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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30일 토요일 설악산
자차이용 : 사니조은 님과
산행코스 : 소공원 – 비선대 – 마등령 – 마등봉 – 공룡능선 (중간에 노인봉) – 희운각 -
대청봉 – 한계령 삼거리 – 한계령 휴게소
산행거리 : 약 18 km 산행시간 : 약 17시간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2131645
거리 18.1 km
소요 시간 17h 49m 41s
이동 시간 9h 29m 37s
휴식 시간 8h 20m 4s
평균 속도 1.9 km/h
최 고 점 1,703 m
총 획득고도 1,202 m
난이도 힘듦
국립공원이 산불방지기간을 정해놓고 출입을 통제한 지 거의 3 개월 동안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원래 5월 16일에 개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올 해도 봄 가뭄이 지속되면서 강원도를 비롯한 전국에서 여러 건의 크고 작은 산불이 발생함에 따라 5월 30일까지 산방기간을 연장했었다. 다행히 5월에는 여러 차례 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면서 마침내 5월 25일에 설악산이 빗장을 열었다.
남한에서 한라산 (1950 m)과 지리산(1916.77 m) 다음으로 높은 설악산(1708 m)은 백두대간이 지나는데다 계곡이 많고 산이 크다 보니 희귀 생물이 자라나는 곳이다. 이른 봄부터 시작해서 가을 단풍들 때까지 쉼없이 새로운 풀들이 자라고 꽃 피고 열매 맺고 다시 땅에 누워 겨울을 나는 곳이다. 작년 이맘 때 설악에서 보았던 산솜다리와 난쟁이붓꽃이 눈에 삼삼하고 여기에 더해 아직 본 적이 없는 참기생꽃이나 장백제비꽃 등 새로운 꽃을 보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설레인다. 일기 예보를 보니 토요일 맑음 일요일 구름 약간이다. 천혜의 조건이다.
산을 좋아하는 사니조은 님과 차박을 하기로 했다. 산에서 야영하는 것을 비박(Biwak – 독일어 : 군영에서 불침번 서는 일)이라 부르는데 이 때 박자가 한자로 잠을 자는 박(배 댈 泊)자로 혼용되어 차에서 잠을 자는 일을 차박(車泊)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비박이라는 단어는 이미 그 어원을 따질 필요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얼추 비슷하게 이해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기왕 차박까지 하는 김에 평소 쉽게 타지 못하는 공룡능선을 타기로 했다. 차를 한계령에 주차하고 산악회 버스에 빈 자리를 얻어 소공원까지 간 후 산행을 시작할 예정이다. 관건은 산악회 버스를 얻어타는 것이 요즘같이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에 몰입해 있는 상황에서는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정에 집에서 출발하여 원통을 지나 설악휴게소에 도착하여 황태국으로 이른 아침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주차장에 나오니 신사산악회 버스가 서 있어 다가 가 보니 전에 낙동정맥을 안내하던 나그네 대장님이 산대장이다. 낙동정맥은 지난 번 마지막으로 걸었던 주왕산 구간 이후에는 더 이상 진행을 못하고 다음 주부터 시작하는 백두대간을 마치고 나서 낙동정맥 남은 구간을 이어서 할 예정이라 한다. 나그네 대장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소공원까지 버스를 태워 달라고 부탁하니 흔쾌히 허락한다.
새벽 네 시 꼬불꼬불 어두운 길을 달려 도착한 소공원 주차장에는 여느 때와 달리 승용차가 많이 주차되어 있다. 코로나가 가져다준 현상중 하나다. 평소 같으면 오늘같이 설악이 처음 열리는 날 수 많은 버스가 들락거릴텐데 버스대신 승용차가 가득하다.
비선대
시원하고 신선한 공기. 설악산 냄새가 새벽 공기에 가득 묻어난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니 검은 하늘에 별들이 빼곡하다. 버스에서 내린 한 무리의 산행팀이 채비를 갖추면서 하는 대화를 엿들으니 어느 비탐길을 가나보다. 젊은 혈기로 가득 찬 예닐곱 명의 남녀 팀이다. 2시까지 하산하겠다고 버스기사분께 얘기하는걸 보니 여유있게 내려와서 성대한 뒤풀이까지 계획하고 있나보다.
