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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27. [역경의 열매] 이홍렬 <1-14> 데뷔 40년 눈앞… 지금도 남 웃길 때 제일 행복
2015년 TBS-FM ‘이홍렬의 라디오쇼’ 공개방송을 진행하는 도중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는 개그맨 이홍렬.
요즘도 많은 사람 앞에서 이 네 글자만 이야기하면 대번에 웃음이 빵 터진다. “귀, 곡, 산, 장”.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분들일수록 더욱 효과만점이다.
이 콩트를 처음 했던 게 1993년이다. 어느덧 25년이 지났다. 이응주 MBC PD가 당시 ‘오늘은 좋은 날’ 프로그램을 같이하자고 했다. 귀곡산장은 그중 한 코너였다.
귀곡산장 주제가를 기억하는가. 오랜만에 어깨를 들썩이며 같이 한 번 불러보면 좋겠다.
“망태 망태 망망태. 망구망구 망망구. 우리는 산장지기. 괴상한 노인. 망태, 꺼지지 않는 불꽃. 망구, 밤에 피는 장미. 누구든지 환영해요. 귀곡산장. 간이 커도 와우. 겁 많아도 와우. 기절 안 하고 못 배기는 귀곡산장. 뭐 필요한 거 없수? 없음 말고…. 뭐 필요한 거 없냐니까. 없음 말랑께롱께롱께롱!”
이 PD가 9인조 가수 ‘작은 별 가족’의 강인구씨에게 부탁해 만든 주제가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망태 할아버지 역을 맡은 임하룡씨와 서로 박자가 틀린다며 티격태격했던 기억이 난다. 임하룡씨는 언젠가 내게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다. “사실, 그 할머니 내가 하고 싶었어.”
처음 코미디언의 꿈을 품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다. 당시에는 개그맨이라는 직업이 없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 다른 사람을 웃기는 일에 몹시 관심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일이었다.
중학교 2학년 학기 초, 반 편성을 마친 뒤 새 담임선생님이 앞으로 매주 분단 이동을 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그때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왼쪽으로 이동하나요. 아니면 오른쪽으로 이동하나요.”
그때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너만 이쪽으로 가. 우리는 다 저쪽으로 갈 테니까”라고 외쳤다. 아이들은 폭소하며 자지러졌다. 학기 초라 그랬는지 선생님 눈에는 그게 그리 웃기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선생님께 불려 나가 흠씬 두들겨 맞았다. 이상한 건 아이들이 배를 움켜잡고 웃는 모습이 눈앞에 선해 맞는데도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때부터 나는 선생님이 뭔가 말씀하시면 재치 있게 맞받아치는 아이가 됐다. 운이 좋은 날은 선생님도 같이 웃었다. 물론 운이 없는 날에는 비 오는 날에 먼지 나도록 맞았다. 그때 내게는 벌을 받느냐 안 받느냐보다 아이들이 웃느냐 웃지 않느냐가 더 중요했다.
당시 일기장을 보면 사흘에 한 번씩은 코미디언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서울 남영동에 자리한 성남극장, 금성극장에 극단이 찾아오면 어떻게든 가서 봤다. 구봉서 서영춘 송해 남보원 등의 코미디언을 보면 가슴이 떨렸다.
사실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이었다. 코미디언 등용문이 없던 시절이라 신문 기사에 실린 극단 단원 모집을 볼 때마다 응시했다. 연예계와 가까울 것이란 생각에 무작정 다방 DJ 보조로 일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79년 3월 당시 TBC 동양 라디오로 데뷔했다. 이후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이홍렬쇼’ 등 여러 프로그램에 나와 국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사랑해주신 분들과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다.
이제는 굳이 분장하지 않아도 귀곡산장 망구처럼 금방 흰 머리가 자란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코미디가 좋다. “정말 코미디를 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
정리=구자창 기자
* [역경의 열매] 이홍렬 <1> 데뷔 40년 눈앞… 지금도 남 웃길 때 제일 행복
* [역경의 열매] 이홍렬 <2> 고생만 한 어머니 암 투병에 기도가 터져나와
* [역경의 열매] 이홍렬 <3> 전역 후 암에 걸린 어머니 업고 안수기도 받으러 다녀
* [역경의 열매] 이홍렬 <4> "교회는 사랑 하나만으로 다닐 만한 가치가 있다"
* [역경의 열매] 이홍렬 <5> 굿판 벌이던 할머니, 예수님 그림으로 방 채워
* [역경의 열매] 이홍렬 <6> 아내가 고3때 첫 만남… 7년 기다렸다 재회해 결혼
* [역경의 열매] 이홍렬 <7> 미웠다가 예뻤다가… 말보다 문자가 편한 삼부자
* [역경의 열매] 이홍렬 <8> "교회는 평범한 사람이 가서 특별한 은혜 받는 곳"
* [역경의 열매] 이홍렬 <9> '뺑코' '숏다리'… 단점으로 사랑받게 되는 축복 주셔
* [역경의 열매] 이홍렬 <10> 따뜻한 신앙 선배였던 구봉서 선생님, 그립습니다
* [역경의 열매] 이홍렬 <11> 천재 같은 전유성 선배… 멘토로 여기고 따라
* [역경의 열매] 이홍렬 <12> 나눔은 기쁜 중독… 남 돕는 묘미 끊을 수 없어
* [역경의 열매] 이홍렬 <13> 국토 종단 마치자 성금 3억… 자전거 구입해 남수단으로
* [역경의 열매] 이홍렬 <14·끝> 성공적인 삶은 나눌수록 커지는 행복을 아는 것
약력=△1954년 서울 출생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홍보대사(1998년∼) △1979년 TBC동양방송 라디오로 데뷔 △예능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이홍렬쇼’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등 출연 △서울 온누리교회 집사
***[역경의 열매] 이홍렬 <2> 고생만 한 어머니 암 투병에 기도가 터져나와
아버지 대신 바느질로 온 가족 부양… 친구 따라 갔던 교회 떠올리며 기도
개그맨 이홍렬이 어린 시절 한복을 입은 어머니와 함께 앉아 있는 모습.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배달했다. 신문 부수를 늘리기 위해 억지로 확장 신문을 넣다가 따귀를 맞는 일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할머니가 동사무소에서 영세민에게 주는 밀가루 배급을 받아오는 것을 보고 “할머니, 우리가 거지야?”라며 철없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야 이놈아. 배부른 소리 하지 마라”고 하셨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참 가난했다. 늘 단칸방을 전전하며 다섯 식구가 몸을 부대끼며 살았다. 어머니는 경제적 책임을 지지 않는 남편 대신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가난과 사투를 벌이셨다. 어머니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밤새 재봉틀, 인두와 싸워가며 한복 바느질로 삼남매를 공부시켰다.
