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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란 이름은 백가제해(百家濟海)가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명사(名詞)은 우리식으로 풀어야 합니다. 한자의 뜻만 이용하여 지나식을 풀다보면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바로 백제(百濟)가 그렇습니다. 고대에 우리나라의 국명을 지을때 우리나라대로 그 방식이 고유하게
존재하였는데 그 짓는 방법에 따라 고대국가를 분류하다보면 백제의 비밀이 풀립니다.
불
옛 말에 야지(野地)를 ‘불’이라 하였다....중략...우리 조선에는 더욱 불을 사랑하여 사람의 이름을 ‘불’이라 지은
것이 많으니, 부루ㆍ품리(稟離) 등이 다 불의 음역이요, 불이라 지은 지명?적지 아니하여, 부여(夫餘)ㆍ부리(夫里)ㆍ
불내(不耐)ㆍ불이(不而)ㆍ국내(國內)ㆍ불(弗)ㆍ벌(伐)ㆍ발(發) 등이 다 불의 음역이다."
즉, 초목을 태워 농사를 짓던 농경민족을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되었을 경우 그 나라이름 뒤에 "불"을 붙였는데
이에 해당하는 나라들은 바로 신불(神市), 북부여(北扶餘), 동부여(東扶餘), 남부여(南扶餘) 등이 됩니다.
市는 저잣거리 "시"가 아니라 앞치마 "불"인 것이죠. 우리나라 역사상 "부여"만 붙인 나라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여는 나라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이므로 그 앞에 꼭 수식어를 붙였죠.
조선상고사에 보면 "불"에 대한 좋은 해석이 있습니다. "농업은 대개 불의 힘을 이용하여 초목을 태워서 들을 개척한
뒤에 발생하였으므로
골, 굴
산과 골짜기가 우거진 곳을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되었을 경우 "골"을 붙여 나라 이름을 짓습니다. "골"이란 지대가
움푹 들어간 곳을 의미하므로 외적으로부터 숨기 좋은 곳일겁니다. 지금도 이런 말이 남아 있는데 산골짜기, 골목
등이고 지역이름으로도 ~골이라고 많이 씁니다. 이 부류에 해당하는 나라가 바로 고구려입니다.
고골이라고 읽었겠죠. 이는 하늘의 나라라는 뜻으로 높을 高를 사용하거나, 해(太陽)을 음차하여 해(解)를 썼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골(高句麗) 혹은 해골(解句麗)라고 하였겠죠. 지나인들은 언어의 유희를 이용하여 해골(解句麗)을
하구려(下句麗)라고 하기도 했는데 웃기지도 않죠.
나, 라, 야
강가를 중심으로 나라를 건설하였을 경우 나, 라, 야 등이 붙습니다. 이러한 말은 현대에 "나라"로 이어졌고 지방
이름을 붙일때도 남아 있는데 "~내" 등이 그렇습니다. 평양도 강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도시이므로 이 부류에 해당
합니다.
다 아시다시피 평양의 원래 음은 "펴라"와 가깝죠. 이 부류에 해당하는 나라로는 신라(新羅), 가라(伽羅) 등이 있습니다. 조선(朝鮮)도 이에 해당하는 나라입니다. 한글자씩 보면 朝는 아침 혹은 밝음을 의미하며, 鮮은 그 뜻이 "날것"인데
訓의 반절을 취하여 "나" 혹은 "라"로 읽어야합니다. 따라서 朝鮮은 조나, 아사나, 밝나 등이 됩니다.
백제
그러나 백제(百濟)는 위 조어법 중에 어느곳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이는 두개의 나라를 앞자만 이용하여 축약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백나라와 제나라를 축약하였음을 알 수 있죠. 그럼 백나라와 제나라가 어디인지 살펴
보면...
* 백나라는 온조가 고구려에서 동남으로 이동하여 패수를 건너 건국한 나라로 온부여(百扶餘)라고 했을 것입니다.
百의 뜻은 고어로 "온"인데 이것은 온조의 첫글자를 따와서 온나라라고 하였을 것이며, 온조는 북부여 동명의 자손
이므로 분명히 나라이름 뒤에 부여를 붙였을 것입니다.
