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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자매샬롬하우스 원문보기 글쓴이: 예수님 심장
최준석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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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델리의 무굴황성 |
나는 타지마할 등 후대에 건축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건축을 남겼다. 황후도 죽고 이제 아그라를 떠나기로 했다. 후마윤 할아버지의 수도 델리로 돌아간다. 후마윤 황제가 살던 옛 황성이 아니라 새 황도를 세웠다.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거대한 건축물이다. 새 황성에 대해서는 내가 살아있을 때 황실 도서관장이었던 무함마드 타히르(1627~1666)가 남긴 나의 전기 ‘샤자한나마’를 보시라. 당시 상황이 짐작될 것이다.
“성채는 천국을 닮았으며, 야무나 강변, 델리시 외곽에 건설됐다. 전지하신 분(샤 자한)은 앞에서 언급한 강의 제방 위에 기후가 온화하고, 쾌적한 자리를 고르고 그곳에 장엄한 성곽과 아름다운 건물들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다. 물줄기가 흘러야 하며, 성에서 강을 내려다볼 수 있어야 했다. 오랜 물색 끝에 델리시에서 가장 먼 외곽과 살림가르(城) 사이에 있는 부지가 선택됐다. 착공 행사는 그리 요란하지 않았다. 이슬람력 1049년 1월 9일(1639년) 금요일 밤에 고귀한 건물의 초석이 놓여졌다. 제국 전역에서 장인들이 명을 받고 모였다. 치세 21년인 이슬람력 1058년 3월 24일(서기 1648년 4월 18일)에 완공됐다. 공사는 9년3개월여가 걸렸으며 공사대금으로 6000만루피가 소요됐다.”
황성과 함께 조성한 신도시에는 나의 이름을 붙였다. ‘샤 자한의 거처’라는 뜻의 ‘샤자하나바드’라고 했다. 성곽도시다. 천도를 위한 길일을 골랐다. 인도인은 길일을 많이 따진다. 아그라를 떠나 1648년 4월 19일 레드포트에 들어갔다. 야무나강 쪽으로 난 궁성문을 이용했다. 천도를 축하하기 위해 나는 성대한 행사를 명령했다. 나의 치세를 기록한 황실 사관들의 당시 기록을 종합해 보도록 한다.
“이란과 투란, 카슈미르와 힌두스탄에서 온 가수들이 노래를 했고, 춤꾼과 광대들이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황성은 거대했다. 황성 낙성을 축하하기 위해 사아압둘라 칸은 6만루피 상당의 카펫을 특별접견실용으로 바쳤고, 알리 마르단 칸은 아람가, 즉 침전(寢殿)용 카펫을 진상했다. 사아압둘라 칸은 시를 지었고, 그걸 침전 벽에 새기도록 했다. 대접견실의 지붕과 벽, 기둥에는 투르크산 벨벳 양단과 중국산 실크가 내걸렸다. 대접견실 앞의 뜰에는 벨벳으로 만든 큰 천막, 캐노피가 세워져 있었다. 네 개의 은제 기둥이 캐노피를 받쳤고, 아마다바드에 있는 황실 공방 장인들이 준비한 캐노피의 크기는 가로 65.7m 세로 40.5m, 높이는 21m였다. 캐노피의 주변은 은제 난간으로 둘러져 있었고, 캐노피 안에는 1000명 이상이 들어갔다. 황제는 특별히 만든 옥좌에 앉았고, 옥좌 주위에는 금제 난간이 둘러져 있었다. 황제의 앞에는 왕자들과 고관들이 앉아 있다. 샤 자한은 대연회를 열고 정부의 고관들에게 선물과 명예를 하사했다. 제위 후계자인 다라 키코 황태자는 예복 한 벌과, 코끼리 한 마리, 20만루피를 받았으며 2만잣을 받는 지위로 승급됐다. 사아둘라 칸은 예복 한 벌과, 7000잣과 6000수와르를 받는 지위로 승진했다. 마크라맛 칸은 예복 한 벌과 5000잣 및 5000수와르를 받는 지위로 승급됐다.”