랜턴을 켜지 않고 길을 걸었다. 권금성 위에 밝게 빛나는 별은 금성인가? 반대편 하늘에는 카시오페이아 별자리가 밝게 빛난다. 그 외 알듯 말듯한 별자리들이 밤하늘을 촘촘히 메우고 앉아 재잘거린다. 누군가 저 별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보면서 꿈을 꾸겠지? 인간의 꿈은 무한히 펼쳐진다. 예전에는 그저 옥토끼가 떡방아를 찧고 있던 달에 인간이 찾아간 지도 벌써 50년이 넘었고 이제는 민간기업이 우주선을 운행하는 시대가 되었다. 미국의 일론 머스크는 화성 이주 계획까지 세우고 한 발 한 발 실천해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태양계 행성이 아닌 가장 가까운 별(센타우르스)까지의 거리가 이미 4 광년(光年)이나 되며 먼 곳은 백 억 광년이니 이백 억 광년이니 말하고 있지만 천체물리학자가 아닌 일반 산꾼에게는 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아주 먼 곳이다. 정말 저 우주의 끝에는 옥토끼가 방아를 찧으며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둠속에서 뻐꾸기 우는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왼쪽으로 천불동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물 소리는 우리가 설악산에 들어왔음을 깨우쳐준다. 때죽나무는 벌써 꽃이 피었다가 지고 있는 중이다. 자연은 인간의 관심을 받지 않아도 정해진 순리에 따라 쉼없이 흘러간다. 아니, 자연은 인간의 간섭이 없으면 더욱 자연스런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비선대를 거쳐 마등령으로 가는 능선에 오르는 중 날이 밝아 온다. 이른 잠에서 깬 검은등뻐꾸기가 쉴 새없이 울어대며 설악의 아침을 연다. 벌써 꽃이 피었다가 진 함박꽃나무(산목련)가 제일 먼저 인사한다. 지금 막 피고 있는 것도 있고 앞으로 피어날 꽃봉오리도 많이 달려있다. 앞으로 두어달 동안 끊임없이 피고 질 산목련 꽃이다. 새벽 밤하늘 별들이 오늘 날이 맑을 것을 미리 알려줬지만 능선으로 오르면서 눈 앞에 펼쳐지는 천불동의 암봉과 화채봉 그리고 햇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공룡능선은 더할 나위없이 공기가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랜만에 맞이한 맑은 날이다. 공기도 시원하여 산행하기에 더 없이 좋은 날이다. 능선을 걸으면서 마주보이는 화채능선과 권금성 방향 그리고 왼쪽으로는 울산바위와 달마봉 그리고 그 너머로 속초시내와 동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올 만큼 맑고 쾌청하다.
고도를 높이자 공룡능선 뒤로 대청봉과 중청봉이 단아한 모습으로 이어져 있다. 외설악의 등대같은 세존봉은 손을 뻗으면 잡힐 듯 가깝다. 설악에 오르는 산객들은 그 동안 여러 번 왔어도 이렇게 맑은 날씨는 처음이라며 모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아침 햇빛을 받은 공룡능선 뒤에 대청봉이 보인다.
외설악의 등대 세존봉
칠형제봉인가? 날카로운 암봉 뒤로 보이는 대청과 중청
산이 높고 북쪽에 위치해 있으니 서울에 비해 계절이 한 박자 늦으니 이제서야 이 곳 마등봉 아래까지 봄이 찾아왔다. 겨우내 말라 있던 나뭇가지에 피어난 녹색의 새잎들은 어느 정원에 피어 있는 귀한 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녹색의 향연이다.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연한 녹색으로 빛나는 나뭇잎은 가을 단풍든 모습 못지않게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마등샘 - 비가 제법 와줘서 그런지 수량이 풍부하다.
마등령에 이르기 전 작은 계곡에 걸쳐있는 마등샘에는 물이 넘쳐흐른다. 이렇게 물이 풍부하니 온갖 새 생명이 저토록 푸르게 빛이 나는 것이리라. 배낭에서 컵을 꺼내 두 컵이나 들이켠다. “20년 젊어지셨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니조은 님이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서 립 서비스를 던진다. 산을 오르는 것은 힘이 들지만 그 고생 뒤에 찾아오는 달콤함은 이 마등샘물처럼 마약 같은 것이다. 마등령으로 오르는 마지막 500 미터 구간은 여느산의 5 km 만큼이나 길어 보인다. 하지만 길은 끝이 있는 법, 마지막 나무계단을 올라 오전 8시 마침내 마등령에 도착했다.
마등봉 (馬嶝峰 1327 m)
마등령에 배낭을 내려놓고 10분 거리에 있는 마등봉으로 향했다. 마등봉을 거쳐 저항봉 그리고 황철봉에서 미시령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백두대간이다. 지난 가을 단풍이 한창일 때 이 구간을 걸었으나 늘 그렇듯 갑자기 몰아친 짙은 안개 때문에 멋진 조망을 보지 못한 아쉬움에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마등봉을 오른다. 이렇게 날이 좋으면 마등봉에서 황철봉 너머로 저 멀리 향로봉과 그 너머로 금강산이 보일거라는 생각에 걸음이 바빠진다.
