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신자들이 성경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고 복잡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한다. 구약성경은 특히 미지의 영역이 많다고 여긴다. 그러나 뎀프스터 교수의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읽는 구약신학』을 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뎀프스터 교수는 모형론적 관점에서 신약성경이 구약성경, 곧 ‘타나크’의 구조와 유사하다는 것을 밝혀놓고 있다. 이야기(복음서, 사도행전), 주석(서신서), 이야기(요한계시록)로 엮어진 것이 구약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구약과 신약의 구조적 유사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구분선 아래에서 확인해 보자. 성경에 대한 깊은 신학적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결론: 모형론과 신약 성찰
아담에서 다윗까지, 천지창조에서 세상에 새 생명을 주고, 신적 통치가 땅 끝까지 확대될 성전 건축까지, 족보와 땅, 왕조와 통치는 '타나크'의 이야기이며, 다윗의 집에서 누군가 나와 만물의 회복을 가져올 집을 세우기를 기다리면서 여전히 일종의 포로 생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다. 주석과 함께 줄거리로 제시되는 이 전체 메시지는 '타나크'가 잡동사니가 아닌 한 권의 책임을 보여 준다. 확실히 '타나크'는 많은 개별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본문들은 더 큰 본문의 일부다. 많은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다윗 왕조를 통해 세상에 대한 인간의 잃어버린 통치를 회복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것이며, 그 이야기는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
성경 이야기의 중요한 구조적 특징 중 하나는 모형론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많은 글이 쓰여졌고, 이 지면에서 모형론에 대해 상세히 다 다룰 수는 없다. 그렇지만 모형론이 사라지게 된 한 가지 확실한 요인은 성경 본문을 포괄적인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을 상실했기 때문이다(Frei 1974). 모형론적 특징들은 성경 본문을 하나의 큰 본문으로 이해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왕조와 통치의 쌍둥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특별히 더 분명해진다. 각각의 경우 보편적인 것에서 특정한 것과 특정한 것에서 다시 보편적인 것으로의 움직임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지만 그 과업에 실패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겨지는 이스라엘로 대체된다. 한 부족이 이스라엘 내에서, 한 가정이 그 부족에서 선택되고, 결국 한 개인 다윗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하지만 다윗과 그의 아들들의 실패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통치의 유익을 가져올 한 의로운 다윗 계열의 왕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통치는 모든 피조물을 대상으로 시작하고, 그런 다음 가나안 땅이 초점이 되며, 그런 후에 예루살렘 성전이 초점이 된다. 그리고 이 특정 장소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과 열방, 심지어 땅 끝까지 확대된다. 공간 및 시간적인 관점을 모두 제공하는 모래시계 이미지(참조, 그림 9.1)가 이런 발전을 전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야기(복음서, 사도행전), 주석(서신서), 이야기(요한계시록)로 된 신약이 구조적으로 '타나크'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록 마지막 책은 엄격히 말해 이야기가 아니지만 요한계시록은 복음서에서 시작된 줄거리를 결론까지 가져간다. 신약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포함하는 계보로 시작한다(마 1:1~17).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는 말로 시작함으로써 신약은 '타나크'의 시작과 결말을 예수님의 생애와 연결시킨다. 창세기와 역대기에서 아담, 아브라함, 다윗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특히 마태복음은 다윗의 조상들에 초점을 맞춘다. 마태복음의 계보는 아브라함에서 시작되며, 각각 열네 대로 이루어진 균등한 세 시대(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다윗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마 1:1~17])가 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숫자 '14'는 다윗을 강조하는데, '14'는 다윗의 히브리 이름의 숫자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포로 생활에 종결을 가져올 이스라엘 역사의 완성인 새로운 다윗이다.1) 그리고 예수님의 출생은 이방인들에게 빛을 가져다준다. 마태복음 2장 2절은 동방에서 떠오른 한 별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원수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민 24:17). 따라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할 때, 새 아담과 새 이스라엘로서 예수님은 옛 아담과 옛 이스라엘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한다(마4:1~11).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삶에서 아담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한다. 예수님은 원수 사탄에게 승리하고, 언젠가 온 땅이 영토가 될 하나님 왕국을 알린다. 그리고 이것은 고난받은 다윗 계열의 메시아가 높임을 받고 이스라엘 왕국뿐 아니라 온 세계의 권세를 부여받는 마태복음의 끝 부분에서 강조된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 영토로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명령한다(참조, 마 28:18~20; 단 7:13~14).
