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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벌써 6월달이 시작됐는데요. 다시 한 번 쳐다보시면서 6월에 우리 복 받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각자 보기 개념이 좀 다르시겠지만 주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의 복을 누리는 우리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정말 시간이 쏜살같죠 네 어떻게 우리 저 뒤에 희재는 손살 같나요? 시간이 좀 저기는 시계가 좀 느리게 갈 것 같은데 대부분의 시계는 자기의 나이대로 간다고 보통 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10대 때는 막 시간이 안 가다가 20대 30대 40대 50대가 가면서 막 쏜살같이 가는데 우리 여기 김원봉 집사님은 어떻게 90km대로 지금 가고 계시는데 굉장히 빠르실 것 같아요.
근데 진짜 어르신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눈깜짝할 사이에 내가 지금 이러한 나이가 되었고 또 하루하루가 다르다고 이제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표현을 듣습니다. 여러분 20세기는요. 시대적으로만 봐도 속도가 굉장히 빨라지는 시대였습니다. 속도의 시대라고 하죠. 근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이제 속도의 시대를 넘어서 가속의 시대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20세기의 산업화 때문에 그전에 있었던 여러 가지의 변화보다 훨씬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면 이제는 이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지금 살아가는 삶에서 지금 세상의 변화 가운데 불편함이 없이 살아가고 계시나요? 어르신들이 요즘 이렇게 뭔가를 먹으러 가면 키오스크 때문에 굉장히 난감하다는 분들도 계시고 또 요즘에는 은행일 보러 가는 것보다 핸드폰으로 하는 분들이 많아서 특히 이제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점점 따라가기가 힘들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근데 젊은 분들은 나는 문제없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요. 요즘 또 10대 20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요.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요. 정말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갑니다. 10대 아이들도요 1살 차이에 세대 차이를 느끼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요. 요즘에는 빠른 것이 대세이고 그 빠른 것에 잘 적응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이다. 빠른 게 진리라고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근데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빨라져도요. 절대로 빨라질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동물들은 태어나면 바로 태어남과 동시에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뭔가를 가지고 태어나요. 물론 보호가 필요하지만 바로 태어나자마자 걷기도 하고요. 바로 수염을 치기도 하고요.
근데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아이를 낳고 최소 1년이 지나야 걷기 시작해요. 그것도 아장아장 우리는 그걸 보면서 막 즐거워하잖아요. 그리고 이제 좀 사람으로서 뭔가를 하려면 그래도 초등학교 한 고학년 정도는 돼야 자기 나름대로의 뭔가를 한 그러니까 한 10년 이상을 누군가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근데 이걸 인위적으로 아무리 시대가 빨라져도 인위적으로 이걸 줄일 수가 없어요.
과학문명은 엄청난 속도로 빨라지고 있는데 거기에 따라가지 못하는 우리가 느끼는 그러한 피로감 때문에 지금 피로가 굉장히 누적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근데 우리가 이런 피로가 누적되는 삶을 살다 보니까 신앙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조급한 마음들이 우리를 짓누를 때가 있어요. 뭔가 기도를 하면 빨리빨리 응답이 이루어져야 될 것 같고, 내가 소망하는 일들은 빨리빨리 결과물들이 나와야 될 것 같고, 너무나도 막 빨리빨리 뭔가를 하고 싶은데 하나님의 응답은 더딘 것 같고 왠지 하나님은 느릿느릿하신 것 같고 여러분 빠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과 보조를 맞춰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사울이죠. 원래 이제 이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은 스데반의 순교의 역사 가운데 첫 등장을 합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스데반에게 돌을 던질 때 사람들의 옷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끌어오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체포조들을 대동하여서 이제 다메섹으로 출동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살기 가득하게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그의 발걸음을 멈추는 사건이 있었죠. 바로 자기가 그렇게 핍박하던 예수님을 믿던 사람들의 그 대상, 예수님이 직접 그를 만나주신 것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예수님이 그냥 한낱 인간에 불과한 사람인데, 사람들이 이것을 미화해가지고 지금 현혹하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까지 말을 하는 그것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자기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이거는 이단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신성 모독으로 여겼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지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고 그런 역할을 감당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에게 빛으로 예수님이 나타나셨죠.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이는 이제는 그가 핍박하던 사람들을 훈련하고 세우고 또 교회를 일으키는 귀한 복음 전도자로서 하나님이 세워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앞쪽에 보면 20절에서 말씀을 보면요. 이 다메섹 회당에서 이 바울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게 신성 모독 중에 가장 큰 신성 모독이라 여겼고, 그거를 너무나도 잘못됐다고 생각해서 바로잡으려고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잡았던 바울이 지금 뭐라고 한다고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전파했습니다.
