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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의 총무이신
김유정 유스티노 신부님의 "기쁨과 희망" 17호 (2016, 여름) 기고글입니다.
자비의 희년에 대하여
1. 우리는 ‘자비’를 무엇이라 여기는가
얼마 전 한 지인으로부터 불교의 ‘고(苦)’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은 ‘기적 같은 축복의 삶을 왜 붇다는 고통, 괴로움이라 얘기했을까’하고
늘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고(苦)’에 해당하는 팔리어 ‘둑카(dukka)’는 본래
‘부족하다’, ‘불만족스럽다’, ‘불완전하다’, ‘불충분하다’ 등등의 뜻이라고 한다.
갈애(渴愛), 갈급(渴急)에서 오는 고통 등의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말이
‘둑카’인데 이것이 한자로 ‘苦’로 번역되면서 삶에 대한 붇다의 설명 자체가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을 들으며, ‘둑카’라는 말의 본래 뜻이
“행복하여라, 영으로 [우리말 성경은 ‘마음이’로 번역] 가난한 사람들!”(마태 5,3)이라는 산상설교의 ‘가난한’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비의 희년’을 보내면서 ‘자비’(慈悲)라는 단어에 대해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혹시 우리가 ‘고(苦)’에 대해 오해하듯,
‘자비’에 대해서도 오해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비’는 본래 불교 용어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은 자비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자(慈)와 비(悲) 두 낱말의 합성어이다. 자는 애념(愛念: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중생에게 낙(樂)을 주는 것이요,
비는 민념(愍念: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중생의 고(苦)를 없애주는 사랑이다.
이 자비는 사랑과 연민의 뜻을 함께 포함한 것으로, 이기적인 탐욕을 벗어나고
넓은 마음으로 질투심과 분노의 마음을 극복할 때에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 만일 자비를 이와 같이 이해하고 있다면 ‘자비의 희년’의 의미를 크게 잘못 이해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쓰는 ‘자비’라는 말에 대해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자비’라는 말을 흔히 정적(靜的)이고 세상사에 초연하며,
남이 나쁜 짓을 하더라도 온화한 미소를 짓고 넘어갈 수 있는 아량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권고는 부당한 일이나 권력의 횡포에 저항하지 말고
‘그냥 참아라’고 권유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자비’가 아니며,
성령께서 ‘자비의 희년’을 통해 우리에게 촉구하고 계신 바와 반대되는 것이다.
오히려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것이 ‘자비’이다.
‘자비’는 횡포를 부리는 권력에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약자에게 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비’로 번역된 라틴어 misericordia는 본래 ‘마음(cor)을 가난한 이들(miseri)에게 둠’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에게 마음을 둠’으로 해석되었다.
두 성인은 또한 ‘동정’(同情)을 ‘고통을 나눔compassio’으로,
곧 ‘다른 이의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는 마음을 지님’이라고 정의했는데
이 ‘동정’과 ‘자비’는 감정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결핍과 고통에 맞서 싸우고 그것들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발터 카스퍼, 발터 카스퍼 추기경의 자비, 51).
‘자비의 희년’의 주제는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이다.
‘자비’는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표현하려는 단어 중 하나이며,
결국 이 희년의 목표는 ‘하느님 아버지를 닮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에 진지하고 성실하게 응답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과 비슷하게 하느님의 모습으로”(창세 1,26)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을 닮으라’는 고귀한 소명을 부여 받았다.
마태 5-7장의 산상설교에서 예수께서는 이 소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신다.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
왜 폭력을 포기해야 하는가?
하느님 아버지를 닮기 위해서이다.
산상설교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말이 바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마태 5,16.45.48; 6,1; 7,11),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6, 4.6.18),
“하늘의 너희 아버지”(6, 14.26.32), “너희 아버지”(6,8)이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7,21)라 부르신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6,9)라고 함께 부르자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예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6,28)고 말씀하시는데 이 ‘완전한’의 의미를
루카 복음은 ‘자비로운’으로 풀이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닮기 위해서는 보이는 표지가 필요하다.
그 표지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기에 칙서 『자비의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이십니다.”라고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를 닮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본받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본받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자비는 어떻게 표현이 되는가?
히브리어 헤세드, 헨, 라하밈 등과 희랍어 스플랑크나,
오이크티모르, 엘레오스 등이 하느님의 자비를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특별히 ‘가엾이 여기다’로 번역된 ‘스플랑크나’는
신약성경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표현하는 특징적 단어로 사용된다.
