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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본주의 탄생
애덤 스미스
근대는 ‘자본주의’와 함께 시작되었다. 자본주의란 생산 수단을 가진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의 노동력을 사서 생산 활동을 함으로써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 구조, 또는 사회 제도를 말한다. 그렇다면 자본가와 노동자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공장에 간 애덤 스미스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1)(1723~1790)는 당시 번창하던 핀 공장을 방문한 뒤, 그곳에서 받은 충격을 1776년 발간된 《국부론》에서 이렇게 썼다.
핀 만드는 일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노동자는 제아무리 노력해도 하루에 핀 20개는커녕 단 1개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핀 제조업은, 한 사람이 철사를 가져오면, 두 번째 사람이 그것을 바르게 펴고, 세 번째 사람은 그것을 자르고, 네 번째 사람은 그 끝을 뾰족하게 만들고, 다섯 번째 사람이 핀 머리를 붙이기 쉽게 다른 쪽 끝을 갈아 내어 만든다. 핀 머리를 만드는 공정도 몇 단계로 나뉘어 있고, 핀과 핀 머리를 붙이고, 색을 칠하고, 포장하는 과정도 다 나뉘어 있다. 결국 핀 하나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18회의 세부 작업을 따로따로 분담시킨다. 이렇게 하여 이 공장에서는 노동자 한 사람당 평균 4,800개의 핀을 생산하고 있다.
단지 일을 나누어 맡는 것만으로 능률이 이토록 향상되다니, 그야말로 마법 같은 일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분업이야말로 나라의 부를 키우는 원천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렇다면 분업을 통하여 이런 마법을 실현한 공장들은 도대체 누가 세운 것일까? 그리고 그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또 어떤 사람들일까?
2) 부르주아지, 근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다
공장을 세우고 운영한 사람들은 바로 ‘부르주아지’들이었다. 이들은 신항로 발견으로 전 유럽이 흥청거리던 때를 틈타 장사와 무역에 나서 큰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공장을 세운 사람들이다. 원래 낮은 신분이었지만 돈을 벌어 귀족 못지않게 떵떵거리게 된 사람도 있었다.
부르주아지들은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낡은 전통에 매달려 있던 귀족들을 비웃었을 뿐 아니라, 여전히 땅에 묶여 사는 농민들도 한심하게 여겼다.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수공업 작업장을 인수하여 대규모 공장으로 만들고, 분업의 이익을 일찌감치 알아차린 것도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생산한 물건이 팔리지 않는다면 분업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부르주아지들에게는 시장이 필요하였다. 식민지는 그런 점에서 너무나 소중한 시장이었다. 모직물, 총과 대포 같은 유럽의 공업 상품이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 마구 뿌려졌다. 부르주아지들에게 종잣돈을 제공하였던 식민지가 이제는 거대한 시장이 되어 유럽을 살찌웠다.
부르주아지들은 나날이 부유해졌고, 공장은 계속 커져 갔다. 커져가는 공장에서는 갈수록 더 많은 일손이 필요하였다.
커피하우스의 부르주아지라틴아메리카에서 들어온 커피가 유럽에서 크게 유행하면서 도시 곳곳에 커피하우스가 생겨났다. 커피하우스는 새로운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들의 정치 토론도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3) 공장의 등장
동그라미 속의 그림은 중세의 수공업 작업장을 나타낸 것이고, 아래 큰 그림은 분업이 시작된 18세기의 한 놋쇠 가공 공장의 모습이다. 분업은 자본주의적인 대량 생산의 물꼬를 텄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본격적인 공장제 기계 공업은 산업 혁명 이후에나 가능하였다.
