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화 벌침 톡톡
실장은 내 눈치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 때문에 말하기를 꺼리는 것이 역력했다.
나도 짧지만 사회물을 먹어봤기에 눈치껏 일어나며 말했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내 말에 살짝 굳어있던 실장과 매니저의 얼굴 근육이 이완됐다.
‘편하게 얘기해보라고.’
연습실 문이 닫히자, 소리가 급격히 차단되었다. 방음 처리를 잘해놓은 것 같다. 하지만, 미세한 소리라도 집중하면 들을 수 있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연습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 우리가 다음 달에 데뷔를 목표로 하는 것은 알고 있지?
실장의 말에 멤버들이 큰 목소리로 화답했다.
- 이미 너희도 알고 있겠지만, 핑크허니의 데뷔가 벌써 2번이나 미뤄졌어. 이번엔 확실히 해보자!
실장의 파이팅 넘치는 외침에 멤버들도 목소리에 힘을 실어 답했다. 뒤이어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 다음 주에 파이널 점검이 있어. 임원들과 사장님도 참석해서 너희를 점검하실 거야.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분발해보자!
- 네!
화장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늦추며 귀를 쫑긋거렸지만, 수현이에 대한 지적보다는 핑크허니의 기운을 북돋는 말뿐이다. 하기야, 멤버들 앞에서 수현이를 지적하면 자존감이 뭉개질 수 있으니 지양하고 있을 터다.
수현이의 문제점을 알아야 그것을 보완할 봉산물을 가지고 올 텐데···.
미간을 좁히며 고민할 찰나, 매니저가 중요한 힌트를 흘렸다.
- 특히, 수현이는 긴장하지 말고, 연습할 때와 똑같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어. 파이널 점검 때는 유독 긴장하니까, 평소 실력의 10%도 안 나오잖아. 알았지?
- 네에.
수현이의 자신감 없는 대답···.
일단 문제점 하나는 확실히 알 것 같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던 수현이가 춤을 잘 출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노래는 곧잘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춤은···.
수현이 본인도 자신의 단점을 알고 있고, 그를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을 터···. 아이돌과 춤은 떼려야 뗄 수 없으니 말이다.
멤버들의 춤사위를 겨우 따라갔다고는 하나, 춤에 대한 자신감은 없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실전과도 같은 파이널 점검 무대에 서면 유독 긴장할 수밖에 없었겠지···.
‘흐음···.’
우선, 수현이에게 필요한 것 중 하나는 확실해졌다.
화장실 문을 열고 안을 살폈다. 다행히 인기척은 없었다.
혹시라도 누군가 이 기이한 주문을 듣는다면 날 미친놈 취급할 것이다. 화장실에 아무도 없음에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열려라, 참깨.”
황금빛 빛이 잠시 일렁이며 빛나자, 서둘러 몸을 차원 문으로 밀어 넣었다.
-츠팟!
전기 스파크 튀는 소리와 함께 화장실에서 내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눈앞이 암전되더니, 곧 환한 빛무리를 느끼며 눈을 떴다. 그리고 벌 정령들이 날 맞이했다.
- 주군! 오셨나이까?
“그래. 고생이 많다. 꿀 분리 작업은 하고 있나?”
- 분부하신 대로 꽃별로 꿀을 별도로 저장하고 있사옵니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작업이옵니다.
“그래, 그렇겠지. 너희는 꿀을 한데 모아 숙성시키는 본성이 있으니···. 너희의 노력을 내 잊지 않으마.”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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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현 실장은 수현이를 별도로 불러내 힘을 북돋기 위해 애썼다. 수현이도 자신 때문에 데뷔가 2번이나 미뤄졌다는 것을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수현이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달리 딱딱하게 굳었다.
“수현아. 내가 말했던가?”
“예?”
수현이가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실장을 바라봤다. 이동현은 훈훈한 아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잘하고 있다고···.”
“아, 감사합니다.”
진심이 묻어나는 말이었지만, 지금 수현이의 부담감을 덜어내지는 못했다. 파이널 점검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있음에도 수현이는 벌써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2번의 실패가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는 것이 분명했다.
“수현아. 열심히 했잖아. 우리가 모두 알고 있어. 임원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이번에는 잘해보자. 평소대로 하면 돼 긴장하지 말고.”
“네.”
수현이의 맥빠진 목소리에 이동현이 안타까운 듯 짧은 한숨을 뱉었다. 매니저 김현수도 수현이를 위해 한마디 거들었다.
“핑크허니의 비주얼이 누구야!”
“···저요.”
“그래. 비주얼은 모든 것에서 완벽할 필요는 없어. 평소대로, 연습한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조금 틀려도 돼. 자신 있게 해!”
“네.”