중학교 시절, 자다가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떠 보니 어머니가 한복을 만들다 졸고 계셨다. 나는 살며시 “엄마, 그냥 주무세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 한복 내일까지 해주기로 약속했단다. 어서 자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어머니 모습을 보면서 신용과 책임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던 것 같다.
어머니는 특히 교육을 강조하셨다. 아버지는 종종 “돈이 없으면 학교를 못 가는 거지”라고 말하실 때가 있었다. 평소 온유하시던 어머니도 이 말을 들으면 “낳기만 한다고 부모가 아니라 키우고 교육을 시켜야 제대로 된 부모가 되는 거예요”라고 발끈하셨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슬픈 기억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다. 늦잠이라곤 모르시던 어머니가 이상하게 늦게까지 자고 계셨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흔들어 깨우자 한쪽 팔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아버지는 느낌이 안 좋으셨는지 쓰레기통을 재빨리 뒤지셨다. 약봉지가 나왔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업고 병원으로 뛰었고 나와 동생도 울면서 뒤를 따랐다. 응급실에서 깨어난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정도 갖고는 죽지도 못하는구나”라고 말씀하셨다.
알고 보니 어머니는 이날 돈을 빌린 사람을 만나 빚 독촉에 시달렸고, 쌀독에 쌀은 다 떨어졌고, 시계를 팔아 돈을 마련해 온다던 아버지는 그냥 방에서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만 지쳐버린 것이었다.
어머니가 자궁암 때문에 살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다는 소식을 들은 건 군 복무 시절이었다. 휴가를 나와 누나와 친분이 있던 치과 의사에게 진료를 받던 중 “어머니한테 앞으로 더 잘해야 해. 앞으로 5년 견디시려나”라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의 병을 알게 됐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누나는 내가 충격을 받을까 봐 일부러 말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어머니 또한 모르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가 잘못되실까 봐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군 생활을 해야 했다.
1978년 8월 전역했다. 그날만을 기다렸다. 이제 어머니 옆에 서서 위안이 되어드리고 싶었다. 어머니도 기뻐하셨다. 제대하는 날 어머니 병세는 호전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음 날 어머니는 하혈을 하셨다. 잦은 하혈로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를 보는 일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때 나는 어린 시절 잠시 다녔던 교회를 떠올리며 기도했다. 음식이나 공책과 학용품을 나눠줘서 친구들 따라 놀이터처럼 갔던 교회였지만 이 순간에는 간절한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어머니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자식들을 위해 지금껏 고생만 하며 살았습니다.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역경의 열매] 이홍렬 <3> 전역 후 암에 걸린 어머니 업고 안수기도 받으러 다녀
어머니께 기독교 알려드리기 위해 녹음기에 성경 녹음해서 들려드려
개그맨 이홍렬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개월 만인 1979년 10월 5일 경기도 고양 일산기독교공원묘지에 있는 어머니 산소를 방문한 모습.
1978년 여름, 날씨가 점차 더워지면서 어머니는 반년 뒤에 찾아올 운명을 예감하셨다. 한번은 혼자 한의원에 다녀오셨다. 한의사가 맥을 짚고도 약을 안 지어줬다면서 큰 병에 걸린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얘, 내가 나을 병이 아닌가 보다. 자궁암인가 봐.”
다음 날 어머니는 아침 일찍 나를 찾으셨다. “아들딸 시집 장가가는 것 보고 오래 살고 싶지만 운명이란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그러고는 그간 빚진 돈은 얼마며 누구에게 빚을 졌는지, 받을 돈도 있으니 빚을 물려주는 것은 아니라는 등의 얘기를 꺼내셨다.
어머니의 말은 마치 유언처럼 들렸다. 나는 마음이 미어져서 눈물을 쏟으며 오열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엄하게 꾸짖으셨다. “어려서 고아가 된 사람도 많단다. 홍렬아, 남자답게 꿋꿋하게 살아야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몇 개월 동안 나는 어머니 목소리를 녹음했다. 언제 갑자기 쓰러지실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 순간들은 고스란히 녹음됐다. 지금도 나는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녹음테이프를 꺼내 듣곤 한다.
전역 후 어머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게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던 중 집주인이 세 들어 살던 우리에게 안수기도를 권했다. 매달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용산남부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당시 안수기도로 유명한 현신애 권사님을 찾아가 안수기도를 받았다.
현 권사님은 지금의 용산역 근처 철길 옆에 큰 천막집을 만들어서 안수기도를 하고 사람들과 예배를 드렸다. 그 안은 배에 물이 차서 숨쉬기 어려운 환자, 머리에 큰 혹이 난 환자, 목에 관을 꽂은 환자 등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지금은 사라진 용산 철길 건널목 앞 달동네에서 용산역 부근까지 어머니를 업고 안수기도를 받으러 다녔다. 어머니를 업고 다닐 때마다 간절히 기도했다. ‘매일 이렇게 업고 다녀도 좋습니다. 제발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내 손으로 돈을 벌어 좋은 옷, 좋은 음식 해드리며 호강시킬 수 있게 해주세요.’
교회에 다니기 직전 어머니를 모시고 산에 올라간 적이 있다. 여러 차례 절을 하면 어머니가 낫는다고 해서 절을 한 적이 있는데, 그러면서도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께 기독교에 대해 설명해 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말씀드려야 하는데 아는 게 없어 성경을 읽어드렸다.
어머니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으셔서 책을 읽을 때마다 힘들어하셨다. 그래서 매일 밤 카세트테이프가 들어가는 큰 녹음기에 성경을 녹음해서 어머니께 틀어드리고 일을 하러 다녔다. 같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고 지우고 또 녹음하고 지우는 일을 반복했다. 어머니께 성경을 읽어드리며 나도 성경을 읽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내가 전역한 지 4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부모가 돼서 아이들이 크는 걸 보면 하릴없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40년이 되어가도 여전하다. 어머니가 직접 부르신 ‘충청도 아줌마’가 담긴 녹음테이프를 들으며 오늘도 나는 어머니를 다시 만난다. ‘눈물 흘리면서 밤을 새운 사람아… 새로운 아침 길을 걸어가 보자.’
***[역경의 열매] 이홍렬 <4> “교회는 사랑 하나만으로 다닐 만한 가치가 있다”
부모님 장례 때마다 교회서 큰 도움… 하나님·예수님·교회 더 사랑하게 돼
개그맨 이홍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젊을 때의 모습.
