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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기 북간도 독립운동을 추동한 캐나다장로회교회들과 설립자들
(1906~1923)
2020년 코로나는 참으로 위대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을 순식간에 병고와 죽음, 굶주림과 공포로 몰아갔으며 첨예하게 대립하는 강대국들로 하여금 백신과 치료약 개발을 위하여 서로 협력하며 공조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죄성과 문명의 한계, 과학의 오만을 숙고하게 만들었으며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집단적으로 대중적으로 성찰할 기회를 주었다.
코로나가 준 천재일우의 기회가 인류에게 진실로 거듭남의 기회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인류가 맘몬이즘의 그럴듯한 속임수 무한 탐욕, 무한 소유, 무한 경쟁, 무한 소비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서열 없는 사회, 초아적인 봉사와 조건 없는 나눔으로 새로운 생명의 질서가 수립되길 빈다.
사라진 이름을 부르는 작업
연길에서 머물면서 말없이 사라진 것들과 잊히어진 것에 대한 아픔, 그리움과 감사함으로 많이 울었다. 해방 이후 정치가들의 이념과 이익대로 취사선택되어져 우리 시야 밖으로 쫓겨난 북간도독립운동의 진실과 팩트를 알고자 고서를 뒤지며 많은 밤들을 하얗게 지새웠다. 그런 과정에서 만난 1800년대 중후반에 조선양반과 관료들의 수탈에 못 이겨 생명을 걸고 두만강을 건넜던 조선의 천민들, 그 천민들이 세운 교회와 독립운동, 경신참변 시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수천의 성도들과 불탄 교회들 그리고 1941년 만주국 치하에서 <만주조선기독련맹>에 가입하였다가 끝내는 중국의 탄압으로 역사 밖으로 떠난 교회들을 만났다.
그들은 나의 역사 이해와 인식을 뒤집어 버렸다. 생명과 민, 진리가 주가 되는 역사의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하는 역사적이며 동시에 초역사적인 교회에 대하여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들은 백년도 안 되는 짧은 사이에 봉건왕조 청나라, 러시아, 중화민국, 동북군벌, 제국주의 일본과 만주국 그리고 친일파 앞잡이들, 세력을 다투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와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공산주의 중국을 온몸으로 겪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한인 지주들의 횡포와 수탈, 토비와 마적단의 약탈과 위협, 중국 관리와 중국인들의 차별과 핍박, 가뭄과 홍수에 에워싸여 살았다. 그런 암담한 환경 속에서 자작농이나 소작농으로 농사를 지으며 나라의 독립을 꿈꾸며 신앙으로 산 그들에게 신의 부재처럼 느껴지는 1920년 경신년 대학살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가혹하다.
그들이 하나님께 독립을 간청하며 기도를 바쳤던, 안전이 보장된다고 믿었던 교회당 안에서 불에 타죽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인가?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그들의 당혹과 경악, 절망과 고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교하지 않고 순교한 그들을 묵상하며 사라진 교회, 잊히어진 사람들을 기억하며 그들과 함께 살고 싶어서 본 글을 쓴다.
오늘 여기에 산산이 부서진 이름을 적어 본다.
지금 이 시간에 허공중에 사라진 이름을 불러 본다.
하나님의 우주적인 교회로 사라진 북간도 교회들의 이름을 적어 본다.
순교하였으나 어디에서도 추모되지 않는 성도들의 이름을 불러 본다.
독립운동사에 찬란한〈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자랑하면서도 그 전투가 가능하도록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친 캐나다장로회 교회와 성도들, 그 결과로 일본군에게 대학살의 고통을 당한 교회와 성도들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무지한 한국인들의 양극화된 역사의식을 애도하며 1906년에서 1923년 사이에 개척된 교회 이름을 연도별로 기록해보았다. 시대 구분과 교회 이름은〈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하권〉에 근거하였다. 그러나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하권〉나오지 않으나 다른 책에 나오는 교회와 설립자의 이름은 그 책에 적힌 원이름을 한국식문법에 맞추지 않고 그대로 적었다. 같은 교회의 이름이 서로 다르게 쓰이어진 것이 확실한 경우에는 주에서 설명하였지만 분명하지 않은 경우에는 두 개의 이름을 다 적어서 한 개 교회가 두 개처럼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1.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의 내한과 북간도 선교
북간도에서의 초창기 교회 설립은 감리교와 캐나다장로회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장로교
와 감리교의 선교지 분할정책으로 북간도가 캐나다장로회 선교구역으로 확정됨에 따라 감리교선교부는 개척한 교회들을 캐나다장로회에 넘겨주고 떠났다. 그리하여 북간도는 1907년부터 캐나다장로회의 단독 선교구역이 되었다.
캐나다장로회가 한국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김세(William JOHN McKenzie) 죽음 이후였다. 그는 1893년 메리타임 연회에서 자신의 한국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간단하게 나누었고 10월 26일 트루로의 교회 성도들의 격려를 받고 벤쿠버로 떠났다. 그리고 11월 12일 밴쿠버에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왔다. 그는 일기에 “하나님, 이제부터는 한국이 내가 받아들일 땅이 되게 해주소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랫동안 한국에 머물며 일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죽음이 나를 삼킬 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큰 나팔소리가 울릴 때까지 내 유골을 그들과 함께 썩게 하소서.”라고 자신의 심정을 기록하였다.1)
1894년 캐나다선교사 김세( 맥켄지)가 황해도 장연군 송천 (솔내)에 와서 거주하며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는 한국인과 동일한 수준의 열악한 집에서 거주하며 형편없는 식사와 기후에 시달렸다. 최선을 다하여 자력으로 교회 건축을 하고 남녀학교를 세우며 교육과 목회를 겸하였다. 그는 과로로 말미암아 말라리아 열병과 일사병에 걸린 증세를 보였으며 그로 인하여 1895년에 6월에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캐나다장로회는 3년에 걸친 찬반토론과 기도 끝에 1897년 메리타임연회에서 111대 25로 한국선교를 가결하였다. 해외선교위원회는 1898년 2월에 구례선(Robert Grierson)과 부두일( William Rufus Foote)의 지원을 받아들이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그 후 4월에 마구례(Duncan M. McRae)를 세 번째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한국 선교의 개척자로서 1898년 7월 20일에 메리타임을 출발하였다. 8월 14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였으며 24일에 나가사키에서 히고마루를 타고 9월 8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도착한 1898년 9월은 조선장로회사기2)에 의하면 선교사공의회시대(1893~1900)3) 로 분류되고 있는 시대이다.
그들은 10월에 미국 북장로회, 호주장로회, 미국 남장로회로 구성된 장로회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등록하여 캐나다장로회로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공의회에 의해서 부산과 원산 두 지역을 선교지로 제안을 받았다. 그들은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인 게일, 펜윅, 하디가 살았던 원산을 선교지로 택하였다. 그들은 원산에서 캐나다장로회선교사회를 조직하고 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회로부터 설립된 교회와 일절 사무를 인수인계 받았다.
캐나다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독노회시대(1907년 ~ 1911년 말)에는 함경대리회에 속해서 활동하였으며 치리기관으로서 상회가 조직된 총회시대(1912년 ~ 1923년)에는 함경노회(1912년 ~ 1917년 ), 함북노회(1918년 ~ 1921년)에 소속 되어서 성진과 원산, 함흥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며 해삼위와 북간도지역 전도에도 관심을 가지고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 결과로 1921년 간도노회가 함북노회에서 분리하여 조직 되었고 선교사 박걸, 서고도, 배례사가 용정 선교부에 거주하며 선교회를 이끌게 되었다.
2.조선예수교장로회 계발시대(1865~1892)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는 공의회시대 이전의 시대를 계발시대(1865~ 1892)라 불렀다.4)
이 시대에는 제너럴 셔만호를 타고 들어왔다가 순교한 토마스 목사,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를 통해 세례 받은 의주 상인, 김진기, 이응찬, 백홍준의 성경 번역과 매서인 서상륜과 이성하 등의 조선 국내 성경 판매와 포교활동 등이 있었다.
1884년 조미조약 후,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인 의사 알랜이 서울에 거주를 시작 한 이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들어오고, 의사 헤론이 들어와서 교회 창립을 시작하였다. 알랜은 조선정부의 제공으로 <광혜원>을 세웠으며 헐버트는 <육영공원>의 교장이 되었다. 그들은 의료, 교육, 전도 활동으로 최선을 다하며 복음을 전하였고 연이어 입국하는 선교사들과 함께 남북미선교사회를 각기 조직하였으며 포교할 지역을 분할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로교선교사회는 감리회와 협의회를 만들어서 상호협조를 도모하였으며 중국 선교사 로스가 개종시킨 조선인 신도들을 이명 받았으며, 일본과 봉천에서 번역된 성경의 오역을 바로잡기 위하여 선교회가 성경번역에 합의하였으며 예수교서회를 설립하였다.
1888년 원두우(Horace Grant Underwood)선교사가 황해도 송천에서 7인에게 세례를 주고 교회를 세웠다. 당시 그는 매서인 4명을 선정하여 1명은 서울 근처에. 1명은 장연 근처에, 1명은 평양 근처에, 1명은 의주 근처에서 전도하게 하였다. 이것이 조선 교역자 임명의 첫걸음이었다.
1889년 게일은 영남 각 군을 순행 전도하였으며 원두우는 관서 각 군을 순행 전도하는 중에 의주압록강 상에서 32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같은 해에 호주 선교사 더비이스(Henry Davis)가 도착하여 부산에서 전도를 시작하였다.
교회가 세워지고 신도들이 증가함에 따라 초창기 계발의 시대가 끝나고 공의회시대가 열렸다.
3.공의회시대(1893~1906)
공의회시대는 공의회의 회원이 선교사로만 구성된 선교사공의회시대(1893년~1900년)와 선교사와 조선인 총대로 구성된 합동공의회시대(1901년 ~ 1906년) 으로 나뉜다.
