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4
선거철 ‘득표 극대화’ 노린 돈 살포 심각… 재정중독증, 코로나 이후 만성화
매표 행위로 국가채무 급증… ‘착한 부채’내세워 국민 현혹하지만 非기축통화국은 나랏빚 수준 낮아도 위기에
역대 최대 수준의 ‘신용 갭’·자본 공동화·양극화 불러… 재정준칙 도입해 통제 시스템 구축해야
608조 원에 달하는 슈퍼예산 집행을 시작한 지 보름도 안 돼 편성된 추가경정예산안이 지난 20일 2조9000억 원이 추가된 채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6·25전쟁 이후 70여 년 만에 긴급한 상황에서 편성한다는 2월 추경은 큰 우려를 자아낸다.
여당은 한술 더 떠 대선 이후 2차 추경도 추진하고 필요하다면 긴급재정명령도 동원하겠다고 나왔다. 날치기 통과를 막으려고 추경에 합의했다는 야당도 재정지출을 더 늘려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어 보인다. 이쯤 되면 ‘재정중독증’이라는 병적 증상을 넘어 매표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대선을 맞아 뒷일은 모르겠고 일단 이기고 보자는 전형적인 정치권의 ‘득표 극대화(vote maximizing)’ 전략이다. 매번 지켜지지도 못하는 재원 조달 방안을 내놓고 공약을 남발한 후과(後果)는 국가채무 증가이다.
◇ 국가채무 급증
원래 정부가 작성한 ‘2018~2022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올해의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39%(당시 기준 41.6%)였다. 올해 예산안(추경 포함) 상의 50.1%와 비교해보면 11%포인트 이상 늘어난 것이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추정한 동기간 동안 코로나19 대응 추가 재정지출 규모가 GDP의 5%포인트 이하임을 감안한다면 문재인 정부가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국가채무는 문 정부 5년간 415조 원 이상 증가해 올해 1075조 원을 넘어설 전망이며 통합재정수지는 2019년 이후 연속 3년간 적자를 기록했다.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도 2020~2024년 기간 연평균 4.2%포인트 증가하는 것으로 예측되는데, 1997~2019년 기간 연평균 1.2%포인트와 비교할 때 3배 이상으로 높은 수준이다.
가장 걱정되는 점은 과거 외환위기와 같이 위기 상황에서만 잠시 용인됐던 높은 재정적자가 코로나19 이후에는 아예 만성화한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착한 부채’나 ‘선진국 절반 수준의 국가채무비율’이라는 주장이 국민을 현혹하고 있다.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한국은 주요 선진국에 비해 아직 고령화 수준이 낮고 복지 지출 수준이 낮은 가운데 세계 최고 수준인 고령화 속도에 직면하고 있다. 일반정부 부채(D2)를 넘어 연금충당부채를 포함한 총부채(D4)를 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더욱이 한국과 같은 ‘비(非)기축통화국’의 경우 국채 발행에 대한 수요가 훨씬 적어, 주요 선진국보다 낮은 국가채무 수준에서도 위기 대응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 ‘득표 극대화’ 전략
국가채무의 급증은 정치권이 선거철을 맞아 강력한 ‘득표 극대화’ 전략을 구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재정지출을 늘려 경기가 진작되면 세수도 늘고 재정 건전성이 개선된다는 가정도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여러 실증 연구의 결과다. 김소영·김용건(2020)의 연구에서도 재정지출 승수를 0.6~0.7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대체로 재정 승수는 1보다 작은 경향이 있고, 소득 증가 대비 세수 증가도 1보다 훨씬 작다. 따라서 재정정책의 효과는 매우 제한적이다.
한편에서는 적자 보전 국채 발행과 재정 여력 소진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크다. 근본적으로 변화된 재정 환경 속에서 새로운 차원의 위기론도 대두한다.
원자재 가격 상승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과 같은 지정학적 요인, 글로벌 물류난 등 삼각 파고로 재정 환경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이미 지난해부터 선진국들은 절약 모드로 들어갔으며 특히 올해에는 많은 국가가 긴축예산을 편성하고 있는 데 비해 한국은 여전히 확장적 재정지출구조를 갖고 있다. 한국이 일본과 같은 선진국 함정에 빠질 여러 징후가 있는 데도 그렇다.