말의 등짝처럼 생겨서 마등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마등령에서 가파르지 않은 길을 십 분쯤 오르자 마등봉이다. 지난 가을 미시령에서 출발해 걸어왔던 단풍길이 훤히 보인다. 지금은 온통 초록빛으로 다시 시작하지만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날씨에 내 시선은 끝도 없이 달린다. 저항봉을 넘어 저항령으로 그리고 황철봉을 넘어 소황철봉으로. 그리고 나의 시선은 황철봉 능선 너머 어디엔가 있을 향로봉을 찾아본다. 그 향로봉 뒤에 어렴풋이 늘어선 금강산 줄기를 보기 위해 향로봉 위에 있을 축구공을 보려고 하지만 아무리 눈에 힘을 줘도 향로봉은 보이지 않는다. 향로봉과 금강산은 황철봉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마등봉 (1327 미터)
마등봉에서 바라본 저항봉 황철봉
마등봉에서 바라본 공룡능선과 중청봉 그리고 대청봉
향로봉과 금강산을 보지 못해도 이미 내 가슴은 지금 보이는 풍경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지난 번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데 이처럼 먼지 하나 없는 맑은 날씨의 축복을 받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눈길을 돌려 설악의 서북능선을 살펴본다. 대청봉에서 시작한 산줄기는 귀때기청을 지나 안산까지 이어지고 마루금 너머로 가리봉과 주걱봉도 뾰족한 봉우리 끄트머리가 보인다. 화채능선 끝에 권금성과 그 아래로 속초 시내도 훤히 보이고 다시 왼쪽으로는 울산바위를 거쳐 황철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티끌 하나 없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정말 복받은 날이다.
마등봉에서 마침내 난장이붓꽃을 만났다. 원래 붓꽃(Iris)은 키가 제법 커서 30~60 cm까지 자란다. 삼 년 전이던가. 지리산 만복대에서 보았던 붓꽃이 인상적이었다. 꽃봉오리 모양이 마치 붓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른 봄부터 각시붓꽃, 금붓꽃이 피기 시작하고 노랑붓꽃, 노랑무늬붓꽃 등이 연이어 피어난다. 아직 노랑붓꽃은 본 적이 없지만 얼마전 소백산에서 보았던 노랑무늬붓꽃은 귀티 나는 단아한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난장이붓꽃은 이 모든 붓꽃보다 키가 작아 붙여진 이름이다. 가는 잎 속에 묻혀서 진한 남색으로 피어있는 꽃이 아름답다. 작년에 신선대에서 처음으로 보았던 난장이붓꽃에 대한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난장이붓꽃
은방울꽃
다시 마등령으로 내려와 오세암 갈림길에 내려섰다. 작년에 오세암으로 내려가면서 보았던 큰앵초를 보고자 잠시 오세암쪽으로 가 보니 과연 나무 숲속에 큰앵초 군락이 펼쳐져 있다. 아침 햇빛을 받아 붉은 색이 더욱 곱다.
다시 공룡능선으로 오르는데 길 옆에 자주솜대가 무리지어 나고 있다. 나는 이번 산행에서 특별히 자주솜대 꽃을 보고 싶었다. 늘 때를 맞추지 못해 제대로 핀 꽃을 본 적이 없었으니 이번에는 꼭 만나고 싶었던 꽃이다. 하얀 꽃을 피우는 풀솜대와 달리 자주솜대의 꽃은 맑은 연록색이다. 이 것이 차츰 자주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자주솜대라고 부른다. 공룡능선을 걸으면서 길 가에 펼쳐진 자주솜대 군락을 보며 여기는 풀솜대보다 자주솜대가 더 많다더라는 말이 생각난다.
마등령 삼거리에서 오세암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숲 속에 큰앵초 군릭이 펼쳐지다.
자주솜대 꽃 - 처음에는 연록색으로 피었다가 자주색으로 변한다.
공룡능선은 마등령에서 시작하여 무너미고개까지 이어지는 4.9 km의 능선길이다. 나한봉, 큰새봉 그리고 공룡능선의 맏형격인 1275봉이 있고 마지막으로 신선대가 있다. 산길은 모두 이들 봉우리 옆으로 비껴가지만 큰 오르내림은 그대로 부담으로 남는다. 땀 흘리며 힘들게 올라가야 하고 급격한 비탈을 내려가야 한다. 가끔 로프나 안전 철난간을 설치한 데도 있어 위험하지는 않지만 체력소모는 상당하다.
