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속에는 나무가 산다
이필선
파란시선 0150
2024년 11월 10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20쪽
ISBN 979-11-91897-89-0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길에서 희망을 가졌던 사람은 위험하다
[그늘 속에는 나무가 산다]는 이필선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으로, 「김치에게 들키고 싶은 날」 「상어는 움직이지 않으면 물에 가라앉는다」 「그늘 속에는 나무가 산다」 등 57편이 실려 있다.
이필선 시인은 충청북도 보은에서 태어났으며, 2010년 [시인정신]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그늘 속에는 나무가 산다]를 썼다.
이필선의 시들은 누구에겐가 조근조근 들려주는, 감성이 풍부한 사춘기 시절의 편지 같다. 그것은 그의 시가 산문 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적 감성과 감수성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시는 스스로를 드러내기보다는 그늘 속에 조용히 숨긴다. 이러한 시인의 성품을 ‘그늘로서의 에토스’라고 명명할 수 있겠는데, 시인이 품고 있는 고유한 성품인 에토스는 의식과 무의식을 통해 그의 삶 속에 내밀히 새기는 나이테와 같은 것이다. 이필선의 시가 전반적으로 울림이 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의 시의 최대 강점은 관념적이지 않고 철저히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불우한 타자에 대한 연민과 척박한 삶에의 리얼리티는 그의 섬세한 감수성과 만나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전해 준다. 그의 시는 현실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 시이면서도 건조하거나 경직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그의 시가 어긋나거나 부조리한 현실에 걸맞은 풍부한 상상력과 비유, 언어 표현을 균질감 있게 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 박남희 시인・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버드나무, 배롱나무, 목련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대추나무 그리고 주목나무…… 이필선의 시는 온통 나무들로 은성하다. 그런데 그 나무들은 하나같이 “그림자조차 만들지 못한 삶을 세워 놓고” “시작도 끝도 없는 동그란 흉터”로 어루러기져 있다(「서시」). 사람으로 치자면 어느 “홀아비”처럼 그리고 그와 함께 떠난 “애 딸린 과부”처럼(「소문」), 또는 어느 “외진 곳 공중전화 부스에 송화기를 손으로 막고/가늘게 어깨를 떠는 비구니”처럼(「비거스렁이」), 혹은 “좌판도 없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노점상 노파처럼(「노점상」), “파스 냄새가 나는 어머니”처럼(「김치에게 들키고 싶은 날」), “그믐달처럼 누워 천천히 가라앉”은 어느 배송 기사처럼 말이다(「상어는 움직이지 않으면 물에 가라앉는다」). 물론 흉터의 연원은 모두 다르겠지만 그런데 이 “몸의 흔적들”은(「양수리에서」), 놀라워라, 시인의 눈길이 닿는 순간 그 하나마다 “꽃잎이 앉았던 자리”로 화한다(「삶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옮기자면 “상처는 꽃의 모습을 닮아 가고 있었다”(「우울한 갈증」). 그러니 이렇게 말해도 되지 않겠는가. 흉터는 다만 상한 자리 혹은 상처가 아문 흔적이 아니라 그곳이 바로 지금 꽃이 피어나는 곳이라고, 아니 실은 흉터가 다름 아닌 꽃이라고. 시인이 “기억이 얼마나 많은 망각을 키우는지” 경계하는 까닭도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고백―작은딸 민솔에게」). 시인이 행간 도처에서 행하는 ‘기억하기’는 선택과 배제의 책략이 아니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오래된 사진」) 즉 생의 본질을 구축하고자 하는 충실성의 실천이다. 비유컨대 그것은 “텅 비어 있는 저 심연 속으로 빨간 등”을 “다시” 켜는 일이다(「정암사 주목나무」). 그 심연마다 흉터마다 꽃이 핀다. 시가 맺힌다. 참 아슬아슬한 시경(詩境)이다.
―채상우 시인
•― 시인의 말
죽음을 앞서 보지 못한 삶이
지쳐 헤매는 저 길들 속에 꽃이 지는 날
머리에 꽃을 꽂고 꽃이 되어 버린 봄날
길.었.다.
허공에 뿌려진 햇살 사이로
못 견디게 설레고 있는 바람이 불고
강에 부딪힌 햇살이 아프게 찔러 올 때
투명한 공기의 무게가 출렁였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계절 속
허기진 풍경이 나를 어떻게 진화시켰는지 안다.
절반이 바람으로 채워져 매달려 있는 공간
무엇을 건드리며 살았을까.
봉인된 걸어온 길들을
이제야 조심스레 풀어 본다.
•― 저자 소개
이필선
충청북도 보은에서 태어났다.