메카 방향 서쪽을 향해 건설
황성은 가로 918m 세로 495m 크기의 팔각형 모양이고, 메카 방향인 서쪽을 향해 있다. 담 높이는 강 쪽은 18m, 육지 쪽은 33.5m다. 아그라 인근의 파테푸르 시크리에서 캐어온 붉은 사암으로 지었고 황성 둘레는 3㎞다. 레드포트에는 4개의 큰 출입문, 2개의 작은 출입구, 21개의 감시탑이 있고, 서쪽으로 난 라호르게이트가 주 출입문이다.
레드포트 안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 그곳은 나의 옥좌다. 나의 옥좌가 그 유명한 공작좌(孔雀座)이다. 수많은 다이아몬드와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를 박아 만들었다. 샤자하나바드와 레드포트를 만든 기념으로 찬드니 촉의 장인들에게 만들도록 했다. 당시 나의 궁성을 찾아왔던 한 유럽인 보석상(Tavernier)은 650만파운드스털링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알다시피 인도는 당시 세계에서 유일하게 다이아몬드가 나는 나라였다. 세상의 많은 군주들이 얼마나 힌두스탄의 다이아몬드를 탐냈는지? 인도의 다이아몬드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바부르 황제가 북인도의 주인이 되기 위해 아그라에 들어갔을 때 바부르보다 먼저 아그라에 진입한 그의 아들 후마윤이 바쳤다는 다이아몬드는 유명하다. 바부르 황제는 그의 자서전 ‘바부르나마’ 중 아그라 입성 직후 “괄리오르의 힌두왕족들이 후마윤에게 붙들린 뒤 보석들을 자발적으로 바쳤다. 그중에는 유명한 다이아몬드 하나가 있었다. 너무 값나가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전 세계가 하루 쓰는 비용의 절반 가격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다이아몬드가 나의 옥좌인 공작좌에 들어가 있던 다이아몬드라고 일부에서는 얘기한다.
세포이항쟁의 마지막 전장, 레드포트
나의 치세에도 큰 다이아몬드가 발견돼 황실로 들어왔다. 황실 사관인 이낫 칸이 기록한 ‘샤자한나마’를 보면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골콘다의 광산에서 나온 놀라울 정도로 큰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보석상들은 15만루피라고 판정했다.
나의 아들 아우랑제브가 죽은 뒤 무굴제국의 구심력은 약해졌다. 나라나 사람이나 영고성쇠가 있는 법이다. 극성기를 지나면 국가 구성원의 씩씩했던 기상은 약화되고, 사회는 느슨해진다. 왕권은 약해지고, 신권이 강해졌다. 변방의 수비선이 약화됐고, 서쪽 국경선에서 외적이 자주 들어왔다.
나의 공작좌는 페르시아의 임금인 나디르 샤(재위 1736~1747)가 델리의 황성까지 쳐들어와 들고 갔다. 델리 북서쪽에 등장한 시크왕국의 병력이 1783년 3월 11일 레드포트에 진입하기도 했다. 레드포트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무굴제국의 위엄은 땅에 떨어졌다.
내가 만든 레드포트는 이후 무굴제국의 끝을 지켜봤다. 내 후손으로 마지막 황성의 주인이었던 바하두르 샤 2세(재위 1837~1857)는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지배에 반기를 든 세포이들의 얼굴마담이 됐다가 1857년 옥좌에서 끌어내려졌다. 무굴의 17대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는 결국 오늘날 미얀마로 끌려가 양곤에서 가택 연금된 채로 살다가 이국땅에서 죽고 말았다.
영국인들은 무굴제국의 간판을 공식적으로 내려버렸다. 레드포트는 1857년 세포이항쟁의 마지막 전장으로 변해 크게 손상됐다. 영국인은 레드포트의 높은 담장을 파괴하기 위해 대포를 퍼부었다. 이후 레드포트는 제국의 중심지에서 영국 식민주의자들의 군대가 주둔하는 병영이 되었다. 황성 안의 아름다운 많은 건물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멋대가리 없는 병영 건물이 들어섰다. 1947년 8월 15일 레드포트에서 인도 독립을 알리는 인도의 삼색기가 올라가기까지 레드포트의 주인은 영국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