* 제나라는 비류가 고구려에서 서남으로 이동하여 대수를 건너 건국한 나라로 제부여(齊扶餘)라고 했을 것인데,
그 위치가 옛날 제(齊)나라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국가 이름을 명시해 놓으면 이로부터 파생되는 역사해석이 나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2권 근초고왕편
근초고왕 24년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원 문
二十四年 秋九月 高句麗王斯由帥步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王遣太子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 將士 冬十一月 大閱於漢水南 旗幟皆用黃
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보병과 기병 2만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 그 사로잡은 적[虜獲]들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겨울 11월에 한수(漢水)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는 데 깃발은 모두 누른 색[黃色]을 사용하였다.
『남제서 백제』백제와 북위의 화북평원 전쟁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臣自昔受封, 世被朝榮, 荷節鉞, 剋攘列酸. 往<姐瑾>
等竝蒙光除, 臣庶咸泰. 去庚午年, < >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梨]南監本作
[ ].《漢書》[匈奴傳], 其國稱單于曰 ?孤塗單于. <匈奴>謂天爲 ?, 謂子爲孤塗, 單于者, 廣大之貌也. <匈>?猶言<匈奴>
單于, ??通.$/ 崩若海蕩. 乘奔追斬, 尸丹野. 由是 其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功勳, 宜在 顯.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 爲行安國將
軍·<酸中王>, <解禮昆>爲行武威將軍·<弗中侯>, <木干那>前有軍功, 又拔臺舫, 爲行廣威將軍·<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又表曰: [臣所遣行龍 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行建武將軍·<城陽>太守
兼司馬臣<王茂>, 兼參軍·行振武將軍·<朝鮮>太守臣<張塞>, 行揚武將軍<陳明>, 在官忘私, 唯公是務, 見危授命, 蹈難弗顧. 今任臣使, 冒涉波險, 盡其至誠. 實宜進爵, 各假行署. 伏願聖朝特賜除正.] 詔可, 竝賜軍號.
이 해에 ‘위노’가 기병 수십만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가니, ‘모대’가 장수 <사법명>, <해례곤>, <목간나>를 보내어 ‘노’ 군을 공격하여 크게 이를 깨뜨렸다.
‘건무’ 이년 ‘모대’ 가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말하길 신은 옛부터 봉함을 받아 대대로 조정의 영화를 입고, 절과 부인
분에 넘치는 것을 받아 오랑캐를 물리치었습니다.
‘저근’ 등이 가서 광택을 입고, 신은 두루 평안합니다. 경오년에 가서 ‘험윤’이 깨닫지 못하고, 병사를 내어 깊이 쳐들어
오니, 신이 ‘사법명’등 군사로 토벌하고, 야간에 번개같이 엄습하니 ‘흉’의 이장이 두려워 하고 무너저 바다로 쓸어버렸다. 달아나는 것을 베어 죽은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를 꺽으니, 흉폭함을 잡았다. 이제 나라가
조용해지니 실로‘명’등의 다스림이니, 그 공훈을 생각하여 칭찬함이 마땅하다.
이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삼고, ‘?수류’는 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삼고, ‘해례곤’은 행무위장군 불중후,
‘목간나’는 전의 무공이 있고 또한 대방을 빼앗으니 행광위장군 면중왕으로 삼으소서. 업드려 원하니 하늘의 은혜로
청을 들어 주옵소서 하였다.
또 표에 말하길, 신이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인 신 ‘모유’,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인 신 ‘왕무’, 겸 참군이고
행진무장군 조선태수 인 신‘장색’, 행양무장군‘진명’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움을 버리고, 오직 공무에만 힘쓰며, 위급함에 명을 받들어 어려움을 물리치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 인신이 사신으로 보내어, 험한 물결을 무릅쓰고
나아가니 정성이 지극합니다. 실로 작위를 내림이 마땅하니 각각 베풀어 주십시오.
엎드려 올바른 제수가 있기를 원하옵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옳다 하고 군호를 내리었다.
백제와 북위의 전쟁의 승자는 백제였고, 백제는 이 결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당시 남제에 보낸 국서를 읽어보면,
다수의 왕과 장군의 직책을 설치하여 남제에 통고하였는데, 이들이 관할한 지역은 모두 양자강 근처에 존재하는
지역이다.