젊을 때는 아버지를 원망했던 때가 많다. 가난한 집안 살림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고 그리움이 커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린 시절이었던 1960년대, 얇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나를 보고 동네 어른들이 “아니, 쟨 저러고 다니면 춥지 않나?”라고 말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홍렬이 쟤는 추위를 안 타요. 어릴 때 내가 자라 피를 먹였거든요. 자, 라, 피.”라고 힘주어 말씀하시곤 했다.
귀하게 태어난 아들이라 귀한 자라 피를 먹였고 무슨 근거에선지 그것 때문에 추위를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때 나는 몹시 추웠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 때문인지 겨울이 찾아와도 추위를 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를 낳고 뭔가 좋은 것을 해주고 싶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과 함께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군대 시절에는 왜 그랬는지 어머니께만 편지를 썼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아버지에게도 편지 한 통 보내드리려무나. 은근히 서운하신 모양이야”라고 귀띔해주셨다.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편지를 보내드렸다. 아마 미소 지으며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셨을 것이다. 나 역시 자식의 편지를 받으면 그렇게 하고 있으니.
이후 수십 년 만에 아버지께 다시 편지를 쓸 기회가 생겼다. 출연하던 프로그램에서 ‘아버지’를 주제로 방송하면서 편지를 써오라고 했다. 먼저 다가서지 못한 안타까움, 어머니께만 속 얘기를 했던 미안함, 아버지에 대해 불평하는 마음만 가졌던 것에 대한 반성을 한 문장 한 문장 써 내려가면서 참 많이 울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다음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교회에 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좋은 곳으로 모시게 도와준 교회를, 보살펴주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하게 말씀드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어디에 모실지, 장례를 어떻게 치를지 막막하던 우리 가족을 도와준 곳은 용산남부교회였다. 이 교회는 단지 교회의 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식구들을 전적으로 도와줬다. 기독교 상조회를 통해 염을 해줬고 예수님 그림이 그려진 병풍을 쳐줘서 장례식장에서 밤을 샐 수 있도록 도와줬다. 성도들이 준비해준 꽃으로 어머니 관 위에 십자가를 만들어 꾸밀 수 있었다. 일산 기독교공원 묘지에 어머니를 모실 수 있었던 것도 용산남부교회 도움 덕택이었다.
이듬해인 1979년 1월 15일 멀쩡하던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일하시던 공장에서 세수를 하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지신 것이었다. 그러고는 일주일 만에 어머니를 따라 하늘나라로 가셨다. 용산남부교회는 이때도 남은 우리 가족을 도와줬다. 덕분에 아버지를 어머니 뒤편에 모실 수 있었다.
내가 교회에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은 이때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깊이 보살펴주셨기 때문이다. 교회와 교인들을 통해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나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게 됐다.
이어령 선생은 “교회는 사랑 하나만으로 다닐 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다. 신앙은 복잡하지 않은 것 같다. 착하게 살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사랑을 많이 베푸는 일,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역경의 열매] 이홍렬 <5> 굿판 벌이던 할머니, 예수님 그림으로 방 채워
“죽은 네 엄마가 꿈에 교회 가라 하데”… 안 믿던 아내도 신앙생활 함께해 감사
개그맨 이홍렬이 1987년 9월 제주도로 떠난 신혼여행에서 아내의 한복 치맛자락을 들고 장난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할머니는 어머니의 수양어머니였다. 할머니가 계시던 경기도 파주 시골에 갈 때마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버스를 타고 넓은 포도밭과 옥수수밭을 지났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미신을 많이 믿으셨다. 문지방을 밟으면 어머니가 아프다고 했고, 문지방에 기대면 아버지가 아프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아프실 때도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것과 상관없이 할머니는 파주에서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이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해 할머니를 찾아뵀다. 방문을 열고는 기절할 뻔했다. 온 방 안에 예수님 사진으로 도배가 돼 있었다. 예수님이 나온 달력, 포스터 등이 즐비했다. “할머니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라고 묻자 할머니는 이렇게 답하셨다. “네 엄마가 꿈속에 나타났어. 머리에 하얀 꽃을 꽂고 나타나더니 한마디 하더라. ‘어머니 교회 다니세요.’”
할머니는 그 말을 들은 이후 정말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다. 주일에는 지팡이를 들고 언덕 위에 있는 교회에 올라가셨다. 나는 이게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는 목사님께 찾아가서 “이게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라고 물었다. “할렐루야”라고 할 줄 알았던 목사님은 의외로 정색을 하면서 “미신에 빠졌던 분들이 기독교를 접하면 단시간에 믿음이 깊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라고 답했다.
누가 뭐라고 말하든 나는 이게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일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전도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안다. 전도는 교회에 나오라고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교회에 나오더라도 그 사람의 신앙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상에서 제일 꼴불견이 일요일에 성경책 옆에 끼고 교회 가는 총각이야.” 연애하던 시절 지금의 아내가 내게 했던 말이다. 결혼 이후에도 나는 아내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집 근처에 있는 교회에 다녔다. 일요일이 되면 “교회 갔다 올게” 하고 집을 나서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말을 꺼냈다. “자기야, 나도…갈…까?”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최대한 다정하게 아내에게 말했다. “그래, 별거 없어. 가서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 눈 감고 하나님께 말하고 바라는 걸 기도하면 돼.”
일요일 아침 성경책을 끼고 교회에 가는 모습이 꼴불견이라고 하던 아내와 함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아내의 믿음도 깊어지고 때가 되면 나보다 신앙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아내가 교회에 다닌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한 전도사님이 심방을 와서 외출하려던 아내에게 3시간이나 설교를 했다. 마음은 감사했지만 아내는 마음이 어려워져서 교회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한 목사님께 이런 설교를 들은 기억이 난다. “절벽 끝 아기에게 조심하라고 소리치면 놀라서 오히려 더 위험해집니다. 환히 웃으며 다가가 영혼을 안는 지혜가 전도의 시작입니다.” 정말 맞는 말이다.
요즘 아내는 나와 같이 교회에 다니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내는 “내가 교회에 같이 가면 당신이 너무 즐거워하기 때문에 간다”고 말했다. 하지만 2년 전부터는 아내 혼자 새벽기도를 꾸준히 다니고 있다. 아내가 하나님을 믿고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역경의 열매] 이홍렬 <6> 아내가 고3때 첫 만남… 7년 기다렸다 재회해 결혼
TBC 개그맨과 신문사 실습생으로 만나 잘 삐치는 나를 받아주는 넉넉한 사람
개그맨 이홍렬이 1987년 제주도 신혼여행에서 착시현상을 이용해 아내와 장난스럽게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나한테 시집오길 잘했지?” “난 누구한테 시집가든지 다 잘되게 되어있어요.”
결혼한 이후로 어느덧 31년이 지났다. 정수리에는 어느 틈엔가 흰머리가 수북하게 자라났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여전히 저렇게 통통 튀는 대화를 나눈다.
