사실을 알고
그 때가 이르기까지는 함부로 경거망동하거나 함부로 그렇게 행동하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섭리를 아는 일이 그분의 경륜을 아는 일이 하나님 자신의 계획이 경륜입니다.
하나님의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그분의 때가 무르 익기까지는 찾아오기까지는
마주하기까지는 그 어떤 일도 절대 그런 일들을 금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돼야 되는데 어느 때는 죽어야 될 때 살기를 원하고 살아야 할 때 죽기를 원하고
그러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말이에요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때에 아버지의 때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경륜 속에 아버지의 섭리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일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시기가 오기까지
메시아의 구속 사역을 이룸에 있어서 끊어지는 일이 있으면 모든 것이 어그러지고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계획이 다 어그러지고 훼손되고 파괴된다는 것을 이 원수 사단은 알았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통해서 제자들을 통해서 베드로를 통해서 심지어는 가롯 유다를 통해서
그렇게 그 골고다 일이 이루기 전에 다른 일을 하도록 그 죽음의 일이 헛되게 되도록 그 일들을
그렇게 변개시키기 위해서 사단은 역사 하였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아무 때 아무 곳에서 아무 사람에
의해서 결코 죽으시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정하시고 하나님이 정하신 장소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에
하나님이 정한 사람들 안에서 골고다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결코 헛된 죽음을 당하실 수가 없었다
골고다만이 하나님이 정하신 곳이요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곳이요 하나님의 경륜이 있고
창세기 3장 15절에 최초의 복음 원시 복음이 이루어져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일이 온전히 성취되고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해서 주 예수님께서는
골고다가 아닌 갈보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결코 절대 죽으실 수 없었던 것이 예수님의 절대 사명이었고
본분이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사는 자와 기억하지 않는 자와의 삶은 천양지차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경륜 그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결코 그곳에
가서도 그 시간에 참여해서도 그곳에 무모하게 목숨을 버려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 선생이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죽으면 죽는가 보다 그랬던 것이 아니라
때가 이르기 전에 그들이 사도 바울 선생님을 통해서 주 예수님께서는 성령님께서는 할 일이 있었고
베드로를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될 필요가 있었고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되어야 이 죄의 능력이 무력화되고 사망의 권세가 무효화 됐음을 십자가의 골고다 그 선악과
나무를 짊어지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 일이 이루어지는 성취되는 사도들을 통해서
이루어져야만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그 일이 이제는 베드로와 사도 바울 선생님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되기 때문에 그 일이 있기 전 까지는 그들이 죽음에 이르면 안되기 때문에 천사를 동원해서 까지도 뱀에
물렸음에도 독사에게 물렸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게 하시고 또 감옥에 갇혔으나 사형당하지 않게 하셔서
베드로의 목숨을 구원하신 것은 때가 이르지 않고 그가 사명이 해야 될 일들이 주 예수님을 위해서 펼쳐야
될 일들과 복음과 사명과 뜻이 계획이 있기 때문에 그는 결코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천사를 동원해서
그들을 살렸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지금 그와 같은 상황이 어느 때 찾아올 수 있어요.
그때 베드로가 감옥에 있을 때 이게 내가 죽어야 될 장소인가 보다 또는 사도 바울이 독사에게 물렸을 때
내가 결국은 배에서 그런 풍란과 파도에도 하나님께서 구원 시켜주셨는데 결국은 독사에 물려서 이렇게
비참하게 죽는가 보다 헛된 죽음을 당하는가 보다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피동적이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사도행전27:22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23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27열 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 저리 쫓겨 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와지는 줄을 짐작하고 28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9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30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31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이에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33날이 새어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 나흘인즉 34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35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 칠십 륙인이러라 38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39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40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41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가니 42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43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 헤엄칠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아~ 그냥 자연 그대로 이것이 내가 죽으려니 하고 그럴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천사를 동원시켰고 그 성령님의 신성한 생명의 능력으로
그 독사에게 물려도 해를 받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막아주신 것입니다.
흑암의 권세가 때가 차기 전까지 죽게 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흑암의 권세인 사단은 때가 차지 않았을 때 때가 이르기 전에 죽게 하려고 하는
것이 사단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사단의 역사는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죽게 하는 것이고 베드로와
사도 바울 제자들을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 전에 죽게 하는 일이 사단의 역사 흑암의 권세인
사단이 하는 일이라면 뱀과 전갈들이 하는 일이라면 성령님의 역사는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아무나 위험할 때 옥에 갇혔을 때 뱀에게 물렸을 때 이게 내가 죽는 길인가?