공룡능선의 3분지 1지점쯤 되는 큰새봉과 1275봉 사이 시원한 계곡으로 탁 트인 조망처에서 아침을 먹었다. 사니조은 님이 싸 온 유부초밥 양이 많다 싶었는데 늦은 아침이라 시장했던지 금방 다 먹어버렸다. 오전 10시니까 아침과 점심의 중간쯤 되는 것 같다. 이른 아침은 오면서 설악휴게소에서 먹었으니 이건 점심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1275 봉
아직 한 번도 1275봉에 올라가 보지 못했다는 사니조은 님을 데리고 바위벽을 오른다. 미끄럽지 않은 바위에 손잡을 수 있는 홀드와 발 디딜 수 있는 홈 등이 잘 파여져 있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그리 수고하지 않은 것에 비해 그 보상은 무척 후하다. 발 아래 아찔한 절벽을 바라보는 스릴은 덤이고 사방으로 탁 트인 조망은 소중한 선물이다. 방금 지나온 나한봉과 큰새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고 반대편 발 아래 범봉과 칠형제봉 그리고 천화대의 뾰족뾰족한 암봉들이 장난감 미니어쳐처럼 아기자기하다. 그 너머로 대청봉과 중청봉이 우뚝 서 있고 그 좌측으로는 화채능선이 매끈하게 뻗어있다. 모든 것이 초록이고 그 푸르름 속에 설악산 산 이름의 유래가 된 회색빛 암봉들이 조화를 이룬다.
금강봄맞이꽃
멀리 뾰족한 봉우리가 화채봉이다. 그 끝에 집선봉과 권금성이 있고 멀리 왼쪽으로 속초항이 보인다.
275봉에서 바라본 대청봉과 중청봉
멀리 왼쪽으로 울산바위 오른쪽에 달마봉
큰새봉과 나한봉
설악아구장나무
화채능선 아래 권금성이 있고 거기서 달마봉 너머에 속초시내도 자세히 보인다. 속초 밖으로는 푸른 색이 바다인지 하늘인지 구분이 안될 만큼 맛닿아 있다. 우람한 바위로만 이루어진 울산바위와 그 위로 뻗은 황철봉 능선 등 모든 것이 맑은 날씨 속에 찬란하게 빛난다. 설악을 제대로 느끼려면 1275봉에 올라야 한다. 사니조은 님은 처음으로 맛보는 찰진 설악의 참맛에 감동한 표정이다.
1275봉 꼭데기에 피어 있는 털진달래와 아구장나무 꽃봉오리 그리고 난장이붓꽃을 살펴보고 다시 조심스레 바위를 타고 내려와 1275봉 탐방을 마친다. 짧은 꿈 뒤에는 다시 험난한 공룡능선을 타야 하는 현실이 자리 잡는다.
노인봉 (老人峰)
작년 이맘때 노인봉에서 보았던 산솜다리 군락을 다시 찾아가보기로 했다. 설악산에는 솔체꽃도 있고 여름에 피는 바람꽃도 있지만 나는 산솜다리야말로 설악산을 대표하는 깃대종이라 생각한다. 옛날 고등학교 다닐 때 설악동 기념품 가게에서는 솜다리를 말려서 액자에 담은 것을 많이 팔았었다.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면 너 나 할 것없이 기념품으로 꼭 에델바이스 꽃 액자 하나씩을 사갔었다. 그 때 산솜다리를 무절제하게 채취한 탓에 지금은 설악산에서도 구석진 바위끝에서나 살아남은 산솜다리는 특별보호를 받고 있는 우리나라 특산종이다.
노인봉으로 가는 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 제대로 찾기가 어렵다. 대충 방향을 정하고 수풀을 헤치며 힘겹게 바위에 접근하여 올라가니 예상했던 대로 산솜다리가 군락을 이루어 피어있다. 그리고 또 한 번 주변의 빼어난 경관에 잠시 젖어본다. 작년에는 짙은 안개로 인해 가까이 있는 범봉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범봉의 작은 크랙까지 자세히 보인다. 앞쪽으로는 어렵겠지만 어찌어찌 잘만 하면 뒤쪽으로 오를 수 있는 길도 보일 듯하다. 방금 지나온 1275봉은 일부러 바위를 날카롭게 깍아서 세워 놓은 것 같다. 아름답다. 모든 것이 다 아름답다.