실제 《남제서》에서는 ‘ 據江左右’ 라는 네 자가 보이는데, 이는 ‘양자강 좌우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는 의미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남제서》는 “이로부터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북위와 백제의 전쟁은 488년 ~ 498년까지 10년간 5차례 이루어 졌으며 북위와 백제의 전쟁은 488년 ~ 498년까지
10년간 5차례 이루어졌으며, 백제와 북위는 당시 최고의 옥토였던“화북평원”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하나 모두
백제의 승리로 끝났다.
『 송서 』
百濟者 後漸强大 兼諸小國其國 本與句麗 在遼東之東 晋世 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今柳城北平之間 自治百濟郡
“백제라고 하는 나라는 후에 점정 강하고 커져서 여러 작은 나라를 병합하고 그 나라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는데 진나라 때 (3세기 중엽)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하고 백제 역시 요서진평의 2군을 점령하니
지금의 유성과 북평 사이로다”
1) 백제의 영토
따라서 이 둘은 형제국가이므로 서로 동맹하였을 수도 있고,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비류가 온조에 투항하였을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온부여(百扶餘)와 제부여(齊扶餘)를 함께 일컬어 백제가 된것이죠. 이렇게본다면 백제의 영토는
한반도 서쪽, 요동반도 서쪽, 요서의 남쪽, 하북과 산동의 동쪽, 양자강 하류 등으로 자연스럽게 비정됩니다.
백제가 지나땅 동해안을 지배하였다는 것을 해석할 필요도 없이, 백제 이름 자체가 한반도 서부에 위치한 온조의
나라와 지나의 동부에 위치한 제나라의 영토라는 것을 자연스레 알려주는 것입니다.
백제가 한반도에만 있다면 더 이상 백제가 아닙니다. 그렇게때문에 남부여가 나오는 것입니다.
2) 남부여로 개칭한 원인
백제는 후대에 이르러 남부여로 개칭합니다. 왜 그럴까요? 현재 충청남도 부여에 그 수도를 옮겼기 때문에 남부여로
개칭하였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부여의 옛 명칭은 사비인데 백제가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그 국명이 그냥
사비의 현재 이름이 된 것이죠. 제 생각에는 백제가 고구려 등에게 제부여(齊扶餘)의 영토를 잃어버리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백제는 더이상 백제로 부를수가 없습니다. 백제중에 제부여(齊扶餘)의 땅은 잃어버리고 온부여(百扶餘)만
남이있기 때문이죠. 더군다나 백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때에 공격을 받아 남으로 한(韓)의 땅으로 이주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온부여 제부여의 영토구조가 아니기때문에 더이상 백제라 부를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남부여라고 개칭한 것이죠.
백제 멸망후 사료가 없어지면서 온부여 제부여 두 나라는 잃어버리고 이 둘나라를 합하여 이른 백제의 이름만 남아
돌다가 후대에 지나인들이 백제를 百濟로 쓰면서 십제(十濟)니, 백제(百濟)니, 백가제해(百家濟海)니 이상하게 바꾸지
않았을까합니다. 역사상 이런 견강부회도 없을 것입니다. 지나인들의 언어 유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늘의 나라를
뜻하는 해골(解句麗) 혹은 고골(高句麗)의 본 의미는 잊어버리고 지나인들이 쓴 하구려(下句麗)라는 말처럼 해석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高句麗를 고구려로 읽느냐 고구리로 읽느냐하는 쓸데 없는 의견 대립도 하는 것입니다.
구려던 구리던 다 나라를 뜻하는 우리나라 고어의 전음(轉音)으로 "골" 혹은 "굴"로 읽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국명은 우리식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해석에서 이두문이 중요한 것이죠. 우리나라 국명을 지나식
으로 풀어서는 안됩니다. 이의 중요성을 신채호 선생은 "고사상(古史上) 이두문 명사 해석법"에서 아래와 같이 역설
하였습니다.
