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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역사에 남을 일>은 김용구 선생께서 발간하시던 16쪽의 작은 책 계간 《부싯돌》에 실렸던 수필 중의 한 편이다. 선생께서는 엄선하여 원고를 모으셨고 교정지를 우편으로 보내주시어 필자가 자기의 글을 다시 읽을 수 있게 배려하셨다. 번거로움을 즐겁게 여기신 선생의 순순함을 기억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으니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배웅해 드리고 싶은 간절함이다.
최원현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의 오래전에 발표된 부싯돌과 김용구 선생에 관한 원고를 함께 읽을 수 있게 되어 이 점도 감사하다. 김용구 선생을 오래 기억하는 개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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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남을 일
류인혜
쉽게 접하기 어려운 특별한 책이 우편으로 보내 왔다. 대구 계성학교의 啓聖(계성)문학 22호는 개교 100주년 기념호이다. 그 책에는 자랑스러운 계성인(啓聖人) 열 분이 선정되어 있다. 1906년 계성학교를 창립한 아담스(James E. Adams) 선교사를 비롯하여 김성재(교육자), 백남채(독립운동가), 박태준(음악인), 현제명(음악인), 신태식(교육자), 강신명(종교인), 신도환(정치인․체육인), 그리고 김동리, 박목월 같은 문학인도 포함되었다.
어떤 기관이나 단체의 역사가 오래되면 이모저모로 책임을 갖고 이바지한 사람이 있다. 기념행사에는 그런 사람을 부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개교 100년의 역사에 자랑스러운 열 분을 선정한 뜻에 긍정의 마음이 담긴다.
그 일로 인하여 무심히 넘겼던 책들의 나이를 살펴본다. 기록된 호(號)수에서 눈에 뜨이게 똑 떨어지는 숫자가 제법 눈에 뜨인다. 《펜문학》 가을호는 통권 80호이고, 《문예운동》은 지난 여름호로 창간 90호가 되었다. 《현대수필》은 60호(겨울호), 속해 있는 단체인 한국수필작가회 연간 집은 20집, 《죽순》 40호 등이다. 책 한 권 만들기가 보통 노력이 드는 것이 아니기에 쉬지 않고 꾸준히 발간해 온 관계자들의 수고에 머리를 숙인다. 그런 특별한 책은 오래 간직하며 귀중히 여기고 싶다.
《죽순》은 죽순문학회에서 해마다 발간되는 책이다. 1945년 시인 이윤수 선생에 의해서 「죽순시인구락부」로 시작했다. 몇 해 전에 창립 60주년을 맞아 여러 가지 기념행사가 있었지만, 중간에 쉬었다가 복간되어 이제야 40호가 나온 것이다. 책 속에 기념호라는 무게가 실린 것도 아닌데 새삼스러운 감회에 젖는다.
대구에서 시작된 죽순문학회에는 1989년 입회했다. 쉽게 기차를 탈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 모임마다 참석하지 못하고 연간 집에 원고만 보내는 심심한 회원이다. 39호(2006년)가 나온 작년부터 속해 있는 단체에 느닷없는 정이 솟아나고 귀중한 마음이 들긴 했었다. 그렇다면 특별한 40호에 어울리는 원고를 준비해야 하는데 그저 속으로만 높은 성을 쌓으며 넘겼다.
등단지 《한국수필》이 100호(1999년 9·10월호)가 되었을 때도 남의 잔치처럼 넘겼다. 그동안 책의 발간에 전혀 상관없던 사람들까지 중요한 기념호에 참여하려고 기를 쓰는 모습이 딱해 보였다. 책이 나올 때마다 사무국장을 도와 교정을 보고 출판사에 함께 가서 사진판을 들여다보던 수고가 무색하게 마음을 접어 버렸다. 벌써 마음가짐부터 앞으로 나서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얼마 전, 수필집을 만들면서 등단한 지 얼마가 되었다는 감회를 넣었다. 생각해보면 평생을 글 쓰는 일에 전념해온 선배 문인들이 많은데, 문단에서 크게 활동한 바도 없고, 별로 나눈 밥도 없는데 문단 밥을 오래 먹었다고 혼자 나선 격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나 좀 보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던 내심이 나타났다.