1) 선교사공의회시기 (1893년~1900)
캐나다 선교사들은 선교사공의회시대에 해당되는 1898년에 내한하였다. 그들은 원산 일대를 선교지로 분할 받은 후에 조사, 권서인, 어학교사와 함께 함경북도지역을 순회, 전도하였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2년 사이에 8개의 교회를 세웠다. 성진교회, 홍원읍교회, 예동교회, 정평읍교회, 영흥군 진흥교회, 영흥읍교회, 단천군 원덕리교회, 경성군읍교회가 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이다.
그러나 캐나다장로회 교회가 북간도에 세워지기까지는 8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하였다.
2) 합동공의회시기 (1901년~ 1906)
1902년에 구례선 선교사가 함경도를 경유하며 실시했던 용정 순회 전도가 큰 결실을 맺었다.
1906년에 용정시교회가 세워졌는데 이 교회야말로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에 의해서 세워진 북간도 최초의 장로교회이다. 연변문사자료집 8권 118쪽은 창립자를 홍순국과 박무림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 상〉227쪽은 용정시교회 설립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다른 기록을 하고 있다.
“선시에 선교사 구례선,❲R. G. Grierson❳이 북만주와 서백리아 등지에 산재한 조선인에 게 전도할 목적으로 자기의 부친과 업아력❲A. F. Robb❳과 홍순국으로 동행하며 복음을 전할 시에 신주한 자와 타지에서 당지에 온 신자들이 합하여 집회 예배하는 중 영수 구춘 선, 집사 이보연이 인도인이 되어 교회를 성립하니 그 때로부터 용정은 전도의 근거지가 되 어 선교사 구례선, 업아력 (A. F. Robb), 부두일 ❲W. R. Footel❳, 매길노, 박걸❲A. H. Baker❳등이 차례로 순회하는 중 교인이 증가하여 교회가 점차 전진하니라.”
두 번 째로 세워진 장로교회는 양무정자(양목정자) 교회이다. 전도인 안순영과 중국 장로교인 단금이 노력으로 세워졌으며 선교사 업아력이 왕래하며 교회를 성장시켰다.
세 번 째로 세워진 교회는 광제암(광제욕)교회이다. 김련보와 한학렬이 믿은 후에 신자들이 늘어남에 김영제 목사가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후에 선교사 박걸과 목사 김내범, 최덕준이 시무하였으며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4.독노회시대(1907~1911)
함경대리회 소속시기
1907년 9월 17일 미국남북장로회, 캐나다장로회, 호주장로회 4 교파 선교사공의회 결정에 따라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었다. 독노회시대는 1907년에 시작되어 1911년까지 계속 되었으며 거리, 기후 등의 문제로 신속한 노회 모임이 어려우므로 경충대리회, 평북대리회, 평남대리회, 황해대리회, 전라대리회, 경상대리회와 함경대리회를 설치하여 노회의 위임사건을 처리하게 하였다. 이 시대에 북간도는 함경대리회에 속하였다.
독노회시대에 북간도에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독노회시대에 함경대리회는 원산, 함흥, 성진, 회령, 동만주 5구로 나누어졌으며 각 구마다 선교사회가 세워지고 전도회가 조직되어 전도회인을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여 복음이 왕성하게 퍼져 교회설립이 활발하였다.
1907년에 남감리회 선교사 하리영과 전도인 이화춘이 전도해서 남공선 등과 함께 세운 와룡동교회가 장로교와 감리교의 분계조약에 의하여 장로교 쪽으로 이전되었다. 선교사 부두일과 김영제 목사가 교대로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정재면의 전도로 용정 중앙교회가 세워졌다.
1908년,
모아산교회가 세워졌다. 이응현의 전도로 이병춘이 등이 믿기 시작하여 교인이 점차 증가하여 선교사 부두일, 박걸과 조사 김영제와 김내범이 순회하며 관리하였다.
1909년,
명동교회가 세워졌다. 정재면의 전도로 김약연, 김하규, 김정규, 문정호, 문치정, 최봉기 등이 믿었으며 선교사 박걸과 목사 김영제가 순회하였다.
같은 해에 호천포교회가 세워졌다. 최봉렬이 전도하여 한수량이 믿으면서 교도가 증가하였다. 선교사 박걸과 목사 김영제가 순회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성내교회가 세워졌다. 신자 오병묵과 황병길이 중국교회 제도를 따라서 함께 강당을 마련하여 예배와 전도를 겸하였으며 학교도 세워서 동포 자녀들을 교육하였다. 선교사 박걸과 조사 김내범이 순회하였다.
같은 해에 용정시교회에 조사 김계안이 이주하여 간도지방 순회전도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불교인으로서 기독교에 개종하여 열심히 전도하였으며 권서로 근무하다가 조사로서 용정시교회에 부임하였다.
1910년,
용정시교회가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같은 해에 만진기교회가 세워졌다. 교인 한수현의 전도로 강성황, 강용철이 먼저 믿었고 강씨 일가들이 미구에 교회를 설립하였고 김내범목사와 서창희조사가 지도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 덕혜향에 대황구교회가 세워졌다. 교인 김하정과 김동현이 자주 드나들며 복음을 전하였고 신자들이 늘어나서 교회를 설립하였다. 박걸 선교사와 김내범 목사가 순회 하였으며 후에는 이병하 목사가 시무하였고 장용하 장로가 장립되어 당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 차대인구교회가 세워졌다. 교인 김강, 김병현(김병관), 김명규가 전도하여 교회를 설립하여 박걸 선교사, 서고도 선교사, 이병하 목사가 돌려가며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 경신향에 옥천동교회가 세워졌다. 교인 이춘이 자주 왕래하며 전도하였고 신자가 늘어나며 교회가 부흥하여 박걸 선교사와 이병하 목사가 번갈아 시무하였다.
1910년에 100만 명 전도대가 서울에서부터 시작하여 각 처에 가서 전도하였으며 그 영향으로
삼국전도회를 조직하여 성진항을 중심으로 북청. 이원, 단천, 삼수, 갑산, 길주, 명천, 경성, 부령,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 북간도(동만주), 해삼위 등지에 전력전도를 하였다.
1911년,
장백현교회가 세워졌다. 교인 이은경, 조덕수, 이주섭 등이 내지에서 그 마을에 이사하여 동현 신흥덕촌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다.
같은 해에 장은평교회가 세워졌다. 성진사람 양진섭이 12호, 72인을 이끌고 명암촌으로 이주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마을 이름을 장은평으로 지었다. 박걸 선교사와 부두일 선교사. 김영제목사, 김내범 목사가 서로 번갈아 계속해서 시무를 하였다. 양형식, 양종식, 이태언, 양창식이 장로로서 시무하였다. 교인들이 300여 명이 넘었으며 계속해서 부흥일로에 있었다.
같은 해에 적안평교회가 세워졌다. 조사 김계안과 강백규5)의 전도로 김봉렬이 믿고 신도가 계속적으로 증가하자 김영제 목사가 순회하며 교회를 설립하였다. 후에 부두일 선교사 김내범 목사, 이하영 목사, 최덕준 목사가 시무하였으며 이태현, 염창화, 최봉렬이 장로로 세워졌다.
같은 해에 국자가교회(소영자교회)가 세워졌다. 평양교인 유기연이 이사하여 복음을 전하여 신자 수가 늘어나자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박걸 선교사와 김영제 목사가 왕래하여 정식으로 교회를 설립하였고 부두일 선교사, 김내범, 최덕준, 유지선목사와 유찬희, 서성권, 박의섭, 유우일, 유흥원 장로가 연이어 계속 시무하여 교회가 왕성해졌다.
같은 해에 정동교회가 세워졌다. 교인 강익태의 전도로 유한풍이 믿고 신자가 증가하여 40여 인이 모이니 김내범목사가 왕래하며 교회를 설립하고 유한풍이 집사가 되어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화용현교회6)가 세워졌다. 성진교인 남성호가 전도함에 신자가 많아져서 교회를 설립하였고 당시에 최선탁목사와 문재린조사가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은포교회가 세워졌다. 김약연장로의 전도로 심성문과 엄방진이 믿었고 신자가 계속 늘어남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최선탁목사와 문재린조사, 김용연, 김원변, 윤영복집사가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두도구교회가 세워졌다. 교인 강찬규, 홍일표가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여 신도들이 적지 않게 일어남에 따라 박걸선교사와 김내범이 연차 방문하여 교회를 설립하였다.
교회당 건축 후에는 이순창, 조명환, 조병수장로를 장립하고 당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에 간장암교회가 세워졌다. 교인 강백규의 전도로 김영섭, 김동의, 김동희 등 10여 명이 믿고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박걸선교사와 김영제목사가 순회하여 교회가 부흥을 하였고 예배당을 건축하고 현기윤을 장로로 장립하였으며 당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 용지향에 신풍교회가 세워졌다. 교인 진형권의 전도로 신자가 늘어나서 교회가 설립되었고 박걸선교사와 이병병목사7)가 순회하며 보살폈다.
같은 해에 일송정교회가 세워졌다. 교인 공원보와 박병섭의 전도로 신자가 늘어나서 교회가 설립되었고 박걸선교사와 이병하목사가 순회하며 섬겼다.
같은 해에 훈춘 경신향에 금당촌교회가 세워졌다. 오재영의 전도로 신자가 늘어났으며 배례사선교사와 이병하목사 순회하며 시무하였다.
5.총회시대( 1912~1923)
1912년 9월 1일에 조선예수교장로회가 평양 경창리 여성경학원에 회집하여 총회를 조직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립노회를 조직한지 5,6년 만에 교회가 각처에 많이 세워져서 사무의 양이 방대해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노회에서 총회 조직에 대한 안건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총회조직위원회가 조직되어 준비를 하고 1912년 9월 1일에 전 노회장 이눌서의 사회로 제 1회 총회가 성립되었다.
총회시대에 북간도지역은 처음에는 함경노회, 함북노회에 소속되었으나 1921년에는 간도노회의 성립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산하의 유일한 재외 노회가 되었다.