『 혹은 이를 웃으리라, 번쇄(煩瑣)하고 무익한 일이라고. 그러나 착오가 이에서 교정되느니라. 와오(訛誤)가 이에서
귀진(歸眞)되느니라. 각기 제 시대의 본색이 이에서 탄로되느니라. 이미 산실(散失)된 조선 역사상의 대사건이 이에서
발견되느니라. 그러므로 이것이 곧 지중고적(地中古蹟)을 발굴함에 비길 만한 조선사 연구의 비약이니라.
자래로 부지자(不知者)들이 이 비약을 망침(妄侵)하여 도리어 본의를 현란케 한 일이 많다. 』
위 부여정림사지5층 석탑비문은 4면 모두에 새겨져 있으며, 중국 낙주 하남의 권희소가 쓰고 당 헌종 5년8월15일에
완성하였다.내용은 백제31대 의자왕,왕자 융,효등은 13인과 대좌평 사타천복 국변성이하 700여명을 중국이 압송
하였고 당나라는 후에 5도독과 37주 250현을 두었고 당시에 백제 영토에는 24만호에 인구620만이엿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 총사령관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라고 기록한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기록내용에 보면 백제 멸망 당시에 백제 영토에는 24만호에 인구620만이엿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백제를
한반도로만 규정했다면 이 인구가 들어설 수 없다.
백제는 백가제해의 축약어다. 즉, 아시아 바다를 지배한 나라라는 의미다. 백가제해의 주역은 고구려에서 나온
온조백제(마한54국의 하나)가 아니고, 부여(고두막 손자)세력인 구태세력이다. 부여의 정통성을 놓고 만주지역부터
고구려와 치열하게 싸워 온 구태세력이 후연과 연합하는 과정에서 고구려를 후미에서 치기위해 평안도지역에서
나라를 개국하게 되고, 이후 서남해 해상을 장악하여 나주를 중심으로 해상활동을 하고 있던 서남해 마한인들(왜)을
복속하여 고구려공격에 지원세력으로 삼는다. 광개토태왕비문에 기록된 <왜>의 실체다.
그리고, 서울 한강변의 온조백제를 통합하고 고리왕때 법치국가를 실현한다.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내몽골에 위치
했던 고리는 해모수.고두막.고추모 등 부여(고씨세력)의 선조의 나라다. 그래서 고리로 왕의 이름을 정한 것으로 본다.
백제 고이왕을 의미한다. 고이왕때부터 본격적으로 요서지역을 진출한다. 또한 서남해 해상세력의 선박제조술과 항해술을 통하여 일본열도로도 진출하여 지배하게 된다. 일본왕릉인 전방후원분과 한강변의 전방후원분 무덤들이 모두 구태
세력의 흔적이다. 초기형 전방후원분은 전라도 서남해 지역에 집중 분포하는데, 이건 마한의 해상세력의 무덤들이며,
서남해 해상세력들과 통합한 구태세력들의 무덤들이기도 하다. 광개토태왕비문에 이잔(구태백제)과 왜를 동일시하는
배경이다. 제도권 백제사학자들이 구태백제에 대한 조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문헌에도 백제시조는 구태이며 중심지는 곰나루(웅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광개토태왕이 한성백제와 서남해
지역의 구태세력의 해상활동의 근거지(웅진)을 공격하여 궤멸시키면서 서남해지역의 해상세력(왜)이 일본열도로
완전히 이주하게 되고, 서남해지역은 서울에서 수도를 이전한 백제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다.
수도이전 후 동성왕때 중국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북경지역뿐만 아니라 중국 동해안지역과 동남아까지 완전히
백제천하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동성왕이 호족세력에게 시해된 후에 중국지역의 백제세력은 무력화되고 고구려에
투항하거나 중국세력에게 통합하게 되고 백제성왕의 국면전환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당연합군에게 멸망당하고 왕족
들과 백제유민들은 일본열도로 망명하여 지금의 일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중국 동남부 지역에는 현재도 백제허
라는 지명과 백제유적유물들이 존재한다. 전남지역의 맷돌과 방아를 사용하는 백제허 사람들은 산동지역에서 전쟁을
피하여 왔다고 말한다.백제금동향로는 당시 백제의 국제적 위상과 함께 해상무역의 활동영역를 잘 보여주는 고고학적
근거자료이기도 하다.
[윤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