누군가 그랬다. 부부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결혼해서 서로 나이 들어가는 것을 지켜봤기 때문이라고. 가끔은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로 결혼했던 시절의 아내 사진을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아놓고 “이 여자 좀 데려와줘요.”라며 억지를 부린다. 그럼 아내는 한 손으로 얼굴을 떡하니 받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배부른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여기 있잖아요.”
1979년 중앙일보에서 실습하고 있던 아내를 만났다. 그때 아내는 고3이었고, 나는 신인 개그맨 시절이었다. 아내에게 반했던 나는 접근을 수차례 시도했으나 계속 불발됐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혼자 덕수궁 안에서 친구와 온 그녀를 만나 사진을 찍어주게 됐다. 이 만남은 데이트로 이어졌다. 하지만 당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상태에서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아저씨를 만나기 부담스러웠는지 아내는 앞으로 만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말을 꺼냈다.
나는 당시 방송국 통폐합의 여파를 직격탄으로 맞았다. 내가 데뷔했던 TBC가 여의도 KBS로 흡수됐고, 아내는 서소문에 있는 중앙일보에 남았기 때문이다. 이후 아내를 보지 못한 채 7년이 지났다. 아내를 계속 그리워하다가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만나 어떻게든 관계를 정리하고 싶었다.
1986년 다시 찾아간 중앙일보 건물에는 여전히 아내가 있었다. 아내의 나이 스물여섯 살 때였다. 7년 만에 아내를 다시 만나자 내 손은 휴대전화 진동 오듯 심하게 떨렸다. 만남의 횟수는 조금씩 늘어갔고, 다음 해 9월 우리는 결혼했다.
결혼 생활 동안 우리 부부는 많이 다투기도 했다. 아내는 너그럽고 낙천적인 성격인 데 비해 나는 꼼꼼하고 잘 토라지는 편이었다. 한바탕 싸우고 난 다음 날, 나는 어제 생각으로 우울한데 아내는 콧노래를 부르며 할 일을 했다. “나만 삐친 것이냐”고 물어보면 “난들 왜 감정이 안 남아있겠어요”라고 했지만 내게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큰아이의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이야기다. 하루는 아내가 등교시간에 큰아이를 태우고 학교 뒷문으로 갔다. 앞문에서 두발 검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내는 아이가 잘 들어가는지 보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그곳에 교감 선생님이 서 있었다. 큰아이는 죽어라 도망가고 교감 선생님은 “저놈 잡아라” 하고 쫓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놀라운 일은 아내가 그 광경을 그저 바라보다가 돌아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아이가 누굴 닮아 저럴까’라고 생각하면서 가슴 아프지 않았냐고 물었다.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다. “난 웃겼어요. 지도 한번 당해봐야 하는 것 아니에요? 가슴이 아프긴요. 근데 왜요?”
티격태격하면서도 우리 부부는 서로 웃고 위로하며 여기까지 살아왔다. 요즘도 가끔씩 삐치곤 하는 나를 받아주는 아내가 너무 고맙다. “당신 성격 맞출 수 있는 여자는 대한민국에서 나 하나예요.” 절대 반박할 수 없는 아내의 똑 부러진 말이다. 아내의 말이 참말이라 이 말이 나는 싫지 않다.
***[역경의 열매] 이홍렬 <7> 미웠다가 예뻤다가… 말보다 문자가 편한 삼부자
‘나는 어떤 아빠니’ 문자 보냈더니 ‘제일 닮고 싶은 아빠’ 답장에 감동
결혼 9주년을 맞은 1996년 개그맨 이홍렬이 아내, 두 아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미웠다가 예뻤다가. 아들만 둘 키우는 부모라면 이런 감정의 롤러코스터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식은 ‘내 아이’가 아니라거나 아이가 스무 살이 지나면 스스로 행동할 수 있게 내버려둬야 한다는 등 자식을 끼고 사는 부모들에 대한 훈계를 나는 정말 좋아한다.
먼저 미웠다가. 큰아이가 PC방에 가서 게임하느라 정신없던 시절이 있다. 한번은 찾으러 갔다가 게임에 빠진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싫은 티를 내지 않고 음료수를 하나 사주고 게임값을 계산하고 나왔다. 내가 생각해도 멋있는 아버지의 모습이었지만 아들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하루는 밤늦게 집에 오니 식탁에 카네이션 한 송이가 있었다. 어버이날 밤이었다. 새벽이 되자 카네이션은 두 송이가 됐다. 두 아들이 하나씩 사온 모양이었다. 지금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식탁에 올려놓은 꽃 두 송이로 어버이날을 때운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며칠 뒤 나는 결국 싫은 소리를 했다. “이 녀석들아.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주기 멋쩍으면 손에라도 슬쩍 쥐어주든가. 아니면 꽃 사왔다고 말이라도 하든지.” 무뚝뚝한 아들들 말고 다정한 딸 하나 낳지 못해 아쉽다는 생각이 들던 날이었다.
2013년 추석 때는 제대로 난리가 났다. 서울에서 자취하던 큰아이가 집에 와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봐도 인사를 안 하기에 며칠째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사달이 난 날도 마찬가지였다. “잘 잤어?”라고 묻자 아들은 고개도 들지 않고 “응”이라고 대답했다.
내가 속이 좁은 것이라 생각하고 함께 밥상에 둘러앉았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짧게 식사 기도를 했다. “사랑의 하나님. 연휴에 우리 가족이 식사를 함께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큰아들은 말없이 밥만 먹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 화나고 기분 나쁜 일 있는 건 아니지?” 아들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계속 말했다. “아침에는 인사 좀 하고, 얼굴은 보고 이야기해야지. 혹시 졸업 앞두고 취업 때문에 고민돼서 그러니? 사람이 말이야 열심히 하다 보면….” 이때 아들의 한마디가 허공을 갈랐다. “알았어!” 나와 아내는 당황했다. 화를 내진 않았지만 더 이상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다시 예뻤다가. 그 뒤로도 우리는 계속 대화가 필요한 부자 사이로 지냈다. 이후 아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속마음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문자를 통해서였다. 부모들은 자식의 단 한마디에 큰 감동을 받는다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한 프로그램 출연 중 MC가 “나는 너에게 어떤 아빠니”라는 문자를 자녀에게 보내라고 했다. 아들은 평소에 말은 잘 안 하면서도 문자로는 그래도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편이었다. 나는 문자를 곧바로 보냈다.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은 답장을 해왔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던 나는 답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문자 내용은 이랬다. “내가 제일 닮고 싶은 아빠.”