그렇게 생각했다라면 그들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알았어요.
자기 자신이 예수님께서 그렇게 3년 반 동안을 훈련시키시고 그렇게 자신을 그렇게 연단시키시고
훈련시키시고 조성하시고 만드시고 꾸짖으시고 경책하시고 때리시고 엄위하게 그렇게 어루만져주셨던
것은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서 이 죄의 능력이 무력화 되고 죄의 권세로 인하여 나타난
이 사망을 권세를 무효화시켰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알려서 구원시키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감옥에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있었고 사도 바울 선생님과 그 함께한 자도 찬송가를 부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던 겁니다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깊은 신앙인지 모릅니다.
베드로 사도와 사도 바울은 알았던 거에요
때가 이르기 전에 흑암의 권세는 자신들을 유대인들을 통해서 그 이방인들을 통해서 자신들을
죽이고자 그렇게 도모하고 위협하고 그렇게 하였을지라도 죽게 하고 사망에 거하려고 했을지라도
절대 성령님께서 절대 주 예수님께서 결코 간과하거나 내버려 두거나 소홀히 하지 않고 보호하시고
운동하신다 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베드로가 감옥에서 잠을 잘 수가 있었던 거예요.
사도바울 선생님이 찬송을 찬미를 부를 수가 있었던 그런 면에서는 베드로 선생님이 훨씬 믿음의
경지가 깊다 라는 거예요 예수님을 친히 만난 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든지 죽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도 보면 24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빌립보서1:24~25)
너희 무리와 함께 지금 있는 것은 너희를 돕고자 하는 일 때문이다 하고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절대 안 두려했어요.
그런데 그들은 알았던 것이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때가 이르면 죽게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제가 요한복음 21장 18절 19절 말씀을 베드로에게 주신 그 말씀을 통해서 제가 이 말씀을 저에게
주셨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이해를 할 수 있어요.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때가 되면 죽게 될 것을 알고 그때 결코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무서워거나 공포심을 갖거나 회피하지 않았어요.
감사함으로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라는 그런 얘기들이 이게 실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여유가 있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죄의 능력이 무력화 되고 사망의 권세가 자기 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무효화 되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는 실제적으로 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 일이 선악과 나무를 짊어지시고
가시고 달리셔서 그곳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사건을 통해서 그 일이 해결 됐다는 것을 알고
그 믿음과 절대적인 신뢰는 이 세상에 그 무엇도 훼손시킬 수가 없고 파괴시킬 수가 없죠.
이것이 죽음을 이긴 자들입니다 이것이 죽음과 사망을 이기는 자들의 삶이고 이기는 자들의 삶의 모범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본분 자신의 사명을 아직도 마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결코
그때까지 그 때 전에 죽지 않을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여유가 있었고 죽음
앞에 의연한 모습으로 마주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왜? 주 예수님의 그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신뢰하였기 때문에 그 약속 그 언약 죄의 능력을 무력화시키고
그 죄로 인하여 발생된 그 권세가 무효화되고 잃어버렸다는 사단이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를 아는 그 절대적인 신뢰함 절대적인 믿음 때문에 그들이 사망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고 그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일이 마치고 또는 마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이르게 되면 죽는다 라는
사실을 알고 항상 마음속에 염두에 두고 자신들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죽었으나 살아있는 자로
살아 있으나 죽은 자들 이다 이 말이에요.