1275봉 아래 선돌
산솜다리
노인봉에서 바라본 1275봉
노인봉의 산솜다리
노인봉에서 바라본 범봉 그리고 멀리 울산바위와 달마봉
만주송이풀
사니조은 님은 아름다운 풍경에 흠뻑 빠져버렸다. “이런 멋진 풍경을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많을텐데 그들은 참 억울하겠어요.” 여행을 하다보면 이색적이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이런 생각을 곧잘 하게 된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풍경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데서 위안을 받으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어디에 있으나 주변 환경에 적응하면서 스스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설악산 공룡능선에 와서 대청봉을 바라볼 기회가 없어도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노인봉에서 내려와 다시 신선대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아직도 내려가고 또 올라가야 하는 급한 경사길이 두 군데나 남아있다. 길 가에 만주송이풀 꽃이 한 송이 보인다. 이제 갓 피어나기 시작한 꽃봉오리는 연한 녹색을 띄고 있다. 대청봉 아래 무더기로 자라는 만주송이풀은 아마도 2 주쯤 후에나 만개할 것으로 보인다.
설악산에서 또 만나기를 기대했던 꽃은 금강봄맞이꽃이다. 공룡능선에 발에 밟힐 만큼 많이 자라는데 대부분 꽃봉오리가 맺혀 있는 상태이고 아마도 일 주일안에 활짝 필 것으로 보인다.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바위떡풀처럼 생긴 푸른 잎을 달고 긴 꽃대 위에 하얀색 꽃을 피운 금강봄맞이 꽃은 설악산의 정령이다. 앵초과에 속하는 봄맞이꽃도 앙증맞게 예쁘지만 설악산 공룡능선 바위틈에서 하얗게 피는 금강봄맞이꽃은 성스러운 느낌을 풍긴다.
신선대(神仙臺)
공룡능선의 마지막 고비는 신선대(神仙臺)다. 뾰족뾰족한 암봉을 보면 인간이 함부로 범접할 수 없고 신선들만이 구름을 타고 오르내릴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는다. 신선대도 백두대간 산줄기이지만 길이 위험하여 대부분 우회하여 정비해 놓은 안전한 길을 걷는다. 신선대 입구에서 부쩍 가까와진 대청봉을 바라보고 있자니 무너미고개쪽에서 올라온 중년의 산꾼 한 분은 중국의 장가개보다도 더 멋있다며 경탄을 금치 못한다. 이렇게 공기가 맑은 것이 코로나로 인해 중국이 공장가동을 멈춘 덕이라고 말하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고 맞창구 쳐 주었다.
신선대에 오르면서 뒤돌아본 공룡능선
신선대에 오르면서 바라본 속초 방향
신선대에서 바라본 대청봉과 중청 그리고 소청봉
신선대에서 마지막 암벽을 내려가는데 이제서야 낑낑대며 거꾸로 신선대로 오르는 여자 산객을 만난다. 천불동에서 올라와 신선대까지만 갔다가 다시 내려갈 예정이라한다. 사실 신선대까지만 가도 공룡능선의 암봉(岩峰)들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오후 3시가 가까운 시간에야 비로소 무너미고개에 도착했다. 오늘 새벽 4시에 소공원에서 산행을 시작했으니 11 시간동안 약 10여 킬로미터를 걸어온 것이다. 평균 시속 1 km 정도로 정말 느긋한 산행을 즐겼다.
희운각(嬉雲閣)을 지나 소청봉(小靑峯)을 향하여
희운각 대피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윤이가 싸준 샌드위치를 먹었다. 더운 날씨에 몸이 허기지지만 배가 고픈 것은 아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약 2 리터의 물을 다 마셨다. 입이 바짝 마르고 목이 탄다. 희운각 대피소에는 두 팀의 산꾼들이 각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음식을 먹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대피소에서 숙박은 허용하지 않기에 모두 잠시 휴식을 취하고 하산할 사람들이다. 끊임없이 세차게 쏱아지는 물을 받아 빈 페트병에 가득 채웠다.
여기서 대청봉까지 가파른 2.5 km를 오르고 다시 한계령까지 8.3 km를 걸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차를 한계령에 세워놓았으니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서 좋다. 힘은 들지만 어쨌든 산을 제대로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희운각에서 소청까지 1.7 km는 계단과 돌길이 이어지는 급격한 오르막 경삿길이다. 급격히 고도를 높이니 뒤쪽 신선대가 점점 발 아래 놓이고 능선길에 자라는 사스레나무 잎은 위로 갈수록 작아진다. 끝청 나뭇가지에는 아직도 이른 봄기운이 걸려있다. 하늘에는 상현달이 파란 하늘에 흐미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시닥나무 꽃
소청을 오르면서 뒤돌아본 신선대와 천불동
철쭉꽃이 아직도 피고 있다.