이 말씀을 증거하자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이 사울이라는 청년이 이 다메섹에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잡아서 가기 위하여 이 사람이 왔는데 오히려 이 사람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증언을 듣고 사람들이 놀라니까 여기에 힘을 얻어서 이어지는 22절 말씀을 보면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언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다. 사울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더욱더 힘을 얻어서 능력껏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렇게 박해했던 내가 이렇게 변화될 수 있었던 것도 감격스러웠는데 지금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분명히 증거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힘을 얻어 담대하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대적인 배경을 보면 유대인들은요. 지금 너무나도 오랜 시간 이 나라적인 상황 속에서 메시아 대망 사상이 가득 차 있는 상황입니다. 구약 성경에 이야기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 그리스도가 올 거라고 하는 그 대망의 사상을 가지고 늘 버티고 견디며 그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데, 자기들이 죽였던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던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지금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당혹했습니다. 여기서 당혹하다는 말을 좀 풀이하면 정신적으로 혼돈 상태에 빠졌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거죠. 쟤 왜 저러는 거야? 도대체 아니 우리보다 우리를 대표해서 가장 앞장서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던 쟤가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사람들이 멘붕에 빠져버린 겁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23절에 보면 여러 날이 지내에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기를 공모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이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이 시간적인 개념이 이 여러 날이 지났다고 하는 이 말이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하루 이틀 정도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 전반적인 상황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며칠 더 머물면서 증언했다고도 이해할 수 있지만 성경 주석가들은 이 여러 날이 3년 일하는 시간이라고 해석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갈라디아서 1장 17절 말씀을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1장 17절과 18절입니다. 시작
사도된 자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3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와 함께 15일을 머무는 동안
아멘 3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서 다메섹으로 사람들을 잡으려고 갔던 그 체포하러 갔던 그때로부터 지금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겁니다. 아마 이 3년 동안 아라비아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이후에 그 3년의 과정을 지나면서 이가 그 지난 과정을 통해서 이제 다시 다메섹으로 왔던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라는 겁니다.
3년 만에 나타난 이 사울이라는 청년이 갑자기 이렇게 완전히 180도 바뀌어가지고 자기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말하니까 당연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제는 이 당혹감이 그냥 멘붕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제는 분노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가만두면 안 되겠다 죽이자
그런데 이것은요. 몇몇 사람들이 몰래 죽이자 이렇게 이 정도의 수준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2절과 33절을 보면요. 이 다메섹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있는데요.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의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 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한마디로 다메섹에서 이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고위 관리까지도 동원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바울이 위험 인물로 정도의 그냥 이야기로만 고발된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전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갈등이 될 거기 때문에 이것은 사회적인 혼란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고 관리들에게 이제 고발을 한 겁니다.
그 당시 다메섹의 유대인들은 약 4만여 명 정도가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바울 때문에 이 곳에 만약에 유대인들이 큰 혼란을 겪으면 사회적으로 엄청난 위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회적인 유지를 위해서라도 이 바울은 죽임을 당해야 되겠다 죽여야 되겠다고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죠. 이때 결국 이 바울은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밤중에 들창문을 통해서 탈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지금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이 바울에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바울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이름을 이방인과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 자기를 핍박하던 사울이 이제 자신을 증거하기 위한 그릇으로서 사용하겠다고 부르셨는데, 이 사람이 복음을 증거하는데 왜 쫓겨다녀야 되고 왜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까요?
다메섹에서 빠져나온 이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근데 예루살렘에 갔는데요. 사람들이 만나주지 않습니다. 26절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지만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을 예수님과 함께했던 그 제자들과 함께 이제 신앙적인 접합점을 만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그 복음에 대한 열정을 세워가려고 만나러 갔는데,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그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갔는데 사람들은 그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사귀고자 하나라고 하는 그 말에는 여러 번 반복해서 시도했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포함돼 있습니다.
