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살면서 이 표현이 떠오르는 날들이, 실제로 저 표현을 사용했던 날들이, 꽤 있었던 것 같다. ‘미사’로 불리는 드라마 때문에 처음 만난 표현이지만, 드라마 내용과 상관없이 그 느낌 그대로 사용하곤 했고 사용한다. 나는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쓰는’ ‘현실 작가’다. 그것이 광활한 우주의 별 하나, ‘나’의 위치이자 바람이다. 고요히 사라지는 그 날까지 그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나를 둘러싼,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에 하고픈 말이기도 하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진화와 진보 그리고 과학
다윈 Charles Darwin의 진화론 Evolutinary theory, 進化論에 대한 나의 물음은 ‘진화’가 ‘발전’이나 ‘진보’를 의미하는가는 것이다.
‘생존에 적합한 종種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게 되고 부적합한 종은 멸종한다’고 다윈이 과학적으로 입증한 ‘진화론’에서 ‘진화’의 의미는 발전이나 진보보다 ‘생존’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다윈의 ‘진화론’을 통해 ‘경쟁’에서 살아남은 종이 ‘생존’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다윈의 과학, 즉 자연에 대한 관찰을 법칙화 한 것이다. 그러니까, ‘진화론’은 생물 종의 ‘진화’에 관한 이론이지, 생물 종의 ‘발전’이나 ‘진보’에 관한 이론은 아니지 않은가라는 것이 나의 물음이다.
‘진화론’, ‘생존경쟁’에 근거한 ‘경제적 자유방임, 제국주의, 인종차별, 민족 우월주의, 군국주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진화론자들의 입장은 정당한 것인가. 그 정당성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과학일까? 그렇다면 과학의 과학다움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사회진화론자들에 따르면 ‘이성, 평등, 휴머니즘, 세계시민주의’와 같은 주장은 ‘생존경쟁’이라는 자연의 법칙,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만일 그렇다면 ‘경제적 자유방임, 제국주의, 인종차별, 민족 우월주의, 군국주의, 침략 전쟁’은 자연의 법칙, 사회의 질서이니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성, 평등, 휴머니즘, 세계시민주의’를 주장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생존경쟁’은 ‘생존’을 위한 ‘진화’의 과정일 뿐이고 ‘이성, 평등, 휴머니즘, 세계시민주의’는 ‘생존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넘어 ‘어떻게 함께 생존할 것인가’와 같은 인류의 발전 혹은 진보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와 같은 주장과 물음과 실천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인류의 발전이며 진보라고 말이다.
‘이성, 평등, 휴머니즘, 세계시민주의’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생물 종은 ‘진화’가 아니라, 혹은 ‘진화’만 아니라 즉, ‘생존’을 위한 ‘경쟁’인 ‘경제적 자유방임, 제국주의, 인종차별, 민족 우월주의, 군국주의, 침략 전쟁’이 아닌 방식으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생물 종의 존재 방식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과학을 ‘진보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생존경쟁, 경제적 자유방임, 제국주의, 인종차별, 민족 우월주의, 군국주의, 침략 전쟁’이 아니라, ‘이성, 평등, 휴머니즘, 세계시민주의’를 정당화하는 과학일 것이다.
ㅣ너의 마음 속으로
이젠 버틸 수 없다고
휑한 웃음으로 내 어깨 기대어
눈을 감았지만
이젠 말할 수 있는 걸
너의 슬픈 눈빛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걸
나에게 말해 봐
너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철없던 나의 모습이 얼만큼
의미가 될 수 있는지
(전람회, ‘기억의 습작’ 중에서)
‘전람회’ 하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만 같은 노래다. '너의 마음 속으로~' 노래의 절정에 있는 가사라서 먼저 귓가에 맴도는 것일 게다. 때론, 그 노래를 열창하는 이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너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상대의 마음을 알고 싶은 것이다. 노래 가사처럼 그 사람의 마음을 안다면 기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혹은, 더 잘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일 게다. 그렇게 바라는 대로 관계가 흘러가도록 하고 싶어서 일 게다.
그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마치 들어가 본 것 처럼 마음을 알아차려 행동하기도 한다.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다.