소청봉
5월의 설악에는 털진달래가 손님을 맞는다. 낮은 산에는 벌써 오래전에 진달래꽃이 불바다를 이뤘다가 사그라들었고 진달래에 이어 피어나는 철쭉마저 져 버린지 오래다. 그런 진달래가 설악산 높은 봉우리에는 5월 중순이나 되어야 피기 시작한다. 나뭇잎의 뒷면에 잔 털이 나 있어 털진달래라 부르는 꽃이다. 작년에는 설악산 문을 일찍 열었기에 5월 16일 대청봉 사면에 활활 타오르는 털진달래꽃을 보았는데 올 해는 그보다 약 2 주나 뒤에 찾아오니 진달래가 좀 시들하다.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진달래꽃이 반갑고 또 고맙다.
중청으로 이어지는 나무계단을 오르며 나는 금강산을 상상해본다. 남북 분단으로 갈 수 없는 곳이기에 더욱 그리운 금강산이다. 맑은 날에는 설악산에서 육안(肉眼)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금강산을 오늘은 분명히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인다. 나무계단 끝 조망처에서 뒤로 돌아 마등봉 너머 또 황철봉 줄기 너머에 있는 흐릿한 산줄기 위에 작은 탁구공을 찾아본다. 우리 군인들이 머무는 최북단 향로봉이다. 그 향로봉 너머로 동서방향으로 길게 이어진 산줄기가 바로 금강산이다.
중청봉과 대청봉이 피라미드처럼 생겼다.
댕댕이나무 꽃
중청을 오르면서 바라본 서북능선과 귀대기청봉. 그리고 그 너머에 가리봉과 주걱봉이 보인다.
중청을 오르면서 뒤돌아본 공룡능선방향. 멀리 황철봉 너머로 향로봉 그리고 그 너머로 금강산이 보인다.
한 때 금강산 관광이 유행처럼 번졌을 때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미뤄두었으나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관광을 나섰던 박왕자 씨 (당시 53세)가 북한군에 의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싸늘하게 식어 버리고 금강산 관광은 전면 중지되었다. 2018년 말에 시작된 남북의 화해무드에 금강산 관광뿐만 아니라 남북간 자유왕래까지 실현될 지도 모른다는 허튼 희망을 갖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직도 금강산은 이렇게 먼 발치에서 희미한 실루엣으로나 볼 수 있는 가깝지만 먼 산으로 남아 있다.
대청봉(大靑峯)
4시 50분 중청 대피소에 도착했다. 텅 비어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대피소에 국립공원 직원이 보인다. 대피소 테이블에 배낭을 벗어두고 대청봉으로 가려는 나에게 너무 늦었으니 대청에 오르려면 오색으로 하산을 하던가 아니면 그냥 한계령으로 가라고 한다. 잠깐이면 다녀올 수 있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주 올 수도 없는 곳인데 설악에 와서 대청봉에 오르지 않고 그냥 내려가는 것은 긴 아쉬움을 남길 터이기에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대청봉으로 향했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에는 아직도 양지꽃과 노랑제비꽃이 한창이다. 대청봉 산비탈에는 눈잣나무 숲 사이에 빨간 털진달래가 화려하게 피어있다. 내가 무리를 해서라도 대청봉에 오르려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털진달래꽃을 보기 위함이다. 배낭을 두고 왔으니 몸이 가볍다.
대청봉으로 오르는 길에 피어 있는 털진달래
천불동과 화채능선 그리고 속초시내 너머로 동해바다
점봉산과 그 너머 멀리 방태산
대청에서 바라본 중청과 끝청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 - 멀리 귀때기청봉 지나 안산이 보이고 왼쪽으로 가리봉 주걱봉
대청봉 정상석
공룡능선과 천불동
대청봉 정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세 명이나 앉아 있다. 둘은 맥주를 마시면서 여유있게 멋진 풍광에 취해있고 여자 한 명은 자동 셔터 기능이 있는 카메라를 삼각대 위에 설치하고 셀프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이리저리 포즈를 취해가며 대청봉 정상석 앞에서 작품사진을 촬영하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도 아직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낀다.
이제 대청봉에서 설악산의 진수를 맛보았으니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다. 다시 중청 대피소에 도착하니 아까 만났던 국립공원 관리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사이 사니조은 님은 중청대피소에 들르지도 않고 앞질러 내려갔다. 국공 직원은 나에게 동료에게 연락하여 함께 내려가라고 당부한다. 너무 간섭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처럼 안전에 민감한 덕분에 설악산에서의 사고를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한계령(寒溪嶺)에서 산행을 마치다.