왜 제자들이 이 만나려고 하는 사울을 만나지 않았을까요? 믿어지지가 않는 거죠. 굉장히 두려움의 대상이었거든요. 예수 믿는다고만 하면 쫓아가서 도시락 싸들고 쫓아가서 사람들을 잡아가두고 죽였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갑자기 예수님의 제자가 됐다고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됐다고 두려웠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사울이라면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너무 막 답답했을 것 같아요. 내가 분명히 예수님을 만났고 내가 그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내가 지금 이렇게 목숨을 내걸고 하고 있는데 제자된 이 무리들이 나를 이렇게 받아주지 않는다. 살해의 위협을 당하고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타고 넘어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인생 복음을 전하는 과정 속에 수많은 아픔을 겪는 바울, 자신의 변화를 믿어주지 않는 제자들 근데 이 상황에서 바나바라고 하는 인물이 중재해줘가지고 겨우 관계가 좀 풀렸습니다.
바울이 변화된 이 사람의 상황들을 설명해줬고, 이 사람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지금 사용되는 사람이라고 증언해 주었기에 이제는 그렇게 멀리했던 제자들과 그 그룹과 교류할 수 있는 은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여러분 여기에서 또 사울의 길은 평탄하지만 않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29절이죠. 또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썼다.
이 사람이 지금 복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이때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요? 변론하는 과정 속에 또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위협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은 죽이려고 했습니다. 심상치 않죠. 예수 믿는 형제들이 사울을 가이사랴를 통해서 사울의 고향인 다소로 피신을 또 시킵니다. 갈라디아에서 사도바울이 증언한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사울이 예루살렘에 머물며 제자들과 교제한 시간이 불과 15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관계가 겨우 바나바 때문에 회복하고 겨우 그들과 이제 교제하면서 복음을 막 증거하기 시작하는데 15일 만에 또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해서 그렇게 자리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여러분 지금 한번 말씀을 정리해 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그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된 바울 그는 복음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3년 만에 가서 복음을 증거했는데 그곳에서 고위 관리까지 동원해서 자기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밤몰래 광주리를 타고 겨우 피신의 목숨을 구하고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는 예루살렘까지 가서 그들과 만났는데 자기를 두려워하고 만나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겨우겨우 중재자가 생겨서 관계를 회복했는데 복음을 전하는 중에 10 5일 만에 자신의 고향인 다소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의 길은 결코 넉넉지가 않았습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우셨고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의 길이 계속 이렇게 막히고 있는 것처럼 보일까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3년의 시간을 지냈을 때 무엇을 했을까? 성경은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냥 휴식만 취했을까요?
교회를 박해하고 예수님을 믿던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한 자신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의미가 무엇인지 3년 동안 되새기고 되새기고 자기가 잘못했던 그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이유가 이것이구나.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나를 부르셨구나 나 같은 괴수 같은 사람을 부르셨구나. 그래서 바울은 담대하게 그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3년이라는 시간을 준비하여 갔고 그 과정들을 지났던 것입니다.
근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이유와 의미를 우리는 분명히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사울은 점점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온전히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성장해 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박해를 겸하여 받아야 한다고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요. 그냥 꽃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도 이 사울처럼 우리가 복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늘 박해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리가 또 성장하고 또 성장하고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대답이 없네요. 너무 기본적인가요?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네 그건 여러분들이 뭔가를 잘해서 예수님 믿고 자녀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마치 내가 아무런 노력하지 않았는데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통해서 어머니의 뱃속에서 내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제자는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배우고 그 과정 속에서 넘어지고 쓰러질 때도 있지만 계속 그 과정을 통해서 성장해 가는 거예요. 신앙생활을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만으로 여러분들 다 했다고 생각하고 지내신다면 큰 오산입니다. 10년 20년이 지나도 나의 모습이 그 모습 그대로일 가능성이 너무 많아요.
