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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열 분의 순교자가 묻혔던 용산 왜고개성지
<왜고개 성지>
왜고개는 조선 시대에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가 있어서
와현(瓦峴), 와서현(瓦署峴)으로 불리다가 왜고개로 지명이 바뀌었다.
서울 명동 성당과 중림동 약현 성당을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이곳에서 만들어 공급했다고 전해진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베르뇌 주교와 성 브르트니에르,
성 볼리외, 성 도리,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신부, 성 우세영 알렉시오가 33년간,
서소문 밖 성지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 성 최형 베드로가 43년 동안
매장되었고, 병오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시신도
잠시 이곳 근처에 가매장 됐다가 미리내로 모셔진 성스러운 땅이다.
<열 분의 순교자> <십자가의 길>
새남터 순교자들을 왜고개로 옮긴 사람은 훈련도감의 군인이었던
박순집 베드로(朴順集 1830~1911)였다.
박 바오로의 아들로 태어나 천주교 신자로 자라난 박 베드로는
1866년 3월 7일과 11일 성 베르뇌 주교 일행이 새남터에서 참수되는 현장을
군인으로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도리, 볼리외 신부는 3월 7일에 순교.)
박 베드로는 박순지 요한 등 5~6명의 신도들과 함께 5월 12일 형장으로 가서
목숨 걸고 삼엄한 감시를 피해 시신을 빼내어 부근에 임시로 묻었다가
보름 뒤에 와현으로 옮겨 매장했다.
매장할 때 위치를 표시하고, 사기그릇에 순교자의 이름과 행적을 적어 함께 묻었다.
또 박순집은 3월 7일과 9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과 최형 베드로의 시신도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 왜고개에 안장했다.
이로부터 20여 년이 흘러 8대 교구장 뮈텔 주교(1854 ~ 1933 우리 이름 민덕효 閔德孝)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직자들의 시신 찾기 운동을 벌이자, 유일한 증인인 박 베드로는
뮈텔 주교를 비롯한 많은 성직자, 교우들과 함께 왜고개로 갔다.
이곳은 수많은 무덤이 들어차 있었으나, 28년 전 표시했던 암호로 무덤들을 찾으니
자기가 순교자 성명, 연월일을 먹으로 쓴 사기 대접을 발견할 수 있었다.
1899년 10월 30일 일곱 분의 유해가 발굴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이장되었고,
1909년 5월 28일에는 노고산에 묻혔던 남종삼과 최형의 시신도 명동 성당에 모셔졌다.
<박순집 베드로에 대한 역사는 이 연재 ‘23. 증거자 박순집과 순교자 3위의 갑곶 성지’에
상술하였습니다.>
♦ 순교자들
✝ 성 베르뇌 주교 (Simeon Francois Berneux 1814-1866 장경일 張敬一)
<성 베르뇌 주교>
프랑스 르망(Le Mans) 교구의 샤토뒤루아(Chaeau-du-Loir)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신심이 깊었기 때문에 본당 신부등의 후원으로 중학교에서 공부하고
프레시네(Precigne) 소신학교와 르망 교구 대신학교를 졸업, 1837년 5월 20일 사제품을
받았다.
1839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1840년 마카오에서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에게 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1854년 주교 수품, 제4대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되어 1856년 3월 27일 서울 잠입에 성공했다.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세우고, 각종 기도서와 교리서를 번역 출판하였으며,
순교자들에 대한 증언과 자료 수집 및 편찬 작업을 하는 등 여러 업적을 쌓아,
1857년 15,000명이던 신자가 1865년에는 23,000명까지 늘어나고, 교세는 크게 확장됐다.
1866년 2월 23일 배교자 이선이의 밀고로 거처에서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영광을 받았다.
✝ 성 브르트니에르
(Simon Marie Antoine Just Ranfer de Bretenieres. 1838-1866 백(白) 유스토)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
시몽 마리 앙트완 쥐스트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는 1838년 프랑스 중동부 디종(Dijon)
교구의 샬롱쉬르손(Chalon-sur-Saone)에서 브르트니에르 남작과 안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21살이 되던 1859년에 파리 근교의 성 쉴피스(Sulpice) 신학교에 입학,
1861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로 편입하여, 1864년 성 볼리외, 성 도리 등과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첫 미사를 봉헌하면서 순교의 특은을 기도했던 그는 수품 즉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자
“이 나라가 바로 내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성 볼리외, 성 도리, 성 위앵 루카(閔) 신부 등과 함께 1864년 7월 파리를 떠나
9월 중순 홍콩에 도착해서 상해, 요동(遼東)의 차쿠를 거쳐 1865년 백령도 부근에서
베르뇌 주교가 보낸 배로 갈아타고 5월 27일 충청도 내포(內浦)에 상륙, 조선 땅을 밟았다.
1866년 초 베르뇌 주교를 보좌하다가 2월 25일 체포되었다.