1) 함경노회 (1912~1917)소속시기
1912년 1월 29일 함경노회가 창립되어 원산 상리 상동예배당에서 제 1회로 소집되었다.
1912년,
훈춘 구사평교회가 세워졌다. 이태가 전도하여 3,4인이 믿게 되어 여러 시험을 거치며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병하목사가 책임을 맡았다.
같은 해에 의란구남 탕동교회가 8) 세워졌다. 교인 최석화가 지역에 와서 전도하여 새 신자가 증가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고 김내범목사가 성실하게 노력하여 당회를 조직하였다. 김순문장로가 책임을 맡았고 박걸, 부두일선교사와 최덕준목사가 연이어 교회를 섬겼다.
같은 해에 훈춘 마적달교회가 세워졌다. 리동춘이 전도하여 신자가 늘어났으며 배례사선교사와 이병하목사가 순회하며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하다문교회가 세워졌다. 리병하목사가 전도하였으며 배례사선교사와 함께 섬겼다.
1913년,
합명당교회(하마탕교회)가 세워졌다. 교인 구태선과 계봉우 등 십여 인이 집단으로 와서 거주하는 중에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김내범목사가 와서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후에 박걸, 부두일, 배례사(Fraser, Edward J.O)선교사와 최덕준목사가 연이어 시무하고 당회를 조직하였으며 구춘선, 김지송이 장로로 섬겼다. 교회가 성장하는 중에 교우 40여 명이 풍토병(토질병)으로 사망하여 민산해(Stanly H. Martin)의사가 와서 문제의 원인을 찾았으나 그 후에도 비참하였다.
같은 해에 구세동교회가 세워졌다. 교인 이종식 등 십여 명이 중국인의 토지를 매수하여 마을 이름을 구세동이라 짓고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김내범목사와 부두일, 박걸선교사, 김계안조사가 순회하며 섬겼다.
같은 해에 광제촌교회가 세워졌다. 교인 안극선과 김경필이 교회를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간도 명동교회에 여전도회가 조직되었고 수처 9) (여러 곳)에 교회가 설립되고 정재면조사가 임무를 다하였다.
같은 해에 명신동교회가 세워졌다. 교인 이봉구 등 십여 집의 교우들이 모여들어 예배당을 건축하고 예배를 시작하자 김내범목사가 교회설립을 하고 당회를 조직하였다. 이봉구, 채원휘, 노종욱이 장로로서 섬겼으며 교우는 200여 명에 이르렀고 부두일선교사와 이하영, 김유목목사 등이 연이어 섬겼다.
같은 해에 용정시교회 박걸선교사가 성진 등으로 전도여행을 다녔으며 부두일, 서고도, 배례사 등이 계속 간도에 와서 용정시교회를 섬겼다. 함경노회가 파송한 김내범전도목사가 용정에 와서 김계안을 장로로 장립하였으며 많은 교회 설립자10)가 되었다. 그는 강두화, 정재면, 박상룡, 김선관, 황신기, 김여용, 한덕일, 김택근, 이태준, 장석함 등을 장로로 세워 당회를 조직하였다.
1914년,
김내범목사가 교회11)를 설립하고 부두일, 박걸, 서고도선교사와 최덕준목사가 이어서 시무하였으며 당회가 조직되었으며 허상훈장로가 임무를 담당하였다.
같은 해에 하래성남교회12)가 세워졌다. 명천교인 김종필이 전도로 교인이 증가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고 교회를 설립하였다. 김내범목사와 박걸, 부두일선교사가 순회 시무하였으며 김종필이 장로가 되어 당회를 조직하였다. 1920년 일본군의 경신참변 시 대학살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다. 그 이후 교회와 학교는 차츰 회복되었다.
같은 해에 칠도구 광암교회가 세워졌다. 신자 이창언, 김용연, 김영옥이 개인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같은 해에 희망봉교회13)가 세워졌다. 교인 최창규, 채학구가 믿고 조덕관, 박창익이 학교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과 함께 예배를 시작하였다. 최덕준목사가 설립을 하였고 허상훈, 김순문조사가 시무하는 중에 일본군의 경신대학살 시 토벌대에 의해 교회가 폐지 당하였다.
같은 해에 창강교회가 세워졌다. 박창익(명동교회 교인)이 창강마을의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권하여 예배를 드리는 중 교회가 시작되어 서고도, 박걸선교사가 교회를 설립하고 최선택목사가 섬겼다.
같은 해에 영생동교회가 세워졌다. 유우일의 전도로 신자가 많아졌고 중국인의 토지를 사서 개척하는 중 신자들이 각처에서 몰려와서 예배당을 건축하며 마을 이름을 “영생”이라고 명하였으며 김내범목사가 설립예배를 드렸다. 김택조, 유한풍, 이용권이 장로로 시무하며 당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에 혼춘14)에 두도구교회가 세워졌다. 구현문, 이경호가 믿고 교회를 설립하므로 박걸, 서고도 선교사, 박극항조사가 순회하며 섬겼다.
같은 해에 훈춘 남별리교회가 세워졌다. 모태환이 전도하고 김내범목사가 설립하였으며 최천약, 이명순, 한인준이 집사로 인도자가 되었다. <훈춘한민회> 회장인 이명순이 장로가 되어 당회가 조직되었다. 일본군의 경신대토벌로 한민회 본부와 교회와 마을과 학교가 소실되었으며 최천약15)과 이명순16)도 학살당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 춘화향 사도구교회가 세워졌다. 이정권, 서윤훈이 믿고 전도하여 교회가 설립되어 최두철, 이영신, 권정해가 집사로 인도하다가 일제의 대학살에 무참하게 파괴당하였다.
1915년,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의 기록에 설립된 교회가 없다.
그러나 〈훈춘조선족이민사〉283쪽에 의하면 훈춘현성 서문밖 교회가 세워졌고 배례사선교사와 이병하 목사가 순회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포은동교회가 세워졌다. 배례사선교사와 이병하 목사사 순회 시무하였다.17)
1916년,
태양동교회18)가세워졌다. 김봉택, 김중흡이 예배를 보다가 신도들이 증가하여 김내범목사가 교회 설립하고 장로 백용흥, 김여술, 김선관, 조석칠, 곽계순 등으로 당회를 조직하여 섬기는 중에 경신대학살 시에 일본군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교회가 소실되고 완전히 무너졌으나 다시 회복되어 이전보다 부흥하였다.
같은 해에 응조암교회가 세워졌다. 최병주가 이주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부두일선교사와 이하영목사가 계속 시무하였으며 정형준이 장로가 되어 당회가 조직되었다.
같은 해에 동불타교회19)가 세워졌다. 오병원이 수년 동안 혼자 예배를 드리다가 신자가 증가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고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하영목사가 교회설립예배를 드렸으며 김내범목사가 시무하며 장로 오병원, 이춘재, 한처은 등과 함께 당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에 압막동교회20)가 세워졌다. 최치호 등 십여 호가 이주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고 김내범목사가 설립예배를 드렸으며 최덕준, 이하영목사가 관리하였고 이춘삼장로를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에 상통납자교회21)가 세워졌다. 독립투사 황병길이 믿고 전도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개종하여 교회가 설립되었고 박걸선교사가 순회하였다. 집사 김창건과 정대윤이 교회를 인도하였으며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도 세워져 활기차게 활동하는 중 경신대학살에 일본군의 방화로 교회와 학교가 소실되었다.
같은 해에 0지구교회22)가 세워졌다. 문병철이 믿은 후에 교회를 설립하고 김수경, 황운익이 집사로 인도자가 되었다.
같은 해에 전선촌교회가 세워졌다. 방두원, 한창동, 최문칠 등이 전도하여 개종자가 늘어남에 따라 박걸선교사가 교회를 설립하고 남녀학교를 세웠다. 한수량을 장로로 세워 당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에 칠도구에 연수동교회가 세워졌다. 김경일과 김순영이 개척하였고 신자가 증가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고 박걸선교사가 설립예배를 드렸고 최선택목사가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 오도구교회가 세워졌다. 리용성이 전도하여 세웠으며 교회를 지도하였다.
같은 해에 용정시교회가 김내범목사의 노력으로 천여 명이 수용될 만한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같은 해에 민산해가 용정에 와서 〈제창병원〉을 설립하였다.
같은 해에 〈부인전도회〉를 조직하였으며 임뵈뵈, 정신태, 김철나가 함께 섬겼으며 활동의 성과가 좋았다.
같은 해에 장백교회가 불신자의 모함으로 중국관헌에게 핍박을 받았다. 관헌들이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성경과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 태웠으며 의복과 기물들을 약탈하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무수히 난타하였다.
1917년,
낙원동교회가 세워졌다. 공리준이 그 마을에 와서 중국인의 땅을 사서 예배당을 건축하여 예배를 시작하였고 김내범목사가 설립예배를 드린 후에 마을 이름을 낙원동이라고 하였다.
같은 해에 무봉촌교회가 세워졌다. 배용규가 이사를 온 후, 20여 명의 계속 이주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고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최덕준과 김내범목사가 연속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청산리 영신동교회가 세워졌다. 이봉섭, 이문섭, 조윤실이 마을에 와서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으며 예배당을 건축하고 박걸선교사가 설립예배를 드렸다. 이사윤, 서인한, 이청춘 등이 연이어 장로직에 시무하였다. 교회가 일본군의 대학살과 중국 마적에게 유린당하고 소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죽지 않았다.
같은 해에 낙타하교회가 세워졌다. 김계안의 전도하여 설립되었고 이기홍집사가 인도를 맡았으며 교회가 점점 부흥되었다.
같은 해에 훈춘 숭례향에 소홍기하교회23)가 세워졌다. 배례사선교사와 리병하목사가 순회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 용지향에 송전동교회24)가 세워졌다. 배례사선교사와 리병하목사가 순회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 용지향에 장성촌교회25)가 세워졌다. 배례사선교사와 리병하목사가 순회 시무하였다.