이는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실 때에 예수께 들었던 마음이며,
예리코에서 눈먼 두 사람을 고치실 때에, 나병 환자를 고치실 때에,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군중들을 보시고 가르치실 때에,
나인에서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보셨을 때에 예수께 들었던 마음이다.
또한 이 단어는 예수의 비유에도 세 차례 등장하는데,
일만 탈렌트를 빚진 종의 빚을 탕감해 줄때에 임금에게 들었던 마음,
아버지로 하여금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멀리서 보고 달려가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게 했던 마음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또한 강도당한 이를 보고 사마리아 사람이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돌보아 주기를 부탁하며,
돌아올 때 다시 들르겠다고 약속까지 하게 한 것도 이 마음 때문이다.
이 모든 구절들의 공통점은
곤경에 처한 이에 대해 단지 불쌍하다고 느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마음은 그의 처지를 나의 처지인 것처럼 느끼게 하여 행동하게 하는 마음으로서,
용서하게 하고, 먹이게 하고, 달려가게 하고, 입을 맞추게 하고, 싸매주게 하고, 되살아나게 한다.
이 마음이 자비의 마음이다.
2.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오늘날 우리는 ‘자비’를 실천하고 있는가?
그 전에 우선 우리가 ‘공감’(empathy, compassion)하고 있는지부터 물어야 할 것이다.
다른 이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상황과 감정 ·
사고 · 삶의 세계에 들어가 그의 입장이 되어 보려는 노력이 공감이다(카스퍼, 41).
과학자들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침팬지와 인간의 DNA가 99.4% 일치하며,
이는 침팬지와 오랑우탄의 DNA의 유사성보다 더 높은 수치라고 한다.
만일 외계인이 지구의 생명체들을 생물학적으로 분류한다면 침팬지와 같은 종으로 오랑우탄이 아니라 인간을 묶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비슷한 생물학적 구조를 지닌 침팬지와 인간을 구분 짓는 차이는 무엇인가?
한 실험에서 침팬지 한 마리에게 어떤 일을 시키고 보상으로 오이를 주자,
침팬지는 처음에는 그 오이를 잘 받아먹었다.
그런데 옆 우리에 있는 다른 침팬지에 똑같은 일을 시키고 포도 알을 주자 문제가 발생했다.
오이를 받은 침팬지가 오이를 내던지며 철창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내게도 포도 알을 달라’는 것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침팬지도 자신의 권리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어린 아이 둘이 서로 협력해서 일을 하게 했다.
일의 보상으로 한 아이는 구슬을 세 개 받고,
다른 아이는 한 개의 구슬을 받았다.
그러자 구슬을 세 개 받은 아이가 일어나 다른 아이에게 가서 구슬 하나를 나누어 주었다.
‘같은 일을 했는데 나보다 덜 받았으니 저 아이가 섭섭하겠다’고 느끼기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여러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했는데 결과는 같았다.
더 많이 받은 아이가 더 적게 받은 아이에게 자기 것을 나누어 주었다.
과학 실험은 이것이 인간과 침팬지의 차이라고 설명한다.
오직 인간만이 다른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할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처참한 광경을 보면 원숭이도 동정(同情)은 하지만, 다른 존재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은 없다고 한다. 관점의 전환, 감정 이입은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는 동양의 지혜는 이미 예전부터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지 말해왔다.
두 실험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침팬지다.”
3. 우리는 침팬지인가 인간인가
오늘날의 정치권력과 경제, 문화와 언론은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가.
하느님을 닮아 다른 이들 특히 고통 받는 사람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연대하도록 돕는가
아니면 반대방향으로 내모는가.
구슬 실험에서 대다수의 아이들은
같은 일을 하고도 자기보다 덜 받은 아이에게 자기 것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오늘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정규직인가
비정규직인가에 따라 똑같은 일을 하고도 급여를 다르게 받는다.
충격적이어야 하는 사실이지만 그냥 그렇게 산다.
어느 본당에 가서 사순 특강을 하던 중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특강 후에 한 교우가 와서 따진다. “왜 사순 특강 때에 세월호 얘기를 하느냐”는 것이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럼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예수님의 고난 이야기가 아니라면
무슨 얘기를 해야 했을까.
그분은 16년 전, 내가 보좌 신부 시절에 나의 팬이었지만
이제 와서 보니 내가 그 사이에 ‘이상한 영성에 물든 것 같다’고 했다.