양에게 잡아먹힌 농민, 노동자가 되다
커져 가는 공장의 일손이 된 것은 농촌에서 쫓겨난 농민들이었다. 가난해도 평화롭던 영국의 농민들은 어느날 갑자기 눈물을 삼키며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하였다. 지주들이 집을 비우고 떠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농사짓던 땅도, 가축을 기르던 풀밭도, 땔나무를 구하던 숲도, 이제 모두 울타리가 쳐져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그 울타리 안에서는 양들이 풀을 한가로이 뜯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16세기 영국에서는 양털을 원료로 하는 모직물 산업이 번성하고 있었다. “양의 발은 모래를 황금으로 만든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직물 산업은 큰 이익을 보장해 주었다. 그에 비하여 농민에게 땅을 빌려주고 얻는 수입은 보잘것없었다. 땅을 가진 사람들은 더욱 큰 이익을 가져다 주는 양을 기르기 위하여 그곳에 살던 농민들을 쫓아냈다. 그야말로 ‘양이 사람을 잡아먹은’것이다. 농업 공동체를 파괴하는 이런 ‘울타리 치기(인클로저 운동)’는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대대로 부쳐 먹던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하였지만 대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이들은 먹고살 길을 찾아 떠돌아다녔다. 나라에서는 ‘구빈법’, 즉 가난한 사람을 구하는 법을 만들어 이런 부랑자들을 작업장에 몰아넣고 강제로 일을 시켰다. 사람들은 이제 규율과 강제에 익숙해져야만 하였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도시의 공장은 농촌처럼 여유로운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로 부르주아지들이 세운 공장에서 최소한의 임금을 받으며 지루한 반복 노동을 견디는 노동자들이 되었다.
영국의 노동력 구성1810년대를 분기점으로 농업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광공업 인구의 비중이 크게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자본주의의 성
여러분은 혹시 우리의 소비 생활이 과거에 비해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먼저 과거에는 해외여행을 통해야만 접할 수 있었던 각국의 음식을 길거리에서 쉽게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좋아하는 영화를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 하나로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는 온라인 쇼핑몰에서 전날 밤에 주문한 상품이 새벽에 도착하는 것도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 성장에 따라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상품이 다양해지고, 우리의 소득 수준이 높아져 다양한 상품을 보편적으로 소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와 경제 성장
인류 역사를 통틀어 세계 경제는 장기적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어 왔습니다.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과거의 경제 통계를 추정하는 매디슨프로젝트(Maddison Project)에 따르면, 세계 경제는 산업 혁명으로 인한 산업화(Industrialization)*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19세기 초반을 기점으로 빠른 성장을 시작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20세기 중반 이후의 세계화(Globalization)**를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에는 근대 이후 주도적인 경제 체제로 자리잡은 자본주의(Capitalism)가 있었습니다
그림 1 1인당 국내 총생산(GDP)의 변화(1820~2018년)
주: 2011년의 미국 달러화 기준으로 측정되었으며, 국가 간 생활비 차이와 물가 상승을 고려해 조정됨.
출처: 매디슨프로젝트
용어 정리
* 산업화
(Industrialization)농업 위주의 경제에서 제조업, 기계화, 분업화를 중심으로 한 경제로의 전환을 의미함. 기술 혁신, 생산성 증대, 대규모 도시화 등 경제나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를 야기함.** 세계화(Globalization)국제 무역의 확대, 자본 및 노동의 국제적 이동 증가, 다국적 기업의 역할 확대 등을 통해 국가 간 상호 의존성이 커지는 현상으로 볼 수 있음.*** 고전적 자유주의
(Classical Liberalism)17세기 이후 서구에서 발전한 사상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강조했으며, 현대 서구 사회의 법·정치적 체계에 큰 영향을 미침.
교육과정
·고등학교 「통합사회」 시장 경제와 금융
그렇다면 자본주의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는 경제 주체 간의 거래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경제 체제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에 필요한 생산 수단(토지, 공장, 기계 등)을 정부가 아닌 기업이나 개인이 갖고 관리하며, 시장에서의 경쟁과 이에 따른 혁신을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경제학의 발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 왔습니다.
경제학의 태동과 자본주의
애덤 스미스
(1723 ~ 1790)
사회의 이익은 누군가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더 효과적으로 증가한다. 나는 공공의 이익을 위하는 척하는 이들이 큰 선을 행한 경우를 거의 알지 못한다.
- 애덤 스미스(Adam Smith), 『국부론』(1776) 중
자본주의가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존재하지만, 흑사병이 유행한 14세기에 많은 소작농이 경제적 자유를 얻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대표적입니다. 이후 자본주의는 새로운 학문으로 등장한 경제학의 영향을 받아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는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 사상을 경제적으로 해석해 고전학파 경제학(Classical Economics)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들은 상품의 생산과 소비, 분배는 시장에서 자유롭게 결정된 가격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 정부의 시장 개입을 부정적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우리가 풍요로운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이 자비롭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라는 애덤 스미스의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이후 고전학파 경제학은 신고전학파 경제학(Neoclassical Economics)으로 계승되었습니다. 신고전학파 학자들1)은 수학적인 방법론을 접목해 경제학이 사회 과학으로 나아가는 데 기여했습니다.
