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철학이야기
칸트의 고향 사랑
칸트는 1724년 4월 22일, 동 프로이센의 수도이자 국제적인 항구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 도시는 인구 5만에 6천 호를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쾨니히스베르크’란 말은 독일어로 ‘왕의 산’이란 뜻이다. 폴란드에 속해 있던 이 도시는 1701년 프리드리히 1세가 대관식을 거행한 이후 역대 프로이센 국왕의 대관식이 열리는 곳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학문과 예술을 보호하면서 여러 대학을 세웠는데, 가난한 집안 출신인 칸트가 철학으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 역시 프로이센 왕국의 진취적이고 계몽적인 분위기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프레겔 강의 다리를 건너 학교를 다닌 어린 칸트는 상품을 싣고 오가는 외국의 배들을 보면서 자랐다. 덕분에 한평생 이 도시를 떠난 적이 없으면서도 세계 곳곳의 지리에 대해 꿰뚫을 수 있었다. 런던 사람 앞에서 웨스트민스터 다리(템즈강 위에 놓인 다리)에 대해 설명하고, 로마의 바티칸 궁전에 대해 실제 가본 사람보다 더 생생하게 설명하여 상대를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을 졸업한 칸트는 모교의 교수직에 여러 차례 지원했다. 첫 번째 기회는 스승 크누첸의 죽음 후에 찾아왔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의 ‘7년 전쟁’이 곧 터질 것 같은 분위기인지라 정부에서는 재정을 줄일 목적으로 그 자리를 아예 없애버렸다. 칸트 나이 34살 때, 정교수인 키프케가 세상을 떠나자 은사 슐츠는 이 자리에 칸트를 추천했다. 그러나 당시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하고 있던 러시아 군의 사령관은 칸트의 선배인 북크를 교수로 임명하고 말았다.
38세 때 세 번째 기회가 찾아오지만 칸트는 이 자리를 사양하고 만다. 시학(詩學)을 가르치는 자리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후 에어랑겐 대학과 예나 대학에로 초빙을 받았으나 또 사양한다. 심지어 많은 특권을 얹어 주겠다는 베를린대학의 교수 초빙도 정중하게 거절하고 만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그것은 자신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칸트의 나이 46세 때인 1770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시학 교수 랑한젠이 사망하자 칸트는 논리학·형이상학 교수인 북크를 랑한젠의 후임으로 가게 하고, 자신은 논리학·형이상학의 정교수로 취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보름 후 칸트는 소원대로 모교의 교수 임명장을 받게 된다. 대철학자 칸트가 80세에 사망하자 쾨니히스베르크 시내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조종(弔鐘)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수천 명의 행렬이 운구(運柩) 뒤를 따랐다. 시신은 그가 졸업하고 또 평생 근무했던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캠퍼스 안 묘지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이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6년 소련(지금의 러시아)의 영토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소련의 지도자인 미하엘 이바노비치 칼라닌(스탈린의 측근)의 이름을 따서 ‘칼리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도시를 돌려받는 문제로 두 나라 사이에 외교적 현안이 되어 왔지만, 서독 정부는 동독과의 통일을 앞두고 이곳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는 설이 있다. 그럼에도 독일 정부는 이곳에 영사관을 설치하고 BMW 공장을 유치하는가 하면, 프로이센 제국 시절의 건축물들을 유지 보수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러시아가 이곳에 핵 장착이 가능한 신형미사일을 영구 배치한 데다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데 대한 서방의 제재로 외부와의 교류가 차단되었고, 그 바람에 쾨니히스베르크의 경제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