이때의 감동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아들이 이렇게 효도를 할 줄이야. 많은 출연자들이 부러워했다. 뒤이어 도착한 문자는 더 좋았다. “아빠, 이런 걸 꼭 말로 해야 하나? 느낌으로 통하는 거 아님?”
***[역경의 열매] 이홍렬 <8> “교회는 평범한 사람이 가서 특별한 은혜 받는 곳”
기도할 줄 몰라 매일 주기도문 외워… 2004년 아내와 미루던 세례 받아
개그맨 이홍렬이 2009년 12월 18일 서울 용산구 온누리교회에서 안수집사로 임직할 때의 모습.
비행기를 타면 이착륙할 때마다 양손을 모으고 주기도문을 외운다. 그리고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눈을 감고 재빨리 기도한다. ‘하나님, 무사히 이륙하고 착륙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무사히 착륙하고 나면 승객들을 돌아보면서 속으로 흐뭇하게 말한다. ‘다 내 덕인 줄 아십시오.’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했던 나는 매일 주기도문을 외웠다. 왼손과 오른손이 만나면 주기도문이 절로 나왔다. 주기도문을 드린 다음 하고 싶었던 말을 하나님께 내놓았다. 나처럼 기도 못하는 사람에게는 주기도문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하고 위안이 된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나가 있었던 일을 친구와 대화하듯 하나님께 기도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혹시 내 얘기는 잘 안 들릴까 봐 기를 쓰고 기도했다. 인자하신 하나님은 그런 내 모습에 어이없어 하지 않으시고 은혜를 주셨다.
제일 난감한 때는 통성기도 시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도 하는데 나는 자신이 없고 큰 소리로 기도할 내용도 없었다. ‘이쯤 되면 다들 했겠지’ 싶어 실눈을 뜨고 동태를 살피다 나처럼 고개를 돌리며 분위기 파악하고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기도 한다. 민망하면서도 반가웠던 그때의 심정이란.
‘열혈청년 전도왕’을 쓴 최병호씨는 기도할 때 악을 쓰거나 울거나 갑자기 “하나님 아버지” 하고 외치는 모습을 콘서트장 모습에 비교해 쉽게 설명했다. 그는 “콘서트 관객들의 스타일이 모두 다르듯 교회에서도 크게 통성기도하거나 작은 소리로 기도하거나 침묵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한다. 기도회에서 “하나님” “주여”라고 외치는 것은 사실 콘서트장에서 “오빠!” 하고 외치는 것과 비슷하다는 말이었다.
물론 나는 얌전히 기도하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더러 믿음까지 작다고 할 순 없을 것 같다. 예수님은 나처럼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람을 위해 답을 이미 주셨다. 마태복음 6장 7∼8절에는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구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이 다 아신다고 하신다. 나는 이 구절이 눈물 나게 좋다.
어머니를 모시고 안수기도 받으러 다니면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지 40년이 되어 간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는 특별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가서 특별한 은혜를 받는 곳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처음에는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왠지 유난 떠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이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셨고, 2004년 5월 15일 고 하용조 목사님으로부터 아내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집사 안수도 늦게 받았다. 교회에서 강연 요청을 받아 나갈 때마다 일개 신자인 나를 “집사님”이라고 부르는 일이 잦았다. 사실을 중시하는 나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하나님은 ‘집사가 되라고 부르시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도록 마음을 바꿔주셨다.
영국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에는 “어영부영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글귀가 쓰여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반대로 언젠가 하나님 앞에 갈 날이 있다는 것을 안다. 언젠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묘비명에 이런 글귀를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 싶다. “내 그럴 줄 알고 하나님과 친해졌다.”
***[역경의 열매] 이홍렬 <9> ‘뺑코’ ‘숏다리’… 단점으로 사랑받게 되는 축복 주셔
큰 콧구멍·작은 키가 트레이드마크 돼… 좋지 않은 것도 감사하는 은혜 깨달아
개그맨 이홍렬(왼쪽)이 2012년 1월 윤복희 권사와 함께 CGN TV ‘펀펀한 북카페’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뺑코’. 솔직히 말해 그리 멋진 별명은 아니다. 하지만 참 친근한 별명이다. 중학생 때 큰 콧구멍은 콤플렉스였다. 거울을 볼 때 밑에서 비춰보면 콧구멍이 유난히 컸다. 사진을 찍으면 콧구멍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500원짜리 동전이 그 안에 다녀온 뒤 나의 별명은 뺑코가 됐다. 1995년부터 5년간 TV프로그램 ‘이홍렬쇼’를 할 당시 이 별명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숏다리’라는 별명도 있었다. 역시 훌륭한 별명은 아니다. 하지만 이 별명은 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됐고 덕분에 돈도 많이 벌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키 작은 동지들에게 “키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도 전했다고 본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은혜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별것 아닌 것을 통해서 놀라운 축복을 주신다. 나는 언뜻 보기에 좋지 않은 것 같은 것도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게 진짜 감사라고 여기게 됐다. 하나님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감사할 일을 부어주시는 분인 것 같다.
2007년 이은호 목사님과 함께 ‘톡 쏘는 남자들’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당시 많은 출연자들을 만나면서 신앙에 대해 깊고 신비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때 궁금하게 된 부분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나는 틈만 나면 목사님께 “하나님의 음성이 뭡니까. 목사님도 들어보셨나요?” 하고 물었다. 목사님은 “들었습니다”라고 답했고, 나는 어떻게 듣게 됐냐고 캐물었다. 대답은 얄미울 정도로 짧았다. “기도하세요.”
2009년 ‘펀펀한 북카페’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다. 교회 사역이라고 생각해 출연료를 안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나만 안 받으면 유난 떠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 마지못해 받으며 속으로 말했다. ‘하나님, 다들 받는데 어쩌죠. 아무튼 이 출연료는 받아서 스태프들 밥을 사겠습니다.’
당시 나는 집 근처 온누리교회에 다녔다. 거기 계시던 강일하 목사가 대학교 학과 후배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됐고 금방 친해졌다. 이후 강 목사는 미국으로 가게 됐다. 이듬해 한국에 잠시 들어온 강 목사를 만나 친척을 방문하기 위해 미국에 갈 수도 있다는 말을 꺼냈다. 그는 “미국 오시면 직원들한테 밥이나 사주세요”라고 말했다.