여러 국가들은 법과 제도를 통해 경제학의 이론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개인이나 기업의 이익 추구 행위는 정당하게 여겨졌고, 정부는 이들의 경제적 자유가 보장되도록 최소한의 역할만 수행하려 했습니다. 또한 국가 간의 무역이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관점에서 세계적으로 무역이 확대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영국은 외국에서 수입되는 농산물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던 곡물법을 폐지(1846년)해 무역 장벽을 낮추었고, 특허법을 개정(1852년)해 창작의 권리를 보장하고 기업의 혁신을 유도했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국가가 자본주의를 도입했고, 이는 곧 세계 경제의 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1) 대표적인 학자로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 레옹 발라스(Léon Walras), 윌리엄 제번스(William Jevons) 등이 있음.
자본주의와 정부 역할의 확대
존 메이너드 케인스
(1883 ~ 1946)
(기존 경제학의 이론을 비판하고 정부의 단기적인 개입을 주장하며) 장기적 관점은 현실의 문제를 잘못 이해하게 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화폐개혁론』(1923) 중
그런데 이러한 접근 방식이 현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1929년에 미국에서 일어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많은 기업이 도산해 뉴욕 증시가 80%가량 폭락하고, 전체 미국인 중 25%가 일자리를 잃어 소득이 감소하는 등 미국 경제가 급격히 침체되었고, 이는 세계 경제의 불황으로 이어졌습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대공황이 일어난 원인으로 과도한 공급에 비해 수요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목하며, 기존의 경제학 이론과 달리 시장이 불황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케인스의 주장을 반영해 뉴딜(New Deal)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당시 미국 정부는 기업이 지나치게 많이 생산하지 않도록 관리하고, 실업을 줄이고 근로자의 소득을 늘리기 위해 대규모 공공 사업을 실시했습니다. 또한 취약 계층의 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사회 보장법을 확대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단기적인 경제 회복을 통해 대공황의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경제학자들 사이에는 시장이 만능이 아니며 정부의 시장 개입이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생겨났습니다. 케인스 이후 자본주의는 시장의 자유와 정부의 개입을 함께 추구하는 수정 자본주의(Modified Capitalism)로 변화합니다.
신자유주의 사상의 확산과 세계 금융 위기
밀턴 프리드먼
(1912 ~ 2006)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하나이며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게임의 규칙, 즉 속임수나 사기 없이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에 참여하는 한도 내에서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자원을 사용하고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자본주의와 자유』(1962) 중
한편 정부가 직접 나서서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케인스의 방식에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나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학자들은 케인스의 방식이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시장을 왜곡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들은 현실의 시장이 이론과 달리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경제 문제는 시장을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시장에서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통해 시장의 질서를 회복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사상으로 정립되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사상은 1980년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정부와 영국의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 정부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들은 시장이 스스로 작동할 수 있도록 정부의 규모를 줄이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쳐 나갔습니다. 규제를 줄이고, 공공 사업을 민영화하고, 고소득층과 기업에 부과하는 세금을 줄였습니다. 또한 개인의 책임과 자립을 강조하며 복지 정책을 축소하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국가에서 신자유주의 사상이 정책에 적극적으로 도입되었고, 이는 20세기 후반 세계 경제의 성장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림2 미국의 부동산 시장으로부터 시작된 세계 금융 위기(The Great Recession)
그런데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접근 방식에 한계가 있다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공황 이후 가장 심각한 경제 위기로 여겨지는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The Great Recession)2)로 나타납니다. 세계 금융 위기가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많은 이들은 미국 정부가 시장을 지나치게 신뢰한 나머지 시장에 대한 관리·감독을 소홀히 해 위기가 발생했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미국의 부동산 시장이 과열된 상황에서 부채를 상환할 수 없는 부실 대출이 누적되고 있었는데, 부동산 가격이 갑작스럽게 하락하자 대출을 회수하지 못한 금융 기관들이 연쇄적으로 도산했습니다. 이로 인한 위기는 곧 미국과 경제적으로 가까운 다른 국가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대공황으로부터 약 80년이 지난 뒤에 역사가 다시 반복된 것입니다. 세계 금융 위기는 신자유주의적 접근 방식을 돌아보고, 자본주의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
지금까지 알아본 것처럼 과거의 자본주의는 주로 시장과 정부의 관계를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 관한 최근의 논의는 그 이상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사회·문화적 가치와 규범, 역사적 배경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보는 한편, 지속 가능성의 관점에서 자본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저자인 대런 애쓰모글루(Daron Acemoglu)와 제임스 로빈슨(James Robinson)은 정부와 제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들은 제도를,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경제적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며 혁신을 장려하는 포용적 제도(Inclusive Institutions)와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를 착취하며 경제적 기회와 자원을 독점하는 배타적 제도(Extractive Institutions)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경제 발전과 불평등 해소를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포용적 제도를 지향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들이 언급한 포용적 제도의 예시로는 평등한 기회의 보장, 법에 의한 권리의 보호, 독과점의 방지와 공정한 경쟁의 보장, 포용적인 정치 체계의 구축, 사회적 안전망의 강화 등이 있습니다.