풀이 죽은 수현이를 다독여보지만, 좀처럼 활력이 돌지 않는다. 그런 수현이를 바라보고 있던 멤버들이 우르르 달려와 수현이를 보듬었다.
“수현아. 우리 잘하고 있잖아. 연습이라고 생각하면 돼.”
“맞아요. 언니! 솔직히 언니 노래 장난 아니잖아. 메인보컬인 나도 위협적이라고.”
“언니이! 나랑 춤 연습할까?”
라니가 수현이를 잡아끌어 연습실 중앙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곧 연습실을 울리는 비트가 심장을 뛰게 했다.
“하나, 둘 점프!”
멤버들이 점프 후 착지하며, 다음 비트를 기다린다. 모여있던 멤버들이 흩어져 위치를 잡고 리듬을 탄다. 풀 죽어 있던 수현이도 몸을 움직이자 얼굴에 활력이 돌았다. 지금, 이 순간에는 수현이도 분명 핑크허니였다.
“좋아! 그렇게!”
이동현과 김현수가 덩달아 목소리를 높이며 핑크허니를 응원했다.
한참을 지켜보던 김현수가 이동현에게 슬쩍 고개를 돌리며 속삭였다.
“지금처럼만 하면 될 텐데요.”
“그래. 지금처럼만 하면···. 얘들아! 얼굴 미소, 웃어야지!”
이동현은 김현수의 물음에 대답하면서도 핑크허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잘못된 부분을 지적했다.
이동현은 핑크허니에 진심이었다. 될성부른 떡잎이지 않나?
역대급 비주얼의 여자 아이돌 그룹. 노래, 춤 무엇하나 빠지는 것이 없다. 수현이가 살짝 부족하지만, 수현이의 가장 큰 장점은 역대급 청순미다. ‘울려라! 골든벨’에서 직접 명함을 건넸던 사람도 이동현이었다.
그래! 솔직히 수현이가 조금 부족하면 어떤가?
저 비주얼이라면 시장에서도 분명 반응이 있을 것이다.
뭇 남성들의 심금을 울릴 테고, 여성들도 수현이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될 것이다. 이동현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당장 자신만 하더라도 수현이의 광팬이지 않던가?
“잘 될 거야. 분명. 파이널 점검만 넘으면 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동현은 핑크허니가 연습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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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 정령 한 녀석과 함께 나는 화장실로 돌아왔다.
손에 작은 앰플병이 들려있었다. 로열젤리 샘플을 담는 통이지만, 오늘은 여기에 푸르스름하면서도 누런빛이 도는 꿀이 들어있다.
바위 암석에 붙어 자라는 으름덩굴 꽃이 있다. 현실에서도 있는 꽃이지만, 정령 세계에서는 풍부한 마나 덕에 현실과 달리 꽃 색도 다르고 향과 효능도 차이가 있다.
언젠가 벌 정령이 따온 으름덩굴 꿀을 맛보았던 때가 떠올랐다.
“푸른색 꿀?”
- 으름덩굴 꿀이라고 하옵니다. 심신을 안정시키고, 기혈을 북돋는 효과가 있나이다.
“아주 좋은 꿀이로구나?”
- 좋은 꿀이니만큼 채취가 힘든 꿀이옵니다.
강한 산미와 함께 특유의 떫음이 느껴졌지만, 꿀은 혀에 짧게 머물다 이내 사라졌다. 꿀이 흡수된 후 마음이 착 가라앉아 차분해졌지만, 몸의 원기가 북돋아져 활력이 살아나는 묘한 꿀이었다.
마음이 차분해지지만, 왠지 몸을 움직이고 싶은 기분이랄까?
기억을 되짚어 볼수록, 이 꿀이 수현이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긴장감을 내리고, 원기를 북돋는 꿀이니 파이널 점검에서 큰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문제는 소량이라는 것인데···.
그래서 내가 요 녀석을 데리고 왔지.
어깨 위에 살포시 앉아 있는 벌 정령 한 마리. 마나가 약한 현실에서는 모습이 흐려져 일반인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터. 물론, 나에게는 희끄무레한 구름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너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느냐? 나는 네가 잘 보이거늘.”
- 주군만 볼 수 있사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벌 정령의 확신 어린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으름덩굴 꿀이 들어있는 앰플병을 주머니에 넣었다. 옷매무새를 고치고 난 당당한 걸음으로 화장실을 나서 연습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우퍼가 진동하며 전달하는 강렬한 저음에 몸이 전율했다. 아무리 방음을 잘했다지만, 진동으로 전달되는 저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 두둥, 둥! 둥!
여자 아이돌 그룹이라길래, 여리여리한 사랑 노래일 줄 알았더니···. 이런 강렬한 비트라면 힙합?
핑크허니의 첫인상을 강렬하게 심기 위한 선곡일지도 모르겠다.