이것을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지만 살아 있어도 죽은 자들이고 죽음 죽었어도 살아 있는
자들이라는 얘기는 아주 영적으로 고차원 적이고 그래서 사도바울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디모데 후서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왜냐하면 이런 것들을 알았던 거예요.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나의 떠날 기약이 죽을 때가 됐다는 것을 안 거에요 베드로도 알았고 요한과 다 알았죠
자기의 죽을 때를 아는 자들 사망의 때를 아는 자들 이것이 죽음을 이긴 자들이에요
이것이 사망을 이긴 자들의 모습이라니까요
우리는 사망의 때를 항상 인식하고 기억하고 염두에 두는 삶을 살아야 돼요
그런데 그걸 잊어버려요 왜 잊어버려요 당연히 사람이 죽으니까 당연히 70년 80년 살다가
죽으면 당연한 거지 안 죽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런데 성경은 안 죽은 사람들의
모습이 엘리야와 에녹을 통해서 사드락, 메삭, 아벤느고, 다니엘의 모습을 통해서 골리앗과
마주한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그 솥에 들어있는 들의 박의 독소로 인하여 죽을 처지에 처했으나
가루로 인하여 예수님의 몸과 살로 상징하는 그 예수님의 그 이상을 통하여 나타내진 그 가루를 통하여
독소가 해소되고 죽음이 없어진다는 면해진다는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 짐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마라에서 쓴 물 때문에 그들이 물을 마시지 못하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을 때 그곳에서
한 나무를 지시 하시니 나무를 둘도 아니고 한 나무를 보내셨어요 십자가 나무를 얘기하고 있거든요
선악과 첫사람 아담이 취한 그 나무 그걸 예수님이 대신 짊어졌다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아~ 이 사랑 어떻게 그것을 짊어지고 죄를 경험하고 죄를 친히 체험하고 아~ 인간이 경험해야
될 죽음과 죄의 모든 것을 아~그러니 살아보러 오실 수밖에 그래서 우리의 죽을 날을 아는 자들
염두에 둔 자들 그것에 깨어 있는 자들이 죽음과 싸우는 자들이고 죽음에 대항하는 자들이고
대적하는 자들이고 결국 그들이 죽음을 이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현실적인 삶에서 죽음을 이기는 체험을 합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있었으나 사도 바울이 뱀에게 독사에게 물렸으나 결코 죽지 않는다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5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6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7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9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쌔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이것이 사망을 이기는 체험이라니까요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를 그들은 알았어요
그때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으나 또 옥에 갇혔다가 목베임을 당해서 처절한 죽음을 당한
사도 바울 선생님이나 그 외에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과 믿음의 선진자들이 자신이죽어야 될 때 떠나야 될 때 사망을 경험해야 될 때를 아는 자들은 사망과 관계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사망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지
사망과 관계가 있는 자들은 사망을 멀리 무서워서 두려워서 피하여서 안 보이는 곳으로 도망을 간다니까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얘기예요 사망과 연관이 없는 자들 사망에서 벗어난 자들 죄의 능력이 무력화되고 사망의 권세가 무효화 된 자들은 사망이 두렵지 않기 때문에 사망을 직시하고 자신의 죽을 때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자들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약을 먹고 건강식을 먹고
스포츠 이렇게 운동을 하고 좋다는 음식 찾아 다니면서 보양식을 먹으러 다니고 하여튼 몸에 좋다면
독사도 먹고 사슴의 피도 먹고 하는 그런일을 왜 할까요? 무섭기 때문에 두렵기 때문에 사망이 자신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러나 죄와 죄의 능력에 관계가 없고 사망의 권세가 자신과 관계가 없는 자들의 삶은
죽음이 와도 죽음이 오지 않아도 자기와 무관한 거에요 상관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 주님으로부터 제자들의 삶을 보면 특별히 그 베드로의 삶
사도 바울 선생님 사도 요한 선생님 가장 오래 살았던 밧모섬에서 정말 요한 일, 이, 삼서,요한 복음
요한 계시록 정말 진리의 복음을 이렇게 기록한 성령님의 뜻에 따라 기록한 그들의 삶은
주 예수님께로부터 비롯되지 않는 죽음은 거절해야 되고 거절하면 당연히 거절하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음을 알고 자신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인식하고 있었다는 거죠.
그래서 끓는 물에 요한을 집어넣으려고 했는데 마치 사드락,메삭,아벤느고,다니엘 처럼 오히려
그들은 해를 받고 죽음을 당하고 사도 요한은 죽음을 당하지 않고 이건 전설이니까
우리가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지만 하여튼 그런 것이 실제 이든 실제가 아니든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그보다 더한 일도 벌어지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주 예수님으로부터 허락되지 않은 죽음은 우리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얘기에요
거절해야 된다는 얘기에요.