한편 ‘이해관계자 이론‘으로 유명한 경영학자 로버트 에드워드 프리먼(Robert Edward Freeman)은 기업의 역할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프리먼은 기존의 주주 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 체제 하에서 기업이 주주 또는 투자자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을 비판하며, 기업이 주주나 투자자 외에도 임직원, 고객, 협력 업체, 지역 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를 지향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를 촉진했으며, 기업이 단기적인 이윤 추구를 넘어서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더 큰 사회적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는 인식으로 이어졌습니다.
표 주주 자본주의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출처: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과정을 통해 변화해 왔는지를 알아봤습니다. 그동안 자본주의는 경제학에서의 논의와 인류가 역사적으로 경험해 온 사건들을 통해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해 왔습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이러한 흔적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류는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 외에도 인간 사회가 지속할 수 있도록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해야 하고, 사회적인 신뢰를 회복하고 다양성과 포용성을 지향해야 하며,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 문제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자본주의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요? 더 나은 자본주의를 향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4. 자본주의의 문제점 : 마르크스
자본주의적 모순과 계급 투쟁이 심화되었는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할수록 경제적 모순이 심화되고 이로 인해 계급 투쟁도 더욱 격렬하게 발생하면서 공산주의 혁명의 조건이 성숙한다고 보았다.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서는 사회적 생산과 사적 소유 사이의 모순이 심화됨으로써 공황과 같은 경제적 혼란과 이로 인한 생산력의 낭비가 발생하며, 또 노동자들의 경제적 궁핍과 이로 인한 계급 투쟁의 심화로 인해서 결국 자본주의 사회는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로스랜드(A. Crosland)와 스트래치(J. Strachey)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이후에 자본주의의 구조가 커다란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이러한 자본주의 위기론은 타당하지 않다고 비판한다(A. Callinicos, 『마르크스의 사상』, 254쪽 참조).
(1)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독점이 확대됨으로써 국가와 대기업이 하나로 수렴하게 됨으로써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경제 계획이 가능하게 되었다.
(2)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기업 내부의 권력 이동으로 인해서 전문 경영인들이 단기적인 이윤보다는 장기적인 성장을 위한 경영을 하고 있다.
(3) 케인즈가 이론화한 총수요 관리 정책에 따라 정부는 경기 과열과 심각한 경기 침체를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자본주의 구조나 상황의 변화로 인해서 자본주의는 지속적인 발전과 풍요를 구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서 계급 투쟁도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캘리니코스는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반박을 가하기도 한다.
(1)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은 독점 자본의 출현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잉여 가치의 축적을 통해 자본의 집적이 이루어지고 그리고 효율적인 대기업에 의해서 비효율적인 중소 기업이 흡수되어 자본의 집중이 이루어진다는 이론을 통해서 이미 독점 자본의 출현을 예상하고 있었다.
(2) 마르크스는 주식회사의 출현을 설명하면서, 자본을 투자하는 단순한 소유자와 타인의 자본을 관리하는 단순한 관리자가 분리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독점의 확대,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변화된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자본의 논리나 자본가의 근본적인 관심이 바뀐 것은 아니며,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여전히 이윤의 극대화이다.
(3) 케인즈적인 국가의 관리 정책은 1950년대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러나 오늘날에는 장기적인 세계 불황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무기력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은 노동 운동의 조직화와 활성화로 인해 자본가들이 불가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측면도 있다. 이러한 국가의 관리 정책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나 경제 불황 또는 산업 부문간의 불균형과 같은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을 제거하거나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연시키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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