강렬한 비트에 눈썹을 움찔거리며 연습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절도 있는 동작으로 브레이크 댄스를 추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수현이가 눈에 들어왔다.
‘헐.’
입이 살짝 벌어졌다. 마냥 어린 줄로만 알았던 수현이가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 컸구나.
그 뻣뻣 수현이가 브레이크 댄스라니, 심지어··· 생각보다 잘 춘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동현 실장과 김현수 매니저가 연습 때처럼만 하면 된다고 했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저렇게 피나는 노력을 했음에도 압박감 있는 무대에 서면 긴장감으로 제 실력을 발휘 못 한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수현이를 지그시 바라보며 주머니 속에 있는 앰플병을 만지작거렸다.
‘수현아, 걱정하지 마라. 오빠가 해결해 줄게.’
연습실로 들어선 나는 이동현과 김현수 곁에 섰다.
“수현이가 춤추는 것은 처음 보네요.”
“그러세요? 아, 2년 동안 행방불명이셨다고 들었어요.”
“아, 예···.”
행방불명 딱지는 인제 그만···!
“수현이가 아이돌이라니···. 믿을 수 없었죠.”
내 말에 이동현 실장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처음에는 배우로 키워볼까 했습니다. 그런데 수현이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꿨죠. 목소리의 흡입력이 어찌나 좋던지···. 노래는 좋았지만, 문제는 춤이었어요. 솔로는 싫다고 하고···.”
나도 모르게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그래 문제는 춤이지. 잘 알지, 내가 수현이는 뻣뻣의 대명사니까.
“열정은 좋지만, 춤은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몸치더군요.”
심각하게 말하는 이동현의 표정을 보니 웃음이 터질 것 같다.
참아라. 임수찬!
‘난 진중한 오빠다. 진중한 오빠···.’
속으로 주문을 외듯 마음을 다스리는데 이동현 실장의 한마디에 참지 못하고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뻣뻣 그 자체였습니다. 솔직히, 불가능이라 생각했었어요.”
“풉!”
내가 웃음을 터트리자, 이동현과 김현수도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바뀌더라고요. 수현이는 3년 내내 쉬지 않고 춤 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를 지금 보고 계신 겁니다. 대단한 친구입니다.”
수현이를 바라보는 이동현의 눈에 대견함이 뚝뚝 떨어졌다.
“물론, 남들보다 2배, 3배는 연습해야 하지만, 수현이는 해낼 겁니다.”
이동현의 말에 김현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수현이는 악착같은 근성이 있어요. 성공할 겁니다.”
수현이에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다. 동생에 대한 평가가 후하니 내 마음도 따뜻해졌다.
이 사람들에게 꿀을 선물해줘야겠군.
흐뭇한 표정으로 연습하는 멤버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인기척들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또 누구지?’
- 핑크허니가 연습 중이라고?
- 예, 사장님. 다음 주에 파이널 점검이 잡혀있습니다.
- 그건 나도 알고 있고···. 내려온 김에 어디 한번 볼까?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하필, 또 뮤즈 엔터테인먼트의 사장님이 등장하셨다. 누구라도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한국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댄스 가수팀 M.U.Z의 박현영이 바로 뮤즈 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이었다.
박현영은 M.U.Z를 탈퇴하고도 솔로로 많은 히트곡을 남겼고, 현재도 현역으로 활동 중인 베테랑 중의 베테랑. 즉, 고인 물···아니 썩은 물이다.
박현영은 핑크허니가 연습 중인 연습실로 성큼성큼 다가와 문을 활짝 열며 소리쳤다.
“연습 중이니?”
한마디 했을 뿐인데 말속에 리듬감이 실려있다. 이게 바로 썩은 물의 내공.
이동현과 김현수가 박현영의 등장에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박현영을 보좌했고, 춤을 추던 핑크허니는 음악을 끄고 타이밍을 맞춰 동시에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소리쳤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핑크허니입니다!”
그들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난 잽싸게 으름덩굴 꿀을 벌 정령에게 내밀었다. 벌 정령은 입을 쭉 내밀어 으름덩굴 꿀을 흡입한 채 나의 명령을 기다렸다.
박현영의 등장이 후 유독 창백해진 수현이를 바라보며 벌 정령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으름덩굴 꿀, 벌침 톡톡.”
- 알겠사옵니다. 주군!
벌 정령은 우렁차게 답하며 수현이를 향해 날아가 으름덩굴 꿀이 들어있는 침을 팔뚝에 꽂았다.
“아야!”
수현이가 눈을 크게 뜨며 침에 쏘인 곳을 멀뚱히 쳐다봤다. 통증은 있되 벌 정령은 보이지 않을 터. 수현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침 쏘인 곳을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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