주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 죽음은 거절해야 되고 뿔은 대항해야 되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옥에서 구원해 주시고 빼내 주시고 독사의 독에서 뱀에게 물릴지라도 해를
받지 않게 해 주시고 마무 때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요,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지 않은 사단의 흑암의 권세로부터 비롯된 뱀의 독소들 전갈의 독소
악한 영들 뱀은 악한 영을 상징하고 있으니까 그런 일들은 하나님께서 철저히 어떠한 상황에서도
막으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해내신다 라는 얘기에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은 수한이 차매 그들이 열조의 품으로 돌아 갔다 라는 얘기가 많이 나오죠
창:25:8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창:35:29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잠언5:9두렵건대 네 존영이 남에게 잃어버리게 되며 네 수한이 잔인한 자에게 빼앗기게 될까 하노라
시편90:10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12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의 수한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 물론 어떤 경우에 지금 백살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어진 그 수한에 인간에 의해서 왜냐하면 오래 살면 오히려 고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수한을 바닷가의 접경 지역이 경계가 있는 것처럼 인간의 생명의 수명도 경계를
제시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늙어서 그냥 육체의 고통을 당하면 그건 저주지 정말 얼마나 많은
아픔과 오히려 죽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커다란 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에 보면
아담 때부터 기록된 그런 열조들의 죽음들을 보면 수한이 이르매 또 창세기 35장 29절에
말씀한 것처럼 이삭은 노년까지 장수하다가 수한이 차자 때가 찰 때 죽었다는 얘기에요
이게 무슨 얘기냐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놀라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이삭을 위해 정하신 최대한의 날수가 하나님의 보살핌인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 일찍 죽은 사람이 있을 거 아니에요 백살이나, 어떤 사람은 백다섯살,
어떤 사람은 팔십살, 어떤 사람은 백칠십살에 아브라함 보다는 누가 더 오래 살고 누구보다는
또 다른 사람이 또 적게 살고 그런데 그렇게 하였을지라도 그가 때가 차매 년수가 되매 수한이 차서
죽었다 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살 수 있는 최대한의 최상의 상태의 때까지 하나님이 배려하셔서
보살피셔서 살아왔고 수명이 혼이 나감으로 말미암아 떠났다 라는 얘기입니다.
이게 때가 찼다 수한이 이르매 수환이 차자 이게 얼마나 은혜가 되는 얘기 입니까
그 사람의 인생을 일생을 살폈다는 얘기에요 이 얘기가 저는 이 얘기를 순간적으로 깨달았을 때
우와~ 일생을 죽을 날까지도 하나님이 살피셔서 때가 차 매 하루의 후도 아니고 하루의 전도 아닌
바로 그 날 그 시간 그때 아침, 점심, 저녁 바로 그때 적재적소에 그 장소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머리카락 하나도 세신바 되고 참새가 떨어지는 것조차도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까지도 왜 참새
한 마리가 인간의 생명을 대신하는 희생제물이기 때문에 그것조차도 관여하고 계시다는 얘기에요
우리가 수한이 차기 전에 자연적인 어떤 하나님께서 주신 수한이 차기 전에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사망을 이기지 못한다 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망을 이기지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연약하고 질병이 찾아와서 일찍 죽었습니다.
그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제가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거에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때가 이르는 그 본분의 사명을 이루고 죽을
날을 계시하기 전까지는 살아있어야 된다니까요 죽으면 안됩니다.
우리를 위해서 정해주신 생명의 수한이 우리에게 있단 얘기에요
우리는 특별하게 그런 계시의 말씀이 없는한 할 수 있는 활동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으로
70이든지 80을 살아서라도 주님에게 기쁘신 도구가 돼야 될 필요가 있다는 거에요.
첫째 주님을 많이 알고 주님에 대한 지식과 주님에 대한 사랑과 주님에 대한 경외함과 두려움과
이런 것을 통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될 필요가 있다는 얘기에요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에게 베드로나 사도 바울 선생님처럼 특별하게 그들의 인생의 생명의
년수를 정해놓은 것 이외에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주신 그 생명의 수한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침범하시지 않아요.
그런데 일찍 죽었어요 그 사람이 그건 자기가 잘못해 죽은 거에요
병으로 연약해서 질병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면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사용하시지 않으신다니까요
물론 베드로처럼 그게 특별히 그 수한을 정해 놓으신 그 사람은 어쩔 수 없어요.
그거는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거니까요
그러나 그 외에 우리는 최소한도로 우리에게 주신 수한대로 그래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1:2)
그래서 이 말씀이 써 있는 거에요.
만약에 하나님의 이 특별한 자들에 대한 계시가 있다 라면 그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지만 이것이 없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의 수한을 오르락내리락
욥처럼 욥과 같은 경우는 특별한 경우니까 그리고 그 아들들 다 죽어버렸잖아요
그건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사단이 펼쳐놓은
그 일들을 하나님이 주권을 활용해서 허락하시고 허용하신 것뿐이에요.