3월 5일 관리들이 ‘차마 죽일 수 없어 본국에 돌려보내 주려는데 어떠한가?’ 라고 하자
그는 “이 나라에 와서 해를 넘기니 풍습에 익어 이곳에서 여생을 즐기려 하는데
어찌 돌아갈 마음이 있겠습니까? 생사에 구애를 받아 변심하지 않으렵니다.”라고
대답했다.
3월 6일 사형 선고를 받고, 이튿날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갈망해오던 순교의 특은을
입었다.
✝ 성 볼리외(徐 Bernard-Louis Beaulieu 1840-1866)
<성 볼리외 신부>
<이 연재 ‘7. 서 루도비꼬 성인의 하우현성지’에 상술.>
✝ 성 도리(金 Pierre Henri Dorie 1839-1866)
<성 김 도리 헨리코 신부>
<이 연재 ‘1. 김도리 신부의 손골성지’에 상술.>
✝ 프티니콜라 신부 (Petitnicolas Michel Alexandre 박덕로 朴德老 1828~1866)
<프티니콜라 신부 초상화> <배론성지의 프티니콜라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는 1828년 프랑스 생 디에(Saint Die) 교구 코앵시(Coinches)에서 태어나
1852년 사제품을 받고, 1853년 파리 외방선교회에 입회,
1856년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해로로 조선에 입국, 충청도 지역에서 사목했다.
1862년부터,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배론 성요셉신학교에서 신학생을 가르쳤다.
그는 한국어를 잘했고 의술에도 능통하여, 우리 말로 교리를 전했으며,
많은 환자의 병을 고쳐주었다.
또한, 3만 이상의 라틴어와 10만에 가까운 조선어를 담아 ‘나한사전(羅漢辭典)’을
지었는데, 그중 한 부는 파리의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냈고 나머지는
병인박해 때 소실되었다.
<이 연재 ‘47. 배론성지 2 : 장주기 성인, 세 신부 그리고 황사영’ 참조>
✝ 푸르티에 신부(Pourthie, Jean Antonie 신요안 申妖安 1830~1866)
<푸르티에 신부> <알비 교구의 푸르티에 기념비>
1830년 프랑스 알비(Albi) 교구 발랑스 앙 알비즈와(Valence en Albigeois)에서 출생,
1854년 알비 교구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즉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1856년 베르뇌 주교,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상해를 거쳐 바닷길로 조선에 입국,
충청도 배론 성요셉신학교 교장으로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노력하다가
병인박해 때 체포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이 연재 ‘47. 배론성지 2 : 장주기 성인, 세 신부 그리고 황사영’ 참조>
✹ 왜고개의 순교자 중에서 프티니콜라와 푸르티에 신부는 시복되지 못했다.
1968년 병인박해 순교자 시복을 위한 심사에서 파리 외방전교회의 요청으로
두 분이 제외되었는데,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두 분은 순교 당시 선교 현장에 안 계셨고, 심문 및 순교 과정에서
신앙을 고백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 성 우세영 알렉시오(禹世英 1845-1866)
<성 우세영 알렉시오 - 윤영선 비비안나 작>
우세영은 황해도 서흥(瑞興)의 향교골에서 부유한 양반집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난 그는 18세가 되던 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그는 우연히 알게 된 김기호 요한(金起浩)이라는 전교회장을 통해
천주교 교리를 듣고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게 되어 입교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와 벼슬길을 외면한 채 세례를 받기 위해 1863년에 집을 떠나
서울에 있던 베르뇌 주교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귀향했다.
1년여의 세월이 지나자 아버지도 천주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우 알렉시오의 차분한 전교로 가족과 친척 20여 명이 세례를 받았으나,
마을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가 있었고, 관헌에 고발하겠다는 등의 소동이 일어나자
모든 가산을 버리고 평안도 논재(평남 대동군 율리면 답현리)로 이사하여
온 가족이 열심히 수계하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1866년 2월 이웃 마을인 고둔리 공소회장 집에서 축일을 지내다가
성 유정률 베드로(劉正律) 등 여러 신자와 함께 체포되어 평양 감영으로 끌려갔다.
첫 번째 심문은 잘 이겨 냈지만 두 번째 심문에서 그만 혹형을 이겨 내지 못하고
배교한다는 말을 하고 석방되었다.
그는 석방 직후 배교에 대해 깊이 뉘우쳐서, 스승인 성 정의배(丁義培) 회장과
베르뇌 주교에게 사죄하고자 상경했으나 정 회장은 이미 투옥되었으므로,
정 회장 집을 지키고 있던 포졸들에게 신자임을 밝혀 체포됐다.
포도청에서 또다시 배교를 강요당하며 심한 형벌을 받았으나 신앙으로 이겨 냈고,
감옥에 있던 베르뇌 주교에게 지난날의 배교를 고백하여 사죄도 받았다고 한다.
1866년 3월 11일 새남터에서 스승인 성 정의배 마르코,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받아 순교했다.
정 회장의 시신은, 부인이 돈을 주고 빼내 갔으므로, 왜고개에 묻히지 않았다.