GDP 대비 민간 신용 비율이 장기 추세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를 측정하는 지표인 ‘신용 갭(Credit-to-GDP gap)’은 지난해 1분기 말 18.3%포인트로 1972년 통계 작성 이후 역대 최대 수준이다. 국제결제은행(BIS)의 경보단계 기준인 10%를 넘는다. 비기축통화국이 재정 지원이 어려울 때 대체 수단으로 발권력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다. 해외주식투자 열풍으로 해외주식 투자액이 2017년 14억 달러에서 2021년 218억 달러로 급증한 가운데 제조업의 공동화 같은 ‘자본 공동화’ 우려도 있다.
◇ 불평등 심화
과도한 국가채무는 불평등의 문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금리 인상과 자산 거품 붕괴로 생존을 위한 구조조정에 내몰리게 되는 계층은 주로 재무 건전성이 약한 경제적 약자들이다. 반면에 재력이 있는 투자자들은 저렴한 가격에 자산을 매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돼 부를 더 키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재정지출 확대로 국가부채가 급증해 한국의 가산금리가 높아진다면 결과적으로 경제적 약자의 살림을 피폐하게 하고 양극화로 인한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도 있다.
더욱이 최근에 국제 신용평가회사들과 글로벌 금융회사들은 한국의 국가와 가계, 기업의 부채 문제를 매의 눈으로 관찰하는 중이다. 국제통화기금도 한국에 대해 재정 건전성을 강화할 것을 권고하고 나섰다. 국가채무비율의 상승 전망이 신용등급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재정 건전화를 위한 향후 재정정책 기조의 변화가 강력히 요구되는 가운데 재정 당국은 암묵적인 기준 아래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코너에 몰린 기획재정부가 국가재정법 개정을 통해 중장기적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한 ‘한국형 재정준칙’을 도입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지만 정부 발의 법안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 재정준칙 도입돼야
재정준칙 도입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의 문제다. 정책 당국이나 국회는 전문가들이 여러 방법으로 제안해온 재정준칙제도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 극단적인 재정 위험 상태를 막기 위해 주요 재정지표의 한도와 기준을 법으로 명시해 관리하자는 것이다.
늘어난 국가부채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재정준칙 도입을 통해 통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장기적으로는 증세에 토대한 세입 확충을 도모해야 한다. 3·9 대선 후 들어설 차기 정권은 대통령직인수위에 국가 재정 위기 타개를 위한 태스크포스라도 구성해 재정 악화를 막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최종적인 수단은 재정이다.
이인실 / 서강대 교수, 전 한국경제학회장
문화일보
■ 세줄 요약
국가채무 급증 : 국가채무는 문재인 정부 5년간 415조 원 이상 증가해 올해 1075조 원을 넘어설 전망. 통합재정수지도 2019년 이후 연속 3년간 적자. 정부가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하기 어려워.
정치권의 ‘득표 극대화’ : 정치권은 ‘재정중독증’을 넘어 선거철을 맞아 강력한 ‘득표 극대화’ 전략을 구사 중. 하지만 공약 남발의 후과(後果)는 국가채무 증가임. 이는 역대 최대 수준의 ‘신용 갭’을 만들어내고 있음.
재정준칙 도입돼야 : 과도한 국가채무는 자본 공동화를 부르고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최종적인 수단은 재정임. ‘재정준칙 도입-통제 시스템 구축-증세-세입 확충’의 재정 대책이 나와야 함.
■ 용어 설명
‘득표 극대화’ 전략이란 정당·후보자가 투표자의 효용 극대화 행태에 맞춰, 공익보다는 득표에 유리한 정책을 앞세워 추진하는 전략. 앤서니 다운스가 제시한 유권자 이익 맞춤형 전략 모델.
‘재정준칙’은 국가채무 등 재정지표가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정한 규범. 기준을 넘으면 국가가 재정 건전화 대책을 마련해야 함. 한국은 몇 해 전 도입을 추진했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