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추사고택(秋史古宅)에 다녀 온 후로 서울 시내에 있는 박물관으로만 맴돌던 <탐방>을 날씨가 풀려 이번엔 모처럼 교외로 발길을 틀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합장된 융릉과 인접한 정조(조선 제22대 왕)의 건릉(경기 화성 안녕동)으로 행선지를 잡은 건 순전히 신입회원 S옹의 강력한 추천 때문이다. 더욱이 S옹은 직접 차를 몰고 현장까지 안내하고 저녁 스폰도 기꺼이 자임함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 탐방이 예정된 3월 22일(목)에 비가 오시리라는 예보가 있었으나 흐린 날씨에 다소 을씨년스러울 뿐 비는 내리지 않았다. 능으로 가는 차안에서는 인터넷에서 미리 뽑은 융릉과 건릉에 대한 자료를 읽으며 예습(?)하고 사도세자가 영조의 미움을 산 배경과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 대해서도 열띈 이바구가 이어졌다.
융건릉 안내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함께 묻힌 융릉(隆陵)
융건릉에 도착하니 해설사와 약속한 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왔기에 인근에 위치한 용주사(龍珠寺)를 먼저 둘러보고 돌아오니 50대 초중반 쯤으로 보이는 여성 해설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융건릉은 주변의 번잡한 도로와 주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고즈넉하고 조용하다. 특히 수목과 잔디가 잘 정돈되어 있어 홀연이 별천지로 들어온 느낌마져 들었는데, 잎이 돋고 꽃이 피는 4월에 오면 더욱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매표소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니 융릉과 건릉으로 가는 갈림길 이정표가 나타났는데, 당연히 사연많은 사도세자의 융릉 방향인 오른쪽으로 향했다. (아래의 이야기는 해박한 지식을 갖춘 해설녀의 이바구에다 인터넷에 있는 자료를 보강하여 끄적인 것임을 밝혀 둔다).
융릉과 건릉의 갈림길 이정표
능의 입구 금천교에서 바라본 융릉
묘자리를 옮기고 이름도 여러번 바꾼 능 - 융릉
사도세자는 1762년 윤 5월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속에서 갇혀 숨지게 되는데, 그해 7월 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 당시 양주 배봉산 자락 언덕에 묻히게 된다. 그후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가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도 수은묘(垂恩墓)라 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개칭하는데, 원(園)자는 세자로 죽은 경우에 쓰는 것으로 폐세자인 사도세자를 정식 세자로 격상하였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슬픈 이름인 사도(思悼)를 장헌(莊獻)으로 개칭한다. 그뒤 13년을 기다린 후 1789년 명당자리인 현재의 위치로 이장한 후 현융원(顯隆園)이라 개칭한다. 이후 사도세자의 직계(정조의 이복동생 계열) 자손인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고 3년이 되는 해인 1899년 장헌세자를 왕(莊祖)으로 추존한데 이어 다시 황제라 하여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하고 혜경궁도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라 추존하였다(이 대목을 해설할 때 K옹이 웃어서 약간의 주의를 받았음^^).
능의 입구에서 해설녀의 현란한 이바구를 들으며(오른쪽 맨끝에 동행한 S옹이 보임)
융릉의 특이한 점
사도세자의 융릉에 대해서 왠만큼 아는 이들도 모르는 게 있는데, 이것만 알아도 여기에 직접 와서 해설을 들은 보람이 있다고 하는 tip 몇가지.
1) 다른 능의 경우 맨앞에 있는 홍살문, 중간에 위치한 T자 모양의 정자각(丁字閣 : 제사 음식을 차리는 곳)과 능이 일직선 상에 있어 홍살문 앞에서 보면 봉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융릉은 봉분이 오른쪽으로 치우쳐 홍살문 앞에서도 잘 보이도록 되어있다. 이는 뒤주속에서 답답하게 숨진 사도세자를 위해 죽은 후에라도 앞이 탁 트여 잘 보이도록 배려한 정조의 효심에 의한 것이라 한다.
2) 정자각 앞에 문무 제신들이 제사를 위해 도열하는 마당이 있는데 능을 향해 오른쪽에 문관이 왼쪽에 무관이 서게 되어있다고 한다. 대개 양쪽의 넓이가 같은데(정조의 건릉도 양쪽이 같음), 융릉의 경우 무반들이 도열하는 왼쪽의 스페이스가 더 넓다. 이는 사도세자가 검법을 책으로 저술할 정도로 살아 생전 무술을 사랑하였기에 이를 배려한 정조의 뜻에 따른 것이란다.