✝ 성 남종삼 요한(南鍾三 1817∼1866)
<성 남종삼 요한 모자이크 – 원주교구 묘재성지>
<이 연재 ‘27. 3대 4명의 순교자가 묻힌 남종삼 성인 묘소’에 상술.>
✝ 성 최형 베드로(崔炯 1814-1866)
<성 최형 베드로 - 최성열 작>
최형은 충청도 홍주에서 최인호 야고보(崔仁浩)와 황 안나의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형제들과 함께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동생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崔方濟)는 1836년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와 함께 사제직을 준비하러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망한 신학생이었다.
형 최수 베드로(崔燧)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절두산에서 참수되어 순교했다.
이렇듯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한 그는 일찍이 한문을 배웠으나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농사일이나 수공업을 하며 가계를 도왔다.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선발한 모방 신부는 최형 베드로를 복사로 임명했다.
최 베드로는 1839년 기해박해로 모방 신부가 순교할 때까지 2~3년간 복사로 일했고
1840년 아버지와 여러 신자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돈을 주고 풀려났다.
1845년 1월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어렵게 입국하여 서울에 도착하자 그를 도와
조선 행을 애타게 기다리던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셔오려고 상해로 건너갔다.
그해 8월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김대건 안드레아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한 뒤,
8월 31일 작은 목선 ‘라파엘호’를 타고 김 신부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상해를 출발, 풍랑을 만나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했다가 다시 배를 수리하여
10월 12일 밤 전라도 나바위에 도착했다.
1846년 병오박해 때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자 상경, 다블뤼 신부의 복사가 되었고,
목수로 생활하면서 틈틈이 종교 서적을 베끼고 묵주를 만들었다.
1856년 입국한 베르뇌 주교의 명에 따라 서울에 인쇄소를 세운 그는 4년 동안
‘성교일과(聖敎日課)’와 ‘성찰기략(省察記略)’ 등 많은 서적을 간행했다.
1866년 3월 1일 체포되어 천주교를 신봉한 죄, 사악한 책을 출판한 죄,
그리고 다른 신자들을 선동한 죄 등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형 선고문에는 “혹심한 곤장에도 굴하지 않고 쇠나 돌같이 고집이 세어
사교를 단념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또 진리를 고백하면서 사형 선고문에
직접 서명까지 하였다. 이에 국법을 따라 마땅히 사형에 처하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결국, 자신의 성실한 벗이자 함께 교회 서적을 출판하는 직무를 맡았던
성 전장운 요한(全長雲 1810-1866)과 더불어 3월 9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했다.
얼마 후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장사지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의 어깨와 다리에
깊은 상처가 여럿 있었고 많은 뼈가 부서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교우들은 이구동성으로 “모든 신앙 증거자 중에서 가장 혹독한 고문을 당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1821-1846)
<성 김대건 신부상 -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
김대건 신부는 1846년 백령도 인근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9월15일에 사형 선고를 받고 다음 날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17세였던 박순집도 서소문과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는
김대건 신부를 보았다고 한다.
사형 집행된 시신은 3일 후 유족에게 인계되어 장례를 치르지만
김대건 신부는 모래밭에 암매장해 놓고, 장례를 치르지 못하도록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40여 일이 지난 뒤, 박순집의 아버지 박 바오로는 서 야고보와 함께
감시가 소홀한 때에 시신을 수습해서 왜고개로 옮겨 가매장했다.
이후, 김 신부의 복사였던 17세 소년 이민식 빈첸시오(李敏植 1829~1921)가
김 신부의 시신을 업고 7일간 밤에만 이동하여 자기 집안의 선산인
미리내에 안장했다.
✤ 성지 확장과 군종교구
<국군 중앙성당 - 대성전>
현재 이 성지에는 군종교구청과 주교좌인 국군 중앙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군종교구는 2013년 12월 15일, 교회사적 의미를 살리고
순례자들이 좀 더 편안하게 순례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성지를 확장하여
새로 단장하고 축복식을 가졌다.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40길 46. 용산동 5가 2-65.
지하철 1호선 용산역, 4호선 신용산역 1번 출구로 나와 용산우체국 지나 우측 250m]
군종교구는 대한민국 국군 가톨릭을 관할하는 교황청 직속 교구이다.
가톨릭 신자 장병을 관리하는 특수 교구의 하나로, 지역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속인적 집단으로서, 교회법적으로는 교구가 아닌, 교구에 준하는
자치권을 보장받는 교황청 직할의 자치단이다.
따라서 교회법적으로는 '군종단' 또는 '군종사제단'이라는 표현이 정확하겠지만,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관할지역만 따로 없을 뿐 시스템적인 면은 지역 교구와 똑같고,
자치단 설정 이전의 군종사제단과도 구별이 필요하다"는 등의 이유로
1990년 봄 정기총회에서 '군종교구'라는 명칭을 확정해서 쓰고 있다.
한결같은 굳음 믿음을 지키려고 군문효수(軍門梟首)로 한목숨을 기꺼이 바친
거룩한 순교자들이 묻힌 땅에 군종교구와 국군 중앙성당이 세워진 것이
과연 우연히 발생한 일일까?
<군종교구청과 국군 중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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