하나님이 치시고 하나님이 죽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찾아온 연약함이나 질병으로 인하여
상황과 죽음이 일찍 도래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단호하게 대항해야 되고 대적해야 되고
거절하고 물리쳐야 됩니다 무슨 얘기인지 아시죠 이게 중요해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 때에 죽어야 되고 때에 살아야 되고 때 때 때가 필요하다는 애기예요
예수님의 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사신 것이고 그때 우리는 사망과 죽음을 이기는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을 모르면 아이고 내가 뭐 예전에 그냥 못된 짓 많이 해가지고
죄가 많아가지고 아이구 내가 죗값으로 죽는가 보다 아이고 이게 에이즈가 걸려서 죽는가 보다
코로나에 의해서 죽는가 보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죽음을 느낀다 라는 거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문을 철폐하시고
완전히 파쇄시키시고 사망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신 믿는 자들 거듭난 자들에 한해서
이 사망의 죽음을 이긴다 라는 것은 우리의 몸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 라는 것이 아니라
우린 모두 잠자거든요 안식을 취하거든요 예전에 한번 말씀 드린바 있는데 고린도 전서15장 51절에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55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그러므로 내 사랑 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나는 하나님 믿기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죽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죽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맞이하지 않는 사람 외에는 모든 사람이 이 죽음이라는 이 죄의
삯으로 말미암은 이 사망과 죽음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망을 이긴다 라는 말은 우리 몸이 70년 내지 80년 살다가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 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거죠.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들인 자들은 아~ 나는 늙지 않고 영원히 산다
그래서 영생교 부천에 보면 그 사람이 죽었는데 부천에 무슨 이상한 이 단체가 있어요
영생교 라고 해서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했던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런데 그 사람 죽었어요
하여튼 영원히 늙지 않고 영원히 산다 그건 있을 수가 없죠.
누구든지 예외가 없죠 칠십 팔십 또 어떤 경우에는 좀 오래 살고 한 백살 정도는 있지만
다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고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고 인식하고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될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요구하는 일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아직 하던 일이 계속 되어지고 있다면
마쳐지지 않고 계속 지금 진행 중에 있다면 우리는 결코 죽을 수 없다는 그 믿음을 갖고 있는 게
있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아직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과의 약속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신 일이 아닙니까 라고 하면은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 요구하고 부르짖는 기도를 간과하시지 못하고 사단의 그 불화살 공격을
제가 어제 겪은 일처럼 막아주실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정해준 수한이 정해진 수명 때가 차매 수한이 차자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날들이
수한의 날들이 있는데 그전에 내가 잘못해서 그랬던 죄의 문제로 그랬던 하여튼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질병이 찾아 왔던 그래도 먼저 죽으면 안 된다는 얘기에요.
세상을 결코 그렇게 떠나서는 하나님의 일에 이율배반적이란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몸을 통해서 해야 될 일이 아직 마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살아
있어야 되는데 그 일을 망가뜨린 것에 대한 책임은 분명히 져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게 중요해요 그래서 제가 여기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 담배를 많이 피우는데 막 담배를 빼앗고
담배 피우지 못하게 하고 날마다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못 마시게 하고 끊어라 라고 해도 소용이 없어요
인간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생명의 끈질김을 주셨느냐면 그런 일들이 30년전부터 해왔는데 아직도 죽지 않고 있어요 그거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에요 그 사람에게 그렇게 해서라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끈질겨요
아니! 분명히 바나나 잎을 톱으로 잘라버렸는데 거기에 생명의 순이 그냥 비가오고 일주일 만에
또 생명의 순이 막 솟아나오는 것을 보면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그 생명의 비췸은 한도 끝도 없이
부요하신 크신 분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원하심의 날들이 아닌 나머지 모든 일들에서 찾아온 질병이나 연약함이나
사망이나 죽음은 우리가 받아들여서도 용납하여서도 그것을 고개를 끄덕여서 동의해서도 안 되고
반드시 대적하고 거절하고 싸워서 물리쳐서 이겨야 됩니다.
여기 제가 살고 있는 이곳 정원에 뽕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열매가 얼마나 무성하게 열리는지
수천개가 달려 있는데 하루에 한 백개정도를 제가 따먹나 봐요 거기에 비타민도 많이 들어있고
혈관도 강화 시켜주고 혈압도 낮춰주고 고지혈증 개선에 도움을 준다고 하는데
이것을 하루만 안 따먹으면 땅에 떨어져서 흙속으로 들어가 버려요.
