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불교를 생각한다 (4월 2주)불기2557년 4월 14일 |일요 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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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강론: 다시 불교를 생각한다 (4월 2주)불기2557년 4월 14일
오늘 주제는 '다시 불교를 생각한다.' 그게 오늘 주젭니다. 지난 주의 주제가 '다시 붓다를 생각'였는데, 오늘 주제는 '다시 불교를 생각한다'입니다.
새벽에 김영동 선생의 '귀소'라고 하는 음악을 듣고 있는데, 마침 약속이라도 했듯이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내리는 그 자연의 빗소리와 인공의 소리인 가야금, 그리고 소금의 소리가 절묘하게 화음을 이루는데 몸과 마음이 릴렉스 되어서 참 평화롭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엄마 품안에서 엄마의 젖을 빨고 배가 부를대로 불러서 더 이상 어머니의 젖은 빨지 않고, 어머니의 젖을 만지작 만지작거리고 있는 아기의 평화로움이라고 할 수 있었죠.
불교의 혈관에 흐르는 피는 생명 평화입니다. 생명 평화는 불교의 육신이고, 마음이고, 호흡입니다. 불교가 지향하는 세계는 모든 생명들이 평화롭게 사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불교가 이루고자하는 세계죠. 그러므로 생명의 평화를 위협하는 어떤 사상도 행동도 말도 용납하거나 동조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불교는 반폭력과 반전쟁의 사상입니다. 불교는 어떠한 폭력도 정당화시키지 않습니다. 어떠한 전쟁도 옹호하지 않죠. 정의로운 전쟁이라거나 정의로운 폭력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폭력은 폭력일 뿐이고, 전쟁은 전쟁일 뿐이라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생명의 평화를 파괴하는, 그것을 깨트리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경에 보면, 초계비구(草繫比丘) 이야기가 나오고 거위비구 이야기가 나오죠. 강도가 어떤 비구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았다는 거죠. 가사까지 다 빼앗아서 풀로다 묶어놓고 갔더니, 그 비구가 풀이 끊어질까봐 그대로 풀에 묶여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초계비구 이야기입니다. 어느 비구가 탁발을 갔는데, 그 집은 금을 세공하는 집이었죠. 마침 다이아몬드를 세공하기 위해서 꺼내 놨는데, 잠시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비운 이유는 그 스님에게 음식을 주기 위해서였죠. 봉당에서 놀던 거위가 마루에 올려진 다이아몬드 원석을 낼름 먹어버렸죠. 그 금세공사는 나와서 다이아몬드가 보이지 않으니까 누가 훔쳤다고 생각했죠. 그 비구는 도둑으로 몰려서 온갖 곤욕을 치루면서도 그 거위가 먹었단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거위가 먹었다고 하면 거위의 생명을 보전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경전에 거위비구와 초계비구가 나오는 이유는 생명과 평화를 상징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죠. 부처님을 생명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고, 생명을 따나서는 말할 수가 없듯이, 불교는 생명의 평화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할 가치도 없습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반폭력과 반전쟁을 그 기저에 깔고 그 토대 위에 세워져 있는 집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의 평화를 파괴하는 어떠한 것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생명의 평화가 위협되고, 파괴되고, 그것이 깨트려지는 시대에 살고 있죠. 자동차를 타고 저렴한 비용으로 백 리 밖에 달려가 음식을 먹기 위해서 옥수수와 콩, 사탕수수에서 바이오 디젤을 뽑고 바이오 메탄올을 뽑죠. 바이오 연료는 폭력이고 전쟁입니다. 이 지구, 이 땅 위에는 음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이 수 억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수 백만명이고, 먹지 못해서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단지 조금 편하기 위해서 인간의 먹거리에서 연료를 뽑아서 자동차에 처넣고 달려간다고 하는 것은 핵폭탄보다도 무서운 폭력이고 죄악입니다. 곡식에서 자동차 연료를 뽑는 것은 국제협약으로 금지시켜야 됩니다. 그런 자가 있으면 발칸반도의 도살자 밀로세비치처럼 전범으로 처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힘없고 가난한 자들은 생명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당장에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위협도 가져오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우리는 절대적으로 식량이 부족한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식량 자급률은 35%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늘을 나는 메뚜기떼가 호주를 휩쓸고, 브라질을 휩쓸어 버려도 우리 국민들은 길거리에서 굶어 죽는 자가 넘쳐날 수 밖에 없습니다. 단지 지금 당장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죠.