반면에 글이 발표되는 일이 늘어나면서 얼굴을 들고 나서기에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썼으니 할 말도 없다. 어쩌다 나가는 모임에도 도회지에 내놓은 촌닭처럼 어설프다. 참석자를 소개할 때도 중요한 직책이 없으니 보이지 않는 도깨비 모자를 쓰고 있는 듯 그냥 지나간다. 어떤 행사 때는 아예 초년병 취급을 받았다. 문인의 수가 점점 많아지니 가까이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아니면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간 사람 대하기를 게을리했으니 안면이 부족한 탓이고, 멀찍이 서서 보는 재미를 누린 결과이다. 그래도 가끔은 역사적인 일에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 다행히 인간의 존엄성이 근간(根幹)이 되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대접받도록 만들어지는 모양이다.
사람의 일생에서 통과의례에 의해 주인공이 되는 일이 많다. 돌상을 받기 시작하여, 학교의 입학이나 졸업도 중요한 행사이며, 새 가정을 이루는 결혼식에는 행복한 주인공이 된다. 좌우를 살피며 조심하지 않아도 먹은 나이로 인하여 특별한 잔치도 열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겪으면서 이만큼 와보니 풍습대로 갑년을 특별히 여겨 축하하는 의미를 알 듯하다. 그때를 맞이하면 속없이 나이만 먹은 사람도 세월의 무게만큼 쌓인 개인의 역사가 자랑스러울 것인가. 스스로 위로의 말을 찾는다. 글을 남기는 사람은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에 참여하는 자격이 있으니 먼저 글쓰기에 전념하거라. 《부싯돌》 2007년
류인혜
1984년 《한국수필》 봄호 수필 〈우물〉로 추천완료. 국제펜한국본부 자문위원
작품집: 수필집 《수필이 보인다》, 《나무를 읽는다》 외 8권
수상: 제18회 한국수필문학상, 제23회 펜문학상, 한국문협작가상, 송헌수필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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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내일을 지향하는 희망의 철학으로 쉼을 멈추지 않는
올곧은 언론인 수필가 김용구 교수
최원현
초목들이 온 밤, 온 낮 내 내린 비를 맞고 한껏 싱그러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고스란히 맞아보고 싶어질 만큼 부시지 않은 은빛 살 마냥 내리는 실비 속에서 나무들은 한껏 푸르름으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호국보훈 영령들이 잠들어있는 묘역을 길 건너로 하여 마주한 곳에 자리한 반포본동 주공아파트 단지, 오늘 나는 수 대째 서울살이의 토박이며, 이곳 반포에서 만도 23년째 사신다는 고려대학교 석좌교수 언론인 수필가 김용구 선생님을 뵈러 가는 길이다.
약속 시각인 오후 3시에서 3분 일찍 우리는 만났다. 항상 웃음 짓는 얼굴로 시원스레 말씀하시는 선생님은 오늘따라 넥타이가 더욱 젊게 잘 어울리신다. 고희를 넘으셨음에도 전혀 그래 보이지 않으실 만큼 젊어 보이는 선생님의 삶의 비결은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에게건 지극한 겸손으로 상대를 편안하게 스스럼없이 대해 주시는 성품 탓일 것 같다.
“오랜만이요!” 하시며 내미시는 손을 잡으면서 정말 오랜만에 아주 가끔 뵙는 것이건만 언제나 조금의 낯섦도 없고 지금 만났음에도 오래전부터 함께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도 평생 언론인 생활에서 국내외의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당신 자신도 모르게 터득되고 몸에 배어버린 만남의 기술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댁으로 찾아뵈려 했었다. 서재도 구경하고, 스물세 해 동안 삶의 내음이 배어있는 집에서 그 유명하신 사모님(전 서울대 교수. 소프라노 이경숙)도 뵙고 싶었다. 한데 모처럼 미국에서 외손자네 식구가 다 와있고, 친척들까지 곁들어 있는 판이라 우리 만남의 장소론 적당치 못하다고 하셔서 아쉽지만, 집 근처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반포 주공아파트 단지는 모두 5층이다. 그래서 20년 넘게 자란 나무들이 아파트의 키보다도 더 큰 키를 자랑하고 있다. 교수님 댁은 5층으로 창문 앞에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쌍둥이처럼 서 있는데 그중 한 나무에 까치집이 걸려 있었다. 선생님의 수필에 나오는 그 까치집이란다. 요즘엔 까치집 말고도 참새 가족이 작은 구멍 속에 가정을 꾸렸다며 앞뒤로 까치와 참새 네와 더불어 모두살이를 하신다며 즐겁게 웃으신다.