3) 융릉 홍살문에 이르기 전에 작은 개울이 있는데, 여기 개울의 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돌다리가 하나 있어 이를 금천교라 부른다. 그런데 이 다리는 원래 인근 수원비행장을 만들 때(1970년) 살아질 위기에 있었던 것을 그 동네 청년들이 해체된 다리 돌들을 손수레와 지계로 날라 여기에 다시 놓았다고 한다. 위치는 좀 떨어져 있었지만 정조가 융릉으로 제사지내러 갈때 지나가시던 다리라 오히려 좋은 자리를 찾은 셈이다. 그 당시 당연히 정부가 나서서 할 일을 시골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했다는데 대해 경의를 표하고 싶다.
효심이 대단했던 정조대왕
앞에도 언급했듯이 정조의 효심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인근에 있는 용주사는 비명에 가신 사도세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노후한 절을 중건 한 것으로, 꿈속에서 여의주(珠)를 물고 나타난 용(龍)을 보고 용주사(龍珠寺)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 절엔 부모의 은혜 10가지를 설한 보경대사의 불설대보은중경(佛說大報恩重經)이 있어 백성들에게도 효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어머니날에 늘 부르던 양주동박사 작시 <어머니 마음>도 이 은중경에서 따온 것이라고..
사도세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중건한 용주사(지장전 전경)
아버지가 묘 발치에 묻히려 했던 정조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부친의 묘를 이곳 명당으로 이전하고 자신도 죽으면 그 발치 아래에 묻어달라 하였다. 그러나 그 발치 아래라는 자리는 지대도 낮고 풍수지리적으로도 그다지 좋은 곳이 못되어 융릉에서 왼쪽(능을 보는 사람의 위치에서)으로 산자락 양지바른 자리에 정조의 능이 들어서게 된다. 거리는 직선 오솔길로 가면 불과 2,3분 거리라서 사후에도 두분이 오손도손 말씀이라도 나누고 계시지 않을까.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이나 정조의 건릉 자리는 조선조 초기부터 명당자리로 인정되어 언제라도 왕릉으로 할 수 있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은 인근에 백성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왕릉 부근에 인가가 가까이 있으면 화재의 위험도 있고 아이들이나 가축에 의한 능의 홰손 우려도 있기에 왕이 붕어하더라도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조는 10년이 넘게 이장을 준비하며 인근에 살고 있는 백성을 수원의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이주시키고 이주비도 넉넉히 주어 오히려 백성들이 좋아하였다고 한다(우리나라 최초의 재개발 이주는 이미 이백년 전에 정조대왕이 그 모범 사례를 보여 주신 게 아닌가).
§사족 : 정조의 여인들
정비 효의왕후에게서는 원래 자식이 없었고, 후궁으로 들어 앉힌 홍국영의 누이 원빈 홍씨는 궁에 들어온지 1년도 못되어 죽는다(독살설도 있는데..). 그리고 화빈 윤씨는 딸만 하나 달랑 낳고 만다. 그 다음이 드라마 이산에 나오는 의빈 성씨(창령 성씨라는 설이 있음, 드라마에서 한지민 분)인데 그 사이에서 첫 아들 문효세자를 얻고 딸도 하나 낳는다. 그렇나 이 문효세자는 5살에 죽고 의빈도 임신 5개월에 시름시름 앓다 죽고 만다. 다음이 반남 박씨 가문(필자의 가문임^^)의 수빈 박씨로 뒤에 순조가 되는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는 사도세자의 묘를 현재 자리로 이장한지 11년이 되는 해이다.
*그외 융건릉에서 찍은 사진
해설을 열심히 경청하는 '문화탐방꾼'들, 휠체어를 탄 이는 발 수술한 H옹인데 초상권 보호를 위해 얼굴 안 보이게 촬영함^^
어렵게 해설녀(春花)를 꼬득여 한컷 같이 찍다
*차를 직접 몰로 능까지 안내하고 저녁까지 쏜 S옹에 감사하고, 수술로 아픈 다리를 절면서도 참여한 H옹에게도 박수를..
첫댓글 맛깔스런 역사탐방 기행문과 분위기에 어울리는 배경 음악 즐감 하였습니다.."옹들의 집단" 으로 표현하였으나, 사진을 보니 청춘의 집단들이네요...
우리집에서 지척간이네.
근간 함 가봐야.....
본문 내용중 조금 불분명한 부분?
사도세자의 아들이 정조....
그런데 " 사도세자의 직계가 정조의 이복동생 " ?
그럼 정조는 사도세자의 후궁의 손???
정조에게는 배다른 남자 동생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은원군으로 철종의 할아버지가 되고 또다른 이복동생 은신군은 고종의 증조할아버지가 된답니다. 말이 잘못된 건지는 물라도 사도세자의 적통은 아니라 하더라도 직계자손이라는 말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