그러니까 때가 되면 종말이 되면 이 생명의 수한이 차게 되면 생명의 때가 이르게 되면
마치 그 뽕나무의 열매인 오디가 땅에 떨어져서 땅속으로 들어가서 묻혀진 것처럼 씨가
되는 것처럼 인간의 생명의 수한도 그러한 종말의 때 마지막 정점의 결과에서 떨어져서
이게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에 편승해서 평안함과 안식과 위로 속에서 세상을
떠날 수가 있게 되는데 그전에 주사로 누군가 그렇게 몇일전에 얘기를 하더라구요.
자기가 죽을 상황에 처하면 주사를 놔서 빨리 죽을수 있게 해달라고 자살하는 사람 그렇게 해서
의도적으로 죽는 거 이건 하나님께서 원래 주신 생명의 법칙과 위반되기 때문에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에요.
그래서 욥기서 5장 26절에서 때가 차기 전에 떨어지면 안 된다 때가 차서
떨어져야 그것이 운반되어서 올려진다 라는 말씀인데 한번 읽어 볼까요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마치 곡식단을 제 때에 들어올림 같으니라
그러니까 제가 얘기하는 것이 사망과 죽음을 이긴다는 거 죽음과 사망하고 똑같은 단어의
표현인데 죄의 삯으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른 것인데 죄의 능력이 무력화됐다 라는 것을
믿지 않고 신뢰하지 않고 그 얘기는 뭐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권세를 인정하는 자들에게 찾아오는 것이 사망이요 죽음이란 말이에요.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자들은 폐기처분 됐잖아요 죄가 폐기처분 됐고 죄의 권세의 마지막인
그 사망과 죽음이 폐기 처분됐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자들은 창조 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 자신의 영 속에 들어와서 새로운 영의 새로운 창조의영 새로운 생명의영이 내주하고 안착하고
자리 잡고 성전삼고 계시고 이것이 몸에까지 나타나서 몸을 통해서 그 일이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집이
몸을 통해서 온전히 건축되어져야 되는 일들이 생겨나야 된다는 얘기에요.
제가 지금 얘기하고 싶은 것은 사망과 죽음을 이기는 것은 결코 그 사람이 늙었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에게 지금 무슨 말씀을 가르쳐주고 계시냐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 십자가에
그분을 이렇게 가둬 놓으셨어도 주님께서는 결코 죽지 아니할 것을 아시고 내가 삼일 만에 부활하리라 라고
그것을 얘기를 하고 계시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
하셔서 자기 자신이 부활하실 것을 알았던 것처럼 부활케 하시지 않을지라도 예수님은
그 일을 행하실 분이라는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이런 말씀을 묵상 하면서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면 잠시 잠깐 사탄의 편에 속해 있는 것처럼
지옥에 가는 것조차도 마다하지 않겠다 라고 작정하는 자가 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라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여서 자신을 다시 살아내게 하실 것을 앎으로
말미암아 또 실제적으로 그 믿음대로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하여서 사망을 완전히 폐기처분 하시고
사망의 문을 열고 다시 살아나서 이겨서 살아나시게 된 것처럼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그와 연합된 자들은 내가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그 죄의 권세가 무효화 되고 죄의
능력이 무력화됐다 라는 것을 인식하고 믿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그러한 영적인 믿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망을 이기는 자들이에요.
그들이 사망을 이기는 자들이지 결코 죽지 않는다 라는 것이 아니거든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사단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 라는 뜻이요 죽음의 쇠사슬에
묶여 있다는 뜻이요 죽음에 패배 당했다 라는 일종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두려워한다는것과 죽음을 무서워한다는 것 죽음을 회피하는 것은 내가 죽음인 사단의 권세가
무효화됐다는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그 십자가를 신뢰하지 않는
그리스도가 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들이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영접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권세가 무효화됐다는 사실을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는 것은 죽음에게 진 자들을 말합니다.