중청 대피소에서 한계령까지 7.7 km 다. 대체적으로 내리막길이기에 힘은 들지 않고 빨리 걸으면 세 시간쯤 걸릴 것으로 보인다. 중청봉을 빗겨 지나가는데 왼쪽 우거진 비탈 숲에서 여자의 말소리가 들리기에 누구시냐, 거기서 뭐하시냐 하고 물었으나 아무런 말없이 조용하다. 혼자 생각에 나물을 뜯는 사람인가 싶기도 하지만 이런 국립공원 높은 산봉우리까지 올라와 나물을 뜯을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인적이 끊어지는 늦은 시간에 여자 혼자서 숲 속에 남아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혼자 궁금해하면서 내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
끝청에서 비탈길을 내려가는데 두 명의 여인이 커다란 배낭을 메고 올라온다. 오후 6시가 넘은 시간에 산을 오른다는 것은 보통 대피소에 예약이 되어 있는 사람이겠지만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대피소는 예약을 받지 않는다. 설사 대피소에 예약을 했다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오후 4시쯤에 입실을 해야 하는데 6시 넘은 시간에 산으로 올라가는 사람은 수상하기 그지없다. 설마 아직도 밤에는 기온이 급히 떨어지는 설악산 능선길에서 비박을 하는 것도 아닐테고 어쩌면 그녀들 말대로 대청봉에서 일몰을 보고 오색으로 하산할 예정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전에도 이 길을 바쁘게 걸어본 적이 있다. 작년이었던 것 같다. 오색에서 올라와 대청봉 부근에서 야생화에 정신이 팔려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해 버렸었다. 중청대피소에 오후 4시쯤 도착하여 한계령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 시간을 물으니 오후 7시쯤 막차가 있다고 하면서 천불동 계곡을 거쳐 속초로 가는 것이 낫겠다고 한다. 나는 나름대로 계산을 해 보고 나서 한계령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내리막 길을 뛰고 오르막 길을 기면서 빠른 걸음을 걸었다. 마지막에는 몸이 지쳐 속도를 내지는 못했지만 결국 서울로 가는 막차를 여유있게 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은 그리 급할 일은 없다. 한계령에 차를 세워 놓았으니 안전하게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길가에 예쁘게 핀 큰앵초 꽃과 나도옥잠화 꽃을 사진에 정성껏 담으면서 여유도 부려본다. 가끔 길 오른쪽으로 터진 조망처에 서서 공룡능선과 용아장성 등 설악산의 신비로운 암봉도 살펴 본다. 여전히 맑은 날씨에 설악산은 숨은 비경을 여과없이 드러내 보여준다.
얼레지
산장대
귀룽나무 꽃
나도옥잠화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자 사니조은 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쯤이야고 묻는다. 자신은 한계령 5.1 km 지점을 지나고 있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내가 착각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가도 5.1 km 거리목은 나타나지 않는다. 몸이 힘들 때의 산행거리는 심리적 지수를 감안해야 한다. 마침내 5.1 km 지점을 지나고 이제 해는 뉘엇뉘엇 나무 사이로 낮아지는데 앞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짧은 마라톤복 차림의 사내 한 명이 걸어온다. 아마도 설악산 종주를 하는 사람인가보다. 지리산 화대종주니 태극종주니 하는 긴 구간을 설정해 놓고 이를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부단히 움직이는 산꾼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가급적 몸을 가볍게 하고 간편복장으로 뛰는데는 아무래도 덥지 않은 밤이 좋을 것이다.
한계령 4.1 km 지점에 도착하니 사니조은 님이 탁 트인 조망처에 앉아 점봉산쪽을 바라보고 있다. 몹시 지친 모습이다. 앞쪽에는 점봉산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 산줄기가 저녁 햇살을 받아 더욱 뚜렷하게 빛나고 그 오른쪽에는 지난번 안개속에 올랐던 가리봉과 주걱봉 능선이 역광을 받아 실루엣으로 비친다. 이런 풍경은 정말 꿈에서나 볼 수 있을만치 아름다운 모습이다. 옛날 안견에게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한 안평대군 꿈 속에서 보았다는 금강산의 모습이 이보다 더 아름다웠을까? 산 구비구비 초록빛으로 덮인 채 저녁 노을빛으로 살짝 덮여 있는 풍경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같다.
조망처에서 바라 본 주전골과 망대암산 점봉산 그리고 멀리 방태산 마루금
서북능선 조망처에서 바라 본 가리봉과 주걱봉. 오른쪽으로 귀때기청봉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저녁 노을이 무척 아름답다.