드디어 미국에 가게 된 날, 나는 약속대로 강 목사에게 전화해 같이 식사할 직원이 몇 명이냐고 물었다. 나는 직원이라고 해봐야 한두 명 정도와 같이 식사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8∼10명 가까이 될 거예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 속으로 불평했다. ‘아니 그렇게 인원이 많은 줄은 몰랐네. 내가 돈 많은 사업가도 아니고. 그 많은 사람들 밥을 왜 내가 사야 되는 거야.’ 바로 그때였다. 내 마음속을 뒤흔드는 듯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밥 산다고 그랬잖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곧이어 휴대전화에서 “땡” 하는 신호음이 들렸다. 출연료 4회분이 들어와 있었다. 이게 설마 그토록 기다리던 하나님의 음성인가 싶었다.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하면 “아프리카로 가거라” “서울시장에 출마하거라” 같은 역사적인 계시를 들려주실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정말 엄청나게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홍렬 <10> 따뜻한 신앙 선배였던 구봉서 선생님, 그립습니다
“저눔은 구여워어∼” 웃으며 아껴주셔… 日 유학 때 기도와 5장 편지로 격려
개그맨 이홍렬(오른쪽)이 2015년 2월 설날 인사를 위해 병상에 있는 코미디언 구봉서씨를 찾은 모습. 구씨는 이듬해 8월 하늘나라로 떠났다.
“안녕하세요. 막둥이 구봉서입니다.” “이거 되겠습니까? 이거 안 됩니다.” 내가 존경하는 코미디언 고 구봉서 선생님이 남긴 유행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구 선생님은 한국 코미디계의 살아 있는 역사 같은 분이셨다. 구 선생님은 코미디언뿐 아니라 영화배우로도 눈부신 활약을 하셨다. 1963년 개봉한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 죽기 직전 “내가 죽으면 누가 너희들을 웃겨주니”라고 한 말이 명대사로 회자됐다.
나는 이런 구 선생님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흠모하면서 코미디언이 되려는 꿈을 품었다. 어린 시절에는 보기만 해도 즐겁고 신났는데 막상 후배가 되고 나니 지레 주눅이 들었다. 스물여덟 살이라는 나이 차이와 대선배라는 인식 때문에 가끔 얼굴을 마주칠라치면 안절부절못하곤 했다.
어렵기만 했던 구봉서 선생님이 나를 다정하게 부르기 시작한 것은 뜻밖의 계기를 통해서였다. 나는 평소 상가 방문을 거른 적이 없었다. 구 선생님을 상가에서 자주 뵈자 처음에는 형식적으로 인사를 받으시다가 점차 살갑게 맞아주셨던 기억이 난다. 아마 “저놈이 그래도 궂은일 피하지 않고 자주 찾아다니는구나” 하셨던 게 아닐까 싶다.
구 선생님은 개그맨 신우회를 이끄시기도 했다. 신앙 선배 역할을 하면서 부족한 후배들을 잘 챙기셨다. 동료끼리 티격태격하면 불러서 사이좋게 잘 지내라고 다독이셨고, 내가 일본 유학을 떠날 때는 열심히 하고 오라고 기도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일본 유학 시절이던 1991년, ‘한국에 다시 돌아가면 잘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던 시기였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보내오는 글과 편지는 큰 위로가 됐다. 이때 문득 구 선생님이 생각났다. 이메일도 없던 그 시절 나는 손편지로 안부 인사를 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은 무려 5장에 걸쳐 답장을 보내주셨다. 지금도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이 편지를 귀한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와 자식뻘 같은 나이 차이가 난 덕에 선생님과 가까워진 다음에는 재롱을 많이 부렸다.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안아달라고 떼를 썼고, 그때마다 “저눔은 하는 짓이 구여워어∼”라고 웃으며 말하곤 하셨다.
지금도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일이 있다. 1989년 큰아이 첫돌 때 일이다. 많은 선후배들로 집이 북적이는 가운데 누군가 구봉서 선생님이 밖에 오셨다고 말해줬다. 선생님을 맞이하러 달려갔는데 환하게 웃으면서 금반지 하나를 건네신 뒤 엘리베이터로 향하셨다. “축하한다. 나는 어디 들러야 해서 갈게. 잘들 놀아라.”
많은 시간이 지나도 이때의 일은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지금 생각으로는 아마 후배들이 편하게 있다가 가라고 배려해주신 게 아닐까 싶다.
언젠가 설날 아침에 찾아뵀을 때도 선생님은 고령이라 보청기를 끼신 채로도 끊임없이 유머를 선보이셨다. “야∼ 선생님 보청기가 크네요”라고 한마디 건네자 “홍렬아, 이거 아주 잘 들려. 모기들 얘기하는 것까지 들려”라며 너스레를 떠셨다.
선생님은 90세까지 살다가 2016년 8월 천국으로 가셨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말씀드리고 싶다. 정말 어려웠던 시절, 웃음으로 국민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주셨던 코미디언 구봉서 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역경의 열매] 이홍렬 <11> 천재 같은 전유성 선배… 멘토로 여기고 따라
“사도세자가 왜 세 자야, 두 자지” 쉴 틈 없는 개그와 넉넉한 마음 닮고파
개그맨 전유성씨(오른쪽)가 2014년 6월 19일 개그맨 이홍렬의 환갑기념 북콘서트에 참석해 축사하고 있다.
한 개그맨이 전유성 선배 앞에서 재미있는 개그를 보여주겠다고 나섰다. 그러면서 한마디 했다. “형님, 이거 제가 처음 만든 개그예요.” 그의 얘기를 들은 전 선배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내 입에서 나와서 너한테 듣는 데까지 5년 걸렸어.”
전 선배는 촌철살인의 대가다. 선배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많다. 매번 폭소를 터뜨리게 만들면서도 본인은 무심한 표정을 짓는 게 포인트였다.
한번은 느닷없이 내게 전화를 걸어 “주소 불러 봐”라고 하신 적이 있다. “네? 아니 왜요?”라고 묻자 그는 “책 보내줄게”라고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늘 핵심만 말하는 분이었다. 이런 선배를 자주 후배들에게 자랑했다. “너희들은 갑자기 후배한테 전화해서 책 보내준다는 선배 있어?”
전 선배는 천재 같은 면이 있다. 연극 용어인 ‘개그’를 가져와 개그맨이란 단어를 처음 대중화시켰고 KBS 2TV 개그콘서트를 기획해 공개 코미디의 시대를 열었다. 독특한 독서 습관을 보면 범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선배는 침대 화장실 거실 서재에 책을 한 권씩 놔두고 그 자리에 갈 때마다 읽는다고 했다. 누군가 “그렇게 읽으면 헷갈리지 않을까요. 한 권 다 읽고 다음 책을 읽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라고 하자 선배는 이렇게 답했다. “그건 책을 안 읽어 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야.”
