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명-영남수필
영남수필문학회 2021.53권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진다. 가지에서 떨어지는 꽃잎은 마치 삶의 여운을 의식하는 것 같다. 서두르지 않고 가녀린 몸을 공중에 띄워 공기와 부딪치며 모든 것을 비운다. 아래로 가라앉는 그 순간까지 숨 끝을 붙잡은 여파가 그대로 느껴진다. 손끝으로 꽃잎을 만지면 체온으로 색을 꿈꾸듯, 모든 미동이 멈추는 순간 차갑게 흙으로 돌아간다. 꽃의 숨결은 그렇게 지나온 시간을 추억으로 남기고 사라진다.-낙화 김미옥
세 명씩 앉아 커피를 먹는 풍경이 오히려 고급스럽게 보였다. 화려한 상델아가 눈이 부셨다. 로코코 장식의 까페 인테리어에 현혹되는 순간 유럽의 살롱 문화와 커피하우스가 언뜻 떠올랐다. 귀부인들이 독서, 노래, 지적인 대화를 나누던 살롱 문화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현재 우리나라도 재력가들이 살롱 문화를 열어 모임을 갖는다. 보고 듣고 느낌으로써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본능적 부분을 일깨워야 하는 창작의 기본이라면 예술은 공감에서부터 시작된다. 기계 문명에 길들여져 사람과 사람이 보이지 않고 유령 취급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갈증 속에서 조심스럽게 마련된 자리인 만큼 느낌이 새롭다. 숨소리마저 고요한 객석을 항해 바이올린과 기타의 열정을 실은 연주가 이어졌다. 한 줄 한 줄 자신을 현에 맡기고 하늘과 지상을 오르내리는 연주에 가슴이 울컥했다. 들려주는 음악이 아니라 연주자 자신의 삶을 읊조리는 듯했다.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했다. 중세 귀부인이 된 듯하다. -살롱 문화와 커피 하우스- 김아가다
암탉은 산고를 치를 때마다 모가지를 꼬고 온몸을 둥지 속에 넣어 신음한다. 원망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업보니 어쩌랴. 사실의 생각이나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격조 높은 품격으로 포장한 대리 만족은 카타라시스인가. 죽을 만큼의 고통으로 이어주는 디지털 시대의 실상은 카니발인가. 카니발리즘인가 동물학과 빌 슈트 교수는 인간은 식인이라는 풍습을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으며 산모는 다만 이 잔인한 습성을 억제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동족의 피로 자양분 삼아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에너지를 얻는데 생존 전략이라면 가면을 쓴 익명의 온라인 수단일 것이라며 긴 숨을 토한다. 생명이 꿈틀거리는 거리마다 카니발리즘이 펄럭인다. 언제쯤 이 광란의 깃발이 내려질까. 그날을 기대해본다 .카니발리즘- 김애자,
점자의 기본은 점 여섯 개다. 여섯 점이 기본형이고 여기에서 변형된 점자가 많다.
손으로 흙을 쟁여 만든 땅을 덧대고 이어 층층의 아름다운 논을 만들었다. 정교하게 조각이불처럼 붙여 나간 칠백 여 개의 논배미를 산의 등뼈에다 수놓은, 인간이 만든 절묘한 수공예품의 집적이고 남해섬의 다랑이마을이다. 노도는 김만중 선생이 유배와서 생을 마감한 곳이다. -노도에서 남영숙
벼슬은 썩은 냄새라 꿈에 관을 본 자는 벼슬을 얻고, 재물은 썩은 흙이라 꿈에 똥을 본 자는 재물을 얻는다. 오늘 밤은 똥 꿈이라도 꾸어야겠다.-똥 꿈꾸기- 남인수
소방헬기가 물을 퍼서 공중에 흩뿌리면서 쇼를 한다. 누가 이렇게 황홀한 날을 우리에게 주었을까?-사문진 나루터 임우희
인간의 살은 인간 냄새가 날 때 더 위대하다. 행복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아니고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 하고 싶은 일 하는 사람, 갈 곳 있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사람, 오늘을 즐기는 사람이다.-전상준 인간 다산의 사랑
가슴에 쌓은 응어리를 쌓으면 백두산보다 높으리라. 그들이 흘렸던 눈물을 모으면 두만강과 압록강 강물을 합친 것보다 많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뺨을 타고 흐르는 통한의 눈물이 눈 덮인 우수리스크의 또 다른 풍경이다.
일제 때 듣고 싶은 게 없다하여 호를 농암으로 지은 광주 이씨 농암 이상석이 건립한 고향 별채건물이다.
<기차는 오지 않고>김애자
요양병원은 생의 유통기한이 다된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다 .갈등의 작용이 멈추고 개인의 인적 네트워크 기능이 차단된 곳, 삶의 서사가 사라지고 식욕이란 무위식적인 본능만이 생존이란 명분을 유치하는 곳, 이곳은 죽음의 대합실이다. 생로병사의 절차에 갇혀 언제 올지 모를 죽음의 열차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수족이 말을 듣지 않아 남의 손을 빌려야 할 상황이 되면 가족이란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결국 요양 시설이란 마지막 기착지에 편입된다. 낯선 곳에 밀려난 것에 대한 불안과 함께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배신감과 소외감이 말문을 닫게 한다. 현대판 고려장이다. 소변과 대변을 스스로 해졀하지 못하면 화장실 출입을 스스로 할 수 있길 원하지만 굳어가는 육신은 도무지 주인의 말을 들어주지 않게 되고 자식은 요양병원으로 모신다. 오늘도 당신 방으로 돌아가 눕고 싶다고 떼를 썼다. 열아홉에 지아비 남편과 살을 섞고. 양수 질펀한 자리에서 아들 사형제 탯줄을 잘라 눕히던 그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원이다. 남편과 자식들 체취가 밴 그 방에는 한 여자가 일생 동안 겪었던 애증과 회한이 얼룩져 있다. 그렇더라도 그 자리는 여인에게 지상에서 더없이 아늑한 요람이다. 그 요람으로 돌아가고 싶은 필생의 소원임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도와 줄 방법이 없다. 오늘도 저무는 해가 토해 놓은 노을이 요양병원 건물 유리창에 삼원색 프리즘으로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