귀때기청봉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이 너덜겅이 있는 조망처에서부터는 흙길 대신 울퉁불퉁한 바위길이다. 그냥 바위가 아니라 불규칙하게 놓인 크고 작은 돌을 짚고 내려가고 또 어떤 것은 건너 뛰면서 가야 한다. 겨울철 눈이 살짝 덮였을 때는 매우 조심스럽게 걸어야 했던 길이다. 아직 햇살이 남아 있어 그런대로 걷는데 큰 불편은 없다. 하지만 실제로 한계령 삼거리까지의 1.8 km 가 가장 힘든 구간으로 보인다.
7시 반이 지나면서 해는 귀때기청 너머로 짧은 여운을 남기면서 넘어가고 우리는 그 남아 있는 여명 속에서 다시 30분을 더 걸어 8시 10분 마침내 한계령 삼거리에 도착했다. 한계령 삼거리에서 한계령 휴게소까지 다시 2.3 km를 내려가야 한다. 평지 같으면 산길이라도 한 시간 안에 갈 수 있는 거리다. 이 한계령 삼거리에서 한계령 휴게소까지 가려면 다시 꽤 높은 고개 두 개를 넘어야 한다. 새벽 무박산행을 시작할 때는 아직 힘이 남아 있으니 그런 고개를 넘는 일이야 식은죽 먹기지만 산행이 다 끝나갈 때 지친 몸으로 다시 두 고개를 넘는 일은 참 고달프다. 이제 해가 완전히 산 너머로 떨어졌으니 랜턴을 켜야 한다. 그래도 대충 아는 길이니 위험한 일은 아니다. 계단을 내려가고 약간의 평지를 걷다가 오래되어 구부러진 피나무 밑을 지나고 다시 바위가 노출된 오르막 경사를 걷는다. 낯부터 따라오던 상현달이 이제야 환하게 밤하늘을 차지한다.
한계령 휴게소까지 1 km 그리고 다시 0.5 km 남았다. 왜 이리 500 미터가 긴 것일까? 아무리 가도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 것같다. 단단한 돌을 깔아 만든 산길에 행여 무릎이라도 다칠까 신경쓰면서 걷는다. 어둠 속에서 간간이 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오른쪽 계곡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침내 눈에 익은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그 계단 옆에 서 있는 커다란 바위를 지나고 한계령 삼거리를 출발한 지 한 시간만인 9시 10분 마침내 한계령에 도착했다.
어둠은 이제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그 아름다웠던 설악의 바위도 초록으로 빛나던 서북능선의 숲도 그리고 그 숲 속에서 선홍빛으로 피어있는 큰앵초꽃도 모두 어둠 속에서 잠이 들었다. 한계령 휴게소에는 아직 잠들 곳을 찾지 못한 마음들이 큰 그림자를 드리우며 꿈틀거린다.
차를 타고 장수대로 내려갔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사니조은 님은 밥을 지으려다가 마음을 바꾼다. 가스가 부족한지 화력이 시원치 않다. 그냥 콩나물을 넣고 라면을 끓여먹기로 했다. 산에서 그리 많이 먹은 것도 아닌데 배가 고프지 않다. 배고픔보다는 잠이 더 고프다. 내가 조수석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 동안 사니조은 님은 라면끓일 준비로 분주하다. 전에 장수대 탐방소에 있던 야외 수도가 없어졌다고 투덜거린다. 나는 빈 페트병을 들고 탐방소 옆 계곡으로 들어가 물을 길어왔다.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에 깜깜한 탐방소 주차장에서 끓여먹는 라면맛이 기가 막히다.
라면을 먹고 나서 사니조은 님은 또 꽁치찌게를 끓이겠다며 김치와 꽁치 통조림을 코펠에 부어 넣고 끓인다. 나는 이미 라면 한 그릇에 배가 부르다. 뒷정리를 미뤄둔 채 차에 올라가 조수석에 침낭을 깔고잠을 청했다.
잠자기에 편하진 않다. 좁은 차 안에서 다리 뻗기도 불편하다. 그럭저럭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다가 새벽 두 시 반쯤 차 밖으로 나왔다. 계곡 속 숲에서 뻐꾹새 우는 소리가 밤 새도록 이어진다. 계곡물 흐르는 소리와 뻐꾹새 소리만이 온 밤을 가득 채운다. 하늘에는 황소 왕눈깔만큼이나 큰 별들이 가득하다. 사니조은 님은 차 옆 아스팔트 바닥에 얇은 자리를 깔고 침낭 속에 들어가 깊이 잠들어 있다. 옆에서 소리를 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좀 있으니 부지런한 산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모두 자동차를 이용해 대 여섯 명씩 세 팀이 시끄럽게 떠든다. 나도 다시 차에 들어가 남은
잠을 청해본다. 다시 한 시간쯤 잠을 잤나 보다. 5시쯤 되니 날이
서서이 밝아온다. 다시 하루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