생명의 터전을 파괴하는 것은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 보다도 더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죠. 주저함이 없이 강을 파괴하고 거리낌없이 갯벌을 파괴하죠. 단지 거기에서 몇 푼의 화폐를 얻기 위해서 말이예요. 지금 당장에는 그로 인해서 삶이 윤택해질지는 모르지만, 그로 인해서 우리는 불행해지게 되죠. 우리는 지금 생명의 평화가, 나도 의식하지 못하고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파괴되고 있죠. 그것은 내 발밑을 파고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은 태백 정선 지역 탄광들이 폐광이 되어서 그렇지, 옛날에 탄을 왕성하게 캐던 시절에는 어느 날 안방에서 잠자고 있던 사람이 지반이 붕괴되어서 갱도에 떨어지는 사고도 있었습니다. 아무도 내 집밑에 탄광 갱도가 있어서 그 지반이 붕괴되어서 내가 떨어지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죠. 그러나 그것은 일어나는 일입니다.
후쿠시마에 지진이 일어나서 그 원전이 파괴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원전은 바다보다 10미터 정도 높죠. 그래서 어떤 파도에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진해일이 후쿠시마 원전을 덮쳤을 때 그 해일 파도 높이는 13미터였습니다. 아무도 후쿠시마 원전이 우리를 위협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죠.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순간이 지나자 잊어먹고 있죠. 모든 원전을 세웠던 일본은 다시 원전을 가동하려고 하고, 다시 원전을 세울려고 하죠. 생명의 평화를 깨트리려고 하는 그 어떤 사상도, 그 어떤 행동도, 그 어떤 말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용납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갉아 먹고 있죠. 우리의 생명을 갉아 먹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의 인간들은 어떻게 하면 내 후손들의 생명을 위험을 빠뜨릴까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는 것 같죠. 우리야 요행이 운이 좋아서 그럭저럭 살다 죽겠죠. 그러나 다음 세대, 그 다음 다음 세대는 어떨까요? 그 어떤 폭력도, 그 어떤 전쟁도 정의라고 하는 이름으로 정당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의로운 폭력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죠.
내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면 한국불교의 전통이 호국불교라는데, 호국불교는 뭐여? 서산, 사명이 칼을 들고 왜적의 목을 친거는 뭐여?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훌륭한 한국 불교의 불교도입니다. 신심이 깊고 제대로 교육받은 분들이라 할 수 있죠.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불교라고 하는 것이 역사적인 불교와 불교라고 하는 본래의 단어인 붓다 사사나(Buddha-ssana)와는 구별해야 된다는 얘기예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붓다 사사나와 우리가 말하는 불교는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불교는 역사적인 불교일 뿐이죠. 역사적인 불교라고 하는 것은 수없는 것이 혼합되어 들어온 것을 뜻하죠. 우리가 그것을 구별하셔야 됩니다.
역사적인 불교라고 하는 것은 독일의 역사철학자 슈펭글러의 이론을 빌려올 거 같으면, 그것은 위형(僞形)의 불교입니다. 그 이론을 빌려와서 불교 사사나를 이야기할 것 같으면, 그것은 정형의 불교죠. (슈펭글러 원어로는 원형(原形)). 위형의 불교와 정형의 불교는 구별해야 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역사적인 불교이지 붓다 사사나가 아닙니다. 역사적인 불교는 폭력을 옹호하고 전쟁을 정당화시켰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붓다 사사나는 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위형의 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불교는 존재의 의미를 잃습니다.