우린 단지 내에 조성된 녹초 지대를 길 따라 걷다가 벤치에 앉아 선생님께 그간의 근황을 여쭤봤다.
“잘 지내고 있지요. 하지만 외손주네 식구가 보름 채 와있는데 정신이 없어요.” 하신다. 그럴 것이다. 두 분이 조용히 사신 게 벌써 얼마인가. 예로부터 아이들 울음소리와 웃음소리가 집 밖으로 새 나와야 번성하는 가정이라고 했지만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은 틀림없어도 생활 방식이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을 테니 그러실 만도 하겠다.
선생님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선생님의 수필 한 편을 읽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미소, 언론인이라면 날카롭고 빈틈없는 인상으로 생각되기 쉬운데 선생님은 오히려 더 다정하고 푸근한 느낌을 받게 하는 건 나만의 느낌일까.
선생님 수필도 그렇다. 혹자는 어렵고 딱딱하다고 하는 이도 있지만, 동서양을 넘나드는 박학다식함이 그런 분위기로 오인케 했을 수도 있다. 한 편의 수필을 읽어도 무한한 지식의 깊이를 느낄 수 있으면서도 결코 난해하다거나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이 선생님 수필의 특징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문장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특유의 겸손함과 애써 우리말을 찾아내어 쓰시기 때문일 것 같다.
가는 비조차 어느새 그치었다. 코를 벌름대지 않아도 스며드는 녹향과 풀벌레 소리, 새소리가 들리는 곳, 보기 싫지 않게 자연스럽게 자란 나무들이 시골 고향 뒷산에 오른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서울 도심에 이와 같은 공간이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잘 손질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힘차게 쭉쭉 뻗어 자란 나무들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세상 돌아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생님 태어나심에 대한 질문을 드렸다.
“나는 1929년에 지금은 충정로 2가이지만 그땐 죽첨정에서 폐허파(廢墟派)의 한 사람인 김만수(金萬洙)와 이봉순(李鳳順)의 삼남 일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어요. 창조파의 김동인이 쓴 〈문단 30년사〉와 김윤식이 쓴 〈염상섭 연구〉를 보면 폐허시대 이야기가 나오는데 '폐허사' 간판을 적선동 우리 집에 걸었었고, 당시 부친은 철학자였다고 염상섭이 회고하고 있어요. 그땐 창조파와 폐허파가 문학정신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창조파는 주요한, 김억 등 평안도인들 중심이었고, 폐허파는 기호인 곧 서울 사람들로 구성되었던 것 같아요.
나의 어린 시절은 혜화동 ‘동산장 포도원’에서 유년과 소년기를 보냈지요. 당시 그곳엔 포도원이 있을 정도로 전원적 풍경지였는데 전차가 창경원(궁)까지만 왔고, 어린 우리는 전차가 들어오면 전선에 연결해 주는 쇠 지렛대 같은 것을 서로 당기며 전차의 출발과 도착에 일조(?)했던 것 같아요. 얼마 후에 전차는 돈암동까지 연장 운행되었지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1930년대의 서울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딸랑딸랑 딸랑 전차가 들고나는 옛 우리의 서울 모습이 눈에 선해지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여유롭고 정겨워 보이는가. 중학교 때 서울에 올라왔다. 전차를 타봤던 기억이 새롭게 살아나 순간 나도 그리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질 뻔했다. 전차 들어오는 소리를 신호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소년들의 모습이 눈에 잡혀 온다.
“나는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여 1949년 졸업을 했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신학교에 다닌 것을 인연으로 미 보병 7사단 종군목사로 유엔군이 되어 9월의 인천 상륙작전에 참여했었으며, 11월 함경남도 이원에 상륙 삼수갑산에 종군했었지요. 그러다가 전쟁이 끝난 1954년 6월 부산에서 알게 된 서양사 학자 이보형 교수의 권유로 신문 분야에 투신하게 되었고, 한국일보사 창간사원으로 기자 생활을 시작 1959년 30도 안 된 나이로 코리아 타임즈의 편집국장이 되었습니다.