각 복음서는 강조점이 다르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다윗의 집의 두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왕조로 이해되는 다윗의 집이 오랫동안 고대해 온 후손으로서, 부활을 통해 다윗의 왕좌에 앉는 다윗의 후손이다(눅 1:32: 행 2:30~35).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한나의 예언적인 노래의 성취를 반영하는 이중창을 부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성전으로 이해되는 다윗의 집으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성육신화 되고 예수님에게서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는 샘솟는 강이 흘러나온다(참조, 요 2:19~22, 7:37~39; 겔 47:1~12).
이와 같이 예수님의 교회는 탑으로 땅과 하늘을 연결하려고 시도하는 인간의 교만에 의해서가 아닌 생명의 강수인 성령의 은사를 겸손하게 기다림으로써 먼저 형성된다. 그리하여 오순절은 바벨 사건을 뒤집어 놓고, 이 다윗 계열의 메시아가 열방 가운데서 잃어버린 조화를 가져올 것임을 보여 준다(행 2:1~21; 창 11:1~9). 다윗 왕조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부터 점점 더 많은 제자들의 무리가 유대에서 땅 끝까지 퍼져 나간다(행 1:8). 새 다윗에게서 새로운 '토라'를 배운 예수님을 믿는 무리는 산 위에 있는 동네 (마 5:14)가 되어, 칼을 보습으로 바꾸고 자신들의 선한 행위의 빛을 열방에 비추게 된다(21~48절).
'타나크'의 중반부에서 이야기 줄거리는 주석을 제공하기 위해 잠시 중지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약속하는 바벨론에서의 유다 왕의 방면이 마지막 역사적 언급이었다(왕하 25:27~30). 마찬가지로 신약의 중반부에서 줄거리는 바울 서신과 일반 서신이라는 주석에 의해 중단되는데, 이것은 새로운 바벨론(로마)에서 다윗 계열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급진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을 허락받은 포로에 대한 마지막 역사적인 언급이다(행 28:30).
이 이야기 줄거리에 대한 바울의 주석은 모든 열방으로 구성된 초기 교회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이며, 단지 한 나라가 아닌 전 세계가 교회의 기업이라는 것이다(롬 4:13). 시내 산은 긍정적인 방식으로 구원하기에는 힘이 없었지만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할 수 있는 구세주에 대한 필요를 강조한다. 예수님은 불순종한 자들을 위해 나무에 달리는 선고를 받는 순종적인 아들이다(참조, 갈 3:10~14; 단 21:18~23). 모든 열방과 민족으로 구성된 새로운 이스라엘이 등장하고 뱀을 정복하는 최후의 싸움이 이어진다(갈 3:28~29; 롬 16:20).
신약 끝 부분에서 요한계시록을 통해 '역사'가 다니엘서와 같은 방식으로 재개되는데, 요한계시록은 그 메시지에서 하나의 놀라운 파노라마적인 환상 속에서 '타나크'의 광대한 만화경 같은 마지막 날에 대한 환상들을 포착해 낸다. 인자가 있으며(계 1:13; 단 7:13), 인자의 입에서는 날선검이 나오는데(계 1:13; 사 11:4, 49:2) 인자는 촛대 사이에 있는 분(계 1:13; 슥 4장), 유대 지파의 사자(계 5:5; 창 49:9~10), 다윗의 뿌리다. 보좌에 앉으신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이 메시아이며 예수님의 죽음으로 종말은 이미 시작됐다. 포로 생활과 심판의 끝을 강조한 70주간은 새로운 세상 질서의 탄생에 필요한 과도기인 세 번의 칠중 재난에서 완성된다.