2) 함북노회(1918 ~1921)소속시기
함경노회가 설립되고 6년 사이에 많은 교회가 설립되어 노회는 집회와 전도 및 교육활동의 효과와 편리를 위하여 분립의 필요성을 깨닫고 경성 이북과 간도는 함북노회, 명천 이남과 해삼위는 함남노회로 나누기로 결의하여 1917년 9월 1일 승동예배당에서 열린 제 6회 총회에서 분리 승인을 허락받았다. 그 후 11월 20일에 함북노회 조직회로 선교사 3인, 목사 2인, 장로 7인이 용정예배당에 모여서 회장 부두일, 부회장 김내범, 서기 채필근, 부서기 강두화, 회계 매도날 (D. A. MacDonald), 부회계 김약연을 선출하였다. 노회 안에 임사, 재정, 총계, 학무, 헌의, 규칙, 신학, 준시. 시찰 등의 각부를 설치하여 사무를 분담하였다. 함북노회 의안에 나오는 교회 중에 설립된 교회 명단에 나오지 않는 교회 이름이 10여 개가 넘는다.26)
1918년, 용정시교회에 박영헌목사가 전임목사로 왔다. 선교회가 성경학원을 설립하였다.
같은 해에 최선탁목사가 양무정자교회에 시무를 맡았다.
같은 해에 와룡동교회에 당회가 조직되었고 남인상, 지병학, 이병익, 함주익, 최희중 등이 장로로서 함께 시무하였다.
1918년,
전석동교회가 세워졌다. 안영환이 믿은 후 전도하여 교회가 설립되고 이병극, 김기석이 인도자가 되어 교회가 발전하였다.
같은 해에 청산리 백운평교회가 세워졌다. 권두혁, 박홍식이 와서 근처에 사는 신자들을 모아서 교회를 설립하였고 남녀 전도인들을 세워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였다. 그 후에 일본군의 경신대학살로 인하여 교회가 소실되고 교인들이 참변을 당하였다. 그 후에 참변을 극복하고 점차 복구하였다.
같은 해에 구호동교회가 세워졌다. 김상설, 이옥현 등이 신도 7,8 가족들과 이주하여 예배당을 건축하자 이하영목사가 설립예배를 드렸다. 그 후에 김상목목사가 시무하며 김상설, 채원휘, 김계홍, 한치훈 등을 장로로 세워 당회를 조직하고 남녀전도인을 세웠으며 예배당을 중건하였다.
같은 해에 옹성납자교회27)가 세워졌다. 이윤지, 신학봉이 마을에 내주하면서 교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김내범목사가 교회 설립예배를 들렸다.
같은 해에 장낙동교회28)가 세워졌다. 문경풍이 마을에 도착하여 땅을 개척하고 인근의 교회들을 모아서 예배당을 건축하고 예배를 드릴 때에 김내범목사가 와서 교회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에 십리평교회가 세워졌다. 함광실, 홍춘명, 김홍순 3인이 마을에 와서 예배를 시작하였고 교인이 불어나자 예배당을 건축하고 교회를 세워 김유목목사가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장백현 동평덕교회 이은경, 이동직조사가 전도하여 진빙, 동작동, 달나자에 각각 예배처소를 세웠다.‘
같은 해에 장동동교회28)가 세워졌다.
같은 해에 훈춘 용지향에 삼도구교회29)가 세워졌다. 배례사선교사와 리병하목사 순회하며 시무하였다.
1919년에 조선독립운동이 세차게 일어나서 북간도 교회에 직접, 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3.1만세운동 이후 3.13만세운동이 용정시를 중심으로 하여 수만 군중이 열광적으로 모여서 만세를 부르는 중에 중국 군경들의 발포로 말미암아 19명30)이 죽었으며 구류 감금된 교인이 허다하였으며 교회가 직면한 고난과 시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기타의 교회에도 일본의 탄압과 핍박이 파급되어 교회활동이 위축되었고 전도활동도 약화되었다.
1919년 양무정자교회에서 당회가 조직되어 한덕일, 강군선이 장로로 함께 섬겼으며 문재린조사가 시무하였다.
1919년에 두도구 간장암교회에 당회가 조직되었다. 만세운동과 국민회 무력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20년 10월에 일본군의 방화와 대학살의 참변을 겪었다. 교회와 학교가 함께 소실되었으며 30여 명의 교우들이 교회당 안에서 함께 불에 타죽었다.
1919년,
신흥교회가 세워졌다. 이태현의 전도로 7,8인이 믿고 모여서 예배를 드리며 예배당을 건축하자 최덕준목사가 설립예배를 주관하였다. 후에 김내범목사가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중강자교회가 세워졌다. 김관식목사가 교회를 설립하고 윤동호, 최동빈, 박동섭 집사가 인도자가 되어 지역에 학교도 세웠다.
1920년에 간도 독립군들의 조선 내 빈번한 침투와 봉오동전투 패배에 경악한 일본은 〈불령선인초토화계획〉을 세우고 경신대학살이 일으켰다. 일본의 약탈과 방화로 청산리 백운평교회의 예배당과 학교가 전소되었고, 간장암교회의 예배당과 학교가 전소되었으며 33명의 교우들이 학살과 불에 타죽었으며 또한 가옥이 불에 탈 때 14명이 즉사하였다. 양정자교회(양무정자) 예배당과 학교가 전소되었다. 용정의 권서인 이근식과 의란, 구혼, 춘남, 별리 등 교회 장로 김문순, 이명순과 교인 50명이 참살되었고 옥에 갇힌 자와 징역형을 받은 자와 나그네 되어 유리하는 자와 행방불명자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31)
장백현교회는 일본경관에게 소실 당하였으며 교인들은 포박을 당하여 중국경관에게 넘겨졌으며 벌금을 내고 풀려났다. 교회가 불에 탄 관계로 이은향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32)
명동교회 중학교실이 소실되었고. 허익근, 박용훈, 최홍택이 학살당하였으며, 김병영은 중국군에게 총살당하였고 한상수, 장성순은 사형을 당하였고 복역자, 구금자가 90여 인에 이르렀다.
장은평교회는 일본군에 의해 교회가 소실되었으며 불에 탄자와 옥에 갇힌 자가 십여 인이고 합마당교회는 가옥 3채가 소실되고 3사람이 피살되었으며 구세동교회는 건물이 소실되었으며 핍박과 고난을 거듭 겪었다. 함북노회에 속해 있는 교회가 겪은 환난은 다 찾아서 일일이 다 설명하기가 어렵다.33)
1920년,
토성보교회가 분립되었다. 용정교회에서 분립되는 중에 교우가 중국인의 땅을 구입하여 가옥 1동은 예배당으로 다른1동은 학교로 기부하였다. 강두송목사가 교회 설립예배를 드렸고 당회를 조직하였다. 김도현, 이광수, 김찬성, 이은경, 신찬선 등이 함께 장로로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호천포교회가 서창희, 지송암조사와 김병두영수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교인이 늘어났다.
같은 해에 용정동산교회가 세워졌으며 리성국이 설립자로 알려졌다.34)
같은 해에 용정에 룡강동교회가 세워졌다.35)
같은 해에 두도구교회 관리가 이성국과 최선택목사에게 맡겨지다.
같은 해에 노두동교회가 세워졌다. 노두동의 신자가 명신교회로 다니다가 분립하여 교회를 세웠다. 이하영과 김유목목사기 섬겼다.
같은 해에 남양동교회가 세워졌다. 조성극과 임종묵이 함께 예배당을 건축하고 예배드리면서 최덕준목사가 설립예배를 드렸다. 김내범목사가 시무하였으며 임종묵이 인도자가 되었다.
같은 해에 합성리교회가 세워졌다.
같은 해에 의란구에 창신동교회가 세워졌다. 최군왕, 김순효가 함께 교회를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김보국 가족이 모여서 예배하므로 흥신동교회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에 김희순, 김재길 양인이 협력하여 태양동에 교회를 세웠다.
같은 해에 훈춘 덕혜향에 북구교회, 청수동교회, 동강자교회가 세워졌다.36) 배례사 선교사와 리병하목사가 함께 설립하였으며 순회,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 마가점에 마가점교회가 세워졌고 리용성이 지도하였다.
함북노회 소속시기에 남녀소학교를 설치한 교회 명단에 형납자교회, 은동자교회, 동구교회가 나오는데 이 교회들은 설립교회 명단에 이름이 없으므로 확인이 필요하다.
3)간도노회 (1921년~1923년)소속시기
1921년 10회 총회에서 회령과 성진시찰구역이 함북노회로 조정되고 간도일대는 간도노회로 독립하였다.
1902년 구례선이 홍순국과 함께 함경도를 경유하여 간도와 해삼위에 전도를 시작한 이래로 중국인 싼진선생, 김문삼조사와 업아력(A. F. Robb)선교사, 김계안조사와 부두일, 박걸선교사 등과 김내범 목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신자가 늘어나고 교회가 부흥하였으므로 총회에서 승인을 받아 1921년 12월 1일 토성보예배당에서 모여 간도노회가 조직되었다.37) 선교사 2인, 목사 5인, 장로 10인이 참석하였으며 회장에 김내범목사, 부회장에 배례사선교사, 서기에 문재린장로 부서기에 허상훈장로, 회계에 강두화목사, 부회계에 박걸선교사를 선출하였다.38)
1921년 11월에 훈춘 경신향에 서가산교회가 세워졌다. 리병하목사와 배례사선교사가 순회하며 시무하였다.39)
1922년,
훈춘현 덕혜향에 중구교회가 세워졌다. 리병하목사와 배례사선교사가 순회하며 시무하였다.40)
같은 해에 포은동교회가 경흥읍에서 분립되었다. 교인 선우화와 고중광이 경흡읍교회에 오가며 예배를 드리다가 포은동에 교회를 건축하였다.41)
같은 해에 간도노회에서 용정에 있는 전 〈삼국전도회〉건물을 용정교회에 기부하기로 결정하였다.42)
1923년,
용정현에 팔가자교회가 세워졌다.43)
같은 해에 훈춘 춘화향에 서북구교회가 세워졌다. 리병하목사와 배례사선교사가 순회하며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 용지향에 사소봉교회가 세워졌다. 리병하목사와 배례사선교사가 순회하며 시무하였다.