16년 전에도 사회적인 아픔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처참하지는 않았다.
용산, 쌍용차, 밀양, 강정, 핵발전소, 세월호, 물대포... 이름을 열거하는 것조차 마음이 아프다.
이런 일들이 나를 ‘이상한 영성’에 물들게 했을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발표하신 올해 ‘평화의 날 담화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느님께서는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담화문은 이어 우리는 무관심하다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무관심하고 그렇기에
하느님의 최대의 관심사인 우리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며,
생태계의 파괴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교황은 말씀하신다.
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기에 그만큼 관심도 많다고 착각하지만
‘정보’와 ‘관심’은 다르다는 예리한 지적이 이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라디오를 듣고 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정보를 잘 얻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중독이나 된 듯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합니다.
그들은 인간을 괴롭히는 비극에 대하여 막연한 생각만을 지니며
그것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겨 아무런 연민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가 연대의 정신으로 의식을 개방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하더라도 그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지 못하고
그들의 불행을 아파하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우리와 상관없는 그들만의 책임인 것처럼 여깁니다.”
우리는 메스미디어를 통해 과도하리만치 많은 정보를 얻고 있지만,
정보를 얻는 것에만 중독이 되어 있다.
내가 그에 대한 정보를 접했으면 그것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앉아서 비판도 하고 분석도 하지만
실재로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정말 관심이 있다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찾아갈 것이다.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것이다.
오늘날 무관심과 무자비를 조장하는 대표적인 세력이 언론이다.
지난 5월 28일, 서울 지하철 구의역 안전문을 수리하던 19세 노동자가 숨졌다.
청년의 어머니는 병원에서 유품으로 아들의 갈색 가방을 받았다.
학교 다닐 때 검사한다고 열어본 후 처음 열어 보았다고 한다.
가방 안에는 여러 가지 공구들 가운데 아무렇게나 뒤 섞여 있던 숟가락
그리고 컵라면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를 더욱 오열하게 한 것은
아들이 자신의 마지막 식사가 되었을 그 컵라면조차 먹지 못하고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한정된 인원으로는 작년 한 해에만
1만2134건이나 발생했던 안전문 보수 공사를 위해 식사할 시간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고용이 불안정해 시간 내에 수리를 해 내지 못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하청 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볼 일이 있어 서울로 가던 기차 안에서
이 청년의 기사를 읽으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동안 기차 안의 모니터는
오늘도 누군가의 외국 방문 성과를 과장하여 보도하는 아부성 뉴스에 이어
무엇을 어떻게 요리해서 먹으면 네 입 안의 감촉이, 소위 ‘식감’이라는 것이 더 자극될 거라는 내용의 ‘먹방’을 내 보내고 있었다.
세상이 어떠하든 타인의 고통이 어떠하든
내 입 안의 감각에 집중하며 살라는 메시지가 연일 방송을 점령하는 야만의 시대이다.
웰빙과 힐링이라는 용어로 개인주의와 소비주의의 결합을 정당화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아예 ‘너 먹고 사는 문제에나 신경써라’는 연설을 매일 해대는 느낌이다. 그렇다.
내 ‘포도알’의 식감에만 집중하고 ‘오이’ 먹는 다른 존재에는 무관심하라고 세뇌한다.
4.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
최근 루이 에블리 신부의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을 읽으며 깊은 공감을 하였다.
우리가 하느님께 비는 것 같지만,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빌고 계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 같지만,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봉사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 봉사를 우리가 하느님께 되돌려드리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형제들에게 되돌려 주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주일 미사 중 보편지향기도의 내용을 들으면 하나같이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더 간절히 원하고 계신 내용들이다.
하느님께서 교회가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를,
세계 평화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본당과 가정 공동체의 일치를,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간절히 원하고 계시다.
우리는 그 내용들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가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고 탓을 돌리고 싶어 하지만
사실은 우리 탓이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절실하게 청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고
청원한 내용들을 진지하게 실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비의 희년’은 하느님께서 더 자비로워지시는 해가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늘 자비로우시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이웃에게 실천할 때에 비로소 기쁨의 해, 희년이 된다.
우리에게 기쁨이 될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진정 기뻐하시는 희년이 된다.
이기적인 감각인 미각에 몰두하라는 야만의 문화를 거슬러
이웃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청각을 회복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