하지만 이 새로운 세상 질서는 모든 기대를 초월하는 질서다. 새로운 세상은 에덴동산의 이미지들을 반영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능가할 만큼 형언할 수 없다. '타나크'의 마지막 부분에 묘사된 성전은 여기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 양과 성도들이다(참조, 계 21:22).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오는데,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다. 이 생명나무들은 지속적으로 잎이 푸르고 그 잎들은 만국을 치료한다.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의 거대한 지성소가 되었다(참조, 렘 3:16~17). 그 결과 인간들은 마침내 그들이 잃었던 왕적 위엄과 권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이마에 새긴 채 "세세토록 왕노릇 할 것이다."(계 22:5). "여호와와 여호와의 백성은 함께 있고 한 몸이 된다”(Barth 1958: 315).
1) 에반스(Evans 1999: 99) 또한 이것을 제안한다.
[본문 속의 참고문헌 표기]
Barth, K. (1958, 1960), Church Dogmatics 3: The Doctrine of Creation, Parts One and Two, Edinburgh: T. & T. Clark.
Frei, H. W. (1974), The Eclipse of Biblical Narrative,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스티븐 뎀프스터, 박성창 역,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읽는 구약신학』(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pp. 299~303.
첫댓글 구약성경의 구조와 유사한 신약성경? 제목이 좋습니다. 신약과 구약은 연속성을 가지므로 구조에서도 유사점이 있을 것입니다. 좋은 폿,팅입니다.
네, 공감합니다.
타나크
타나크(히브리어: תַּנַ"ךְ Tanakh) 또는 유대교·유태교 성경(猶太敎聖經, 영어: Hebrew Bible)은 유대교 경전으로, 기독교의 구약 성경에 대응한다. 경전 이름인 '타나크'는 성경을 구성하는 세 분류명인 토라(תורה, 율법서), 네비임(נביאים, 예언서), 케투빔(כתובים, 성문서)을 늘여서 쓴 형태이며, 각 분류명 맨 앞글자를 따서 약칭 '타나크(תנ"ך)'가 되었다. 유대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이슬람교 경전으로도 인정하므로 학계에서는 중립적 용어인 '히브리 성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하 위키백과 링크 참조
https://ko.wikipedia.org/wiki/%ED%83%80%EB%82%98%ED%81%AC
히브리 성경이라고 하면 더 확실하겠네요.
@에이프릴 공감합니다.
모형론적 해석이란 무슨 의미인가요?
1. 모형론(typology, 유형론, 예표론)적 해석은 구약 성경의 역사는 진리가 그림자처럼 나타난 것이라 보는 해석을 말합니다. 즉 구약 성경의 그림자 같은 역사는 그 원형(原型)이나 구현이 신약성경의 계시에 나타난 것으로 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의 말씀, 사건, 인물 그리고 제도들은 모형들(Typen)로 간주되고, 그 모형들과 상응(相應)하는 것이 신약에 있다는 입장입니다.
2. 모형론적 해석은 이러한 모형(模型, Typos: 구약)과 원형(原型, Antitypos: 신약)의 대조를 통해 구원역사의 연속성을 살펴보게 됩니다. 어떤 학자는 극단적으로 구약의 모든 사건과 역사를 모형으로 해석하여 실제 역사를 무시하기도 합니다.