그 후 줄곧 언론인의 길에서 한 번도 외도하지 않았지만, 한국일보 주필 석천 오종식 선생과 함께 아시아에서의 문화 자유라는 지식인 단체를 발기하여 '춘추선언'을 했고, 1974년엔 민주화 회복 국민 선언에 서명 참여하는 등 주요한 시국 변화의 때에는 꼭 함께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 8월 타의에 의해 한국일보 논설위원에서 해직되어 만 8년 동안 자유롭게(?) 지내다가 1988년 복직되어 1990년 1월 정년으로 한국일보사를 퇴직했습니다.”
언론인으로 보낸 40년의 세월을 생각하면 선생님은 외길을 가신 언론인으로만 생각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인이면서 문필가 특히 수필가였던 그를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가 평생을 머물다시피 한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은 바로 '메아리'의 집필실이면서 수많은 김용구 수필의 산실이었다.
김용구 선생님의 수필에선 해박하고 깊은 사색 인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그의 수필을 읽다 보면 사색 인의 순수하고 천진무구한 향취에 나도 모르게 젖어 들고 만다. 원형갑 교수는 ‘그의 수필 문장 자체가 사색인의 산책길처럼 기쁨에 충만한 한 걸음 한 걸음’으로서 그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해박한 지식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벗어 던지기 위해서 수필을 쓰는 수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김용구 선생님은 곧 존재의 사색을 위해 수필을 선택했고, 수필만이 그 해결점이 되어줄 수 있다는 자각에서 수필을 택한 수필 인으로서 그의 수필의 원점은 오직 인간의 원점인 존재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선생님은 1958년 12월 9일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인 성악가 이경숙과 백 년의 가약을 맺으셨단다.
“그러니까 1957년 여름, 난 첫 외유길에 올랐어요. 코리아 타임즈의 사회부장인 나는 노스웨스턴대학으로 신문학을 공부하러 가는 길이었지요. 그때 내 아내가 될 이경숙은 오벌린대학 대학원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었는데 내 길벗이 이경숙을 만나게 되었고,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매점에서 그림엽서 몇 장을 사 들고 나오던 나를 소개해 주었지요. 그렇게 수인사를 하게 된 우리인데 그 후로 나는 가는 곳마다 그림엽서를 띄우게 되었고, 이경숙은 항공 서한으로 답장을 보내오곤 했어요. 우린 다음 해 12월 결혼을 하게 되었고, 나는 지금도 그 바쁜 여로에서 가진 오 분가량의 만남밖에 안 되는, 길을 가다 스친 사람을 사십 년이 넘도록 따라다니느냐고 물으면 아내는 미소만으로 자기도 알 수 없다고 말하곤 한답니다.”
김용구 선생님은 사모님에 대해 ‘나의 여자요, 내 딸의 어머니요, 말벗이요, 동아리요, 스승이요, 길벗’이라며 삶 속에서 늘 사랑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아내에 대하여 깊은 존경과 사랑을 갖고 계신 것 같았다.
선생님은 유년 시절 특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유난하신 것 같다. 그의 수필 <포도원이 있는 풍경>에도 잘 나타나 있듯 꿈 많은 소년 시절을 지낸 전원 곧 포도원은 향수가 사무치게 하는 곳, 그래서 언제나 그리우면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그래서 선생님의 호 동촌(東村)도 거기서 연유된 것이라고 한다. 처음엔 동원(東園), 동산(東山) 등 동산장 포도원에서 따서 사용했는데 ‘동촌’이 의미나 부르기에도 좋은 것 같아 그걸로 사용하고 계시단다.
선생님은 특별히 문단 등단 절차를 거치거나 하시지 않은 거로 안다. 선생님께선 어떻게 문학에 관심을 끌게 되셨으며 수필을 쓰게 되셨을까.