같은 해에 훈춘 덕혜향에 라권구교회가 세워졌다. 리병하목사와 배례사선교사가 순회하며 시무하였다.44)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하권의 간도노회의 1921년, 1922년, 1923년 노회의안에 나오는 교회 명단 중에 하강포교회, 구수허교회, 순도구교회, 육양동교회. 남구교회, 잠빗골교회, 계림촌교회는 설립된 교회 명단에 없었던 이름으로 설립교회 명단에 실수로 누락된 것인지 아니면 의안에 잘못 기재된 것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이상으로 1906년에서 1923년까지 북간도에 세워진 교회이름과 설립자, 장로, 목회자, 선교사들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18년 동안 그들이 협력해서 세운 교회가 무려 92개나 된다. 여기에 에는 명동교회여전도회가 정재면조사와 함께 개척한 “수처”교회가 포함되지 않았으며 또한 노회 의안에서 언급된 21개교회도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교회는 당회가 있는 조직교회와 당회가 없는 미조직교회와 전도 초기 단계에 세워진 작은 기도처로 구성되어 있었다.45)일본군이 경신대학살을 자행한 후에 교회 방화에 대한 비난에 직면하자 교회가 아니라 “곳곳에 있는 모옥”46)을 소각했다고 말하였는데 그 것이 바로 기도처교회였다.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에 발간한 〈종교사〉152쪽에 보면 1922년 캐나다장로회 교회는 조직교회 30개, 미조직교회 57개, 기도처 28개로 총 115개로 나온다. 본 글에서 계수된 92개라는 숫자가 과장이 아니고 거의 사실에 부합하다는 말이다. 포은동교회를 비롯하여 몇 개의 교회 이름이 본 글에서 중복되고 있지만 앞으로 계속 노력하여 20여개의 이름을 더 찾아내야 한다.
6.독립운동을 추동한 교회들과 설립자들
1)독립운동을 추동한 교회들
이름이 파악된 92개 교회들 대부분이 북간도의 독립운동의 진원지로서 독립운동을 추동하였다. 교회는 구국신앙과 구국교육론으로 무장되었으며 교육 활동과 사회참여 곧 간민자치활동으로 1900년대 초반 20여 년 간의 독립운동을 견인하였다.
1928년 조사표에 의하면 캐나다장로회에 속한 조선인 목사(교회)가 운영하는 학교가 44개였으며, 1926년 조사표에 의하면 캐나다장로회 선교부가 운영하는 학교는 19개였다. 이는 거의 모든 교회 산하에 근대식 학교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47)
용정시교회는 영신학교, 양무정자교회는 제3소학교, 와룡동교회는 창동학교, 명동교회는 명동학교, 호천포교회는 청호학교, 만진기교회는 대흥학교, 대황구교회는 북일학교, 계림촌교회는 진명학교, 구세동교회는 숭신학교, 동불사교회는 광신학교, 장은평교회는 보진학교, 적안평교회는 정동교회(慈洞 소재)는 정동학교 걸만동교회는 화성학교, 간장암교회는 흥동학교, 신풍교회는 신풍학교, 구호동교회는 신흥학교, 소회막동교회는 길성학교, 신흥동교회는 신흥학교, 광동동교회는 광동학교, 장흥동교회는 진동학교, 노두구교회는 혜성학교, 장동교회는 창동(彰東)학교, 남평동교회는 덕성학교, 소영자교회는 길동기독학당 (광성학교), 구사평교회는 구사평학교, 송전동교회는 송동학교, 남양동교회는 덕성학교, 남별리교회는 남별리사숙, 동구교회에 영생학교, 연통라자교회는 광동학교, 소홍기하교회는 양성제학교, 남구교회는 정민학교, 낙타하자교회는 공진학교, 석상하자는 기독동명학교, 합명당교회는 보진학교를 세워서 독립운동의 골간이 되는 인재를 양성하였다.48) 이들 학교 중에서 <3.13> 용정만세 시위를 강력하게 추진하며 〈독립운동의사부〉를 강박한 학생들은 정동교회의 정동학교, 와룡동교회의 창동학교, 국자가교회(소영자교회)의 광성학교 그리고 명동교회의 명동학교의 학생들이었으며 4개 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해서 〈국민회군〉의 근간이 되는 〈충렬대〉와 〈청년맹호단〉이 조직되었다. 장암동의 영신학교(흥동학교) 또한 교사들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기독교동지청년회〉를 조직하여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교회의 독립운동의 또 다른 한축은 조선이주민들의 권익과 협동을 추구하는 간민자치운동으로 나타났다.〈간민교육회〉는 1909년에 조선인 간민들의 민족교육과 자치, 생활향상을 표방하며 북간도 전체를 아우르는 자치단체로서 초대회장 이동춘을 비롯하여 용정시교회의 박무림과 구춘선, 용정중앙교회의 정재면, 명동교회의 박찬익이 설립에 앞장섰다. 1910년의 주요성원들 또한 용정시교회, 용정정중앙교회, 명동교회에 속한 인사들이 많았다.
간민교육회 뒤를 이어서 북간도 조선인 자치를 표방하며 1913년 4월에 창립대회를 가진 〈간민회〉주요성원 또한 캐나다장로회 지교회 명동교회, 용정시교회, 용정중양교회, 와룡동교회, 합명당교회 지도자들이었다. 화룡현분회의 지도자들 또한 그 지역 안에 있는 장로회교회 소속인사들이 태반이었고 연길현분회도 비슷하였다.
용정의 〈3.13〉만세시위는 장로회 인사들이 1919년 1월 25일에 국자가 소영자에서 소집된 〈기독교전도대회총회〉로부터 시발되었다. 그들은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운동을 주동적으로 이끌어갈 지역 대표 30 여명의 대표를 선출하였고 2차 모임에서 김약연, 정재면, 리중집을 연해주로, 강봉우를 조선 국내로 파견하여 공동투쟁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그 후 구춘선, 김영학, 고평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33인이 2월 18일과 20일에 걸쳐서 국자가 하장리 박동원의 집과 국자가 적암평 리동식의 집에서 회의를 열고 독립운동의 형식과 방법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들은 모임에서 3가지 사항을 결의하였다. 첫째, 연변 내 각 교회와 모든 단체는 단결, 협력하여 독립운동에 힘을 다할 것, 둘째, 연변 내 모든 단체는 연해주에서 “독립선언서”의 공포와 동시에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할 것, 셋째,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면 연변지구의 각 단체는 룡정에 모여 독립시위를 전개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49)이밖에도 독립운동의사부를 설립하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시위행진 시 일제군경과 무리적인 충돌이 있을 경우를 대비하여 광복단을 조직하고 연변지구를 연길, 룡정, 자동, 팔도구, 평강 등 5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의 적임자를 임명하였다. 연길에는 김영학, 리홍준, 박동원, 리성근, 룡정촌에는 김정이, 자동에는 백유정이, 팔도구에는 류례균이 평강에는 고동환이 각각 임명되었다.50) 그 후 조선의 〈3.1〉운동의 소식을 전해들은 그들은 3월 8일에 비밀회의를 열고 3월 13일에 룡정촌에서 〈조선독립축하회〉라는 명목으로 군중집회를 열기로 하였다. 그리고 회장에 장로회 목사 김영학, 부회장에 배형식을 선출하였으며 연변의 각계각층의 인사들에게 독립만세시위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3만 명이 모이는 〈3.13〉 용정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13〉만세시위와 같은 날에 연길현 이도구와 화룡현 양무정자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이 두 개의 만세시위에 이도구교회, 장은평교회, 양무정자교회, 화용현교회들이 참여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열창하였다. 〈3.20〉훈춘만세시위에는 황병길과 로종환, 리명순, 라정화, 량하구 등이 연통라자교회와 광동학교, 남별리교회와 남별리사숙, 대황구교회와 북일학교, 동구교회의 동구학교, 전선촌교회의 전선촌학교 그리고 훈춘성내교회가 함께 주도한 시위로 3천여 명이 모였고 두만강대안의 각지 기독교신도들의 대표도 참가하였다.51)
〈3.13〉용정만세시위 후에 만들어진 재외 조선인 최대의 독립운동단체인 〈간도국민회〉토대는 처음부터 캐나다장로회 지회였다. 대부분의 주요 성원들이 회장인 구춘선과 부회장인 강구우를 비롯하며 장로회 교회 소속 인사들이었다.52) 중앙총회는 합명당교회가 있는 하마탕에 본부를 두었으며 후에는 의란구 구룡평으로 옮겼는데 의란구에는 의란골남교회와 의란골북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국민회의 활동, 토의, 연락 장소는 일본 영사관이 간섭할 수 없었던 치외법권 지역인 영국조계의 캐나다제창병원 지하실 안에 두었다. 본부 아래 5개의 지방총회가 있었는데 중부지방총회는 국자가서구, 동부총회는 연결현 화련리, 남부총회는 화룡현 명동, 서부총회는 숭례향 명월구, 연길현 합수평 리대방자에 두었으며 1920년 8월 통계에 의하면 촌지회가 총 100여 개에 있었다.53) 당시 국민회 회원이 8,000명이며 지회가 100여 개에 이르렀다는 것은 당시 캐나다장로회 교인 수와 지회 숫자와 맞아 떨어진다. 또한 국민회 본부가 정부나 할 수 있는 〈군적등기회〉를 반포하고 징집령을 내리고 군자금을 많이 모금할 수 있었던 것은 캐나다장로회 지회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훈춘현의 독립운동의 역사를 찬란하게 수놓는 〈훈춘한민회〉의 배경도 캐나다장로회 교회이다. 〈한민회〉의 전신은 〈기독교교우회〉이며 황병길과 오병묵이 교우들의 신앙교류와 복음전파, 학교 건립과 구국교육, 독립운동 및 계몽활동과 미신타파에 목적을 두고 10년 가까이 훈춘성내교회, 하다문교회, 전선촌교회, 신풍교회, 대황구교회, 차대인구교회 등의 지도자들과 함께 운동을 이끌었다.