3. 모형을 나타내는 신약의 단어 튀포스(모형, 롬 3:14; 고전 10:6,11)는 16번 나타나는 데, 못자국(요 20:25), 형상(행 7:43), 표상(롬 5:14), 모형(히 8:5), 식(행 7:44), 본(롬 6:17; 빌 3:17; 살전 1:7; 살후 3:9; 딤전 4:12; 딛 2:7; 벧전 5:3), 거울(고전 10:6) 등으로 번역되고,
, 스키아(그림자, 골 2:17; 히 8:5; 10:1), 휘포데이그마(사본, 히 8:5; 9:23), 세메이온(표적, 마 12:39), 파라볼레(비유, 히 9:9; 11:19) 등과 같은 용어들도 있습니다. 모형론을 폭넓게 보아 알레고리의 영역에 넣어 다루려는 학자들도 일부 있기는 합니다. 확대 해석하면 그렇게 볼 여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엄격히 구분하면 약간 그 성격이 서로 다르므로 구별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4. 모형은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신 것(예를 들어 노아 홍수 사건과 소돔성의 롯의 때를 인자의 재림 사건에 대한 모형으로 언급한 누가복음 17장 26-30절을 참조할 것)이므로 연구 가능한 해석 모델입니다. 다만 모형론 해석이나 연구를 하려면 다음 몇 가지를 먼저 잘 숙지해야 합니다.
첫째, 신약성경에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모형과 오늘날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모형을 구분할 것
오늘날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모형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이나 바울 등이 분명하게 모형이라고 말하는 것과 학자들이 임의적으로 모형이라 말하는 것을 구분해야 혹시 발생할 지도 모르는 그릇된 해석을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 교리와 관련된 모형과 교리와 상관없는 모형을 구분할 것
요나가 큰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난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부활의 모형임을 예표해주셨습니다(마 12: 40). 하지만 요나가 육지에 다시 선 것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팔레스틴)에서 회복 될 것이라는 예표로 쓰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마 24:32) 말씀하셨다고 무화과를 이스라엘로 해석하고 이스라엘이 독립한 1948년에 50년 희년을 더하여 1998년을 종말로 해석한 것도 그릇된 적용이요 해석입니다. 무화과 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만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알레고리적 요소를 담고 있으므로 이것을 단순하게 신약 시대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알레고리로 해석하면 엉뚱한 시한부 종말론 교리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마태복음 24장의 예수님 말씀은 종말의 때를 잘 분별하라는 말씀이지 시한부 종말론의 날짜를 계시하려는 의도가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셋째, 모형에도 핵심적인 것과 부차적인 부분이 있음을 명심할 것
너무 지엽적인 주장을 핵심적인 것으로 몰고 가면 성경 해석의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부차적인 부분을 핵심적인 것으로 집착하는 실수도 조심해야 합니다. 일부 이단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 본질적 핵심과 부차적 부분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넷째, 완전히 성취된 모형도 있고 부분적으로 성취된 모형도 있으며 미래 또는 내세에 이루어질 모형들(주로 요한계시록 예언들)도 있음을 명심할 것.
다니엘서 2장에 나타난 열 발가락을 과거 일부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EC 공동체 10개국으로 해석하여 이 내용을 종말론적으로 성취된 것으로 오해한 것은 잘못 해석한 대표적인 경우이지요.
5. 과거 일부 사람들이 모형 해석을 확대 적용하여 그릇된 성경 해석으로 나아가는 바람에 모형 해석에 대한 일부 반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모형적 요소가 있음을 분명합니다. 다만 모형에 대한 바른 해석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성경 전체가 모형론으로 해석될 수 있는 책도 아닙니다. 일부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학문인 신학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대두 됩니다. 과거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던 이단들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성경 해석의 중심을 잡아 준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탁월한 신학자들이었습니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조직신학)
@장코뱅 모형론에 대한 좋은 소개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객관적인 시각의 좋은 글이네요.
@코람데오 그렇군요. 저도 잘 읽어 보겠습니다.
"새로운 세상은 에덴 동산의 이미지들을 반영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능가할 만큼 형언할 수 없다." -->
벌코프 왈 계시는 점진적이고 발전적이라고 했는데요. 구약과 신약에는 연속성이 있지만 신약에서는 더 발전합니다.
좋은 포스팅이고 원글이 참 충실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