“나는 포도원에서 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운 그것밖에 없지만 내 소년기를 살게 해 준 포도원은 내 정서를 만들어준 보금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예요. 나는 12살 때 다른 아이들에게 지지 않으려 파우스트를 읽었고, 그 후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열독 했는데 특히 <지식인 이야기> 같은 밝은 이야기가 나의 마음에 꼭 들었고, 니체의 글들이 내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거예요. 나는 특별히 등단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글을 썼는데 1976년의 《신선한 아침 풍경》에 이어 1978년 9월 전예원에서 낸 산문집 《바보야 이 바보야》는 당시로는 대단한 3판을 찍기도 했으니 늘 논설위원실에서 글을 쓴 덕택에 나도 모르게 수필가가 되어있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은 많은 저서를 내셨는데 수필집만도 1976년에 낸 《신선한 아침 풍경>>(일지사)과 1978년의 《바보야 이 바보야》, 1979년에 《가거라 시인이여》(기린원), 1983년에 《철학산책》(사계절), 1987년에 《동과 서 어디서 만나는가》(문학사상사), 1989년에 《불교산책》과 《인간을 위하여》, 1990년에 《철학이 있는 삶과 문화》를 내었으며, 1994년엔 《서광이 비칠 때》(교음사)를 내어 그 책으로 수필문학 대상을 받았으며, 1998년에 선집 《포도원》(선우미디어)과 1999년 《김용구의 문학산책》을 내셨다.
선생님께 이렇게 많은 작품집을 내셨는데 대표작이라면 어느 것을 드실 것인가 여쭸더니 “내가 골라내긴 곤란하고 주로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좋다고 하는 작품들을 들어보면 〈겨울 강변〉, 〈포도원이 있는 풍경〉, 〈어머니 생각〉, 〈귀로〉, 〈생명〉, 〈햇빛 찬가〉, 〈흐르는 시간 무르익는 시간〉 등을 들 수 있을 것 같군요.” 하신다.
선생님의 〈겨울 강변〉은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수필로 꼽힌다. ‘낯선 철새가 한강을 외면하지 않고 찾아오는 건 거기 물고기가 살아있기 때문이니, 그렇다면 한강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강물이다. 강도 신은 살아있어야 한다고 동의하지 않는가.’ 선생님의 수필은 이처럼 생명에의 경외감으로 넘치기에 모두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은 출판계는 대단히 어렵다고들 하지만 수필집 등 작품집은 홍수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것은 자비 출판에 따른 출판의 자유화 현상이겠지만 그것이 때로 독자에게는 작가들로 인해 좋은 작품을 선별할 수 없게 하는 혼란의 야기로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모 일간지 기자가 수필에 대하여 혹평을 한 것을 놓고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지만, 이것도 어쩌면 출판 방식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닐까?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처음에 몇 부가 출판된 지 알아요? 자비로 일곱 부를 출판했답니다. 그것도 1.2.3부로 나눠서 1부만 7부를 찍은 것이니 우리의 상상으론 이해가 잘 안 되지요? 물론 그때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많이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책의 홍수를 만들어 좋은 책을 쉽게 찾아내기 어렵게 만드는 요즘 같은 현실도 작가들의 책임이라 할 수 있겠지요.”
시간이 많이 지나고 있었다.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곳 ‘타워’라는 레스토랑의 손님들도 대부분 우리가 들어왔을 때의 손님은 다 가고 없을 것 같다. 그만큼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얘기다.
너무 오랫동안 말씀을 부탁드리는 것 같아 죄송키도 하고 해서 선생님으로부터 급한 마음에 ‘수필은 어떻게 써야 하나’에 대한 견해를 듣기로 했다.
“수필은 사실성이 있어야 하되 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진실이란 작가의 절실한 체험이나 절실히 원하는 바람이 될 수 있겠지요. 수필가의 독특한 구실은 사실의 진실인 절실한 체험을 수필가만이 할 수 있는, 곧 수필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절실한 동경으로 표현해야 하지요. 다시 말해서 수필가는 수필가만이 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사명감과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못하면 영원히 공백으로 남는다는 절대적 사명 및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그것은 혼을 다해서 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독자는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잊을 수 없는 한 편의 수필을 쓰겠다는 각오로 쓰지 않으면 독자는 수필가 편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이제는 수필가의 세기입니다. 곧 산문의 시대, 수필의 시대가 열렸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시대는 너무 짧아 생각을 요구하는 글, 너무 길어 시간이 있어야 하는 글보다도 수필 한 편의 길이만 한 글을 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바야흐로 수필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어떻게 독자를 만족시키는가는 오직 수필가의 몫일 수 있습니다.”
일찍이 지식인 단체인 「문화자유회 한국본부」를 발족시켜 한국적인 문화 자유를 주창할 때 시인 조지훈 선생이 작성했던 ‘춘추선언’엔 ‘정신의 자유, 문화의 자유, 지성의 자유를 옹호하고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으며 새로운 자유를 창조하는 투쟁에 앞장선다.’라고 되어있다.