2010년 [시인정신]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그늘 속에는 나무가 산다]를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서시―흉터 – 11
양수리에서 – 12
아이를 찾습니다 – 14
소문 – 16
비거스렁이 – 17
뒷골목 – 18
노점상 – 20
김치에게 들키고 싶은 날 – 22
부음 – 24
사라진 여인 – 26
와이어 브래지어 – 28
홋줄 – 30
행주대교 – 31
무거운 기다림 – 32
물수제비 뜨다 – 34
제2부
개심사 가는 길 – 37
유월 – 38
화정역 – 39
주차장 – 40
우울한 갈증 – 41
이력 – 42
상어는 움직이지 않으면 물에 가라앉는다―배송 기사의 죽음 – 44
이별 – 46
장마 – 47
여름의 끝 – 48
송년회 – 50
허공에는 길이 있다 – 52
삶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 54
제3부
정적 – 57
안부가 궁금해지는 계절 – 58
개기월식 – 60
하품 – 62
환상통 – 63
무지외반증 – 64
아버지 – 66
고백―큰딸 한솔에게 – 70
고백―작은딸 민솔에게 – 72
오래된 사진 – 75
CCTV – 76
돌아가다 – 78
꽃다발 – 79
기억의 어두운 부분 – 80
제4부
폐역 – 83
쇼펜하우어가 궁금해지는 밤 – 84
쇼펜하우어가 떨어진 길 – 85
쇼펜하우어가 떨어진 저녁―마네킹 – 86
오후 세 시 – 87
그늘 속에는 나무가 산다 – 88
유리창 – 90
입동 즈음 – 91
침대에서 깨다 – 92
오래된 기억에는 윤곽이 없다 – 93
뱀 – 94
겨울 풍경 – 96
자화상 – 97
정암사 주목나무 – 98
해설 박남희 그늘로서의 에토스와 사랑의 파토스, 혹은 윤리적 앙가주망의 시학 – 99
•― 시집 속의 시 세 편
김치에게 들키고 싶은 날
1
첫돌 지날 무렵
딸애가 여린 관절로 스스로 서려 했다
이윽고 힘이 드는지 엉덩이를 빼고 앉는다
걸음마 시킨다고 발등 위에 올려놓는다
내가 앞으로 가면 딸들은 뒷걸음질을 배우고
내가 뒤로 가면 딸들은 앞걸음을 배웠다
그때부터 뒷걸음질하는 인생이 생겼다
봄이 느린 속도로 지나가고 있다
2
내가 운전하는 동안 뒷좌석 셋은 마냥 즐겁다
항상 귀는 그들을 향해 열려 있으면서
끼어들기 힘든 차선처럼 번번이 놓쳐 버리는 대화
열리는 것도 문이고 닫히는 것도 문이었다
백미러로 보이는 딸을 아내를 발등에서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틈 사이로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밤비 내리는 정거장에 내린 적이 있다
전화를 하고 싶어도 정거장까지 거리가 멀어
홀로 길을 끌고 집에 걸어간 적이 있었다
적막은 꼭 산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자리에 있으면서 흘러가는 풍경이 있다
휘어진 시간 속에
파스 냄새가 나는 어머니 김치가 먹고 싶은 날이고
혼자인 것을 그 김치에게 들키고 싶은 날이다 ■
상어는 움직이지 않으면 물에 가라앉는다
―배송 기사의 죽음
1
돌아갈 길이 너무나 굽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녹슨 시간 속에 나사못이
헐거워지고 있었다
공원 벤치 틈새로 흘러가는 뿌리에
누군가 구토를 해 놓았고
비둘기가 쪼아 먹고 자면서 울고 있다
가시같이 까매서 너무나 까매서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르는 그녀의 삶이 있었다
차에 실린 시간으로 까만 김밥을 먹다가
그믐달처럼 누워 천천히 가라앉았다
어둠은 무게가 없었다
2
사람이 필요해서 사랑한 여인이
어둠 속 흰빛 속에 누워
심전도 기계음으로 살아 있다
그녀의 이름은 상처였으므로 그들은 밤마다 헤어졌고
채찍처럼 살아 있는 심전도 그래프는 그를 밤마다 때렸다
심장에서 사라진 기다림이
청구서 종이로 되살아나는 밤
감은 눈 속으로 캄캄한 소금물이 밀려왔다
그믐달 같던 그래프가 비명과 함께 펴지고
그녀의 몸이 해저에 닿았다 ■
그늘 속에는 나무가 산다
풍경은 채워진 것이 없으면 헐겁다
태양이 만들어 낸 풍경은 그늘을 가지기 마련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는
빛은 그림자를 보지 못한다
드러난 것은 언제나 시간이 지나간 모습이다
항상 그늘은 생각을 품고 있다
생각은 빛에 말리는 것보다 그늘에 말려야 한다
그림자는 낮은 곳에 있고 슬픔은 그림자 곁에 있어 당당하다
꽃들이 자기 씨앗을 만드는 계절이다
나팔꽃과 분꽃이 서로 곁을 주지 않는 것은
노을이 저렇게 낮은 자세로 풍경을 가득 채우기 때문
낮과 밤이 포옹하는 것은 서로 겹치지 않기 때문이다
술병들이 취해 쓰러지는 저녁
아직 골목길에는 떠난 사람이 없고
저녁이 그늘을 지우며 어둠이 되어 발바닥에 닿았다
보이지 않는 것에 안도한다
익숙해지지 않아도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