그러려면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헤아림의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내 마음 챙기기도 힘들 만큼 먹고 살기 바쁘다 보면 헤아림이 힘들 수도 있다. 그런 서로의 사정을 헤아리기 힘들 만큼 생활에 쫒기다 보면 서운해지기도 소원해지기도한다.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이에서라면 서로의 마음을 더 잘 헤아릴 법도 한데 좋아하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더 어렵기도 하다. 그 이도 내 마음과 같기를 그 이와 한마음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내 마음 같지 않을 때, '그럴 수 있지' 라며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면 덜 좋아하는, 덜 사랑하는 것일까. 더 좋아하니까, 더 사랑하니까 그런 것일까.
어쨌거나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좋아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이유로 마음을 비우기가, 내려놓기가 더 힘들어지는 것이다. 부단히 마음을 다해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ㅣ슬픔의 힘
그래도 가을이라서 시시詩詩한다. 애정하는 詩 중에 박노해 시인의 <슬픔의 힘>이 있다.
울지마
사랑한 만큼
슬픈 거니까
울지마
슬픔의 힘으로
가는 거니까
울지마
네 슬픔이 터져
빛이 될 거야*
* 체게바라에게서 따옴
- 박노해 '슬픔의 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수록 詩
박노해 시인하면 여전히 ‘새벽 시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붓는다’는 <노동의 새벽>이나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 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 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는 <손무덤>이 떠오르지만 <슬픔의 힘>도 있다.
<슬픔의 힘>이 실린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2010)는 중남미 여행을 가면서 챙겨갔던 시집이다. 여행을 갈 때 책을 꼭 챙겨가는 분들도 있지만 나는 그와 정반대에 속한다. 일부러 챙겨가지 않는 편이다. 여행 가방의 짐을 줄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여행의 모든 시간을 온전히 현지의 것들을 보고 느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렇다.
그런데도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는 시집을 챙겨갔던 이유는 좋아하는 시인이어서 이기도 했지만 그 시집에는 시인이 남미를 여행하면서 쓴 시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표제작인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도 안데스 산맥의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그것은 ‘빛’을, ‘희망’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했다.
지인들이 읽으라면서 중남미 관련 시집, 소설 등을 챙겨줬지만 가져가지 않았다. 시집 한 권만 챙겨갔다. 그런데, 여행을 한 지 수개월이 지나면서 한국인을 거의 못 만나는 여행지에서 한국어를 할 기회가 없었고 한국어에 대한 금단 현상이 오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시집은 고마운 존재가 되었다. 또한, 당시 전자책이 막 출간되던 때여서 그때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전자책으로 읽기도 했고,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을 전자책으로 다시 읽으며 조금씩 필사하기도 했다. 주로 장거리 여행을 하는 버스에서였다. 시집에서 시인은 볼리비아의 탄광 마을인 포토시에서의 노동자들의 삶을 노래하기도 한다. 2013년 중남미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박노해 시인이 몸 담고 있는 <나눔문화>의 ‘라 카페 갤러리’에서 ‘볼리비아 사진전’을 했었다. 내심 시인을 만날까 기대했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시인은 ‘노동의 새벽’과 ‘손무덤’ 때부터 ‘사람만이 희망이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노동자들의 삶을 노래하고 있었다. 사람에게서 희망을 찾고 있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이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중에서)
시인은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고 노래하고 있다. 박노해라는 한 사람이 희망이기도 할 것이다. 노동자들의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여전한 물음이다. 한국에 팔려 온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은 어떤가. 농촌에는 이제 알 만큼 아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비싼 인건비 때문에 일손이 달린다지만 농촌 소멸의 현실을 보여줄 뿐이다.
시인은 ‘사랑한 만큼 슬픈 거라고’, ‘슬픔의 힘으로 가는 거라고’ 노래한다. 그의 노래가 나에게 힘을 준다. 그러면서 아직 덜 슬픈 나를 느낀다. 아직 덜 사랑하는 것이리라. 더 사랑해야 더 슬픈 텐데. 그 ‘슬픔의 힘’으로 한 발 더 나아갈 텐데. 그래야 게바라가 말하는 ‘빛’이 될 수 있을 텐데. 그래도 가을이라서 시시詩詩한다.
하영진(작가, 현대사상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