여러분들의 삶에 여러분들 각자의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을 지금 하고 계시죠? 그 과정 속에서 내 삶의 신앙의 성장이 전혀 없다. 예전과 지금이 그대로다. 그러면 점검해 볼 문제들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훈련 과정 속에 핍박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어려움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제자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수없이 넘어지고 넘어지고 나서야 뜀박질할 수 있는 건강한 아이가 되듯이 말입니다.
또 두 번째로 사울이 이런 연속적인 시련을 맞이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때가 사울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사울은 지금 막 불이 나가지고 급하게 막 복음을 증거하고 싶은데 가는 곳곳마다 지금 사람들이 뭐 어떻게 생각하든지 말든지 막 복음을 증거하는데 하나님의 때가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이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3년이라는 준비 과정을 거쳤습니다. 사울의 마음은 지금 막 불이 막 엄청나게 탔을 겁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준비하면서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겪는 거예요. 가자마자 또 만나자마자 고향 다소로 보내져서 그곳에서 몇 년의 시간을 보냈는지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약 7~8년의 시간을 무명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갈라디아 1장의 기록에 보면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 기간이 사울에게는 더 깊은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에 바나바가 이 바울을 교회의 동력자로 부를 때까지 지금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에서 그때까지의 또 중간의 시간이 또 있습니다. 이 무명의 시간이 사울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바울로서 세계 선교의 큰 기초석을 세운 위대한 인물이 되는 준비 기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 여러분 어떤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리나요? 집안을 닦는 거야 기초석을 다지는 시간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아무리 화려하고 아무리 멋지게 세워봐야 어느 순간 무너지거나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깊이 파고 기초를 다지는 데 사람들은 많은 돈을 들이고 많은 시간을 투여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일수록 더 긴 훈련의 기간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훈련 기간을 잘 견디고 버티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아가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수많은 인물들이 우리에게 그걸 증언하고 있어요. 모세 80세에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름받기 전에 그 애굽 왕궁에서의 40년, 위대한 광야에서의 40년의 무명의 목자의 생활, 그 기간의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라 일컫는 다윗도 사울에게 도망다니면서 온갖 고난을 당하면서 쫓겨당했던 그 긴 훈련의 과정이 있었기에 그는 겸허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불의 선지자 엘리야도 그 그리스의 카에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그 음식으로 연명을 하며 버티고 견디던, 그리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훈련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 이전에 그 훈련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조급하게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세계 열방의 복음을 위하여 쓰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이 부르신 이 사울을 철저하게 훈련시키시고 준비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이 막 빨리빨리 지나가는 시대 가운데 조급할 수 있습니다. 저도 조급한 마음이 제 마음을 짓누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는 말이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넋을 놓고 기다린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죠. 하나님과 더욱더 가까이하고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듣고 나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시편의 시인들이 탄식시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어느 때까지니까 우리 한번 따라해볼까요?
어느 때까지니까 고난과 시련이 다가왔을 때 그 시편에 저자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한 탄원으로 드리는 말씀이 어느 때까지입니까? 나는 근심 걱정이 가득하고 지금 나는 조급해 죽겠는데, 내 옆에 있는 원수들은 의기양양하고 나아가는데 지금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소연하는 것이 바로 어느 때까지니까라고 하는 그 탄식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의 여정에도 여러 가지 기도의 제목이 있으실 텐데 그 과정 속에 정말 이 시편 고백처럼 어느 때까지입니까? 답답함이 느껴질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그때 더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고 우리 기도하며 나아가길 원합니다. 우리 공동체적으로 지금 이제 올해를 우리가 개척의 원년으로 삼아보자라고 다시 시작이라고 선포를 했습니다. 무엇을 우리가 다시 시작하고 있는지도 점검해 보길 원합니다.
물론 교회적으로도 여러분들에게 뭔가를 제시할 겁니다. 근데 여러분들 개인적으로도 다시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또한 지금 지금이 아니고 지금은 준비 기간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있다면 또 그 음성도 붙들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늦어지는 이유는 우리가 지금보다 더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준비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볼 때는 답답해 보이고 우리가 볼 때는 정말 연약해 보이는 그 훈련의 기간 그 기간 가운데 조급하지 말고 더 기도하고 더 하나 되고 우리가 견고하게 훈련되어 세워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풍성한 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