2) 캐나다장로회 지 교회 설립자들의 독립운동
1) 구춘선 : 용정시교회의 창립자인 구춘선은 길동전도대, 간민교육회, 간민회의 주요성원 이었으며〈3.13〉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의사부의 회장이었으며 3월 26일에는 국자가에서 2천명이 모이는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용정 시위 후에 만들어진 조선독립기성총회와 간도국민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국민회의 회장으로서 〈국민회군〉을 창설하였으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승전의 토대를 닦았다. 그는 하마탕교회 조사였으며 하마탕에 보진학교를 세웠다.
2) 남공선 : 와룡교회 창립자 중의 한 사람인 남공선은 와룡동에서 와룡농장학원을 운영하며 간민교육회 활동에 참여를 하였으며 간민회에서 〈법률연구〉과장을 맡았고 1917년 러시아로 이주하여 〈한족공보〉 주필로 활동하였다.
3) 정재면 : 용정중앙교회 창립자인 정재면은 신민회에 소속된 인사로서 명동학교 선생으로 초빙 받아 용정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명동촌 사람들을 전도하였으며 명동학교 설립에 많은 부분 기여하였다. 그는 길동전도대, 간민교육회, 간민회, 한족독립기성총회, 간도국민회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아서 감당하였으며 구국교육과 구국신앙을 제창하였다.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나중에는 신학을 해서 목사임직을 받았다.
4) 김약연 : 명동교회 창립자인 김약연은 길동전도대, 간민교육회, 간민회에서 주요성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명동학교를 세웠다. 평양신학교 1년 수학 후에 명동교회 목사가 되었고 은진학교 이사장으로 활동하였다.
5) 김하규: 명동교회 창립자인 김하규는 김약연과 함께 명동학교를 세웠고 길동전도대와 간민교육회에서 활동하였다.
6) 김정규 : 명동교회 창립자인 김정규는 김약연과 함께 명동학교를 세웠고 후에 교장으로서 활동하였다. 간민교육회 회원이었다.
7) 최봉렬 : 호천포교회 창립자인 최봉렬은 청호학교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8) 오병묵 : 훈춘성내 교회 창립자인 오병묵은 와룡동 창동중학교와, 남별리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면서 황병길과 함께 〈기독교교우회〉를 조직하여 민족교육과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9) 황병길 : 및훈춘성내 교회 창립자인 황병길은〈기독교교우회〉를 조직해서 복음전파와 독립운동, 미신타파와 근대교육을 실시하였다. 〈3.13〉용정만세시위 후에 3월 20일, 3월 30일, 4월 1일 3차례에 걸쳐서 훈춘현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훈춘한민회〉를 조직하여 교섭계장과 경비대장의 임무를 맡았으며 1919년 7월에 결사대를 모집하여 〈급진단〉을 만들었으며 강병일의 〈의사단〉, 최경천의 〈포수단〉과 연합하여 〈훈춘한민회 군사부〉를 만들어서 무장독립투쟁의 선두에 나섰다. 그는 신풍학교를 세웠으며 교회와 지사들의 학교 설립을 적극 지원하였다.
10) 김강 : 차대인구교회를 설립한 김강은 105인 사건의 수사를 피해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간민회 일본조사부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에 대동협신회, 동제회에 가입하였으며 1919년 〈3.13〉용정 만세시위 후, 간도국민회에서 활동하였으며 서성권, 강백규 등과 함께 간도청년회를 조직하였으며 1920년 11월에 일본 기병연대에 체포된 뒤 연길현 동불사 북구에서 피살되었다.
11) 한수현 : 만진기교회 설립자인 한수현은 청호학교 교사로서 활동하였다.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양진섭 : 장은평의 설립자인 양진섭은 보진학교를 세웠으며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활동과 간도국민회 지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2) 김계안 : 적안평교회 설립자인 김계안은 1913년에 용정교회 장로로 장립되었으며 여러 교회 창립과 학교 설립에 기여하였다.
13) 유한풍 : 정동교회 설립자인 유한풍은 강백규, 강익태와 함께 자동툰 후저동에 농가 한 채를 사서 정도서숙을 시작하였다. 유한풍은 정동서숙의 학감으로 일하였으며 간민교육회, 간민회 성원으로 활동하였다.
14) 강익태 : 정동교회 설립자인 강익태는 정동중학교의 교사로 활동하였다.
15) 강백규 : 간장암교회 설립자 강백규는 정동서숙과 호천포에 청호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서전서숙에서수학 하였으며 간민교육회, 간민회의 주요 성원이었다. 그는 조선독립운동의사부의 일원으로 3월 8일에 김영학과 함께 비밀회의를 열고 3월 13일에 룡정촌에서 조선독립축하회 명목으로 대중집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3.13〉 용정만세시위 후에 조직된 조선독립기성총회의 통신부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조선독립기성총회가 간도국민회로 재편성되자 와룡동에서 서성권, 강상모, 김강 등과 간도청년회를 만들었고 후에는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대한청년단을 조직하여 무력투쟁을 하기도 하였다.
16) 김동희 : 간장암교회 설립자 김동희는 1919년 1월 25일 국자가 소영자에서 열린 기독교대전도총회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할 30여 명의 비밀요원으로 선발되어 의란구지역을 책임 맡았다.
17) 맹정국 : 금당촌교회 창립자인 맹정국은 훈춘한민회 군사부 참사로서 1920년 초부터 무장투쟁을 시작하여 일본헌병주재소 습격, 경원군 일본수비대 사살, 모연금 등의 한민회 군사부 활동에 참여하였다.
18) 오재영 : 금당촌교회의 설립자인 오재영은 금당서숙을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항일사상을 선양하였다.
19) 김순문 : 의란구남 탕동교회 설립자인 김순문은 조선독립기성총회의 의사부원으로 활동하였다.
20) 이동춘 : 마적달교회 창립자인 이동춘은 양정학당의 설립자로 한국과 중국 학생들을 위하 국제학교를 만들었다. 소영자 길동기독학당의 교장으로 재직하였으며 간민교육회를 조직해서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간민교육회 대표로서 정재면, 박찬익, 장기영과 함께 중화민국 부총통 여원홍을 면담하여 간민자치회 성립인가와 지지와 원조를 청원하였다. 간민회에서는 식산과장으로서 간민들의 의식주개선과 생활향상을 위해 수고하였다. 농상회를 만들어서 농업과 상업 진흥을 표방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꾀하였다. 대한인국민회 간도책임자였으며 길림변무독판 오록정의 임명으로 변무공서 직원으로 공무를 보면서 간민교육회와 간민회가 중국 정부의 보호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21) 계봉우 : 합명당교회의 설립자인 계봉우는 1910년 12월에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길동전도대, 간민교육회와간민회에 활동을 하였으며 화룡현 구세동의 기독교 소학교, 광성중학교에서 교사로 일하였다. 그는 청년친목회와 대동신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그는 대동신협회 기관지인 대진의 주필로서 역사와 수신교과서를 집필하였다.
22) 이종식 : 구세동교회를 세운 이종식은 구세동교회 산하의 기독교회소학교와 숭신학교에서 교사로 일하였다.
23) 허상훈 : 교회 창립자인 허상훈장로는 1941년 캐나다장로회 선교부가 용정에서 강제로 철수당할 때 선교부에게 제창병원 관련 재산 관리를 부탁받았다.
24) 박창익 : 창강교회 창립자인 박창익(朴昌翊)은 명동교회 성도였으며 박찬익(朴贊翊)과 동일인. 간민교육회 부회장. 간민교육회 대표로 이동춘, 정재면, 장기영과 함께 북경 중화민국 부총통인 여원홍을 만나서 조선인자치 인가와 민국정부의 지지와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 후 간민회 서기로 활동하였다.
25) 이명순 : 남별리교회 창립자 이명순은 남별리학교의 교사, 1919년 4월 훈춘한민회를 조직, 회장으로 활동하며 1920년 5월에 간도국민회와 연합하였으나 지방조직을 유지시키며 활동하였다. 1919년 말에 한민회는 훈춘현 각지에 29개 지부가 설치되었으며 국민회와 연합 후에 한민회 100명의 군인을 북로도독부에 인계하고 다시 군인을 모집하였다. 이명순은 1920년 11월 4일 일본군 19사단 38여단과 삼도구에서 교전 중 전사하였다.
26) 조성극 : 노두동과 남양동의 창립자 조성극은 제창병원에서 의사수련을 받아 의사가 된 제창병원 수련의 1기생이다.
27) 이태현 : 신흥교회 창립자인 이태현은 연길현 적안평 배문학교의 교사로 활동하였다.
28) 김관식 : 중강자교회를 창립자 김관식은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후 북간도로 가는 도중 함경남도 이원에서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그는 당시 기독교에 입교하여 회령지역 순회전도사로 활동하다가 경1917년 경흥교회 장로가 되었으며 1919년 4월 12일 용정에서 5천명 모이는 만세 시위 집회를 이끌었으며 임시정부 군자금모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캐나다 토론토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유학하여 구약을 전공하였다.
30) 김내범 : 교회 창립자인 김내범은 1913년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같은 해 9월 15일에 용정에 도착하여 북간도 순회목사로 첫발을 디뎠다. 간민회의 활동을 지지하며 간민자치와 교육에 앞장섰고〈3.13〉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21년 간도노회를 설립하고 초대 노회장이 되었다.