전 선배는 후배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분이었다. 예전 다른 선배 중 만날 때마다 연락을 안 한다고 야단치는 분이 계셨다. 어느 날 전 선배는 안부전화를 안 한다고 후배들에게 짜증을 내는 선배들에게 특유의 말투로 한마디 내지르셨다. “선배도 후배가 보고 싶으면 먼저 전화하면 되는 거지이∼. 왜 꼭 후배가 먼저 전화해야 하는 거야아.” 선배는 실제로 갑작스레 내게 전화하기도 한다. “야, 홍렬아. 서울 왔다가 그냥 전화했어. 끊는다.” “홍렬아, 홍대인데 나올 수 있냐. 바쁘면 그냥 일 봐.”
2009년 서울 마포의 한 호텔에서 열렸던 전 선배의 환갑잔치 역시 인상적이었다. 연예인들은 보통 잔칫집에 가면 축의금과 동시에 노래를 하나 준비해야 한다. 좋은 날이라 즐겁게 축하하면 되지만 어떨 때는 망설여지거나 무대에 올라가고 싶지 않은 날도 있다. 그는 하객 중 단 한 명도 무대에 올라가지 않도록 했다. 무대에서는 다른 팀을 불러서 공연을 했다. 찾아온 개그맨과 연예인 후배들은 모두 편안히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선배의 배려심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전 선배는 현재 경북 청도에서 ‘코미디철가방극장’이라는 개그극장을 운영하고 있다. 개그 공연뿐 아니라 강의도 하고 있어 코미디 사관학교라 불린다. 특히 반려견과 주인이 함께 참석해 즐길 수 있는 ‘개나소나 콘서트’는 2009년부터 매년 열리면서 인기를 얻고 있다. 선배는 이처럼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배들을 위해 새롭게 도전하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다. 나는 그래서 늘 선배를 멘토처럼 생각한다.
썰렁하지만 전 선배가 하면 재밌는 ‘아재개그’가 생각난다. 선배한테 이렇게 물었다. “형, 사도세자 보셨어요?” “사도가 왜 세 자야. 두 자지.” 쉴 틈도 없이, 대비할 여지도 주지 않고 쏟아지는 선배의 개그가 나는 참 좋다.
***[역경의 열매] 이홍렬 <12> 나눔은 기쁜 중독… 남 돕는 묘미 끊을 수 없어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홍보대사 20년… 행사 사회자로 초청돼 개인 후원 시작
사회복지기관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홍보대사로 위촉된 개그맨 이홍렬이 이미지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이씨는 1998년 홍보대사 활동을 시작해 올해로 20년째를 맞았다.
지난 세월을 돌아볼 때 잘한 일로 손꼽는 것 중 하나가 사회복지기관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홍보대사가 된 지 올해로 20년. 개인 후원을 시작한 것은 32년째를 맞았다. 칭찬을 받으려고 시작한 건 아니었다. 어쩌다 시작된 나눔이 이렇게 쌓였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는 1986년 처음 인연을 맺었다. 당시 재단이 주최하는 소년소녀가장 돕기 행사에 사회자로 초청됐다. 성황리에 행사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재단 관계자가 수고했다며 흰 봉투를 건넸다. 수고비를 받고 출연하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사회복지기관 행사이고 소년소녀가장을 위한 자리라 양심상 돈을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얼떨결에 돈을 받았다. 입으로는 “괜찮은데”라고 하면서 돈은 어느새 안주머니로 들어왔다.
몹시 후회했다. ‘나도 어렵게 자랐는데’ 하는 생각에 자신을 책망했다. ‘소년소녀가장을 위한 자리에서 돈을 받아 오다니. 이런 바보 바보.’ 나는 후회하면서 돈을 돌려줄까 고민하다가 이 재단이 뭘 하는 곳인지 찾기 시작했다. 국내 어려운 어린이들을 돕는 곳이었고, 후원회장이 믿을 만한 최불암 선배님이었다. 나는 출연료를 돌려줄 게 아니라 아이들과 일대일 결연을 해 후원자가 되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했다.
처음엔 강원도 어린이 1명, 제주도 어린이 1명을 후원했다. 이후 숫자가 조금씩 늘었고 대상도 국내외로 넓어졌다. 무엇보다 이렇게 후원하는 일은 재밌었다. 남을 돕는 일의 기쁨과 묘미에 빠져 살다 보니 어느새 30년 넘게 후원하게 됐다.
이홍렬쇼가 한창이던 1998년, 어린이재단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이 단체는 나름 역사가 깊다. 미국이 1948년 CCF(Christian Children’s Fund) 한국 지부를 세워 전쟁고아를 돌보면서 아동복지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자 CCF는 지원을 멈췄다. 이후 이 단체는 국내 순수 민간기관으로 자립했고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하게 됐다. 나 역시 이 역사의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을 수 있어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재단 직원들, 후원 모임 사람들은 정말 칭찬받아야 할 분들이다. 이들의 진정한 어린이 사랑은 나눔 봉사활동을 끝낸 뒤 갖는 뒤풀이에서 느낄 수 있다. 뒤풀이에서도 이들은 어린이 돕는 이야기만 한다. 그렇다고 홍보대사로 나선 나보다 칭찬을 많이 듣는 것도 아니다. 이들보다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나는 생색만 내는 것 같아 부끄러워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분들을 보면 ‘나눔 중독’이란 게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처음 홍보대사를 시작할 때는 재단이 나에게 엄청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오히려 내가 재단에 무한 감사를 표현해야 할 것 같다. 재단을 통해 어린이들을 돕고 나눔의 기쁨을 깨달은 세월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이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가진 것을 나누는 행동은 언제 해도 늦지 않다. 투명성이 확보돼 있고 활발히 활동하는 사회복지기관을 통해 단돈 1만원이라도 후원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연금만 나오게 준비하는 게 노후대책이 아니다. 후원은 처음 시작이 어렵긴 하지만 일단 하면 멈추기도 어렵다. 정년퇴직 없는 이 일을 앞으로도 계속해 나갈 작정이다.
***[역경의 열매] 이홍렬 <13> 국토 종단 마치자 성금 3억… 자전거 구입해 남수단으로
후배들이 결혼 주례 요청해 오면 에티오피아 아동 후원 약속 받아
개그맨 이홍렬이 2016년 3월 방문한 에티오피아에서 현지 아이들과 함께 엄지를 치켜들고 있다.
세계 인구 4분의 1은 배가 불러 죽고 4분의 3은 배가 고파 죽는다는 말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나만 해도 배불러 죽겠다는 얘기를 끼니때마다 한다. 2012년 아프리카 남수단, 2016년 에티오피아를 다녀오면서 나는 크게 반성했다. 볶은 커피껍질을 뜨거운 물에 우려내 하루 한 끼만 먹는 아이들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아프리카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 계기를 말하려면 2012년 국토 종단 얘기를 꺼내야 한다. 나는 당시 ‘버킷리스트’에 있던 국토 종단을 하기 위해 매일 걷기 연습을 했다. 그러던 중 좀 더 의미 있게 국토 종단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했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어린이재단)과 함께 기금을 마련해 어린이들을 도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그맨은 역시 아이디어로 먹고산다.