크샤트리아 전사 고타마 싯타르타가 왜 칼을 놓았겠어요? 우리는 고타마 싯타르타는 카빌라국의 왕자이며, 태자라고만 알고 있죠. 그러나 우리가 명백하게 알아야 될 것은 붓다가 속해 있는 계급 크샤트리아는 본래 인도에서 전쟁을 위해서 양성된 살인병기 전사입니다. 붓다는 그 출신입니다. 그가 전장에서 자랑스럽게 적의 목을 베어 그 수급을 말 안장에 달고 당당하게 돌아오는 것이 그의 의무이며, 그의 책무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버렸습니다. 그 의무를 방기했고, 그 책무를 잊어버렸습니다. 도리어 붓다는 반폭력과 반전쟁의 가르침을 이야기합니다. 그 어떠한 것도 생명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거예요.
불교는 마가다제국에서 시작했습니다. 붓다 당시의 마가다는 침략전쟁을 통해서 인도 대륙에서 코살라를 합병하고, 연합 공화국이었던 베이살리를 멸망시키고, 제국의 기틀을 다져가던 그런 국가였습니다. 인도 대륙에서 가장 강력했던 국가였고, 가장 강한 군사력을 자랑했던 나라였어요. 불교는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그 한가운데서 시작했습니다. 불교는 마가다 제국 밖에서, 그 제국에서 시작했지만, 그 제국 밖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세운 집단입니다.
바웃드하(Bauddha: 산스끄리뜨어의 바웃드하 Bauddha 는 붓다를 신봉하는 사람들) 는 생명과 평화를 옹호하는 사람입니다. 인도에서는 불교도를 바웃드하라고 부르죠. 바웃드하는 붓다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붓다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도 되겠죠. 불교도란 생명과 평화를 옹호하는 사람들입니다. 생명과 평화를 위협하고 그것을 파괴하는 그 어떤 사상도 그 어떤 행동도 그 어떤 말도 반대하는 것이 바웃드하이죠.
이 시대의 불교가 과연 생명과 평화의 리더쉽을 보여주고 있는가? 아니 생명과 평화의 길을 가고 있는가? 지금 불교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 스스로가 거기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죠. 나는 전에도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불교는 의문을 갖고, 그 의문에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것이라고. 여기서 답은 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답을 구하지 않는 것은 그 답은 각자가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 김영동의 '귀소'를 듣다가... 국군방송을 들었죠. 저한테 남아도는 것이 시간입니다. 다른 분은 하루가 24시간인데, 나는 하루가 365일처럼 많아, 시간이. 국군방송의 군가를 들으니 내 몸의 피가 끓어오르더군요. 호흡은 가빠지고, 내 몸의 열기는 넘쳐 흐르고, 머리는 곤두섰다?고 말하지는 못하죠. 어제 깎았으니까. 머리가 있었다면 아마 머리카락이 곤두섰겠죠. 김영동의 '귀소'는 나로 하여금, 내 핏 속에 생명과 평화를 흐르게 했죠. 군가를 들으니까 나도 모르게 갑옷과 투구를 입고, 관운장의 적토마를 빼앗아 타고 전장을 누비고 싶은 열정의 욕망이 끓어 올랐죠.
우리는 생명과 평화를 위협하는 그 어떤 것도 용인해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불교의 이름으로, 붓다의 이름으로 그것을 행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그것이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분은 붓다의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일 겁니다.
오늘의 주제가 '다시 불교를 생각한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교는 역사적인 불교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붓다 사사나입니다.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입니다.
공지사항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28일날 법주사를 함께 가기로 했는데, 그걸 5월 말이나 6월 초로다가 좀 늦추기로 하겠습니다. 참 이런 얘기 입에 올리기 좀 뭐하지만, 몸이 좀 부실해서, 제가. 아, 맨날 저렇게 아프단 소리만 하나? 그럴까봐 이 말은 안할라 그랬는데, 마 혹시라도 제가 지금 참외 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는 중이라서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합장하시죠.
우르러 온 법계에 충만하신 부처님!
대지에 꽃은 만발해 있고
그 향기는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생명의 평화는
꽃과 같고, 꽃의 향기와 같습니다.
아름다눈 꽃이 피어 있어도 눈이 없으면 보지 못하고
향기로운 향기기 있어도 코가 없으면 맡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주시고
아름다운 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감성을 주시옵소서!
저와 저희 가족이 부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봄날의 꽃처럼 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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