31) 박무림 : 용정시교회 창립자인 박무림(박정서)은 신민회의 멤버로서 이상설과 함께 1906년 가을에 용정으로 왔다. 이상설이 용정촌 기독교인 최병익의 집을 사서 서전서숙을 세울 때 함께 창립자가 되었다. 그러나 1907년 이상설이 헤이그로 떠나면서 서전서숙이 문을 닫게 되자 그는 명동촌으로 가서 서전서숙 출신인 김학연과 함께 명동서숙을 세우고 숙장이 되었다. 그는 〈간민교육회〉와 〈간민회〉주요성원으로 활동하였다.
32) 홍순국 : 용정시교회 창립자인 홍순국은 캐나다선교사 구례선의 어학교사였으며 그와 함께 북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 지방을 순회 전도하였다. 그는 구례선을 도와서 캐나다장로회의 북간도선교의 문을 열었다.
33) 한수량 :호천포교회 창립자인 한수량은 훈춘한민회 군사부 (1920년 5월 이후) 경호대장 으로 직분을 맡았다. 훈춘한민회 군사부는 6월에 있었던 봉오동전투와 10월의 청산리전투에 (개척, 394쪽)에 참여를 하였다. 청산리로 가지 않은 독립군들은 훈춘 삼도구에서 일구 19사단 38여단 78연대 2개 중대와 교전하여 승리하였으나 이명순회장과 라정화 참모장이 전사하였다.
간도출병사는 “11월 4일 삼도구 부근 북쪽 약 3리 지점에서 약 30명의 적과 교전하였으나 적은 깊은 밀림으로 숨어들어갔고 마치 시간도 밤아 되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추격을 중지하였다. 이 전투에서 보병 소위 이다 군페이 및 병졸 4명이 부상을 당했다. 적의 손해는 상세히 알지 못하지만, 유기된 사체 3구가 있었다. 원래 한민회 회장 이명순 역시 그 중 한 명인 듯하다.”<간도출병사 22쪽>
34) 국자가교회 장로 유찬희, 서성권은 한족독립기성총회 재무부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한족독립기성총회 명칭 변경 후, 유찬희는 간도국민회 재무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서성권은 간도국민회 산하단체인 간도청년회를 강백규와 함께 조직하고 회장의 직분을 감당하였다. 강백규는 부회장이었다.(개척 374, 376쪽)
서성권은 와룡동 창동학교 교사였으며 국자가교회 장로였다. 개척 571쪽, 철형광복단 멤버였다.574쪽 개척
35) 장은평교회 장로 양형식과 이태언은 국민회 서부지회 주요간부였으며 이태언 장로는 장은평 보진학교 교감으로도 활동하였다.
이상으로 1923년까지 캐나다장로회 산하 교회 창립자 또는 지도자로 밝혀진 사람들이 북간도독립운동에 참여한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대부분 창립자들도 독립운도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교회와 역사를 회복하기 위하여, 일본의 대학살과 이념 대립 속에서 핍박과 비판과 모략 속에서 방황했던 교회의 길이 다시 반복이 되지 않도록 많은 연구들이 있길 희망한다.
7.북간도교회는 어디에
지금까지 92개의 교회 이름과 설립자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당시 교회는 청나라 또는 동북군벌의 위협, 중국 지주들의 위협, 일제 군경의 위협, 마적과 토비들의 위협, 공산주의에 의한 위협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믿었다. 성도들은 독립과 해방의 날을 확신하며 고뇌하며 흔들리며 낙심하며 절망하며 아주 특별한 조선인 디아스포라교회를 세웠다. 북간도교회는 공동체가 되어
첫째, 성도들의 가난과 수탈과 착취와 안전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며 풀어나갔다. 영생동교회, 장은평교회, 구세동교회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둘째, 수평적 교회를 세우고자 하였다. 천민의 삶을 억압하였던 유교의 양반관료계급의 차별을인정하지 않았다. 그 흔적을 연통라자교회, 훈춘성내교회, 남별리교회 등에서 볼 수 있다.
셋째, 구국신앙으로 일제 식민지에 저항하였다. 〈3.13〉용정만세시위에 참여한 대다수가 캐나다장로회 교우들이었다. 그리고 그 후부터 5월 1일까지 연변에서 46회 만세시위가 열렸는데 천도교와 대종교가 주도한 소수의 집회를 제한 나머지 집회는 장로교회와 지도자들이 주도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군은 경신대학살에서 장로교회와 그 마을들을 표적삼아서 초토화시켰다. 청산리백운평교회, 장암동교회, 의란구교회, 남별리교회, 금당촌 교회 등 50여 개에 이르는 교회가 불에 탔거나 참변을 당하였다.
넷째, 활발한 구국교육의 장이 되었다. 1928년 조사표에 의하면 캐나다장로회에 속한 교회와 캐나다장로회 선교부가 운영하는 학교가 60여 개였으며, 서굉일은〈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238쪽에서 〈십자군〉이라는 잡지에 나온 글을 재인용하여 1913년에 북가도 캐나다장로회 산하에 교회와 학교가 병립한 교회가 36개였다고 쓰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대부분의 교회들이 산하에 학교를 세웠다. 〈3.13〉용정만세시위운동에서 학생 동원을 맡았던 정동학교, 광성학교, 창동학교, 명동학교가 다 미션스쿨이었다.
다섯째, 사회주의 사조에 휩쓸려 교회가 내홍과 분규를 겪으며 양분되었다. 교회 내 진보주의자들은 계급혁명과 소비에트정권 옹호, 약소민족 해방을 약속한 레닌과 연대를 주장하는 이동휘가 위원장으로 있는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여 교회를 떠났고, 남은 자들은 사회주의의 흐름으로부터 공격당하며 흔들리는 교회를 지키고자 방어적이고 보수적인 자세로 악전고투를 벌여야 했다. 안타깝게도 간도국민회는 진보 크리스천의 대표 격인 이동휘가 임시정부를 탈퇴한 후에 구춘선회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공산당에 가입하면서 자동적으로 해체되었다. 일본군에게 최초의 참패를 안겨주었던 조선의 최대 기독교 독립운동단체인 간도국민회가 사회주의가 던진 이념분규로 말미암아 스스로 무너진 것은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경종이 아닐 수 없다. 그 후로 교회와 미션 스쿨은 제국주의의 앞잡이, 아편과 미신으로 매도당하면서 북간도에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했다.
북간도교회 설립자들에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었다. 어디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며 쉴 수가 없었던 그들은 교회 안에서 자유와 평안과 위로를 받았다. 교회는 그들에게 피난처였으며 안식처였다. 이방인으로서 유리 방랑하며 고달프게 살던 그들은 십자가에서 절대 평화와 구원, 절대사랑과 희망을 체험하였다. 그들은 캐나다장로회의 치외법권 영역 속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과거의 자신들처럼 불안과 공포, 절대절망에 빠져있는 북간도의 동포들을 절망과 죽음에서 구원하고자 화산 같은 가슴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둘째 교육 구국의 의지를 가진 독립 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은 학교 창립자 또는 교장과 교사로서 민족교육을 주도하였으며 역사의식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체육과 군사훈련까지도 모색하였다. 교육 구국의 신념으로 양육한 학생들이〈3.13〉용정만세시위 학생동원과 질서, 안전 유지를 책임 졌다. 그리고 훈춘현, 연길현, 화룡현 만세시위에서도 기동성과 조직력을 발휘하였다. 그 후 그들은 독립운동단체를 만들었으며 청년들과 함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3.13〉만세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와룡동 창동학교와 명동학교는 교회 설립자들이 세운 학교이고 광성학교와 정동학교에는 교회 설립자들이 교사로서 학생 교육을 주도한 학교들로서 많은 독립운동의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셋째 구국 신앙을 가진 독립 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은 서양의 국가들처럼 조선인들이 기독교를 믿고 개화되어 생활과 사회가 근대화 되면 나라를 되찾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들은 한 마을에 한 개 교회와 한 개 학교를 세우려는 의지를 가지고 교회와 학교 설립을 동시에 추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캐나다선교사들의 독립운동 지지는 그들에게 기폭제가 되었으며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그들은 성경 공부와 사경회, 시찰회와 노회, 청년회를 비롯한 각종 신도회 활동을 통해서 함께 기도하며 독립의연금을 모으며 정보를 교환하였다. 드디어 1919년 1월 25일 국자가 소영자에서 열린 기독교대전도총회에서 그들은 파리강화회의 참여한 김규식의 요구대로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만세계에 알릴 만세운동을 전개할 준비를 위해 30여명의 비밀요원을 선발하여 북간도지역을 분담하였다. 그리고 전 북간도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지휘할 〈조선독립운동의사부〉만들었고 3월 13일에 룡정촌에서 〈조선독립축하회〉라는 명목으로 군중집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회장에 장로회 목사 김영학, 부회장에 배형식을 선출하였으며 연변의 각계각층의 인사들에게 독립만세시위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3만 명이 모이는 경천동지할 〈3.13〉 용정만세시위가 일어났다.
1900년대 초반 4반세기 북간도는 조선독립운동으로 화산처럼 끓어올랐다. 그 중심에 캐나다장로회 교회들이 있었고 교회 창립자들이 있었다. 그들은〈간민교육회〉와〈간민회〉창립자들이었고 주요멤버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3.13〉만세시위 후에 〈간도국민회〉와 〈훈춘한민회〉등을 조직하여 무장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 결과로 교회는 1920년 일본군의 〈경신대학살〉의 표적이 되었으며 그 대가를 가혹하게 치러야 했다.
북간도 조선인 디아스포라들의 화산처럼 뜨거운 신앙고백, 투철한 구국교육과 가슴 절절한 구국신앙과 그리고 사회주의 사조로 인한 각 분야의 내홍은 오늘 코로나사태에 직면한 한국교회에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20년대에 북간도교회가 겪은 진보와 보수의 갈등은 해방이후 한국교회가 겪은 갈등의 예고편이었다.