사망에게 패배한 자들 죽음에 패배한 자들은 지금 교회를 다니고 십자가를 믿고 예수님을 따라도
소용 없다는 이게 중요한 얘기에요
피와 살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를 다녀도 교회의 문을 일주일이 멀다 하고 일주일에 두 번 세 번
다녀도 그들은 죄의 능력이 무력화되고 죄의 권세가 십자가 나무를 통해서 나무 나무 그 선악과 나무
짊어지시고 나무에 달리시고 죽으신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인의 그 의를 죄를 의가 되게 하시고
사망이 생명이 되게 하신 그 변화 시켜주신 조성해 주신 바꿔주신 그분을 믿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쇠사슬에 묶여 있는 자들이 죽음을 무서워하는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골고다의 십자가에 그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 그분이 죽으셨으며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보고 우리도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두려하지 않고 담대하게
마주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선진자들의 모습이요 그리고 제자들의 모습 베드로의 모습
사도바울 선생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수많은 위기 이상한 일들, 환경들, 사고 ,질병들, 열악한일들,
어려운일들, 공포, 두려움 이런 것들이 오는데 그것에 대해서 연연해할 필요가 없는 것은 혹시
내가 믿음이 연약해서 죽음이 경험되어지고 죽음이 다가오고 죽음을 체험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이 현실적인 삶에서 어둠이라는 이 깜깜한 무덤이라는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그 무덤 속으로
이 장소에서 무덤이라는 장소로 옮겨가는 것뿐이지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이 현실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잠시 옮겨져서 안식을 누린 것처럼
그렇게 그런 것이 죽음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질병이나 고통이나 연약함 이런 것들이 어떤 면에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일일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크신 관점에서 보면 허용하시고
허락하신 중에서 주시는데 그것은 자신들이 아닌 세상과 자신들의 삶이 아닌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게 하려고 하나님 자신만을 사랑하게 하려고 그러한 것들을
허용하실 수가 있다 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삶을 살아가면 이겨나갈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알지 못하면 그 사망이라는 그 쇠사슬에 묶인바 되어서
노예가 되고 종노릇 하게 돼서 항상 자기 자신만을 돌아보게 되고 자기 자신만의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온갖 일을 도모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해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고 빼앗겨버리는 이상한 그런 일이 생겨버립니다.
사단의 역사 훼방하고자 하는 역사가 그게 죽음을 무서함으로 발생되는 나를 바라보게 하고
나를 도모하게 되고 나를 아끼게 되고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나를 귀하게 존귀하게 여겨지는
그래서 자기 자신이 우상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래서 우리가 이 믿음의 선진자들이 사망과 죽음이 이 죄의 권세가 사단의 흑암의 권세가
무효화됐다 라는 것을 십자가를 예수님이 짊어지시고 달리시는 그 일을 통해서 부활하시는 일을 통해서
사망이라는 것은 부활로 인하여 사망이 생명으로 대체되고 부활이라는 것은 생명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고
생명을 표현하는 말이죠.
때문에 사망이 생명 되게 하신 것은 부활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그런 일이 생겨짐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능력이 무력화되고 힘이 없게 되고 죽음의 권세가 무효화되는 이 사단의 권세가 없어졌다는
것을 확연히 알고 있는 사람은 죽음이 오든지 질병이 오든 혹 연약하든 고통이 오든 사고가 오든 흑암이
오든 어떤 이상한 슬픈 일들이 오든 이별이 오든 다 극복할 수 있고 우리를 관여하지
못하고 우리를 두렵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너희가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의 십자가 그 나무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죄와 사망의 문제 보다도 큰 것이
있으면 얘기해 보세요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이 죄와 사망 속에 다 포함이 돼 있어요
크고 작은 것들이 다 태산 같은 이 커다란 죄와 사망이라는 양대 산맥 속에 모든 것이
슬픔과 이별과 아픔과 고통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해결받고자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의 문제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면은 이 문제를 제거받을 수가 있는데
그래서 이 산더러 저 바다에 던지우라 해도 빠지게 될 것이요 이 뽕나무 뿌리를 뽑아서
저 바다에 던지라 하면 심기어 질것이다.
뽕나무 뿌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질기고 가장 깊고 가장 뻗어나간 미터가 길어요
뽕나무 뿌리를 동영상으로 봤는데요 얼마나 긴지 5m,10m, 15m 계속 옆으로 옆으로 뻗어 나가요
얼마나 질기고 뿌리가 깊이 박혀 있는지 포크레인으로 뽑아도 잘 안뽑힐 정도에요.