2012년 5월 부산 해운대에서 출발해 경남 경북 충북 충남 경기도의 주요 도시를 걸어 한 달 만인 6월 4일 서울시청 뒤에 있는 어린이재단에 도착했다. 국토 종단을 마친 뒤 모금액을 확인하자 목표였던 1억원을 훌쩍 넘은 3억원이 마련돼 있었다. 우리 국민의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서울에 도착할 때쯤, 기부금으로 자전거를 마련해 아프리카 남수단에 다녀오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까짓것 가보지 뭐’ 하는 생각을 하고 수원 근처를 지날 때 아예 예방주사를 맞았다. 서울에 도착한 다음에는 ‘내가 국토 종단에 성공했어. 610㎞를 걷다니. 우와!’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자전거 2600대 중 200대를 갖고 남수단으로 떠났다.
남수단 아이들은 구정물을 뜨러 4∼10㎞를 걸어 다니느라 온종일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자전거를 보내주면 물을 빨리 뜨고 남는 시간엔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자전거를 제일 먼저 시범으로 탔던 모세수라는 아이는 나를 만나 수줍어하며 두 가지 얘기를 했다.
하나는 “자전거를 줄 정도면 키가 클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하긴 좋은 일은 키다리 아저씨가 다 하는 거니까. 두 번째는 “당신은 키가 작지만 마음이 크군요. 당신을 잊지 않을 테니 당신도 저를 잊지 마세요”라는 말이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내 마음은 아프리카에 확 꽂혀버렸다.
이후에는 6·25전쟁 당시 한국을 도와준 에티오피아에 관심을 갖게 됐다. 에티오피아에 가게 된 계기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결혼식 주례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후배들이 결혼할 때 주례를 서 달라고 찾아오는 경우가 있었다. 왠지 나이 든 것 같은 기분에 자꾸 거절하다가 이번에도 역시 개그맨다운 아이디어를 냈다. 주례를 봐 줄 테니 내겐 선물을 하지 말고 에티오피아 아동 한 명을 후원하라고 했다. 후원은 이어져서 어느새 에티오피아 어린이 25명이 도움을 받게 됐다. 덩달아 나도 주례 보는 게 신이 났다.
이 일이 계기가 돼 2016년 3월 꼭 가고 싶던 에티오피아에 가게 됐다. 뒤늦게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기념관과 용산 전쟁기념관에도 갔다. 에티오피아는 6·25전쟁 당시 6307명을 파병했고 121명이 전사했으며 536명이 부상당했다.
이제 내 인생의 새로운 목표는 인생을 마칠 때까지 121쌍의 결혼식 주례를 보고 혼자서 536명의 후원자를 개발하는 것이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리를 도와준 그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역경의 열매] 이홍렬 <14·끝> 성공적인 삶은 나눌수록 커지는 행복을 아는 것
연예인들은 인기 떨어지면 우울증 앓아… 예수님이 원하는 성공 위해 살고 싶어
개그맨 이홍렬이 왼손에 모자를 든 채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이 사진은 2016년 펴낸 자서전 ‘인생 뭐 있다’의 표지에 사용됐다.
“이홍렬씨, 요새 뭐하세요.” “요즘 왜 TV 안 나와요.” “거 좀 자주 나와요.”
방송이 뜸해지면서 이런 말들을 자주 듣는다. 나를 알아보시는 분들이 애정을 갖고 건네주시는 말들이다. 반가움과 더불어 활동이 예전만 못한 것에 대한 걱정에서 나온 말이란 것을 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왠지 서서히 연예인 생활의 끝이 다가오는 것 같아 마음이 어려워지기도 한다.
1998년 ‘이홍렬쇼’ 100회를 마치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을 때 금방 시청률을 회복하니 “역시 이홍렬”이라고 신문에 크게 기사가 났다. 2년이 지나면서 14∼15%로 시청률이 떨어지니 미국에 다녀온 뒤 예전만 못하다는 식으로 말이 달라졌다.
얼굴이 어느 정도 알려진 연예인이라면 인기가 있든 없든 누구나 결국 최후에 들어야 할 말이 “요즘 왜 방송에 안 나와요”다. 한 번은 친하게 지내는 손아래 연예인에게 이런 말을 너무 많이 들어 우울하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이제야 그런 소리 들으면서 뭘 그러세요. 저는 힘들어서 안 좋은 생각을 한 적도 있었어요”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연예인들 중엔 이런 문제로 우울증을 앓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기를 누리다 무대 뒤편으로 사라진 연예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사람을 만나면 듣기 싫은 소리 들어야 하니 아예 안 만난다고 한다. 정상에서 내려올 때는 내려와야 하는데 준비를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이다.
정신과전문의 김병후 박사님께 공짜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김 박사님은 나와 눈높이(키)가 같고 권위 의식이 없어 늘 기쁜 마음으로 찾아뵌다. 박사님께 속 얘기를 털어놨다. 그러자 이렇게 답하셨다.
“‘요즘 잘 보이지 않네요’는 연예인을 향한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속상해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기에 의연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 사회참여, 봉사활동 등에 나설 때 행복을 유지할 수 있어요. 제일 위험한 게 정상에서 멀어진 후 사람들과의 만남을 줄이는 것입니다.”
한때 나 역시 “이홍렬 씨, 성공의 비결이 뭡니까”같은 질문을 숱하게 받았다. 그때는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있어 보이는 말을 여럿 했다. “열심히 보다 더 열심히 했습니다.” “이 바닥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라서 가만히 있으면 뒤로 처집니다.”
나중에는 하도 인터뷰를 많이 해 기자들이 물을 말을 다 꿰고 있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말들은 교만이었다. 중요한 건 그렇게 성공의 비결을 탐구하던 기자들이 전부 이민을 갔는지 더 이상 내게 성공에 대해 묻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성공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이란 걸 알게 됐다. 흔히 말하는 성공보다 더 중요한 건 ‘성공적인 삶’인 것 같다. 나에게 성공적인 삶은 나누면서 커지는 행복이 뭔지 아는 삶이다.
다행히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을 통해 이웃 사랑에 참여하며 조금이나마 행복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눔과 봉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고귀한 성공이라는 생각을 조금씩 갖게 됐다. 굳이 내 흔적을 남기고 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열심히 이웃을 사랑한 흔적은 남기고 싶다. 마치 예수님처럼 말이다. 만약 이게 예수님이 원하시는 성공이라면 나는 정말이지 이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다가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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