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신수영(辛首榮) 자:영백(榮伯)
생년:1592년 7월 3일 선조 25년 임진년(壬辰年) 수 51세
졸년:1642년 11월 4일 인조 20년 임오년(壬午年)
配:용인 이씨 도사 덕민 녀
생년:1595년 1월 8일 선조28년 을미년(乙未年) 수77세
졸년:1671년 5월 28일 현종12년 신해년(辛亥年)
묘:예산 오원면 오리지 유좌원 동영 유 석물
◆예산파보 임술년(1862년)에 편찬한 임술보에
신수영의 묘는 예산 오원면 오리지 유좌원 으로 기록 되어있고
배 용인이씨 묘는 신수영과 합묘(同塋)로 되어있고 석물이 있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2002년에 발간한 영산 영월 신씨대동보에는
오리지 도사공 묘 상 유좌로 되어있다
도사공 묘 상의 묘는 누구의 묘일까?
특별한 사유가 없는한 예산 파조인 신후담(충익부도사)의묘 상에 도장을 할수는 없기 때문이다 신수영의 묘 일수도 있을까?신수영이 졸한 1642년 가족 상황을 보면
18세의 삼촌 항열은 모두 졸 하셨고 삼촌 신종술만 생존해 있었다
1641년(인조19년) 6월에 신종술은 백령첨사를 막 사직한 상태였다
19세 형제 종형제들도 거의 생존한 상태였고
19세 신계영은 1642년은 67세로 순천도호부사로 있을 때 였다
아무런 관직이 없는 무관이었던 후손이 고조부의 산소 위에 도장을 한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 불가능 할것 같다
그럼 누구의 묘일까?
도사공 위의 산소에 대해 만나는 일가 분들께 많이 문의해 봤는데 아시는 분이 안계셨고
오산리에 누대로 기반이 탄탄한 신용무에게 그 묘에 대해서 문의 해 보니 어려서부터 어른들 한테 그 묘는 옹주묘 라고 듣고 자랐다 한다
내가 나름 조사하고 판단하기에 그 묘는 17세 신현의 딸이 이모인 인빈김씨(선조의 후궁)에 의해 궁녀가 되고 광해군의 후궁이 된 숙원신씨가 있는데 광해군 폐위후 인조가 집권 했지만 인조가 이모 인빈김씨의 손자이기에 화는 면한것 같고 예산으로 귀향하여 여생을 마치고 졸 하신것 같다.숙원신씨는 후에 숙원에서 소원으로 가자가 된것 같고 집안에서 상의하여 묘자리를 정했을 텐데 그당시 첨사 관직에 있던 오빠 신종술과 순천도호부사로 있던 종손인 7촌 재종질 신계영이 높은 관직에 있었기에 이들에 의해 정해졌을 것같다
도사공 위의 산소는 소원신씨의 묘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현 상태의 석물을 보면 비석은 받침들만 남아있고 비문이 깨져 나갔는데 후대 누군가가 광해군의 후궁인 것에 불이익이 있을까 비문을 없앴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동자석을 세웠는데 동자석의 형태를 보면 꽃무늬가 선명한 치마를 입은 여자 동자석 이다 망자가 여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내가 보기에 숙원신씨 외에 도사공묘 위에 묘를 쓸수 있는 후손은 없어 보인다
19세 신필영(辛必榮)
1626년 1월 8일 인조 4년 병인년(丙寅年) 수75세
1700년 9월 2일 숙종26년 경진년(庚辰년)
配:김해 김씨
묘:청양군 화성면 도동
19세 신기영(辛起榮) →20세신유(辛濡)〓출계(出系)청양폭 신충보(辛忠寶)
19세 신태영(辛泰榮)
19세신두영(辛斗榮)
영산 영월 신씨 세계도
1 세 신경辛鏡
2 세 운민
3 세 영계
4 세 몽삼
5 세 각계 천계 현계 주계
6 세 백련 순현
7 세 희 극규
8 세 지화 공근
9 세 천덕재공파 혁초당공파 온부원군파 한판서공파 성렬상장군공파
10세 원경
11세예 부 순 귀
12세 유정
13세 인손
14세석조 계조 윤조 봉조 경조
15세복담 후담 서담 종담
16세 의정系子 준정 의정出系 세정
17세 진 흠 탁 현
18세 종원 종달 종일 종도 종수 종적 종괄 종술 종형
19세 계영 덕영 복영 효영 중영 준영 기영 대영 충언 충보 득영 수영 필영 기영 세영 자영 태영 두영
20세 엄 잠 연 보 지 약 절 황 찬 급 성 간 책 성 전 격 유신 재신 유 범 항 연 유 형 정 오 탁 옥 학
21세 보벽 원갑 의갑 성갑 영갑 형갑 두갑 여갑 익여 익한 익해 익박 익서 명호 대진우장
22세 수화 태화 이화 광일 광숙 광보 응화 성화 광화 상화 일 만희 삼징 원징 의한 석구 석규 석명 석하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