그렇게 인간의 죄악이 그렇게 끈질기고 집요하게 야곱의 삶의 모습처럼 하나님께서
야곱의 그 환도뼈를 쳐서라도 그 천연적인 육신적인 힘을 고집을 그 성질머리 못된 것들
자기만이 갖고 있는 그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것들을 빼앗고 제거시키고자 하나님이 강제로 치신 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그가 깨어지지 않고 제거되지 않고 뽑아지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이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다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면서 까지 왜 살아있는
말씀이냐 왜? 옛날에 제사장들이 성소뜰에서 제물을 드릴 때 예리하고 날카로운 그 칼들을 가지고
짐승들 희생 제물들을 베어가지고 내장부터 다 끄집어내고 토막을 내서 번제물로 드려서 하나님께
향기로 드리고 죄를 제거시키고 해결 받는 일을 제사장들의 손에 의해서 이렇게 이루어졌는데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영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하여서 우리 속에 있는 영과 혼과 몸의 그런 죄악들을 아주 깊게 깊게 뿌리박은
그런 독소들을 다 쪼개서 잘라서 떼어낼 수 있다는 거에요.
며칠 전에 동영상을 봤는데요 중국에서 가장 비싼 음식이 원숭이 해골이라고 해요
해골을 뼈에 빨대를 꽂아가지고 먹는데 그것이 일반 음식값의 20배 더라구요
가장 깊은 중요한 생명이 가장 깊은 뼈 속에 감춰져 있듯이 인간의 죄의 깊은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그런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고 역심을 품고 배도하게 하는 그런 죄의 것들을 제거시키기
위해서는 대제사장이 칼로 오장 육부를 빼서 깊게 그 죄의 기름덩이들 못된 것들 간에
붙은 암덩어리들 그 독소들을 다 잘라서 베어서 쪼개서 빼내야 되는데 우리 몸과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이것을 쪼개서 잘라내기 위해서는 이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성령님께서 그 일을 하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예리한 칼이에요 양날의 칼이란 말입니다.
옛날에 대제사장들은 한 날의 칼을 사용했죠 그것보다도 더 훨씬 예리한 칼이라니까요
그 예리한 칼이 그때 당시에는 제사장들 희생 제물을 통해서 잘라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아름다운 것 좋은 것 이런 것을 도모하고자 기름덩이는 죄악을 상징하니까 그런것을 태워서
하나님께 드려야 없어지니까 그런데 지금 인간에게 붙어 있는 것은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고 그렇게 쪼개고 자르고 제거해서 오려내서 짓눌러서 막 빼내신다는 얘기에요.
뼈 속에 갇혀 있는 생명의 물을 빼내기 위해서는 뼈를 깨뜨려야 돼요
뼈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무거운 것을 우리 위에 올려놔야 그렇게 뼈가 깨지는 일이
영에 붙은 그런 나쁜 독소들 누룩과 같은 것들 문둔병 처럼 전염되어진 것들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고 성령님께서 그 일을 그렇게 하신다는 얘기에요.
거기에 따라서 영과 혼과 몸이 각자의 기능을 발휘 하도록 각자의 최대한의 기능을 발휘하여서
몸이 혼을 위하고 혼은 영을 위하고 영은 안에 들어오셔서 내주하시는 창조되지 아니한 그 생명이신
하나님의 영을 위해서 일을 하나가 되어서 연합되어서 일치되어서 일할 수 있도록 함으로 말미암아
영과 혼과 몸이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성령님께서 그 일을 지금 삶을 통해서 쓰디쓴 환경을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데 그게 마라의 쓴물이고
그게 들판의 박 이란 말입니다.
그걸 잘라내고 제거가 되기 위해서는 가루를 집어넣어야 되고 가루? 어떤 가루인지는 몰라요
그런데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이에요 나무라는 얘기란 말이죠
그래서 내 피를 받아 마셔라 내 살을 받아 먹어라 그 말씀을 계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 어떠한 것이 나를 불화살로 공격하고 죽음이든, 환란이든, 고통이든,
슬픔이든, 이별이든, 조롱이든, 오해든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이 경험하셨던 믿음의 선진자들이
경험하고 고통을 겪었던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가해진다 하더라도
우리를 두렵게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죽는 것도 주를 위해서 유익함이라
아~ 사도 바울 선생님이 이걸 알았던 거에요
빌립보서 1장 21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그 욕망을 가진 이 간절한 바람을 가진 이것은 내가 살아
있어서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혹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죽는 일이라면 죽는 일조차도 유익함이라 이것이 제가 좀 전에 얘기한 지옥의 날을
보낸다 할지라도 주님이 유익이 된다면 주님의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나 라는
어떤 고차원적인 그런 말씀이 바로 빌립보서 1장 23절 이 말씀이 아닌가 싶어요.
이제 우리는 사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이 오히려 담담하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 삶이 이겨나가는 자들의 삶이다 라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여기서 일단 3부의 말씀을 마치고 조금 후에 4부의 말씀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