실로 북간도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모세의 광야교회였다. 광야교회는 우리가 길을 잃을 때 돌아가는 모형의 교회이며 한국교회의 DNA가 되어야 하는 십자가를 진 교회이다. 그러나 한국기독교사에는 북간도 교회의 자리가 없다. 민경배가 쓴 〈한국기독교회사〉에도, 김명구가 쓴 〈복음주의자 시각으로 보는 한국의 기독교 역사 한국 기독교사 1 – 1945년까지〉에도 옥성득이 쓴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에도 북간도교회는 전혀 거론 되지 않는다.
교회가 있었던 곳은 그들의 조국이 아니어서 그들을 추모하지 않고 그들의 조국은 그들을 잊어서 추모하지 않는다. 교회 또한 그들을 어둠 속에 묻었다.
북간도의 독립운동은 자랑하면서 독립운동의 모체였던 교회는 제거해버린 역사 왜곡과 침묵이 가슴 아프다.
2021.1.1.금
우담초라하니
미주
1). 윌리엄 스코트 저 〈 한국에 온 캐나다사람들〉, 82쪽 2). 양전백, 함태영, 김영훈 원저, 이교남 번역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60, 61쪽
3). 선교사공의회시대 – 조선에 기독교가 전파 된지 10년 미만에 교회가 많이 세워졌지만 상회가 없어서 여러 위원들이 공의회를 조직하여 적법대로 설립할 치리회가 구성되기 전까지 전권으로 치리하는 상회를 만들었다. 1893년에서 1900녀까지 선교사들이 공의회를 주도하였기 때문에 선교사공의회시대 라고 명명하였다.
4). 양전백, 함태영, 김영훈 원저, 번역 이교남〈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35쪽
5). 호이전, 문홍복 주필, 〈연변문사자료 제 8집, 종교사료전집〉, 118쪽
6). 화룡현이다. 호이전, 문홍복 주필, 〈연변문사자료 제 8집, 종교사료전집〉, 118쪽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편, 〈종교사〉, 148쪽
7). 리병하의 오기.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편,〈종교사〉, 148쪽에는 리병하로 나온다.
8). 연변문사자료 제8집119쪽에 의하면 탕동교회는 의란구교회이다. 의란구에는 의란구 남교회, 의란구북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9) 서굉일의 책,〈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198쪽은 1911년부터 3년간 열성적으로 전도한 결과 36개의 교회가 개척되었다고 하나 교회 이름이 없다.
10). 김내범목사가 많은 교회를 혼자 개척해서 세웠다는 뜻이 아니다. 교인들이 개척해서 시작한 교회를 캐나다장로회에 등록하고 공식적인 교회로 출범시켰다는 뜻이다.
11). 양전백, 함태영, 김영훈 원저, 번역 이교남〈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359쪽
설립된 교회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이름이 빠지게 된 것이 함경노회 노회록의 실수인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의 편집과 번역 과정의 실수인지 알 길이 없다.
12). 호이전, 문홍복 주필, 〈연변문사자료 제 8집, 종교사료전집〉, 119쪽은 혜례성남교회로 표기하고 있다.
13). 호이전, 문홍복 주필, 〈연변문사자료 제 8집, 종교사료전집〉, 119쪽은 희망동교회로 표기하고 있다.
14) 혼춘은 훈춘과 동일지명이다.
15) 최학천 학살에 대한 기록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361쪽에 나온다.
16) 이명순의 학살에 대한 기록은 김연옥이 번역한 〈조선군사령부 간도출병사〉 55쪽에
나온다.
17) 최석숭 저 〈훈춘조선족이민사〉에는 1915년에 세워진 교회로 서문밖교회, 포은동교회, 구사평교회, 금당촌교회, 옥천동교회, 두도구교회가 나온다. 그러나 연변에서 나온 〈종교사료전집〉과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에 구사평, 금당촌, 옥천동, 두도구교회 설립된 해가 분명하므로 본 글에서는 서문밖교회와 포은동교회만 1915년에 설립된 교회로 정리하였다.
18)〈연변문사자료 제 8집, 종교사료전집〉 119쪽에 의하면 대양동교회이며 설립자가 박리섭으로 나온다.
19) 〈연변문사자료 제 8집, 종교사료전집〉 119쪽에 의하면 동불사교회이며 리하원이 설립자이다.
20)〈연변문사자료 제 8집, 종교사료전집〉 119쪽에 의하면 회막동교회이며 리춘삼이 설립자이다.
21) 황병길이 연해주에서 돌아와 거주를 시작하여 만든 조선인마을 연통라자이다. 22) 〈연변문사자료 제 8집, 종교사료전집〉 119쪽에 의하면 관지골교회이다.
23) 훈춘 숭례향의 소홍기하교회는 최석숭의 〈훈춘조선족이민사〉284쪽에 나온다.
24) 훈춘 용지향의 송전동교회는 최석숭의 〈훈춘조선족이민사〉284쪽에 나온다.
25) 훈춘 용지향의 장성촌교회는 최석숭의 〈훈춘조선족이민사〉284쪽에 나온다.
26)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581쪽에 나오는 1917년 11월 함북노회가 허락한 장로에 관한 문건에 시거우교회, 로구산교회가 나온다. 이교회들은 설립된 교회 명단에 나오지 않으므로 누가 언제 어디에 세웠는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582 쪽에 나오는 관도거우교회, 의랑거우교회²⁰ 583쪽에 나 오는 천보산교회, 586쪽에 나오는 장인강교회, 남양천교회, 588쪽에 나오는 구호동교회. 589쪽에 나오는 황거우교회 591쪽에 천동교회, 592쪽에 나오는 동불사교회, 593쪽에 나 오는 옹성나자교회, 잠박골교회, 치도구교회, 달나자교회, 창동교회도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디에 세워졌는지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이다.
27) 룡섬매자교회이다.
28) 장동동교회는 연변문사자료 8집 119쪽에 나온다.
29) 용지향에 삼도구교회 설립은 훈춘조선족이민사 284쪽에 나온다.
30) 19명은 〈3.13〉용정만세시위 시 중국군경들의 발포로 현장에서 즉사한 10명(박상진, 정 시익, 공덕흡, 김태균, 김승록, 현봉률, 리균필, 박문호, 김흥식, 장학관)과 병원에서 사망 한 4인 (최익선, 현상로, 리유주, 차정룡)과 장례식 후에 사망한 5명(김병영, 채창헌, 김종 묵, 원용서, 허준언)이다.
31)〈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612, 613 쪽은 3.13만세운동으로 1920년에 간도지역 당한 참변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핍박을 당한 일부 교회의 기록에 불과하다.
32)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613 쪽
33) 같은 책 614쪽
34) 정협룡정현문사자료연구위원회 편〈룡정문사자료 제 2집〉, 154쪽
〈연변문사자료 제 8집, 종교사료전집〉 119쪽
35) 정협룡정현문사자료연구위원회 편〈룡정문사자료 제 2집〉, 154쪽
〈연변문사자료 제 8집, 종교사료전집〉 119쪽
36) 최석숭 저, 〈훈춘조선족이민사〉284쪽
37)〈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678쪽
38)〈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678쪽
39) 최석숭 저〈훈춘조선족이민사〉284쪽
40) 최석숭 저〈훈춘조선족이민사〉284쪽
41) 포은동교회,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685쪽, 최석숭저 〈훈춘조선족이민사〉283쪽 에 나오는 포은동교회와 동명이므로 설립상황이 다르므로 기록은 했지만 설립된 교회 숫 자 계산에는 포함시키지 않았음.
42) 삼국전도회 자산에 대한 기록. 건물이 용정에 있으며 노회에 기부한다는 내용이다. 〈조 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680쪽
43) 김춘선 주필 〈중국조선족사료전집 철학종교편 2권〉, 486쪽
44) 최석숭 저 〈훈춘조선족이민사〉284쪽
45) 류병호 저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 6 종교사〉, 152쪽
46) 김연옥 역 〈조선군사령부 間島出兵,105쪽 47) 중국조선족교육사42~44 중국조선족교육사 집필소조〈중국조선족교육사〉, 42-44쪽
48) 허청선, 강영덕 주편 〈중국조선민족교육사료집 1〉, 465~471쪽 49) 양소전, 차철구 외 3인 〈조선족혁명투쟁사〉,163쪽
50 양소전, 차철구 외 3인 〈조선족혁명투쟁사〉,164쪽 51) 룡정 3.13 기념사업회 편찬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96.97쪽 52)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편집 〈개척 〉,376 쪽 53) 같은 책 377 쪽
룡정 3.13 기념사업회 편찬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51쪽
참고서적
양전백, 함태영, 김영훈 원저〈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8
차재명 원저〈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7
중국조선족교육사 집필소조〈중국조선족교육사〉,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0
허청선, 강영덕 주편 〈중국조선족교육사료집 1〉,연변교육출판사, 2002
김춘선 주필 〈중국조선족사료전집 철학종교편2〉,연변인민출판사, 2013
류병호 저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 6 종교사〉,연변교육출판사, 2006
호이전, 문홍복 주필 〈연변문사자료 제 8집 종교사료전집〉,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997
김택 주필 외 〈연변문사자료 제5집 교육사료전집〉,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988
정협화룡현문사자료연구위원회편 〈화룡문사자료 제4집〉,화룡현문사자료위원회, 1992 정협룡정현문사자료연구위원회편 〈룡정문사자료 제 2집〉,문사자료연구위원회, 1988 김택 주필 〈길림조선족〉, 연변인민출판사, 1995 김연옥 역 〈조선군사령부 間島出兵史 〉, 경인문화사, 2019
서굉일 외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임김약연선생〉, 고려글방, 1997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편집 〈개척 〉, 민족출판사. 1999
윌리엄 스코트 저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2009
김춘선저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2016
최석숭 저 〈훈춘조선민족 이민사〉, 연변교육출판사, 2015
양소전, 차철구 외 3인 〈조선족혁명투쟁사〉, 연변인민출판사, 2005
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 연변인민출판사, 2001
룡정 3.13 기념사업회 편찬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연변인민출판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