그때 《춘추》라는 작은 월간지가 50호나 발행되었었는데 요즘 김용구 선생님은 그때의 판형과 면수, 편집체제로 계간 《부싯돌》이라는 문학·철학 편지를 1997년 봄호를 시작으로 이번 1999년 가을호까지 통권 11호째 내고 계시다. 총 16쪽의 어쩌면 초라해 보이는, 책자랄 수도 없는 책자 같지만 그 호응도는 날로 대단해져 가고 있단다. 옛날 《춘추》의 정신을 계승한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 체제를 유지하여 발간하되 보다 문학과 철학이 친숙하게 독자를 찾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시며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시는 모습을 보이신다.
「수필이 다양한 제재를 자유로운 형식으로 표출하는 글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보다 의미있고 가치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은 쉼 없는 자기 비판을 통해 보다 바르고 높은 안목을 유지하도록 해야만 좋은 수필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문학작품이란 독자에게 감동을 전하는 것을 본연의 사명으로 하고 있지만 수필은 인생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유지하고 건강하고 윤기있는 표현으로 작가와 독자의 공감대를 확대시켜 나감으로서 인간 곧 삶에 대한 보다 진실한 이해를 구축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문학이나 예술이 담당해야 할 궁극적인 사명은 인생의 효과적인 노출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인 성향을 드러냄으로써 삶에 대한 이해를 증폭시킬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윤재천)」
수필가란 이미 자연인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공인(公人)으로서의 자각과 책임이 동반되지 않은 무책임한 글은 어떠한 경우에도 수필이라고 명명(命名)되어서는 안된다는 윤재천 교수의 말은 이 시대 수필인들에게 아픈 채찍이 아닐 수 없다.
김용구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우려들을 말끔히 씻어준다는 점이다. 세상을 바라보고, 사색의 방향과 모델을 제시하는, 우리 삶과 가장 친근한 문학이 수필이기에,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에 따라서 때로는 애정어린 위로가 되기도 하고, 더러는 상처를 주지 않게 조언을 하는 김용구 선생님의 수필이야말로 수필 본연의 사명에 매우 충실하다고 할 것 같다.
김용구 선생님은 한마디로 만났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는 분이다. 애써 자기를 기억시키지 않으려고 해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처럼 그의 수필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만남을 중시하고 사람을 정확히 기억하는지를 금방 알게 된다.
1993년에는 한국언론학회 언론상 신문 본상을 받았으며, 정년 후로도 2년여 동안 시사저널에 칼럼을 쓰기도 하셨지만,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마지막까지 쓰셨던 메아리의 마지막 글 〈남기고 싶은 말〉과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를 읽으면 그의 삶이 얼마나 멋진 삶인가를 느끼게 된다. 성서의 한 구절을 인용해 만남과 떠남을 이야기하고, 노병으로 사라지는 자신을 그동안의 성원에 감사함으로 맺음하는 멋은 김용구 선생님답지 않은가. 그의 수필 또한 늘 그랬던 것이다.
‘세상만사에는 기한이 있어서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철학과 수필과의 교감, 밝은 삶을 지향하는 맑은 정신, ‘왜 수필을 쓰느냐고 물으면 쓰는 일이 기뻐서 쓴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라는 수필가 김용구 선생님. 그래 선생님은 삶은 기쁨이어야 하고, 생명은 긍정이듯이 문학이 인간을 위한 임무를 벗어나면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는 것이고 따라서 생명성과 삶의 깊은 진리에 바탕을 둔 수필만이 독자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이신 것이다.
“자주 만납시다” 하시는 선생님과 헤어져 나오는 길에 까치집이 얹혀있는 나무를 바라보니 깨끗이 목욕한 전신을 바람에 맡기며 기분 좋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선생님과 같이 잠들고, 먼저 일어나 삶에 참여하는 맛을 아느냐고 묻는 것만 같다. 순간 저만치 집을 향해 들어가시는 선생님의 머리 위로 까치 두 마리가 정다운 날개짓으로 인사를 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눈을 비비며 까치집을 올려다봤다. 세상만사에는 기한이 있어서, 까치들이 그렇게 소리하고 있지 않는가.
《수필과 비평》 1999년 9·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